시쳇말: 문학이란 레퀴엠
- 작성일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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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쳇말: 문학이란 레퀴엠
방승호
1. 레퀴엠
2. 아직 있는 것을 위한: 예기적 애도
3. 거처가 되어 주는: 자기 삭감의 애도
4. 시체들의 말
5. 문학이란 레퀴엠
1. 레퀴엠
“Dona eis requiem”
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레퀴엠.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 진혼곡(鎭魂曲)이라고도 불리는, 생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를 위한 노래들.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모차르트를 떠올리거나 주세페 베르디를 말하겠지만, 이번 작업의 초점은 레퀴엠의 현대적 흔적들을 더듬어 보는 일이다. 흔적들은 떠다닌다. 다만 우리가 찾지 않았을 뿐. 레퀴엠은 그 형태를 달리하며, 혹은 변주하며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것이 15세기에 여러 성부의 형식으로 변주되었듯이, 이 시대의 레퀴엠은 더 다양한 이미지가 되어 잔존한다. 원형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죽은 이가 죽어서도 세계에 존재하듯이 원형은 몰락하였더라도 그것은 이미지가 되어 세계에 기생한다. 문학이란 이름으로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도사리는, 잠재적 가능태로서 숨죽인 기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레퀴엠은 죽은 자의 죽음을 위로하는 일뿐만 아니라 죽은 자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한다고 말하는 일에도 쓰인다. “Dona eis requiem(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이것은 타자를 기억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영원한 시간을 부여하려는 주문이기도 하다. 기억과 애도는 호출과 재생을 야기한다. 응답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호명하고 증언하며 기록을 거듭하는 일이 때로는 제한된 해석 바깥의 사건을 일으킨다. 상징이 이미지가 되듯 레퀴엠은 파생된다. 형식적 애도 바깥에서 주체의 출현을 예비하는 시도로서 레퀴엠은 변이된다. 들뢰즈가 말한 해석 자체를 전환시키는 해석, 다시 말해 관습 바깥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이행은 정형화된 애도에서 탈피할 때 비롯된다. 의식과 실천이 범벅되는 그 경계로부터 현대식 레퀴엠은 다시 꿈틀댄다. 문학이란 이름의 레퀴엠이 모습을 드러낸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이라는 전제를 뒤흔들면, 관행의 중력 바깥으로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죽지 않은 자를 위한 형식. 자기 삭감의 형식으로 뒤틀린 채 존재하는 양태. 오히려 이러한 지점들이 레퀴엠을 작동하는 작금의 방식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을 레퀴엠이라는 이름 아래 포섭하자는 말은 아니다. 타자에 대한 애도라는 명분으로 다시 정형화된 그 관습 이면의 무엇들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문학은 늘 질서 바깥의 것을 주목해 왔으며, ‘문학적인 것’은 그 양태들과 함께 뒤섞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레퀴엠으로부터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닐지라도 주체와 타자로 호명되는 그 이분적 질서 사각지대에 애도 대상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죽음으로 호명된 타자는 잠시나마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되지만, 죽지 못한 존재는 타자라는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채 경계에 떠돈다. 타자 중의 타자. 이들은 타자로 바로 서지 못한 애도 사각지대에 밀려 선 존재들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호명된 자들을 애도하는 게 기존의 레퀴엠이라면 호명받지 못한 타자를 응시하는 시도는 새로운 레퀴엠의 움직임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레퀴엠은 어디를 바라보며 어떤 얼굴로 우리 곁에 남아 있는가.
2. 아직 있는 것을 위한: 예기적 애도
죽음이 아닌 죽음의 형식이나 애도 불가능한 애도와 같은 역설에서 문학이란 이름은 늘 존재해 왔다. 사라진 존재의 흔적을 응시하기 위해 흔적이 되고자 했던 기형도의 시도나, 스스로 시체처럼 여기는 자아가 또 다른 시체를 찾아다녔던 허수경의 흔적처럼, 위태롭게 보이는 존재들을 위해 누군가는 위태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만약 이러한 흔적으로부터 현대식 진혼곡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면 문학은 지금 어떠한 모멘트들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허은실은 시적 레퀴엠의 몇 가지 지점들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그의 시는 타자와 타자 바깥의 존재를 모두 기억하는 방식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먼저 그의 시를 놓아 본다.
너는 묻혔는가. 어디에. 너를 찾아 헤맸다. 모든 마을 온섬을. 모든 시간과 대지를 헤매느라 이제 나의 귀는 늙었다. 두 세계에 속한 자. 오래도록 기다리는 심장. 끝까지 버티는 존재 너는 그것을 알려주었다. 사랑. 지켜내는 것. 번뇌의 여러 이름. 달을 보고 짖는 피.
-「순례자」 부분
다리 사이에 꼬리를 숨긴
개여,
친한 슬픔이여
우리는 그리움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짐승
마침내 종족을 죽일 수도 있는 족속이어서
- 「개」 부분
시인은 남겨진 것을 말한다. 비극적 사건들이 남기고 간 증상들을 재현하고 증언하면서도 시인은 이러한 증상 이후의 것을 함께 말한다. 시인이 응시하는 지점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 떠도는 일차적 피해자들이면서 동시에 사건을 직면하고 경험하고도 죽지 않고 남겨진 자들의 장소까지 포괄한다. 이들은 애도의 불가능성을 가늠하기 전에 이미 애도의 대상에 속하지 못한 그 애도 사각지대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허은실의 회복기가 여전히 유효하게 읽히는 것은 그가 다루는 제주 4.3 사건, 4.16 세월호 참사 등의 비유적이고도 주체적 접근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다루는 애도의 대상이 죽음으로 호명된 대상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 있기도 하다. 특히 회복기 4부와 마지막 5부에서는 애도 사각지대에 홀로 남아 있는 존재를 비유하는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야말로 작금의 애도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지점들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미처 애도 받지 못한, 그렇게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지 못한 자들을 위한 애도의 시도가 이곳에서 구현된다.
「순례자」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떠도는 자들에 관한 애도라면 「개」는 사건을 경험한 트라우마를 겪으면서도 미처 애도 대상이 되지 못한 자들에 대한 비유다. 시인은 떠나간 존재뿐만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존재들을 통해 애도 불가능한 지점에 관한 애도를 시도한다. 이것은 비극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하는 자들에 대한 호명이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한 애도로서 온전한 애도에 다가서려는 시인의 노력이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애도가 주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상처를 수단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흔적들로 치부될 처지에 있는 존재를 향한 기록이라는 점이다. 비유로서 “개”라는 존재는 사건을 ‘묻는 자’로서 비극적 인간의 표상이자 남겨진 존재로서 살아갈 타자의 알레고리다. 잉여가 되어 밀려난, 그렇게 적히지 않고 유실된 조각처럼 살아가는 자. 이 온전한 타자가 되지 못한 자들의 시간까지 시인은 조명하며, 미래에 유실될 처지에 놓인 존재들의 몫을 미리 애도한다. “목격한 나무들은 죽지 않는다”(「목격한 나무들은 죽지 않는다」). 죽지 않고 남은 타자를 응시하는 이러한 언급은 직설적이지는 않지만 예기적 응시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정형화된 의식처럼 세속화된 애도가 아니라 남겨진 존재를 기억하고 미리 그가 겪을 아픔을 기록으로써 시작되는 애도. 이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레퀴엠의 단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돌아누운 등뒤에
오래 앉았는 이가 있었다
아- 해봐요 응?
마른 입술에
떠 넣어주던
흰죽
세상에는 이런 것이 아직 있다
- 「첫눈」 부분
예기적 응시는 불가능해 보이는 애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비극이 늘 예기치 못하게 다가왔듯이 슬픔은 늘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 고여 있다. 그곳을 미리 가늠하고 들여다보는 일이 어쩌면 불완전해 보였던 애도의 시작 지점이 될 수 있다. “터진목 팽목 / 젖은 명단 속/ 글썽이던 이름”(「회복기-연고」)이 “먼 곳에서 어느 먼 시간으로 / 잠시 서글픈 곁이 되려고”(「스윙바이」)하는 움직임이 함께 할 때, 애도는 정서가 아닌 정동이 될 수 있다. 레퀴엠은 오랫동안 누군가의 뒤에 살아 있던 자를 다시 새겨 보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것이 꼭 슬픔이란 이름으로 적히지 않더라도 어떠한 존재가 아직 남아 있음을 알게 하는 재인의 과정에서 타자를 위한 시간은 잊히지 않고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이렇듯 기록되지 않은 타자에게 남겨진 시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직 남아 있음을 미리 알고 기억하려는 시도에 있다. 이러한 예기적 이행이 남겨진 자들과 떠나간 자들을 연결하는 유의미한 움직임이 된다. 겪었던 시간만큼 돋아나는 미래가 있다면, 그 시간을 회복하는 애도야말로 문학이란 레퀴엠의 지향점일 테다.
3. 거처가 되어 주는 : 자기 삭감의 애도
아직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예기적 응시가 애도의 새로운 지점이라면 애도 사각지대에 있는 존재가 되어 보는 일 또한 애도의 새로운 방식이 될 수 있겠다. 주지하다시피 ‘-되기’의 방식은 화자가 타자의 타자성을 자신의 것으로 내화하여 타자와의 경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이해되어 왔다. 물론 ‘-되기’의 방식 역시 온전히 같아질 수 없음이라는 불가능성에 늘 직면하고는 한다. 그런데 이러한 ‘되기’의 가능성을 따지기 전에 먼저 무엇이 어떻게 되려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험적 질서에 균열을 내기 위해 규범 바깥의 존재가 되는 일은, 때로 타자의 타자성을 무기로 삼아 자아를 확장하고 팽창시키는 과오로 이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때로 목격한다. 중요한 것은 타자는 충분히 취약하다는 사실이며 그만큼 누군가에게 의존적이라는 진실에 있다. 그렇기에 타자가 되어 보기 위해서는 취약해 보이는 타자로의 일방적인 ‘되기’가 아니라 자신을 삭감하고 비움으로써 타자가 공생할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케노시스적 자아로부터 타자는 다시금 살아날 여지가 마련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혜미는 이러한 자기 삭감의 글쓰기를 미리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입안에서 별들이 돋아나던 저녁에는
자주 피를 흘렸다
찔린 자리마다 고여 드는
낮은 언덕들
흘린다는 말은 다정했기에
- 「순간의 모서리」 부분
썰물처럼 마음이 빠져나간 곳에
깨진 유리들이 반짝이며 수북해질 때
떠올리고
떠올랐지
- 「붉은 그네」 부분
자신의 몸을 다른 존재를 위한 거처로 제공하는 일은 익숙하지 않은 상상이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신체와 마음을 거두어 타자들을 의한 새로운 터로 생성시키고자 한다. 마치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자신을 비워 내며 가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균열을 내던 영혜의 반코나투스적 행위를 떠올리게 하듯이, 시인은 자기 몸과 마음을 타자가 생성할 수 있는 매체로 탈바꿈하려는 듯하다. 설령 이것이 신체의 파고듦과 피 흘림을 전제할지라도 시인은 자신의 몸 자체가 다른 것을 위한 장소로 쓰이기를 상상한다. 이는 자신에게는 하나의 멸망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타자에게는 재생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무엇인가에 찔리고 파인 상처의 지점들에서 무엇인가 돋아나는 현상들은, 언어만이 교감할 수 있다는 통상의 시각들을 뒤엎는 상상적 시도다. 규정된 말이 오가는 입을 닫는 대신 화자는 “열림이 맺힘으로 고여 드는 이 세계”(「깊어지는 문」)를 열어두며 상처를 통한 타자와의 교감을 이어 간다.
“입안에서 별들이 돋아나던 저녁에는 / 자주 피를 흘렸다”라는 고백은 내면에 쌓인 언어만큼이나 피 흘린 고통에 대한 비유다. “찔린 자리마다 고여 드는 낮은 언덕들”들은 상처가 생긴 곳곳마다 생성되는 타자의 흔적들이다. 이혜미의 타자는 주로 식물성을 지닌 존재들로 나타난다. 이것은 시인이 품고 있던 말의 비유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언어만이 할 수 있다는 관행적 사유를 뒤엎는 ‘몸체(혹은 신체, the body)’1)의 움직임으로서 정동에 더 가깝다. 단지 말로써 안식을 비는 것이 아닌 비좁기만 한 자신의 세계를 비인간을 비롯한 타자들에게 내어 주기 위한 정서적 역량이 곧 그의 레퀴엠인 셈이다. 정동의 연결. “눈을 뜨자 귓속으로 나무가 쏟아지”(「귀가 열리는 나무」)는 것과 같이, 이렇게 고이고 흘러듦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취약함을 타자를 향한 공간으로 내어 주는 상상, 아니 그 증상들. 이러한 삭감의 역설은 자아의 일부로부터 타자의 생성을 도모하는 역량이 되어 죽음과 생성의 이분적 메커니즘에 균열을 낸다. “감은 눈 사이에서 / 공들여 완성된 병이 휘황해졌다”(「감염」).
몸
영혼의 우주목.
뭄
물구나무를 심은 숲.
뒤집어 보면 정수리부터 흘러나오는 뿌리의 두려움, 일부러 물을 구하는 나무는 없지만 꿈을 지어 가지려는 헛된 시도로 우리는 끝내 이 숲을 낭비하는군요. 무엇도 흐르지 않는다는 귓속말을 기억합니다. 나무는 지금 자신에게로 깊어지는 중, 육체는 잠시 맺혀 있는 물의 시간인 것을요. 무모한 외투를 걸치고 거꾸로 서 있는 나무들에게 곁을 내어준다면, 이 숲길의 끝에서 나무들의 가신(家臣), 떠돌이 사내를 맞이할 수도 있겠습니다.
- 「머무는 물과 나무의 겨울」 부분
시적 자아의 몸이 “영혼의 우주복”이라면, 이를 뒤집어쓴 “뭄”은 시인의 몸체에 타자가 싹을 피운 애도 공간의 비유다. 이 경우 거꾸로 쓰이는 기표의 기이함은 질서 바깥을 향하겠다는 다짐보다는 지나간 상처와 흔적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로 다시 읽힌다. 내면으로 침잠은 외부의 각성이라는 역설을 내포하지만, 레퀴엠에서 이것은 은폐된 또 다른 타자로의 이행을 함의한다. 이혜미의 시는 자신의 일부를 내어 주는 윤리성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는 내면의 침잠으로 과거의 기억과 마주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것은 수면에 비친 자화상과의 대면이기도 하지만 수면 내부에 잠식한 타자와의 응시를 함의하기도 한다. 이것은 ‘물’이라는 이미지로 몸의 감각에 스며들어 죽음과 삶의 경계에 여전히 잔존하는 이미지를 재생하는 기제가 된다. “얼굴 속의 얼룩, 얼룩 속의 / 얼굴”(「블랙 베이비」)처럼 감각 이면에 있던 존재들과 융화되고, “무모한 외투를 걸치고 거꾸로 서 있는 나무들”에게 곁을 내어 주는 그 시도로부터 윤리적 자아는 은폐된 타자와의 만남을 기대할 수 있다.
4. 시체들의 말
그런데 그 은폐된 타자는, 그 애도 가장자리에 있던 타자는, 결국 온전히 애도할 수 없는 대상이자 애도에 늘 실패하는 자아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데리다가 말했던 애도에 대한 애도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애도라는 점도 이러한 맥락과 닿아 있다). 자아는 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타자에 관한 성찰 역시 자신에 관한 반성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허은실과 이혜미를 경유하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남아 있는 자에 관한 예기적 애도와 타자를 위한 자기 삭감의 애도가,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여 그 관계들을 성공이나 실패로 설정하려는 얽매임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애도를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양분하였던 프로이트적 이분법2)에 균열을 낸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바로 이 부분에서 기형도와 허수경의 시 쓰기는 문학적 진혼곡이 향해야 하는 지점들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남겨진 그들의 시는 마치 이렇게 되묻고 있는 듯하다. 이 시대의 레퀴엠은 무엇을 애도해야 하는가. 아니 진정으로 문학은 애도한 적이 있는가?
쓰러진 나무들이 어지러이 땅 위에서 흔들린다. 다리 가득 유리가 담겨 있다. 이 악물며 쓰러진다. 썩은 나무 등걸처럼 나는 쓰러진다. 바람이 살갗에 줄을 파고 지났다. 쿡쿡 가슴이 허물어지며 온몸에 푸른 노을이 떴다. 살이 갈라지더니 형체도 없이 부서진다. 얼음가루 사방에 떴다. 호이호이 갈대들이 소리친다. 다들 그래 모두모두-대지와 아득한 거리에서 눈[雪]이 떨어진다. 내 눈물도 한 점 눈이 되었음을 나는 믿는다. 강 속으로 곤두박질하며 하얗게 엎드린다. 어이 어이 갈대들이 소리쳤다. 우린 알고 있었어, 우린 알았어-
끝없이 눈이 내렸다. 어둠이 눈발 사이에 숨기 시작한다. 도처에서 얼음가루 날리기 시작한다. 서로 비비며 서걱이며 잠자는 새벽을 천천히 깨우기 시작한다.
기형도, 「새벽이 오는 방법」 부분
죽음을 존재적 귀결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기형도 자아의 특성이겠지만 이보다 주목되는 것은 ‘죽은 나무’의 타자성을 자신의 것으로 사유하려는 시도에 있다. 기형도는 “죽은 나무”라는 기표를 자신의 일부로 전유하여 소외된 이미지들과의 연대를 일으킨다. “서로 닮은 아픔”을 사유하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공유하려는 노력이면서 동시에 타자와 타자와의 관계를 또다시 이분하지 않겠다는 시도로도 비춰진다. 경멸하고 비하하며 자신을 시체처럼 간주하는 기형도의 시 쓰기는, 자신의 ‘시체성’을 거듭 전유하여 몸체화하는 정동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이러한 모습은 때로 방향을 거스르거나 비틀린 방식으로 드러나지만, 이 해체적으로 보이는 과정은 결코 자기 확장의 도구로 수단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자기 삭감의 모습에는 어떠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비움의 정동이 내재하고 있다.
기형도의 자아는 애도라는 언어를 가지기 위해, 문학이라는 이름표를 가지기 위해 언어를 소진하지 않는다. 반드시 비인칭적인 목소리나 우울증적 주체로서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지 않더라도 기형도에게서 윤리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다. 그는 자신을 타자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자화된 자신을 다시 타자화하려는 그 예비적 ‘주체’의 윤리가 있기 때문이다. 시체屍體성을 전유하여 몸체화된 시체詩體. 그리하여 시체화된 주체. 그 ‘시체’의 말하기로부터 시작되는 삭감의 정동은 기이와 비인칭적이라는 수식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주체와 타자와의 이분법을 흔들고 은폐된 타자와의 만남을 도모하는 하나의 레퀴엠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시체성으로부터 이어지는 흐름에 닿아 있는 또 한 명의 영혼은 이렇게 말을 한다.
인류!
사랑해
울지 마! 하고
따뜻한 이마를 가진 계절을 한 번도 겪은 적 없었던 별처럼
나는 아직도 안개처럼 뜨건하지만 속은 차디찬 발을 하고 있는 당신에게 그냥 말해 보는 거야
-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부분
문학은 위로받지 않아도 되는 삶과 위로받아 마땅한 삶을 구분하지 않는다. 단지 문학은 누군가를 향해 무엇인가를 건넬 뿐이다. 애도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다. 애도는 언어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멜로디를 덧입힌다고 가능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학만이 할 수 있다고, 혹은 문학만이 답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 문학은 다시 다른 것과의 경계를 이분하는 이기가 될 수 있다. 문학이 형식을 위한 형식이 되고 수단을 위한 수단이 될 때 그 무엇도 전하지 못하는 것처럼, 타자를 규정하고 애도를 위한 애도의 형식만을 고집할 때 문학은 그 무엇도 위로하지 못한다. 다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은폐된 그들에게, 당신에게 “그냥 말해 보는” 것뿐이다. 허수경의 자아는 타자됨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타자의 흔적들을 마주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의 모든 것이 비워진 차가운 시체들의 목소리처럼, 기약 없는 이행처럼, “달을 보고 짖는 피”처럼, 아직 애도 받지 못한 존재를 위해, 차디찬 발로 살아갈 당신의 시간을 미리 기억하고 예비할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문학적인 것’은 차라리 문학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주체와 타자, 그리고 타자와 타자, 기억과 미래 사이에서 떠도는 것은 타자일 뿐이다. 그 타자들을 정의하지 않고 그들의 시간을 기억하고 예비하는 것에서 이 ‘문학적인 것’은 새로운 레퀴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쓰일 자격을 얻게 된다.
5. 문학이란 레퀴엠
“Lux aeterna”
(영원한 빛을)
문학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애도한 적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없다. 문학은 진정으로 애도한 적이 없다. 결국 문학이란 이름으로 포장할 뿐, 누군가가 ‘되’어서 애도하고 슬퍼하고 대신 죽어 본 적이 없다. 그저 기생하며 타기되며 다시 시대와 유합하며 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문학이 남겨져 있는 이유는, 은밀하게 규정되는 질서와의 불화와 애도 불가능한 지점을 향한 끝없는 이행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레퀴엠이 가리켜야 할 지점은 어디인가. 그곳은 적어도 호명된 타자가 아니라 기약 없는 이행처럼 잊히고 고통받고 묻혀간 존재들과 앞으로 그 고통을 함께 견디어 낼 미래의 존재들의 장소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직 남아 있는 자들에 대한 예기적 애도와 은폐된 타자들을 위한 자기 삭감의 윤리는 애도 받지 못한 타자를 향한 윤리적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이란 레퀴엠은 멜로디를 특별히 요구하지도, 통상의 언어로 진행되는 의식적 절차를 수반하지도 않는다. 문학은 오히려 어떠한 요구에 불응하고 해체함으로써 본질이 드러난다. 문학은 정의하지 않고 규정하지 않으며 구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문학은 불화한다. 죽음과 불화하는 시체처럼, 문학은 규정과 정의, 구분과 판단과 같은 이기와 폭력과 불화하고, 그 불화의 관습으로부터 또다시 불화하기를 작정한다. 이러한 불화의 몸체로부터 다시 피어나는 타자의 공간. 그 생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공감과 연대의 시간이 다시 문학이란 레퀴엠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레퀴엠. 아직 죽지 않은 자를 위한 변주곡. 문학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자기를 삭감하면서 공존하는 시체들을 위한, 그 시체들의 노래들. 이 시체(들의) 말이 ‘유행어’를 뜻하는 순간 다시 문학은 종언을 맞겠지. 하지만 괜찮다. 문학이란 레퀴엠은 또다시 변주되어 흐를 테니까.
1) 브라이언 마수미는 정동을 말하면서 스피노자가 언급한 ‘몸체’ 개념을 강조한다. 스피노자의 몸체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며, 이는 다분히 ‘실행주의적(pragmatic)’인 개념이라고 마수미는 말한다. 이에 관해서는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정치』, 조성훈 역, 갈무리, 2018, 25쪽.
2)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을 논하면서 이를 ‘정상적 애도’와 ‘비정상적 애도’로 이분한다. 그에 따르면 애도란 특정 존재를 향했던 리비도를 철회하여 다른 대상에 투영하는 것을 지시하며,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서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키며 자기혐오에 이르는 것을 우울증이라고 한다. 프로이트, 「슬픔과 우울증」, 『무의식에 관하여』, 열린책들, 248쪽. 아브라함과 토록은 이를 내사(introjection)와 합체(incorporation)로 설명한다. 내사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정상적 애도에 가깝다면, 합체는 비정상적 애도로서 우울증(mourning)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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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강연의 강연록을 개고한 글입니다. 은 말과활 아카데미 북클럽 [산책:자]의 일환으로 2025년 10월 16일부터 11월 6일까지 총 4주간 진행되었습니다. 내 솔직한 마음 현재 인생에서 수많은 적수를 만났지만, 아내여. 그대 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바이런의 격언, ···이라고 알려진 격언 1. “My soul is dark!” 솔직한 사람들은 이기적 오늘 제가 다뤄 볼 시인은 김수영이고요, 그리고 주해할 시는 「풀」입니다. 너무 유명한 시인이고 너무 유명한 시죠. 그렇지만 결국에는 고백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고백’.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수영은 고백의 달인이었습니다. 숨기는 게 좀 나을 법한 일상적인 치부까지도 굉장히 적나라한 발화로 시에다 풀어내곤 했었죠. 그런데 시만 그런 게 아니라 생활에서도 말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나 봐요. 예를 들어 「성(性)」 같은 시에는 외도를 비롯한 시인의 성생활이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는데, 실제로도 당시의 출판사 접대 자리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른 아침이면 아내인 김현경 여사에게 전날 밤 다른 여성과 동침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곤 했었더래요. 눈까지 반짝여가면서 말이죠. 그러면 김현경 여사는 또 그 얘기에 장단 맞춰가면서 재미나게 들어주었다고 하고요. 서로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유쾌해 보인다기보다는 약간 닳고 닳은 부부간의 기싸움 같기도 한데, 하여간에 이런 고백은 생전에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감안하고서라도 상대방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진솔함이죠. 그러니까 김수영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 살다 보면 자기 기분이나 생각이 얼굴에 바로바로 드러나는 사람들 있잖아요? 좋으면 좋다든지, 싫으면 싫다든지, 도대체가 갈무리가 안 되는 사람들. 김수영이 딱 그런 타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좀 완전 반대인데, 면전에서는 눈치 보느라 쩔쩔매다가 집에 가서 끙끙 앓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도 좀 나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제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사장님이 저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는 거예요. ‘하아···.’ 뭐지? 손님 나밖에 없는데. 혹시 방금 나 들으라고 그런 건가? 제가 독서대 들고 다녀서, 갈 때마다 허름하게 이거저거 펼쳐 놓고 죽치고 앉아 있거든요. 이런 일 있으면 항상 역지사지해 봅니다. 아니 짜증이 날 수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 같으면 좀 안 들리게 할 것 같은데···. 아니, 자기 심기가 불편
- 관리자
- 2025-11-01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K-pop, 변화하는 스토리텔링 류수연 2020년대 한국 문학계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을 꼽는다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 첫 번째에 놓일 것이다. 그것은 근대문학 이후 세계문학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오랜 콤플렉스에 종지부를 찍은 동시에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외연을 스토리텔링으로 좀 더 넓힌다면 한 사건이 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방영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등장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노벨문학상과 OTT 오리지널 영화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문학의 일이며, 그의 노벨상 수상은 지극히 문학 그 자체의 사건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다르다. 애초에 그것은 문학 텍스트가 아닌 영상이지 않은가? 원작이 있는 작품도 아니니 미디어믹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루는 것에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대단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필연적으로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선택했다. 그것은 현재의 한국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OTT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현 단계 한국문학과 한국적 이야기가 전 세계인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지표이다. 그 사이에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대문자 ‘K’로 지칭되는 K-컬처가 놓인다. 이 연재에서 나는 ‘K’를 화두로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를 그려낸 스토리텔링의 3가지 국면을 탐색하고자 한다. 1. 바깥, 또 다른 중심 스토리텔링으로서 한국문화를 말하는 첫 번째 장에서 가장 먼저 선택한 키워드는 한강이 아닌 K-pop이다. 이 연재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결국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단계에서 한국을 둘러싼 모든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K-pop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다. 오늘의 세계인이 실감하고 상상하는 한국문화의 첫 장면은 매력적인 아이돌이 등장하는 K-pop 퍼포먼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K-pop의 성공은 여전히 놀라운 사건이다. 세계 문화의 가장 변방에 있는 한국이 이토록 많은 세계적 스타를 배출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때로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엔 수많은 ‘왜&rs
- 관리자
- 2025-11-01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허병식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에 새로이 등장한 주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가 있다. 세계문학이란 세계화 혹은 지구화 이후 도래한 지구화시대 문학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논의 속에서 등장한 담론이지만, 그 시작은 이른바 괴테-맑스의 논의가 그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듯 근대의 전지구적 도래와 시점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말한 “민족문학이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한 것과, “어느 한 국가의 정신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의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많은 민족문학과 지방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이 탄생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세계문학 담론의 기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괴테와 마르크스의 선언이 곧바로 세계문학을 근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도록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민족이 제국주의와 식민의 결과라면, 그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험이 정련한 것이 각국의 민족문학이었고,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국가로 이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족문학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이 지니고 있는 ‘영향의 불안’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새로이 만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 타자의 문화를 의식하게 된 순간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던 것이다. 이후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경험이 식민종주국과 식민피지배국에 미친 영향관계를 분석하면서 비교문학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지배의 승인이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시작했다. 비교문학과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식민지의 경험 이후에도 이어지는 문화적 지배와 혼종성의 문제와 씨름하였다면, 포스트식민주의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개되면서 그에 대한 문화적 응전으로 재귀한 것이 세계문학일 것이다. 괴테 이후의 세계문학의 전개를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문학이란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비교문학이자 포스트식민을 경유하여 새롭게 등장한 ‘제국’에 대항하는 문학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1세기 이후 ‘세계문학론’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이다. 그들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소개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모레티와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이 강조하는 세계란, 일차적으로 “하나이면서도 불균등한” 세계체제, 혹은 서로 진입하기 위해 각축하고 경쟁하는 세계문학 공간으로서 주로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해된다. 즉 이들의 세계 개념은 문학을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환경 내지 배경에 가깝다.1) 김용규는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와 그들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세계문학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정을 보면,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는 중심부의
- 관리자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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