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자리 2
- 작성일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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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자리 2
최가은
1.
너는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죽은 작가의 약점과 결점을, 네 작업에 알맞은 누추한 진실을 건져낼 수 있는 교묘한 질문들 속으로 그녀를 유인할 것이다. 너는 그 질문들 속에 죽은 작가와 함께 살았던 사반세기 동안의 시간을 반성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은밀한 함정들을 설치하여, 그녀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 속임수와 거짓말에 치가 떨릴 것이고, 그날 너를 집으로 들여놓은 것을 자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는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게 진실의 일부를 공유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너는 미열 같은 흥분 속에서 응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초인종 소리가 멎었다. 너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여전히 저택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들리지 않았다. 대문은 완강하게 잠겨 있었다.1)
소설은 ‘죽은 작가’라는 기호 아래 결집하고 흩어지는 ‘너’의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무언가를 좇는 자. 불가해한 형태로 유폐된 어떤 진실을, 진실의 환영을, 혹은 환영을 덮치는 기억을 추격하는 자이다. 누추한 진실을 누비기 위한 거짓, 투명한 거짓을 뭉개기 위한 진실 사이를 정신없이 횡단하는 ‘너’는 그 무언가의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다시, ‘너’는 누구인가. ‘죽은 작가’에 관한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 그의 흔적을 찾는 중이라는 ‘너’는 그의 문학적 “유산”을 “냉혹하게 적출”하는 “문학적 해체”, 혹은 일종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문학의 우상을 살해하는 퍼포먼스”2)를 준비하는 자이다. “숭배”와 “모독” 사이의 간극과, 그 간극을 오가는 자의 공포를 요란하게 발설하며 초조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자이기도 하다. ‘너’는 은밀하게 설치한 네 함정에 의해 ‘죽은 작가’와 ‘죽은 작가의 아내’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은 작가’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선 ‘앎’과 ‘진리’를 확보한 것이 ‘너’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로부터 진실에 관한 특권적 “의무”를 지닌 그들의 미래,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이다. 곧 맞이하게 될 무력하고 무지한 과거의 몰락 앞에서 흥분한 현재는 초인종을 누른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굳게 잠긴 대문 너머로부터 과거는 아무런 응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2.
최근 나는 페미니즘 리부트 10주년을 맞아 열린 한 학회에서, 현 한국문학비평장의 ‘쟁점’에 관한 논문의 초고를 발표했다. 발표문의 요지는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역사적 계기를 통과한 한국문학비평장의 담론적 분산을 크게 두 갈래의 운동으로 구분하여 살피는 것에 있었다. 비평장의 한쪽에 페미니즘적 읽기/쓰기의 방법론을 다양하게 활성화하는 생성과 확장의 운동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바로 이 생성에 제동을 걸며 비평 자신의 쓰기를 점검하는 반성과 위축의 운동이 있다. 나는 이 서로 다른 입장을 크게는 들뢰즈적 ‘전망’을 토대로 하는 생성의 비평으로, 또 하나는 이른바 푸코적 ‘비판’을 토대로 하는 제동의 비평으로 명명했다. 다소 부적절한 데가 있는 이 명명은 다른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들 비평이 도달하는 동일한 한계에 주목하기 위해서였다. 그 한계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현 한국문학비평장의 ‘쟁점’이기 때문이다.
논문은 학술지에 실리지 못했는데, 게재불가 판정을 받은 탓이다. 심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페미니즘 전회’ 이후 페미니즘 비평의 현재를 왜 하필 이 두 단어로 설명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당황스러움을 넘은) 내 최초의 반응은 나에게는 ‘현재’임이 분명한 두 운동에 관한 설명이 더 구체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반성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질문의 핵심이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사자의 질문 뒤에 있는 또 다른 질문의 그림자를 의식하게 된 것이다.
문학 텍스트를 ‘꼼꼼히-거슬러’ 읽으며 페미니즘적으로 다양한 독법을 탐구하는 일은 확실히 비평장의 현재 모습이랄 수 있다. 그러므로 ‘이후’ 비평장의 쟁점은 새로운 독법 간의 차이점을 일별하고, 더 나은 읽기 개발을 위한 모색의 과정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읽기 전반에 대한 비평의 자기 참조 내지는 자기 반성을 두루 포함하는 비평의 운동 따위가 ‘페미니즘 전회’ 이후 비평장의 쟁점이 될 만한 사안이랄 수 있는가. 그런 것은 비평가 개인의 비대한 자의식과 관련된 비평장의 지나치게 내재적인 문제가 아닌가. 이 같은 불만이 내가 의식한 상상의 그림자다. 비평의 역할에 대한 동시대적 합의를 유보하고 훼손하며 지속되는 자족적이고도 엘리트주의적인 ‘(자기) 비판’을 향한 의구심.
이 글은 비평의 ‘현재’를 구성하는 움직임의 포착에 대한 보론으로서, 동시에 저 질문의 이면을 가로지르고 있다고 생각되는 상상적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쓰였다. 비평의 역할을 둘러싸고 비평끼리 치고 받는 비평의 운동은 비평장 내에서나 식별되는 미약한 움직임에 불과한 것일까. 다소 냉소적으로 답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이는 경험상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비평의 운동은 ‘페미니즘 전회’ 이후의 쟁점을 다루는 일과 무관할 수 없다. 좀더 과감하게 말해, 이것이 실은 지극히 동시대적 의제일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나는 비평(장) ‘바깥’의 이들에게 심히 무용한 몸짓처럼 보이는 비평의 운동이 첫째로는 ‘진리의 확정’을 유보하는 ‘비판’에 대한 오늘날의 전반적인 의구심을 전제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둘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의구심 위에서 ‘비판’의 활성화 방안에 대한 여러 이론적-실천적 (재)검토를 요청하는 여전히 유용한 움직임이 비평의 운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페미니즘 전회’와 같은 ‘이후’의 시간 구분이 만들어내는 여러 이데올로기적 기능과 그 속에서 생산되는 주체의 양식 및 가능성-한계를 살피는 일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페미니즘적’인 쟁점이라는 주장과 함께 말이다.
3.
‘생성’과 ‘제동’의 비평 간 갈등은 잘 알려진 ‘비평의 경량화’ 현상에 대한 비판과 그 반론의 구도3)와는 미묘하게 다른 논점을 취한다. 구체화를 위해 먼저 여성 평론가들만으로 이루어진 최근의 한 좌담에 주목해보자.
김보경 : 관련해 질문을 이어가고 싶은데요. 당시 문단의 여러 사태에 대한 비판론이 제도 비판의 형태로 이루어질 때, 제도 비판의 필요성과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그 내러티브가 계속 같은 형태로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홍성희 선생님께서 쓰신 글들을 살펴보면, 문학성을 쇄신하고자 하는 작업이나 문학 계간지에서 이루어지는 혁신 기획 등이 결국엔 문학에 대한 위계적인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져요. 저는 이러한 주장이, 요컨대 제도 쇄신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결국에는 시스템에 흡수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제도 비판의 주된 내러티브의 한 사례로 읽히더라고요.
시스템을 비판하는 목소리까지 결국 그 시스템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 혹은 그 시스템을 비판하는 목소리로 인해서 시스템 자체가 재생산된다, 이런 이야기들이 저한테는 계속해서 대안 없이 반복되거나 구체적인 비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주장이 반복될 때마다 피로감이 좀 들기도 하고, 또 의도와는 다르게 쇄신이나 변화에의 의지를 무력화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4)
위의 말은 ‘생성’의 관점에서 ‘제동’의 비평에 가하는 비판이다. 평론가 김보경은 좌담에서 언급된 글인 「실종」에서 오늘날-현장에 밀착하여 담론을 재/생산해내는 ‘페미니즘 비평’ 전반―남성중심적 제도/시스템/문학 비판을 포함한―을 향한 회의적 시선, 말하자면 ‘제동’의 비평이 갖는 치명적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대개의 페미니즘 비평은 ‘전회’를 합의된 기준점으로 전제하며 이루어진다. 상대화되는 것이 ‘문학성’이든, ‘문학’ 그 자체이든, 문학이 수행하는 광의의 폭력을 심문하기 위해 역사와 동시대가 동시에 소환되며 그와 같은 절단선 위에서 페미니즘 비평은 과거가 남긴 오물의 청산과 함께 그로부터 누락되고 실종된 존재들을 가시화한다.
그런데 김보경이 보기에 ‘제동’의 비평이 지닌 가장 문제적인 지점은 이러한 ‘생성’의 비평을 향한 대개의 비판이 ‘세대론적 욕망’을 전제한다는 데 있다. 특히 ‘자기 반성/비판’이라는 대의 아래 발표되는 여러 메타비평은 주로 김봉곤, 김세희, 정지돈 작가와 관련된 문학 작품을 초과한 ‘사건’을 기점으로 분출하고 회전하는데, 그때의 반성이 비평의 수행성을 모조리 ‘호명 권력’으로 환원하며 이루어지는 경향은 문제적이라는 것이다. 이들 메타비평에서 페미니즘-퀴어 비평이라는 ‘전환’은 “‘젊은 세대’라는” “선배 세대에 적대적이지만 위선적인 세대”5)의 (겨우) 부친살해적인 욕망으로 축소된다. 신구의 권력 투쟁만을 목표로 나아가는 비평장의 움직임이 비평의 자기 점검을 누락하고, 그 누락의 결과, 즉 ‘비판의 부재’가 낳은 결함은 문학장 내외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 앞에서 비평이 보이는 무력감으로 증명된다는 것이 ‘제도 비판’의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김보경이 보기에 이러한 자기 반성은 “쇄신이나 변화의 의지를 무력화하는” 피로감 이외에 그 어떤 유효성도 낳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비평장을 향한 비판적 개입, 즉 ‘제동’의 비평은 문학비평장의 일상화된 통치성에 대한 저항으로서, 비판적 관점을 비평 스스로에게 되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비평의 공간이 그 스스로 평면”6)이 되는 일에 대한 비평의 자기 저항은 그 근원에서 실천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 비평의 ‘효능’을 전면 부정하는 비평 무력화의 논리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 자의식이 단순히 특별히 예민한 개별 비평 주체들의 의지와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비평’이라는 장르를 재구축하기 위한 출판 기획과 매체의 형식적 장려 효과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때 홍성희의 말처럼 문제는 오히려 “국지적인 것”이 되며, 그에 따라 문학장의 ‘비판적 개입을 향한 비판적 개입’, 말하자면 ‘반성의 반성’이 연쇄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흔히 오해되는 바와 달리, 비평의 상실된 권위를 회복하려는 권력 의지와는 전혀 다른 지향을 바탕으로 한다.
홍성희 : [...]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재생산되는 여러 문제에 있어서 공통되는 핵심은 문학을 다른 것과는 다른 특수한 무엇으로 의미화하고, 그 특수하고 특별한 문학을 지키는 일에 대해 골몰하는 태도 자체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여러 움직임을 통해 읽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요. 폭력이 가능해지게 되는 배경이나 폭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인을 혹은 문학을 비호하는 입장에 있어서 문학을 특수한 공간으로 상정하는 태도가 어떻게 문제적일 수 있는지는 치열하게 논의되었고, 또 계속 논의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중요하게 바라보게 된 것은 폭력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고 대처 방안이나 대안을 마련해가는 일련의 과정에도 문학을 낭만화하는 태도가 거듭 개입된다는 점이었습니다.
[...]
그때부터 문제는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국지적인 것이다, 라고 생각할 때 무엇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고 또 실제로 무엇이 되풀이되고 있는가,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로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는가, 그 문제를 들여다보는 일이 저에게는 가장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일로 여겨졌습니다.7)
결국 두 평론가의 말을 나란히 놓고 볼 때, ‘생성’과 ‘제동’의 입장 차는 오히려 동일한 문제의식, 즉 ‘과거 청산’을 바탕으로 더욱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폭력과 위력의 결과를 직시하고 이를 개선하는 일뿐만 아니라 실제 위력이 생성될 수 있는 담론적/제도적 맥락 자체를 가시화하는 일이 양쪽에서 강조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비평이 읽기의 ‘문제’를 설정하고 이를 가시화하는 작업이라면, 무엇을 가시화할 것인가만큼이나 ①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지(‘생성’의 비평)가 하나의 문제로서, 더불어 ② 그 가시화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끈질기게 되묻는 것(‘제동’의 비평)이 또 하나의 팽팽한 문제 축을 담당함으로써 ‘새로운’ 비평의 운동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김봉곤, 김세희, 정지돈 사태와 관련된 여러 논쟁에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은 ③ 이 ‘어떻게’와 ‘누구’의 문제가 남성/여성 혹은 ‘전회’ 이전/이후 세대의 얼굴과는 조금 다른 위계 구도와도 계속해서 관계된다는 문제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비평(장) 전반을 향해 쏟아지는 이른바 ‘외부’의, ‘온라인 공론장’의 의구심과 질책은 비평-문학-발화 권력과, 그것과 대립하는 비/제도권 비평-비/문학-발화 권력의 구도를 상정한다. 이는 지식 권력과 발화 권력에 대한 일반적인 억압 가설을 바탕으로 할 때 쉽게 이해되고 또 해소될 수 있는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오늘날의 문학 비평은 소영현의 진단처럼 ‘지식인-비평가’의 상징적 권위뿐만 아니라 ‘지식’의 위상 역시 바닥까지 추락한 상황 속에서, 플랫폼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문학 매체, 문학 시장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때 문학장이 발화 주체를 생산해내는 통치성의 기능과 한계는 유동적으로 그리고 탄력적으로 변화하며, 비평 주체는 그것에 전략적으로, 혹은 저항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개인-제도의 ‘얼굴’을 구축한다. 비평이 가진 발화 권력의 미세한,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거대한 차이가 생성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중층적인 과정 속에서이다.8)9) 이때 유효하고도 중요하게 참조할 수 있는 입장은 ‘보편적 지식인’이라는 관념이 전혀 기능하지 못하는 오늘날, ‘비판’의 자리가 누구의 것일 수 있는지, 궁극적으로는 ‘누구’를 넘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그 한계와 가능성을 섬세하게 탐구하는 문학장 내외부의 진지한 논의들인 듯하다.
이희우가 지적하듯, 객관적 자리임을 자처하는 그 어떤 입장이든, 지식 권력이 현상을 포착하고 서술하는 모든 과정은 그 자체로 정치적 ‘생산’이다. 다시 말해 “어떤 질문이 그 사회의 결정적인 정치적 질문으로 부각되고 조성되는 것은, 한 사회가 특정한 모습의 사회로 구성되는 과정 자체”10)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객관적’ 자리가 어떤 ‘마술적 힘’을 지니고 있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 혹은 ‘객관적’ 자리가 명백한 현상이나 현실을 왜곡하거나 누락하며 채택한 억압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사회의 혹, 혹은 사회의 모순이 모순으로 확정되고 (재)생산되는 과정 자체를 지식-권력, 혹은 하나의 ‘객관적’ 자리에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모순을 ‘객관적’ 자리가 지시하는 하나로 환원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적은 물론 아군의 다양성에 주목해야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 몸들 사이의 불일치, 즉 빈틈”11)에 주목해야 한다.
원론적이고 궁극적인 차원에서 비평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 ‘불일치’와 ‘틈새’를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주목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뒤따르는 이유는 비평가가 전제하고, 다시 도착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발본적 믿음, 즉 ‘평등’의 논리가 ‘제도’를 완전히 해체하거나, 하나의 저자(주관적-객관적 자리)를 전제하는 모든 종류의 쓰기를 소거하자는 주장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 배세진은 이를 ‘읽기’의 문제로 재구성해낸다. 세계라는 텍스트 자체의 해석을 단지 쓰기가 아니라 (쓰기인)-읽기의 자리로 위치시키는 것은 텍스트의 안과 밖이라는 허상, ‘누구’라는 단독자의 자리로 모든 문제를 환원하는 것으로부터 이탈할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한다. 그는 20세기 보편의 붕괴의 결과로서 도래한 ‘탈진실 상황’에서, “실재가 소박하게 저기에 놓여”12)있다고 믿는 ‘실증적 읽기’는 물론이고, 실재가 아닌 “심층의 구조라는 ‘진리’”13)를 상정하는 ‘비판적 읽기’ 역시 그 유효성을 온전히 상실했다고 말한다. ‘멸균된 실험실’의 객관적 과학자나 역사초월적 보편을 담지하는 비판적 지식인 양쪽의 ‘앎’은 그 자체로 ‘진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비평의 역할을 놓고 벌어지는 온갖 종류의 운동을 억압 가설을 바탕으로 한 단순한 의미의 ‘권력’ 문제로만 상대하는 것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환기한다.
배세진은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두를 지양하며 이루어지는 ‘증상적 읽기’라고 말한다. 이는 ‘모순’이 세계라는 “텍스트의 심층에 놓여 있는 그 구조 또는 구조가 초래한 결과물이 아니라 텍스트의 표면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는 점, 텍스트에 심층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지 프로이트가 개념화했듯 그 ‘다른 공간’ 또는 ‘타자적 공간’으로서의 무의식만이 ‘부재로서 존재’한다는 점, 증상으로서만 읽어낼 수 있는 이 무질서⦁혼란⦁질병 또는 모순이 텍스트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텍스트를 텍스트로서 존립시켜 텍스트다움textualité을 가지게 해주는 바로 그것이라는 점”14)을 부단히 강조하며 제출되는 읽기의 방법론이다.
나는 그의 논의가 ‘보편적 지식인’ 혹은 나아가 지식인들의 매개를 삭제하여 실천으로 직행하는 ‘특수한 지식인’이라는 허상을 두루 해체하면서도, ‘비판’의 자리 아닌 자리를 포기하지 않은 채로 ‘평등’의 문제에 보다 급진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처럼 보인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세계라는 텍스트 자체에 대한 개입은 쓰기의 문제 이전에 읽기의 문제이며, 이는 이 읽기의 주체인 ‘독특한 지식인’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한정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때 ‘증상적 읽기’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보는 것’의 문제이자, 정확히는 ‘다르게 보는 것’의 문제로서, 삶이자 저항인, 말하자면 실천인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위 두 사람의 입장이 동시에 문제 삼고 있는 것이 ‘객관’을 자처하거나 반성하는 불투명한 비평의 자리 그 자체라기보다 ‘이후’라는 분할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운동의 방향성이라는 사실에 좀더 주목하고 싶다. 계엄 ‘이후’, 코로나 ‘이후’로서의 지금-여기를 인식하는 방식은 지금-여기라는 텍스트 바깥의 ‘예외 상태’를 전제하며 진보적 시간관을 급진적으로 해체하는 비평의 과제를 계속해서 유보하게 한다. ‘이후’를 전제하는 일은, 말하자면 ‘증상적 읽기’를 방해하며, 텍스트 읽기를 ‘누구’의 문제로만 환원하게 한다. ‘이전’과 ‘이후’라는 환상은 ‘현전하는’ 앎과 진리의 우위를 여전히 전제하는데, 이는 언제나 상속된 자리의 흔적 위에서 그러나 그 자명한 흔적을 다르게 발견하는 가능성 위에서만 움직이는 우리의 자리를 포착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후’와 ‘바깥’이 불가능한 자리에서 비평의 운동에 가까울 답답한 움직임, 그 ‘증상적 읽기’가 반복되어야 한다. 이 미진하면서도 미세한 운동의 반복을 ‘비평의 자리’라고 명명할 때, 그 운동은 고착된 채로 순환하는 자가당착적 몸짓으로 비칠 오독을 예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자리’라는 단어를 다시 한 번 고집하고자 하는데, 그래야만 “폭력이라는 아포리아를 빠져나올 길을 영원히 찾을 수 없다”15)는 이 자리만의 ‘진리’가 여기가 아닌 저기로의 움직임, 저기가 아닌 다시 여기로의 움직임을 추동할 미약한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이 미약한 힘의 광활한 결과를 목도하기 위해 다시 과거의 청산을 앞두고 닫힌 문 앞에 서성이던 ‘너’의 자리로 되돌아가본다.
‘죽은 작가’의 해부와 관련해 결국 아무것도 허락된 것이 없는 ‘너’는 무엇을 하는가. ‘너’는 갇힌 ‘너’의 세계 속에서 고집스런 운동을 한다. 정처 없고 무력하나 한편으론 광폭하고 무지막지한 질주와 무수한 엎어짐의 반복. 더 나은 진실을 움켜쥐고 있다고 믿었던 네가 계속해서 ‘죽은 작가’의 진실을 불가능케 하는 진실의 빈틈만을, 그 사이를 즉각적으로 비집고 들어서는 또 다른 진실의 빈틈 사이를 횡단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식적인 다시 쓰기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세계를 향한 ‘너’의 증오심과 자기 혐오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죽은 작가’가 아닌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죽은 작가의 아내”16)를 향해 미끄러진 기이한 에로스에 있는 듯하다. ‘너’는 ‘죽은 작가’의 주변을 이상한 방식으로 맴돌며 결국 ‘죽은 작가’를 향한 ‘죽은 작가의 아내’의 읽기에 도달한다.
죽은 작가의 아내는 작가가 죽은 뒤 몇 해 동안 교도소에 있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행적을 변호하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
죽은 작가가 자살한 날짜인 5월 28일이 제목인 에세이의 결말 부분에는 에세이의 전체 어조와는 상반되는 다소 몽상적인 서술이 등장한다. 그것은 드넓은 사막 어딘가에 있는 환상적인 의사당에 관한 내용이며, 그 환상적인 의사당에서는 은폐된 삶의 이면을 판결하는 회의가 이루어진다. 그곳은 타는 목마름에 시달리는 사람 앞에만 출현하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특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입장을 허가하는 장소다. 그곳은 죽은 작가의 아내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의사당이며, 그녀는 수많은 죽은 작가의 아내들이 원탁에 앉아 젤리와 밀감을 까먹으며 노닥거리는, 밤새도록 주제 없는 회의에 몰두하는 환상적인 의사당에 입회할 수 있는 회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그곳은 침잠된 슬픔이 아니라 격론과 수다스러운 말장난과 사나운 웃음소리가 감도는 연회장이며, 죽은 작가의 소설은 의사당의 테이블 위에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해석된다. [...]
죽은 작가의 아내들은 테이블 위에 오른 작품들 가운데 최고의 작품을 투표로 선출한다. 축배를 치켜들며, 하얀 접시 위를 수북하게 뒤덮은 죽은 작가의 언어는 계속되는 연회를 위한 관능적인 열매들이 되고, 죽은 작가의 아내들은 접시가 하얗게 비워질 때까지 향긋하고 달콤한 죽음을 맛본다.17)
‘너’는 이제 진정한 진실에 도달한 것일까? 신비의 광막이 걷히고, 심판과 소멸만이 남아 있는 곳. ‘죽은 작가의 아내들의 의사당’은, ‘너’는 닿을 수 없는 숭고하고 장엄한 진실의 장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설은 ‘너’의 움직임을 지속한다. 삭막한 사막 한가운데 얼굴을 처박고도 이어지는 ‘너’의 집요한 다시 읽기로. 진실의 구멍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죽은 작가’들의 “달콤한 죽음”을 “문학의 후렴구”이자, “공허한 묘석으로 부활”18)시킬 수 있다는 착각으로. 굳게 잠긴 대문 너머로부터 닫힌 과거와 그것의 다른 이름인 닫힌 미래는 여전히 아무런 답을 내어놓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문 앞으로 돌아와 같은 곳을 서성이는 ‘너’의 운동은 우리를 여기 이 자리에서, 그러나 가장 먼 곳으로 데려가는 유일한 움직임이다. ‘너’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은 곧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 양선형, 「죽은 작가의 아내」, 『백조』 2025 하반기, 156쪽.
2) 양선형, 위의 글, 154쪽.
3) 1990년대 중반 이후로 가속화된 ‘비평의 위기론’, 즉 “비평이 권위를 잃고 이론을 물리치고 작품 자체로 내려앉은 시간”이 페미니즘 비평의 가능성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소영현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는 동시대 ‘생성’의 비평을 “‘작가-비평가’ 비평의 어떤 귀결인 ‘기획자-비평가’와 ‘리뷰어’”로 본다. 소영현, 「비평을 찾아서 : ‘K-’ 시대의 비평」,『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13-14쪽. 한편, 성현아는 바로 이러한 ‘생성’의 비평적 독해법 자체에 대해서도 새로운 읽기가 요청된다고 말한다. ‘이후’ 달라진 문학 텍스트에 대한 전혀 “새로운 독해법이자 준거틀을 개발하기 위해 작품 한 편 한 편을 들여다보는 일”이 오늘날 문학 비평의 한 역할인데, 그것의 의의는 기존의 ‘비평’에 관한 정의를 전제로 해서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현아, 「비평(非平)한 비평(批評): 비평의 경량화에 대한 비판과 옹호」,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29쪽. 성현아는 그 읽기 ‘개발’의 일환으로 적극 활용되어왔던 신유물론적 관점의 작품 해석을 개괄하고 그 생산성과 한계를 짚은 바 있다. 성현아, 「인류세 시대 변화된 신체 감각과 물질로서의 몸-인간을 해체하는 소설의 전위」, 『자음과모음』 2024 겨울호.
4) 김보경, 백지은, 소영현, 홍성희, 조연정 좌담 중 김보경의 말,「서로의 목격자가 되어주는 우리 ‘실종’당하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는, 우리」,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97쪽.
5) 김보경, 「실종」,『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1년 가을호, 24쪽.
6) 홍성희, 「두께만큼 깊은」,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 가을호. 9쪽.
7) 홍성희, 위의 좌담, 98쪽.
8) 홍성희는 이러한 과정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주목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평(가) 개인의 발화가 제도를 기반으로 이루어질 때 결과적으로 그것은 개인의 얼굴이자 제도의 얼굴을 구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홍성희, 「두께만큼 깊은」,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이는 자연히 그 과정에서 ‘생산’되는 주체인 비평가의 불안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하는데, 최근에는 이에 대한 비평가들의 자기 고백적이며 자기 분석적인 작업을 통해 그 행위의 중층적 의미가 가시화되는 중이다. 장은정, 「지나간 미래」, 『자음과모음』 2020년 봄호; 「우리의 2010년대」,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0년 여름호; 이은지,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최가은, 「비평의 조건-예속과 애착」, 『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호; 강동호, 「비평의 감정-‘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은 어떻게 가능할까」, 『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
9)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이러한 비평의 운동 전반을 가진 적 없는 비평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시도, 혹은 정반대로 땅바닥에 내려 놓기 위한 시도라는 구도로 이해하는 진단은 현 비평장에 대한 허술한 분석일 뿐만 아니라, 철 지난 의제를 계속해서 비평의 장에 도입함으로써 논쟁 구도를 더욱 공허하고 단순하게 만드는 논리다. 대표적으로 권희철, 「거울 쓰기 망령 쓰기」, 『문학동네』 2025년 봄호.
10) 이희우, 「우리의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청년 남성 극우화’라는 사회적 사실의 구성」,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년 가을호, 10쪽.
11) 이희우, 위의 글, 39쪽.
12) 배세진,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탈진실과 계엄 상황에서 독특한 지식인의 증상적 읽기를 위한 시론」,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년 여름호, 101쪽.
13) 배세진, 위의 글, 102쪽.
14) 배세진, 위의 글, 105쪽.
15) 배세진, 위의 글, 116쪽.
16) 양선형, 앞의 글, 163쪽.
17) 양선형, 앞의 글, 169-170쪽.
18) 양선형, 앞의 글,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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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강연의 강연록을 개고한 글입니다. 은 말과활 아카데미 북클럽 [산책:자]의 일환으로 2025년 10월 16일부터 11월 6일까지 총 4주간 진행되었습니다. 내 솔직한 마음 현재 인생에서 수많은 적수를 만났지만, 아내여. 그대 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바이런의 격언, ···이라고 알려진 격언 1. “My soul is dark!” 솔직한 사람들은 이기적 오늘 제가 다뤄 볼 시인은 김수영이고요, 그리고 주해할 시는 「풀」입니다. 너무 유명한 시인이고 너무 유명한 시죠. 그렇지만 결국에는 고백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고백’.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수영은 고백의 달인이었습니다. 숨기는 게 좀 나을 법한 일상적인 치부까지도 굉장히 적나라한 발화로 시에다 풀어내곤 했었죠. 그런데 시만 그런 게 아니라 생활에서도 말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나 봐요. 예를 들어 「성(性)」 같은 시에는 외도를 비롯한 시인의 성생활이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는데, 실제로도 당시의 출판사 접대 자리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른 아침이면 아내인 김현경 여사에게 전날 밤 다른 여성과 동침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곤 했었더래요. 눈까지 반짝여가면서 말이죠. 그러면 김현경 여사는 또 그 얘기에 장단 맞춰가면서 재미나게 들어주었다고 하고요. 서로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유쾌해 보인다기보다는 약간 닳고 닳은 부부간의 기싸움 같기도 한데, 하여간에 이런 고백은 생전에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감안하고서라도 상대방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진솔함이죠. 그러니까 김수영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 살다 보면 자기 기분이나 생각이 얼굴에 바로바로 드러나는 사람들 있잖아요? 좋으면 좋다든지, 싫으면 싫다든지, 도대체가 갈무리가 안 되는 사람들. 김수영이 딱 그런 타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좀 완전 반대인데, 면전에서는 눈치 보느라 쩔쩔매다가 집에 가서 끙끙 앓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도 좀 나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제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사장님이 저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는 거예요. ‘하아···.’ 뭐지? 손님 나밖에 없는데. 혹시 방금 나 들으라고 그런 건가? 제가 독서대 들고 다녀서, 갈 때마다 허름하게 이거저거 펼쳐 놓고 죽치고 앉아 있거든요. 이런 일 있으면 항상 역지사지해 봅니다. 아니 짜증이 날 수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 같으면 좀 안 들리게 할 것 같은데···. 아니, 자기 심기가 불편
- 관리자
- 2025-11-01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K-pop, 변화하는 스토리텔링 류수연 2020년대 한국 문학계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을 꼽는다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 첫 번째에 놓일 것이다. 그것은 근대문학 이후 세계문학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오랜 콤플렉스에 종지부를 찍은 동시에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외연을 스토리텔링으로 좀 더 넓힌다면 한 사건이 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방영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등장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노벨문학상과 OTT 오리지널 영화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문학의 일이며, 그의 노벨상 수상은 지극히 문학 그 자체의 사건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다르다. 애초에 그것은 문학 텍스트가 아닌 영상이지 않은가? 원작이 있는 작품도 아니니 미디어믹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루는 것에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대단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필연적으로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선택했다. 그것은 현재의 한국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OTT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현 단계 한국문학과 한국적 이야기가 전 세계인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지표이다. 그 사이에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대문자 ‘K’로 지칭되는 K-컬처가 놓인다. 이 연재에서 나는 ‘K’를 화두로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를 그려낸 스토리텔링의 3가지 국면을 탐색하고자 한다. 1. 바깥, 또 다른 중심 스토리텔링으로서 한국문화를 말하는 첫 번째 장에서 가장 먼저 선택한 키워드는 한강이 아닌 K-pop이다. 이 연재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결국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단계에서 한국을 둘러싼 모든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K-pop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다. 오늘의 세계인이 실감하고 상상하는 한국문화의 첫 장면은 매력적인 아이돌이 등장하는 K-pop 퍼포먼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K-pop의 성공은 여전히 놀라운 사건이다. 세계 문화의 가장 변방에 있는 한국이 이토록 많은 세계적 스타를 배출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때로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엔 수많은 ‘왜&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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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1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허병식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에 새로이 등장한 주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가 있다. 세계문학이란 세계화 혹은 지구화 이후 도래한 지구화시대 문학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논의 속에서 등장한 담론이지만, 그 시작은 이른바 괴테-맑스의 논의가 그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듯 근대의 전지구적 도래와 시점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말한 “민족문학이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한 것과, “어느 한 국가의 정신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의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많은 민족문학과 지방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이 탄생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세계문학 담론의 기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괴테와 마르크스의 선언이 곧바로 세계문학을 근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도록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민족이 제국주의와 식민의 결과라면, 그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험이 정련한 것이 각국의 민족문학이었고,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국가로 이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족문학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이 지니고 있는 ‘영향의 불안’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새로이 만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 타자의 문화를 의식하게 된 순간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던 것이다. 이후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경험이 식민종주국과 식민피지배국에 미친 영향관계를 분석하면서 비교문학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지배의 승인이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시작했다. 비교문학과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식민지의 경험 이후에도 이어지는 문화적 지배와 혼종성의 문제와 씨름하였다면, 포스트식민주의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개되면서 그에 대한 문화적 응전으로 재귀한 것이 세계문학일 것이다. 괴테 이후의 세계문학의 전개를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문학이란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비교문학이자 포스트식민을 경유하여 새롭게 등장한 ‘제국’에 대항하는 문학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1세기 이후 ‘세계문학론’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이다. 그들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소개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모레티와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이 강조하는 세계란, 일차적으로 “하나이면서도 불균등한” 세계체제, 혹은 서로 진입하기 위해 각축하고 경쟁하는 세계문학 공간으로서 주로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해된다. 즉 이들의 세계 개념은 문학을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환경 내지 배경에 가깝다.1) 김용규는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와 그들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세계문학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정을 보면,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는 중심부의
- 관리자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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