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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솔직한 마음

  • 작성일 2025-11-01

   *아래의 글은 <시론 읽기 1>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강연의 강연록을 개고한 글입니다. <시론 읽기 1>은 말과활 아카데미 북클럽 [산책:자]의 일환으로 2025년 10월 16일부터 11월 6일까지 총 4주간 진행되었습니다.




   내 솔직한 마음


현재


인생에서 수많은 적수를 만났지만, 아내여.

그대 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바이런의 격언,

···이라고 알려진 격언



   1. “My soul is dark!”



   솔직한 사람들은 이기적


   오늘 제가 다뤄 볼 시인은 김수영이고요, 그리고 주해할 시는 「풀」입니다. 너무 유명한 시인이고 너무 유명한 시죠. 그렇지만 결국에는 고백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고백’.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수영은 고백의 달인이었습니다. 숨기는 게 좀 나을 법한 일상적인 치부까지도 굉장히 적나라한 발화로 시에다 풀어내곤 했었죠. 그런데 시만 그런 게 아니라 생활에서도 말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나 봐요. 예를 들어 「성(性)」 같은 시에는 외도를 비롯한 시인의 성생활이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는데, 실제로도 당시의 출판사 접대 자리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른 아침이면 아내인 김현경 여사에게 전날 밤 다른 여성과 동침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곤 했었더래요. 눈까지 반짝여가면서 말이죠. 그러면 김현경 여사는 또 그 얘기에 장단 맞춰가면서 재미나게 들어주었다고 하고요. 서로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유쾌해 보인다기보다는 약간 닳고 닳은 부부간의 기싸움 같기도 한데, 하여간에 이런 고백은 생전에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감안하고서라도 상대방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진솔함이죠. 


   그러니까 김수영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 살다 보면 자기 기분이나 생각이 얼굴에 바로바로 드러나는 사람들 있잖아요? 좋으면 좋다든지, 싫으면 싫다든지, 도대체가 갈무리가 안 되는 사람들. 김수영이 꼭 그런 타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좀 완전 반대인데, 면전에서는 눈치 보느라 쩔쩔매다가 집에 가서 끙끙 앓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도 좀 나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제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사장님이 저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는 거예요. ‘하아···.’ 뭐지? 손님 나밖에 없는데. 혹시 방금 나 들으라고 그런 건가? 제가 독서대 들고 다녀서, 갈 때마다 허름하게 이거저거 펼쳐 놓고 죽치고 앉아 있거든요. 이런 일 있으면 항상 역지사지해 봅니다. 아니 짜증이 날 수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 같으면 좀 안 들리게 할 것 같은데···. 아니, 자기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어떻게 저렇게 노골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거지? 뻔히 내 귀에도 들릴 거 알면서 저러는 건데, 그럼 들리든 말든 내 기분 따위는 고려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나한테 시비 거는 거로 받아들여도 되는 부분···?


   도도한 것도 마찬가지예요. 가끔씩 보면 쿨한 척하는 인간들 있죠. 마주 앉은 자리에서 따분하다는 듯이 턱 괴고 앉아서 뚱하게 지켜만 보고 있는 사람들. 뭐지? 사람 앞에 두고 애쓰는 척이라도 좀 하지. 이건 진짜 예의가 아니잖아···. 자기가 지루하면 나도 지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안 드나? 저는 좀 다자이 오사무급으로 침묵을 두려워하는 편이라서, 이런 상황에 놓이면 제가 항상 지는 쪽이거든요. 악! 빨리 뭐라도 말해야 해! 하고 쥐어 짜내듯이 너스레를 먼저 뱉고 마는데, 그럼 괜히 안 해도 되는 말 하게 되고, 그럼 또 경솔하게 군 거 같아서 후회하느라 집에 가서 힘들고요. 근데 이게 나 좋자고 그런 것도 아닌데···. 저만 손해 본 느낌이죠. 그래서 자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또 괘씸해집니다. ‘뭐지뭐지뭐지뭐지?···.’ 어쩌면 저도 내키는 대로만 하고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까 샘이 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만 그런 건 아닐 거 같아요. 저희 다들 애쓰느라 맨날 이렇게 손해만 보고 사는데 마주 앉은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죠. 언젠가 김소연 선생님께서는 ‘솔직함’과 ‘정직함’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해 주신 바가 있습니다.


 솔직함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이고, 정직함은 남을 배려하려는 것이다. 솔직함은 전부를 다 풀어 헤친다. 이율배반적인 것들과 대책 없는 것들과 막무가내인 것들까지 그냥 다 뱉어낸다. 솔직함은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는다. 반면, 정직함은 전부를 다 풀어 헤치지 않는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율배반적인 것들 중에서 일관성을 찾아 정리하고, 대책 없는 것들의 대책을 궁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함은 한층 더 정리되어 있으나 고집스럽고 편집적이다. 정직함은 가리는 것이 있다. 의도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주겠다는 신념 아래에서 의도적으로 행해 지는 것이 정직함이다.

 - 『마음사전』



   정직한 사람들은 이타적?


   솔직한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만 몰두하는 반면, 정직한 사람들은 상대방 기분이 우선이 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는 거짓말하면서도 솔직할 수가 있습니다. 리플리가 그렇죠. 사기꾼이지만 자신의 욕망에 한해서는 매우 진실한 캐릭터입니다. 그 발화의 내용은 거짓일지라도 발화 행위 자체는 진실하니까요. ‘정말로’ 거짓말을 하고 싶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캐릭터죠. 그런가 하면 때로는 정직하면서도 거짓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까 말한 너스레가 그렇죠. 누군가 비위 맞춰 주기 위해 내 맘에도 없는 말을 자꾸 하는 것, 이는 일종의 자기 자신을 속이고 하는 연기인 셈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상대방을 속이는 연기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너스레의 달인은 『인간 실격』의 요조일 것입니다. 요조의 인생 자체가 한편의 실패한 너스레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인간 실격』은 다음과 같은 침울한 구절로 시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죠.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요조는 다자이가 생전에 그랬듯 중증의 회피형 성격장애로 짐작됩니다. 마음 한편에는 애정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고 있지만, 거절과 갈등이 두려워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내심 방황만 하는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요조가 인간 사회에 부대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을 ‘이해한 척’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선택한 수단 중 하나는 익살이었고요.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요조의 익살은 그가 속한 사회에 ‘나 또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있다’라는 신뢰감을 주기 위해 행해집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너스레는 정직한 발화일까요? 하나하나 따져 봅시다. 요조는 얼핏 이타적인 인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고상하고 엄한 아버지 앞에서는 귀염둥이 막내아들을, 학교에서는 학급의 분위기 메이커로서 장난꾸러기 역할을 자처하지요. 심지어는 본인을 겁탈하고자 하는 하녀와 머슴에게도 화를 내기는커녕 힘없는 억지 미소로 응대하고요. 당장의 자신의 심정 따위와는 상관없이, 마주한 상대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키지도 않는 역할을 연기합니다. 그럼에도 요조의 익살을 일컬어 ‘정직하다’라고 표현하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직이란 속마음과 표현이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의 발로였는데, 익살 연기의 달인이라는 말은 거짓말의 달인이라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속에 딴마음을 품은 채 가면을 쓰고 아부하는 것은 무척이나 이율배반적이죠. 예컨대 저희가 보통 ‘좋은 사람’을 연기하는 기업인이나 정치인을 가리켜 정직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식적이라고 말하죠. 그렇지만 너스레 이후에 찾아오는 죄의식은 어떨까요? 요조는 자신이 상대방을 속이고 있다는 느낌, ‘척’하고 있다는 느낌, 인간의 탈을 쓰고 말하고 있다는 느낌, 나아가 무엇보다도 그 자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에 끊임없이 시달립니다. 그리고 이 기만감이야말로 『인간 실격』이 다루고자 하는 고통의 근원이 됩니다. 여기서 정직함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또 한 가지 도출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인식, 즉 반성입니다. 호인 행세하는 정치인 또한 어떤 의도하는 바가 있어서 누군가를 배려하지만, 어쩌면 그들에게는 반성이 결핍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 요조의 수기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누군가를 순수하게 마주하지 못한다는 기만감, 자신을 향한 신뢰에 거짓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다는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수기 자체가 이러한 허위의식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 되는 셈입니다.


속마음: 말하고 싶지 않음 ↔ 표출: 익살


   아무리 겉과 속이 달라도 그러한 모순(‘↔’)을 모순으로 인지하는 자기 인식 자체는 매우 반성적입니다. 물론 체면 따위의 겉치레를 모두 내려놓게 된 말년의 요조는 그제야 공허한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만, 자기 본연의 모습에 솔직할 수 있게 되었다기보다는 더 이상의 가면을 쓰고 있을 만한 기력이 없을 만큼 쇠한 상태라고 보는 게 좀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수기는 여기서 마침표를 찍죠. 들뢰즈라면 “다 써 버린 인간”이라고 했을지도 모를, 무(無)에 도달하거나 혹은 추락한, 마침내 실격된 인간입니다.


   김수영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요조가 앓았던 죄의식이 말하자면 ‘충분히 정직하지 못했다’라는 부정형으로서 정의되는 진정성이었다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수영은 ‘긍정형’으로서 가능한 한 실제로 진솔해지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김수영은 요조처럼 누구 비위 맞춰 주느라 괜한 소리 하는 법이 없었다죠. 요령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럴 바엔 아예 침묵을 택하는 편이었던 것 같아요. 또한 상당한 직설가였다고 하는데, 말할 때도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더래요. 아마도 그가 평생토록 가장 진실하고자 했던 이는 김현경 여사였을 것입니다. 여사를 만나 프러포즈했을 때는 그를 끌어안고서 이렇게 외쳤다고 해요. “My soul is dark!”


속마음: 다크한 영혼 = 표출: “My soul is dark!”


   문장 부호에 주목해 봅시다. <“”>, <!>; 직접 발화이면서, 강조입니다. 하지만 요조라면 자그마한 글씨로 수기에 이렇게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My soul is dark···’, 다시 말해 간접과 생략이지요.



   2. “뱀 조심해라.”



-큰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부하는 말


   내가 당신을 사랑할 자격


   김수영은 당시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김현경 여사에게 수업을 반만 하고 돌아올 테니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 달라고 했대요. 낭만적이죠. 그만큼 제멋대로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이 고백은 굉장히 충동적이고 사적인 발화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와락 껴안은 그 순간에 그야말로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솔직한 고백이니깐요. 그런데, 이렇게 솔직하기만 한 고백에도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운 김수영만의 증상적인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한 가지 힌트가 될만한 언급을 참조해 봅시다. 여사가 회고하시길, “수영은 내게 ‘마이 소울 이즈 다크’라고는 했어도 ‘아이 러브 유(I love you)’라고는 한 번도 안 했어요.” 김수영은 시인이면서도 평생토록 김현경 여사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더래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제가 생각하기엔 주의 깊게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입니다. 다시 묻건대, 김수영의 프러포즈는 왜 ‘아이 러브 유’가 아닌 하필 바이런의 시구여야만 했을까요? 시인이 어떤 심정으로 그런 고백을 했는지 저희로서는 결코 완벽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만, 프러포즈 당시의 전후 사정을 살펴보게 되면 그가 이미 여사에게 적잖게 복잡한 심정을 품고 있었다는 점 정도는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위 프러포즈는 김수영이 스물여덟이던 1948년 겨울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듬해 두 사람은 돈암동에 살림을 차리고, 마침내 그 다사다난했던 결혼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42년으로 벌써 그 이전부터 나름의 짧지 않은 전사(前事)가 있었습니다. 여러 에피소드가 있었겠지만, 오늘 제가 살펴보고 갈 내력은 배인철 시인과의 관계입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나 봐요. 여사의 첫사랑은 김수영이 아닌 배인철 시인이었는데, 배인철은 권투선수 출신으로 체격도 좋은 데다가, 일찍이 서양 문물을 접한 엘리트라서 실제로 보면 굉장히 젠틀한 멋쟁이였대요. 그런가 하면 꼬질꼬질한 김수영을 비롯해 그 주변 문인들은 말이 시인이지 사실상 한량이나 다름없었고요. 그런데 두 사람이 교제를 시작한 지 얼마 안 가 정말 괴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느 봄날 남산에서 데이트하던 도중 배인철이 의문의 총탄에 맞아 즉사하고 만 것입니다. 발견된 탄피가 미군이 쓰던 것이라서 아마도 미군에 의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추측만이 있을 뿐, 도대체 누가 어떤 의도로 그를 저격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미스터리라고 하네요. 하여간 중요한 건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는 바람에 “삼각관계 치정으로 얽힌 정부가 범인”이라는 둥, “일고여덟 명의 남자하고 사귀었다”라는 둥 김현경 여사가 추문에 휩싸이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여사에게 호감을 품고 주변을 서성이던 김수영이 용의선상에 올라 호된 고문을 받게 되고요. 그런데 시인의 여사를 향한 마음이 생각보다 깊었나 봐요. 김수영은 그런 굴욕을 치르고 나서도 의기소침한 김현경을 위로해 주기 위해 집까지 찾아가 “문학 하자!”라고 손길을 내밀었고, 바로 그 한마디에 여사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얼마 후 김수영 시인이 암치질로 심하게 고생할 때도 김현경 여사가 동거하면서까지 지극으로 간병하게 되죠. 


  그런데 문제는, 이 동거 때문에 배인철 사건이 다시 입방아에 오르면서 ‘역시 진범은 배인철을 시기한 김수영이었다’라는 식으로 음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에 덜컥 겁을 먹은 김수영은 헤어지자며 여사를 내치고 맙니다. 후에 밝혀지기로는 당시에 미래가 불투명했던 김수영을 못마땅하게 여긴 여사의 아버지가 교제를 중단해달라며 시인을 설득했다고는 하는데, 사실이 어떻건 사랑 앞에서 망설이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서인지 그렇게 여사를 외면하면서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헤어진 채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 몇 달 만에 정류장에서 우연히 여사를 다시 만난 김수영이 충동적으로 프러포즈를 감행하게 된 것이고요. 그렇다면 김수영은 사랑을 말하는 대신, 그게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여사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대로 고백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의심이나 시기, 두려움 따위의 모든 비겁을 털어 내고 당신 앞에서 진실해지기 위해서, 말하자면 사랑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선행된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에 대한 이러한 심의는 여전히 어느 정도는 부정적이며, 또한 반성적입니다.


   그런데 이 “My soul is dark!”는 공교롭게도 정확히 십 년 뒤 다시 한번 발화됩니다. 첫 번째가 한 겨울밤 작은 벤치 앞에서의 낭만적인 프러포즈였다면, 두 번째는 바로 그 유명한 폭행 사건으로서 말입니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죄와 벌」 전문



   김수영은 왜 아내를 우산으로 때려눕혔을까요? 거기에는 정말 너무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저희가 주목해 볼 지점은 그가 ‘왜’라는 질문에 결코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여사를 어째서 폭행해야 했는지 당위를 설명하기는커녕 버려 놓고 온 우산이 아깝다며 그보다 더 부정한 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많은 평자들이 이런 식의 노출증은 흔히 자기비판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독해합니다. 자신의 결점을 타자화하여 다름 아닌 그 스스로가 못난 김수영에게 맹렬한 비난을 가하는, 일종의 메타적인 자기풍자의 제스처인 셈이죠. 그렇지만 시의 문면에 드러난 사실에만 주목해 봅시다. 말했듯이 김수영의 반성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다지 반성적이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치부를 지나치게 뻔뻔한 태도로서 고백하고 있기에 문제가 되고 있을 뿐이죠. 김수영의 고백과 요조의 고백이 차이를 가진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입니다. 가령 요조의 어정쩡한 처세술은 주변인으로부터 동정과 연민을 유발합니다. 특히 요조의 주변에서 그를 둘러싸고 그에게 모성애를 발휘하는 여성 인물들이 그렇죠. 예를 들어 첫 번째 자살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이후, 의기소침해 있는 요조를 거두어들인 시즈코는 그를 보며 말합니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뭔가 해 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져. ···언제나 쭈뼛쭈뼛 겁먹고, 그러면서도 익살스럽고. ···가끔 혼자 굉장히 침울해하고 있으면 그 모습이 더 여자의 마음을 흔들거든.” 작가와 인물의 발화를 곧바로 등치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 소설이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요조의 익살이나 다자이의 실존적 고통은 어느 정도는 이 동정심을 염두에 두고 있는 엄살이거나, 적어도 그런 반응을 은근히 기대하고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는 점에서 굉장히 미심쩍어지기도 합니다. 당대에 다자이 문학의 가장 열띤 비판자였던 미시마 유키오는 이러한 ‘다자이적인 것’을 ‘응석 부리는 것’이라 규정하며 다음처럼 신랄하게 표현한 바 있죠. “그 시대 특유의, 어떻게 해도 퍼데틱(pathetic)한 한편, 자신들이 시대병을 대표하고 있다는 자부에 찬 [···] 그리스도인 체하는 얼굴”이라고요(『나의 편력시대』). 실제로 요조의 반성문은 그의 또 다른 보모 중 한 명이었던 마담의 회상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자상하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런가 하면 김수영은 결코 응석 부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이 시의 핵심은 바로 이 비반성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말미에 극적으로 사면되는 일종의 제스처에 불과한 파렴치가 아니라,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가 직접적인 처벌마저도 요구하는 파렴치 말입니다. 그런데 왜 처벌을 원하는 걸까요? 김수영이 번역한 크로오드 비제의 시론 「반항과 찬양」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진정한 시는 무시와 반시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죠오지 바테이유가 지극히 적절하게 말한 것처럼) ‘시의 증오’가 그의 아우성 소리가 될 것이다.” 「죄와 벌」이 반시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 시에 대한 기존의 평가처럼 표면 뒤에 있지도 않은 반성의 심리를 읽어 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죄와 벌」은 반시(反詩)가 아니라 나름의 당위를 내재한 ‘훌륭한 시’가 될 것이고, 그렇게 가정 폭력범 김수영은 ‘인간미’라는 자기 합리를 갖추게 되고 말겠지요. 요조라는 “광인”이 마침내 “좋은 사람”으로 승인되자 결국 그의 수기 또한 인간이 될 자격에 대한 인정 투쟁으로 소급되고 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죄와 벌」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자격이라는 규범성에 대한 반항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학적 테러리즘[폭행]”이 바라는 것은 오히려 철저한 증오와 경멸입니다. 왜냐하면 반항은 그래야만 반항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반항과 찬양의 변증법적인 독법을 차치하고서라도 시를 쓰는 시인 쪽에서도 또 한 가지 기이한 역전이 발생하고 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물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혹여 이 반항은 진실되고 싶다는 강인한 의지의 발현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거짓된 세계를 직접 심판하고자 했던 라스콜니코프가 그랬듯, 세속의 위선이나 상투성에 대한 교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시의 첫 구절에 주목해 봅시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 살인을 한다”. 여기서 김수영의 초점은 “희생”일까요, “살인”일까요.


   1948년의 프러포즈와 달리, 「성(性)」 혹은 「죄와 벌」에서의 고백은 더 이상 ‘고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My soul is dark!”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선행된 고백이었다면, 김수영의 후기 시에서 고백의 양상은 이보다는 고해에 더욱 가까워집니다. 이러한 고해는 일차적으로는 마음이 평온한 상태, 즉 거리낄 게 없는 순결한 상태를 소망할 것입니다. 또한 죄의식이나 부채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어두운 욕망 같은 것들을 모조리 다 토해 내야만 할 필요가 생기고요. ‘네 속의 사악하고 허황된 생각을 긁어내라는’, 어떤 배설적인 명령이 작동하는 것이죠. 그리하여 고해는 항구적인 자기 검열과 비판을 동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냉철한 자기비판으로 말미암아 김수영 그 자신 또한 누군가를 비판할만한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왜 흔히들 내로남불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나의 불륜이 불륜임을 겸허히 자인할 수만 있다면, 남의 로맨스도 불륜입니다.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은 그만큼 남에게도 가혹해질 수가 있는 셈이죠. 다시 한번,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가 되어 있기만 하다면, 라스콜니코프가 그랬듯 살인도 감행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처벌과 심판의 선후 관계를 따져 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요. 언젠가 김현은 김수영의 요설을 일컬어 “정신의 설사”라며 “벗기려고 한다는 사실까지를 벗기려 한다”라고 썼었죠. 저 또한 시로는 얼마든지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써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함으로써 해소가 될 수 있다면 좋은 형태, 좋은 방식의 게워 냄이겠지요. 그런데 실제로 길가에서 누군가를 때리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우선 첫째로, 시와 삶 사이 창작을 가능케 하는 간극이 말소되어 버린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시-삶-속마음’을 일직선으로 관통하고 자는 욕망으로 인해 이제 정직함은 단순히 삶의 태도일 뿐만 아니라 시작(詩作)의 차원에서도 연관이 됩니다. 이로부터 ‘정확성’에 대한 금욕주의적인 집착이 시작되고요. 왜냐하면 자신을 가능한 한 정확히 표출하기 위해서는 어둡고 부정한 속마음까지 여과 없이 표현해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시적 수사나 감정의 과잉 또한 기피해야 하기 때문이죠.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수영은 작위에 대한 병적인 거부감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의 후기 산문들, 가령 「요동하는 포즈들」이나 「포즈의 폐해」를 살펴보게 되면 “얄팍한 포즈”, “위조”, “사기성”, “기만성”, “인찌기”(いんちき) 등 그가 빈번하게 사용하는 어휘에서부터 벌써 ‘가짜’에 대한 거의 혐오에 가까운 경멸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러 멋 내는 것, 뭔가를 꾸미는 것에 대한 경멸 말입니다. 그러나 정직한 건 좋습니다만, 그런 것 치고도 김수영의 날 것에 대한 집착은 어딘지 좀 강박적이고 결벽에 가까운 면이 없지 않아 있어요. 참조해 볼만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김수영의 생활상은 거의 청교도적인 소박함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사치하는 것을 정말 싫어해서 김현경 여사가 집안에 새 가구를 들일 때면 두 손을 싹싹 빌면서까지 제발 사지 말라고 만류했대요. 특히 텔레비전이랑 피아노만큼은 안 된다고 극구 반대를 했다는데, 어느 날은 술에 취해 갑자기 안방에 쳐들어가 도끼를 들고 피아노를 때려 부수겠다며 난리를 피운 적도 있다고 해요. 약간 호들갑 같기도 하죠? 그런가 하면 옷차림도 매우 검소한 편이라서, 가끔 여사가 다리미로 바지에 줄을 세워 주면 일부러 그걸 다시 구겨서 입었더래요. 재밌는 일화입니다. 왜냐하면 김수영이 ‘의도적으로’ 바지를 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의 소박함 역시 어느 정도는 ‘가장된 날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역설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김수영의 진실은 때때로, 매번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요, 때로는 진실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과시하고 강요하기 위한 진실이었던 것처럼도 보입니다. 좀 더 대담하게 말해 보자면, 김수영은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아내를 폭행한 죄로서 「죄와 벌」을 쓴 것이 아니라, 이런 시를 쓰고 싶어서 김현경 여사를 폭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발가벗을 수 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 고해하기 위해 우선 고해할 만한 죄를 먼저 저지르는 것이죠. 그러나 이는 분명 본말전도입니다. 본인도 시작 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변을 붙이고 있고요. “여편네를 욕함으로써 자기만 잘난 체하고 생색을 내려는 것은 치기다. 시에서 욕을 하는 것이 정말 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문학의 악의 언턱거리로 여편네를 이용한다는 것은 좀 졸렬한 것 같은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정직함에 대해 한 번 더 세분하고 들어가 볼 수 있겠습니다. 요조의 안온한 반성문이 함량 미달의 정직함이었다면, 김수영의 반항은 조금 과하게 정직합니다. 자신의 악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바로 마주 보겠다는 말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큼을 정확하게 보겠다는 말이죠. 하지만 위악이란 내가 본디 어두운 것보다 조금 더 악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속마음과 표현 사이 여전히 모종의 어긋남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확성으로부터 한 발 더 넘치도록 말입니다. 모순(‘↔’)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닌, 순수하게 악한 마음이 아니라 과장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는 요조의 익살이 그랬듯, 또 하나의 의식적인 ‘포즈’입니다.


속마음: 다크한 영혼 ≠ 표출: 「성(性)」, 「죄와 벌」



   私心/邪心


   김현경 여사가 김수영이 평생토록 바로 보고자 애써야만 했던 사람이라면, 그가 끝끝내 바로 보지 못했던 사람은 아마도 박인환일 것입니다. 살다 보면 정말 ‘잘못된 만남’이라고 할 만한 인연이 있잖아요? 김수영과 박인환이 딱 그런 사이였던 것 같은데, 한국 문학사 대표적인 견원지간 중의 하나죠. 두 사람은 정말 여러 면에서 상극이었나 봐요. 박인환은 좀 설치는 타입. 독립 서점이니 뭐니 여기저기 일을 벌이고 다니는 데다가, 사석에서도 말이 많고 허세가 심해서 김수영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일부러 자기 나이를 네다섯 살 높여서 소개했대요. 그래서 김수영은 박인환이 죽을 때까지도 자기랑 동갑인 줄 알았다고 하고요. 반면에 김수영은 약간 신중파. 애초에 말주변도 별로 없는 데다가 점잖고 다분히 유교적인 인물이라서, 서로가 만나면 항상 김수영이 박인환을 못 견디고 먼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대신 속으로만 반감을 키워 가다가 박인환이 죽고 나서는 아주 매몰차게 그를 비난하고 다니죠. 인환이는 “겉멋만 든 허섭스레기”라든가, 인환이는 “곡마단의 원숭이”라면서요.


   그런데 또 라이벌이라기엔 박인환은 김수영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고 해요. 워낙에 이른 나이에 요절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생전에 김수영에 대해서는 언급도 한 적 없었다고 하고요. 그러니까 사실 김수영의 “박인환 콤플렉스”는 김현 말마따나 양자의 라이벌 의식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열등감에 가까웠던 거죠. 김수영은 지금에서야 신화적인 인물로 취급되지만 50년대에만 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거든요. 한국 전쟁 당시 포로로 수용되는 바람에 그만큼 활동을 못 한 것도 있고요. 그런가 하면 박인환은 특유의 저돌적인 성격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하면서 이미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김수영이 박인환을 질투한 것도 당연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질투라는 것도 사이즈에 따라서 대처법이 조금 달라지는데, 예를 들어 김수영은 자신이 질투를 느낀 한 후배 시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씁니다.


   김재원의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를 읽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어리둥절해 있었다. 젊은 세대들의 성장에 놀랐다기보다도 이 작품에 놀랐다. 나는 무서워지기까지도 하고 질투조차도 느꼈다. 그래서 그달치의 「시단월평」에 감히 붓이 들어지지 않았다. 그런 사심이 가시기 전에는 비평이란 쓰여지는 법이 아니다. 그러다가 그 장벽을 뚫고 나온 것이 「엔카운터지」다. [···] 「엔카운터지」를 쓰지 못하고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의 월평을 썼더라면 나는 사심(私心)이 가시지 않은 글을, 따라서 사심(邪心) 있는 글을 썼을 것이다. 개운치 않은 칭찬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죽이거나 다치거나 했을 것이다.



   이게 이 사심이라는 게, 김수영이 직접 쓰는 단어인데, 김수영은 ‘사적이다’ 할 때의 ‘사사로울 사(私)자’와 ‘사악하다’ 할 때의 ‘간사할 사(邪)자’를 중의적으로 씁니다. 혹은 ‘뱀 사(蛇)’자를 써서 말하자면 뱀심, 뱀처럼 간사한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질투 역시 그중의 하나겠죠. 김수영은 자신이 질투를 느낄 때면 섣불리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선은 극복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극복이 되면 그제야 행동에 옮기고요. 이와 관련해 철학자인 이성민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십니다. “이 섬뜩할 정도로 놀라운 말은 그가 삶과 윤리와 창조성을 등치시키는 바로 그곳에 나온다. [···] 그는 엄밀하게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초월적인 차원을 획득한다. 즉 여기서 창작과 조우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비평이 아니라 비평이 가능해지는 차원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해 봅시다. 이성민 선생님의 논리에 따르면 순전히 사심으로만 쓰인 듯한 박인환에 대한 평가들은 자격 없이 쓰인 ‘불가능한’ 글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논리대로라면 사실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하는 후배 시인보다는 박인환이야말로 정말 용기를 내 극복해야 할 일생일대의 윤리적 난관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사심이라는 것도 사이즈가 중요한 건데, 저희가 극복할 만한 사심이 있고 극복하기 힘든 사심이 또 따로 있잖아요. 그냥 예쁘고 말 잘 듣는 후배 시인이라면 그만한 질투쯤이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위 월평은 왠지 시 잘 쓰는 후배 덕담도 할 겸, 별것도 아닌 사심 극복해 놓고 자기 사고가 이렇게나 성숙하다고 우쭐거리기 위함인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건 뒤집어 말하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사심에 불과했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저희가 정말로 속으로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시기하면 아예 티도 내지 않으려고 하잖아요. 게다가 나하고 관계가 아주 짙고, 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우라면···, 김수영에게는 박인환이 그런 케이스였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제일 좋은 건 바로 마주 보는 겁니다. 애초에 문제가 되는 근원을 직면하고 어떻게든 그 갈등을 풀어내는 방안이지요. 그렇지만 살다 보면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죠. 그래서 저희는 보통 아래와 같은 대안들을 택하게 됩니다. 


   첫째로는 ‘삭이기’,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입니다. 김수영은 거의 박인환을 보자마자 반감을 느꼈다고 해요. “인환의 첫인상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김수영도 처음에는 나름대로 그에게 공정해지려 애를 써 보기는 한 것 같습니다. 한번은 박인환이 초현실주의와 관련해 무슨 멋들어진 말을 하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오랫동안” 고민을 해 봤다고도 하죠. 그러나 이처럼 공정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양심의 가책과 피로를 유발하게 됩니다. 애정을 가져보려 무던히 애를 쓰는데, 그 애쓰는 게 너무 힘들어서 더 미워지는 것이죠. 여기서부터 형평이 다시 약간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박인환은 평소 그럴듯한 말로 김수영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보통 이럴 때면 정당한 이유 없이 하는 짓 하나하나가 다 밉살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좋게 하는 말에도 왠지 모를 악의가 감지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헤아려 보지만, 언제나 최종 결론은 정상참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원점으로의 회귀입니다. “네가 죽기 얼마 전까지도 나는 너의 이런 종류의 수많은 식언의 피해에서 벗어나려고 너를 증오했다.”


   두 번째는 외면하기입니다. 실제로 김수영은 박인환을 오랫동안 외면해 왔습니다. 박인환이 스물아홉의 나이로 요절한 게 1956년의 일이거든요. 반면 「마리서사」나 「박인환」 등 김수영이 박인환에 대해 모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글들은 모두 1965년에서 67년 사이에 발표된 글이고요. 다시 말해 김수영이 박인환에 대해 쓴 것은 모두 박인환이 죽은 지 거의 십 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서 이루어진 사후적인 악담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노력을 해 보다가 어느 시점 이후에는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한 것이지요. 김수영은 말합니다. “이런 인환과 인환의 세평에 대한 뿌리 깊은 평소의 불만 때문에 나는 한사코 인환에 대해 얘기를 쓰지 않기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한국 문단이란 곳이 또 워낙 좁아서 ‘그냥 얽히지 말자’도 좋은 대안이 될 수가 없는 것이 활동 반경이 겹치면 몹시 곤란해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김수영은 그런 것 치고는 박인환과 엮일 일이 많았습니다. 의기투합해 《신시론》이라는 동인도 함께 꾸린 바 있는가 하면, 박인환이 독립 서점 마리서사를 차릴 때 도움을 줬던 복쌍이라는 인물은 김수영이 평소부터 존경해 마지않았던 은자(隱者)로 그가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 속표지에 “이 시집을 박준경[복쌍의 본명] 형에게 드린다”라고 헌사하기까지 한 인물입니다. 그 사람 하나면 안 보고 살면 그만일 텐데, 이렇듯 저희가 평소에 신경 쓰는 제삼자가 엮여 있으면 보기 싫어도 안 볼 수가 없는 노릇이죠. 게다가 원한 감정이라는 게 무서운 것이, 당사자랑만 결판 지으면 되는 게 아니라 그 주변으로까지 심정이 복잡해지고 이러면 문제는 정말로 심각해집니다. 그리곤 이제 뭘 더 잘해 보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중립국으로 가고 싶어지죠. 그러나 중립국 같은 곳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요.


   그래서, 세 번째는 그냥 털어버리기입니다. 상술했듯, 김수영은 박인환이 죽고 난 이후로도 거의 십 년 동안 그에 대해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죽고 난 직후, 동갑내기 시인인 박태진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잠깐이나마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더래요. “인환이가 죽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죽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허약한 친구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후 「마리서사」나 「박인환」에서는 아주 대놓고 사심으로 글을 쓰면서 죽은 박인환으로서는 항변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비난을 마구 가하고요. 그렇지만 사심에 눈이 멀어서 가끔 사람들 보는 눈이 무섭다는 걸 잠깐 까먹게 될 때가 있는데, 당시 김수영이 딱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앗차!’ 하고 보는 눈 무섭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되죠. “나는 그 후 인환에 대해서 쓴 나의 유일한 글에 그런 욕을 쓴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거짓말이라도 칭찬을 쓸 걸 그랬다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이게 남들 볼 때면 자기 눈에도 다 보이듯이 저희 하는 생각들도 남들이 훤히 다 보고 있거든요. 투명하게 쓸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사실 어떤 필자들의 글은 투명함 자체가 이미 증상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원한이 한번 생기고 나면 정말 골치 아파지죠. 태생적으로 싸움닭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면 또 모를까, 피해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덤벼들 수도 없는 시련이 계속됩니다. 게임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심을 극복할 만한 한 가지 유일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바로 보고, 그리고 죽는 것입니다(「공자의 생활난」). ‘자폭하는 속물’이라는 유명한 구절을 바로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사사로운 자기’, ‘간사한 자기’를 완전히 폭파해 버리고 아예 그냥 소멸해 버리는 것이죠. 이때 그는 ‘김수영’이 아닌 무(無)의 경지에, 모자라거나 과하지도 않은 어떤 정확성의 상태에 비로소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거의···’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전문



   이제부터가 시의 얘기로 들어섭니다. 이런저런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 시의 핵심은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이 시에는 자연적인 움직임을 제외하고서는 그 어떤 어조나 감정도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말로는 비인간적인 시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메트로놈이나 뒤집어 놓은 시계추처럼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왕복 움직임만을 보여 주고 있으니깐요. 김수영은 반시의 이러한 진자와 같은 운동성을 다음처럼 묘사합니다. 


   귀납과 연역, 내포와 외연, 비호(庇護)와 무비호, 유심론과 유물론, 과거와 미래, 남과 북, 시와 반시의 대극의 긴장. 무한한 순환. 원주(圓周)의 확대. 곡예와 곡예의 혈투. 뮤리얼 스파크와 스푸트니크의 싸움. 릴케와 브레히트의 싸움. 앨비와 보즈네센스키의 싸움.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더 큰 싸움··· 반시론의 반어.

   —「반시론」 



   주지하다시피 왕복 운동하는 진자는 극단을 향해 가속하다가 한계 지점에서 전진도 퇴행도 아닌 일시 정지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장 방향 전환해 다시 반대 극단을 향해 가속하고요. 풀이 바로 이러한 “대극의 긴장”의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번째 핵심은, 풀의 반복적인 왕복은 그러나 끊임없이 움직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움직임을 멈추기 위해서만이 되풀이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운동은 한계 지점에서의 정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선(線)적 사고”에서 “점(点)적 사고”로의 전환입니다(「진지하게 다룬 생명과의 격투」). 그러나 이 극점은 정점이라기보단 언제나 ‘거의···’의 형태로 직전에 멈추고 마는 잔인한 근접성에 가깝습니다. 정점에 ‘거의···’ 도달할 뻔했는데, 그 사람을 ‘거의···’ 극복할 뻔했는데, 무엇보다도 이 시를 ‘거의···’ 완성할 뻔했는데···! 라는 식인 것이죠. 언젠가 김수영이 읽고 너무 좋아 즉시 팔아 버렸다는 바타유의 『문학과 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보들레르의] 시는 ‘놓치기’를 실행에 옮기는 동시에 이 ‘놓치기’를 붙들려는 시도를 한다.” 말하자면 풀의 움직임은 이 ‘놓치기’의 형상화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컨대 풀이 숨이 죽어 다분히 하이데거적인 대지에 ‘거의···’ 밀착해 있을 때면, 가끔은 시를 붙잡은 듯한 ‘느낌적인 느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만세! 만세! 나는 언어에 밀착했다. 언어와 나 사이에는 한 치의 틈서리도 없다.”(「시작 노트 6」) 그러나 세속의 바람이 도대체가 풀을 가만히 좀 내버려 두질 않기에, 대지로부터 멀어진 채로 또 한 번의 극점에 가닿기 위해서는 다시 반대 극단으로 드러누울 필요가 생기고요. 그리고 관건은, 이러한 풀의 움직임은 “발목까지”라는 어떤 한계 지점을 끊임없이 노크하지만 그 너머로는 결코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너머로의 진행은 다만 “죽음의 실천”(「새로움의 모색」)을 통해서만이 도달할 수 있는 ‘불가능’의 영역이며, 그러한 죽음은 극단에 멈추어버린 ‘운동량 0’의 정지 상태, 즉 비개성화 된 상태로부터 찰나에 간접 체험될 뿐입니다.


   그런데 「풀」은 어느 순간 ‘실제로’ 극점의 너머에 도착하기도 합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는 김수영 생애 마지막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는 탈고일이 1968년 5월 29일이에요. 그리고 3주 후인 6월 18일 김수영은 마흔일곱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고요. 「풀」은 몇 달 후 그해 《현대문학》 8월호에 게재됩니다. 이런 낭만적인 독해가 허락된다면, 흔히 김수영 시의 완성 혹은 정점이라고 불리는 이 시는 이 지점에서 실재적인 무(無)표정을 성취합니다. 다만 시인 그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해서 말이죠. “발목까지”에서 “발밑까지”로의 불가능한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딘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김수영의 죽음을, 「풀」이라는 시의 논리적 결과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 지점에서 내/외면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더 이상의 마음도 말도 없기 때문입니다. 


속마음: 無 = 표출: 無



   3. “그 영화 좋지요?”



   그런데 김수영의 미완의 시 중에는 이런 시가 하나 있어요. 제목도 없는, 어쩌면 주인 없는 시입니다. 



   —이를테면 소라라고 합시다 

   소라 속에 그리어진 나선(螺線)이 어떻게 부드러운 것인지 아시지요


   기차를 타고 내가 서울로 기어 들어왔다고 합시다

   기차가 그리고 내가 도회 서울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왔다고 합시다


   희고 부드러운 소라의 속으로 한 마리 개미가 기어 들어간다고 합시다


   —이를테면 이 자유를 잊어버린 도회가 소라 속 같다고 합시다

   소라의 밑바닥까지 기어 들어간 개미는 자기의 걸어온 길을 모릅니다

   그러나 비좁은 도회 안에 들어온 시인은 자기의 송곳 같은 자리를 알고 있습니다

   —「소라」(가제) 전문



   이 시는 김수영 40주기를 맞이해 《창작과비평》 2008년 여름호에 처음 공개되었고요. 전집에는 2018년에 3판으로 추가되었습니다. 「풀」이 김수영 시의 문을 닫는 하나의 정점이자 닫힌 점으로 작용하는 시라면, 이 시는 미완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모종의 잠재성을 품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창비》 여름 호에 함께 실린 김명인 선생님의 유고 해제에 따르면 1956년 2월 중순에 쓰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 당시는 김수영이 마포구의 넓은 마당 집으로 이사해 양계업을 시작한 시기로 “생활에 대한 긍정적 감각”을 회복한 시기이기도 하죠. 그래서 위 시 「소라」(가제)에서도 세속의 한복판에서 버티고 살게 된 시인의 타협적인 태도가 두드러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고요. 날 선 마음보다는 어딘지 희고 부드러운, 조금 둥그러진 마음으로 쓰인 시입니다.


   이제 잠시 처음으로 돌아가 볼게요. 강의 첫 부분에서 인용한 김소연 선생님의 『마음사전』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솔직한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과 미워한다는 말을 번복과 반복으로 발설한다. 반면, 정직한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을 정리하여, 사랑하지만 미워한다거나, 밉기도 하지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줄 안다. 자기감정에만 충실할 때에는, 좋을 때에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싫을 때에 미워한다고 말해 버리지만, 누군가를 배려하고 싶을 때에는, 사랑하되 미워한다거나 밉지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더 믿게 되는 것은 정직함이지만, 진실로 더 믿게 되는 것은 솔직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솔직함은 항상 거짓을 말할 것을 전제합니다. 저희의 싫다, 좋다의 감정 자체가 이미 너무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반면 정직함은 모종의 진실한 마음을 추구해야 할 진리로서 가정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다 보니 정직함은 때때로 감정을 삐져나오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실제로 저희가 그다지 슬프지는 않지만, 저희를 둘러싼 처지가 아주 비관적일 때, 내면의 목소리는 보통 이렇게 말하죠. ‘정신 차려. 넌 슬픈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길 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감정을 억지로 다스리다 보면 한순간 흉하게 눈물을 쏟아내기도 하거나, 아니면 마음 한구석이 곪다 못해 저희도 모르는 새에 아예 썩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솔직함은 오히려 작위성을 포용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솔직한 순간에는 대개 어느 마음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반성할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본심이라는 게 없다고는 말하긴 힘들겠지만, 때때로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터져 나오는 마음도 있잖아요. 솔직함은 이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자격 없이 말할 용기, 어쩌면 비겁해질 용기입니다. 그러나 ‘자격 없음’이 아니라, ‘자격’이라는 기준의 없음입니다.


   그러니 제가 여태 강의한 내용에는 두 가지 벗어남이 있고, 두 가지 재귀성이 있으며, 또한 두 가지 고백이 있습니다. 정직함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를 보여 주기 위해 때로는 모종의 극단성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더 크게 발가벗기 위해서 더 큰 죄를 저지르듯이,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더, 더, 더 큰 싸움···”을 추구하다가 좌절하길 반복하죠. 반면 솔직함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만 마주한 그 순간의 용기를 통해 아주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움직임에 보다 가깝습니다. 그러나 “희고 부드러운 소라의 속으로 한 마리 개미가 기어 들어간다고” 하듯, 그렇지만 더 오래, 더 멀리, 이를테면 “나선(螺線)”을 그려나가는 식으로 말입니다. 때문에 이 나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항구적인 미완의 움직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말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나선은 좌절 없이 언제나 지나갑니다, 혹은 죽지 않고 반드시 살아 있음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마음이란 대체 뭘까요? 고해가 아닌 고백의 예를 하나 더 살펴보면서 이 강연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격 없이 발화된 마음의 또 다른 예입니다. 김수영에겐 김현경 여사 말고도 중요하게 언급되는 연인이 또 한 명 있었는데요, 바로 노 선생이라는 인물입니다. 김현경이 낡아도 좋은 평생의 동반자였다면, 노 선생은 어느 한 시절의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현경 여사는 멋쟁이에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그야말로 아방가르드한 여성이었다고 하죠. 반면에 노 선생은 그다지 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학을 잘 아는 것도 아닌, 좀 수더분한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또한 동시에 무척이나 다정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언젠가 한 번은 시인이 누이동생인 김수명에게 “노 선생의 본명은 노봉실이란다”라며 그가 일하는 미도파백화점에 심부름을 부탁한 적이 있었대요. 김수명은 이때를 회고하길,


   오빠가 가르쳐 준 대로 미도파 1층이었던가 2층에 가서 미스 노를 찾았지요. 미스 노는 진열장 안에 있었어요. 키가 작고 눈이 큰 ‘아줌마’였어요. 나는 실망했어요.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런 아줌마라니··· 그래서 아마 말도 더듬었던 것 같아요. 그분은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것 같아요. 나이가 얼마냐? 어느 학교에 다니냐? 그런 것을 물었던 것 같애요. 돌아갈 때는 와이셔츠에 넥타이, 내복을 포장해서 오빠에게 전해 주라고 했어요. 그 뒤로도 서너 번 오빠 심부름으로 만났댔죠. 우리는 가까웠어요. 오빠는 ‘나는 손 한 번 안 잡았다.’, ‘입에서 말도 잘 안 나온다.’고 했어요. 그럴 때 오빠 얼굴은 조금 붉어졌던 것 같아요.



   김수영이 노 선생의 어떤 부분에 반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심지어 노 선생은 그 무렵에 이미 기혼이었고, 미도파에서 일하는 것도 생계를 책임지기 위함이었다고 하거든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아마도 한국 전쟁 당시 김수영이 부산의 한 야전 병원에 근무할 때였던 걸로 짐작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북한의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던 김수영은 거제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죠. 거제 수용소는 정말 생지옥과 다름없었다고 하는데, 김수영은 거기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생전엔 입에도 담지 않았을 정도로 끔찍한 경험들을 많이 했었나 봐요. 그런데 천만다행인지 영어 실력이 출중한 덕분에 야전 병원의 통역으로 이내 차출됩니다. 그리고 노 선생은 그 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고요. 어쩌면 서로가 힘든 시기에 만나 말 그대로 생과 사의 고비를 함께 넘겼기에 그만큼 감정이 깊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남아 있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왜인지 연인 관계는 또 아니었던 것처럼도 보여요. 김수영 본인 말로는 애인이었다고는 하는데, 노 선생이 김수영을 대하는 태도에는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서로 손도 한 번 잡아 본 적 없다고 하고, 거기다가 노 선생과 관련된 몇 안 되는 일기에선 그가 약속을 하고서도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김수영이 하루 종일 기다리기만 한 적도 있다고 하죠. 그저 플라토닉한 사랑이었거나, 아니면 감정 기복이 심한 김수영이 일방적으로 짝사랑한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고요. 더군다나 김수영이 노 선생과 미도파에서 재회한 건 석방된 지 얼마 안 된 참이었던데다가, 마침 또 그때는 김현경 여사와 별거 중이었던 시기이기도 해서, 수용소 후유증과 여사에 대한 앙심 등 이래저래 힘든 일이 겹치는 탓에 잠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사랑이라는 게, 저희가 보통 그 사람의 이런저런 점이 좋아서 사랑에 빠졌다고 믿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사실 그런 이유들은 다 사후적인 이유이기도 하죠. 저희가 사랑에 빠질 때면 ‘음, 생각해 보니 나는 그 사람이 이래서 좋아’하고 없는 장점도 마구 만들어 내니깐요. 그러니까 쓸쓸하게도 저희는 어쩌면 애초에 없던 사람 혹은 없는 마음과 덜컥 사랑에 빠지고 마는 것이기도 한 셈입니다. 이렇듯 정직하기엔 감정은 너무나도 쉽고, 따라서 진실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인 것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은 분명 후자에 가까우며, 예컨대, 다시 사랑이 그렇습니다.


   「인생유전(人生流轉)」이 시시한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 영화를 본 이후 오늘까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 그런데 로 선생(나의 애인)까지 이 영화를 보고 좋다고 한다.

“그 영화 좋지요?” 하고 물어보는 그의 말에 나는 두말없이,

“네.”

이것이 사랑이다.

―1955년 1월 11일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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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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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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