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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의 그림자, 혐중이라는 문화정치

  • 작성일 2025-12-01

   K-컬처의 그림자, 혐중이라는 문화정치

   : 2020년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자부심은 어떻게 배타적 혐오가 되었나


허희


   1. 정동적 역설의 면면


   2020년대 한국 사회는 기묘한 정동적 역설 가운데 작동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K-팝‧K-드라마‧K-웹툰‧K-게임 산업까지 확장된, 이른바 K-컬처 복합체가 가시적 성취를 축적하면서 한국의 상징체계를 재편 중이다. 이것은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정동적 보상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화적 자부심은 경제 양극화를 포괄하는 저성장 국면‧불안정 노동‧청년 세대의 좌절과 같은 내부 불안을 상쇄하는 역할로 작용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K-컬처는 문화 산업만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국가 정동을 생산‧관리하는 체제로서, 문화적 자부심은 일종의 집단 감정 자본으로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였다.1) 동시에 한국 사회는 ‘혐중(Sinophobia)’으로 대표되는 조직화된 집단 감정의 분출을 목도하고 있다. 

   이 글은 그것을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동시대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부심이 혐오로 전이되는 정동 형성의 정치적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니까 혐중은 자부심의 어두운 파생물, 정동의 이동과 변조가 빚어낸 적대의 결과라는 논점이다. 여기에서 비판과 혐오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비판은 특정 행위나 정책, 제도적 불투명성이나 권력 작동 방식과 같은 대상을 향한다. 이는 사실 검증과 토론 가능성을 전제한다. 예컨대 중국 정부의 신장 위구르 지역 내 강제 수용 의혹, 홍콩 보안법의 인권 침해 문제,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 등은 어떨까. 이상의 논란은 분석과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국제사회가 공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안이다. 

   반면 혐오는 문제를 특정한 정치·사회 행위에서 찾지 않는다. 증오의 대상을 일반화하고 전체화함으로써 제거의 정동을 발생시킨다. 이때 중국(인)은 특정 행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문명적으로 열등하고 비도덕적이며 반인권적인 타자로 폄하된다. 이 같은 혐오의 메커니즘은 정동의 순환—감정이 사회적으로 이동하며 타자를 구성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작동한다. 더불어 그들을 향한 정서가 실체적 검증 없이 사실처럼 굳어지는 탈지성적 담론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0년대 한국 사회 내 반중—혐중 세력은 합리적 비판과 비합리적 망상의 경계가 붕괴된 상태에서 광적으로 결집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제재가 대증 요법에 그치지 않으려면 면밀한 분석이 요청된다.

   오늘날 혐중은 SNS·커뮤니티·유튜브 생태계의 유통망에서 집단 감정의 양극화를 선동한다. 김치·한복 공정 논란처럼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문화 투쟁은 팩트에 근거한 학술 논쟁이나 국제문화 비교 연구의 영역이 아니라, 무분별한 감정 투쟁의 장으로 격화되었다. K-팝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이른바 사상 검증(중국 시장을 겨냥한 발언을 했는가, 홍콩·대만 문제에 침묵했는가)의 사례는 집단 감시된 순응주의가 디지털 민족주의와 결합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 준다.2) 웹툰과 유튜브 콘텐츠에서 반중 서사가 장르적 흥행을 이루고, 밈과 조롱의 은어가 혐중 감정을 일상 언어 수준으로 통합하는 현상도 그러하다. 이것은 혐오가 대중 감성의 일부로 내포되어 정치적 행동과 여론 형성의 동력으로 작동함을 예증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 어떻게 K-컬처의 문화적 자부심이 혐오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문화정치적 자원이 되었느냐를 제기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K-컬처는 경제적 결핍을 상징적 보상으로 대체하는 자본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정당성이 세계로부터의 인정에 의존하기에, 중국의 한한령 조치나 문화 기원 논쟁과 같은 충돌은 자부심을 순식간에 불안으로 뒤바꾸는 계기가 된다. 이때 혐중은 내부의 불만 에너지를 외부로 전이시키는 정동 경제로 작동하고3), 나아가 ‘민주주의 vs 권위주의’라는 신냉전 이데올로기 프레임과 결합하며 도덕적 명분을 얻는다. 그때 정동이 문화정치의 주요 키워드로 부상한다.

   미국‧일본 등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한 합리적 비판은 가능해야 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혐중은 합리적 비판의 언어를 잠식하고, 감정 정치에 의해 왜곡된 인식 구조를 양산한다. 이 글은 중국 비판과 중국 혐오를 구별할 수 있는 비평적 언어 질서를 재정립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를 통해 K-컬처의 자부심이 어떻게 타자 배제를 정당화하는 음험한 권력이 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문화적 자긍심이 배타적 민족주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인문적 방어선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상의 문제의식은 문화가 단지 산업으로만 취급받을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감정과 정치적 상상력의 장이라는 관점에서, 오늘날 혐중 담론을 문화정치의 분석 대상으로 삼는 이론적 당위를 제공한다.



   2. 인정의 리추얼: 세계의 호명과 문화적 자기의식의 구성


  K-컬처 복합체를 문화적 현상이나 산업적 성공의 관점만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 2020년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하고 봉합하는 정동 관리 체제로 작동하는 까닭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가 내면화되고 그로 인한 반향이 N포 세대‧헬조선‧수저 계급론과 같은 집단적 좌절과 냉소의 언어로 귀결될 때, K-컬처의 괄목할 만한 세계적 성공 서사는 물질적 공백을 심리적으로 대리 보상하는 거의 유일한 상징 자본을 제공한다. K-컬처는 국가가 직접 통제하지 않더라도, 사회 구성원들이 현실의 모순을 감내하도록 유도하는 분산된 이데올로기 장치처럼 기능한다. 핵심은 사회적 불만과 패배감이라는 부정적 정동 에너지를 국가적 자부심과 문화적 승리라는 긍정적 정동으로 능동적으로 전유하는 데 있다. 

   K-컬처는 현실의 경제적 실패를 문화적 자부심이라는 서사로 치환함으로써, 현 체제가 야기하는 모순을 감내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고 관리하는 문화정치적 기제인 셈이다. 상징 자본의 가치를 보증하고 평가하는 메커니즘은 K-컬처 복합체의 독특하면서도 취약한 지점이다. 해당 자본의 가치는 우리 스스로의 내재적 확신이나 미학적 자평에 의해 확정되지 않는다. 오직 세계=서구로 표상되는 권위적 타자의 인정을 통해서만 이를 최종적으로 공인받는다. 자신의 증명을 타자의 시선을 통해 확인받고자 하는 탈식민주의적 징후와도 결부된, ‘인정의 시스템’은 상호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중의 축으로 작동한다. 한 축은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 등의 빌보드 차트 점령이나, 〈오징어 게임〉의 넷플릭스 글로벌 순위처럼 객관적 지표로 환산된 계량적 보편성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장에서의 상품성과 대중성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다른 한 축은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및 아카데미를 석권한 봉준호, 그와 더불어 박찬욱‧홍상수 등이 해외 영화제에서 거둔 업적처럼 권위 있는 시상식의 호명을 통한 질적인 예술성의 확보다. K-컬처는 두 축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상업적이면서도 예술적인 문화적 헤게모니를 달성했다는, 식민지적 근대성의 상처를 치유하는 듯한 환상을 제공한다. 미디어 시스템은 외재적 인정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증폭시키며 ‘자부심의 공동체’를 상상적으로 구축한다. “세계가 열광했다”거나 “외신도 극찬했다”는 식의 인용 보도가 일상의 리추얼(ritual)처럼 반복되며, 해외 반응이라는 콘텐츠 장르가 K-컬처 생태계의 일부로 자리 잡은 양상은 이러한 속내를 반영한다. K-팝 댄스를 따라 추거나 K-드라마에 감탄하는 외국인(주로 서구 백인)의 이미지는 인정의 증거로서 자부심의 산물로 소비된다. 

   이는 중심부(서구)가 주변부(한국)의 문화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시선의 역전을 전시함으로써, 탈식민주의적 욕망을 충족시킨다. 이 과정에서 국민은 K-컬처라는 우량주에 투자한 정동적 주주 공동체로 변모하고, K-컬처의 열매는 개인의 경제적 성취와 무관하게 ‘나의 만족감’으로 등치된다. 주목할 점은 정동적 주주 공동체의 성격이다. 이는 20세기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적 애국심과는 다른 결을 갖는다. 그것은 K-컬처라는 브랜드의 성공 신화에 열광하는 디지털 소비자 민족주의에 가깝다.4) 팬덤의 속성, 또는 소비자 주권의 논리와 유사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K-컬처는 국가의 자산인 동시에 개인의 자부심이므로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는 모든 행위는 응징의 대상이 된다. 가령 상징 자본의 가치를 의심하거나(가령 K-팝의 노동 문제를 지적하거나), 그 성과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려는(가령 K-드라마의 서사적 한계를 지적하는) 내부의 목소리는 어떤가. 

   디지털 소비자 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이것은 미학적 이견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공동체의 집단적 자산의 가치를 폄훼하고, 정동적 보상의 기제를 위협하는 정치적‧도덕적 배신―내부의 적으로 여기는 폐쇄적인 토양이 마련된다. 이러한 디지털 소비자 민족주의의 확산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체계화되고 즉시적인 행동성을 띤다. 이들은 K-컬처 브랜드의 가치와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디지털 자경단처럼 행동한다. 상징 자본의 오염을 막기 위해 K-팝 아이돌의 사소한 발언이나 행동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국익에 반한다고 판단되는 문화적 표현에 대해 ‘좌표 찍기’와 ‘불매 운동’을 벌인다. 당연히 합리적 토론이나 미학적 비평의 공간은 축소된다. 우리 편의 자산을 지키기 위한 순혈주의만 강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의 위협에 대해 훨씬 더 공격적이고 배타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감정적 토대를 예비한다. 그러나 타자의 인정에 의존하면서 관리되는 정동 체제는 운용 방식에 약점을 갖는다. 시스템은 자부심을 생산하는 동시에, 그것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근원적 불안을 항시적으로 재생산한다. K-컬처가 지속적으로 글로벌 스탠더드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유지 강박(언론의 ‘제2의 BTS’, ‘제2의 오징어 게임’에 대한 조급한 탐색)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더 치명적인 것은 K-컬처가 취득한 상징 자본의 원천과 정체성이 외부로부터 부정당하는 경우다. 인정의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때 자부심의 원천(자애로운 타자)이었던 외부 세계가 어느 순간 우리의 문화적 자산을 도용하거나 기원을 침범하는 위협적 대상으로 돌변할 때, 시스템은 존립 위기에서 극심한 정동적 스트레스를 받는다.

   여기에서 르상티망(ressentiment)이 출현한다.5)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고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수동적으로 정립(reactive)할 때, 그것이 틀어지거나 부인당하면 긍정적 자부심은 원한으로 반전된다. 원한의 에너지는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타자, 또는 자신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타자를 향해 폭발적 적대감을 분출하게 된다. K-컬처의 자부심은 세계의 인정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위태로운 균형점 위에 서 있으므로, 이를 위협하는 움직임은 자부심의 주주들에게는 본인의 정동적 자산을 파괴하려는 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인정 불안과 르상티망의 정동은 특정한 배출구를 요구한다. 그럴 때 중국이 마침맞은 적대적 타자로 호명된다. 왜 하필 중국인가? 중국은 K-컬처의 가치를 보증하는 서구가 아니라는 점, 한편으로 과거 식민 지배의 트라우마로 얽힌 일본과도 구별되는 새로운 경쟁자이기에 그러하다. 

   중국은 G2로 부상한 경제적 거대함―두려움의 아우라를 드리우면서, K-컬처가 인정받은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권위주의적이고 비문명적인 존재라는 이미지로 재현된다. K-컬처의 성공이 시장의 흐름을 선도한 창의성에 기반을 둔 자생적 성과로 간주되는 반면, 중국의 문화적 부상은 국가 주도의 인위적 시도이자 ‘짝퉁’으로 폄하된다. 이러한 인식 지형은 중국의 문화적 행위를 정치적 의도를 내포한 침탈로 해석하게 만든다. 거기에 더하여 중국의 한한령이나 문화 공정은 외교적‧역사적 갈등만이 아니라, K-컬처 복합체의 민감한 회로를 건드리는 정동적 트리거로 작동한다. 중국은 K-컬처의 성공을 보증하는 인정의 타자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K-컬처 상징 자본의 핵심 자산(김치, 한복, K-팝 시스템, 역사적 인물 등)을 자국의 것으로 편입하려 시도하는 경쟁자이자 약탈자로 간주된다. 

   이는 공들여 쌓아 올린 상징 자본의 근간이 부정당하고, 인정의 시스템이 모욕당하며, K-컬처의 고유한 원형성이 훼손당했다는 집단적 위기감과 굴욕감을 촉발시킨다. K-컬처의 자부심이라는 정동 관리 체제는 체계적 허술함으로 인해 외부의 인정 불안이 중국이라는 대상으로 촉발될 때마다, 손쉽게 폭발적인 분노와 혐오를 배출할 수 있는 불안정한 동력이 된다. 폭발 직전의 불안정성이야말로, 다음 장에서 검토할 혐오의 정동 구조가 아무런 저항 없이 만연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3. 적대의 자동화: 플랫폼 생태계와 혐오의 양상


   K-컬처 복합체가 생산한 자부심이 인정 불안을 내포한다면, 폭발 직전의 불안정한 에너지가 명시적 실체를 타깃으로 폭발하는 장이 2020년대 한국 사회의 혐중이다. 심각한 점은 전술한 합리적 비판과 비합리적 혐오 사이의 구분이 무화되고, 혐오의 언어가 비판의 언어를 압도하며 사실상 잠식해 버린다는 데 있다. K-컬처의 정동적 주주로 호명된 공동체는 상징 자본을 위협하는 적의 출현 앞에서 둘을 구분할 의지나 능력을 잃는다. 인정 불안은 객관적 거리두기나 복잡한 분석을 요하는 비판을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신속하고 감정적인 방어 기제(혐오)를 요구하기에, 비판은 혐오의 격렬한 정동에서 적을 이롭게 하는 비애국적 행위로까지 격하되며 발화의 공간을 상실한다.

   그러기에 비판과 혐오의 구별은 다시금 강조될 필요가 있다. 비판은 공론장의 이성적 담론 교류를 전제한다. 이는 중국 정부의 특정한 행위‧정책‧제도를 겨냥한다. 비판은 이성적 소통을 통해 대상을 설득 가능한 주체로 상정하고, 사실 검증과 상호 토론의 여지를 열어 둔다. 반면 혐오는 적을 식별하는 정치 행태와 유사하게 작동한다. 이는 중국(인)이라는 집단을 야만으로 본질화한다. 혐오의 목적은 토론을 통한 설득이 아니다. 우리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대상을 향한 제거와 배제의 정동을 발생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혐오의 정동은 문화 공정 논쟁에서도 드러난다. 이것은 합리적 비판의 영역―역사 문헌의 비교 연구, 유네스코 등재 기록의 교차 검증, 문화 전파의 상호 영향 관계 분석 등으로 수렴되지 않았다. K-컬처의 성공이 서구의 인정을 통해 얻어진, 그만큼 흔들리기 쉬운 상징 자본임을 상기할 때 이것은 문화적 소유권 논쟁을 넘어선다. 

   인정 불안에 시달리는 정동적 주주들에게, 자신들의 핵심 상징 자산의 원형성과 정당성이 침탈당한다는 실존적 위협이자 인정 시스템의 붕괴를 목도하는 감정 투쟁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여기서 중국은 토론의 상대가 아니라, K-컬처의 성취를 약화하거나 탈취하려는 불한당이라는 이미지로 고정되면서, 비평적 태도는 격렬한 감정의 파도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감정 투쟁의 과정에서 혐오 메커니즘은 노골적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중국의 유튜버가 김치를 담그는 영상을 올리거나, 중국 관영 매체가 김치를 파오차이의 일종으로 표기한 사건 등은 행위의 상세한 맥락(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인지, 개인의 주장인지, 혹은 지역적 관습의 차이인지)을 따지는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6) 그것은 14억 중국인들이 한국 문화를 조직적으로 강탈하려 한다는 믿음의 증거로 환원될 따름이다. 사실 관계의 확인을 거부하는 편집증적 태도의 전형이다. 

   감정적 낙인은 중국이라는 대상에 달라붙어, 실체적 검증 없이 사실 그 자체가 된다. 혐오의 순환에서 “중국 내 조선족의 문화이기도 하다.”라는 지적은 내부의 적을 옹호하는 매국적 발언으로 규탄받으며 무력화된다. 혐오의 본질주의적 속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른바 오염의 스테레오타입을 동반한다. 혐중 담론에서 중국은 K-컬처가 표상하는 세련됨‧민주적 감수성‧청결함의 정반대 편에 있는 상대, 즉 투박함‧권위주의‧더러움 한마디로 짝퉁 이미지로 재현된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바이러스의 근원지’, ‘비위생적인 식습관’이라는 오명이 더해진 가운데, 오염의 표상은 문화적 차원뿐 아니라 생물학적‧도덕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된다. 

   이것은 디지털 플랫폼 생태계를 통해 유통을 넘어 내재화의 단계로 진입한다. 해당 생태계는 혐오 정동을 증폭시키고 재가공하는 정동적 엔진이자 인프라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합리적 토론이나 다른 견해의 노출을 허용하지 않는다. 보다 더 자극적이고 더 감정적인 콘텐츠(혐오)를 우선 노출함으로써 필터 버블과 에코 체임버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것은 정동적 주주들의 인정 불안을 격화하고 결집시키는 기술적 수단이다. 이른바 ‘관심 경제’ 하에서 비판은 혐오에 비해 ‘좋아요’와 조회 수를 얻기에 비효율적이다. 비판은 느리고 골치 아프며 감정적 보상이 적다. 반면 혐오는 빠르고 단순한 통쾌함을 제공한다. 그러니까 서두에 거론한 담론의 탈지성화는 플랫폼의 기술적 환경 곧 알고리즘적 편향에 의해 필연적으로 가속화된다.

   K-팝 아이돌에게 가해지는 사상 검증의 압력 역시 이와 같은 디지털 엔진과 디지털 자경단이 결합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K-컬처의 최전선에 있는 아이돌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조했는지(중국 시장을 의식한 배신), 혹은 홍콩/대만 문제에 침묵했는지(암묵적 동조) 심문받는다. 비판의 논리(그들의 정치적 발언이 타당한가?)가 아니라, 정동적 주주 공동체가 자신들의 귀중한 자산(아이돌)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동적 감사(audit)다. 감사의 목적은 정치적 올바름의 추구라기보다, 우리 편의 자산이 중국이라는 오염원에 감염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순수성의 강요다. 충성도 테스트에서 비판의 논리는 우리 편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이분법적 행태로 대체된다. 

   나아가 혐오는 웹툰과 유튜브 콘텐츠 시장에서 장르적 흥행 공식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중국을 절대 악으로 설정하고 한국이 이를 응징하는 ‘국뽕’ 웹툰, 속칭 ‘중국의 충격적인 근황을 고발’하거나 ‘중국인의 미개함을 전시’하는 유튜브 콘텐츠는 속 시원한 감정적 공명을 제공하면서 상업적 성공을 보장받는다. 이것은 혐오가 특정 사안에 대한 수동적 반응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를 상품화하여 기획되고 생산‧소비됨을 가리킨다. 정동의 산업화로 불러도 좋을 플랫폼 순환망에서 생산자가 혐오를 공급하고, 소비자가 혐오를 학습하는 피드백 루프가 완성되는 것이다. 상품화된 혐오가 제공하는 ‘사이다’의 정동적 쓰임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초반에 논의한 현실의 물질적 결핍과 경제적 불안에 대한 대리 보상적 서사로 기능한다. K-컬처의 문화적 승리가 거시적 차원의 자부심을 제공했다면, 혐중 콘텐츠의 서사적 승리는 개인이 일상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정동적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중국(혹은 거대 자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개인이 중국을 ‘참교육’하는 서사를 소비함으로써 국뽕과 정의 구현의 쾌감을 동시에 느낀다. 쾌감은 혐오의 정당성을 감정적으로 강화하고, 비판의 필요성을 무감각하게 만들며, 혐오 콘텐츠에 대한 중독적 소비를 유도한다. 상품화된 혐오는 밈과 은어의 형태로 일상 언어의 수준까지 침투하며 혐오의 내재화를 촉진한다. ‘짱깨’, ‘착짱죽짱’(착한 짱깨는 죽은 짱깨)과 같은 조롱과 욕설은 극우 커뮤니티의 은어를 넘어, 일상 대화나 포털 사이트 댓글 창에서 별다른 죄의식 없이 사용되는 유희적 언어로 변질된다. 혐오가 밈이 되는 순간, 그것은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말초적 웃음과 공감을 유발하는 감정적 반사로 기능한다. 혐오 발언은 심각한 폭력이 아니라 가벼운 놀이로 간주되고, 혐오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분위기를 망치는 ‘진지충’으로 놀림거리가 된다. 

   혐오가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때, 내재화의 단계를 넘어 ‘정상성’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혐오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역전 현상이 발생한다. 혐오가 밈이나 놀이가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인식론적 지위를 잃어버렸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중국인은 열등하다.”라는 혐오 발언은 참과 거짓을 판별해야 할 명제가 아니라, 우리를 결속하고 타자를 배제하는 정동적 기호로 작동하는 것이다. 비판이 명제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지적 활동이라면, 밈화된 혐오는 기호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소속의 수행성을 발휘한다. 혐오 밈을 사용하는 것은 “나는 중국이 열등하다고 믿는다.”라는 명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K-컬처의 자부심을 공유하는) 우리 편이다.”라는 소속감을 확인하는 행위다. 

   혐오를 향한 사실적 반박을 하려면 “왜 그런 말을 믿느냐?”가 아니라 “왜 그런 놀이에 동참하느냐?”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재미있으니까.” 혹은 “다들 하니까.”라는 가벼운 답변 앞에서 공허해진다. 이것이야말로 담론이 탈지성화하는 실제 사례이다. 그러니까 2020년대 한국 사회의 혐중은 인정 불안을 자양분으로 삼아, 비판의 언어를 질식시키고 혐오를 일상적 감성 구조로 내재화함으로써 생겨났다. 감정 투쟁은 오염의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고, 디지털 플랫폼의 장에서 아이돌 사상 검증과 같은 일을 벌인다. 또한 혐오는 상품화되어 서사적 통쾌함을 제공하고, 밈과 놀이가 되어 지성적 담론의 자리를 퇴색시켰다. 이처럼 견고하게 구축된 혐오의 정동 구조는 K-컬처의 자부심이 혐오를 정당화하고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문화정치적 동력으로 기능할 준비를 갖춘다.



   4. 전치의 회로: 신냉전 이데올로기적 윤색


   K-컬처의 인정 불안과 내재화된 혐오 구조라는 두 개의 정동적 축을 검토한 이후, 이제 남은 것은 자부심이 혐오를 정당화하는 문화정치적 자원이 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현상이 엮인 틀, 불안이 혐오로 전이되고, 혐오가 자부심을 방어하는 논리로 동원되는 교호 관계에 있음을 밝히는 작업이다. 자부심과 혐오는 원인과 결과라기보다, 서로를 연료로 삼아 증폭하는 정동적 공생에 가까운 것이다. 정동적 전이를 추동하는 첫 번째 동력은 정동적 경제의 원리로서의 전치(displacement)다. K-컬처의 상징적 보상은 저성장‧양극화‧불안정 노동이 야기하는 물질적 결핍의 근원적인 해답이 되지 못한다. K-컬처의 성공 신화가 화려할수록, 개인의 삶에서 체감되는 경제적 패배감의 괴리는 더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국가는 성공하는데 나는 왜 실패하느냐는 질문은 K-컬처가 봉합할 수 없는 균열이다.

   상징적 보상과 경제적 현실 사이의 괴리가 심해질수록, 사회 내부에는 해소되지 못한 부정적 정동의 부채가 쌓인다. K-컬처가 정동적 주주 공동체를 호명했다고 분석했지만, 이들의 정동적 자산과 별개로 실물 자산은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 불안정하고 모순적인 상태에서 축적된 막대한 불만 에너지는 임계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정동적 부채는 실재하지만 추상적인 신자유주의 체제나 국내 정치라는 대상을 향하지 않는다.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복잡하고, 우울하며, 당장의 삶을 개선해 주지 못하는 회의감만 안겨 줄 뿐이다. 또한 K-컬처의 성공 신화가 공정한 경쟁과 창의성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가치의 (예외적) 실현처럼 포장되므로, 체제를 문제 삼기도 어렵다. 배출구를 찾지 못하고 부유하는 내부의 불만 에너지는 손쉬운 외부의 표적을 찾아 헤맨다.

   바로 여기에서 중국이 타깃으로 설정된다. 신자유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을 미워하는 것은 어렵지만, 김치를 훔쳐 가려고 하는 중국을 미워하는 것은 쾌감을 야기한다. 혐중은 내부의 경제 문제를 외부의 문화적 갈등―중국 문제로 전치하고, 계급적 분노를 민족적 혐오로 대체하는 정동적 경제의 수단이다. 정동의 전치는 2020년대 문화정치의 주요 키워드라고 할 만하다. 사회 내부의 수직적인 불만의 에너지를 문화적이고 수평적인 적대의 에너지로 돌림으로써, 현 체제는 그릇된 방향으로 안정화된다. 더 나은 노동 조건이나 복지 확대를 요구해야 할 정치적 에너지가 김치와 한복 수호라는 문화적 방어의 에너지로 외부화하는 것이다.7) 혐중은 국내 권력에는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 않으면서, 공동의 적에 맞선 국민 통합을 유도하는 정치적으로 안전하고 효율적인 정동의 배출구가 된다.

   그러나 정동적 전이만으로는 혐오의 급격한 확산과 그들이 내세우는 알리바이를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혐오는 부끄러운 감정, 인종차별이나 배타적 민족주의라는 도덕적 비난에 허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혐오가 밈이나 놀이가 되어 내재화하였다고 분석했으나, 그것이 공적 담론장에서 정치적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비합리적 혐오를 합리적 분노로, 배타적 민족주의를 보편적 가치의 수호로 호도하는 이데올로기적 윤색을 거쳐야 한다. 그러한 과정이 없다면 혐오는 그저 부끄러움으로 남겠지만, 이데올로기적 윤색을 거친 혐오는 용기 있는 신념이자 정의로운 분노로 떠받들여진다. 이를 실행하는 프레임이 앞서 기술한 신냉전 이데올로기다. 2020년대 미-중 갈등이 전방위적으로 심화되면서 민주주의 vs 권위주의라는 대결 구도가 부상했다. 

   이것은 K-컬처의 자부심과 혐중이 도덕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정치적 명분을 제공한다. K-컬처가 국위 선양하는 문화 상품 정도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보편적 가치를 담지한 문명적 우월성의 증거로 격상되는 까닭이다. 신냉전 프레임에서 중국은 오염의 스테레오타입을 넘어, 자유 진영의 가치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규정된다. K-컬처가 서구의 인정을 통해 자유 진영의 선두 그룹으로 편입되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킴을 상기할 때, 이러한 구도는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다. K-컬처의 자부심은 민주주의의 자부심이 되고, 혐중은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데올로기적 윤색의 특징은 혐오의 정동적 질을 변화시킨다는 데 있다. 이것이 작동하기 전, 혐중은 인종차별이나 편협한 민족주의라는 논변에 대응하지 못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vs 권위주의 이분법과 결합하면서, 혐오는 저급한 감정이 아니라 원칙에 기반한 윤리적 태도로 격상된다. 중국을 혐오하는 것은 자유를 사랑하는 것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윤리적 프레이밍은 혐오를 단단하게 붙들어 매면서, 혐오의 주체들에게 ‘우리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싸운다’라는 정의로운 전쟁의 명분을 부여한다. 탈지성화된 혐오가 이데올로기적 윤색을 거쳐 다시금 숭고한 정치로 (탈)지성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K-컬처에도 영향을 미친다. K-컬처는 자유세계의 개방성을 입증하는 선봉장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짊어진다. 예컨대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성공은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잔혹성을 비판한 내용과는 무관하게 중국에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비판적 콘텐츠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승리로 해석된다. K-컬처의 모든 성과는 이와 같은 문명적 우월성의 증거로 동원되고, K-컬처의 자부심은 반권위주의의 자부심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그렇게 문화 투쟁은 문명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문명 투쟁 서사의 위험한 국내적 귀결은 디지털 자경단의 주장이 사회 전반으로 확장되며 내부의 적을 색출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선악의 이분법에서 중립이나 회색지대는 허용되지 않는다. 합리적 비판을 위해 혐오를 중단하자고, 중국 정부와 중국 인민을 분리하자고 말하는 목소리는 의심의 대상이 된다. 이들은 다른 의견을 가진 동료 시민이 아니라, 권위주의에 굴복한 자발적 노예, 친중 인사라는 레테르를 덧씌운 적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혐중은 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의 정치적 리트머스 시험지로 쓰인다. 중국에 대해 얼마나 비판(혐오)적인가가 그의 사상을 검증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K-팝 아이돌에게 가해졌던 충성 테스트가 사회 전체로 확장되어, 중국 비판이라는 명목하에 혐오 발언이 용인되고 심지어 권장되기까지 한다. 

   이로써 정동적 전이의 마지막 단계가 완성된다. K-컬처의 자부심이 혐오의 일상적 내재화를 촉발하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면, 내부 불만을 전치하는 정동적 경제는 혐오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신냉전 프레임은 혐오에 가속 페달을 달아 준다. 자부심이 혐오를 정당화하는 도덕적 자원이 되고, 혐오는 자부심의 불안을 해소하는 정서적 배출구가 되는 공생 관계가 구축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비판과 혐오의 구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치가 되어 버린다. 혐오의 정동으로 폭주하는 기관차에 합리적 비판이라는 브레이크를 걸려는 시도는 매국적 행위로 지탄받는다. 혐오는 정의를 참칭하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부에서부터 제거한다. 그러므로 K-컬처의 자부심은 혐중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정당화하며 에너지를 공급하는 문화정치적 자원이기에 그러하다. 



   5. 보이지 않는 그림자와의 싸움


   이제 남은 과제는 병리적 순환의 고리를 끊어 내고, K-컬처의 성취가 고립된 민족주의로 퇴행하지 않도록 그것을 질적으로 재구성할 인문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혐오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혐오가 정동적 보상을 제공하는 산업이자 내재화된 감각이 된 지금, 인문적 방어선은 혐오의 동력원을 차단하고, 자부심이 온전히 스스로 설 수 있는 대안적 정동의 토대를 제공하는 다층적이고 실천적인 기획이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네 가지 방안을 제안한다. 첫 번째는 K-컬처의 자부심이 기생하는 인정의 시스템을 탈구축하는 일이다. 이것은 서구 중심의 외부적 승인이 아닌 내재적 문화 주권을 확립하는 지난한 작업의 동의어다. 인정 불안과 르상티망은 혐오를 추동하는바, 타자의 시선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는 자부심은 내파의 위험을 안고 있으므로, 인정이 철회되거나 위협받는 순간 원한과 적개심으로 반전된다. 

   따라서 타자의 목소리를 메아리처럼 중계하는 리추얼을 멈추고, 우리 자신의 언어와 시각으로 K-컬처의 미학적 결실과 사회적 한계를 논의하는 내밀한 비평적 인프라를 복원해야 한다. 이는 K-컬처의 성과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려는 디지털 자경단의 편견을 타파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K-팝 아이돌의 착취적 노동 시스템, K-드라마의 젠더 감수성, K-웹툰의 서사적 획일성 같은 내부의 그림자를 공론장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현재의 정동적 주주 공동체는 이러한 비판을 공동의 자산 가치를 폄훼하는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지만, 자기 성찰의 과정이야말로 K-컬처가 르상티망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하는 중요한 방어 기제다. 스스로의 성취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그 한계를 토론할 수 있는 문화적 자신감, 타자의 인정 없이도 자신의 가치를 논증할 수 있는 내재적 주권이야말로, 외부의 위협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자부심의 진짜 토대가 된다. 

   두 번째는 내재적 주권을 위협하는 정동의 근원, 내부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외부의 문화적 갈등으로 전치되는 정동 경제의 작동을 멈추고 그 흐름을 되돌리는 재정치화의 과제다. K-컬처의 상징적 보상은 저성장‧양극화‧불안정 노동이라는 물질적 결핍과 사회적 좌절을 해결하지 못한다. 되풀이하지만 그렇게 해소되지 못한 막대한 부정적 에너지가 혐중이라는 편하고 안전하며 쾌감을 주는 배출구로 전치되는 것이다. 정동적 주주들의 실물 자산은 모래성 같기에, 상징 자산에 대한 집착과 그것을 위협하는 대상에 대한 혐오는 더 격렬해진다. 그러므로 K-컬처의 상징적 보상에 안주하는 대신, 그 기만성을 폭로하고 부정적 정동 에너지가 현실의 신자유주의 체제와 국내 정치라는 본래의 대상을 향하도록 재정치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혐중 콘텐츠가 당신의 주거 문제를 해결해 주는가?”, “중국인을 혐오하는 것이 당신의 고용 불안을 해소하는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는 일을 포함한다. 

   세 번째는 정의로운 분노의 가면을 혐오 위에 씌워 K-컬처의 자부심을 문명적 우월성으로 미화한 민주주의 vs 권위주의의 프레임을 해체하고, 복합적 세계시민성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행위, 소수민족 인권 탄압, 팽창주의적 정책에 대한 합리적 비판의 언어는 포기하지 않되, 그 비판을 위해 14억 중국 인민을 야만과 오염의 타자로 환원하는 비합리적 혐오와 결별하는 태도와 결부된다. 중국(인)을 단일한 적대적 실체로 상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 복잡한 욕망, 그리고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일상의 스펙트럼을 인식하려는 노력 말이다. K-컬처의 자부심이 민주주의적 가치와 연결되기를 바란다면, 타자를 배제하는 문명 투쟁의 선봉에 서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우리 내부의 배타성과 싸우고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윤리적 태도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자부심은 외부의 적을 규정함으로써가 아니라, 내부의 다양성을 옹호함으로써 성취된다.

   네 번째로 이상의 제언은 디지털 플랫폼 환경에 맞춘 합당한 실천, 정동적 리터러시 교육을 통해 교차하고 지지되어야 한다. 앞선 세 가지의 인문적 방어선이 담론적‧정치적‧윤리적 차원의 과제라면, 이것은 혐오가 유통되고 내재화되는 기술적 인프라에 개입하는 실천적 과제의 성격을 띤다. 플랫폼 알고리즘은 혐오를 상품화하고, 관심 경제는 합리적 비판보다 자극적 혐오에 더 큰 보상을 제공하며 담론의 탈지성화를 가속화한다. 이 같은 환경에서 우리는 나의 분노가 과연 스스로의 고유한 감정인가, 혹은 알고리즘에 의해 기획된 감정인가를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혐오 콘텐츠가 주는 사이다의 이면에 어떤 정치적 의도와 상업적 이익이 숨어 있는지 해독하는 능력, 감정적 반사 대신 성찰적 거리를 두는 습관, 재미와 놀이의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적 밈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교육과 훈련이 요구되는 것이다.

   K-컬처의 자부심이 혐오를 먹고 자라는 음험한 괴물이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과 사회적 성찰을 이끄는 성숙한 동력이 되기 위한 인문적 방어선의 층위가 이처럼 다양하게 얽힌다. 자기 성찰(내재적 주권), 정치적 각성(정동의 재전치), 윤리적 결단(복합적 비판), 미디어 해독력(정동 리터러시)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전제가 되면서 유기적으로 연동하는 것이다. 정동 리터러시라는 실천적 도구 없이 알고리즘에 잠식된 감정을 성찰할 수 없고, 자기 성찰이라는 주체적 기반 없이는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는 정치적 각성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또한 각성이 혐오의 길로 다시 접어들지 않기 위해서는 윤리적 결단이라는 확고한 방향 설정이 필수적이다. 네 겹의 방어선은 혐오가 파고드는 정동의 약한 지점들을 지키면서 재건하는 상호보완적 설계도다.

   적을 설정해야만 유지되는 자부심이란 얼마나 허약하고 하찮은가. 타자의 부정으로만 지속되는 혐오의 운동성은 K-컬처의 의의를 모독하는 행위다. 진정한 자부심은 스스로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함으로써 획득되는 질적으로 다른 감정이다. 그러는 한에서 K-컬처가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유의미한 문화사적 성취로 기록되고자 한다면, 이후의 여정은 내부의 그림자와의 싸움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그림자는 혐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안에 내재한 배타성, 말초적 쾌감에 중독된 감정, 복잡한 현실을 이분법으로 재단하려는 지적 나태함 등을 포괄한다. 김수영이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8)고 썼을 때,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호출된 투쟁의 한계—자기를 성찰하지 않는 싸움의 공허함을 겨냥한 역설이었다. 이 시구를 오늘의 K-컬처 정동에 비추어 보면, ‘그림자 없음’이란 싸울 대상만을 외부에 설정한 채 자기 내부의 배타성과 편견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의 역설을 되돌려 이해해야 한다. 화려한 빛이 드리운 편협하고 낡은 자신의 그림자와 싸움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K-컬처가 혐오의 자양분이 되기를 거부하고 문화라는 이름에 값하는 성숙한 동력으로 거듭나기 위한, 지금 여기의 인문적 과제다.



1) 정동은 통상적인 감정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주체 내부에서 완결된 심리 상태라기보다 신체·감각·환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비언어적 에너지의 흐름을 가리킨다. “정동은 사이의 한가운데서, 즉 행위하는 능력과 행위를 받는 능력의 한가운데서 발생한다. (···) 정동은 몸과 몸(인간, 비안간, 부분-신체, 그리고 다른 것들)을 지나는 강도들에서 발견되며, 또 신체와 세계 들 주위나 사이를 순환하거나 때로 그것들에 달라붙어 있는 울림에서 별견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강도와 울림 들 사이의 이행과 변이형 들 그 자체에서 발견된다.” (멜리사 그레그‧그레고리 J. 시그워스, 최성희‧김지영‧박혜정 옮김, 『정동 이론』, 갈무리, 2015, 14쪽.) 이 글에서는 이상의 이론적 맥락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감정 구조가 K-컬처의 자부심·혐중·정치적 적대와 같은 집단 감정 형태로 조직되고 이동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분석적 범주로 정동을 의미화한다.

2) 「큰절 안 한 걸그룹 中 멤버 갑론을박··· 韓비하 논란도」, 뉴시스, 2022년 1월 10일. ; 「“하나의 중국, 동의 못 하면 나가라”··· 女아이돌 발언 논란」, 한국경제, 2025년 7월 13일.

3) 정동 경제는 정동이 시장의 화폐처럼 사회적 장 안에서 축적·전환·배분되는 방식을 가리킨다. 특정 집단이 경험하는 불안·좌절·박탈 같은 부정적 정동이 해소되지 못할 때, 그것이 본래의 원인을 향하지 못하고 다른 대상으로 이동·전치되는 과정을 초점화한다. 그럴 때 정동은 사회적 욕망·미디어 환경·국가 담론 등에 의해 특정 방향으로 조직되고 배치되는 교환 가치를 지닌다. 이 글에서 언급하는 정동 경제는 이와 같은 교환·배분의 과정—K-컬처에서 얻는 자부심이 외부 인정에 의존함으로써 쉽게 불안으로 전환되고, 그 불안이 다시 혐중으로 배출되며, 혐오가 또다시 자부심을 방어하는 논리로 회수되는 순환 구조를 포착하기 위한 용어이다.

4) 팬덤이 집단 정체성의 정당화를 위해 민족주의 정서를 전략적으로 호출한다는 점은 기존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이혜수, 「한국 팬덤의 민족주의 정체성 전략에 관한 연구」, 『사회사상과 문화』 22집, 동양사회사상학회, 2019, 246~247쪽 참조.) 해당 연구가 팬덤 내부에서 작동하는 민족주의적 정서와 상징 자원의 동원을 분석했다면, 이 글은 이러한 메커니즘이 디지털 플랫폼의 소비·여론 환경과 결합할 때의 특징에 주목한다. 팬덤의 민족주의적 정서가 문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플랫폼 기반의 소비자 행동·브랜드 방어·정동적 주주 의식과 맞물려 작동하는 새로운 민족주의의 양상으로 재구조화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려는 것이다.

5)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옮김, 「제1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 『도덕의 계보학』, 연암서가, 2020, 27~76쪽 참조.

6) 「파오차이가 마치 김치인 것처럼··· 중국의 ‘김치 깎아내리기’」, 동아일보, 2020년 11월 29일.

7) 미시마 유키오는 외부의 침식으로부터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문화를 국가적·민족적 정체성의 최후 방어선으로 위치시킨 바 있다. (미시마 유키오, 남상욱 옮김, 『미시마 유키오의 문화방위론』, 자음과모음, 2013.) 이것은 이 글에서 다루는 2020년대 한국의 김치·한복 수호 담론과 동일한 맥락은 아니지만, 문화적 상징이 정치적·정동적 투쟁의 매개로 배치되는 경향을 보여 주는 역사적 사례로서 참조할 만하다.

8) 김수영, 「하······ 그림자가 없다」, 『김수영 전집 1: 시』, 민음사, 2018,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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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1-01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3] 오늘의 한국문학과 문학 시장에 대하여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3 -오늘의 한국문학과 문학 시장에 대하여 류수연 1. 노벨문학상의 낙수효과? 2020년대 미디어믹스의 원천IP로 주목받는 것은 웹소설이나 웹툰 같은 웹 콘텐츠이다. 다양한 디지털 기기가 일상화되면서 그러한 매체 안에서 즐길 수 있는 더 많은 콘텐츠가 요구되었고, 웹상의 스토리텔링은 매우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그 결과 현재 웹 스토리텔링은 그 자체로 콘텐츠인 동시에 또 다른 콘텐츠의 원천IP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활자로 된 스토리텔링이 영상미디어로 2차 가공되는 일은 비단 최근에 나타난 현상만은 아니다. OSMU나 미디어믹스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사실 이러한 방식의 콘텐츠 확장은 일상적으로 있었다. 무엇보다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은 가장 오랫동안 원천IP로 각광받았던 이야기 그 자체였다. 하나의 소설이 극이 되고, 또 다른 소설의 영감이 되고 패러디 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과정이다. 트랜스미디어 환경이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을 더욱 가속화하고 확대하였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이야기의 구전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신체라는 미디어를 활용한 확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 과정에서 발생된 2차 가공은 오늘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로 인해 편집과 각색이 더 시시각각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스토리텔링의 확장은 애초에 이야기의 고유 속성이라 할 만큼 아주 익숙한 방식에 가깝다. 문자에서 이미지와 극으로, 다시 영상과 미디어를 넘나드는 스토리텔링의 확장은, 그 무엇보다 문학이 가장 잘 해 왔던 일이니 말이다. 문학의 영상화는 영화산업의 초창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의 미디어믹스에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은 1960년대 문예영화일 것이다. 영화산업이 부흥하면서, 당시 많은 문학작품이 영화의 원천 텍스트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부터는 TV 단막극을 통해 많은 문학 텍스트가 영상화되었고, 이러한 시도는 2020년대 현재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금희 원작의 (2018), 장류진 원작의 (2020)과 (2025) 등의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트랜스미디어 환경 속에서 예측되는 문학의 미래는 암울한 전망으로 가득하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문학의 위기론은 40년 가까이 논의되는 동안 이제는 잊을 만하면 꺼내는 해묵은 불편함이 되었지만, 웹 콘텐츠의 등장 이후에는 위기론 자체도 언급되지 않을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미디어 환경이 ‘읽기’의 위기를 기정사실화했다면, 생성형 AI의 등장 이후에는 ‘쓰기’의 위기까지 대두되는 실정이다. 생성형 AI가 문해력까지 대체하는 마당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돌이켜 보면 근현대문학사의 여러 굴절마다 제기되었던 문학의 위기론은, 어쩌면 그래도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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