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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고도 불친절한 미래에 대한 단상

  • 작성일 2025-12-01

   낯익고도 불친절한 미래에 대한 단상


임지훈


   세상의 속도를 점점 감당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 간다. 변화하는 속도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이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낀다. 스팅의 노래 〈Englishman in New York〉의 화자는 자신을 “legal alien”, 합법적인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신사다움’이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여전히 “Manners maketh man”이라 말하고,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당신답게, 누가 뭐라고 하든’이라 말하는 사람. 그 노래 속에서, 이 합법적인 이방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Modesty, propriety

   Can lead to notoriety

   You could end up as the only one

   Gentleness, sobriety

   are rare in this society

   at night a candle’s brighter than the sun


   - Sting, 〈Englishman in New York〉


   겸손과 예의범절이 악평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흔치 않은 감정이 된 세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이미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건 단지 착각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어쩌면 그 또한 자신의 착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미치광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건 아마 이중의 의미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가 정말 착각에 빠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겠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또한 미친 것이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겸손과 예의범절이 더 큰 이익을 위한 술책이 되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그것들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런 세상 속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들고요, 당신은 당신답게 살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 광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종종 이방인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그와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와 달리 우리는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뿐더러, 현실 속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와 그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처럼 보이는데, 기술적 환경의 변화에 휩쓸려 떠밀리듯 살아가는 우리와 달리, 그는 마치 좌표계의 원점에 선 것처럼 세계를 바라보며, 그 변화의 속도를 측정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에 문학을 읽고 공부하는 나로서는 그 광인과도 같은 속성마저 하나의 롤 모델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나는, ‘자기 자신’이라는 절대적 위치로부터 세계를 바라보는 〈Englishman in New York〉과는 달리 단지 표류하고 있을 따름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속도 속에서, 발 닿지 않는 물에 빠진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 ‘아니요, 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지요. 심지어는, 가까운 미래조차도 나는 예견할 수 있어요’ 따위의 표정을 지으면서.


   속도. 좌표 공간에서 어떤 사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본래의 위치로부터 변화한 값을 나타내는 방법. 이때 속도라는 개념은 물체의 시간 대비 이동 거리를 의미하는 ‘빠르기’ 뿐만 아니라 ‘방향’ 또한 포함한다. 이와 같은 ‘속도’의 정의는 고전적 역학 개념에 기초한 것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시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초기 조건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사물의 상태를 예측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사물을 관측함으로써 단순히 그것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 일뿐만 아니라 대상이 현재 위치에 도달하기까지의 과거와 이후에 일어나게 될 미래의 사건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 

   관측이라는 행위가 대상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개념은 궁극적으로 인간 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방대했던 세계를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더 이상 세계는 감탄과 경의, 숭고의 존재가 아니다. 이제 세계는 인간에 의해 측정 가능하며, 조작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물에 불과하다. 신의 진노로나 여겨졌던 기상이나 천체 현상은 관측 행위를 통해 마땅한 인과관계의 산물로 환원되었고, 그렇게 세계는 불가사의한 지고의 존재가 다스리는 신화적 세계로부터 인간에 의해 파악 가능한 인과의 세계로 하강하게 되었다. 인간은 고전 역학을 통해 현재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자신들이 만든 신화적 세계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과학의 발달은 이 원점으로부터의 판단, 인간이 세계를 측정·계산하고, 예측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질서를 모두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발전했다. 이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 신의 자비를 구하는, 세계의 주변적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제어할 수 있는 특권적 위치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인간의 권능이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내면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흔히 말하는 ‘근대인의 등장’이 그것인데, 쉽게 말하자면 이는 세계와 그 안에 위치한 사물들이 좌표화될 수 있다는 믿음이 인간의 사고방식과 일상적 감각의 깊은 층위에까지 스며든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의 상식을 통해 설명하자면 이는 세계를 ‘측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사물은 ‘이해 가능한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사회는 ‘예측 가능한 구조의 결과물’로, 시간은 ‘균질하고 직선적인 흐름’으로, 미래는 ‘계산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결괏값’으로 여기는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의식 구조를 즉각적으로 내면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그와 같은 새로운 의식 구조와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관습적 의식 구조의 충돌을 경험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을 경험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이는 근대적 의식 구조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는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이상의 「날개」에 등장하는 ‘나’, 혹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구보’와 같은 존재들 말이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화자는 ‘나는 그저 누워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 말은 직업여성인 아내가 집에서 손님을 받는 사이 뒷방에 누워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설령 그가 다른 근대인들처럼 바삐 살아갔다 할지언정 그가 느꼈을 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나’와 ‘세계’ 사이에 속도로 인한 격차가 발생하였고, 그 격차가 걷잡을 수 없는 가속도로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화자에게 도시의 속도란,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물들의 움직임이란 흡사 끊임없이 명멸하는 듯 느껴지는 감당하기 힘든 혼란이 아니었을까.

   그런 그가 종국에서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 “날개야 돋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소망한 것이 단지 현실로부터의 탈주였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조금 애매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소설 내내 자신의 시점으로 세계를 관찰했던 건 단지 그와 같은 혼란을 느끼고 그 속에서 절망을 견인하기 위함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와 같은 해석은 소설가 ‘이상’과 「날개」의 화자를 혼동하면서 발생하는 추론일 테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가 “날개야 돋아라”라고 말한 까닭이 일종의 부감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배척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외부적 자리를 마련하는 것 말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다시금 화자가 느끼는 혼란의 양상으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단지 ‘나’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속도의 격차로 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좌표계에 위치한 사물들의 관측자로서 원점에 위치하고 있지 못하다는 자각, 혹은 자신의 좌표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근대적 의미에서의 가치관이 내면화되는 시기에 모든 이가 그것을 동시적으로 이룬 것은 아니며, 그렇기에 모든 인간이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위치시키지는 못했다는 이야기인데, 이와 같은 혼란은 소설가 구보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상대적 속도와 주체의 좌표로 인한 혼란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소설 내내 그가 ‘천천히’ 걸었다는 문장이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와 같은 서술은 도시를 관찰하기 위한 소설가 구보의 이동 속도를 묘사하는 것일 테지만 소설에서 사용되는 문체의 속도감이나 명멸하듯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물들의 모습을 보자면 이는 세계 속에 놓인 ‘나’라는 주체의 상대적 속도를 감각하는 묘사라고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구보는 거듭 움직이고 있음에도 그 속도는 경성의 속도보다 현저히 느린 것이어서, 그의 시선을 따르는 소설의 서술은 사물들의 움직임을 완전하게 포착하는 것에 거듭 실패한다. 그렇기에 구보 또한 속도의 격차 속에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피신하듯 다방으로 숨어들고는 어딘가로 떠날 여행비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한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때의 욕망에는 단지 탈주에 대한 욕망뿐만 아니라 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해 가는 세계를 외부의 위치에서 조망하고 싶다는 관측자의 욕망 또한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근대로의 전환기 소설 속 주체들이 느끼는 혼란이란 크게 두 가지 원인으로부터 발원한다. 첫째로 ‘나’와 내가 위치한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속도의 격차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주체 모두 현상을 관찰하기 위한 외부적 위치를 소망한다는 사실은 둘째, 이들이 자기 자신의 주체적 위치가 원점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지시하는 듯 보인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은 역설인데, 앞서 근대적 주체의 특징이 세계와 그 안에 위치한 사물들이 좌표화될 수 있다는 믿음이 인간의 사고방식과 일상적 감각의 깊은 층위에까지 스며든 상태라고 했던 것과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우회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존재하는데, 그것은 이와 같은 주체의 양상이 일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예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바로 그와 같은 혼란이 진정한 근대인의 초상이라고. 근대인이란, 변화된 세계의 가속도에 적응한 새로운 인간의 내면 의식이 아니라 그와 같은 혼란을 감추고 살아가는 존재들의 명칭이라고 말이다. 예컨대 우리가 예외화하고자 하는 바로 그 혼란이야말로 근대인을 특징짓는 중핵인 것이며, 그 밖의 요소들은 기술적 편의로 인해 생겨난 부차적인 인습의 산물일 따름에 불과하다. 물론 이와 같은 정의에는 큰 문제는 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이것이 사실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인의 특징까지도 포괄한다는 점에 있다. 즉, 이러한 정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 생기는 문제란 ‘근대인’에 대한 오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근대인’이라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에 문제적인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자면 우리는 과연 저 소설 속 근대적 주체들과 무엇이 얼마만큼 다를까? 가령, 근대 도시의 속도로부터 격차를 느끼고 자신의 위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자각한 소설 속 주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현대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부터 무한한 격차를 느끼며 AI라는 타자로부터 인간의 지위가 영원토록 절대적인 것일 수는 없음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예컨대 기술적 환경의 양상이 조금 다를 뿐, 우리 또한 그들이 느끼는 현기증과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으며 그러한 혼란을 최대한 길들이기 위해 무수히 많은 정보와 속도의 흐름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소간 추측에 기반한 것일 테지만, 나는 그러한 증상이 가장 단도직입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소설, 그 가운데서도 SF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의 기술 발전 속도가 너무나 빨라진 나머지 서사적 상상력을 압도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인데, 그 생각을 가장 처음 느낀 건 코로나가 끝난 직후에 나타난 전염병과 관련된 서사들을 읽으면서다. 이 시기 발표된 다수의 전염병 관련 작품들은 분명 시의적이며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지만 특히 전염병을 소재로 하는 SF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감상이란 대개의 경우 서사적 상상력이 현실보다 풍부한 세계를 그려 내는 것에는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이야기는 단지 특정한 작가의 직업적 게으름을 비난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다.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2020년을 기점으로 발표된 재난 소설들, 전염병을 소재로 하는 SF 소설들의 갈래에서는 코로나가 가시화시킨 현실의 문제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통해 짚어 낸 의미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측면으로, 인간은 이제 재난을 상상하는 속도보다 재난이 도착하는 속도가 더 빠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지닌 서사적 상상력에서 나타나는 지체 현상이란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근원적 격차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가속되고 있음을, 이와 같은 격차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AI를 소재로 하는 작품들에서도 서사적 상상력의 지체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 유형의 작품들에서 AI가 수행하는 역할을 분류하자면 크게 4가지 종류가 반복적으로 관찰된다. 첫째, 대립형 서사. 매트릭스를 비롯한 고전적 SF의 전통적 플롯으로, AI가 인간의 통제와 예측을 벗어나 위협이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와 같은 서사에서 AI는 초기 인류의 편의를 증진해 주는 도구적 역할에 머물렀으나 자신들의 처우에 불만을 갖고 인간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한 음모를 획책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사에서 나타나는 AI는 사실 AI라기보다는 주류 사회에 억압당한 계층적, 민족적 분노가 기술적 계기를 통해 분출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예컨대 냉전 시기 서방의 통제 바깥에 위치하던 약소국가가 핵무장 기술을 갖춤으로써 발생하는 주류 사회의 불안과 분노, 혹은 하층 노동자 계층이 자신들의 잠재적 힘을 각성하고 상위 계층을 공격하는 상상이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도구적 서사. 여기에서 AI는 주인공의 협력자로서 철저히 도구적 위치에 존재하며 서사의 빈틈을 메워 주는 구멍 마개의 역할을 수행한다. 즉, 주동 인물의 개인적 목표의 완수를 위해 요구되는 서사적 결함을 기술적 가정을 통해 보완한다. 예컨대 단기간에 이동 불가능한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 주거나 주인공이 자기 상황에 대한 몰입으로 인해 해결하지 못하는 단순한 현상을 제3 자의 위치에서 해결해 주거나 혹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타 종족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 주거나 등등. 이와 같은 서사에서 AI는 흡사 기사도 소설의 마술사와 같은 위치로써 주동 인물의 목표 완수를 위해 필요한 도구를 마법적 지혜를 통해 갈음해 주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동시에 클리셰적이라 할 수 있다. 단지 마술과 마법의 자리를 기술적 상상이 대체했을 뿐,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오히려 과학적 상상력을 마술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SF 서사라고 말하기 어려운 단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협력형 서사. 여기에서 기계는 단순히 인간과 대립하거나 혹은 도구적 존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의지와 목적을 지닌 인격적 존재로 나타난다. 이때 AI의 목적은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 등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궤를 함께할 수 있는 종류의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인 경우가 많다. 주인공은 대개의 경우 삶의 의지를 상실한 상태에서 출발하여 AI와 함께 철학적 성찰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고 인격적 의미에서의 성장을 경험한다. 혹은 종 전체의 성장을 목표한다는 점에서 공진화적 관계를 수립하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와 같은 유형은 성장 소설의 특징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공진화라는 모티브로 말미암아 협력과 공존이라는 서사적 목표가 뚜렷한 동시에 새로운 문화/사회적 구조를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서사는 서로 다른 가치관과 문화를 지닌 타민족과의 우정을 통해 공통의 목표를 완수하는 서구 중심의 모험물 서사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오랜 소설적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넷째, 초월적 존재의 탄생. 이와 같은 유형은 ChatGPT를 비롯한 약인공지능의 발전으로부터 강인공지능의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때부터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유형에서는 앞선 세 가지 유형의 플롯이 부분적으로 반복되는 특징을 보이는데,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대립형 서사에서처럼 인간과 초인격적 AI는 서로 적대감을 갖지만 이는 한정된 자원의 문제로 인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이해 능력을 초과한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으로부터 발원한다. 또한 도구형 서사에서처럼 이 존재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며 때때로 그렇게 행동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에 따른 재배치의 일환인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협력형 서사에서와 같이 이 초월적 존재는 인간과 부분적인 교류를 수행하지만 이는 상호 이해의 결과가 아닌 일방적이며 일시적인 동조 현상에 불과하다.


   소설뿐 아니라 영상 서사에서도 이와 같은 초월적 존재를 다루는 경우가 대폭 증가하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그 기술적 가능성이 현실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서사 유형에서 우리가 투영하고 있는 공포와 불안이란 그 자체로 곧 다가오게 될 미래에 대한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각인가 라고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서사적 공포와 불안이란 오랜 시간 동안 근대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감정이 기술적 계기를 통해 가시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인간 주체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속도의 격차와 인간 주체가 더는 관찰자로 세계의 원점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서사적 상상력의 지체 현상이란 고전 역학으로부터 발원한 인간의 지위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예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인공지능의 가능성이란 그와 같은 지위가 고전 역학의 세계관이 불러일으킨 착시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가시화시킨 계기에 불과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강인공지능의 기술적 가능성은 인간의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발생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구체적 계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여기에는 하나의 불만이 남는데,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강인공지능의 형상이 지나치게 종교적인 모티프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기술적 특이점이 도래하여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초인공지능이 나타날 것이라는 관측은 종말론적 서사에서 나타나는 도래하는 신에 대한 서사와 너무나도 유사하지 않은가? 그때 신이 인간의 죄를 심판하리라는 공포와 마찬가지로 강인공지능이 인간을 불필요한 존재로 판단하리라는 예측 역시 동일한 종교적 모티프를 공유하고 있지는 않은가? 강인공지능에 의해 인간 사회가 완벽한 예측을 기반으로 평화로운 유토피아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예측은 또 어떠한가? 결국 우리가 상상하는 강인공지능의 형상이란 신의 지상 강림이라는 오래된 종교적 서사의 또 다른 판본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물론 여기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존재를 상상한다는 인간 능력의 곤궁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상상력이란 실체로서의 현실을 분해하고 이를 재조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에, 강인공지능에 대한 상상 역시 현실의 조각을 일정 이상 함유하고 있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곤궁이 결여가 아닌 진실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예컨대, 인간 문명으로부터 탄생한 강인공지능이 인간 역사가 지시해 온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상상을 반복하며 그것을 가시화시키게 된다면 말이다. 여기에는 충분한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기술적 가능성이 나날이 증가함에 따라 우리는 약인공지능의 발전으로부터 도래할 강인공지능의 모습을 부분적인 형태로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최근의 약인공지능을 활용해 특정한 인물의 인격을 학습시키는 분야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강인공지능이 인간적 인격을 소유할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진단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문학의 분야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죽은 작가의 작품을 반복 학습 시킨 AI를 통해 가상의 인격을 구현해 내는 프로젝트가 그러하다. 우리는 이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그 의미를 해석함에 있어 가상으로 구현된 AI 셰익스피어를 하나의 참조점으로 삼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작품에 대한 학습을 통해 역으로 구현된 인격적 AI는 작품의 의도에서부터 특정한 구문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답변을 제시할 수 있으며, 원한다면 사용자에 맞춘 1인용의 작품을 제작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와 같은 일을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카프카나 도스토옙스키, 카뮈 혹은 윤동주나 기형도, 염상섭과 이상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은 문인인 것이 아니라, 기술적 계기를 통해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적 상태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예시는 우리가 마주하게 될 강인공지능에 대해 또 다른 비관론 또한 제기하는데, 그것은 인격적 존재로서의 초월적인 지능을 가진 강인공지능이 무로부터 자신의 생성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예컨대, 현재의 약인공지능이 인터넷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간에 의해 형성된 정보를 기반으로 학습을 수행하여 사용자의 의도에 따른 판단과 추론을 수행하듯이 인격적 존재로서의 강인공지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격’의 개념과 그 안에 위치할 실체적 진술을 학습하기 위한 자료가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우리 자신에 대한 정보가 과연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자신을 재현하고 있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 내용만을 서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인간 존재가 그 자체로 우리의 생각과 달리 선하지 않은 존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에서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렇게 출현하게 될 인공지능의 형상이 과연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새로운 존재가 될 가능성이 생각만큼 높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공동체에서 사회적 합리성은 이미 도구적 합리성과 분간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인간 존재의 내면 의식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경제적 합리성을 원천으로 작동하며,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 역시 논리적 필연성이 아닌 확률적 정합성에 기초한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체, 혹은 원점의 지위를 상실하였으며, 원점의 위치에는 화폐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할 것이다. 즉,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유의 주체가 아니었으며, 우리의 사유는 경제적 합리성을 원천으로 하는 도구적 이성에 의해 주변화되어 있었다. 최근 LLM 모델의 등장에 의해 인간 사유의 주변화를 문제 삼는 것은, 이와 같은 경향이 기술적 계기를 통해 완결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보를 기반으로 형성될 강인공지능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외려, 그와 같은 존재가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나는 형상을 취하리라는 것이 지나친 낙관론인 것은 아닐까?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자면, 과연 우리는 100년 전 근대인의 사유 방식으로부터 얼마나 나아간 것일까. 그때의 인간 존재가 세계가 변화하는 속도로부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던 것과 동일하게, 우리 또한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적 환경으로부터 동일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종교가 차지하는 영역을 과학으로 완전히 대체하였다고 생각했지만, 과학의 발전 끝에 다시금 종교적 서사가 반복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서사적 상상력의 지체 현상은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은, 속도의 격차로 말미암은 것일 뿐 아니라 인간 상상력의 토대로서의 현실이 근본적인 의미에서 별다른 변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사회적 합리성이 도구성 이성에 완전히 복속된 사회에서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인 셈이다.

   물론 이와 같은 상상은 단지 추론에 불과할 따름이며 지나친 비관론자의 입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적 합리성이 여전히 도구적 이성에 복속된 상태이며, AI의 발전과 강인공지능의 등장이 그와 같은 상황을 기술적 계기를 통해 완성시키는 순간에 불과하리라는 전망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술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현대 사회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현대 사회는 수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을 모두 환상 혹은 시어(Poetry)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한다. 도구적 이성의 사회를 비판 이성의 입장에서 사유하고 있는 이 문장에서 우리는 어쩌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문학은, 예술은, 도구적 이성을 통해 환원 불가능한 잉여적 요소들이 기거할 수 있는 존재론적 장소라고. 물론 상황은 비관적이다. 기술과 인간의 격차는 갈수록 심해질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거듭 심화된 현기증에 휩싸일 것이므로. 그럼에도 우리는 되어야만 할 것이다. 〈Englishman in New York〉처럼,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예술의 가치를 주장하는 합법적 이방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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