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無名)의 상품, 번역의 연쇄
- 작성일 202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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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名)의 상품, 번역의 연쇄
: 네트워크 시대의 시와 저자성
이성주
1. 저자성의 균열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 이후, 시 비평의 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개념 가운데 하나는 저자성(authorship)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시 쓰기에 인공지능을 포함한 다중 행위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저자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시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입장 역시 강하게 존재한다. 두 입장 사이에는 유보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들이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고, 그에 따라 저자-시-독자의 관계나 독창성(고유성)을 둘러싼 논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물론 이 글에서 관련 논의를 모두 정리하거나 판별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성 비판이 오늘날 어떤 형식과 논리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최근의 평문 가운데 하나인 박상수의 「영원한 베타 테스트로서의 여름」(『문학동네』, 2025 가을호)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비평은 2010년대 이후 한국 시에 만연해진 ‘납작함’의 감각을 핵심 문제로 진단하며, 저자성 해체 담론이 간과하기 쉬운 지점을 예리하게 짚어 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참조가 된다.
박상수가 말하는 ‘납작함’이란 최근 시에 나타나는 시적 주체의 무력함, 대상에 대한 비관여성(非關與性), 타자와의 상호작용 약화, 그리고 ‘메타적 인식의 과정’만이 부각되는 경향 등을 아울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박상수는 최다영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시의 생산 주체를 비인간 행위자와 기술 장치까지 포함하는 연합적 모델로 긍정하는 최다영의 논리가 결과적으로는 주체의 저항과 행위 가능성 혹은 내면의 복잡한 역학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본 글의 맥락에 맞춰 간단하게 말하자면, ‘저자성 해체’를 동시대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승인할 때 타자성이나 윤리적 긴장이 소거된 ‘납작함’ 역시 쉽게 수용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최다영의 입장에 서면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우선 박상수의 글이 지닌 문제의식에 많든 적든 공감하지 않기란 어렵지 않을까. 확실히 최근 시에서 ‘타자와의 접촉면’이 얕아지고 있음은 박상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인터넷상에서 실수나 실언 하나로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쉽게 뒤집고 때로 그것을 근거 삼아 혐오를 정당화하는 오늘날의 문화적 현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박상수가 ‘무엇’을 주장하는가에 있다기보다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의 글은 맥락이 다른 다양한 이론과 담론을 빠르게 호출하고 병치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령 한병철과 마크 피셔가 별다른 매개 없이 나란히 놓이고, 현대 신학 담론의 어휘들은 그것이 형성된 맥락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문학 비평의 어휘로 변형・(재)조합되는가 하면 개인의 경험, 대담, 심사평, 인터넷 서점 리뷰까지 참조・인용된다. 서로 다른 계보와 문제의식을 지닌 담론들이 한곳에 모이기 위해서는, 원래 맥락에서 이탈하기 좋게 어느 정도는 ‘납작’해져야 한다. 그리고 이때 비평은 일정 부분 ‘지식(정보) 조합’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는 물론 정보가 과잉되고 빠른 이동이 핵심이 되는 네트워크 환경에서 지식과 문화 생산물이 기호화(데이터화)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박상수의 스타일은 오늘날의 네트워크 환경에 적응한 비평적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세련되게 잘 수행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여기서 문제삼고 싶은 것은 글의 스타일이나 생산성 여부는 아니다. 그보다 그의 글에서 내용과 글쓰기의 형식 사이에 모순(혹은 긴장)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박상수의 글은 포스트모던한 환경에 적응한 시의 ‘깊이 없음’을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을 수행하는 방식은 어느 정도 포스트모던한 글쓰기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개별 비평(가)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만약 박상수의 진단처럼 최근의 시가 ‘납작’해졌다면 그에 못지않게 비평 역시 ‘납작’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문화의 생산・유통・소비 구조가 공유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지식과 문화가 데이터화되어 알고리즘적 환경과 플랫폼적 유통에 노출되어 있고 다중 행위의 개입 속에서 변형・왜곡・이동・조립되는 방식으로 문화가 형성되는 세계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물론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지만, 시에 타자성과 역사적 깊이 등이 담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도 지금의 환경을 완전히 벗어난 외부를 상정하고 논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비판자가 비판 대상의 논리 안에 편입되어 있음은 오늘날 시 창작과 비평이 공유하는 구조적 딜레마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저자성의 해체를 무조건 긍정하거나, 반대로 회복해야 할 가치로 상정하기보다는 저자성의 균열이 발생하는 장(場)과 그 균열이 만들어 내는 시적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최다영이 언급한 ‘연합적 창작 모델’의 윤리적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가 “데이터가 커먼스로서 공유된다는 가정하에”(「망각지 : 채굴 불가」, 『문학동네』, 2024, 가을호, p.131.)제시한 이 모델은, 단순히 인공지능이나 알고리즘에 시(문화) 생산을 맡기자는 것이 아니라, 문화 생산 과정에 이미 개입해 있었으나 ‘인식’되지 못했던 행위자들을 가시화하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상수의 우려대로 그것이 시에서 ‘타자성(치명성)’과 ‘깊이’를 소거하는 방향이 된다면 곤란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둘의 논리는 어느 한쪽을 긍정하면 다른 한쪽이 부정되는 종류의 것인가? 두 논리를 화해시킬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일종의 사례 분석이 되겠지만, 이 글에서는 기존 비평에서 거의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두 시집 하혜희의 『데모』(봄날의 책, 2022)와 문보영의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서점』(문학동네, 2023)을 읽는 것으로 그것을 시도하고자 한다. 두 시집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금의 모순적 환경에 틈을 발생시킨다. 앞질러 이야기하면 하혜희의 경우 모더니즘적 고유성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대체 가능성 사이에서, 문보영의 경우 저자와 독자를 번역자의 자리로 이동시켜 행위 주체를 다층화하는 ‘옮김의 장(場)’에서 그러하다.
2. 무명(無名)의 상품 – 하혜희, 『데모』
하혜희의 시집 『데모』는 처음부터 어떤 명명의 질서에서 약간 비켜서 있는 듯하다. 하혜희라는 이름부터가 그렇다. 본명을 밝히지 않고 여러 이명을 오가며 활동한다는 정보가 알음알음 전달될 뿐, 시집 안팎에서 하혜희라는 이름은 특정 개인의 단위로 환원되지 않는다. 예컨대 김승일 시인의 시집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해설은 하혜희라는 이름으로 쓰였지만, 세 명으로 구성된 ‘독자 평의회’의 대화를 기록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데모』의 지은이 소개에는 “쓰이거나 쓰임 없는 이야기의 가공인물”이라고, 시집 서두에 수록된 「머리시-진실로」에는 “동인 공동창작 전선 소속, 그런 소속이 아니며, 활동을 시작한 적 없고, 태어나지도 않았다”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필명을 쓰는 작가야 많다지만, 하혜희라는 이름은 어쩐지 작가의 정체성을 지시하는 또 다른 고유명사라기보다 오히려 여러 목소리가 겹쳐 있는 단위로서의 기호, 누구의 이름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무명(無名)에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무명성은 시집 제목인 ‘데모’가 품고 있는 두 가지 의미와도 닿아 있다. 하나는 집회나 시위를 뜻하는 데모(demonstration)다. 여러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모이는 ‘데모’는 개인의 고유한 이름보다 몸들의 위치로 정체화되는 공동의 무엇을 상상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음악이나 게임의 데모 버전이라고 할 때의 그 ‘데모’로, 미완성의 시범적 형태 혹은 아직 제도적 승인과 완결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의 작품(상품)을 뜻한다. 다시 말하지만, 시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품고 있다. 『데모』는 완성되지 않은 존재들의 임시적 연대이고, 동시에 결함과 불완전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범적 상품이다.
오, 그대도 진실한 것을 아니?
미친 것, 모자란 것, 후줄근한 것, 괴상하고 천한 것들과
피할 수 없이 닿아 있다는 점을 너무 깊이는 생각하지 않고
아주 영리한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그런 줄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서
그렇게 살고 있니?
잘하고 있는 거다
울면서 돌아다니지 않는 것만 해도 큰 힘이 들지
맞아, 알아, 괜찮게 하고 있다
계산은 힘들어, 맞아, 알아, 나름
만약에 지금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나쁜 이들이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우리와 같이 나쁜 이들이 없겠다면
그대의 사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니?
그렇다면 그래도 된다
우리는 그런 이들이고
우리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코를 막아도 괜찮고 침을 뱉어도 괜찮다
그러지 않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지, 알아
그대의 영혼이 회로처럼 꺼진다 하고 켜진다 하고
오 나도 그대를 알아, 그대의 외로움은 끝이 나야만 해
뺨을 대봐, 뺨을 대자, 뺨을 댈 수 있겠니?
우리는 혼내려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대를 지켜보지도 않는다
우리를 한군데 모아놓아도 돼
우리가 모퉁이를 밀면서 점점 복잡해지고 어두워져도
깊어지고 복잡해지는 것을 구경하러 와도, 오지 않아도 된다 맞아
그래도 된다 울지나 말아, 제발, 알아
우리가 계속 가르쳐주지 않니 괜찮다고 가르쳐주지 않아?
우리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우리를 너무 깊이는 생각지 말라고, 그대
이것을 읽어도 되겠니 읽어도 된다 미친 것
모자란 일이 무엇인지 그대가 알고 우리도 아는, 알아, 그래, 이 일
오, 그대도 진실한 것을 아니? 잘됐구나
오, 그대도 아름다운 것을 알아? 잘됐구나, 오
그대도 슬픔을 알고, 또 분노를 안다고? 잘됐구나 그것들을 우리에게 새겨준 뒤에 그대가
안겨 으스러지는 것은 다음의 일이네
「명멸」, 전문
『데모』에서 화자를 지칭하는 표지로 자주 선택되는 것은 ‘우리’라는 복수형 인칭대명사다. 시집의 「머리시-진실로」에 “우리 계급을 위해” 같은 표현이 있으니 ‘우리’는 ‘계급’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지만, 시집에서 ‘우리 계급’의 범주는 꽤 넓은 것 같다. 가령 위 시에서는 ‘우리’의 대타항으로 ‘그대’가 놓이지만, 다른 시편에서는 ‘인간’이 놓이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우리’에는 “집 없던 한 사람”(「생명 충격」)도 포함되지만 “죽은 이들”(「공중 들림」)이나 “귀뚜라미”(「대미망인」) 혹은 “파리들”(「파리에 관하여 설명함」)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어딘가 세계의 표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위 시의 표현을 빌리면 “미친 것, 모자란 것, 후줄근한 것, 괴상하고 천한 것들”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냥 간단하게 “대체 가능하다고 믿어지는 이들”(「머리시-진실로」)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인이 누구고 화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라기보다, 대체 가능하다고 믿어지는 이들이 어떤 형식으로 표현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시집에서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때때로 시집의 어조가 종교적인 것에 육박할 정도로 장엄한 리듬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뭐랄까, 시집 전반에 ‘교리’, ‘성서’, ‘신앙’, ‘이단자’와 같은 종교적인 어휘가 자주 등장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고, 화자가 어딘지 모르게 세계의 진실을 이미 깨달은 ‘전지적 시점’에서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 때문이기도 한데, 여하간 ‘대체 가능한 존재들’이 주변적 위치에서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굽어살피는 듯한 위엄을 보인다는 것 자체로 이상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모더니즘 예술에서 ‘고유함’, 즉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함은 예술의 가치를 보증하는 핵심 원리였다. ‘신 앞에 선 단독자’(키에르케고르)라는 형상이 반복적으로 호출된 이유 역시, 군중이라는 일반성에서 이탈해 고유명사를 획득하려는 근대적 주체의 형식을 잘 보여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분명 특이한 지점에 놓인다. 『데모』는 ‘우리’라는 복수형 주어를 고수하면서도 단독자가 추구해 온 신적인 ‘유일무이함’의 무게를 완전히 내려놓지도 않는다. 그러나 『데모』에서 고유함이 작동하는 방식은 모더니즘이 전제한 단독자의 내면이나 초월적 심급과의 일대일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이 시집에서 고유함은 언제든 교체 가능한 존재들이 서로를 향해 말을 건네고 취소하는 집합적 발화의 순간에 잠정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때의 장엄함은 주체가 유일무이한 단독성을 선언하는 행위가 아니라, 취약함을 공유하는 존재들이 “네가 나와 구분되지 않는구나, 구분되는구나”(「일기」)를 오가며 중얼거리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러한 장엄함은 근대적 예술이 갈망하던 ‘원본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시집은 원본이 부재한 네트워크의 평면 위에서, ‘교환 가능성’ 그 자체를 하나의 존엄한 형식으로 전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가 상품이자 데이터로 환원되는 환경을 단순히 부정하는 대신, 화자 스스로를 완성되지 않은 ‘데모 버전’의 무명성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때 발생하는 시의 윤리 혹은 정치적 가능성이 있다면 폐쇄된 자아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깊이가 아니라, 대체 가능한 존재들이 서로의 뺨을 대는 얇은 접촉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혜희의 『데모』는 고유함과 장엄함이라는 모더니즘의 미적・윤리적 감각을 일정 부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단독자의 소유에서 분리해 대체 가능한 존재들 사이에서 잠정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적 형식으로 재배치한 시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데모』에서 시의 고유함은 소유되거나 보존되어야 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명멸’의 순간에 가까운 것으로, 나는 이러한 무명들의 발화가 책임의 회피가 아니라, 고유함을 다수의 존재가 공유할 수 있는 조건으로 이동시키려는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3. 번역의 연쇄 – 문보영,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문보영의 세 번째 시집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은 문보영 특유의 상상력이 두드러지는 동시에, 시집의 형식 자체가 하나의 실험 장치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독법으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 시집이다. 가령 시집의 서두에는 통상적인 시집과 마찬가지로 문보영 자신의 ‘시인의 말’이 수록되어 있지만, 3부의 첫 시에는 ‘올리비아 페레이라’라는 가상의 인물이 또 다른 ‘시인의 말’을 남긴다. 보통 해설이 위치할 자리에 문보영은 자신을 ‘번역자’로 표기하고 ‘번역 후기’를 썼는가 하면, 그 ‘번역 후기’도 아리송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에는 이외에도 수많은 형식 실험이 등장한다. 장르를 특정할 수 없는 글, 시에 그림이 등장하는 정도는 예사로운 일로 보일 정도다. 그런데 왜 이런 실험을 하는 것이며, 이러한 특이한 형식은 무엇을 수행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대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약간의 난감함을 품은 상태로, 우선 최소한의 지도를 확보하기 위해 시집 출간 이전 조대한 평론가와의 대담 「쓰고 지우다 지나간 것들」(자음과 모음, 2022 가을호)에서 문보영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자.
문보영 제가 요즘 빠져 있는 건 카프카의 시집을 만드는 거예요.
조대한 카프카의 시집이요?
문보영 물론 출판될 수도 없고 누가 저한테 부탁한 것도 아니지만 저 혼자 보려고 카프카의 시집을 엮고 있어요. 카프카의 소설도 그렇고 일기의 어떤 부분을 잘라서 발췌하면 영락없는 산문시더라고요. 산문시를 이렇게 많이 써놓고 본인은 몰랐던 거죠. 요즘에는 카프카의 두꺼운 일기를 아무 데나 펴놓고 읽으면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를 떼어내면 시가 될 것 같다’ 싶은 부분에 표시해요. 유물 발굴하는 것처럼요. 그렇게 제멋대로 일기에서 시를 발굴하고 제목을 붙여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시에 걸맞은 제목을 꼭 두세 페이지 넘기면 찾게 돼요. 다른 날의 일기에서 시의 제목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렇게 혼자 남의 시에 제목 붙이며 뿌듯해합니다. 그 시들의 순서를 정리해서 4부로 구성해 보고 있어요. 남의 작품을 마음대로 훼손하며···마치 제가 카프카의 유령 편집자가 된 것처럼요.
‘카프카의 소설이나 일기의 부분을 잘라서 발췌’하여 ‘제멋대로 제목을 붙이고’ 시의 순서를 정리해서 시집을 구성하는 방식, 그러니까 ‘유령 편집자’의 역할은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이 구성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다만, 당시에는 ‘편집의 대상’이 카프카의 소설이나 산문에 국한되었다면, 시집에서는 책뿐 아니라 실제 사건이나 경험 심지어 상상의 세계도 편집의 대상이 된다. 실로 무한에 가까운 재료가 ‘발췌’되고 ‘제멋대로 붙여’질 수 있다 보니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도 괜찮고 ‘시인의 말’이 다른 시편으로 이동하거나 실재하지 않는 언어(‘옴니크어’)가 등장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런 점에서 문보영의 시는 정말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무엇도 아니게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목 때문에도 그렇지만, 시집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르헤스의 소설 「모래의 책」이 연상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래의 책’은 페이지 수가 한정되어 있지 않으며, 펼칠 때마다 다른 내용이 나타나는 ‘무한의 책’이다. 책 자체가 무한하고 불확정적인 탓에 책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모든 해석은 계속해서 미끄러지게 된다. 이는 원본을 지시할 수 없는 무한한 복제품의 세계, 혹은 정보가 과잉되어 주체를 아득하게 초과하는 네트워크 사회의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시를 써줘’라고 요구할 때마다 매번 다르게 시를 써주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닮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와닿을 수도 있겠다. 문보영 시집 역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시집은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텍스트는 이동하며, 독자는 자칫 무한한 미로에서 영원히 길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시가 그래도 괜찮은 걸까.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문보영의 이름이 저자에서 번역자(옮긴이)로 이동・배치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시인이 시의 기원(origin)이나 의미의 원천(source)이 아니라, 언어와 세계를 매개하는 존재임을 선언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 저자는 의미의 종착지가 아닌 하나의 통로가 된다. 이러한 저자 위치의 이동은 연쇄적으로 독자의 위치 또한 이동시킨다. 언젠가 최가은 비평가가 문보영의 일기는 “독자가 곧바로 쓰는 자의 자리로 이동하게 한다”(「문보영-일기」, 『문장웹진』, 2020년 12월호)고, 문보영의 세계에서는 독자가 일기의 단순 수용자가 아니라 일기-쓰기의 조건(동력)으로 개입하며 독자는 문보영의 일기를 읽는 동시에 자신의 일기를 쓰고 공유함으로써 ‘일기’라는 형식을 함께 장르화하는 공동-생산의 집단이 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 바 있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문보영의 세 번째 시집 역시 독자의 위치를 ‘해석자’에서 ‘번역자’로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고 주장하려 한다.
있잖아, 지금부터 내가 지어낼 세상에는 난방이라는 개념이 없어.
실내 온도를 좀 높일까요?
이런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아. 대신 사람들은 방한 나무에 의지하지. 방한 나무는 스스로 엄청난 열을 내. 이 나무는 실내에서는 자랄 수 없고 길바닥에서 살아야 해. 실내에서 키우면 자살해버리거든. 온기가 필요한 인간은 나무 앞에 줄 서서 기다리지, 나무를 껴안으려고. 나무는 죽을 때까지 키가 크고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 사람들은 출근길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공항에 가는 길에, 퇴근길에, 이별하러 가는 길에 나무를 껴안아, 따뜻해지려고. 죽으러 가던 사람도 차에서 내려 방한 나무를 껴안아, 죽을힘을 내려고. 나무는 추운 인간을 멈추게 해. 그래서 이 나라에서 포옹(ighlek)과 멈추다(ighlek)*는 같은 단어야. 너무 추운 날에는 인간들이 죄다 나무에 들러붙어 아무것도 안 해. 나무에 들러붙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미납 공과금, 덜 마른 빨래, 저녁거리, 타이어 공기압, 빚 갚을 능력, 막힌 변기를 떠올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해.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나는 존재했던 시간보다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더 길었으니 내가 없을 때 더 나다운 게 아닐까? 먼지 같은 생각들. 그동안 옅은 고온의 물체에서 저온의 물체로 전달되고 사람은 온기를 느낀다.
인간을 껴안고 있을 때 방한 나무가 하는 상상:
지구가 갑자기 자전을 멈추면
존재들은
허공을 향해 쏟아진다
비가 내리고 있다
「방한 나무」, 전문
*옴니크어, 옮긴이
문보영의 독자가 ‘해석자’에서 ‘번역자’로 이동한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먼저 통상적인 독법으로 시를 해석한 결과를 제시하기로 한다. 각주로 처리한 해석의 결과는 챗GPT가 쓴 것이다.
나는 인공지능의 해석이 나름대로 참조할 만한 정합성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는 것은 해석이 잘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혹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해석 행위를 비교하거나 윤리적 쟁점을 따지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문제는 해석의 주체가 인간이든 인공지능이든 ‘해석자’의 자리에 고정된 주체가 놓일 때, 텍스트는 더 이상 이동하지 않으며 해석자인 독자(비평가)가 텍스트 의미의 기원(origin)이 된다는 점이다. 문보영이 스스로 저자가 아니라 번역자의 위치로 이동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텍스트의 정지 상태를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가 ‘해석자’가 아니라 ‘번역자’로 이동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다소 잠정적인 구분이지만, 여기서는 텍스트의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기술을 해석이라고 한다면, 번역은 텍스트가 작동하는 조건 자체를 다른 자리로 이동시키는 행위에 가까운 것으로 정의하려 한다. 부연하자면, 시를 다른 맥락으로 옮기되 원래 시가 가진 어떤 종류의 고유성을 일정 부분 보존한 채로 옮기는 일이 여기서 말하는 번역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의미의 정확성이 아니라, 의미가 발생하고 소통되는 장(場)이 어떻게 재배치되는가 하는 문제다. 하나의 사례로, 나는 인용한 시를 개인적인 경험(상상)의 장으로 ‘옮기는’ 행위를 수행해 보고자 한다.
몇 해 전, 한 작가에게 들은 일화이다. 그는 작업 중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키보드 위에 올라간 고양이가 앞발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놀라서 급히 고양이를 안아 올렸지만, 이미 화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글자들을 곧바로 지우지 못했다. 어쩐지 그것이 고양이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그 파일을 별도의 폴더에 저장해 두었다.
시간이 흐른 뒤 고양이는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그는 요즘에도 가끔 그 파일을 연다고 했다. 더 이상 읽히지 않는 문자들의 나열을 바라보며, 작업을 멈추고 고양이를 안고 있던 순간의 체온과 무게를 떠올리기 위해서다. 그때 남겨진 글자들은 여전히 ‘인간의 언어’가 아니지만, 그에게는 분명하게 감각되는 ‘언어’이다. 참고로 그 고양이의 이름은 옴니크였다고 한다.
물론 나는 시인처럼 상상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며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도 부족하기에, 지금 시도한 것은 그저 간단한 시뮬레이션 정도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무엇을 시도하고자 하는지는 어느 정도 전달되었으리라고 본다. 문보영의 시 「방한 나무」에 등장하는 ‘옴니크어’는 실제로 존재하는 언어는 아니다. 훈민정음처럼 내용과 체계와 역사가 있는 언어가 아니니, 문보영이 창조한 언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옴니크어’는 내용이 없고 역사가 없으며 따라서 깊이가 없다. 그런 점에서 ‘옴니크어’는 하나의 기호이며, 문보영은 그것을 ‘난방이라는 개념이 없는’ 허구적 세계로 ‘옮기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문보영의 시를 어느 정도 보존하면서, 완전히 다른 맥락 속에 그것을 옮겨 두는 시도를 한 것이다. 말하자면 번역의 번역, 즉 번역의 연쇄를 작동시킨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 ‘번역’하느냐에 따라 ‘깊이’나 ‘복잡한 내면’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마 내가 이야기를 더 잘 구성할 수 있었다면, 옴니크라는 고양이와 작가의 관계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문보영의 「방한 나무」에 깊이 있는 정서적 울림을 발생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서점』은 완결된 텍스트가 아니며, ‘깊이 없이’ 끝없이 미끄러지는 무한한 미로가 될 위험도 있지만, 독자가 참여하는 것으로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문보영의 시집에서 시적 의미의 발생은 시인 혼자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공동으로 책임지는 것이다. 문보영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친구와 나 사이의 빈 공간에서 나의 것도 친구의 것도 아닌 새로운 무언가가 발생하고”(『일기시대』, 민음사, 2021, p.29.) 그 빈 공간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썼다. 어쩌면 문보영이 저자의 자리를 이탈하고 독자에게도 이탈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친구-되기’를 하기 위해, 그러니까 시 쓰기를 관계론적 실천의 장(場)으로 치환하여 ‘빈 공간’을 발생시키고 배움의 장을 만들기 위함일 수도 있다. 즉, 네트워크 시대에도 시적 의미가 다원적이고 역동적일 수 있는 장(場)을 구성하고 그것이 계속 그렇게 작동될 수 있도록 저자와 독자가 공동으로 책임지는 구조를 설계하는 일, 문보영은 그런 것을 하고 있다.
4. 고유함의 복수화(複數化)
문화 생산과 수용의 영역에서 창작자, 매개자, 수용자의 구분이 점점 흐려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소비주의가 강화되면서 문화적 생산물은 이전보다 분명하게 ‘상품’으로 인식되며, 동시에 그 유통과 의미 형성 과정에서 소비자의 역할 역시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의 문화 생산물은 창작 이후에 덧붙여진 댓글이나 인터넷 플랫폼을 통한 공유, 재맥락화 과정을 통해 갑자기 유명해지거나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하기도 한다. 시 역시 이러한 조건에서 예외일 수 없는데, 조각난 시의 구절이 원래 시의 맥락과 무관하게 상품 광고나 결혼식 청첩장 문구로 쓰이거나 SNS에서 유통되는 현상은 앞으로 더 쉽게 발견될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사실 시가 ‘담론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비평가에게는 행운인지도 모른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비슷한 시장 규모를 지닌 사회에서 이 정도로 시집이 많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이는 곧 한국 시가 특수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오늘날 시장 환경에 비교적 빠르게 적응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시집 출판사가 증가하고, 시집 출간 주기가 짧아지며, 손바닥 크기로 시집을 제작하거나 키링과 같은 형태로 상품화하는 흐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시인과 비평가(독자)의 시에 대한 감각이나 태도가 변화하는 것도 당연하다. 시를 상품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소비자의 기호와 시장의 알고리즘을 의식하게 된다는 의미이며, 이는 모더니즘 미학이 강조한 저자의 고유성(작가주의)이 둔화되는 현상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시를 둘러싼 저자성의 문제를 단순히 ‘누가 썼는가’라는 질문으로 환원하기 어렵게 만든다. 반복하는 것이지만, 네트워크 환경에서 시는 단일한 주체가 생산하고 단일한 주체가 소비하는 완결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행위와 우연한 접속을 거치며 계속해서 다른 자리로 이동하는 과정에 놓이기 때문이다. 저자, 독자, 편집자, 플랫폼, 알고리즘 등이 서로 다른 비율로 개입하는 조건 속에서 시는 언제든 다시 읽히고 다시 사용되며 다시 의미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일각의 우려처럼 상품화된 시, 알고리즘 유통에 노출된 시는 문화적으로 다원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획일성을 낳을 수도 있다. 이 글에서 주장한 것은 지금의 조건을 인정하되 이러한 변화가 곧바로 기존에 있던 시의 윤리적・미학적 의미를 소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혹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혜희와 문보영의 시집은 모더니즘이 전제했던 작가주의적 고유함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도 아니고, 모든 차이를 평평하게 만드는 포스트모던한 대체 가능성에 스스로를 맡기는 태도도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고유함을 하나의 본질이나 소유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관계와 과정 속에서 매번 생성되는 것으로 재배치한다. 이 글에서 ‘고유함의 복수화’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움직임이다. 고유함은 하나의 이름이나 단일한 주체에 귀속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닌, 여러 갈래로 분기되며 그때마다 서로 다른 윤리적 긴장을 만들어 내는 목소리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유함의 복수화’는 시의 주체(여기에는 저자뿐 아니라 해석자도 포함된다)가 시에 대한 배타적 권위를 포기하는 대신, 네트워크라는 다층적인 관계망 속에 시의 자리를 재배치하려는 시도다. 이는 저자의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 허무나 무기력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시적 의미가 발생하는 현장을 집단적이고 역동적인 연쇄의 과정에 개방하는 일에 가깝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의 시는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번역’되고 ‘사용’되는 것으로 (미)완성되는 아카이브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시가 획득할 수 있는 ‘깊이’라는 것이 있다면 작가적 아우라나 단일한 의미를 보존하는 데서가 아니라, 시가 수많은 타자의 목소리와 접속하는 장면을 다층적으로 만드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3장에서 후쿠시마 료타의 책 『신화가 생각한다-네트워크 사회의 문화론』을 언급하였는데, 이 책의 마지막 말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함으로 이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한다.
“현상을 되짚어보더라도 우리가 사는 문화적 공간에는 무수한 글쓰기의 규칙이-거의 국어에서 일탈해버린 듯한 글쓰기마저-흩어져 있다. 일찍이 롤랑바르트는 시민들이 ‘다양한 욕망이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수만큼의 언어활동을 갖는’ 세계를 일종의 유토피아로서 간주했다. 실제로 단일한 언어(국어)에 시민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들이 개개의 주제에 가장 적합한 문체를 묘사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 아닐까. 이 유토피아적 이상은 오늘날 진지하게 추구할 가치가 있다.”(p.285.)
1) 무료 버전의 챗GPT를 사용했으며 명령어로는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 시를 해석해 줘’였다. 분량이 길어 약간의 요약을 했으나, 문장을 수정하거나 덧붙이지는 않았다. “이 시는 난방이라는 기술적 장치가 부재한 세계를 설정함으로써, 인간 문명이 전제해 온 편의와 보호의 조건을 제거한 상태에서의 존재 양식을 탐색한다. 방한 나무는 이 결핍을 대체하는 자연적 장치이자,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외부적 타자이다. 인간은 스스로 온기를 생성하지 못한 채, 길 위에 고정된 나무를 찾아가 포옹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거대한 시스템과 장치에 의존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 읽힐 수 있다. / 특히 이 세계에서 ‘포옹하다’와 ‘멈추다’가 동일한 단어로 번역된다는 설정은 중요하다. 인간은 방한 나무를 껴안는 순간 이동과 생산의 흐름에서 이탈하며, 그 이탈은 일종의 사유의 발생 조건이 된다. 출근, 사랑, 이별, 죽음이라는 삶의 주요 국면들이 모두 방한 나무 앞에서 잠시 중단된다는 점에서, 이 나무는 인간 삶의 시간성을 재조정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여기서 멈춤은 무력이나 실패가 아니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적극적인 조건으로 재의미화된다. / 시 후반부에서 방한 나무가 인간을 껴안으며 상상하는 장면은 주체와 객체의 위계를 전도한다. 인간을 보호하는 존재로 여겨졌던 나무가 오히려 인간을 관찰하고 상상하는 위치로 이동하면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은 흔들린다. “지구가 갑자기 자전을 멈추면 / 존재들은 /허공을 향해 쏟아진다”는 이미지는, 세계를 지탱하던 질서가 중단될 때 존재가 얼마나 쉽게 붕괴되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주목할 점은 시 말미에 제시되는 ‘옴니크어’라는 가상의 언어이다. 이는 특정한 의미를 지시하는 언어라기보다, 언어가 생성되는 이전의 감각적 층위를 가리키는 표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번역 주석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 언어라는 점에서 이 주석은 오히려 의미의 불확정성을 강조한다. 즉, 이 시는 번역을 통해 의미를 고정하기보다, 번역이라는 형식을 통해 언어의 불완전성과 세계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다. / 종합하면, 「방한 나무」는 기술과 시스템에 의존하는 현대인의 존재 조건을 환상적인 세계 설정을 통해 재현하며, 멈춤과 포옹, 의존과 취약성이라는 감각을 통해 새로운 공동성과 사유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로 읽을 수 있다. 방한 나무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지만, 인간이 계속 살아가도록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을 제공하는 존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구원 없는 세계에서의 생존 윤리를 사유하게 한다.”
2) 여기서 쓰는 번역 개념은 의미의 해석이나 치환보다는, 텍스트가 작동하는 장(場)을 이동시키는 개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후쿠시마 료타가 제시한 ‘장을 바꾸는 신화’-작품의 고유성을 쉽게 분해하지 않고 다른 리듬과 조건으로 이식함으로써 수명을 연장하는 전략-와 이론적 친연성을 갖는다. 후쿠시마 료타, 『신화가 생각한다-네트워크 사회의 문화론』, 김정복 옮김, 기역, 2014. 특히 1장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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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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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6-03-01
반복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ㅡ 김엄지론1) 안세진 1. 색소폰 연주와 살아남은 소설들 내가 살고 있는 집 앞 하천 굴다리에는 매일 저녁 색소폰을 부는 할아버지가 있다. 처음에는 아저씨였는데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항상 있었다. 어제도 있었다. 당신은 테이프 반주에 맞추어 끈적한 유행가를 연주하는 중절모 쓴 노신사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겠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풍경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벽을 보고 색소폰을 분다. 반주도 없고 관객도 없다. 중절모는 쓰고 있다. 한 이십 년쯤 들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나는 아직도 그가 대체 매일 무엇을 연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협화음 같은 프레이즈가 툭툭 던져지고 호흡을 고르는 듯 어색한 침묵이 길게 흐른다. 몇 개의 음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멜로디가 수십 번 반복되기도 한다. 아무리 들어 보아도 그것은 노래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오래 연주하지도 않는다. 한 시간쯤 지나면 색소폰을 케이스에 넣고 어딘가로 털레털레 사라진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매일 무엇인가를 연주하고 있다.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유 모를 형벌을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는 장인(匠人)일까, 아니면 광인(狂人)일까. 언제부터인가 김엄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색소폰 소리를 듣는다. 무엇인가가 소설 속에서 그저 미친 듯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엄지의 연주가 시작된 순간은 언제였을까? 정확히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겠다. 그때 데뷔 육 년 차의 소설가 김엄지는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문학과지성사, 2015)와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민음사, 2015)라는 두 편의 책을 거의 동시에 문단에 상재했다. 전자는 그의 등단작 「돼지우리」부터 시작해 비교적 ‘단편소설’의 통상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는 초기 작품들이 모여 있는 소설집이었고, 후자는 그가 최근 발표했던 각종 소설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조합되어 만들어진 그야말로 괴이쩍은 장편소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지만 김엄지의 소설은 명백히 전자에서 후자의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무개념 상태로 널브러져 있”2)는 오피스 맨들의 기이한 무기력은 이미 그의 초기 소설이 잠시 펼쳐 보였던 ‘씹’, ‘뻑’, ‘좆’의 치기 어린 발랄함을 모조리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야흐로 - 이후 김엄지의 소설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규정하게 될 - “삶의 무게, 아니 ‘무게 없음’을 형상화한 듯한 하나의 형식”3)이 발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엄지의 문체(style)는 사실상 그때 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성의 없이 툭툭 끊어지는 문장, 몇 페이지를 채 이어 가지 못하고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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