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2]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 작성일 2026-04-01
- 댓글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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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으로 3회 연재됩니다. |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김인숙의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2)
박서양
1.
앞서 1부에서 살펴보았듯 『자작나무 숲』을 단편에서 장편으로 개작하는 과정을 거쳐 쓰레기 집이 지니는 의미는 보다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된다. 기존의 사회적 담론이 쓰레기 집을 단순히 개인의 병리적 현상이나 위생 문제로써 다뤄왔다면, 장편소설에서 작품의 주된 배경이 되는 쓰레기 집은 한 가문의 은폐된 기억이 귀환하는 실체적 장소로 탈바꿈한다. 그렇기에 이곳은 단순히 한 노인의 저장강박이 빚어낸 결과물이 아니다. 쓰레기가 켜켜이 쌓이고 느리게 부패하는 이 공간은 공적 시스템의 신속한 망각에 맞서 기억의 소멸을 유예하는 지연의 장소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과거 배경이 1989년이라는 사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95년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며 규격 봉투 안에 모든 폐기물이 동질화되고 익명화되기 이전, 쓰레기는 그것을 배출한 자의 삶의 궤적과 정보가 선명하게 남겨진 물질이다. 즉, 1989년이라는 시간은 쓰레기가 아직 완전히 규격화되지 않은 채,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었다는 실명(實名)의 흔적을 지닌 채 공동체 내부에 머물던 시기다. 또한, 좁은 다리 하나를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되는 곡교의 폐쇄적인 마을 구조 역시 이러한 쓰레기의 관계적 속성을 한층 강화시킨다. 쓰레기차가 드나들기 어려워 쓰레기를 각자 태우거나 묻는 비공식적 처리에 의존해야 했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변두리 마을에서 쓰레기의 출처는 서로에게 투명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누가 무엇을 버렸는지 훤히 알 수 있는 동네에서 타인의 쓰레기를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수집이나 저장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가 서둘러 지우고자 했던 기억들을 자신의 공간으로 편입시키는 행위가 된다.
더욱이 할머니가 쓰레기를 쌓아 올리는 산1번지의 집이 본래 일제강점기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했던 시아버지 모칠성의 거처였다는 점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할머니의 수집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은 이미 채무자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장물들이 켜켜이 쌓이던 공간이었다. 저당 잡힌 물건들은 누구에게서 어떤 연유로 빼앗아 왔는지 그 유래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그 어떤 폐기물보다도 비극적이고 선명한 서사를 품고 있다. 요컨대 이 집은 단순히 버려진 사물들의 무덤이 아니라, 타인의 삶의 서사가 강제로 유입되고 축적되어 온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이러한 공간적 내력은 언뜻 산1번지의 쓰레기 집을 마을의 배제된 기억과 비밀이 축적되는 일종의 아카이브처럼 비치게 만든다. “할머니한테는 저 집이 뭐랄까…… 박물관 같은 거지요.”(124쪽)
하지만 할머니의 수집 행위를 ‘기억의 보존’으로 쉽게 낭만화할 수는 없다. 집 안으로 모여든 쓰레기들은 한데 뒤엉켜 부패하며 본래의 형태와 개별성을 잃고, 그것이 매개하던 고유한 서사 역시 점차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즉, 쓰레기의 축적은 기억의 정교한 보관이 아니라 물질적 변질과 오염을 수반한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 온전하게 남는 것이 아니라, 훼손되고 썩어가는 물질의 상태로 끈질기게 그곳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산1번지의 집은 도시의 논리가 종용하는 신속한 망각을 유예시키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공간에 쌓인 오랜 기억을 단숨에 지워버리는 재개발의 속도와, 매립과 소각을 통해 망각을 가속하는 쓰레기 처리제도에 맞서 할머니의 집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고 끈질기게 부패할 뿐이다. 거기서 배어 나오는 악취와 침출수는 마을 사람들을 꼼짝 없이 그 불편한 감각 속에 함께 묶어세운다. 특히 냄새는 시각처럼 대상을 거리를 두고 파악하게 하거나 언어처럼 의미를 분절하지 않는다.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신체에 스며들어 공간 전체를 장악하는 악취는, 과거를 단순한 회상이나 망각의 대상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감내해야 할 물성으로 전환시킨다.
“자작자작 타서 자작나무란다.”
“불에 탈 때 꽝꽝 소리를 내서 꽝꽝나무란다.” (151-152쪽)
그러나 이 작품의 감각적 층위를 냄새와 후각에만 한정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인용문은 인용문은 할머니가 자작나무와 꽝꽝나무가 타들어 갈 때 내는 각기 다른 소리를 정확히 구분할 만큼, 사물의 고유한 개별성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녀는 물질이 소각되면서 다른 상태로 변환되는 순간에 발생하는 소리를 청각적으로 예민하게 포착하는 인물이다. 자작나무가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타고, 꽝꽝나무가 꽝꽝 소리를 내며 탄다는 것은 단순히 식물학적 지식이 아니다. 이는 물질의 형체가 사라질 때 청각적 감각이 발생하는 장면을 오래 들여다본 이만이 감별할 수 있는 섬세한 차이다. 요컨대 할머니는 물질이 사라질 때 감각적 흔적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나무의 차이를 이렇듯 정확하게 구별하는 할머니가, 정작 그곳의 모든 사물들이 한데 뒤엉키고 썩어가며 개별적 경계가 사라져가는 쓰레기집 한가운데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쌓아올렸는가. 이는 역설적으로 사물의 고유성이 지워지는 이곳이 가장 치명적인 비밀을 구별 불가능한 상태로 묻어버릴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들의 기억과 서사, 치부들이 한데 엉키며 형체를 잃어갈 때 가장 밑바닥의 사체 또한 가장 견고한 폐기물로 위장될 수 있다.
2.
한편 이 소설은 쓰레기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이야기 자체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쓰레기라는 물질적 대상을 서사의 개연성 문제와 연결 짓는 지점이다. 앞서 1부에서 살펴보았듯, 쓰레기의 의미는 하층 계급성, 무가치함, 여성성, 공간적 주변성 등과 긴밀하게 얽힌 것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쓰레기가 무엇과 인접해 있는가를 묻는 순간, 그것은 관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정치적 문제가 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쓰레기를 둘러싼 배치를 손녀의 ‘글쓰기’와 교차시키며, 이를 서사적 개연성의 문제로 확장해 나간다.
“그 소설에 묘사된 죽은 아들의 서사에 대해서는 당연히 모두 혹평했다. 너무 작위적이고, 너무 장르적이라는 것이다. 왜 호더의 생생함과 상속의 절실함을 그런 작위적이고 장르적인 스토리로 망쳐버렸는지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라고 했다. 나는 묵묵히 들었다. 부끄러워서 귀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빨간색 펜으로 죽죽 그은 문장들은 이야기가 되지 못한 채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단편 「자작나무 숲」, 280쪽)
“그럼 개연성이 있으려면, 어째야 하는 건데? 개연성이 있는 세상에서는 엄마가 아들을 못 죽이지. 그것도 도끼로 찍어서는 못 죽이지. 그것도 뱃속의 딸에게는 그런 힘이 없지. 당연히 못 죽이지. 개연성이 있는 세상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때리지. 아빠가 태어나지 않은 딸을 죽이지. 아들이 늙은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지.
고작 그게 개연성이라니……. 태어나지 말 걸 그랬나봐.” (291-292쪽)
손녀 모유리는 소설 합평회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죽였다’는 파격적인 설정의 작품을 내놓지만, 이는 곧바로 ‘개연성이 없다’는 차가운 비판에 직면한다. 여기서 개연성이 없다는 판정은 단지 소설 작법이 서툴다거나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지배적인 질서가 도저히 승인할 수 없는 낯선 가능성에 찍는 낙인에 가깝다. 이때 개연성 있는 이야기라는 규범에서 탈락한 서사는 ‘쓰레기 같은 글’로 취급받으며, 실제로도 빨간 펜이 죽죽 그어진 종이 뭉치라는 물질적 쓰레기로 전락한다. 즉, 개연성의 세계에서 쫓겨난 서사의 잔해와 유용함의 질서 바깥으로 버려진 사물은 서로를 비추며 공명한다.
이 소설의 독특함은 바로 개연적 질서에 대한 거부가 쓰레기의 물질성과 인접한 위치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나는 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 어쩌면 엄마의 이야기 속 빈틈을 채우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단편 「자작나무 숲」, 279쪽)라는 손녀의 회고와 같이, 인간은 세계의 무의미한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그 빈틈을 이야기로 채워 넣으려는 서사적 존재다. 하지만 소설은 인간이 서사적 존재라는 명제가 결코 보편적이지 않으며, 개연성 또한 중립적인 기준이 아닐 수 있음을 폭로한다. “버려졌다가 굶어 죽은 일본 부자의 딸이 그 집 남자들을 다 잡아 먹는다는 식”(245쪽)의 소문은 논리적 인과가 아닌 악의적인 낙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괴담은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와 공포 속에서 기꺼이 개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쓰레기가 제자리에서 밀려난 물질적 잔여라면, 개연성은 사건과 기억이 서사 속에서 제자리를 부여받는 방식을 규율하는 규범이다. 이는 어떤 가능성을 서사적 세계로 채택하고 폐기할지 결정하는 가능성의 분배 체계로 규정될 수 있다. 여타의 작품들이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서사 구조에 균열을 내기 위해 복수의 가능성을 열어두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또한 단일한 서사로 환원되려는 세상의 질서에 “불쾌하고 께름칙한 냄새”(해설, 380쪽)를 덧칠하는 전략을 취한다. 냄새라는 감각의 형식으로 귀환하는 기억은 사건의 앞뒤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매끄러워 보이는 세계의 표면 아래에 여전히 처리되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신체적으로 감각하게 함으로써, 지나치게 개연적인 서사의 질서를 의심하게 만든다.
아울러 모유리가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의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집”(11쪽)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녀가 자신의 문장을 스스로 ‘쓰레기’라 부르는 언술 역시 사뭇 다르게 읽힐 여지를 남긴다. “저들은 쓰레기는 다 쓰레기인 줄로만 안다”(단편 「자작나무 숲」, 281쪽)고 조소하는 그녀에게 쓰레기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고 버려지는 폐기의 대상이 아니다. 쓰레기는 일상 속에 삶의 자리를 함께 차지하고 있는 구체적인 실체로 그의 세계에 존재한다. 세상의 질서가 효용성을 기준으로 의미만을 골라낼 때, 소설은 그것으로부터 걸러지고 남겨진 것들을 서사 안으로 다시 불러 모은다. 이때 ‘쓰레기 같은 소설’은 자기비하의 표현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쓸모에 따라 분류하고 폐기하는 질서에 맞서 버려진 것들의 자리를 보존하겠다는 미학적 선언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는 소설의 특유한 형식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소설은 집에서 발굴된 백골 사체와 할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의 명확한 인과관계로 봉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확한 해답 대신 남겨진 서사의 잔여들이 읽는 이에게 설명되지 않는 찜찜함을 안긴다. 소설은 이 잔여들을 끝내 비개연적 상태로 남겨둠으로써, 소설은 밀려난 여분의 가능성들이 점유하는 고유한 영토를 확보한다. 여기서 만일 할머니가 아들을 죽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사실로 밝혀졌다면, 처음에는 개연성 없어 보이던 이야기가 나중에 진실로 입증되는 식의 흔한 반전 서사로 회수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작나무 숲』은 이 서사적 가능성을 진실로 봉합하지도, 쓰레기처럼 완전히 폐기하지도 않는다. 이 작품이 정말로 질문하고 있는 것은 사건의 최종적인 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오히려 왜 어떤 가능성은 비개연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어떤 가능성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승인되는가 하는 개연성의 질서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단편에서 '개연성 없는 쓰레기'로 취급받던 서사가 장편으로 확장되며 구체적인 삶의 실감을 획득할 때, 이 소설은 그 자체로 배제된 이야기들을 끌어모아 경계를 허무는 거대한 '쓰레기집'이 된다. 작품은 할머니의 살해 여부를 인과적으로 규명하여 사건을 매끈한 개연성의 질서에 안착시키는 대신, 냄새와 소리라는 끈질긴 감각의 형식으로 기억을 귀환시킨다.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서사의 공백을 봉합하지 않는 이 불온한 감각들은, "아직 처리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신체에 직접 기입함으로써 '말이 되는 이야기'만을 승인하는 개연성의 권력 체계를 맹렬하게 심문한다. 결국 소설은 진상을 명쾌하게 해명하여 섣부른 혐오의 서사를 재생산하는 대신, 부패하고 뒤섞인 쓰레기 더미처럼 결코 매끄럽게 분절될 수 없는 진실의 덩어리를 우리로 하여금 끈질기게 대면하도록 이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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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양 문학평론가의 연재 비평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 1편.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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