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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지

  • 작성일 2024-09-01

[에세이]


   내가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지


심완선


   ‘제일 좋아하는’ 하나를 꼽아 보라는 질문을 종종 듣는다. 작가님은 제일 좋아하는 SF 소설, 작가, 영화, 게임이 뭐예요? 하나만 골라 본다면? 그럼 나는 시야의 한쪽 구석을 노려보며(사람이 고민에 빠질 때 흔히 나오는 얼굴이라고 들었다) 고심하는 표정을 짓곤 한다. 답변은 대체로 이렇게 흐른다. 너무 어려운데요. 어떻게 하나만 고를 수가 있죠.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은데. 조건을 조금 바꿔서 대답할게요. ‘제일 처음 읽은’이나 ‘제일 여러 번 본’ 아니면 ‘최근 접한 것 중에서’라면 말할 수 있어요.

   ‘최애’(최고로 애정을 쏟는 대상)가 확고한 분야가 아닌 이상 나의 1순위가 무엇이라고 내세우기는 정말 어렵다. 적어도 나는 적잖이 갈팡질팡하는 편이다. 게다가 솔직히, 남들이 듣기에 그럴싸한 이름을 대고 싶다는 욕망도 약간은 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할 때는 체면을 차리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나를 너무나 쉽게 대변한다. 예를 들어 제일 좋아하는 영화를 <조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인셀’(비자발적 독신의 약어로, 주로 인터넷 하위문화와 여성혐오 및 적개심을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혐의를 산다. <캐롤>은 상당히 대중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레즈비언 영화의 고전 명작이 되어 가는 중이다. 영화사를 말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시민 케인>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는 건 꽤 젠 체하는 발언 같다. 아니면 평범한 씨네필의 발언이거나. 만약 누가 <500일의 썸머>를 말하면 나는 ‘흠······’ 하며 잠시 의심을 품을 테고, <하녀>를 말하면 슬쩍 거리를 둘 것이며, <현기증>을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여상하게 넘어갈 것이다. 아, 히치콕, 취향을 적당히 가릴 만한 무난하고 점잖은 대답이죠. 물론 진심으로 히치콕을 좋아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고요.

   나는 영화를 매우 드물게 보는 사람이지만 무난하고 점잖게 주워섬길 만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기는 하다. 저는 개인적으로 <커피와 담배>를 봤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상영시간 내내 커피와 담배가 줄창 나오거든요. 전 비흡연자고 그때는 커피도 거의 안 마셨는데 스크린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중독되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내용은 특별할 게 없는데 촬영 방식이나 분위기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죠. 아, <중경삼림>을 뒤늦게 봤는데 말이죠. 거기 나오는 대사들이 따로 떼놓고 보면 유치하도록 낭만적인 게 많잖아요. 그런데 상영관에서 실물을 마주하니 영화가 뿜는 그 분위기에 빨려들더라고요. 제가 몰랐던 세기말의 조각을 그제야 확인한 느낌이었어요. 좋아하는 감독이라면, 저는 기회가 된다면 아이다 루피노가 찍은 영화를 모두 섭렵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배우는 버스터 키튼이 아닐까 싶네요. SF 영화 중에서 좋아하는 걸 고르라면, 글쎄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분명 정교하게 만든 영화지만 아무래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정이 갑니다.

   이 정도면 무난하지 않나? 착각인가? 아니면 너무 스놉 같나? 적어도 듣는 사람이 대강 끄덕이고 넘어갈 만한 내용이지 않을까?

   하지만 내 마음의 고향은 로맨틱 코미디 쪽이다. 정확히는 여자가 주연으로 나와서 어쨌거나 행복해지는 내용이 좋다. 할리우드 드림을 불신하면서도 나는 <프리티 우먼>과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고 SF 영화 중에서는 <바바렐라>를 마음껏 웃으면서 봤다. 노래하고 춤추는 영화라면 더 좋아하는데, 덕분에 <8명의 여인들>을 질리지 않고 봤다. 집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두고 엄마, 고모, 언니, 여동생, 하녀 등 여자들이 치고받는 뮤지컬 영화다. 물론 <시카고>도 좋다. 영화에서는 조지 클루니가 노래를 좀 못하긴 했지만 어차피 그는 주인공이 아니니까. 똑같은 이유로 <피치 퍼펙트> 시리즈도 챙겨 보았다. 이 시리즈엔 살인사건은 없지만 아카펠라 대회가 있다. <로슈포르의 연인들>도 아름다웠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뻔하고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쪽이 취향이다. 영화에 여성혐오가 보이더라도 어느 정도는 눈 가리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좋아하건 말건, 나는 같이 영화 보는 사이가 아니고서는 이런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취향을 속일 생각은 없지만, 괜히 나서서 밝힐 필요도 없지 않은가. (지금도 자제하는 중이다.)

   언제는 홍지로에게 <파티 걸> 이야기를 들었다. 홍지로는 SF 팬이자 번역가이며 소장한 영화 디스크가 너무 많아서 난관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이미 여러 번 내게 영화 추천을 성공한 적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파티 걸>은 “명품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근사한 파티를 주최하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것도 없고 직업도 없고 미래 계획도 없는 20대 뉴요커”인 여자 주인공이 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점점 성장한다는 내용이었다. 동네 도서관이 배경이고 여자 주인공이 십진분류표를 공부한다니. 거기다 코믹하고 통속적인 요소가 가미된 인디 영화라니. 나는 그 영화를 좋아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내 취향을 털어놓았다. 사실 내가 가장 여러 번 봤던 영화는 <컷스로트 아일랜드>라고. 거액의 비용을 들여 대차게 망했다며 비웃음을 사는 영화지만 나는 솔직히 많이 좋아한다고.

   <컷스로트 아일랜드>에는 해적, 보물지도, 총싸움, 모험과 항해와 탐험이 등장한다. 그런데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보물섬]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호기심 넘치는 소년이 아니라 능력 있는 여자 해적 선장이다. 선장을 맡을 만큼 담대하고 멋진 성격에, 속임수가 필요할 때는 연약한 아가씨 흉내도 낼 줄 안다. 해적이니까 당연히 선량한 사람은 아니지만 주인공답게 믿음직스럽고 매력적이다. 이 선장님은 영화 초반에 괜찮게 생긴 사내놈을 주워다 유용하게 써먹는데, 덕분에 중간 중간 로맨스 분위기가 살짝 곁들여지는 점도 내 취향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주인공은 보물을 차지한다. 상당히 뻔하고 통속적이지만 그만큼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더욱이 여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는 지나 데이비스다. 이걸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지? 조니 뎁이 주연인 <캐리비안의 해적>보다 훨씬 좋지 않나? 역시 어디 가서 굳이 말을 꺼내진 않지만, 그래도 진짜, 솔직히?

   내 고백을 들은 홍지로는 고민하다가 진지한 답변을 돌려주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이야기였다. 많이들 <컷스로트 아일랜드>를 망작이라고 하지만 그건 확증 편향의 오류라고 생각한다. 계속 망작이라고 부르니까 영화를 안 본 사람도 비웃을 준비부터 하는데 그런 상태에서 비웃음 사지 않기는 힘들다. 게다가 이 영화는 여자 주인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중심으로 주도권을 쥔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은근슬쩍 남자 파트너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작정하고 만든 여성주의 영화이고, 지금 봐도 보기 드문 성취다. 지나 데이비스는 페미니즘 영화로 손꼽히는 <델마와 루이스>의 주연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영화도 눈여겨볼 점이 있다. 특히 지나 데이비스를 중심으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나는 감격해서 눈물을 (속으로) 줄줄 흘렸다. 맞아! 모험물에다 여자 주인공이 돋보이는 영화라 좋았던 건데! 좋아할 만한 이유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풀어낼 수 있다니. 더군다나 지나 데이비스는 훌륭한 배우일 뿐만 아니라 ‘지나 데이비스 연구소’의 설립자다. 연구소의 정식 명칭은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Geena Davis Institute on Gender in Media)’로 이름대로 미디어에 나타나는 성차별과 관련한 연구에 힘쓰는 곳이다. 가장 유명한 연구는 배우의 성별에 따른 비중 차이를 분석한 것이다.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영화와 드라마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출연 시간, 대사의 분량, 역할의 중요도 등은 남성에 비해 확연히 적었다. 2016년에 발표된 보고서에서도 여성의 분량은 남성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올해 연구 중에는 96회의 오스카상을 분석한 결과가 있는데, 수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 지극히 남성 제작자에 치우쳐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지금도 홈페이지에 가면 자세한 분석 결과를 볼 수 있다. 지나 데이비스에게 반하는 취향은 전혀 부끄럽지 않다. 내가 이를 <컷스로트 아일랜드>와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컷스로트 아일랜드> 취향을 부끄럽지 않게 받아들이고 나니 <갤럭시 퀘스트>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스타 트렉>과 그 팬덤인 ‘트레키’를 패러디한다. 작중에는 아무리 봐도 <스타 트렉>을 흉내 낸 SF 드라마 시리즈 ‘갤럭시 퀘스트’가 있다. 드라마는 종영된 지 오래지만 일부에게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덕분에 아직도 팬덤이 건재하다. 드라마 팬인 ‘퀘스터리안’들은 컨벤션을 열거나 코스프레를 하는 등 열렬한 애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배우들은 SF 드라마의 이미지가 너무 깊이 박힌 탓에 ‘갤럭시 퀘스트’ 이후 변변한 배역을 얻지 못했다. 함장 역할을 맡았던 ‘제이슨’은 팬들에 여는 컨벤션에 나가서 으스대는 게 일이고, 다른 배우들도 전자제품 매장 오픈 행사에나 등장하는 등 생활이 여의치 않다. 그러다 어느 날 이들은 컨벤션에서 외계인 코스프레를 한 팬들에게 출연 제의를 받는다. 여타 제의와 비슷한 일이라고 여긴 배우들은 유니폼을 입고 드라마 속 우주선을 똑같이 구현한 세트에 올라탄다. 그리고 진실을 깨닫는다. 우주선은 실제 우주선이고, 외계인 분장을 한 사람들은 진짜 외계인이었으며, 우주선 바깥은 정말로 우주다.

   이런 소동은 외계인 무리가 지구의 ‘갤럭시 퀘스트’를 픽션이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인 탓에 발생한다. 그들은 드라마 내용을 고스란히 구현했다. 물론 그들의 기대와 달리 배우들은 함장이나 의사가 아니다. 주어진 배역대로 대사를 말했을 뿐이지 드라마 속에서와 같은 전문성은 없다. 그래도 우주에 던져졌으니 배우들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엔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육중한 함정을 돌파하고(외계인들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런 엉터리 요소마저 놓치지 않았다) 나쁜 외계인 무리를 물리쳐야 한다. 배우들은 ‘갤럭시 퀘스트’를 누구보다 꿰고 있는 진짜 전문가, 진성 팬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팬들은 부름에 응한다. 방구석 오타쿠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머리를 맞대고 길을 알려주는 장면은 꽤 감동적이다. 애정으로 굳게 연결된 이들이 결국 무언가를 해내는 모습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것마저 픽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현실에서는 외계인들의 우주 전투에 끼어들어 활약하는 사건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일어나지 않는다. 옛날옛적에 끝난 SF 드라마를 파고들어 봤자 그 지식을 실제로 써먹을 기회는 좀처럼 없다. 자신이 무언가의 팬이라는 사실은 자부심을 품는 데 그리 도움되지 않는다. 팬들의 노력이나 노동에는 보수가 책정되지 않는다. 팬은 그냥, 남들이 우습게 보든 말든 대가가 있든 없든, 좋아하는 마음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다. 세련된 취향이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에서조차 <갤럭시 퀘스트>는 코믹하고 어설프다. 뻔하고 통속적이고 유치한 세계를 메타적으로 담는 영화가 심각하거나 묵직할 수는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갤럭시 퀘스트>는 <스타 트렉> 팬덤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스타 트렉>의 허술한 면을 웃음거리로 삼고 팬덤과 출연진을 노골적으로 패러디하는, 바로 그런 면이 환영받았다. 팬들은 자기네 장르의 결점까지 잘 알기 마련이다. 나중에는 심지어 <갤럭시 퀘스트> 제작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되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사람도 당연히 죄다 팬이었으리라.

   SF 장르도 마찬가지로 진지하지 못한, 다소 저속한 취향으로 치부되었다. 뻔하고 통속적이고 유치하다는 평은 오랫동안 SF를 따라다녔다. 자기들끼리만 좋아하는 마니아의 장르라는 표현도 곧잘 볼 수 있었다. 전부 맞는 말이다. 모든 SF가 ‘삐용삐용’이나 ‘으아아악!!’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지만, SF를 좋아하다 보면 분명히 그런 면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SF 팬들이 우리끼리 아는 농담을 하는 점도 맞다. 타임머신은 안이 밖보다 커야 하고, 항구의 하늘은 방송 끝난 텔레비전 색이다. 로봇은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외계인은 지구를 침략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우주로 진출하다 보면 웜홀을 발견할 텐데, 초광속 이동에 성공한다면 은하제국을 건설하는 게 정해진 수순이다. 이런 농담에 깔깔대고 있으면 ‘고급’ 소리는 못 듣는다. 반면 문학성이 부족하다든가, 성찰이 없다든가, 허무맹랑하다는 소리는 자주 들을 수 있다. 나는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SF가 사회의 통념보다 훨씬 넓고 깊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팬심을 참지 못하고 고백하기도 한다. 취향을 평가하는 시선 앞에서 부끄러움을 털어버리는 데는 두 가지 질문이 도움이 된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그게 뭐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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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비비디바비디부 홍순인 이거 제가 쓴 건데 들어 보세요. 나는 ‘네튤농’이라는 포크 밴드에 소속된 ‘작가’다. 밴드에 작가가 웬 말이냐고 따진다면 뭐라고 할 말은 없다. 네이버에서도 네튤농을 등록할 때 밴드에 작가라는 포지션은 있을 수 없다며 결국 나를 퍼커션으로 소개하게끔 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작 열여섯 가지 유형으로 인간 유형을 분류하는 건 신봉하면서 전 세계 보편적인 밴드 구성에 반기를 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뭐, 고분고분 인정하면서도 서운하긴 했다. 참고로 나는 INFP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시를 써 가면 죄다 디테일한 묘사뿐이라 시인이 될 수 없다는 평가를 받던(싱잉랩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평가도 있었다.), 화성학의 기초도 떼지 못했지만 밴드의 일원으로서 약 100회가량의 공연을 해낸 돌팔이 음악가이자,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에서는 비록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런, 정말 그런 내가 포크 밴드에서 ‘작가’로 살아가게 된 어떤 우연에 관한 이야기다. 때는 바야흐로 2013년, 대학교 4학년 1학기에 축제 위원장을 맡으며 학교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였다. 당시 학교 축제 기획에 도움을 주었던 기획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진짜 시에 대해 공부하고자 했지만 너처럼 노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책상에 앉아 있겠냐는 주변의 만류로 기분 좋게 기획사에 입사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특히 ‘이규범’을 만났다. 나와 같이 하루하루 일을 쳐내 가며 밤이 되면 야근을 하다가 술을 마시고 좁은 방에 여럿이 구겨져 자고 다음 날에는 이걸 또 반복했다. 대학원에 가면 불행해진다지만 기획사에 가도 불쌍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다만 그런 의미 없는 날들 속에서 이규범이 나와 달랐던 점이 하나 있었는데, 이규범에게는 ‘싱어송라이터’라는 꿈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신기했다. 어떻게 싱어송라이터가 된단 말인가. 이규범은 노래도 못 했고 가사도 못 썼다. 나는 회사의 기획서와 제안서 내의 글과 카피를 대부분 담당하고 있었고, 평소 인디 밴드 음악을 굉장히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규범은 가사와 관련해 나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나는 싱잉랩 정도는 할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을 제안해 줬고 종종 밤늦게까지 회의실에서 같이 노래를 불렀다. 꿈이 있다는 게 부럽다기보다 나도 싱어송라이터가 되어 보면 어떨까 막연한 상상을 해 보던 밤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이규범은 회사를 떠났다. 정이 많이 들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규범이 첫 앨범을 낸다며 찾아왔다. 나는 그 앨범의 소개 글을 써 주었다. 솔직히 좋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안티팬의 입장에서 소개를 하는 글을 써 주었다. 나는 진심을 담은 글로 편하게 족발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이규범은 두 장의 앨범을 더 냈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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