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기
- 작성일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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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기
이주라
역사 없는 사극
언젠가부터 사극과 시대극에서 역사가 사라진 지 오래다. 2000년대 초반 팩션(faction)의 열풍을 시작으로 역사적 자료는 상상의 원천이 되었고, 역사극은 역사적 사실에 현대적 상상력을 덧입힌 트렌디한 드라마로 재탄생하였다. 영화 <왕의 남자>나 드라마 <대장금>은 조선왕조실록의 단 한 줄짜리 기록에서 시작하였다. 역사적 공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일이 판타지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대중문화 속에서 역사극은 더 이상 역사적 고증이라는 부담을 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실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서 역사극을 볼 때 역사적 고증이 잘 되었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기준은 의미 없다. 역사극 자체가 역사적 허구이고, 이미 허구적 상상의 세계로 재구성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허구의 세계 속에서 대중이 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재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재미가 있다고 해서 역사적 왜곡을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대중 수용자는 역사적 허구를 허구로 인지하고 있으며, 허구적 재현 속에서 왜곡된 부분에 대해서는 관련 논쟁을 통해 문제 사실을 인지하고, 스스로 정보 검색을 통해 역사적 왜곡을 수정할 만한 충분한 판단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극을 볼 때 너무 고지식하게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재현했냐 아니냐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요즘에 역사극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다른 걱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팩션의 시대 이후로 최근 역사극 드라마들이 대부분 ‘한복 입은 로맨스’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역사극을 볼 때 역사적 고증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기는 하지만, 그래도 계속 마음에 찜찜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하게 잡아낼 수 없어서 아예 역사극을 보지 않는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재밌자고 보는 드라마 아닌가. 알 수 없는 답답함 때문에 휴식의 시간을 날릴 수는 없었다.
그러다 최근 우연히, 일 년 전쯤 방영한 ‘한복 입은 로맨스’를 보게 되었다. 조선 시대 양반가의 딸이 자신만의 옷을 몰래 만들어 팔다가 타임슬립을 하여 21세기 한국에 오게 되고 거기에서도 한복 디자이너로 활약하면서 조선 시대 자신에게 닥쳤던 곤경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다. 여주인공은 조선 시대에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갑작스럽게 죽게 되었는데, 현대 한국으로 타임슬립해 보니 조선 시대의 인간관계가 똑같이 반복되었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여주인공은 이 살인 사건에 숨겨진 전모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조선 시대로 돌아가 자신을 죽인 범인을 잡는다.
예상외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국 걸리는 부분이 생겼다. 문제는 조선 시대로 돌아간 여주인공이 범인을 잡는 장면이었다. 여주인공이 갑자기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범인을 쫓아가는 것이다. 마침내 여주인공이 범인을 잡는다. 이 범인은 덩치 큰 남자 하인으로, 몽둥이를 들고 쫓아온 여주인공 집 노비들도 이미 물리치고 도망갔다. 그런데 우리의 여주인공이 한복 치마를 펄럭이며 그 범인을 잡은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은 멋있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양반가의 여식이 진짜 서양 시대극의 귀족 여성처럼 승마와 양궁까지를 배웠을까. 이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는 것은, 역사극은 역사적 고증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것보다는 과거라는 시공간 자체가 꼭 저렇게 현재와 유사해야 할까. 이 의문이 더 크게 다가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근 고증을 가볍게 넘어서는 역사극에서는 과거라는 시공간을 현재 우리가 사는 현실 그 자체 혹은 일상에서 경험한 문화 콘텐츠와 동일한 방식으로만 상상한다. 현대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자신만의 성취를 이루어 내고, 적극성을 가지고 자기 일을 스스로 해결하며, 심지어는 신체적인 능력도 뛰어나서 격투 장면도 소화를 하는 것처럼, 조선 시대 여인들도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돈을 벌며, 담 넘기, 활쏘기, 변장, 달리기 등은 쉽게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허구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과거는 현재와의 대화라고 했으니, 현재의 관점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도 좋다. 다 인정한다. 그래도 과거가 현재와 동일할 수는 없다. <박씨전>처럼 조선 시대 여성에게도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구국의 영웅이 되고자 욕망은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 현실에서는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통해 허구적 상상으로나마 또 다른 존재가 되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현재에 가능한 것이 과거에도 똑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최근 역사극 드라마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과거의 삶이 현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상정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과거는 사라진다. 과거의 역사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중 하나는 현재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배우게 한다는 점이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기 전 개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했는지, 임금이 곧 국가이던 시절에 국민이 국가라는 공화정의 이념은 과연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여성에게 현모양처의 삶을 강요했던 시대 여성의 욕망은 어떤 균열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렇게 낯선 세계를 생각하게 해 주는 것 또한 역사의 기능이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가치와 태도가 적용되지 않는 또 다른 세계도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와 동일한 시공간이 아니다. 현재의 시선에서 보면 오히려 낯선 세계일 수 있다. 역사극은 허구적 상상을 통해 과거에 대한 재해석을 할 수 있지만, 과거를 현재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라고 재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브리저튼(Bridgerton)>의 경우처럼, 현재의 정치적 올바름을 구현하기 위해 역사극에 흑인 여왕과 귀족의 존재 가능성을 전제로 깔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흑인 여왕의 등장으로 인종 차별이 완화된 시대가 과거에도 있었다면, 그 진보적 과거에 왜 귀족 여성들은 아직도 결혼에만 얽매여 있는 존재인 것인가. 인종차별도 사라졌는데 왜 그 시대에는 가부장 중심의 일부일처제는 사라지지 않았는가. 무엇보다도 위험한 일은 그 시대 실존했던 대다수의 흑인 노예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현재도 엄연히 존재하는 인종 차별과 젠더 차별의 현실을 과거라는 판타지 시공간에서부터 역사적으로 정성스럽게 지워나가게 된다는 점이다. 그 결과 현재는 우리가 문화적이고 예술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구현해 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고, 과거는 현재의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적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현재의 시야에 갇혀 버리게 된다. 현재 경험할 수 없는 낯선 과거를 통해 낯선 세계를 사고하면서 얻을 수 있는 새롭고 다양한 시야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동일화라는 지옥
모든 것을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만 바라보면 사고의 폭은 좁아진다. 낯선 세계가 불편하여, 그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왜곡하여 편안하게만 받아들이면 새로움을 통해 확장될 수 있는 세계는 사라진다. 새로움의 경험은 다양성의 확장이다. 새롭고 낯선 것은 우리가 자신의 제한된 시야에서 벗어나 다양한 삶의 가치를 수용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최근 대중문화에 나타나는 모습은 과거도 판타지의 2차 세계도 모두 현재의 반복일 뿐이다. 그렇게 동일한 현재의 무한 지옥에 갇혀 있다.
연상호의 <지옥>은 다름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고, 모두의 같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문제적 상황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지옥>은 사적 복수, 사이비 종교, 처벌하는 신, 공정성 추구에 대한 강박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들면서 생겨나는 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 지점을 흥미롭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화살촉’이라 불리며 새진리회의 강령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집단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화살촉 집단은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틀렸다’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틀린 사람들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사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동을 사회의 정의 구현이라고 생각한다.
새진리회와 화살촉 집단은 현재의 기준에서 인간의 죄를 찾고자 한다. 아빠가 다른 아이를 둘이나 낳은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이 죄인으로 지목된다. 사람들은 그 여인의 죄를 추측한다. 어쩌면 유부남들과 바람을 피워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아이를 혼자 낳아 기른 것일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죄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죄는 낭만적 연애를 통해 결혼을 해서 일부일처제 가정을 순결하게 유지해야 하는 근대 가족 체제에서 생겨난 죄다. 그것은 현재의 죄일 뿐이다. 그 죄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죄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현재에도 어딘가 존재하는 모계 중심 사회에서는 죄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화살촉 집단은 현재의 가치와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라 판단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맞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모두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른 사회를 상상하는 능력이 없다. 그렇게 현재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공정성의 기준이 정의의 모든 기준일 것이라 생각하는 사고의 빈약은 폭력의 정당화로 손쉽게 연결된다. <지옥>은 이런 동일화에 대한 요구가 낯선 타자를 배제하며 인간 사회의 다양성을 폭력적으로 파괴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옥>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재 한국 대중문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현상 중 하나는 모두가 자신에게 낯선 세계를 배제하고 익숙하고 편한 세계에 계속 머무르려고 한다는 점이다. 내가 알고 있고 그래서 익숙해서 불편함이 없는 세계 속에서 그것과 같은 세계만을 무한 반복 생산하고 있다. 최근 대중문화의 과거라는 시공간 그리고 판타지의 2차 세계는 현재의 세속적 욕망을 손쉽게 구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로서만 활용될 뿐이다. 그래서 과거는 현재와 같아지고, 판타지의 세계도 현재와 같아진다. 이런 동일화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다양함을 추구할 수 없다.
그런데 동일성의 추구가 단지 폭력적인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동일성의 추구는 점잖고 교양 있는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최근 한국 출판계의 베스트셀러로 올라오는 소설 중에 ‘K-힐링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를 단 작품들이 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나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 아니면 『메리골드 마음세탁소』처럼 현실에서 곤경에 처한 주인공들이 판타지 공간으로 가서 마음의 치유를 하고 돌아와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 내는 이야기들도 있고, 『불편한 편의점』이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처럼 현실 세계의 특정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치유하는 이야기도 있다.
비록 홍보 문구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들은 ‘마음의 치유’를 내세운다. 이때 이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마음의 치유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다른 좋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소통을 하면서 나 자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의 어떤 기준이 마련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작품들에서 좋은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래야 한다. 그렇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나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가, 그와 동일한 좋은 사람을 만나서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은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야지만 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는다는 말이 된다. 결국은 나와 동일한 자아와 마주해야지만 나는 치유 받을 수 있다. 이는 나와 다른 타자, 낯선 타자, 그래서 불편한 타자는 만나지 않겠다는 의미일 수 있다. 이른바 ‘K-힐링 소설’에서 말하는 마음 치유도 이렇게 낯선 타자에 대한 배제, 익숙한 동일성에 대한 추구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현재 한국 대중문화에는 폭력적인 방식이든 교양 있는 방식이든 나와 다른 타자를 불편해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질성에 대한 배제와 동일성에 대한 추구는 우리 사회가 낯선 타자의 존재를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대중문화를 통해 현재의 욕망을 읽어 낼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이렇게 낯선 타자에 대한 수용성이 사라져 가는 것의 위험성을 감지하는 것이다. 낯섦은 새로움이고, 새로움은 불편함이다. 이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우리 사회의 수용성을 높이고 다양성을 넓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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