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 작성일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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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이훤
이번 여름 나는 지독한 갈증에 시달렸다. 하루 몇 컵씩 물을 마셔도 몸이 아우성쳤다. 더 많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어쩌면 너무 많은 마음을 쫓느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곤란해졌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소화가 안 되고 소화가 안 되면 자연히 몸에 수분이 부족해졌다. 하여 또다시 갈증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내가 평소 불안과 맺고 있는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했다.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위태로워지곤 하는데, 무엇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이미 내가 불안한 사람이었는지, 불안은 어디든 자라므로 그가 날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건지. 불안한 자는 취약해진다. 취약한 자는 더 불안해진다. 어떤 세계는 정확한 수순을 모른 채 이어진다. 불안과 느슨하게 잘 지낼 방법을 찾고 있다. 어차피 여기 오래 상주할 것 같다. 불화해 왔지만 같이 살아야 한다면 그를 반려해 버리겠다. 그런 각오로 방 한편에 앉혀 놓고 달래도 보고, 듣기도 하고, 어깨 위에 데리고 다니며 삼십여 년간 함께의 방식을 찾고 있다. 불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유 없는 불안. 이유 있는 불안. 타인에게 건네받은 불안. 나의 말과 행동을 놓아주지 못해 자초하는 불안 등 모습을 달리한다. 불안은 상상하기 어렵고 형체 없어서 익숙하거나 귀여운 물성을 입혀 본다. 이름을 붙여 본다. 그러면 조금 더 친해진 것 같고‧‧‧ 어떤 식으로든 조화하는 듯 느껴진다. 이유 없는 불안은 증식을 멈추지 않는 대나무와 닮았다. 키우는 화분이 시름시름 앓는 여름에도 대나무는 쑥쑥 자란다. 땡볕을 견디며 성인 정강이만큼 큰다. 대나무 유형의 불안은 빠르게 자라고 빠르게 퍼진다. 들춰 보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출구를 모르는 숲에 터를 잡은 박새처럼, 나는 대나무 사이를 서성인다. 온갖 나무가 거기 자라고 있다. 내가 쓰이지 않을 거라는 기우. 종이책이 점점 덜 팔리고 희귀해져서 작가란 직군이 줄어들고 사진가마저 AI에게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온갖 크고 작은 걱정이 모두 여기 속한다. 근거 없이도 그들은 자란다. 잘 살고 싶어서 한 번씩 낫을 들고 그 앞에 선다. 뿌리부터 베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숲 전체를 뽑고 싶지만 참는다. 어차피 다시 자랄 것이다. 솎아 내면서 나무들을 한 그루씩 배우고 기록한다. 마음이 기우는 방식을 배운다. 박새가 계절의 풍향을 배우듯. 한편 실체 있는 불안은 재빨리 손을 빠져나간다. 마음을 더디게 알아차리는 사람은 언제나 늦다. 하루가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한다. 직업 때문에 생겨나는 불안도 있다. 작가들은 신간이 나왔을 때 책의 추이를 살핀다. 3년간 쓴 책이 세 달도 안 돼 잊히기도 한다. 중요한 행사에 모객이 잘되지 않을까 봐 마음 쓰기도 한다. 숫자보다는 거기서 일어나는 만남이 언제나 중요하지 않겠냐고 친구에게 말하고, 나도 가끔 돌아서서 북토크 예매 상황을 살핀다. 언제든 작가로서의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마음들이다.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연말에 평소와 다른 사진 전시를 앞두고 있다. 익숙한 평면에서 이미지를 꺼내 보고 있다. 즐거운 상태로 준비하지만 전시는 말미에 가까워질수록 해야 할 일이 늘어난다. 시도 만큼이나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나 현재형으로 뾰족한 작업을 기대 받는 숙명은 좀 잔인하다. 증명하려고 무언가 만들던 시절도 있었지만 더는 아니다. 목소리 내고 싶어 만들기 시작하지만 어쨌든 결과물도 중요하다. 좋아야만 다음 기회가 오고‧‧‧ 그때 다시 목소리 낼 수 있다. 세계를 잘 받아적으려면 공간과 지면이라는 게 필요하니까. 오랫동안 작업을 아껴 준 독자들을 떠올리게 되는 밤이 있다. 빠르게 뛰어다니는 우려들은 발이 많다. 민첩하고 조용하다. 고양이와 닮았다. 주시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 어떤 날은 근처에 머물며 하나씩 돌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들이 곧 나의 동력이기도 하다. 잘하고 싶고, 가장 좋은 걸 주고 싶고, 치열해지는 마음 모두 거기서 기인한다. 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 이 시절 나의 지도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고양이들은 대나무 숲 주위를 오가며 큰다. 말이나 눈빛 같은 데서 시작될 때도 있지만 내가 결정해야 한다. 어디까지 실체 삼을지. 어느 색 고양이를 쫓을지. 어떤 불안은 함께 지내기 어렵고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불화도 아니다. 다만 계절마다 토마토가 자라듯 불안은 삶이라는 넝쿨을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뿐이다. 어제 베어 먹은 열매가 아직 그대로 있다. 일부는 멀쩡하고 일부는 상했다. 어떤 날은 나라는 인간이 조금 상한 열매도 자라는 과수원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숲을 가만히 걷다가 토마토들을 본다. 설익은 토마토, 불그스름한 토마토, 먹음직한 토마토와 반쯤 죽음 토마토. 대나무 숲 사이로 들어선다. 거기에는 고양이도 뛰어놀고 둥글고 시들시들하고 새파란 토마토들이 열려 있다. 흔들리는 이파리와 말라가는 껍질들을 본다. 반려 방식은 계속 변할 거다. 세계와 내가 관계 맺는 방식도 계속 변할 거다. 숲이 이동할 거다. 우리도 이동할 거다. 몇 그루의 대나무를 베고 등을 돌리자, 네 발 달린 동물들이 뛰쳐나가는 게 보인다. 오래된 울음소리 때문에 저녁이 호박색으로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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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입니다. 이번 호의 주제는 정다연 편집위원이 참여한 ‘나의 반려들’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존재에게 삶을 빚지며 살아갑니다. 그 존재는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고,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 사물일 수도 있습니다. 저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우리와 오랜 시간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만은 변함없습니다. 이번 기획에서는 세 명의 작가가 각자의 반려가 되어주었던 대상에 대해 소개합니다. 그들의 반려 이야기에 자신의 경험을 포개보면서 즐겁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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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비비디바비디부 홍순인 이거 제가 쓴 건데 들어 보세요. 나는 ‘네튤농’이라는 포크 밴드에 소속된 ‘작가’다. 밴드에 작가가 웬 말이냐고 따진다면 뭐라고 할 말은 없다. 네이버에서도 네튤농을 등록할 때 밴드에 작가라는 포지션은 있을 수 없다며 결국 나를 퍼커션으로 소개하게끔 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작 열여섯 가지 유형으로 인간 유형을 분류하는 건 신봉하면서 전 세계 보편적인 밴드 구성에 반기를 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뭐, 고분고분 인정하면서도 서운하긴 했다. 참고로 나는 INFP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시를 써 가면 죄다 디테일한 묘사뿐이라 시인이 될 수 없다는 평가를 받던(싱잉랩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평가도 있었다.), 화성학의 기초도 떼지 못했지만 밴드의 일원으로서 약 100회가량의 공연을 해낸 돌팔이 음악가이자,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에서는 비록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런, 정말 그런 내가 포크 밴드에서 ‘작가’로 살아가게 된 어떤 우연에 관한 이야기다. 때는 바야흐로 2013년, 대학교 4학년 1학기에 축제 위원장을 맡으며 학교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였다. 당시 학교 축제 기획에 도움을 주었던 기획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진짜 시에 대해 공부하고자 했지만 너처럼 노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책상에 앉아 있겠냐는 주변의 만류로 기분 좋게 기획사에 입사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특히 ‘이규범’을 만났다. 나와 같이 하루하루 일을 쳐내 가며 밤이 되면 야근을 하다가 술을 마시고 좁은 방에 여럿이 구겨져 자고 다음 날에는 이걸 또 반복했다. 대학원에 가면 불행해진다지만 기획사에 가도 불쌍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다만 그런 의미 없는 날들 속에서 이규범이 나와 달랐던 점이 하나 있었는데, 이규범에게는 ‘싱어송라이터’라는 꿈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신기했다. 어떻게 싱어송라이터가 된단 말인가. 이규범은 노래도 못 했고 가사도 못 썼다. 나는 회사의 기획서와 제안서 내의 글과 카피를 대부분 담당하고 있었고, 평소 인디 밴드 음악을 굉장히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규범은 가사와 관련해 나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나는 싱잉랩 정도는 할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을 제안해 줬고 종종 밤늦게까지 회의실에서 같이 노래를 불렀다. 꿈이 있다는 게 부럽다기보다 나도 싱어송라이터가 되어 보면 어떨까 막연한 상상을 해 보던 밤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이규범은 회사를 떠났다. 정이 많이 들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규범이 첫 앨범을 낸다며 찾아왔다. 나는 그 앨범의 소개 글을 써 주었다. 솔직히 좋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안티팬의 입장에서 소개를 하는 글을 써 주었다. 나는 진심을 담은 글로 편하게 족발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이규범은 두 장의 앨범을 더 냈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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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대먹튀 시대에서 예술의 쓰임에 관하여 오웅진 벨라 타르가 세상을 떠났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번역 신간이 집에 도착한 직후 그의 부고 소식을 들어 공교롭다는 생각을 했다. 소식을 듣고 멍청하니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벨라 타르의 1994년도 영화 〈사탄탱고〉의 한 주인공 이리미아스 역할을 했던 배우(Víg Mihály)가 동시에 이 영화의 음악 감독이었다는. (실은 주인공 같은 건 없다, 감독에 따르면 자신의 영화에서 굳이 주인공이라면 ‘시간’ 정도)1) 작품에서 그가 분(扮)한 역할을 설명하자면, 아니 그를 쉬이 욕할 수 있도록 거칠게 요약하자면 ‘곗돈을 들고 튄 계주’쯤 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죽는다. 아이의 죽음, 그로 인한 공통의 슬픔을 바탕으로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집 가장 깊숙한 곳에 박아 두었던 돈을 모으게 되는데, 계주는 그 돈을 들고 튐으로써 스스로를 사탄과 편히 겹쳐 보게 돕는다. 소설은 카프카의 짧은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2) 앞서 언급한 떠난 계주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도, 작품 속 마을 사람들 삶의 대부분은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음악이란 게, 혹은 춤이라는 게 실은 곗돈을 들고 튄 저 악마 같은 계주쯤 되는 것은 아닌지 말해 보고자 한다. 소설 『사탄탱고』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85년, 그의 최근작 『헤르슈트 07769』가 쓰인 것은 2021년이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그가 좀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의 첫 장을 펼쳐보고 안도했다. 짧은 문장 한 줄이 나를 반겼다. “희망은 실수다.”3) 그가 여전히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 그를 믿게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다수가 음악인인데, 이는 독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예컨대 누군가 주말마다 부장님에 의해 호출되어 산을 탄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어쨌든 그가 산에 성실히 오르고 있으니 산악인이라 충분히 불릴 자격이 있다고 믿는 이라면, 이 소설 속 다수의 인물을 또한 능히 음악인이라 불러도 좋다. 소설에선 부장님 대신 ‘보스’라는 이름으로 음악인들의 리더를 달리 부른다. 보스는 바흐에 관하여 얘기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단원들 역시 보스가 바흐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건 그들이 바흐에 관해 듣길 좋아한다는 말과는 사뭇 다르다. “보스는 그들이 바흐에 대한 보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리허설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카나 심포니는 아마추어 음악가들로 자기 악기에 어느 정도 능숙하게 다루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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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지문 너머로 하나의 선율이 아를 lilysacredlily · 20251228_slowslofi playset 최초의 기억은 들렸던 것이다.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 할머니는 늘 자기 전에 적혀 있는 그것들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할머니가 나를 부를 때,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또 다른 생경한 목소리와 리듬으로 그것들은 발화되었고 그 목소리는 음악처럼 들렸다. 할머니는 거기에 분명히 있었지만 어느 영겁 너머 다른 차원에서 내려오는 작은 신의 목소리처럼 들렸기에 그 소리의 흐름 속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나 또한 내가 무엇인지, 내가 있는 곳을 잊어버렸다. 그 뜻 모를 말들을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듣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거의 기도처럼, 주문처럼, 노래처럼 들렸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전해지고 또 쓰인 것들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나에게로 전해졌고 어린 나는 그것들을 어설프게나마 소리 내어 보기도 했다. 그 유년의 밤 동안 할머니는 나의 유일한 이야기꾼이었으며, 어린 나의 두 귀가 되어 주는 밤의 훌륭한 안내자였다. 구전. 우화. 신화. 전설. 민담. 시대를 넘어서도 계속되는 이야기들. 되풀이되는 노래 같은 것들. 요정. 고블린. 거인. 요괴. 도깨비. 기사와 문지기. 바드와 리라. 검과 용사. 광장의 하프 소리. 그것들은 때때로 꿈속을 수호하며 때론 일상의 그림자들이 되어 호출하면 응답할 것만 같았다. 들려지는 것들이 쓰여질 때, 쓰여진 것들이 들릴 때. 적혀 있는 것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귀로 전해지는 것. 반복해서 전해지고 지금도 여전히 전승되고 있는 것. 어느 날 들렸던 하나의 목소리가, 어느 한 구절이 누군가를 살렸다면, 그로 인해 살아갈 수도 있다면 그것은 신앙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빌어 준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기대어 계속 갈 수 있었던 수많은 시간들로부터 지금도 계속되는 어떤 순간들이 지속될 수 있었을 뿐이고 그다음이 있기를 그 순간들로부터 감히 바랄 수 있었던 것이다. 늘 목숨처럼 붙들고 있지만 동시에 늘 너무 아득하기만 한 것에 대해 대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끝에 일주일도 안 되어서 나는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며칠 동안 정신이 몇 번이나 나갈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셀 수 없을 정도로 꿈을 정말 많이 꿨는데 잠깐의 꿈에서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의 소리였겠지만 귓가에서 목소리는 오래 머물렀다. 병실의 침대가 아니라 이제 마침내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나는 온 건가? 눈을 뜨면 나의 옆에 누워 그것을 읽어 주는 할머니는 없었지만 나는 들었다. 이곳을 넘어서, 시간을 넘어서, 세월을 넘어서. 그 밤 이전의 무수한 밤들로부터, 그 밤의 영겁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던 목소리를. 초연해지고자 열망하는 마음을 이미 초월해 있는 곳으로부터 목소리는 들린다는 것이. 나의 뼈의 일부는 부러졌고 언제까지 누워 있어야 할지 그때는 몰랐다. 부서진 건 뼈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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