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一人詩爲(일인시위) ‘고독사’

  • 작성일 2017-09-01

[기획]

 


포에트리 슬램이란?

시를 쓴 후 이를 슬램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
2차 대전 이후 시인과 래퍼들이 이를 세상을 향한 발화형태로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一 人 詩 爲 (일인시위) ‘고독사’ - Poetic Justice

 

 

 

 

 

DNR

 

김경주

 

 

내 가슴엔 문신이 하나 있어
DNR(do not resuscitate)이라는 글씨야
의학용어로 심폐소생술을 거부한다는 뜻이야
내 심장이 멈추면 더 이상 날 살려 주지 말아 줘
멀리 있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이제 그만 해줘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전 화장을 하고 자곤 해
마지막 화장일지 모르기 때문에 곱게 하고 싶어
벽에 돌아누워 화장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눈물을 흘려

 

어느덧 내 머리칼은 흰 폭설로 하얗게 변했어
이불 속에 누워서 삶이 가여워서 나는 웃곤 해
다시 아침이 온다면 살아서 웃음이 날 것 같아
열심히 삶을 속여도 늙는 건 못 막아
열심히 삶을 속여도 늙는 건 못 막아

 

밤이면 발이 차가워지고 별이 차가워지고 눈물이 차가워지곤 해
내 쇄골은 빗물이 가득 고일 만큼 파였어
심장이 멈추어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다면 행운이야
가장 인간다운 자연사라고 하니까

 

방구석에서 지내다가 죽어서 썩어 발견되긴 싫어
내 앞가슴의 문신을 읽어 줘
DNR do not resuscitate
열심히 삶을 속여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 난 이불 속에 누워서 삶이 가여워서 웃곤 해
아침이 온다면 살아서 웃음이 날 것 같아

 


 

DNR

 

Kyung ju Kim

 

 

There is a tattoo on my heart.
It says DNR.
In gastroterminology this means please do not engage in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If my heart stops beating please don’t try to save me.
I don’t want to be a burden on my kids.
Cures that prolong life have no meaning. I quit them.

 

Before I go to bed I urinate.
I don’t know if this will be my terminal urination, so when I pee
I wish to pee beautifully.
I turn toward the wall. Because I can’t pee, I cry.

 

All of a sudden my hair has greyed into a blizzard.
Hiding under the sheets, my life has gone to shit.
I feel bad for myself so I laugh.
If I live to see another day, what a joke.
Even if you trick life, you can’t stop getting old.
Even if you trick life, you can’t stop getting old.

 

At night my feet have gone cold. The stars have gone cold. My tears have gone cold.
In my collarbone raindrops have stagnated into a pool.
To die naturally of a heart attack would be a blessing.
That’s the most human way in natural history.

 

I don’t want to be found rotting in the corner of a room somewhere.
Read the tattoo on my chest.
DNR. Do. Not. Resuscitate.
Tricking life, I’ve come this far but
Hiding under the sheets, my life has gone to shit.
I feel bad for myself so I laugh.
If I live to see another day, what a joke.

 


 

 

 

 

 

 

 

 

단독생활동물

 

 

제이크

 

 

바다 속을 내려다보시오
난 바다거북이다. 산호초에서 수영하고 내 등껍질을 긁지.
산호초군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 나는 다른 생선을 좋아하는 편 아니다.
내 지느러미를 잡지 마!
난 수영하면 나 혼자만 해.
나무속을 올려다보시오
난 입에서 밖으로 유칼립투스 나무 잎에 매달려 있는 코알라.
얼굴을 찡그리지 않아도 내 얼굴은 찡그리게 생겨서 계속 화가 나 보이는 동물이다
가까운 것들 내 발톱 안에 가득해
그래서 난 친구가 한 명도 없어
난 정신건강 이상 이력이 있는 불곰이다
난 동굴에서 소주 한 병 마시면서 박쥐들이 귀가 있는 것을 알아서
난 말 안 하고
동굴 벽이 내 생각들을 훔치고 싶은 것을 알아서
난 생각 안 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들 의탁하지 마
바위로 만든 것들은 믿을 수 없지
언제 어느 때나 누구나 경찰을 부를 수 있겠지
좌심실에 살고 있는 주머니곰은
우심실의 주머니곰을 향해 으르렁거린다.
둘 다 밤새도록 싸워 난 못 자
심전도를 읽은 후 의사가
심장에 주머니곰의 똥이 가득하다고 말했어
심장 박동이 불규칙한 게 아니라
인간 심장에게 내 흉곽이 아주 작다고
버마재비가 남편의 머리를 잘랐다
남편 시체를 먹었다가 버마재비가 인간 외로움을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버마재비가 자살했어
개미들이 곤충류 중에 제일 사근사근한 곤충이지
개미들은 버마재비의 시체를 먹었다
세계에서 버마재비 존재의 흔적이 없어졌다
내 아파트에서 버마재비가 사라진 후에
다른 개미 음식이 없어진 것을 알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바닥에 누웠고 이렇게 말했다
개미들! 나를 먹으라고
그렇지만 개미들이 내 몸을 거부했고
하나씩 하나씩 개미들은 여왕개미에게 희생했다
개미 군대 없이 여왕개미는 한순간도 살고 싶지 않아서 여왕개미가 자살했지
그리고 나는 여왕개미 시체를 머리부터 먹었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 살 수 있다
내 삶은 혼자 사는 삶이다
곤충들, 내 제일 친한 친구들, 다 이별했지
나는 오리너구리 같다
믿기 힘들겠지만 오리너구리는 평생을 거의 완전히 혼자 산다
흙과 지조(枝條) 만든 은신처에서 오리너구리가 뺨을 핥고 있다
오리너구리가 1년에 한 번 집 밖으로 나간다
사육하기 위해
그렇다고 나는 오리너구리 같은 사람 아니다
나보다 오리너구리가 섹스 많이 하는 동물임을 알게 돼서
그런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
난 오리너구리가 아니어서 세계에서 나를 원하는 동물이 없다
지금은 그래 난 나이 먹었고 쓸모없고 내 가족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옛날에 난 젊었을 때 잘생겼고 내 꿈들은 번쩍거리는 별 같았다
지금은 어두운 풀과 풀 먹는 검은 젖소의 차이를 볼 수 없지
내 꿈의 하늘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난 혼자 살고 플라스틱 슬리퍼밖에 다른 신발이 없어
왼쪽 슬리퍼의 끈이 찢어져서 강력 접착테이프로 수리해서 붙였다
비 오는 날에 모자처럼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고 여기저기 플라스틱 양동이를 흩어 놓고
물을 모아
난 양동이에 물을 모으는 것이 내 직업인 척해
난 한 양동이에 물을 모으면 5천 원을 나에게 수수료를 지급한 척해
난 6개월에 한 번 나에게 연봉을 인상한 척하고
6개월 뒤에 힘든 경제 상태 때문에 나는 나에게 연봉을 인상하지 않은 척해
길에서 지나가면 나는 너 생각하는 이 알아
무슨 냄새야?
난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 냄새는 그런 것이다
난 염두에 두지 않는 냄새이다
나는 양동이에 물은 모으는 남자이고
세계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알아
그리고 세계에서 내가 사리지면 너에게 얼마나 좋지?
나는 안 먹는 고기 지방, 통에 새우 머리, 범죄의 얼굴이 수치심,
발끝에 문질러 제거하는 각질이다
나는 잉여인간이다
목발로 편의점에서 절뚝절뚝 걸어가고
직원의 눈에 보이지 않게 소주 한 병을 산다
인간 눈알 안에 인간 인형이 있지
나는 모딜리아니 같다
몸이 있지만 눈구멍에 눈알이 없다
난 내일 죽을 거야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페이스북 업데이트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죽어도 페이스북 업데이트 없다면 진짜 죽었어?
생각해 봐요
난 몇 년 동안 내 페이스북 업데이트 안 했어
그래서 몇 년 동안 아무것도 안 했어
내 죽음은 내 삶, 마찬가지잖아
걱정하지 마 난 박근혜 트럼프 같은 사람 아니다
난 hashtag 없다
너 트위터 피드에서 내 환한 빛이 없다

 

 

Solitary Animals

 

 

Jake

 

 

Look down into the sea,
I am that sea turtle using the coral to scratch the belly of my shell.
But just because I hang out at the reef doesn’t mean I like other fish.
Don’t try to grab my fin.
When I swim, I swim alone.
Look up in the trees.
I am a koala with a eucalyptus leaf sticking out my mouth.
This angry grimace is a permanent expression I wear on my face.
The insides of my claws are caked with those who get close to me.
That’s probably why I have no friends.
I am a brown bear with mental health issues.
When I drink alone in my cave I know the bats have ears,
So I don’t speak.
The walls are trying to capture my thoughts,
So I don’t think.
Never trust anyone who sleeps upside down.
Never trust anyone who is made out of earth.
Any moment someone or something might call the police.
The tasmanian devil that lives on the right side of my heart
Growls at the tasmanian devil that lives in the left side of my heart.
They fight all night so I can’t sleep.
When I got an EKG the doctor said
Both sides of my heart are clogged with Tasmanian devil shit.
It’s not that the beat of my heart is irregular
It’s that my chest wasn’t meant to hold a heart.
After the wife of the praying mantis cut off her partner’s head
And ate his body, she began to understand human loneliness
So she killed herself.
Ants, who are the most social of all insects,
Came and ate every part of her body until not a trace
Of her existence was left. After the mantis’s body was gone,
The ants scoured my apartment, but they had nothing left to eat,
So I laid on the floor and I said, Ants! Eat me!!!
But they rejected my body, so
One by one they sacrificed themselves
To their queen and then the queen killed herself because she
Couldn’t bear the thought of living without an army.
Starting with her head, I ate the body of the queen.
I can live alone
Because that is what my life has become.
The insects who were my best friends have left me.
I am like a platypus.
Believe it or not, the male platypus lives almost the entirety of its life alone.
In a simple burrow packed with dirt and twigs
In the ground above the water, the male platypus licks its face.
It only comes outside one day a year.
That day is the day he finds a female to breed with.
I guess I am not like a platypus.
When I think of this fact I realize that
Even the platypus has more sex than me and it makes me cry.
Because I am not a platypus, no animal would want to breed with me.
Not now. I am old and useless and even my family doesn’t love me.
I was once young and beautiful and my dreams were like flashing stars.
Now you can’t tell the difference between the black cows bending into dark grass in the field.
That’s because the sky of my dreams has gone dim.
I live alone and the only shoes I own are plastic slippers.
The left slipper has a strap that is held together with duct tape.
On stormy days I put a vinyl bag on my head and collect water in buckets outside.
I pretend collecting rain water in buckets is a kind of job.
I pretend to pay myself 5 thousand won per bucket of rain water collected.
I pretend to promise myself a raise every 6 months and every 6 months
I pretend the economy is not doing very good
So I pretend not to give myself a pretend raise.
When I pass you on the street, I know you are looking around,
Thinking to yourself, “what’s that horrible smell?”
I don’t care anymore. That’s what the smell is.
The smell of me not caring.
I am the man with the buckets of rainwater
And I know I am not needed
And I know you want me to disappear.
That’s why I am the fat you cut off the end of your steak,
Those heads of shrimp in a tin bucket,
The look of shame on the face of a criminal,
Dead skin you scrub off the edge of your feet.
Excess human.
I walk with my crutches to the 7-11 and get a bottle of soju.
I don’t look at the eyes of the clerk when I pay.
The eyes of a human being contains a human soul
And I am like a Modigliani.
I have a body, but there is no me inside me.
I will die tomorrow and no one will find me.
That’s because there won’t be a facebook update.
If there is no facebook update, then the action didn’t happen.
For years I haven’t updated my facebook.
For years I haven’t done anything.
My death will be like my life.
Don’t worry though, I am not like Park Geun Hye or Donald Trump.
Nothing I do ends up as a hasthag.
I don’t light up your twitter feed.

 

 


 

 

 

 

 

Review

 

김봉현

 

 

이번 화의 주제는 ‘고독사’다. 김경주의 시와 제이크의 시를 천천히 읽어내려 가던 나는, 문득 이 시들이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혼자 살고 있고 자주 혼자 밥을 먹는다. 옆집 남자하고는 딱 한 번 인사한 것이 전부고 얼굴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옆옆 집에는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게는 집 주소를 틀리게 알려줬고 어젯밤에는 페이스북 친구 4천 명을 정리했다. 친구 없는 게 요즘 좀 힙해 보이는 것 같아서 오래된 몇몇과는 일부러 싸웠다. 나는 지금 거실 쇼파에 혼자 누워 맥도날드 리치 초콜릿 파이를 먹고 있는데, 만약 내가 이 상태로 죽는다면 누가 날 발견해주는 거지? 다음 책 마감을 독촉하던 편집자 고우리씨? 아니면 이 글을 받아내야 하는 이미선씨?

 

쓸데없는 상상은 이쯤 하기로 하자. 결론적으로 이번 화의 작품들은 지금까지를 통틀어 가장 접근성이 높다는 생각이다. 화려한 기교나 어려운 상징 같은 것이 거의 없어서 지금까지를 통틀어 가장 쉽게 읽혔다. 어찌 보면 시라기보다는 수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와 별개로 엠씨메타는 ‘일인시위’ 프로젝트를 통해 실험을 계속 진행 중이다. 다양한 비트, 다양한 랩 스타일, 그리고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을 계속해서 실험하고 있다. 래퍼는 새로운 것을 예전의 방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오래된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엠씨메타는 김경주의 시를 힙합이 현재 지닌 가장 새로운 방식으로 소화했다. 고독사라고 해서 그는 고독하게 뱉어내지 않는다. 대신에 선동적이고 음울한 ‘트랩’의 방식으로 시를 재창조한다. 반면 (이번에도 동물이 등장하는) 제이크의 시를 그가 소화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엠씨메타는 마치 재즈 랩을 연상하는 비트와 랩으로 제이크의 시와 만난다. 자칫 밋밋해질까봐 후렴에 간단한 노래도 직접 부른다. 예상 가능한 어울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다. 모든 고독한 자는 이 노래 안에서 휴식하라.

 

 

 

 

 

 

 

 

 

 

 

김경주
참여 / 김경주

시인, 극작가, Poetry slam 운동가.

 

제이크
참여 / 제이크 레빈

아이스크림 황제

 

MC메타
참여 / MC메타

힙합 음악가. 현재 <금기어> 발표 가리온 3집 준비

 

김봉현
참여 / 김봉현

힙합 저널리스트. 대중음악, 그중에서도 힙합에 관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네이버뮤직, 에스콰이어, 씨네21 등에 글을 쓰고 있고 레진코믹스에서는 힙합 웹툰을 연재하고 있다. <서울힙합영화제>를 주최하고 있으며 김경주 시인, MC 메타와 함께 시와 랩을 잇는 프로젝트 팀<포에틱 저스티스>로 활동 중이다.

 

Lei
참여 / Lei

그래픽 디자이너

 

   《문장웹진 2017년 09월호》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스스로 고른 빛

[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스스로 고른 빛 허희 1. 주어진, 선택한 이름 본명은 주어진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먼저 도착해 있다. 이름으로 불리고 거기에 반응하며, 어느 순간 명명된 내가 곧 나라고 믿으며 자란다. 그러한 점에서 본명은 숙명과 비슷하다. 삶의 첫머리에 놓인, 직접 쓰지 않은 나의 첫 단어. 반면 필명은 스스로 취한다. 이러한 선택이 자율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대 정신, 언어 감각, 타고난 기질 등이 개입하니까. 그럼에도 마지막에 나의 의지는 남는다. 새로운 이름으로 한번 살아 보고 싶다는 미래형의 소망이 필명에 깃든다. 그래서 필명은 완성된 자아의 명패라기보다, 아직 닿지 못한 어떤 상태를 향한 선언에 더 가깝다. 그러기에 왜 필명을 쓰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략 두 갈래의 답이 떠오른다. 하나는 일상을 살아가는 나, 글 쓰는 나를 분리하기 위한 실용적 장치라는 설명. 다른 하나는 본명보다 조금 더 문학적 자아를 추구한다는 낭만적 소명이다. 실제로 나의 경우 필명은 어떤가 하면, 그 두 지점 사이 생활의 편의와 문인-되기의 욕망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러기에 필명을 둘러싼 사정은 꽤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직접 이름 하나를 골라 자기 앞에 내세우려면 오랫동안 자신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필명은 자기를 향한 해석의 과정이자,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장의 행로를 설정하는 제일 짧은 서문이라고 할 만하다. 내 필명은 ‘허희’다. 성은 내 본래 성인 양천 허씨의 ‘허’이고, ‘희’는 ‘빛날 희’다. 여기에는 극적인 계시나 비밀 따위는 없다. 다만 이러한 고민은 품었다. 필명으로 불릴 때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어떤 글쓰기의 윤리를 두 음절로 새겨야 하나. 따져 보면 필명의 두 음절 안에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이어받은 것(계보)과 내가 갖고 싶었던 것(지향)이 나란히 들어 있다. 사람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전적으로 주어진 것도, 온전히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 존재. 물려받은 것 위에 스스로를 덧쓰고, 선택한 것을 통해 과거를 다시 반추하며 산다. 반은 유산이고 반은 결심인 셈이다. 나는 이름이 한 사람의 캐릭터를 표상하는 한편으로, 그에 따라 그 사람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고 여겼다. 운명론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명은 애초에 그러려고 지은 이름이 아닌가. 사람들은 필명으로 나를 부르고, 나는 그 이름으로 원고를 보내고 서명한다. 호명이 누적될수록 필명은 실체화되고 힘을 갖는다. 필명이 가면과 다른 이유도 거기 있다. 가면은 상황에 따라 벗을 수 있지만, 오래 사용한 이름은 어느새 나와 일체화된다. 그러니까 필명은 나에게 자기를 감추는 수단만은 아니었다. 자기를 재발명하는 방법이었다. 필명에는 묘한 이중성이 있다. 사적으로 고른 이름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공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사소한 일에 마음이 흔들리고, 어떤 날은 쓸 문장을 한

  • 허희
  • 2026-04-01

문장웹진 기획

옷장과 언어

[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옷장과 언어 이자켓 저는 작가로 마주하는 첫 만남에서 대부분 필명에 관한 질문을 받습니다. 그럴 때 꺼내입는 자켓은 한 벌이 아닙니다. 제게는 각기 다르게 디자인된 자켓이 여러 벌 있고 매 시기 골몰하던 것을 나름대로 다르게 직조해 보며 다른 답을 해 봅니다. 각기 진의를 담은 것이라 하나만 꼽아 진실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글은 그중 한 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매번 다르긴 하여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면 ‘자켓’을 말할 때 문학을 빼놓은 적은 없습니다. 필명에 관한 질문은 질문자에게서 비롯된 것이지만, 저는 그보다 이전에 ‘자켓’에 대한 질문자이기에 이 명명에 문학을 둘러싼 어떤 관점이 깃들어 있음을 염두하고 있으니까요. 문학은 무상을 가장한 유상의 것입니다. 자연히 주어지는 것 같지만 물질적 지불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형태의 지불은 따르기 마련이고 그러한 점에서 거래처가 불분명한 자영업과도 같습니다. 그러한 인위 속에서 예상치 못한 덤이 따라옵니다. 신기루 같은 덤은 원두 찌꺼기가 담긴 쓰레기봉투를 내놓을 때, 건너편 상점의 불이 꺼졌을 때, 공산품을 포장하고 있을 때 거미처럼 있다가 사라집니다. 이 가게는 폐점한 다이보 커피가 여전히 연중무휴하듯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 태도를 따릅니다. 매일 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처럼 때로는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잊으며, 한편으로 옷을 입어야 하는가 되물으며 가게를 열고 닫지요. 저는 특별히 옷을 모으거나 자주 구매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빈티지와 구제를 구분하며 옷의 내력과 미학을 따르는 이도 아닙니다. 다만 옷을 입고 살기에 되도록 편하고 잘 맞는 것을 갖추어 오래도록 입습니다. 지금 옷장에 있는 옷들은 대개 10년이 넘었거나 비교적 새것인 제품들은 제 성정을 잘 아는 이들에게 선물 받은 것입니다. 제가 추구하지 않아도 삶에는 여러 변화가 있겠습니다만, 제가 의도를 가지고 추구하는 변화는 문학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면 충분하다고 여겨왔습니다. 작년 봄에는 꿰맬 수 없이 해진 것들을 정리하였으니 어떤 옷들은 이미 그리고 아직 내가 착용하는 옷들은 무형이 되어 갑니다. 나도 그렇게 되어 갑니다. 내게는 주요한 옷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시장에서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사다 준 잠바의 모습을 한 것인데 짙은 쪽빛에 표면이 매끄러운 것입니다. 스포츠를 위한 바람막이 디자인이었고 지금도 즐겨 입는 필드 재킷의 디자인과도 닮았습니다. 품이 넉넉하고 부담 없이 입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어 갑니다. 그것을 입고 그와 비슷한 색채의 어둠 속에서 맹꽁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을 입고 배드민턴을 치러 한겨울에 나섰다가 추위에 떨며 스테인리스로 된 벤치에 웅크려 있을 때 친구들과 이름 모를 동네 아이들이 패딩을 벗어 제 위에 쌓아 두기도 했습니다. 그때 옷더미 속에서 포근한 어둠을 보았고 드문드문 소리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을

  • 이자켓
  • 2026-04-01

문장웹진 기획

미완의 봄, Primave

[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미완의 봄, Primave 김봄 이십 대 중반, 나는 강남구 신사동에 작은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지 6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다년간의 아르바이트 경험으로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은 자신 있었다. 회사만 아니면 된다, 뭔가 작게라도 만들어 팔 수 있는 가게를 해 보자, 그런 마음으로 사방을 떠돌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강남시장 인근을 걷다 가게 자리를 발견했고 나는 몇 주 동안 매일같이 가게 앞으로 출근해 시간대별·연령별 유동 인구를 조사했다. 신사대로와 압구정대로 사이를 가로지르는 꽤 널찍한 골목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유동 인구가 많았다. 커피 선호도가 높은 소호 사무실이 많은 동네였고, 연령대도 청장년층이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권리금도 없이 월세 30만 원만 내면 되는 자리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굳은 의지만 가지고 결심한 바를 밀어붙였다. 그런데 정작 가게를 계약한 다음부터는 모든 게 물음표로 남았다. 내 머릿속에는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라는 막연한 테마만 존재했을 뿐 어떤 콘셉트로 가게 이미지를 만들 것인지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가게 이름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데, 무어라 부르지?” 나는 난데없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그렇게 쿨하고 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미 그 골목 곳곳에 즐비한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들처럼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만들 생각도 없었다. 수중에 가진 돈으로 어림없는 일이기도 했다. 커피 가게의 정체성은 커피 원두가 좌우하는 법이니 나는 이태리 원두 ‘라바짜’를 사용하기로 한 것에서부터 가게 콘셉트를 잡아가기로 했다. 당시 주변 가게에서는 9,800원짜리 코스트코 스타벅스 원두를 사서 쓰거나, 그와 비슷하거나 더 낮은 가격으로 유통되는 영세업자들의 원두를 사다 썼다. 대상에서 만든 ‘로즈버드’라는 전문 브랜드는 가격도 품질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내 입에는 좀 가볍게 느껴졌다. 진하면서 크레마가 풍부한 커피를 만들어 승부하고 싶었기에 나는 대담하게도 44,000원짜리 라바짜 원두를 선택했다. 1킬로그램 원두 한 봉지에 100잔 정도 커피를 만들 수 있는데, 컵과 뚜껑, 컵 홀더, 빨대와 같은 부자재와 우유 등의 식재료 가격을 따져 보면 다른 가게에 비해 마진율이 크게 떨어졌다. 이문이 좀 적게 남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려고 도전하는 것이니만큼 나는 공들여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가게는 작아도 이탈리아 원두를 쓰느니만큼 정통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고 가게 이름을 이탈리아어에서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단어들을 후보군에 올려놓고 고민하다가 ‘봄’을 뜻하는 ‘프리마베라(Primavera)’로 결정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실개천이 녹아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 오페라 주역 여성 가

  • 김봄
  • 2026-04-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