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2024년 10월호

  • 작성일 2024-10-01

기획의 말

《문장웹진》은 연초에 독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나만 알고 싶은, 다시 보고 싶은 《문장웹진》의 작품을 그 이유와 함께 추천받았고 해당 작품은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로 하여금 시각화하였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최제훈, 「추출 혹은 작곡」을 읽고(《문장 웹진》 2023년 6월호)

점선면



점선면 작가 한마디

기억은 연주자에 따라 변주된다.


독자의 한마디

여러 번 읽을 가치와 재미가 있어요.


▶최제훈, 「추출 혹은 작곡」 감상하러 가기

점선면 작가

불규칙한 것들로 규칙적인 우리의 모습들을 그립니다.

문장웹진 10월호 살펴보기

내가 그때 알던 물

내가 그때 알던 물 김미령 미안해요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어요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내가 하려던 말은 나를 남겨 두고 혼자 걸어가 지금쯤 집에 다다랐을 것이다 한동안 우린 물 위의 오리를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리가 아니었고 눈앞에 호수는 있지도 않았고 아까부터 저기서 우릴 향해 짓궂은 표정을 짓던 아이가 의자에 드러누워 테이블을 차기 시작했다 피곤한 날이군 하늘은 점점 흐려지는데 이쯤이면 이제 우리 중 누가 물을 엎지를지도 괜찮냐고 거듭 미안하다고 말하며 급히 닦다가 다시 컵을 깨뜨리기도 하면서 이런 날이 처음은 아닌데 이 장면들 중 내 기억이 아닌 것은 무엇이고 곧 다가올 경험은 또 무엇 휴일 아침은 탁자 위의 물방울 하나에서 흘러나와 시간의 앞뒤로 무한히 뻗어 가는데 어디선가 자동차 경보음이 들렸다 어제의 꿈에서인지 근처 주차장에서인지 그 소리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좀 걸어 볼까요? 우리는 먼길을 돌아 호수공원까지 갔다 오리배들이 밧줄에 묶여 목을 까닥이며 무언가 아는 흉내를 냈다

  • 관리자
  • 2024-10-01
외출

외출 김동균 양우산을 쓴 사람.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얼굴이 있을 거야. 양우산을 접어도 있을 거야. 초콜릿도 먹고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으면 입꼬리에도 묻을 거야. 가방에서 티슈를 찾을 땐 한쪽 어깨를 올리고 목과 어깨 사이에 우산대를 끼우고 있을 거야. 티슈가 없다면 창피한 모습을 가리는 데도 양우산이 쓰일 거야. 아무튼 있을 거야. 없다면 찾을 때까지 양우산을 쓰고 얼굴을 붙인 다음 양우산을 접을 거야. 결국에는 집에 들어갈 거야. 방에서는 드러날 거야. 양우산을 쓴 사람. 한밤에 불을 끄고 잠에 드는 사람. 잠들기 전에 얼굴을 떠올려 볼 거야. 전원이 꺼진 모니터에 검은 얼굴이 비칠 거야. 거울 앞에선 적나라하게, 냉장고 문을 닫을 때마다 얼핏얼핏. 그러나 모르는 사람의 이마와 눈과 귀를 어디서부터 조립하고 어떻게 떠올려야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양우산을 쓴 사람은 양우산을 쓴 사람으로 깜깜하게 있을 거야. 양우산이 있는 사람은 모두 양우산을 쓴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죄다 얼굴이 있을 거야. 없다면 찾을 때까지 양우산을 쓰고 있을 거고. 얼굴이 생기지 않는다면 가마솥더위에 밖으로 나오지는 않을 거야.

  • 관리자
  • 2024-10-01
예체능

예체능 김중일 망친 도화지를 찢었어. 물통에서 그만 잠이 넘쳤거든. 잠이 넘쳐서 흘러나온 그림자를 과자부스러기처럼 빨아들이는 여진들. 그걸 목격한 동공 지진. 붓을 든 채 깜빡 졸던 중에, 그만 졸음을 스케치한 여진들. 찢긴 도화지에 난 여진들. 여태 최적의 비율을 찾으려 바람과 바다는 서로 섞이며 물타기 하는 중. 수평선에 줄타기하는, 바다를 찾은 뭍사람들의 상념들. 하루에 한 장씩 찢겨 나가는 실패한 그림들. 무슨 소리, 찰나의 한 장이라는 말. 여태 지구를 그리고 있는 삼색 볼펜은 알다시피 해와 달과 그리고 그림자를 그리는 발. 기본적으로 그림자를 잘 그리는 것이 그림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그림자 선생님이 말했어. 명보다는 암이나 잠을 잘 그려야 하듯. 잘 써야 하는 색깔은 엷은 투명, 짙은 투명, 흰 투명, 검은 투명 등등. 오늘의 주제처럼 주어진 오늘의 물감. 해를 쥐어짜자 발끝에서 흘러나오는 엷은 밤. 확인 불가능한 찰나 떠오르며 대기 중에 녹아버린 러닝 타임이 담긴 숫자. 미술 시간 끝난 건가요 묻지도 못하고 일단 달렸어, 내가 아니라 미술 시간에 내가 열심히 그리던, 머리 팔 팔 다리 다리 의도치 않게 온몸이 손의 형상을 한 그림자가 나를 바통처럼 꼭 쥐고 이어달리기. 그림자가 낀 장갑처럼 젖은 내 옷. 미술 시간의 여진인지 한여름의 초록이 짙어지며 갈빛을 띰. 검정은 가장 짙은 초록. 그려진 궤적을 따라 하루 한 바퀴 도는 트랙. 밤의 건물 안을 통과하는 찰나의 하룻밤. 나를 나에게 건네다가 그만 떨어뜨림. 떨어져 뒹구는, 바통처럼 꼭 쥐고 있던 기억. 실수도 루틴. 건물 안에 침대를 들이고, 떨어진 바통처럼 침대에 뒹굴며 황망히 관중석에 빼곡히 놓인 잠을 열어 보지만, 열리지 않는 잠. 잠을 청해 보지만, 응하지 않는 잠. 이루지 못한 잠. 높이 쌓지 못한 잠. 반듯이 세우지 못한 잠. 그것은 당장은 달리기를 멈추는 것처럼, 불가능. 함성처럼 흩어진 잠이, 일으켜 세우지 못한 잠이 대신 그림자가 되어, 잠시 넘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 나를 줍고 다시 꼭 쥐고 건물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 그림자의 손에 매달려 나뭇가지의 참새처럼 종일 재잘거린 나. 여름 나무의 이파리들이 뜬눈의 눈꺼풀처럼 깜박이고 있어. 그 눈꺼풀 안에 얼음 눈동자들은 폭염과 여름 때문인지 녹아 사라졌어. 내 눈동자를 나무 이파리 안에 넣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그림자가 초록색인 걸 알 수 있어. 오늘의 기록은 단축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어, 그것이 상관없다는 걸. 열심히 그려도 잠도 그림자도 늘 미완성, 그래서 손가락이 겨우 다섯 개뿐이라 자꾸 불면의 나를 밤중에 떨어뜨리는 것도. 초록 옷의 그림자야 널 탓하는 건 아니야. 그저 달리는 네 손에 매달려 살짝 멀미가 나는데, 검은 눈동자 같은 나무 그늘 속에 빠진 눈썹 한 올처럼 붙어 잠깐 찌르고 싶어. 거슬리게 하고 싶어. 아무라도 눈물 나게 하고 싶어.

  • 관리자
  • 2024-10-01
여름 생활 계획표

여름 생활 계획표 김중일 당신이 온다고 해서 수박을 샀어요. 청과점에서 가장 큰 수박을. 십 킬로는 훌쩍 넘을 거예요. 걸음마를 떼고 막 뛰기 시작한 한 아이가, 공처럼 어디로 뛸지 종잡을 수 없는 아이가, 넘어질라 붙잡으려 해도 달처럼 맴돌던 아이가 불시에 내 품안으로 넘어질 때처럼, 와락 뛰쳐 들어올 때처럼 묵직한 수박을 받아 안습니다. 아이가 두드린 가슴이 텅텅 울리네요. 수박을 두드려 봅니다. 물동이처럼 묵직한 수박, 덕분에 심장이 다시 뜁니다. 수박을 들고 오는 내내 또 떨어뜨릴까 놓칠까 많이 애썼어요.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산산조각 깨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이 온다고 해서 깨끗이 목욕시킨 수박을 반으로 잘랐습니다. 당신은 오지 않아 그 많은 걸 혼자 다 먹었어요. 체내에 수분이 들어차니 눈물도 쉽게 툭툭 잘 나와요. 슬플 때 먹어 보시면 알아요. 걸으면 몸 안이 철렁 철렁합니다. 다음날 당신이 다시 온다고 해서 남은 수박을 반으로 잘랐어요. ‘잠자기’하듯 잠자코 기다려도 당신이 오지 않아 혼자 먹었어요. 또 또 눈물! 그런 핀잔을 먹더라도, 수박의 그 많은 수분이 눈물이 되더라도 먹어야죠.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잖아요. 어차피 찬 눈물은 다 버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여러 번. 마지막으로 당신이 온다고 하는데, 한 번도 온 적이 없는데 이번의 마지막은 어떤 마지막인가요. 일일 생활 계획표의 삼십 분짜리 칸만큼 남은 수박은, 오든 말든 당신을 위해 남겨 뒀어요. 차 한 잔도 못 마실 짧은 시간을. 선잠이라도 들라고, 당신이 오지 않더라도 나는 그것을 먹지 않을 생각입니다. 눈물로 바꿔도 얼마 되지 않고, 그 마른 눈물은 되레 나를 마른 수건처럼 쥐어짜는 일이거든요. 사실 삼십 분 동안 ‘준비’를 하게 계획되어 있었어요. 무슨 준비인지 궁금하시다면 수박 먹으러 오세요. 오신다니 다 제쳐 두고 준비하고 사내아이의 까만 머리통 같은 흑수박 한 통 사러 가려 해요. 얼마나 많은 그림자를 욱여넣어야 이렇게 속이 새빨갛나요. 세상의 모든 그림자를 화장해서 담으면 이렇게 새빨갛군요. 수박을 반으로 가르듯 한순간 한낮의 열기가 툭 내려앉는 여름 유독 빨간 저녁. 마지막으로 온다던 당신은 마지막으로 오지 않고. 잘라 놓은 반을 그 많은 걸 ‘기다리기’하며 또 혼자 다 먹어요. 밤이든 낮이든, 어느 걸 남겨 두고 어느 걸 먹을까요. 기다리다 지쳐도 빨간 눈두덩을 하고 창밖으로 내다버릴 수는 없잖아요.

  • 관리자
  • 2024-10-01
자연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박유빈 문장을 읽는다 끔찍하단 건 뭘까 나무 의자에 동여 묶인 육체가 늪에 엎질러지는 기분일까 그렇듯 말의 침몰은 세계가 끝장나는 때에 올 것이다 누군가 내게 벽만을 바라보게 한 다음 마지막 문장 남길 기회를 준다면 어쩌면 난 벽 아닌, 벽과는 다른, 벽보다는 무른 곳에 어떤 문장이든 텁텁한 글씨를 아로새길 것이다 내 것 아닌 숨 누구의 것도 아닌 멸망 호흡해야 한다 시가 하등 쓸모없는 숲에서도 호흡은 이어지고 열대림의 연속이거나 천장에 맺힌 문장부호들이거나 어느 것이든 높고 습하고 드넓게 뻗친 문장 말과 친밀한 세계라면······ 말이 말과 사귀어 이렇게 작은 방에도 천장에 간신히 매달린 글자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말은 이끼다 이곳은 단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살과 무성생식을 반복하는 버려진 시들이 모여 사는 마을 이끼 숲에서 탄생은 곧 지워짐 언제까지고 상상해봄 직한 영원한 조형 세계 지워진다는 것은 우리의 말이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 것 벌벌 떨면서도 무작정 오염될 필요 없는 것 시가 돌아온다면 몸을 고쳐서 올 것이고 시를 읽으면 두 발은 잠긴다 나무 의자에 앉아 시가 몸을 휘적이며 이곳을 향해 산뜻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실루엣을 바라본다 즐겁다기엔 신비롭다 공들여 채집한 첫 곤충을 들여다보는 마음으로 시의 발끝을 살핀다 고개를 들면 뚝뚝 육신을 둘러싼 이끼 된 단어들 오래전 늪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다섯 손가락이 발목을 잡아끄는 감각 축축해라 끔찍하단 기분은 뭘까 눈을 감고 주위를 서성이는 언어들의 둔탁한 발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머리 위 느린 종소리 쌉싸래한 바람 맛 하나에서 쪼개진 이파리들의 들숨과 날숨 손을 건네면 언어들의 고민이 이어지는 내내 나무 의자에 앉은 나는 상상만으로도 가볍게 늪을 지나고 이끼 숲의 언어 교환에 훼방을 놓고 소음을 끼얹고 숲이 곧 숨인 것처럼 마음은 의자 위에 두고 가늘게 늘어뜨린 눈빛 찌르레기가 정말로 울고 있다 말을 되감아 올리며 감은 눈이 문장을 더듬는다 무언가 뒤바뀐 문장을 찾아낸다 유심히 지켜보는 상상 속의 눈 진득해진 기분의 낯빛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습한 뒤통수와 마주친 늪의 표면 호흡한다 다신 소망하지 못할 것처럼

  • 관리자
  • 2024-10-01
돌핀스루

돌핀스루 박유빈 우린 모두가 아종이라서 칭얼대도 된단다 노을에 입혀진 것처럼 공터는 포근한 얼굴을 하지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데요 집도 없고 몸도 없지만 나는 다행입니다 발라진 살점 개개풀린 두 눈 나를 휘감고 돌아가는 모자람 몇몇 그렇게 살면 곤란합니다 한 문장 흘려 쓴 구름형 말풍선 하나 수영모처럼 쓰고 다녀요 아무도 상처받지 않아요 걷는다 공터에 거품이 가득하길 바란다 슈퍼맨처럼 공터를 일곱 바퀴 반 돌면 분명 제정신은 아닐 거야 성을 쌓을 수 없는 모양뿐인 모래땅 무르팍 생채기 같은 붉은 하늘 공터의 냄새가 후텁지근하군요 빙빙 걷는다 걷다가 투명한 벽에 이마를 부딪친 척 멈춰 섰다 멍하니 입 벌리고 있으면 누가 들어와 씹히고 가만히 씹다가도 먹히는 우리에게 눈이 생겨서 수족관 속 우리에게도 물밑에 버려진 미증유를 구하려고 온몸이 무지갯빛으로 뒤덮이고 해답같이 비늘은 돋아나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왜 물밑인 걸까요 계속 걷는다 걷다가 고개를 휘젓는다 말라붙은 마음보다 헛헛한 공터 그게 참 밉다 너는 민물고기의 제왕 나는 멸종하는 돌고래 슈퍼맨은 그냥 외계인 우리는 공터의 슈퍼 물고기죠 대륙 모양 나룻배를 타고 떠돌고 있어요 뱅뱅 돌고 돌다가 보얘지는 눈앞 동공이 커지고 얼굴은 뜨거워지고 빛을 되쏘는 몸들 아주 긴 시간 쏘가리 없는 행성 지느러미로 걷는다 걷다가 발끝으로 모래땅 한번 헤적여 봅니다 서로를 붙들어 맨 우리 비슷한 척 미소 흘리기

  • 관리자
  • 2024-10-01
누옥 욕심

누옥 욕심 김남극 둥근 정원을 하나 갖고 싶었습니다 물을 끌어 배롱나무 꽃을 비춰 두고 자귀나무 꽃이 진 자리에 제월당1) 들이고 달 뜨면 월훈을 따서 당신 손가락에 끼워 주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나무숲 속에서 겨울을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겨울은 느리게 가고 봄은 빠르게 지나는 둥근 정원에서 한 십 년 살면 곤줄박이나 박새도 식구가 되고 메꽃이 새벽잠을 깨우는 시절을 맞이하리라 야무진 꿈도 꾸었습니다 늘 야무진 꿈은 개꿈이라서 둥근 정원은 묘연한데 모란은 삐라처럼 지고 작약은 한창입니다 각시붓꽃 앉은 자리로 해당화 노란 꽃잎은 지는데 멧새 몇 마리 날아와 소리처럼 봄볕을 흔들고 간 후 소낙비 내리고 마당 구석엔 빗물이 고여 작은 연못을 이뤘습니다 물결 사이로 구름도 지나고 꽃잎도 떨어져 화양연화 같습니다 돌아보니 누옥은 명옥헌2) 같고 돌아보니 마당은 호서장3) 같습니다 후원을 갖고 싶었습니다 부용정4)이나 활래정5)을 앉히고 은밀한 이야기가 들릴 듯한 비술나무 아래에 상사화가 피면 옛 연인의 숨결이 남은 홍매화 진 자리로 나비 몇 마리 날아와 짝을 맺든가 잠자리 암수 교미를 하는 양귀비 꽃밭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 후원을 생각하다가 뒤란에서 나물을 삶아 발에 널면서 연초록 물이 빠지는 동안 꽤나무 꽃 진 자리나 꽃사과 꽃 떨어진 자리에 맺힌 둥근 수정란을 만지면서 그 솜털이 전하는 뒤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흰 딸기꽃 진 자리에 희끄무레한 딸기가 자라고 묵은 더덕은 깊은 향기 같은 순을 내밀어 함석 울타리를 오르는 시간 나무 함지나 돌절구같이 오래전 이 자리를 떠난 조상이 남긴 유물은 그렇게 꽃피거나 재잘거립니다 재잘거리는 뒤란도 연초록 물 다 빠진 산나물이 말라 가는 풍경도 다 후원입니다 1) 제월당 : 전남 담양의 소쇄원에 있는 집 2) 명옥헌 : 전남 담양의 원림 3) 호서장 : 허균이 강릉 초당에 세웠다고 전하는 도서관 4) 부용정 : 창덕궁 비원에 있는 정자 5) 활래정 : 강릉 선교장에 있는 정자

  • 관리자
  • 2024-10-01
헌 책이 있는 새 방

헌 책이 있는 새 방 김남극 최신형 화재경보기가 자꾸 울린다 불장난 하는 꿈을 포기한 지 오랜데 묵은 책을 치우니 경보가 멎었다 오래된 것은 위험하다고 오래된 책을 읽으면 오래된 거역과 전복의 꿈 때문에 장기가 상할 수도 있다고 단명할 수도 있다고 경보가 울리다 그치고 또 울리는 새 집 헌 책 가득한 방에서 오래된 새 방에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30여 년간 강독하는 레닌이 당 건설을 위해 30여 년간 분투하고 있는 오래된 새 방에서 보낸 며칠 경보기 건전지를 빼두기로 한다

  • 관리자
  • 2024-10-01
튤립이 있는 식탁보

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궁금한 건 @너말고 '너’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궁금한 건 @너말고 '너’ 문장서포터즈 배연주 대화하다가 들으면 좋은 말 중 하나는 이거다. “요즘 읽은 책 중에 좋았던 거 뭐야?” 그 말을 들으면 30분은 떠들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질문 받기를 기약 없이 기다리기보다 먼저 보여주고 싶다. 내가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청소년 장편소설 과 단편소설집 다. ‘가장 좋다’라고 무언가를 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좋은 것에 순위를 매기고 기준을 정하는 건 힘들다. 그럼에도 두 책이 바로 떠오른 건 다시 읽고 싶어져서였다. 직장 동료들과 2~3주에 한 번 모여서 점심 독서모임을 하는데 같이 읽을 책을 내가 정할 차례였다. 나는 을 골랐다. 나도 다시 읽고 싶었고,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했다. 도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그러면서 올해 읽은 책들 중 그 책들이 가장 좋았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걸 주변에 나누고 싶은 마음과 다시 읽으며 되새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까. 두 소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소재로 sns가 등장한다. 의 등장인물들은 sns에 게시물을 올리고 댓글과 DM으로 소통한다. 의 ‘나주’는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를 운영한다. 나도 주인공들처럼 두 소설의 리뷰를 sns 이미지 속에 담아 보았다. 먼저 인스타그램. 의 친구들이 쓰는 sns는 인스타그램으로 추정된다. 독서모임을 한 후에 생각했던 것을 썼다. 가상의 DM이지만 몇몇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내가 만약 실제로 저 게시물을 올린다면 oo이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하면서. 평소에도 내가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이나 스토리를 올리면 그 주제로 대화를 거는 친구들이 있고, 고등학교 시절과 친구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있다.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에는 늘 다정함이 배어 있다고 느낀다. 인스타그램은 친구들과 소통하는 곳이니까 발랄한 느낌이 담겨 있다면 페이스북에서는 좀 더 사적이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잘 쓰이지 않는 sns. 내가 가끔 비공개로 일기를 쓰러 가는 곳. ‘나는 사실, 내가 참 싫다.’라는 소설 속 문장을 좋아하면서도 어쩐지 친구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데, 페이스북 비공개 게시물로는 무람없이 올릴 수 있다. 아이디와 프로필 사진 이미지는 가상으로

  • 관리자
  • 2024-10-01
요즘 SNS에서는 시가 유행이라고?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요즘 SNS에서는 시가 유행이라고? - 문학예술 융합 인터뷰 : 포엠맥 편 문장서포터즈 채미나 좋아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잃을 게 없어요. 너무 겁먹지 마세요. 요즘 핫한 SNS인 인스타그램에서는 시가 유행이자 젊은 세대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시를 계속해서 읽던 마니아층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시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한 하나의 흐름 속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소규모 문학 매거진 포엠맥(@poemmag)과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안녕하세요! 우선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소개 먼저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포엠매거진이고, 인스타그램에서 한국 현대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소개할 것은 없습니다. 포엠맥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 스무 살 때부터 시를 엄청 좋아했어요. 꾸준히 읽고, 혼자 쓰다가 독립 출판도 하고요. 시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꼈던 것과는 별개로 전공은 패션 디자인을 선택했는데, 졸업하고 회사도 다녔지만 미련이 남더라고요. 시를 주제로 해서 콘텐츠화하고 싶다, 시의 매력을 더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퇴사하자마자 바로 포엠맥 계정(@poemmag)을 만들었어요.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저는 전에도 유튜버처럼 콘텐츠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그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혼자서도 디자인, 브랜드 마케팅, 카피라이팅, 큐레이션 등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원래부터 콘텐츠 제작 쪽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아니면 글을 쓰시다가 자연스럽게 넘어오신 걸까요? 처음에는 100% 쓰는 쪽에 더 가까웠어요. 스물부터 스물여덟까지 세 권의 시집을 독립 출판했어요. 처음의 꿈은 시인이었어요.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시인을 병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전업 시인은 힘드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저는 쓰는 쪽보다 사람들을 혹하게 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더 적합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글 쓰는 것만큼 디자인과 마케팅을 좋아하거든요.(하하) 시에 전념하면 두 가지를 놓치게 되는 것이 아쉬웠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총합해 본 것이 바로 포엠맥이에요. 저만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져서 더 애착을 갖게 되어요. 포엠맥을 운영하면서 좋았던 점이나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포엠맥을 운영하는 매일매일이 기뻐요.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도 즐겁고, 업로드 하였을 때 사람들이 반응을 남겨 주는 걸 보는 일도 즐거워요. 매 순간 행복하지만, 최근에는

  • 관리자
  • 2024-10-01
중국에서 퍼지는 한국 문학의 ‘전파(電波)’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중국에서 퍼지는 한국 문학의 ‘전파(電波)’ 문장서포터즈 팅팅 중국에서의 한국 문학은 관련 연구자들에게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비주류 문학으로 여겨졌으며,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몇 년 동안 이러한 침체 상태가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이제 한국 문학은 중국 내에서 작은 붐을 일으키고 있다.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 이창동의 소설집 『녹천에는 똥이 많다』와 『소지』, 공지영의 장편소설 『도가니』, 한강의 장편소설 『채식주의자』, 김애란의 소설집 『너의 여름은 어떠니』 등, 중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작품들은 중국 인터넷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지난해 소설가 김초엽은 제34회 중국은하상(1985년에 제정된 중국 공상과학소설계의 최고영예상) 시상식에서 ‘최고인기외국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졌고, 중국에서 초청받아 북토크나 문학대회와 같은 문학행사에 참석하는 한국 작가들도 많아지고 있다. 아울러 한국 문학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찾을 수 있으며,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하는 목소리도 중국 독자들 사이에서 점점 커지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출판된 한국 문학 작품들은 한 가지 주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사회 속 약자의 인권, 청년들의 생활 곤경, 그리고 여성과 같은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은 중국 독자들의 큰 이목을 끌고 있다. 한국 문학이 자주 언급되는 요즘, 중국에서도 한국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블로그, 동영상, 팟캐스트 등 새롭고 젊은 방식으로 한국 문학 작품을 소개하고 전파하고 있다. 그중 팟캐스트는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로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주로 2030 고학력 도시 청년들의 지식 공유,, 사회적 이슈 토론, 그리고 다원화된 시각의 탐구를 위한 플랫폼으로서 자리 잡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중국의 팟캐스트 사용자 수는 2억 3500만 명을 넘어섰으며, 그 수는 여전히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중국 팟캐스트 플랫폼의 문학 콘텐츠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소통의 장이 되는 새로운 아지트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 중, ‘운중전파’는 멀리 중국에 있는 청취자들과 국경을 넘어 함께 한국을 읽는 경험을 공유한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한국 문학을 소개해 드리는 팟캐스트

  • 관리자
  • 2024-10-01
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 관리자
  • 2024-10-01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 관리자
  • 2024-10-01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 관리자
  • 2024-10-01
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청의 자리

청의 자리 이준아 윤의 기침소리가 아침부터 요란했다. 목을 억지로 긁어 가며 끌어내는 기침이라 답답함이 해소되기는커녕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침을 꼴깍 삼키고 싶게 만드는 소리였다. 상담이 잡힌 날이면 윤은 꼭 그런 식으로 불필요한 소음을 일으키며 단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다 목쉬겠어, 그만 좀 하지, 단이 타박이라도 할라치면 윤의 눈썹은 단박에 가파른 산등성이가 되었다. 단은 그 성질 사나워 보이는 눈을 흘기며 티가 나게 중얼거리곤 했다. 방구석 호랑이 주제에. 하지만 그날의 단은 윤에게 단 한 마디의 반기도 들 수 없었다. 윤의 상담이 시작된 이래 최초로 윤이 아닌 단이 환자인 날이었다. 그러니까 윤의 불안이 단에게서 기인한 날이었다. 하다 하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단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이런 일이 종종 있나요?” “글쎄요, 흔한 케이스라고 말할 순 없겠네요.” “이유가 뭘 까요?” 의사는 그건 앞으로 차근차근 알아보자며 그날의 상담을 마무리 지었다. 차근차근, 이라니,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입장 차이가 이처럼 분명하게 갈릴 말도 없을 거라고 단은 생각했다. 사무직에 종사하는 오늘날의 20대에게 모니터를 거부하는 증상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배울 만큼 배운 저 의사 놈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단은 의사씩이나 되면서도 충분히 젊기까지 한 그 태평한 얼굴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마지막 질문이 우선이었다. “저 혹시, 지인 추천 할인 같은 건 없나요?” 의사는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며 처방전을 써내려가는 중이었다. “음, 죄송해요. 그런 건 없어요.” 단이 진료실 문을 나서려는데 여전히 모니터에 고개를 박은 그가 인심 쓴다는 듯 말을 보탰다. “두 분이 자매시니까, 설윤 환자 분 세션 예약해 놓은 거 설단 환자 분이랑 서로 양도는 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처음 증상을 느꼈던 곳이 하필이면 출근길의 만원 지하철이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낀 단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출입문을 향해 내달려야 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객차에서 의지대로 방향을 바꾸기란 대개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당장이라도 전부 게워낼 것 같은 얼굴로 주변을 밀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승객들은 짜증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서로에게 몸을 더 밀착시켰다. 그렇게 가까스로 생긴 공간으로 단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다른 쪽 손바닥에 들린 단의 휴대폰에선 알고리즘이 충실하게 골라 준 30초 내외의 짧은 영상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플랫폼 자판기에서 물 한 병을 결제해 해갈하며 숨을 돌리자 메스꺼움은 곧 가라앉았다. 역시 마지막 하이볼은 마시는 게 아니었어, 단은 지난밤의 객기를 후회하며 남은 다섯 정거장은 도보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물에 젖은 솜 같은 몸뚱이를 겨우 일으켜 긴 계단을 올랐건만 손이 허전했다. 자판기 옆

  • 관리자
  • 2024-10-01
인간적 빵

인간적 빵* 한영원 빵이 운다 빵은 울어서 상해 가고 있다 넌 지금 내 영혼을 고약하게 취급하고 있어 그래 이 빵은 현학적이다 나는 아랑곳 않고 빵을 먹는다 빵은 사람처럼 아주 크기에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다 그냥 푹 패었다 내가 먹은 만큼 그만큼이 없다 이 빵은 피학적인 면이 있어서 나를 쉽게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더 심하게 빵을 파먹는다 빵은 나를 더 사랑하게 된다 나는 더 심하게 빵에게 군다 빵은 나를 더 사랑한다 빵은 푹 파인 인간처럼 보인다 그만큼이 없는 인간처럼 보인다 빵에게 내가 말하노니 빵이여 나를 사랑하지 마 나는 네게 심하게 대할 뿐이다 빵은 내가 자신을 먹을 때마다 자신의 영혼이 파괴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린다고 한다 더 정확히는 내가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먹혔다고 한다 나는 기분이 이상하다 그러면 지금 나에게 네 파괴당한 영혼이 있다는 것이잖아 너의 절망적인 삶이 내 안에 있다는 소리잖아 나는 빵을 먹어 현학적이게 된다 빵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빵을 안는다 빵은 나를 안을 수 없다 빵은 인간을 안을 수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빵을 안을 수 있지 나는 푹 파인 빵을 조금 먹는다 빵이 나를 사랑한다 나는 더 먹는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한다 언젠가 그는 다 없어진다 그건 미래의 일이지만 지금 나는 사랑과 동시에 먹고 있다 *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í의 「Antropomophize Bread」

  • 관리자
  • 2024-10-01
시린과 알코노스트

시린과 알코노스트 한영원 어쨌거나 종로에서 만난 그 사람은 좀 묘하다 새장을 들고 나를 만났는데 그 안에는 두 마리의 새가 있었고 이름은 시린과 알코노스트라고 한다 그들은 설화에 나오는 새들로 기쁨과 슬픔을 상징한다고 했다 나는 담배를 떨며 에스파냐어로 새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생각하고 있다 새들이 사람처럼 생겨 무섭다 새 주인은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만 그런 사람을 볼 때 느끼는 호승심 때문에 그를 사랑해 볼까도 했다 길거리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위조지폐를 나눠주는 거지가 있다 구원을 나눠준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짓밟고 있다 내 앞에 놓인 커피 위 재와 같은 눈이 살짝 내린다 거리에 있는 가게마다 불이 났으면 좋겠다 혹은 칼로 누군가를 찌르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면 좋겠다 그런 사건이 생기면 오랫동안 방관자로 있고 싶다 마치 산책을 나온 것처럼 바라보고 싶다 새 주인이 정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는 딴청을 피웠고 국제 정세 같은 것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다 그가 오줌을 싸러 갔을 때 나는 두 마리 새를 풀어 놓아 주었다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새를 풀어 주었을 때 새 주인의 반응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이라는 것들이 어떻게 그 새장에서 사라지는지 천천히 맴돌다 서서히 소멸하는지 꾸벅 인사를 하고 뒷걸음질 치는지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날아갈는지 영원히 그 새장 안에 있을 듯 나를 쳐다보는지 내 곁에 머물지 그런 뒤 나를 사랑하거나 원망할지 새 주인이 곧 돌아올 것이다 마저 커피 마셨다 * Viktor Vasnetsov의 「기쁨과 슬픔의 노래(Sirin And Alkonost)」

  • 관리자
  • 2024-10-01
원가족

원가족 김미령 다 외우고 있어서 그 기억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거기 쓰러져 있던 아이도 멀리 서서 웅성이던 거뭇한 군상들도 내가 외운 길에는 정다운 이웃이 지나고 외우지 않은 길에는 사람 아닌 것이 거긴 벚나무가 많지만 사이프러스 나무가 줄지어 있는 어느 풍경과 겹쳐지고 저 멀리 외딴 집 양철지붕은 붉은색 잘못 외웠더라도 아이가 좀 더 거기 쓰러져 있는 것이 기왕이면 아름답겠지 이제 와서 기억을 수정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앉은뱅이로 그 자리에 오래 발목이 삐어 누가 찾으러 올 때까지 가만히 낮은 노래를 부르며 또다시 외운 바람이 불어오고 외운 구름이 흐르고 키 큰 사이프러스는 아이에게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듯이 꼭대기에서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네 그때 왜 거기서 구경만 하고 있었어? 나중에 동생이 물으면 네가 도와달라고 안 했잖아 그렇게 말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동생은 아직까지 묻지 않는다 두고두고 벌을 주고 싶은 게지 그때 많이 울어서 내 눈이 퉁퉁 부었었다고 정말 그랬다고 여러 번 힘주어 말하곤 했는데 아직 어렸던 그가 정말 그렇게 기억할진 알 수 없고 지금도 모르겠다 그때의 그를 구할지 말지 조금 더 생각해 보려는 듯이 사이프러스 나무가 구불거리는 들판 사이로 나는 천천히 사라지면서

  • 관리자
  • 2024-10-01
전부 수용할 수 있는 날

전부 수용할 수 있는 날 김동균 채점하고 있어. 누가 동그라미를 치고 있어. 초록을 칠하면 청귤이 되고 노랑을 칠하면 우산이 되는 여름 안에서, 점수를 매기고 있어. 청귤도 맞고 우산도 다 맞는 거라면서 연거푸 치고 있어. 동그라미를 보여 주면서 칭찬을 주고받았어. 받은 위로는 돌려주었어. 이번에는 검은 색깔을 써볼래. 섬유 타래로 엮은 트램펄린을 끌고 와볼게. 힘껏 뛰어오르면 용수철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나는, 외국의 낯선 동전들이 주머니에서 쏟아지는, 그것도 틀린 게 아니라고 그래서 덧칠을 조금 더 해봤어. 자신감을 가지고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볼게. 이마에서 솟아난 땀이 턱 밑까지 내려가고 쓰고 있던 모자가 굴러 떨어지고 아직 한 번도 안 쓴 물감들 전부 구멍 안으로 쏟아져서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와중에, 재빨리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볼게. 아무도 없는 굴속으로 이제 막 떨어져 나왔는데 거기서도 누가 채점을 하고 있어. 반듯하게 동그라미를 치고 있어. 전부 수용할 수 있는 날이라고 그랬어. 그렇다면 지난번처럼 밖으로 나가 볼게. 가을이었어. 나무가 앙상했어. 청귤 나무보다는 컸어. 청귤 나무가 절대로 아니었어. 다글다글한 동그라미들 전부 오려서 그 나무에 매달아 보았어. 저번 때처럼 사람들이 몰려왔어. 우르르 와서 매달린 것 모조리 따 가지고 돌아갔어. 동그라미가 다 사라진 그다음 날에도 자꾸만 누가 동그라미를 치고 있어. 선생은 아니었어. 선생도 아닌데 점수를 잘 매겼어. 그래서 오늘은 “선생님” 하고 불러 보았어. 처음이었어. 선생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어. 선생님, 하는 산울림이 퍼지고 있었어.

  • 관리자
  • 2024-10-01
세 개의 컵

세 개의 컵 오은경 너의 더벅머리에서 눈을 발견한 것 같다 머리카락이고 너의 시선이 닿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 순간의 너는 머리를 흩날리면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반짝이는 눈, 너의 눈빛은 네가 너라는 것을 알려준다 나는 유리컵을 내려놓는다 커피가 남지 않아서 더는 마실 것이 없다 마실 수가 없다 컵을 다시 들어야 할 이유도, 우리는 바닥에 컵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물을 엎지를 일도, 물과 분간되지 않는 유리 파편에 다칠 일도 생겨서는 안 된다 × 나는 유리컵을 내 몸과 같이 여긴다 겨울에는 히터를,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어 온도를 조절한다 바람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닫고, 에어캡을 붙인다 방풍 테이프로 창문 틈새를 막는다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 (사고 싶은 항목을 정리한다) 나 없이도 이 집은 괜찮을까 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올 텐데 낯선 이가 침입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신경이 쓰일 테고 닫힌 것들, 밀폐된 것만 보면 열어 보고 싶어져 큐브는 여섯 개의 면을 가졌잖아 모서리부터 맞추면 돼 너는 거리에 서서 시범을 보여준다 우리는 공원에서 공연도 함께 본다 저글링을 하는 사람, 인파 속에 공연하는 이가 가려져 숨었을 때도 높이 튀어 오르는 공 여러 개의 컵 중에서 공이 든 컵은 하나다 공이 든 컵을 맞춰야 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계속 배치가 바뀐다 더벅머리, 너는 알까? 너는 언제부터 연습을 하고 있었을까 공원에 와 있었을까 * 영화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에서

  • 관리자
  • 2024-10-01
창문에 누워

창문에 누워 오은경 너에 대해 말해야겠다 너는 조금 특별하고 어딘가 유별난 데가 있어 (눈을 자주 깜빡거려, 나는 그게 거짓을 말할 때 버릇인 줄 알았어, 진실은 모르겠는데,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입장한 사람, 나타난 누군가 네게는 늘 동행이 있었다(나는 그걸 친구라 불렀지만) 어떤 관계인지 물어 볼 만큼 우리가 가깝다거나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너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이름을 알고 싶었다 내가 너를 불렀더라면, 네가 돌아봤다면 나에게도 한 번쯤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 × 갑자기 변명이 하고 싶어진다 클럽 안 사람들은 대개 말이 통하지 않았고 외국인이었으며, 잔뜩 술에 취해 있었다 너와 닮은, 비슷비슷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네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계속 클럽을 돌았고 왜 내가 혼자 남아 있는지 묻다가 너와 춤추던 (옷차림부터 머리 모양까지 똑같던) 네 옆 사람을 떠올렸다 나는 잠깐 그를 너라고 착각했는데, 정말 잠깐이었다 웃을 때 입 모양이 달랐다 슬프고 화가 났다 무섭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아주 많았으니까 (나는 혼자 남겨질 때만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는 분명 익명이었다 그런데 너와는 어떻게 만났을까? × 너의 비웃음, 너를 통과할 때 되찾은 내 그림자 (너라면 이걸 외투에 비유하겠지만 지금은 빛이 강해 더워, 더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지만 너는 손닿지 않는걸) × 계절이 돌아와 봄이 되었다 며칠 전에는 설레는 기분을 느꼈는데 완연한 봄이다 계속 창문을 열어 놓으니까, 벚꽃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어 좋다

  • 관리자
  • 2024-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