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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호

  • 작성일 2025-10-01

문장웹진 10월호를 열며

   어느덧 가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나날을 보내고 계시나요? 저는 지난여름에 미뤄둔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얼룩이 묻어 있는 옷가지만 모아 손빨래를 했어요. 어떤 얼룩은 세탁기를 몇 번이고 돌려도 소용없더라고요. 시간을 들여 손으로 문지르지 않으면 지워지지 않겠다는 듯 남아 있는 흔적들을 지우며 새 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미지근한 물에 손을 담가 옷을 주무르고 있자니 이번 가을은 많은 것을 정리하며 시작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메모를 모으고, 오래 써서 곳곳에 칠이 벗겨진 책상을 바꾸고, 솜이 꺼진 낡은 침구를 정리하는 식으로요. 그러다가 문득 이 사물들, 거기에 남겨진 흔적들이 제 일상과 뗄 수 없는 관계로 함께하고 있었음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일상의 반경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작은 원 위에서 자유롭다고”(이다희, 「실리카겔」) 느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서요.

   그런 마음을 떠올리며 이번 10월호 문장웹진에서는 시와 소설, 비평 등 다채로운 작품들과 함께 기획 콘텐츠 ‘나의 반려들’을 준비했습니다. 각기 다른 형태로 우리의 일상을 호위하는 존재를 떠올리며 함께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연수 후기와 과거 문장웹진에 발표된 작품을 다시 읽는 20주년 기획도 계속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다음 호에도 풍성한 기획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 문장웹진 편집위원 정다연 시인 외 편집위원 일동




[기획] 문장웹진 REWIND

문장웹진 20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선정한 대표 작품들을 다시 읽습니다.
시간을 넘어 되살아난 문학의 순간들과 함께,
그 의미와 감상을 새롭게 나누며 문장웹진의 아카이브를 확장합니다.

“벽돌과 줄눈으로 만들어진 경기장. 인생은 사탕을 쫒는 경주견을 위한 정물화”

문장웹진 > 기획 > 삶은 곡선이다 게시글로 이동

- 글래스카이만(glasscaiman) 작가, 편혜영의 「무한히 증가하는 숫자의 방」를 읽고

글래스카이만

북디자인, 그래픽디자이너, 책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문장웹진 10월호 살펴보기

한뫼의 방

한뫼의 방 김병운 1. 준일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산호에게서 지난주 이사를 마친 한뫼 어머니 얘기를 듣는다. 삼십삼 년 가까이 한집에서 꾸려 온 살림을 옮기는 것이라 짐이 어마무시했다고, 웬만큼 추리고 나누고 버렸는데도 많아서 결국 1.5톤 트럭 다섯 대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잘은 몰라도 보통 일은 아니었겠구나 싶다. 산호에 따르면 이사 당일은 순조로웠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었으나 날씨는 줄곧 흐리기만 했고, 이주 일자 막바지까지 버티느라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텐데도 어머니는 의외로 담담했다.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였다. 이사비에 용돈까지 얹어 주며 고맙다던 어머니에게서 분실 신고가 잇따랐으니까. 어머니는 찾는 게 안 보인다 싶으면 곧장 산호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하는 모양이었다. 포장 이사이긴 했으나 애초에 남이 정리해 줄 수 있는 성격의 살림이 아니어서 일단 되는 대로 욱여넣게 됐는데, 어머니 입장에서는 뭐가 어디에 어떻게 들어 있는지를 몰라 애먹는 상황이었다. 어제는 슈퍼집 여자가 선물해 주었다는 산토리니 마그넷, 그제는 십수 년 전 외상 대신 받았다는 시바스 리갈 양주 세 병, 엊그제는 당장 입으려고 보자기에 따로 싸 둔 여름 옷가지. 산호는 손가락을 접어 가며 분실 품목을 열거하더니, 지난 엿새 동안 단 하루도 그냥 넘어간 날이 없다며 질린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고는 다행히 오늘 신고 건을 제외하고는 전부 찾았다며 안도한다. 오늘은 뭔데? 신발. 신발? 어, 어머니 운동화. 한뫼가 사 준 거라 아낀다고 몇 번 신지도 않은 건데 아무래도 그 집에 두고 온 것 같다고. 혹시 모르니 시간 날 때 가서 확인해 줄 수 있느냐고. 너무하시네. 그지, 너무하시지. 산호는 두 해 전 애인인 영근 씨와 함께 이사 일을 시작했는데, 주로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 같은 소형 가구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이나 요즘에는 팀을 짜 큰 이사도 척척 해내는 중이다. 단골도 적지 않고 주력 플랫폼 평점 또한 5점 만점에 4.98점을 기록하고 있어 이제는 웬만큼 자리를 잡은 것 같다는 게 산호의 자평이다. 최근 한 달간은 한뫼네 집뿐만 아니라 그 동네의 여러 집 이사를 도맡아 진행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바쁜지 지난주에는 산호답지 않게 만나기로 한 당일 점심에 약속을 파투 내기도 했다. 혹시 다른 집 이사도 이렇게까지 AS가 되느냐는 내 물음에 살포시 웃어 보이던 산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아, 어머님이 말이야, 하면서 말머리를 돌린다. 한번 놀러 오라고 하시네. 나? 다 같이. 준일이도 지금 들어와 있다 말씀드렸더니 집들이 겸 보면 좋겠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준일이 오면 시간을 맞춰 보자고 대답한다. 준일이 일러 준 출국 일자가 당장 다음 주이기도 하거니와 준일이 한뫼 어머니를 뵙는 건 내켜 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 그건 힘들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일단 준일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하지만 준일은 좀처럼 나타나지를 않는다. 카페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돌아보나 준일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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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누군가

누군가 윤단 복합 상업 시설과 연결된 M역은 도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날씨는 덥고, 광장은 소란스럽다. 이보는 보도를 건너 역 앞 광장에 들어선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캐리어를 가까이 끌어당긴다. 이보 앞에서 걷던 여자아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본다. 엄마, 하늘이 너무 가까워.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손을 잡아끈다. 하늘에는 낮게 깔린 잿빛 구름이 무거운 이불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보는 그러게, 하고 속으로 대답한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보다 가까워진 것도 같다. 최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아 목이 뻐근하다. 뒤에 있던 누군가가 짜증을 내며, 잠시 멈춰 선 이보의 등을 밀치고 지나간다. 아이와 아이의 엄마도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광장을 가로지르던 즈음 주미에게서 메시지가 온다. 열차를 탔느냐는 물음이다. 이보는 나중에 답장하기로 한다. 예매한 열차는 놓쳐 버렸다. 도로가 군데군데 통제되어 여기까지 걸어 오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제 주미는 가족과 함께 열차를 타고 친척이 사는 지역으로 갔다. 그리고 이보는 주미가 있는 곳으로 간다. 이보에게 친구는 주미뿐이다. 다른 친구들은 하나둘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보는 이따금 주미를 찾는다. 전화를 걸고, 만나자고 하고, 딱히 할 일이 없는데도 같이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스무 살에 만나 십오 년을 알고 지냈다. 나이가 들며 달라진 점도 있지만 어쨌든 만나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이보와 달리 주미는 다른 친구들이 있다. 무엇보다 가족과 무척 끈끈하다. 그것이 이보는 언제나 신기하고, 부럽다. 잠시 후, 하늘에서 붉은 방울이 두둥실 날아오듯 떨어진다. 자두 크기의 붉은 방울은 비눗방울 모양으로 둥글고 윤이 난다. 곧 광장에 있는 모두가 어수선하게 흩어진다. 이보도 사람들이 달아나는 방향을 따라 뛴다. 캐리어 바퀴가 덜커덩거리며 어긋난다. 얼마 안 가 이보는 뒤를 돌아본다.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붉은 방울이 한 남자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방울이 터지고, 이보는 남자와 그 주변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광경을 본다. 가벼운 폭음이 지나간 뒤 잠시간 고요가 흐른다. 사람들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불안한 얼굴로 하늘을 흘끗거리며. 이보도 아무 말 없이 캐리어를 끌며 M역으로 향한다. 가슴이 울렁이지만 이것이 무슨 감정인지는 알지 못한다. 두려움도, 불안도, 슬픔도 아닌 기묘한 감정이다. 어쩌면, 그새 조금 익숙해진 걸지도. 붉은 방울은 우연히 떨어지는 우박처럼, 예고 없이, 간혹가다 내려온다. 인파를 비집고 매표창구에 다가가자 대기 줄이 지그재그로 길게 늘어서 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보의 차례가 온다. 그녀는 목적지를 말하고, 가장 가까운 시간대 열차를 묻는다. 역무원은 지친 어조로 저녁 출발 열차를 알려 준다. 그게 제일 빠른가요? 네. 다른 건 입석도 전부 매진이에요. 이보는 여섯 시간 뒤 출발하는 열차의 입석 표를 구매한다. 전광판에는 여러 행선지의 출발 시간과 번호가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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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대나무 숲을 서성이는 고양이, 그리고 토마토 이훤 이번 여름 나는 지독한 갈증에 시달렸다. 하루 몇 컵씩 물을 마셔도 몸이 아우성쳤다. 더 많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어쩌면 너무 많은 마음을 쫓느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곤란해졌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소화가 안 되고 소화가 안 되면 자연히 몸에 수분이 부족해졌다. 하여 또다시 갈증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내가 평소 불안과 맺고 있는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했다.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위태로워지곤 하는데, 무엇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이미 내가 불안한 사람이었는지, 불안은 어디든 자라므로 그가 날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건지. 불안한 자는 취약해진다. 취약한 자는 더 불안해진다. 어떤 세계는 정확한 수순을 모른 채 이어진다. 불안과 느슨하게 잘 지낼 방법을 찾고 있다. 어차피 여기 오래 상주할 것 같다. 불화해 왔지만 같이 살아야 한다면 그를 반려해 버리겠다. 그런 각오로 방 한편에 앉혀 놓고 달래도 보고, 듣기도 하고, 어깨 위에 데리고 다니며 삼십여 년간 함께의 방식을 찾고 있다. 불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유 없는 불안. 이유 있는 불안. 타인에게 건네받은 불안. 나의 말과 행동을 놓아주지 못해 자초하는 불안 등 모습을 달리한다. 불안은 상상하기 어렵고 형체 없어서 익숙하거나 귀여운 물성을 입혀 본다. 이름을 붙여 본다. 그러면 조금 더 친해진 것 같고‧‧‧ 어떤 식으로든 조화하는 듯 느껴진다. 이유 없는 불안은 증식을 멈추지 않는 대나무와 닮았다. 키우는 화분이 시름시름 앓는 여름에도 대나무는 쑥쑥 자란다. 땡볕을 견디며 성인 정강이만큼 큰다. 대나무 유형의 불안은 빠르게 자라고 빠르게 퍼진다. 들춰 보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출구를 모르는 숲에 터를 잡은 박새처럼, 나는 대나무 사이를 서성인다. 온갖 나무가 거기 자라고 있다. 내가 쓰이지 않을 거라는 기우. 종이책이 점점 덜 팔리고 희귀해져서 작가란 직군이 줄어들고 사진가마저 AI에게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온갖 크고 작은 걱정이 모두 여기 속한다. 근거 없이도 그들은 자란다. 잘 살고 싶어서 한 번씩 낫을 들고 그 앞에 선다. 뿌리부터 베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숲 전체를 뽑고 싶지만 참는다. 어차피 다시 자랄 것이다. 솎아 내면서 나무들을 한 그루씩 배우고 기록한다. 마음이 기우는 방식을 배운다. 박새가 계절의 풍향을 배우듯. 한편 실체 있는 불안은 재빨리 손을 빠져나간다. 마음을 더디게 알아차리는 사람은 언제나 늦다. 하루가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한다. 직업 때문에 생겨나는 불안도 있다. 작가들은 신간이 나왔을 때 책의 추이를 살핀다. 3년간 쓴 책이 세 달도 안 돼 잊히기도 한다. 중요한 행사에 모객이 잘되지 않을까 봐 마음 쓰기도 한다. 숫자보다는 거기서 일어나는 만남이 언제나 중요하지 않겠냐고 친구에게 말하고, 나도 가끔 돌아서서 북토크 예매 상황을 살핀다. 언제든 작가로서의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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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썬더스트럭

썬더스트럭 이유리 일 톤 트럭의 조수석에 올라타며, 장석원 씨는 이 모든 것이 몽골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올해는 장석원 씨의 환갑이었으나 그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의견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이 먹은 게 뭐 자랑이라고 호들갑을 떠나 싶은 쪽이었고, 때문에 아들 내외가 선물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저 심상하게 글쎄다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오히려 신이 난 건 장석원 씨 아내였다. 더 늙기 전에 여행을 다녀야 한다고 우기며 패키지여행을 보내 주기로 확답을 받아 낸 것도, 밤낮으로 홈쇼핑 채널을 시청한 끝에 최저가라는 삼박 사일짜리 몽골 여행 패키지를 찾아낸 것도 아내였으니까. 그리하여 여행 날짜가 착착 다가왔으나 장석원 씨는 여권 갱신이며 짐 챙기기 등의 잡다한 여행 준비를 아내에게 내맡겨 버렸다. 심드렁히, 지난 육십 년간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성실하게 살았고 결혼이며 육아며 내 집 마련과 부모 봉양, 아무튼 남들이 하는 건 다 했지만 그중 스스로 원해서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가 주선한 선 자리에 나온 비슷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했고 장인어른이 철학관에서 받아다 준 이름으로 첫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가진 돈으로 넘볼 수 있을 만한 동네에 집을 샀고 거기서 십오 년을 살다가 아내의 불평에 리모델링해 십오 년을 더 살았다. 몽골 여행도 그에겐 마찬가지였다. 썩 내키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원하지도 않았다. 여행 전날, 기대와 설렘으로 전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던 아내와 달리 장석원 씨는 평소처럼 눕자마자 잠들었다. 그러나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서도, 몽골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는 잠만 잤다. 눈을 뜨고 있었던 건 오직 기내식을 나눠 줄 때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그가 받은 비프 도시락이 너무 달아 먹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걸 깨닫자마자 뚜껑을 덮고 도로 잠들었으므로 오 분도 안 됐을 거였다. 칭기즈칸 국제공항 입국장에는 몽골인 가이드가 여행사 로고가 쓰인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내외는 함께 여행을 할 사람들과 안면을 텄다. 총 여덟 명의 한국인들은 모두가 쌍쌍이 부부인 데다 나이도 전부 비슷한 듯했다. 가이드는 양 떼 몰듯 그들을 공항 밖으로 데리고 나가 미니버스에 태웠고 출발한 버스 안에서 여행 일정을 간략하게 읊어 주기 시작했다. 테를지 국립공원에서의 몽골 대자연 관광, 무슨 사원과 무슨 박물관, 고비 사막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멋진 무슨 사막‧‧‧ 그리고 게르에서 자고 허르헉을 먹으며 유목민 생활 체험‧‧‧ 및 기타 등등. 장석원 씨는 창밖을 바라보며 심상하게 생각했다. 저 아가씬 생긴 건 토종 몽골인인데 한국말을 참 잘하는구먼. 첫날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배정받은 게르에 짐을 풀자마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많은 일들을 했으나 크게 즐거운 건 없었다. 커피는 쓰디썼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으며 물건들은 죄다 너무

  • 관리자
  • 2025-10-01
나의 반려 시

나의 반려 시 정다연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자주 빈집에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맞벌이하셨던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무료하게 창밖을 구경하거나 거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엄마가 간편히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음식을 데워 먹었다. 익숙하게 빈 그릇은 싱크대에 넣어 두고 티브이 켜 두고는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일기를 쓰고 숙제를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부모님 냄새가 밴 이불을 파고들며 낮잠을 잤다. 눈을 뜨면 여전히 아무 무늬 없는 흰 벽지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일상의 곳곳이 자주 비어 있었기 때문에 늘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던 걸까. 한동안은 무언가를 모으거나 기르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첫 시작은 개미였다. 놀이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미를 채집통에 담아 와 길러 보겠다고 떼를 썼다. 오후 내 그 안을 관찰하다가 어딘가에서 개미가 좋아한다고 들었던 과자 부스러기나 과일 껍질을 넣어 주기도 했다. 또 한동안은 머리끈에 달린 유리구슬만 모았던 적도 있었다. 간직하고 싶은 구슬을 모으기 위해 부모님 몰래 멀쩡한 끈을 가위로 자르기도 했다. 그 후로도 무언가를 애착하는 일은 계속됐다.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에 푹 빠져 달마시안 인형을 수집하기도 했고, 조금 더 커서는 백문조를 기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내 마음의 구멍을 온전히 채워 주지는 않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인형으로 방을 꾸미고 반려동물에게 말을 걸어도 그 구멍은 여전했다. 다른 방식으로도 삶을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였다. 그 친구는 나와 이름이 한 글자만 달랐다. 우리는 그게 친해질 이유라도 된다는 듯이 매일 같이 붙어 다녔다. 서로의 집 주변을 오고 가면서 누구와 친했고 멀어졌는지, 아무리 애써도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은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같은 보습 학원을 등록하고 친구가 학원에 가지 않으면 나 역시 가지 않았다. 하루는 공원 벤치에 앉아 어른이 되면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해 떠드는데, 친구가 맑은 얼굴로 고백하듯이 말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어. 시가 좋아. 친구가 좋아한다는 시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며칠 뒤 글쓰기 학원에 따라갔다. 그때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시는 그전에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감정이나 대상에 대해 느낀 걸 있는 그대로 쓰면 되었다. 나와 친구가 쓰는 문장은 하나의 답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한 편의 작품을 읽고서도 감상과 해석이 달랐다. 그건 얼마든지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구부리고 펴서 말해도 된다는 걸, 고스란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시가 그것을 읽는 이들까지 염두에 둔다는 거였다. 혼자만의 생각에 갇히는 대신 시 속에 타인이 오고 갈 수 있는 문을 내어 함께 생각을 나눌 수가 있었다. 읽고 쓴다는 감각이 가볍고 자유로웠다. 시라는 문을 통해 나의 안과 밖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그 후로 나도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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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내가 아프리카로 갈게

내가 아프리카로 갈게 박정현 1 거울은 화장실에 있다. 거울은 단 한 개뿐이다. 여진은 화장실로 가 거울 속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기다랗고 보기 흉한 상흔이 있다. 미간 좌측에서 시작된 상흔이 콧등을 거쳐 움푹 파인 오른쪽 볼로 강처럼 흐른다. 상흔의 끝부분은 둘로 갈라져 오른쪽 얼굴 더 깊숙한 곳으로 향하다가 자연스럽게 피부로 녹아든다. 그는 중지로 상흔을 흐르는 방향 따라 매만졌다. 이미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어쩌면 수십만 번 무의식중에 했던 행동일지도 모른다. 상흔은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피부 위로 볼록하게 올라와 있으며, 두께는 일 센티미터 정도에 별다른 감각도 없다. 계속해서 보고 있으면 상흔 주위의 멀쩡한 피부가 가려움증을 동반하며 열이 오르는 것만 같다. 동시에 상흔이 벌어지고, 끊어졌던 두 갈래 길이 이어져 귀와 목뒤로 향하는 듯한 착각도 든다. 여진은 거울을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거울은 이미 그가 일전에 주먹을 뻗었던 곳을 중심으로 금이 간 상태다. 비교적 조명이 얼굴 위로 잘 내려앉는 위치를 찾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명이 거의 다해 끝이 검게 변한 형광등이 진동하듯 깜빡였다. 셔터를 누르고, 사진을 확인하고, 몇 차례 더 각도와 표정을 바꿔 사진을 찍었다. 변기에 앉아 지금껏 찍은 사진을 두 손가락으로 확대해 가며 살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원히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화면 속의 상흔을 지우는 건 쉽다. 사진 보정 어플리케이션으로 조금만 매만지면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흔을 지울 수 있다. 그러나 거울 속의 상흔을 지우는 건 어렵다. 불규칙한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에게 매달 나가는 각종 생활비를 제하고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은 절망에 가까운 일이다. 여진은 이해할 수 없다. 얼굴의 상흔을 없애는 것이 어째서 코를 높이거나 눈을 키우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더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저 정상이 되고 싶을 뿐인데 어째서 누군가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척력이 느껴지는지. 거울 속의 상흔을 지울 수 없다면, 화면 속의 상흔 역시 지워서는 안 된다. 솔직해야 한다. 적어도 사만다에게만이라도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왓츠앱을 켜서 사만다와 나눴던 지난 2주간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그녀와 나눈 대화를 반복해서 읽는 것은 상흔을 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이미 무의식적인 습관이 되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아마 그곳은 저녁 무렵일 것이다. 스크롤을 올려 어제 나눴던 대화를 살폈다. 고백하고 싶어. 무엇을? 예전에 올렸던 사진, 사실 제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바로 나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어. 얼굴에 큰 흉터가 있어요. 나는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 큰 흉터입니다. 보는 것은 소름 끼칠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아니. 당신은 결코 이해하지 못해. 이후 여진은 답장하지 않

  • 관리자
  • 2025-10-01
믹스테이프 원더월

믹스테이프 원더월 임국영 #1 인투로 (이승윤) 무대 위에 록 밴드가 서 있었다. 조명이 드리운 실내 공연장은 마치 화마가 뒤덮은 것처럼 새빨갰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길어온 듯한 베이스 기타 소리가 인트로 라인을 열었다. 긴장감이 고조되자 보컬이 관객에게 정중히 알렸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쇼.” 보컬이 말을 끝맺자 일렉트릭 기타 두 대와 드럼이 달궈진 무쇠를 망치가 내려치는 듯한 굉음을 내뿜었다. 관중은 음악에 맞춰 고개나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쏟아 냈다. 리듬을 따라 움직이던 나는 잠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다. 연주 파트가 끝이 날 즈음 고개를 들자 코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어? 이게 왜 내 앞에? 의문이 가시기 전에 나는 그간 매일같이 불러서 입술 끝에 달라붙은 가사를 발음하기 시작했다. 1절 후렴을 끝내고 나서야 온전한 기억을 되찾았다. 맞다. 내가 보컬이었지. #2 나는 왜 (못) “록 얘기 좀 그만 쓰면 안 돼요?”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기 직전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 사람 말고도 직간접적으로 비슷한 조언을 했던 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유난히 진지한 그의 태도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록 같은 걸 누가 듣겠는가? 당신이 어떤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지 아무도 관심 없다. 주구장창 똑같은 이야기만 하면 질리지도 않는가? 그날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의 말에 사로잡혀 지냈다. 저기요 선생님, 내가 쓰고 싶은 거 쓰겠다는데 님이 뭐 어쩔 건데요, 하는 반발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으레 애주가가 적은 글에는 술이 등장하고 흡연가가 쓴 소설에는 담배 피우는 장면이 삽입되기 마련 아닌가. 작가에게 친숙한 소재가 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는 항변을 스스로 되새겼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음미해 볼 만한 화두임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소설을 쓸 때 늘 음악을, 특히 록을 소재로 삼는가. 어째서 한 번도 이 현상에 관해 의구심을 갖거나 깊이 성찰해 본 일이 없었을까? 나에게 록이란 무엇인가? #3 난 알아요 (서태지와 아이들) 당신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은 무엇인가? 라디오, 오디오 플레이어, TV와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거나 부모님이나 유치원 선생님이 알려 주신 동요인가? 나의 경우는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재생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곡 〈난 알아요〉였다. 힙합 장르를 베이스로 한 댄스 팝에 메탈 요소가 가미된, 네 살 남짓한 꼬마한텐 여러모로 자극적인 노래였다. 얼마나 자극적이었냐면 노래를 듣는 순간 트랜스 상태에 빠진 샤먼처럼 눈이 뒤집혀서 별안간 춤을 췄을 정도였다. 이 소리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내 감정을 멋대로 조종하는 것인가! 나는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얼굴도 모르는 이와 마치 하나가 된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이 곡을 듣고 있을 누군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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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비평의 자리 2

비평의 자리 2 최가은 1. 너는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죽은 작가의 약점과 결점을, 네 작업에 알맞은 누추한 진실을 건져낼 수 있는 교묘한 질문들 속으로 그녀를 유인할 것이다. 너는 그 질문들 속에 죽은 작가와 함께 살았던 사반세기 동안의 시간을 반성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은밀한 함정들을 설치하여, 그녀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 속임수와 거짓말에 치가 떨릴 것이고, 그날 너를 집으로 들여놓은 것을 자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는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게 진실의 일부를 공유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너는 미열 같은 흥분 속에서 응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초인종 소리가 멎었다. 너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여전히 저택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들리지 않았다. 대문은 완강하게 잠겨 있었다.1) 소설은 ‘죽은 작가’라는 기호 아래 결집하고 흩어지는 ‘너’의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무언가를 좇는 자. 불가해한 형태로 유폐된 어떤 진실을, 진실의 환영을, 혹은 환영을 덮치는 기억을 추격하는 자이다. 누추한 진실을 누비기 위한 거짓, 투명한 거짓을 뭉개기 위한 진실 사이를 정신없이 횡단하는 ‘너’는 그 무언가의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다시, ‘너’는 누구인가. ‘죽은 작가’에 관한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 그의 흔적을 찾는 중이라는 ‘너’는 그의 문학적 “유산”을 “냉혹하게 적출”하는 “문학적 해체”, 혹은 일종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문학의 우상을 살해하는 퍼포먼스”2)를 준비하는 자이다. “숭배”와 “모독” 사이의 간극과, 그 간극을 오가는 자의 공포를 요란하게 발설하며 초조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자이기도 하다. ‘너’는 은밀하게 설치한 네 함정에 의해 ‘죽은 작가’와 ‘죽은 작가의 아내’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은 작가’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선 ‘앎’과 ‘진리’를 확보한 것이 ‘너’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로부터 진실에 관한 특권적 “의무”를 지닌 그들의 미래,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이다. 곧 맞이하게 될 무력하고 무지한 과거의 몰락 앞에서 흥분한 현재는 초인종을 누른다. 한 번, 그리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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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실리카겔

실리카겔 이다희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진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하늘은 원래 구멍 그 자체이다. 구멍에 어떻게 구멍이 뚫린단 말인가. 비가 온다는 것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나무로 만든 악기들은 습기에 매우 약하다. 나는 케이스를 열어 조심스럽게 첼로를 꺼낸다. 굳이 당겨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악기는 퉁퉁 불어 있다. 이런 날에 제대로 소리가 날 리 없다. 남은 실리카겔 봉투를 세어 본다. 5개가 남아 있다. 나는 더 이상 실리카겔을 사 두지 않는다. 5개의 실리카겔 봉투를 다 쓰는 날에 연주를 그만둘 것이다. 아, 겨우 이런 다짐으로 연주 생활을 이어 간다. 봉투 겉표지에 있는 붉은 입술 위에 검은색의 커다란 엑스 표시가 있다. 먹지 말라는 것이겠지. 나는 조용히 붉은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어 본다. 내 입술이 더 작은 것 같아. 이 표면은 모든 것을 밀어낸다. 먹지 말라고 그저 여기에 가만히 두라고 말한다. 봉투를 흔들면 마치 작은 쌀알 굴러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잘 정리해 둔 신경줄이 이상한 곳으로 흐른다. 이 소리는 나의 어떤 것을 열고는 바로 닫는다. 일어나 따뜻한 차를 만든다. 침대에서 포트까지 25보. 차를 손에 쥐고 서성거린다. 러그의 양모가 올라와 발가락 사이를 파고든다. 이 만족감은 무엇일까. 무엇인가 해결된 기분이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다. 러그 위에 둘 가구를 사야겠다. 무엇이 좋을까? 나는 식어 가는 차를 쥐고 러그 위를 빙빙 돈다. 작은 원 위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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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키야

키야 이다희 안녕. 사랑해. 내가 키야에게 가르친 단어는 단 두 가지. 그 외에 모든 저주의 말들은 나에게서 자연스레 배운다. 외출을 할 때 나는 키야를 한참 바라보고 나온다. 안녕. 사랑해. 어디 갔어? 나쁜 년. 지옥에서 만나. 키야는 나에게 배운 두 단어에 항상 무엇인가를 얹어 준다. 나는 웃으며 혀를 찬다. 키야를 이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키야는 통통 걸어가 먹이통에서 사료를 쪼아 먹는다. 우연히 시장 골목을 지나가다 노점상 옆에 있던 키야를 본 순간 나는 새장을 그대로 들고 시장 골목을 나섰다. 키야를 처음 본 순간 키야라는 이름만 생각이 났다. 주인이 키야를 키야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을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키야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내가 밖으로 나갈 때 키야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 나 또한 키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안녕. 사랑해. 나는 두 단어를 정말 열심히 가르쳤다. 그 외에 저주의 말들은 키야가 알아서 배웠다. 안녕. 사랑해. 어디 갔어? 나쁜 년. 지옥에서 만나. 나는 키야가 하는 말들을 모두 받아 적고 싶다. 그게 설령 지리멸렬하고 괴로울지언정. 키야는 키야. 나는 오래된 지옥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피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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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바탕색 칠하기

바탕색 칠하기 조우연 상실의 시대에는 가로등도 라일락도 그와 그녀의 키스도 짙푸른 바탕색에 있었죠 누가 선뜻 노랑을 등지고 있었겠나요 바탕색은 그런 거죠 하늘색은 영영 구름의 바탕색이고요 가파른 골목을 걸어 올라가는 남자의 바탕에는 회색을 칠해 주죠 교실 아이들이 툭하면 바탕도 칠해야 해요, 묻는 데에는 별이 뜨겁게 빛날 일과 차갑게 빛날 일이 바탕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는 탓이겠죠 내가 우는 걸 한참 보던 그녀가 던지길 바탕색을 고르는 건 너잖니, 그저 밤이 되어 하늘이 검은 거란다 그런 그녀도 나의 바탕색인 줄 알았어요 팔순이 다 되도록 내 멋대로 색칠을 해 왔네요 늦은 저녁 칙칙한 바탕을 끌고 돌아오던 그가 싫어서 그날은 빠삐용처럼 절벽 아래 나를 던져 볼까 줄무늬를 입은 나를 삼켜 버릴 듯 출렁거리는 바다가 나의 바탕 초록의 나무들을 바탕으로 검은 그늘이 눈부셔요 여러 해 내가 진해질수록 아련해지는 뒤엣것들이 보여요 바탕을 보기 위해 여직 무성한 것들을 그려 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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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수긍의 색은 회색

수긍의 색은 회색 조우연 아직이요, 하는 수국을 피워 보려면 그나마 색부터 배워야 한다네요 철봉에 매달린 팔을 놓아 버리는 마음을 먹어 본 아이는 자주 울던 일이 덜한다죠 새는 죄책감을 알까요 밤에 듣는 새의 말은 노래라 해 둘까요 울음이라 해 둘까요 구름은 후회를 할까요 투명해서 건너의 무엇도 숨길 수 없는 비의 색이 구름의 마음일까요 무언가 젖어야 물의 색이 보이는 것처럼 오늘 밤 비가 와서 우리 마음은 색을 가졌습니다 어두워져서 가까워지는 향기가 있고 비 그친 그 밤에 우리는 미안한 마음이 들뜨죠 이제 수국의 향을 알게 됐는데 놓아 버렸나 봐요 정작 색은 알고 싶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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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페니 맨

페니 맨 -The Penny Man 노인은 길바닥의 페니를 줍지 않는다. 대신 동전을 살짝 돌려 에이브러햄 링컨의 얼굴이 하늘을 보게 한다. ―S. Donovan Mullaney 조인호 세상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은 1센트 페니 동전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50센트를 쪼개면 25센트가 되고, 그걸 다시 쪼개면 10센트가 되고, 그걸 다시 쪼개면 1센트가 되지만, 그 지점부터 1센트는 더는 쪼개지지 않는다. 어떤 강력한 힘이 1센트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형을 떠올린다. 확실히, 형은 페니를 닮았다. 한 닢의 페니를 공중에 던지면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오십 퍼센트지만, 형을 공중에 던져 올린 그 남자는 동전이 어느 쪽 방향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페니의 앞면에는 돼지 치는 남자를 닮은 사내가 새겨져 있고, 형은 늘 그 얼굴을 보며 ‘돼지 치는 개새끼’라고 불렀다. 형의 1페니는 미국에서 온 선물 자루 속에서 굴러떨어져 나왔다. 고아들을 위한 친절한 백인들이 보내 준 후원 물품 자루에서 나온 구리 동전 한 닢, 그것으로는 무엇도 살 수 없었지. 만약 형이 눈이 어두운 잡화점 노파를 1페니로 속였다면 분명 감옥에 갔을 테지만, 노파건, 사내건, 아줌마건 다들 1페니를 보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얘야, 장난감 동전으로 사기 칠 생각은 꿈에도 말거라.” 페니는 형과 이별할 생각이 없는지 늘 형의 호주머니 안에 있었다. 애완 생쥐보다도 작은 1페니― 1페니로 살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미국에서 온 동전,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방인처럼― 신기했지만, 형의 1페니는 고아원의 형들, 누나들, 동생들 호주머니 속을 홈리스처럼 떠돌아다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페니의 가치는 점점 떨어졌고, 돌고 돌아 언제나 형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형은 잘 때도 페니를 잃어버릴까 봐 몸에 딱 붙이고 잠들곤 했는데, 다음 날, 언제나 형의 작은 배에는 돼지 치는 사내의 얼굴이 꾹 눌려 있었다. 어느 날, 돼지 치는 남자의 얼굴과 똑같은 사내가 고아원에 찾아와 형을 데려갔고, 형의 1페니도 그날로 사라졌다. 형이 그리워질 때면 나는 페니 동전 한 닢을 찾기 위해 교회 헌금통까지 뒤적거린 적도 있다. 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밑바닥을 더듬을 자신도 있었다. 그게 흙이건 아스팔트건,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름이 새겨진 보도블록이건 무엇이든 간에. 때론 무슬림들이 엎드려 절할 때 “아자르 씨, 혹시 바닥에 떨어진 1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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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녹색 광선

녹색 광선 조인호 형이 물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그의 몸은 너무나 투명해져 있었다 밤바다에는 달이 떴고, 녹색 광선이 형의 몸을 꿰뚫고 있었는데도 형은 아파하지 않는 듯했다 “봐라, 깨끗해졌어” 형이 말씀해 주실 때마다 형의 몸을 반으로 가르는 바다― 너머로 파도가 밀려오고는 했다 그 바다에서 고아원 아이들은 모두 다 보름달물해파리처럼 투명해졌고, 그것은 너무나 투명해서 마치 이 세상에 처음부터 없었던 아이들 같았고 그래서 나는 형들, 누나들, 동생들이 이 세상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은― 무서운 꿈을 꿀 것만 같아서 감았던 눈을 뜨면 그 바다, 거기에 고아들이 있었다 투명해져서 너무나 투명해서 고아들은 서로를 통과해 지나다닐 수도 있었고 물방울처럼 하나가 둘로 나뉘기도 하고 둘이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 바다에서, 나는 형과 때론 하나가 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밤바다에 혼자 떠 있는 기분이 들고는 했고 그 순간은 물을 무서워하던 내가 처음으로 물에 뜨는 시간이었고, 밤바다에 누운 채 형에게 몸이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다에는 이렇게나 많은 별이 떠서 어딘가로 무섭게 흘러가고 있었고 그 해변에는 고아원의 여전도사가 함께 있어 그녀는 고아들에게 세례를 주고 계셨다 바다로, 그녀가 먼저 걸어 들어가고, 그녀를 따라 고아들이 형들, 누나들, 동생들이 따라 걸어 들어갔고 나도 따라 걸어 들어갔고 고아들을 반으로 가르는 바다― 수면 위로 창처럼 내려꽂히는 달빛, 녹색 광선 그 바다에서, 아이들이 나올 때는 몸은 투명해져 있어서 너무나 투명해져서 형들에게는 검은 미역이 누나들에게는 이름 모를 물고기가 동생들에게는 불가사리가 담겨 나오고 그 바다에서, 나는 세례를 받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담겨, 올려다본 수면 위로 일렁이는 고아들의 얼굴들 눈과 코와 입이 물고기처럼 지느러미를 흔들고 “숨 쉬어”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바다 가까운 곳― 폐교에서 보낸 고아들의 여름 교실 마룻바닥 백여 명이 족히 넘는 고아들이 잠들어 있고 한밤중 형은 밤바다로 걸어 나가시고 나는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간다 밤의 바다 앞에서― 우리 둘은 그렇게 녹색 광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면 위로 여전히 창처럼 꽂히는 녹색 광선 그 창은 점점 많아져 바다 위 묘비들이 점점 많아져 그 밤바다, 속으로 형은 걸어 들어가시고 다시 해변으로 걸어 나왔을 때 형은 다시 태어난 사람 같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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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미래 설계 - 우리는 집을 짓고 그 안엔 사람이 살고

[문장서포터즈] 미래 설계 - 우리는 집을 짓고 그 안엔 사람이 살고 - 《문장웹진》 다시 읽기 문장 서포터즈 2기 김성호 설계를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만들거나 짓기 위해서다. 2024년, 작년에 기획 연속좌담으로 진행되었던 ‘창작, 노동: 4차〈대학(원)생 작가들의 미래 설계〉’를 다시 읽자는 취지에서 특별한 형태랄 것 없는 이 ‘대화’가 이루어졌다. 대화는 1년 반 전의 좌담에서 이루어졌던 미래 설계를 돌아보고, 2025년 대학생 작가의 현재는 어떠한지 톺아 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 설계를 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지어진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집’이라 명명하고, 그 집 안에 어떠한 사람이 살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2024년 《시와산문》 문예지 시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올해 여름 첫 시집 『네가 오렌지를 먹는 동안 나는 시집을 읽었다』(달아실 출판사)를 펴냈으며 현재 대학 재학 중인 임수민 시인과 함께 대화를 시작했다. 김성호(이하 김): 오늘 인터뷰일로부터 2학기 개강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해요. 작년 여름에 시인으로 등단하시고 나서 올해 여름 첫 시집을 펴내셨는데, 1년간 집필 활동에 학부 생활에 많이 바쁘셨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무얼 하고 계시나요? 임수민(이하 임): 첫 시집을 출간하고 나서 두 번째 시집을 바로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 시편 원고를 투고했는데, 좋은 기회로 계약이 되어서 준비하는 중입니다. 김: 오, 바로 두 번째 시집이라니. 활동이 왕성하시네요. 개강을 앞둔 소감은 어떠신가요? 개강을 앞둔 건 저도 마찬가지지만(웃음). 저와 같은 문예창작과이기도 하니까요. 임: 창작 수업이 많아서 잘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조금 있고, 학점을 잘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어요. 학교생활과 집필 작업을 같이 잘 병행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고요. 성호 님은 방학 때 무얼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김: 저는 일단 종강날 교수님의 조언대로 전작주의자가 돼서 한 작가를 좀 깊게 파 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빠지게 된 작가가 2018년 타계한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예요. 단편소설도 세 편 정도 썼습니다. 곧 신춘문예와 공모전 시즌이기도 하니까요. 그러고 보면 수민 님은 등단에 대한 압박에서 조금 벗어나 있으신 것 같아 부럽기도 해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다른 고충이 있을까요? 임: 등단을 했지만, 작은 곳에서 등단했기 때문에 작품 청탁이나 시집 출간, 홍보에 관련해 조금 어려움이 있어요. 예를 들어 ‘대학생’이라서 원고료를 제대로 못 받는다거나, 저를 알리는 데 많은 기회가 없다거나. 아까 한 작가를 팠다고 하셨는데, 어떤가요? 확실히 글쓰기에 도움이 되나요? 김: 한 작가에 빠져서 읽는다는 건 일종의 ‘사랑’의 형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랑의 대상이 작가든 작품이든 간에 느끼는 감정이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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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나만의 여름나기 일기

[문장서포터즈] 나만의 여름나기 일기 -《문장웹진》 다시 읽기 문장서포터즈 2기 김소리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을까요? 저의 첫 번째 《문장웹진》 작품 「도슨트는 문학이 될 수 있을까」 이후 두 번째로 인사드립니다. 김소리입니다. 무더위가 지속되고 있어요. 이런 무더위 속에서 무기력한 기분이 들 때도 글을 쓰는 일만큼은 그만둘 수 없네요. 저는 글을 쓰는 일만큼 읽는 일을 좋아하는데요. 글을 ‘읽는다’는 것은 좁은 세계에서는 작가와, 넓은 세계에서는 비슷한 체험을 하고 있는 여러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는 문학뿐만 아니라 에세이나 일기 등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쓴 글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를테면, 여름의 무더위 속 일상을 적은 글에서 우리는 작가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동시에 이와 관련된 나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겠네요. 그리고 글을 읽은 뒤 타인과 감상을 공유하거나 비슷한 주제의 다른 글을 읽으면서 내가 가진 하나의 경험이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곤 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세계는 자전을 시작하지요. 그럼 우리는 글을 쓸 때 어떤 방식으로 읽게 할 수 있을까요? 나와 타인의 세계가 어우러져 짝이 맞는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시작점은 어디서 기인할까요? 글도 하나의 콘텐츠고, 콘텐츠를 보여 주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요. 특히 요즘은 디지털 콘텐츠나 오프라인 이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개인적으로 글을 읽는 방식도 풍부하게 확장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요. 《문장웹진》의 기획들도 이처럼 글을 다양하게 소비하기 위한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따라서 이번 두 번째 기획에서는 이전 《문장웹진》의 기획 중 한 가지를 다시 읽고, 관련된 저의 경험을 기록하며 소통하는 방식으로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제가 다시 읽은 《문장웹진》은 강영숙 작가의 「인디언 썸머」인데요. 여름의 끝자락에서 ‘겨울에 쓰는 여름 이야기’를 읽고 저만의, 그리고 여러분만의 여름을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디언 썸머’는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인 10월 말~11월 중순경에 나타나는 고온 현상’을 의미해요. 여름은 덥죠. 무더위가 지속돼요. 저는 땀이 많은 사람이라 한여름 대낮에 길가를 걸을 때마다 무엇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하는데요. 그래서 제가 지나온 여름을 돌이켜 보면 그저 ‘덥다’는 감상 말고 특별히 기억나는 순간들 없이 빠르게 지나갔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사계절 중 여름이 가장 길다고들 하는데 우스운 이야기지요. 더워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은 여름이, 지나고 나서야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계절 감각을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지요. 그중에서도 여름과 겨울은 봄과 가을에 비해 온도 차가 커서 ‘계절감’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작품에서 활용되고 있어요. 앞서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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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이 어둠 6

이 어둠 6 하혜희 제삼 계절의 광증, 제사 계절의 광증, 제오 계절 제육 제칠 계절의, 으스러지는 계절마다의 새로운 병명들, 느낌을 일깨우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 주기만 하고 절대 받지 않는 하늘이, 우리를 만든 자연의 전파와 우리가 만든 전파의 자연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음이 이제는 전해지고 동전은 외상으로 글자는 공중으로, 기쁨은 살 속으로, 날을 숨기고 나갔던 산책에서 짐승들 돌아오면, 눈물들이 나무둥치를 껴안고 있었다 하며 옷을 갈아입는데, 가지마다는 옛날이 피어나고 있었다 하는데, 인간은 이제 그만! 발아래 머리 위에 우리는 너무 많이 쌓였다. 남아도는 피돌기로 손발 아리고 불 꺼지듯 안다. 만사가 새끼를 책임지지 않는다, 새끼가 만사를 책임지려는 것이고, 열기 반납한 아스팔트에 기어 보는 우리의 양친, 긁힌 길이 희게 일어나 평행으로 가리키는, 고향 없이도 향수 젖은 병사들의 머리 터진다. 더운 전쟁이 길고 축축한 후퇴는 더 길다. 우리가 사랑해야 함이 이제는 전해지고, 일렁이는 철편에 속속 불꽃, 불나지 않는 여기서, 불타지 않는 여기서, 간교한 광증이, 축척을 벗어난 시간과 함께, 그 언제도 우리의 목적을 드러낸 적 없다는 데서, 방아쇠를 당기고 잇따라 숨을 삼키는데 물 위에 떠오른 아득한 무늬 모두가 공모하여 찢어질 리 없는 것을 찢기 위해 가장 깊은 골짜기의 시내까지 핥는 것은, 나뭇잎의 서툰 비유를 비웃으며 검댕으로 만드는 것은, 관들을 끼고 돌던 지하의 물길로 번져 나가는 것은, 학살자들, 다른 말을 동시에 하는, 우리를 심판하려는, 예, 아니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하자, 폭풍에 달려 나가는 듯이 끄집어내기를, 핏덩이를 쥐어 으깨고 이빨 구멍에서 말 뽑아내기를, 수풀을 달라, 뿌리를 달라, 자신과 맞서라고? 그것을 원할 때에, 만들어 달라, 명령을 듣기만 하는 우리를, 우리를 따르기만 하는 너희를, 그것이 자기를 깨우는 줄은 알고 있으면서, 부서질 것들만 건드려 이 모양이 되어 있는 다시 빗속에, 그토록 무서웠던 지난밤도 흩어진다, 보라 대적자를, 등에 잿더미를 지고 너로부터 일어나 구정물 흘리는 더한 어둠 앞에 어둠이 엎드린다. 엎드려 발목을 잡아챈다. 덜한 어둠이 더한 어둠을 거꾸로 든다. 계절은 하룻밤에 바뀐다. 망해 버린 그날의 밤들은 억 수십에 걸쳐 겹쳐 있다. 옛것이 거느렸던 단어들 일제히 자세를 바꾸고, 위험한 시기 지나면 더 위험한 통치가 왔다. 돌아앉아 일제히 우좌로 고개를 흔드는, 너희는 아무것도 안 했지, 이렇게 되도록 아무것도. 죽을 이는 죽었고 아닌 이도 죽었지. 우린 망설일 대로 망설였다. 그만둬야 할 때 그만두면서! 소리를 질러도 속수무책으로 가로놓인 자신 앞에서 혜희는 거닌다. 이 방을 떠나야 한다. 내가 돌아올 날을 기다릴 필요 없다. 나는 돌아올 때에 돌아온다. 너는 아직 말하는 법을 모른다. 너는 용서해 달라고 빌면서 무릎으로 퇴장해야 한다. 네 때가 올 날을 기다려야 한다. 혜희는 혜희의 손을 쥔다. 그러나 그 전에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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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별의 파티 16

별의 파티 16 하혜희 개 거인들이 많은 손들로 인간들을 쓰다듬는 꿈이 나를 그곳에서 벗겨 냈다 내가 오늘의 인간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내일의 거인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드리우기를 그들은 전기이고 빛이다, 신들의 그림자가 우르릉댄다, 말로 된 무논 위로, 그들은 열을 맞춰 인간들을 꽂아 심으려 한다, 바보는 먼바다에서 기후처럼 일어서는데, 해일로 그 경지를 덮치려고다 로봇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세상에서 싸우지 않으려고 죽은 내가 이곳에서 영문 모르게 앉았다가 터졌다가, 이 저승 풍경 속에서 또 죽어 놓인 나를 비정한 별 하늘이 읽으려는 것과 같이 기계의 말을 배우겠다며 절지동물들은 모래 속에서 기어 나옵니다 무슨 디움이니 리움이니 하는 것들을 나의 기억으로부터 집게발로 고르는데, 우리의 문법은 다른 층계에 있다고 일러 주려 해도 그들에게 닿지 않고 간지러울 따름입니다 유령 여러 사람이 되려고 하는 여러 사람이 되려고 하는 심중에 한 사람뿐 살갗에 한 사람뿐, 신은 우릴 놓고 도박했다가 서럽게 울고 있다 거지꼴로, 눈만 번쩍이면서 앉아 있다 저 구석에서 위안받고자 임금이 한 나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그들이 엉거주춤 바다 위에 서나니, 찢어서 떼어 놓은 반죽 같은 것아, 끓고 있는 것아, 낳는다는 것을 어떤 일로 생각했느냐, 접을 수 있다 생각했느냐 펼 수 있다 생각했느냐, 무정한 윤슬 위에서 누구의 말인지 분간할 수 없고, 임금의 몸 위로 기대는 한 나의 음성이 마지막인 듯이 물결친다 바보 낳아야 하는 곳이 아니고 죽여야 하는 이곳이라면 우리는 이곳에게 물어야 한다 턱밑에 망치를 대고 죽을지 살지를 내가 이곳이냐? 아니다 우리가 원해서 이렇게 됐다고들 하지?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네가 이곳이냐? 아니다 우리가 다 무엇이냐고 했지? 이것이 우리다 이것이 우리는 원한다 우리는 벌을 원한다 그다음에 벌을 원한다 그리고 벌을 원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용서할 자유 없는 이곳이, 우리에게 오물로 쏟아붓는 자유가 잘못되었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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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달력은 유독 생일이 많은 달을 기억한다

달력은 유독 생일이 많은 달을 기억한다 이솔 골똘한 내가 각성하는 지점들에 서 있는 모습을 본다 가로수의 간격과 도시의 미관을 관련지으면서 터널에 진입하는 사랑하는 것들에게 무관심하려고 애써 본다 매일 소량의 신선한 피가 내 몸 속 곳곳에 공급되고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고 여기면서 환절기에 예민한 어른들은 제각각 나무를 하나씩 껴안고 있다 이게 맞는 길이라고 지적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면서 뭐 하나 피워 냈다고 안도한다 비행기의 꼬리가 열심히 노를 젓는 모습을 올려다보면 역시나 꽃은 한 송이가 화면을 가득 채울 때의 느낌이 훨씬 좋고 육안의 세계를 벗어나는 기분이란 잎사귀의 윤곽이 풍만해져 다가오는 거리에서 매몰차게 가열되는 수증기는 나를 압박하고 압력을 견디지 못해 눈이 자주 시큰거리고 이 날씨에도 긴 옷을 입는구나 하면서, 초심을 걱정하지 않는 자세들이 진열장에 나란히 서 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어디선가 프로펠러 도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방심하는 순간 엉금엉금 몸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것들이 심장을 콱 물었으면 아이들을 보면 새로운 형식의 옷을 입은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나 같은 아이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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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에는 사건이 없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에는 사건이 없다 이솔 나는 옥상 위에 숨어 있었다 당신이 나체를 빨랫줄에 거는 것을 본다 납작 엎드린다 당신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 함부로 웃는 얼굴은 낮은 곳으로 가까워져야 한다 어떤 지상에서는 아이가 딸기를 먹어 대며 꼭지를 아무렇게나 뱉어 댄다 부모의 젖은 이름을 부르듯이 숨을 쉴 때마다 무릎이 땅에 박힌다 복부 쪽으로 몰리며 가라앉는 정서들 당신은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다 당신의 기원은 어느 높이에 있을까 아이의 기도를 확보하고 울음이 터지는 순간 나는 단단하게 멍이 든다 누구든 와서 이것을 핥을 생각을 하면 벅차오른다 당신이 들이닥치고 저녁은 사건이 없이도 붉게 물든다 당신이 나를 높이 매다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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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입의 가장자리

입의 가장자리 이언 하루 종일 어떤 멜로디가 입에서 맴도는 날이 있지 그런 날엔 알록달록한 알사탕을 혀 밑으로 굴려 봐 혀끝에서 녹아 사라지는 말들 꼬마야 꼬마야 줄을 넘어라 어느 흐린 날의 줄넘기 놀이 닦지 않은 유리창처럼 방충망에 걸린 거미줄처럼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하고 구연부에서 맴도는 노래가 있어 후렴구에서 자꾸 걸려 넘어지는 그런 말들이 있어 하루 종일 어떤 멜로디가 따라와 꼼짝 못 하게 하는 그런 날엔 가끔은 덜 녹은 가사 조각에 혀를 베일 수도 있지만 허밍 허밍, 이런 날에는 알록달록 알사탕을 한입 가득 넣고 굴리는 일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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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를 아시나요

♨를 아시나요 이언 세상 어디에나 하나쯤 있는 삼양목욕탕입니다. 삼양목욕탕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수로가 있어요. 수로를 통해 바닷물이 들어올 때 바닷속 ♨들이 처음 역류했다고 해요. 어느 날, 삼양목욕탕 42℃ 열탕 속으로 바닷물이 차올라 ♨들이 밀려들었을 때였어요. ♨의 이름은 미끄러져 흘러갔어요. 자세히 보면 ♨의 바닥이 뚫려 있어요. 네, 맞아요. 바로 흘수선처럼 보이는 ♨의 아랫부분 말이죠. 해일이 일어나 파도가 치면 해안 절벽까지 ♨들이 튀어 오르기도 하지요. 가끔은 습식 사우나 바닥에 닻을 내려 정박하기도 하고, 그물에 걸린 ♨들이 탈의실 옷장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밤이 되어 삼양목욕탕 굴뚝 위로 ♨가 등대처럼 불을 밝히면 육지로 몰려든 ♨들이 부표처럼 떠다니기도 하지요. 오늘따라 ♨는 미역 줄기처럼 유난히 더 미끄럽군요. ♨의 정체는 어쩌면 배수구 속으로 빠져나가는 푸른 물소리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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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나는 시간을 조금 옮겨 다녀야겠다

나는 시간을 조금 옮겨 다녀야겠다 이새해 얼음이 모서리를 버리기 전에 매미가 매미를 벗기 전에 도심의 강한 빛에 이끌린 철새들이 대형을 바꾸기 전에 옛날이야기 들려주던 고모가 이불을 개어놓고 방을 나가기 전에 휴대전화를 쥔 할아버지가 아스팔트 도로 위를 뛰어다니기 전에 신발이 거실을 떠다니기 전에 젖은 보도블록이 곳곳에서 일어서기 전에 내 목덜미를 끌어안던 손이 침구 위의 어둠을 놓아주기 전에 청소차 소리가 들리기 전에 몇 걸음 뒤가 낭떠러지인 줄도 모르는 아이들을 달려가 낚아채기 전에 나는 죽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잖아 들뜬 목소리로 말하던 아이가 한참을 이해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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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모조 얼음

모조 얼음 이새해 나쁜 생각이 너를 빠져나와 나에게 들어오려는 것을 보자 안락의자에 걸터앉아 이쪽을 노려보는 선생의 분노를 보자 제 방인데요, 말하는 순간 창틀 넘어 도망치는 선생의 꽁무니와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의 침착함을 보자 여긴 내 방이야 네가 경고한다 선생이 놓고 간 비닐봉지 속에는 신선한 식재료가 섞여 있다 소금, 붉은 양파, 레몬즙과 올리브유 조금 생선살을 조각냄으로써 나는 세비체를 완성한다 완성은 네가 좋아했던 것 세비체는 우리가 공유했던 것 너는 봉지에서 얼음 하나를 꺼내 보인다 진짜보다 투명한 아크릴 모조 얼음 한 조각 모조는 올려놓기에 좋다 테이블 위에 혓바닥 위에 꿀꺽 삼키는 척했다 뱉어도 그대로여서 좋다 너는 빈 유리잔에 모조 얼음을 넣고 가볍게 흔들어 본다 그 잔을 나에게도 건넨다 할 말이 남았다며 돌아온 선생이 창밖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자 할 말을 잊고 우리를 잊고 제라늄 심기에 여념 없는 모습을 보자 지친 선생이 쪼그려 앉은 채로 기체가 되어 가는 풍경을 보자 화단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선생의 캐리어를 가지고 오자 거기 들어 있는 것이 편지라면 열어 보겠지 폭약이라면 사용해야 할 곳이 있다 네가 기다리던 소식이라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뭐가 더 있어 봉지를 뒤지면서 네가 말한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다 안락의자가 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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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포식자들

포식자들 신준영 바람은 날 선 송곳니와 푸른 입술을 가졌다 길고양이의 주검이 오늘 바람의 첫 끼니다 어제 죽은 습기의 심장을 길 위에 내다 너는 건 길짐승들의 오래된 습성 포식자의 뜨겁고 거친 혀 아래 오래된 습성이 뒤틀리며 말라 간다 말라서 가벼워진 심장은 맨발의 바람을 가볍게 들어 올린다 바람은 그물로 짠 위장을 가졌다 온종일 벽화가 그려진 동네의 남겨진 이야기를 먹고 아이들이 사라진 아파트 놀이터의 무료함을 먹고 뒷골목을 흔들리며 가는 취한 그림자의 혼잣말도 주워 삼킨다 쓰레기봉투를 뒤지던 길고양이가 하루치의 양식을 얻어 사라질 때 줄 없는 번지점프를 꿈꾸며 바람은 불 꺼진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선잠에 든다 삼킨 심장들을 되새김질하며 허기로 소생하는 이후의 하루,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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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음복의 밤을 지나 해피벌스데이투유 노래하는

음복의 밤을 지나 해피벌스데이투유 노래하는 신준영 어제는 당신을 위해 향을 피웠고 오늘은 당신을 위해 초를 태운다 향과 초의 시간을 통과하면 어김없이 아침은 와서 씨를 삼키고 씨를 뿌린다 수건을 접다가 수건을 접지 못하는 날들을 종일 떠올리게 되는 하루 너머의 하루 하루에 하루가 더해지면 하루에 하루가 사라지는 숨들의 명멸로 깨어나 다시 노래하는 순정의 아침이다 사르고 일어나는 불길이 우리를 여기 데려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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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무한히 증가하는 숫자의 방

[문장웹진 REWIND] 무한히 증가하는 숫자의 방 -서유미 「검은 문」 (문장웹진 2012년 3월호 수록) 읽기 편혜영(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검은 문」을 처음 읽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이자 ‘벽’에 관한 정보이다. ‘문에 손을 대지 않는다’를 규칙으로 가진 이곳은 소등 후에는 방 사람들이 돌아가며 출구 앞에서 불침번을 서는 규칙-그러고 보면 규칙이 많은 곳이다-을 가진 공간이기도 하다. 갇힌 사람들은 출구로 끌려 들어가면 죽는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어서, 출구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품고 소설을 읽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소설을 다시 읽을 때도 이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문’보다는 ‘숫자’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한 방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세 사람, 211번, 123번, 99번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벽돌을 돌리며 의미 없이 ‘숫자’를 올리는 작업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낸다. 세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진한 향을 풍기는 박하 맛 사탕을 습관처럼 먹으며 손잡이를 돌리고 숫자를 증가시키는 무의미한 노동에 열중하며 하루를 보낸다. 도대체 숫자만 끝없이 증가하는 벽돌의 손잡이 돌리는 노동은 왜 계속하는 걸까. 이 단순한 노동의 반복이 그들에게 즉각적인 대가를 건네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노동’은 좁고 무료한 공간에서 그들의 존재 의미를 형성하는 요소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더 큰 숫자를 얻고 싶다는 갈망이다. 세 사람은 하루 종일 손잡이를 돌리면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마음의 평화를 회복한다. 원하는 숫자에 닿지 못하면 부족한 수만큼 불행해진다. 하지만 열심히 돌려도 원하는 숫자는 항상 앞서 있기 때문에,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 대도 원하는 숫자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간수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자신이 그동안 쌓아놓은 숫자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들은 끊임없이 손잡이를 돌리며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는데, 이는 단순히 시간을 소비하는 행위를 넘어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중요한 행위가 된다. 다른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서 숫자에 대한 집착이 갇힌 자들에게 삶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공간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성취는 조금이라도 높은 숫자를 획득하는 것뿐이다. 숫자가 올라가거나 목표한 숫자에 도달했다고 해서 갇힌 자들의 삶이 달라지거나 실질적인 변화가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맹목적으로 숫자를 올리는 일에 매달린다. 숫자는 그저 그들이 이곳에서 존재하게 만드는 규칙에 지나지 않음에도 그들은 이 규칙을 따라 무료하고 무의미한 체계에 질문을 던지지 않고 체계와 처지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폭력이 발생하는 부분도 이 지점과 관련되어 있다. 간수들은 숫자를 통해 세 사람의 행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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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시쳇말: 문학이란 레퀴엠

시쳇말: 문학이란 레퀴엠 방승호 1. 레퀴엠 2. 아직 있는 것을 위한: 예기적 애도 3. 거처가 되어 주는: 자기 삭감의 애도 4. 시체들의 말 5. 문학이란 레퀴엠 1. 레퀴엠 “Dona eis requiem” 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레퀴엠.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 진혼곡(鎭魂曲)이라고도 불리는, 생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를 위한 노래들.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모차르트를 떠올리거나 주세페 베르디를 말하겠지만, 이번 작업의 초점은 레퀴엠의 현대적 흔적들을 더듬어 보는 일이다. 흔적들은 떠다닌다. 다만 우리가 찾지 않았을 뿐. 레퀴엠은 그 형태를 달리하며, 혹은 변주하며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것이 15세기에 여러 성부의 형식으로 변주되었듯이, 이 시대의 레퀴엠은 더 다양한 이미지가 되어 잔존한다. 원형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죽은 이가 죽어서도 세계에 존재하듯이 원형은 몰락하였더라도 그것은 이미지가 되어 세계에 기생한다. 문학이란 이름으로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도사리는, 잠재적 가능태로서 숨죽인 기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레퀴엠은 죽은 자의 죽음을 위로하는 일뿐만 아니라 죽은 자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한다고 말하는 일에도 쓰인다. “Dona eis requiem(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이것은 타자를 기억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영원한 시간을 부여하려는 주문이기도 하다. 기억과 애도는 호출과 재생을 야기한다. 응답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호명하고 증언하며 기록을 거듭하는 일이 때로는 제한된 해석 바깥의 사건을 일으킨다. 상징이 이미지가 되듯 레퀴엠은 파생된다. 형식적 애도 바깥에서 주체의 출현을 예비하는 시도로서 레퀴엠은 변이된다. 들뢰즈가 말한 해석 자체를 전환시키는 해석, 다시 말해 관습 바깥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이행은 정형화된 애도에서 탈피할 때 비롯된다. 의식과 실천이 범벅되는 그 경계로부터 현대식 레퀴엠은 다시 꿈틀댄다. 문학이란 이름의 레퀴엠이 모습을 드러낸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이라는 전제를 뒤흔들면, 관행의 중력 바깥으로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죽지 않은 자를 위한 형식. 자기 삭감의 형식으로 뒤틀린 채 존재하는 양태. 오히려 이러한 지점들이 레퀴엠을 작동하는 작금의 방식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을 레퀴엠이라는 이름 아래 포섭하자는 말은 아니다. 타자에 대한 애도라는 명분으로 다시 정형화된 그 관습 이면의 무엇들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문학은 늘 질서 바깥의 것을 주목해 왔으며, ‘문학적인 것’은 그 양태들과 함께 뒤섞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레퀴엠으로부터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닐지라도 주체와 타자로 호명되는 그 이분적 질서 사각지대에 애도 대상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죽음으로 호명된 타자는 잠시나마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되지만, 죽지 못한 존재는 타자라는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채 경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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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한강의 양의성(Ambiguity)

한강의 양의성(Ambiguity)1) 후쿠시마 료타(福嶋亮大)2) 한국어 번역: 정창훈 1. 우선 한 가지 밝혀 두자면, 나는 한강의 열렬한 독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녀가 주제화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만, 내가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으며, 한강의 서술 방식 또한 종종 암시적인 측면이 있기에 읽어 나가다 보면 구름을 잡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 그녀가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이며 그것이 문장에 추진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모든 작품에서 소재나 주제에 적합한 서술 방식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그녀의 문학이 일본에서 수용되는 방식을 보면, 전반적으로 비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위화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시적(詩的)’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녀의 문체가 구체적으로 분석되지 않고 무조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 그러하다. 그러한 평가를 하고 싶다면, 글쓴이가 먼저 ‘시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단순히 꾸밈만 있고 내용이 없는 문장과 어떻게 다른지를 책임을 갖고 확실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한강을 둘러싼 일본 독서계의 분위기는 ‘아픔’이나 ‘상처’나 ‘회복’과 같은 심오해 보이지만 결국 누구나 안심하고 입에 담을 수 있는 클리셰를 동반할 뿐이며, 개별성・비판성을 결여한 채 모호한 안개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에 관한 일본인들의 비평은 대체로 판에 박힌 듯이 이러한 클리셰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현재 일본에서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전쟁이 빈번히 언급되는 반면,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구의 독자들이라면 그래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의 독자들이 한강이 묘사하는 ‘아픔’을 그토록 쉽게 일반화해도 괜찮은 것일까? 애초에 근현대 한국의 ‘아픈 역사’의 원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카터 에커트의 방대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군사주의의 뿌리는 일본 육군의 사관 교육에 있었다. 군사 쿠데타를 거쳐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본래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인 교관으로부터 규율과 가치관을 주입받은 군인이었다. 따라서 ‘개발 독재’를 기축으로 하는 그의 국가 형성 사업은 “항상 현저한 군사적 색채”를 띠었고 “경제를 포함한 모든 분야의 국가 프로젝트가 군대식으로 행해졌으며, 그 영향은 한국 사회 곳곳에까지 미쳤다”고 한다.3) 한강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에서 다뤄진 1980년 광주 항쟁도 한국의 군사주의적 정신 풍토를 고려하지 않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박정희 암살 사건 이후, 전두환의 계엄령 아래 북한의 공작에 의한 치안상 위협을 구실로 삼아 일어난 이 학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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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궁금하니까 궁금하고, 알고 싶으니까 알고 싶은

[문장서포터즈] 궁금하니까 궁금하고, 알고 싶으니까 알고 싶은 - 《문장웹진》 다시 읽기, 나는 왜 자꾸 당신이 궁금한가 문장서포터즈 2기 박소희 책은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다. 그 문은 얇고 가볍지만 예상치 못할 만큼 깊고 넓은 세계를 품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는 많은 것들을 감각한다. 아직 겪어보지 못한 죽음이나 이별의 감정을 체험하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시간여행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면 한 세계의 끝 혹은 다른 세계의 시작을 마주하는데 그곳에 이전과 같은 ‘나’는 없다. 세계 하나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은 온전히 각자가 경험하는 문학의 신비다. 거쳐온 세계 하나, 그 문학을 탐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책 한 가운데에 우뚝 서서 작품만을 탐구할 수도 있다. 책의 바깥에 서서 작가의 생애나 작품이 쓰여진 시대 상황, 다른 독자들을 데려와 연결지어서 탐구할 수도 있다. 어떻게 그 세계를 다시 파고들 것인지는 각자 다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세계를 직접 유영하다 온 ‘이전과는 달라진’ 이들은 앞서 말한 모든 것에 기꺼이 손을 뻗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연히 처음 초콜릿을 먹고 달콤함에 매료된 어린 아이가 그것과 비슷한 모양이나 색을 띄는 것들을 곧장 입으로 가져가듯이. 쉽게 말해 문학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은 독자는 곧 작품과 연관된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진다. 이들은 아주 오래 전에도, 다가올 미래에도 늘 존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도서관이나 지역 서점에서 열리는 북토크나 강연에 간다. 관련 전시나 축제가 있으면 작가나 작품의 발자취를 찾아 간다. 인터뷰 기사나 동영상 콘텐츠도 있다.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중 내가 선호하는 것은 인터뷰다. 정리되어 있는 글을 쉽고 빠르게 찾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05년에 창간해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문장웹진 또한 세계와 독자를 잇는 기획을 여럿 진행해왔다. 여러 기획 중 내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지난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이어진 연속 기획 공개인터뷰 ‘나는 왜’이다. ‘나는 왜’ 기획은 매달 독자 10명을 초대해 시인 혹은 소설가를 인터뷰하며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했다. ‘공개인터뷰’로 작가와 독자를 물리적으로 한 공간으로 이끌었다는 점이 새로웠다. 또 인터뷰만 공개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라면 자선 시를, 소설가라면 자선 소설을 함께 공개했다. 이는 인터뷰에서 이야기 나눈 작가의 작품세계를 다시금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기존에 10회로 기획되었던 공개인터뷰는 2015년까지 이어져 이제니 시인을 마지막으로 15회까지 진행됐다. 기획의 이름인 ‘나는 왜’에서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를 칭했다. 작가마다 질문이나 주제를 갖고 인터뷰가 진행되었는데 가령 박준 시인의 질문은 “나는 왜 서정을 미인처럼 사랑하나”였다. 정세랑 소설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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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결국은 문학이었다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노작홍사용문학관) 결국은 문학이었다 노작홍사용문학관 정란희 작가 노작홍사용문학관의 상주작가로서 가게 된 영국 연수는 나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만들었다. 공항에서 일행들의 반짝이는 미소가 나를 맞아주었을 때부터 이 연수가 이상하고 진기한 체험이 될 거라는 예감이 번쩍이긴 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토끼를 따라간 앨리스처럼, 나는 그렇게 영국으로 가는 토끼굴로 뛰어들었다. 토끼굴은 작고 좁으면서도 끝이 없었다. 작은 공간에 끝없이 갇혀 있었지만 동시에 이동하고 있었고, 14시간이 지나 낯설고 기이한 ‘영국’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굴러떨어졌다. 영국은 나에게 해리포터의 나라이기 이전에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였다. 전 세계인이 지켜본 올림픽 개막식을 자국의 문화 콘텐츠로 가득 채워 문화 강국의 자부심을 뿜어냈던 나라, 최근에는 브렉시트와 경제불황이라는 말로 더 많이 회자 되는 나라, 그러면서도 문학 선진국을 생각하면 여전히 1, 2위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는 나라, 그것이 내가 영국에 대해 가진 단편적인 인식의 대부분이었다. 영국 연수에서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영국작가 루이스 캐럴의 동화, 1865년)가 직면한 놀라움과 진기함을 보고, 듣고, 체험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낯섦’이었고, 이전에는 본 적 없던 ‘놀라움’이었고, 듣지 못한 ‘새로움’이기도 했다. 직접 보고 체험한 문화는 새로웠고 많은 영감과 배울거리,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놀라움’은 토끼굴 속 나라의 진기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앨리스 자신의 이상한 변화-쪼그라들고, 커지고, 목이 길어지고, 당돌해지고- 때문이었을까? 앨리스의 영국 연수는 앨리스가 체험한 문화 강국 영국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영국에 도착한 앨리스가 그 나라에서 겪은 진기한 변신 이야기이기도 하다. 1. 에든버러 북 페스티벌 세계 최초의 문학 도시인 에든버러는 옛 스코틀랜드왕국의 수도답게 문화와 정치, 관광의 중심지였다. 특히 『셜록 홈즈』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 『해리포터』의 작가 J.K 롤링, 『아이반호』를 쓴 월터 스콧 등 많은 작가를 배출한 도시로 유명하다. 우리가 에든버러 북 페스티벌에 도착한 날은 8월 19일, 비가 오리라는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하늘이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8월 9일부터 24일까지 16일 동안 진행되는 축제장은 무척 안정되고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본관으로 여겨지는 건물 2층에 오르자 어린이들이 동화책을 들고 한 줄로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연을 마친 동화작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 어린이들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동화작가는 밝은 표정으로 어린이들의 이름과 함께 정성스레 사인을 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다정한 풍경이었다. 다양한 책과 일러스트와 어린이들의 참여 마당을 둘러본 다음, 관계자 미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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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유종의 미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거마도서관) 유종의 미 거마도서관 흥흥 작가 들어가며 3년 동안 상주작가 사업에 참여하며 감사한 일이 많았다. 덕분에 계속해서 상주작가 사업에 참여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상주작가 사업과 개인작업을 언제까지 병행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2025년에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한 작가가 최대 3년까지만 상주작가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내 마지막 3년 차의 상주작가 무대였던 거마도서관이 우수시설로 선정되었다. 상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우수시설로 선정된 것도 모자라 영국 연수의 기회까지 얻었다.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 연수를 통해 상주작가 사업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라는 의미로. 더는 상주작가 사업에 참여할 수 없지만, 지난 3년간 상주작가를 하며 느끼고,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영국 연수로 완성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영국 연수는 그런 경험이 되었다. ‘문학기반시설 상주작가 사업’을 떠올리면 그림 하나가 떠오른다. 삼각형 그림이다. 이 삼각형의 세 꼭짓점에는 각각 공공시설, 서점, 작가라고 쓰여 있다(여기서 공공시설은 도서관이나 문학관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삼각형의 중앙에는 독자가 있다. 이 연수 후기는 일정 순서와 상관없이 내내 이 삼각형을 떠올리며 썼다. 공공시설 상주작가로 여러 해 근무하면서 점점 더 모집에 어려움이 없을 것 같은 프로그램만 기획했다. 상주작가 사업은 참가자들이 더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더 많은 혜택이 지역에 돌아가는 것이고, 이것이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영국국립도서관에서 만난 Community Engagement Manager인 Jamal Mohamed를 만나면서 깨졌다. 지역주민과의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는 18~24세 청년층이 도서관에 더 자주 올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한다. 그 이유에 관해서 물으니, 그 전까지 도서관의 주 방문층은 지식인, 학자 등이었기 때문에 도서관 방문 및 독자층을 확대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18~24세는 수험생이면서 취업 준비생이다. 이 연령층은 책보다 학업이나 자격증에 집중하다 보니, 문학 독서율이나 문학 프로그램의 참여율은 낮을 수밖에 없다. 고백건대 상주작가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이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프로그램을 개설해봤자 신청자가 없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과연 그랬을까. 그리고 그게 과연 중요한 문제였을까. 신청자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신청자가 서너 명뿐이라고 하더라도 18~24세의 학생들과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다면 그 성과는 단순히 보고서 한 줄로 그치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이렇게 인원수에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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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연수 일지 : 지역, 연계, 참여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가온도서관) 연수 일지 : 지역, 연계, 참여 가온도서관 김병운 작가 런던에서의 일정 가운데 단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국국립도서관(British Library)이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도서관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손꼽히는 곳인 만큼 규모가 압도적이었고, 자국에서 출판되는 모든 인쇄물이 납본되는 곳답게 도서, 지도, 악보, 신문, 음반 등 매우 다채로운 형태의 자료를 보유하고 있었다. 상설 전시 를 통해 마그나 카르타 원본, 구텐베르크 성경, 셰익스피어 제1차 희곡집, 제인 오스틴 필사본, 비틀스 자필 가사 등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를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기도 했는데, 소장 가치가 높은 자료도 증명 없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하는 도서관의 정책적 기조가 전시에도 반영되어 있는 듯했다. 일정 관계로 아쉽게 전시는 관람하지 못했으나, 보유 자료의 활용도를 높이는 동시에 이용자의 접근성을 강화하려는 도서관의 노력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도서관의 기반 시설 역시 이용자의 입장에서 설계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각층마다 열람 공간을 복도까지 확장해놓은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각각의 구획마다 테이블의 형태가 모두 다른 것 또한 특별하게 다가왔다. 몰입이 필요한 사람부터 토론과 회의를 통해 의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까지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하는 듯했다. 건물의 층고가 높고 개방감 또한 커서 공용 공간임에도 오히려 이용자들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도서관이 추구하는 공공성과 개별성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했고, 이용자로 하여금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도서관 측의 깊은 고민 또한 느껴졌다. 자료를 보존하고 활용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서관뿐만 아니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창의적인 공간으로서의 도서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도서관 관계자들과의 네트워킹 프로그램 역시 뜻깊었다. 네트워킹은 크게 이벤트 기획 파트와 전시 기획 파트로 나뉘어졌는데, 담당자들의 업무 내용과 성과, 그리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내게 크게 와 닿았던 것은 커뮤니티 참여 매니저(Community Engagement Manager)인 자말 모하메드(Jamal Mohamed)의 이야기였다. 그에 따르면 원래 영국국립도서관은 지역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은 아니었으며, 8년여 전 이용자 실태 조사 이후 본격적으로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집중적이고 꾸준한 노력 덕분에 실제로 인근 1마일 이내에 사는 주민들의 참여가 늘었다고 한다. 관련 사례로 그가 최근 3년간 진행했다며 소개해준 참여형 프로그램 역시 눈길을 끌었다. 18세에서 24세 사이의 청년들이 도서관의 소장품을 소재로 소셜 미디어에 어울리는 시각적 결과물을 만드는 활동이었고, 이를 통해 도서관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동시에 소속감과 애정을 높이는 기획이었다. 보다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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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노작홍사용문학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노작홍사용문학관 조온윤 “Stories are told eye to eye, mind to mind, and heart to heart.” 이번 영국 국외연수로 방문했던 에든버러의 스코티시 스토리텔링 센터에서 운영 철학으로 삼고 있는 스코틀랜드 격언이다. 연수 나흘째 날에 만난 이 말을 나는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자주 떠올렸다. 한국과 달리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탓에 상대에게 손짓과 표정으로 의사를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야기가 눈에서 눈으로, 정신에서 정신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는 믿음만 있다면 영국은 물론 어느 나라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해외를 나가본 경험이 적어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이 짧은 문장 한 줄이 자꾸만 묘한 용기를 불어넣어 주곤 했다. 지난 연수를 회고하며 이 문장이 가장 먼저 떠오른 데에는 영국이니 당연하게도 영어로만 진행되는 스토리텔링 센터의 공연을 보고 ‘이야기는 그저 눈에서 눈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라고 스스로 다독여야 했던 때문도 있을 것이다. 공연의 내용을 전부 해득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자조적으로 한 말이지만, 자꾸만 강조하게 되는 이 문장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이날 스토리텔링 공연을 관람하고서 알게 된 건, 그 나라만의 문화에 기반한 유머와 뉘앙스가 담긴 모든 대사를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이야기꾼이 전하려는 이야기의 얼거리를 비롯해 슬픔과 기쁨, 분노와 두려움 따위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그림자극과 애니메이션, 노래와 연주가 어우러졌기 때문도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 무대에서 구연을 맡는 주연 배우, 그러니까 ‘스토리텔러’가 실감 나는 구연과 감정선으로 이야기 속 등장인물과 상황에 쉽게 이입하게끔 관객들을 끌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관람한 스토리텔링 공연 〈A Wolf Shall Devour the Sun〉은 한두 명의 출연자가 구술로 극을 이끌어가는 공연이었는데, 이런 형식 자체도 우리나라에서는 자주 접해보지 못한 형식이라서 내게는 유독 새롭게 느껴졌다. 여기에 연극배우와는 성격이 분명하게 다른 듯한 스토리텔러라는 역할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찾아본 이날 공연의 스토리텔러는 Dougie Mackay, 노래와 연주는 Jemima Thewes라는 가수이자 작사가였다. Mackay 씨는 바이킹처럼 길고 풍성한 수염을 기르고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인 킬트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이야기를 손에 쥔 공처럼 갖고 놀듯이 그의 읊조리는 짧은 농담에 모두가 웃고, 격앙된 한 마디에 모두가 긴장하며 숨을 죽였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 스토리텔링이 이렇게 멋진 무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우리나라에도 물론 어린이 독자에게 동화책을 소리 내어 들려주는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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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거마북이의 모험 : 거마북이, 영국에 가다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거마도서관) 거마북이의 모험 : 거마북이, 영국에 가다 거마도서관 김미경 모험을 시작하며 그림 1 거마도서관의 마스코트 ‘거마북이’ 안녕! 나는 거마도서관을 지키는 마스코트 ‘거마북이’야. 거마도서관이 2024 문학기반시설 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기관으로 선정된 덕분에, 담당자님을 따라 꿈에 그리던 영국에 다녀오게 되었어.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 특히 잠자리에 든 아이들에게 「피터팬」을 읽어주는 조앤 롤링과, 아이들이 동화 속 악당들로 인해 악몽을 꾸자 하늘에서 우산을 들고 날아와 물리쳐 주는 메리 포핀스로 이어지는 연출이 인상 깊었지. 영국문학과 문화가 가진 힘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것 같았어. 그런 영국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다니! 올해로 스무 살이지만 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보니 해외에 가보는 건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거렸어. '거마북이의 모험: 거마북이, 영국에 가다'! 직접 보고 느낀 이야기를 들려줄게. 첫 번째 모험. 거마북이, 날다 14시간이 넘는 긴 비행 끝에 드디어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어. 비행은 처음이었지만 씩씩하게 잘 해냈지.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껴본 거북이는 아마 몇 안 될걸! 킹스크로스역 앞 숙소에 짐을 풀고, 먼저 도착한 분들과 만나 드디어 이번 연수 완전체가 될 수 있었어.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며 내일부터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 모두 피곤했지만 설렘 가득한 눈빛이었지. 특히 흥흥 작가님을 만나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흥흥 작가님은 2024년에 거마도서관 상주작가로 활동하며 우리 도서관만의 특색있고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진행해 주셨지. 나 ‘거마북이’를 만들어 주신 것도 바로 작가님이셔. 작가님의 재치와 열정은 도서관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어. 지금 돌이켜봐도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반짝거렸지. 물론 그 때는 우리가 8월의 어느 날 저녁, 런던에서 마주 앉아 저녁을 먹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말이야. 두 번째 모험. 지식의 바다로의 항해 아침에 일어나 TV를 켜니 어린이 채널에서 페파피그와 패딩턴이 나왔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친구들이지. 우리 도서관에서도 자주 보이는 책의 주인공들이라 알고는 있었지만, 런던에서 이렇게 보니 새삼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어. 오늘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영국국립도서관이었어. 영국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 원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북, 셰익스피어 자필본 등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희귀한 자료들을 포함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지. 지식의 바다를 항해한다는 의미로 거대한 배를 형상화했다는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오픈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어. 평소에도 얼마나 사랑받는 공간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 도서관의 위치와 접근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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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책과 일상, 문학의 문턱을 낮추다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가온도서관) 책과 일상, 문학의 문턱을 낮추다 가온도서관 송은정 2024년 문학기반시설 상주작가 지원사업을 운영하며 주기적으로 상주작가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저희 일등하는 거 아니에요? 저희가 이번에 해외연수 갈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김병운 상주작가님은 “선생님, 김칫국 금지예요.”라는 답을 돌려주시곤 했다. 그리고 2025년 4월, 가온도서관이 최우수 시설로 선정되었다는 결과발표를 보고 연락을 드렸다. “제 말이 맞죠! 짐 쌀 준비하세요.” 그렇게 도착한 영국에서 마주한 것은 책이 대중 안으로 스며들고, 일상 속에 자리 잡은 광경이었다. 막연히 한국의 작가 생가와 같은 관광지의 형태, 대출·반납 위주의 도서관 형태가 주가 될 거라 예상했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풍경은 전혀 달랐다. 어느 곳 하나 사유화된 곳이 없었다. 누구나 제한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소박하고 편안한 장소들, 그리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참여’의 요소들이 먼저 시선을 끌었다. 영국의 문학 현장은 기념이나 보존, 보관의 장소가 아니라, 접근과 참여의 장소라고 부르는 것이 걸맞았다. 2연수 일정 중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았던 것은 영국문화원 문학 담당 관계자와의 미팅 중의 말이었다. “번역이라는 언어적 장벽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문학은 종이와 펜 그리고 컴퓨터만 있으면 어디든지 퍼져나갈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오케스트라나 공연처럼 큰 장비나 무대 장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문학은 더 보편적이고 확산 가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영국 국외연수 일정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도서관 사서로서, 또 문학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책이 일상에 스며드는지’ 영국의 문학 향유 방식을 나름대로 따라가는데 있어서의 길잡이가 되기도 하였다. 영국 국립도서관 The British Library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받은 주요한 인상은 보존과 개방의 공존이었다. 사실 어느 도서관이 이 두 가지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냐마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영국 국립도서관의 노력이 더 와닿았던 것도 사실이다. 과거 희귀·고자료 중심의 폐쇄적 운영에서 벗어나 누구나 패스를 발급받아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체계로의 전환, 그리고 수장고 자료의 신속한 제공(신청하는 모두에게)과 디지털 제공을 병행해 이용의 시공간적 제약을 낮춘 점이 인상 깊었다. 생활권 단위의 원 마일 커뮤니티 구축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 사업을 운영하면서 도서관을 ‘연구자를 위한 장소’에서 ‘지역 커뮤니티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도 돋보였다. 국립 단위의 도서관이 원 마일 커뮤니티를 중점 사업 중 하나로 보고 있다는 점도 놀라웠다. 국립도서관이지만 여전히 지역에 존재하는 모두를 위한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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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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