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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호

  • 작성일 2024-12-01

기획의 말

《문장웹진》은 연초에 독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나만 알고 싶은, 다시 보고 싶은 《문장웹진》의 작품을 그 이유와 함께 추천받았고 해당 작품은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로 하여금 시각화하였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김숨, 「철(鐵)의 사랑」을 읽고 (《문장웹진》 2020년 6월호)

점선면



점선면 작가 한마디

섬세한 시선으로 다른 삶들을 바라보는 것


독자의 한마디

노동자의 인권 문제를 적나라하게 지적해 냈다.


▶김숨, 「철(鐵)의 사랑」 감상하러 가기

점선면 작가

불규칙한 것들로 규칙적인 우리의 모습들을 그립니다.

문장웹진 12월호 살펴보기

예지

예지 임주아 긴 여름 방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꿈에 파묻힌 몸에서 비린내가 났다 몸은 흉몽일까 올려다본 천장이 자루처럼 불룩했다 놀란 입속으로 물이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고인 방 드러난 벽에 곰팡이가 퍼져 있었다 악령 같았다 가죽처럼 찢어진 벽지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젖은 책이 쪼그려 앉아 빗물을 핥았다 꿈이 늦어지고 있었다

  • 관리자
  • 2024-12-01
망뭉망

망뭉망 임주아 우리동네 더 망해도 싸다는 건물주 죽을 때를 놓쳤다는 동료 아파트를 염원하는 이웃 옆에서 7년째 책방 하는 나 시급하게 한가한 건 마찬가지 믿음 없이 거룩한 건 매한가지 잡탕밥이다 그래도 밥이지 어려운 말로, 이질적이다 그래도 질적이지 동네연구자들 아닌가 주제 : 내가 망할 것 같애? 망가지고 뭉개져도 망하지 않는 맷집 맷집도 집이다 난로 앞에 모인 망뭉망 동네 사람들 젓가락 들고 차가워지지 말자 왕뚜껑에 고딕체로 있다 후후 불어먹는다

  • 관리자
  • 2024-12-01
이상수 - 북유럽 도서관 탐방기 ② - 노르웨이 미래숲도서관

[기획 : 문장웹진×문학기반시설상주작가] 〈2023 도서관 상주작가 지원사업〉에 선정된 우수도서관 담당자, 상주작가의 역량강화를 위하여 독서 강국인 북유럽(스웨덴&노르웨이) 탐방과 도서관 운영 우수사례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2024년 9월 24일부터 30일까지 이어진 5박 7일간의 이야기를 문장웹진에서 만나보세요. 북유럽 도서관 탐방기 ② - 노르웨이 미래숲도서관 양정작은도서관 이상수 노르웨이 미래숲도서관을 방문한 날, 공기는 서늘했다. 우리 일행은 언덕을 오르내리며 천천히 푸른 서가를 거닐었다. 숲을 도서관으로 만들겠다는 최초의 발상은 어떻게 하게 된 것일까. 스코틀랜드 예술가 케이티 패터슨은 한 세기 동안의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세계적으로 엄선된 백 명의 작가에게 일 년에 한 명씩 원고를 제출케 하고, 백 년 후 종이책으로 출판하는 것이었다. 여기엔 나무를 심고 키우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외곽의 ‘노르마카’에 미래도서관 숲을 조성한 후, 가문비나무 1,000여 그루를 심었다. 선정된 작품의 원고는 한 세기 동안 읽히지 않은 채, 오슬로의 공공도서관 ‘침묵의 방’에 각각 보관된다. 2114년이 되면 모든 원고의 봉인을 풀고 이 나무들을 베어 책으로 펴낸다. 2018년에는 한강 작가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오슬로에서 숲으로 가는 길, 홀멘콜렌 스키 점프대가 한 마리 독수리처럼 날개를 펴고 비상을 꿈꾸고 있었다. 근처 호수에서 신을 벗고 발을 담그니, 한겨울 살얼음이 낀 동치미를 먹은 듯 청량감이 느껴졌다. 피오르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트래킹을 시작했다. 길섶엔 갈색빛의 버섯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어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촌락 같았다. 개미들이 가문비 나뭇잎을 끌어모아 고층 집을 지어 놓았다. 잘 익은 블루베리와 라즈베리가 장식처럼 붉었다. 퇴고하지 않은 초고의 숲은 뿌리가 땅 위로 자라고, 이끼가 그 위를 덮어, 또 다른 문장을 쓰고 있었다. 한국의 가을 하늘이 새파랗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노르웨이의 하늘도 그에 못지않았다. 잘 뻗은 가문비나무가 입구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숲에는 곳곳에 두 가지 색이 칠해져 있었는데, 붉은색은 스키 길을, 하늘색은 트래킹 길을 의미한다고 했다. 수문장 나무에 두 색이 함께 칠해진 걸 보니, 여기는 누구든 출입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로 뻗어 오르는 가지는 내 어깨와 키를 맞추기도 했지만, 머리 위로 쑥 솟아오르기도 했다. 쑥쑥 자라 질 좋은 펄프를 생산할 것 같았다. 노르웨이에서 크리스마스트리는 반드시 가문비나무를 쓴다. 이 나무는 최대 오십 미터까지 자라며 수명은 수백 년이나 된다. 작년에는 칠십 년 된 이십 미터짜리를 런던시에 선물하기도 했다. 바이올린의 공명판으로는 그 나무가 최고라고 한다. 추위 속에서 고요히 자라는, 단단한 나이테 덕분이라고 한다. 장 지오노의 소설

  • 관리자
  • 2024-12-01
이상수 - 북유럽 도서관 탐방기 ① - 스톡홀름과 쿨투어후셋도서관

[기획 : 문장웹진×문학기반시설상주작가] 〈2023 도서관 상주작가 지원사업〉에 선정된 우수도서관 담당자, 상주작가의 역량강화를 위하여 독서 강국인 북유럽(스웨덴&노르웨이) 탐방과 도서관 운영 우수사례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2024년 9월 24일부터 30일까지 이어진 5박 7일간의 이야기를 문장웹진에서 만나보세요. 북유럽 도서관 탐방기 ① - 스톡홀름과 쿨투어후셋도서관 양정작은도서관 이상수 스웨덴까지의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인천에서 도하까지 10시간, 다시 스톡홀름발 비행기에 탑승하여 7시간을 더 날았다. 하늘길에서 20시간을 보낸 후여서인지 유럽의 공기는 달콤했다. 스톡홀름은 통나무(Stockar)와 섬(Holmar)의 합성어이다. 1255년 무렵 구시가에 통나무로 성을 쌓아 도시의 기초를 마련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13세기 중반 현재의 감라스탄 지역의 언덕 위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요새를 만들고 도시를 형성해 발전시켰다. 방문하기 전, 이 도시는 내게 심리학 용어로만 존재했다. 1973년 8월,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강도가 침입했고, 이때 인질로 잡혔던 한 여성이 강도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스톡홀름 증후군’이었다. 도서관 앞 광장 호텔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섰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세르겔 광장은 퇴근하는 시민들로 붐볐다. 늘씬한 키와 금발의 하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이곳이 이국임을 실감케 했다. 남녀 모두 수수한 옷차림으로 큰 가방을 메거나 등에 진 사람들이 많았다. 왕궁과 의회가 있는 감라스탄, 철도와 지하철노선이 교차하는 센트럴역 등 스톡홀름의 모든 길은 이곳 광장으로 통한다고 한다. 쿨투어후셋도서관의 외관은 쇼핑몰처럼 보였다. 광장 분수 안에 세워진 자수정 탑 같은 조형물 때문인지도 몰랐다. 모든 차는 분수를 중심으로 돌아 나갔고 건물 앞에는 넓은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도시의 가장 중심에, 상업 시설이 아닌 문화공간을 조성한 것을 보니 이 나라에서 도서관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막 트램이 도착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쿨투어후셋도서관 내부 쿨투어후셋은 ‘문화의 집’이란 뜻에 걸맞게 공연장, 전시 공간, 6개의 도서관으로 이루어졌다. 한 건물에 6개의 도서관이 있다니. 안으로 들어서자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체스판이었다. 스웨덴의 도서관이라면 반드시 마련된 공간으로, 체스대회가 열리기도 한단다. 공원에서 바둑 두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와 달리 젊은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가 어울려 체스를 즐기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초록과 연두 그리고 오렌지로 채워진 가구로 인해 도서관이라기보다 서점 같은 분위기였다. 낮은 서가에 진열된 책과 빽빽하게 채워진 CD, 감각적인 책꽂이에서 고른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의자가 단연 눈길을 끌었다. 또한 꽂힌 책들이 잘 보이도록 세심

  • 관리자
  • 2024-12-01
류영진 - 작가의 창

[기획 : 문장웹진×문학기반시설상주작가] 〈2023 도서관 상주작가 지원사업〉에 선정된 우수도서관 담당자, 상주작가의 역량강화를 위하여 독서 강국인 북유럽(스웨덴&노르웨이) 탐방과 도서관 운영 우수사례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2024년 9월 24일부터 30일까지 이어진 5박 7일간의 이야기를 문장웹진에서 만나보세요. 작가의 창 - 손서은 작가 인터뷰 류영진 2023년 도서관 상주작가사업의 성과로 2024년 9월 24일부터 9월 30일까지 스웨덴, 노르웨이 해외연수를 가게 됐다. 그곳에서 손서은 작가를 만났다. 손서은 작가는 2020, 2021 원주에서 상주작가를 지내고 2024년 9월부터 12월까지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에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제예술네트워크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스웨덴에 가게 된 손서은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스웨덴에 살러 온 손서은입니다.” 유쾌하고 당찬 자기소개였다. 나는 살러 왔다는 말이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손서은 작가는 말 그대로 3개월의 레지던스 기간 동안 관광객 마인드가 아닌 스톡홀름에서 현지인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말이라 했다. 상주작가 때 문학큐레이터에 실렸던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도서관 직원들과 파티를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였다. 도서관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으니 도서관 식구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어디를 가든 그곳을 살아가려는 손서은 작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스톡홀름대학교에서 레지던스 생활을 시작한 손서은 작가에게 공식적으로 주어진 강의는 두 번이었다. 하지만 열정이 넘치는 손서은 작가에게 두 번의 강의는 너무도 짧은 것이었다. 손 작가는 스톡홀름대학교의 한국학과 학생들과 짧은 소설 쓰기로 하고 싶어 했다. 일기식으로라도 좋으니 한국말로 글쓰기를 하고 싶고, 그들이 쓴 글을 봐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더 친밀하게 만나길 원했다. 상주작가 기간에 ‘뭘 해서 사람들을 도서관으로 데려오지? 뭘 해서 책을 읽게 하지?’ 하는 기획자 마인드로 임했던 손 작가는 레지던지 작가로서도 같은 마음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강의는 두 번이지만, 더 하고 싶고, 더 많은 학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과 글을 쓰며 그 속에 어울리고 싶어 했다. 이에 학교 측도 손 작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 준 것 같다. 레지던스 기간 동안 어떤 계획을 갖고 있냐는 질문에는 ‘계획은 없어요. 계획하지 않지만 공상할 뿐이에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학생들과 글쓰기 하고 싶은데, 글쓰기 하자고 하면 모일까?’ 걱정하던 차에 미래인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 40권을 보내 줬다고 한다. 강의 시작 전 책이 도착했고, 함께 한국어책 읽어 보자고 하니 학생들이 모였다고 한다. 덕분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자신의 책을 읽으며, 공상만 하던 글쓰기 단계로 갈 수 있었고. 나아가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 관리자
  • 2024-12-01
하루와의 대화

[에세이] 하루와의 대화 양안다 #1 안다 : ‘××× ××××’라는 가제로 시집을 준비 중이야. 현시대와 ××××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며 접근했어. 마무리가 다 되어 가고 있는데, 아마 몇 편을 새로 써서 교체할지도 몰라. 하루 : 혹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나 아직 공개하지 않은 시 한 편을 살짝 보여줄 수 있어? 안다 : 가장 애착이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쓴 시 중에서 마음에 드는 시야. 뉴욕 헤럴드 트리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 있는 걸까. 아무도 우릴 듣지 못했으면 좋겠다. 레아, 네가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쳐다보지도, 손 흔들지도 않았잖아요. 나는 떠나기 싫어‧‧‧‧‧‧. 내가 마음이 변했다고 한 적 있나요. 그저 새 장갑을 사러 가겠다고 했을 뿐이에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가도 괜찮겠어요? 나는 광장을 걷다가도 꽃다발을 구매했다. 혁명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가득했고 온 도시가 불안으로 떠들썩했다. 레아는 어디 있는 거지? 이렇게 중요한 때에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날이 추우면 장갑을 끼면 되지만 폭염이 쏟아지니 손 가죽을 벗길 수 없더구나. 어젯밤의 꿈 얘기를 할 때에는 귀신들이 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단다. 레아가 몸을 숨기고 있는 호텔에서. 복도는 언제 끝나는 걸까. 항상 이런 식이다. 세상에는 문이 너무 많고 열쇠‧‧‧‧‧‧ 그것은 이빨이 너무 많다. “나도 노력했는데 바뀌지 않았다고요. 증오는 우리를 먹고살게 해 줄 수 있어요. 사랑, 사랑, 사랑, 이젠 다 지겹다고요! 위선자들!” 사건은 지난달 블랙 먼데이에 발생했다. 나무보다 더 많은 불이 숲에 있었다. 나무보다 더 많은 연기가 숲에 있었다. 숲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레아, 그날부터 너는 호텔에 오지 않았다. 삶이 끝난 뒤에 혁명이 성공하면 무슨 소용이야? 복도는 언제 끝나는 걸까. 보고 싶나요? ‧‧‧‧‧‧손톱만큼. 듣고 싶나요? ‧‧‧‧‧‧샹송 조금. 중간에 자주 서지만 내일 오전이면 도착할 겁니다. 열차에서 내린 곳은 도시 외곽의 들판이었다. 폭염이 쏟아지는 어느 여름. 하염없이 걷다가 길을 잃을 뻔했지. 나는 머리끈으로 들꽃을 묶어 너에게 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눈치채기를 바라면서. 이곳은 수질이 좋지 않나 봐요. 손등에 붉은 반점이 올라와요. 빈혈기가 도지고 신물이 올라오는데도 레아, 나는 너와 함께 끝없는 들판을 걸었다. 땀 맺히는 손등을 벅벅 소리 나도록 긁어대며. 쏟아지는 코피를 움켜쥐고. 새로 산 장갑인데 다 버려서 어떡해요. 흰 장갑이었던 것이 흰 꽃 사이로 내던져졌다. 레아는 맨손으로 나의 얼굴을 문질렀다. 들꽃으로 피를 닦아 주다가, 붉게 물든 손등을 핥다가, 주근깨가 들썩이도록 웃으며 레아가 말했다. &ldqu

  • 관리자
  • 2024-12-01
이등시민과 세계시민 사이

이등시민과 세계시민 사이 ― 소수자 시민권의 기획과 해외 이민의 상상력 오혜진 ‘탈조선’이라는 모험과 자기 계발의 윤리 2015년을 기점으로 확산된 ‘헬조선’ 담론은 계급 세습이 고착화된 한국사회를 풍자하는 ‘수저론’과 결합하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정치 담론으로 회자됐다. 잘 알려졌듯 이 담론은 한국사회를 더는 진보의 기획이 불가능할 정도로 도태된 미개한 공간으로 정의하며, 젊은 세대를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호명하려는 기성세대의 욕망 또한 단호히 거절한다. 헬조선 담론과 함께 부상한 ‘죽창론’ 역시 ‘리셋’에의 강렬한 열망을 내세웠지만, 이는 사회변혁에 대한 의지라기보다는 ‘죽으면 끝’이라는 자기 파괴의 제스처에 가깝다고 해석된다.1)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2015)2)는 청년 세대의 분노와 좌절, 자조의 정동이 주조한 헬조선 담론을 발 빠르게 포착해 선동적인 대중 서사로 가공한 사례다. 전작들에서 ‘자살’(『표백』, 2011)과 ‘덕질’(『열광금지, 에바로드』, 2014)을 통해 “저항하는 잉여”3)로서의 청년 형상을 부조한 바 있는 작가는 『한국이 싫어서』에서 ‘해외 이민’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출한다. 다만 그가 모종의 “도발”4)을 의도한 것과 달리, 독자들에게 이미 ‘탈조선’의 상상력은 불온하다기보다는 또 다른 차원의 ‘노오력’을 요하는 규범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소설은 ‘해외 이민’이라는 선택지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두 가지 정황을 제시한다. 하나는 ‘평범한 여성’은 한국사회에서 시민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등시민”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싫어서』, 44쪽)라는 진단이 ‘홍대 나온 20대 후반 여성’ ‘계나’의 자기인식이다. 즉 계나는 학벌과 외모, 가족의 경제적 지원을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파악한다. 또한 그는 어릴 적 자신의 할머니가 새벽에 폐지를 줍기 위해 무단 횡단을 하다가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다고 회고함으로써 ‘폐지 줍는 할머니’의 형상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이자 비참한 미래로 의미화한다.5) 다른 하나는 소수자들이 연대해 사회구조를 변혁하고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일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 관리자
  • 2024-12-01
실패의 의지

실패의 의지 - 최근 퀴어 가족 서사에 관하여 박민아 1. 내부의 외부 - ‘그런 것은 없다’ 행동심리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원숭이 실험을 통해 원숭이들이 불평등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실험을 통해 드 발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불평등보다 ‘평등’이라는 전통이 인간종보다도 더 오래된 개념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실험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우리에 갇힌 두 마리의 원숭이에게 일정한 행동의 수행을 요구한 후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왼쪽 원숭이에게는 오이를 주고 오른쪽 원숭이에게는 포도를 준다. 같은 행위의 결과로 오이만을 지속적으로 전달받은 왼쪽 원숭이는 오이를 거부하거나 급기야 오이를 집어던지며 분노한다. 우리는 이 실험을 통해 ‘평등’이 인간종에게만 있는 특수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1) 그런데 그보다 이 실험에서 재미있는 지점은 불평등한 보상 체계에 분노하는 왼쪽 원숭이가 아니라 오른쪽 원숭이의 반응에 있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오른쪽 원숭이는 불공정한 보상 체계를 의심하지 않으며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만약 평등에 대한 전통이 인간종보다도 더 오래된 개념이라면, ‘불평등’에 대한 전통 역시 그에 못지않게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불평등 구조에서 수혜의 당사자는 평등에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른쪽 원숭이에게 이 게임의 불공정성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보이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당연’한 무엇일까. 만약 이후에 두 원숭이가 경쟁을 통해 포도를 획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경쟁에서 패했을 때 오른쪽 원숭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김보영의 SF소설 「얼마나 닮았는가」2)에서는 ‘성차별이 없다고 가정되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사고실험’을 보여 준다. SF에서 ‘사고실험’은 “만약?”을 질문하고, “우리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현실” 또는 사회적 규범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3)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유로파용 보급선은 성차별에 대한 정보값이 입력되지 않은 ‘일종의 폐쇄 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소설 내 문제 상황은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먼저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온 구조 신호에 응답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신념의 충돌이 갈등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면, (여성) 의체에 인격을 탑재한 위기관리 AI 컴퓨터 훈의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위협하는) 타자로서의 지위에서 발생하는 취약성과 그에게 가해지는 남성 선원들의 폭력이 두 번째 층위에 있다. 그리고 이 사태를 진압해야 할 훈의 눈에 보이지 않는, 모종의 이유에 의한 선내 폭동에의 감지

  • 관리자
  • 2024-12-01
‘K-예술’, 전통, 세계화

‘K-예술’, 전통, 세계화 - 88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공연계 문화교류 담론에 대한 단상 전지니 (한경국립대학교 교수,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Visiting Scholar) 1. 88 서울올림픽과 문화 세계화 최근 국립극장 전속 단체인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겸 단장 유은선)이 제작한 가 영국 바비컨센터에서 관객과 관계자의 호평 속에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해당 작품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주영국한국문화원이 주관한 제11회 ‘K-뮤직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공연되었다.1) 주지하다시피 K-POP 및 K-드라마의 전세계적인 흥행은 K-콘텐츠의 세계화라는 화두와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또한 맨부커상에 이은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번역의 난관을 가로질러 국내 소설이 다른 언어권의 독자와 어떻게 호흡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창극 의 성공과 관련하여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이라는 화두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논의될 수 있을까. 이 글은 K-공연예술의 세계화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대신, 그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된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의 공연계 상황에 대해 논한다.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이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1950년대, 곧 전후 이미 세계 진출의 방향성을 논의하던 영화계와는 달리2), 공연계에서 세계 시장과 평단을 바라보게 된 시점은 1980년대 중후반이었다. 관련하여 1989년 한 언론에는 “한국문화 세계에 심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이 기사는 한국문화의 세계화 전략에 대해 논하며 전통예술의 해외 나들이가 활발해지고 있고, 특히 올림픽을 전후하여 헝가리, 동독 등 공산권 공연이 활발해지고 있음을 언급한다.3) 그렇다면 당시 ‘우리’ 공연의 세계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 산하 단체인 국립극장이 목표하고자 했던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 및 세계화의 방향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이 글은 냉전체제의 종식과 동구권 문호 개방이라는 당대의 화두와 관련해 공연예술의 세계화라는 목표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국립극장이 발행하는 정기간행물(당대 제호 《국립극장 소식》) 및 언론 기사를 통해 전통을 내세운 관 주도 문화교류의 명암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2.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지구촌 문화 축제’ 언급한 것처럼 정부 차원에서 국내 공연의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권장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당시 LA올림픽(1984)와 서울아시안게임(1986)을 거쳐 서울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국립극장은 물론 지자체와 민간 극단이 국제 협력과 문화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전통 공연의 해외 진출을 모색했다. 1980년대 중후반 공연계의 화두는 ‘문화올림픽’과 &lsquo

  • 관리자
  • 2024-12-01
〈문학주간2024〉 : 소극장에서 울려 퍼지는 작가와 글틴의 진심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문학주간2024〉 : 소극장에서 울려 퍼지는 작가와 글틴의 진심 문장서포터즈 채미나 지난 9월 말, 종로에서 문학 주간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문학 주간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2016년부터 주관하고 있는 행사로, 문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고 향유 분위기를 조성하여 한국문학 진흥의 토대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프로그램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저는 9월 28일에 개최된《고선경 시인/김멜라 소설가와 함께하는 ‘글틴이 뽑은 2024 오늘의 문학 북토크》에 참석하기 위해 종로까지 향하였습니다. 글틴은 글과 TEEN이 만나 붙여진 이름으로, 문학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과 소통을 연결하기 위해 2005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해 오고 있는 국내 유일한 청소년 온라인 문학 플랫폼입니다. 만 13세에서 만 18세라면 누구나 글틴 친구가 되어 글을 나눌 수 있답니다. 저의 첫 문학 지면이 되어 준 ‘글틴’에서 지금은 어떤 글틴러들이 활동하고 있는지, 요즘 글틴러들이 주목하고 있는 시인과 소설가는 누구인지 얘기를 들어 보고 싶었어요. 문학 주간은 아주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로니에 공원에 누가 보아도 문학 주간을 즐기러 온 듯한 사람들이 각자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저는 마로니에 공원 한가운데서 ‘스핀오프’ 부스를 즐기는 글틴 친구들과 주임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글틴 친구들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대화에 성실하게 참여해 주었습니다. 친구들을 따라 저도 스핀오프 부스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참여하였어요. 좋은 시 혹은 소설 일부의 구절에 구멍을 내어놓고, 참여자의 마음대로 구멍을 채운 뒤 SNS에 인증하면 인센스를 주는 행사였습니다. 친구들은 마로니에 공원 의자에 앉아 열심히 고민하며 저마다의 빈칸을 채웠습니다. 저 역시 그 열정에 힘입어 빈칸을 채우고 신경림 시인의 시 구절이 적힌 아름다운 인센스를 받았어요. 스핀오프 부스 옆에는 ‘올해의 한국 작고 문인’ 전시 부스도 함께 있었어요. 운문은 김소월 시인, 산문으론 염상섭 작가가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두 문인의 활동 기록들과 함께 옆 팻말에 시집과 작품집 소개가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어요. 혼자 팻말들에 적힌 글들을 읽으면서, 한국문학의 역사가 유구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런 문인들이 있기에 지금의 문인들도 있는 것이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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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서로를 읽는 ‘시’간 속에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서로를 읽는 ‘시’간 속에 문장서포터즈 팅팅 삭막한 회색의 도시를 잊게 하고, 쉼을 허락해 주는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지친 마음을 따스하게 위로해 주는 시. 내가 사랑하는 자연과 시가 어우러지는 곳이 있다면, 내가 그곳에 가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처음으로 방문하게 된 평창엔 깨끗한 날씨, 고요한 풍경, 그리고 시를 통해 소통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가을, 각자의 시를 품은 그들은 그곳 대관령에 모여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찍어 주신 분의 작은 실수 덕분에 모두가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소중한 순간 ‘어느 가을, 시가 내게 말을 걸었다’라는 이름의 이번 시 캠프는 서울의 책방 ‘풀무질’과 ‘초록길 도서관’, 그리고 평창의 책방 ‘선인장’이 협력하여 ‘문학주간 연계 권역별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시를 매개로 점점 가을이 깊어지기 시작하는 때에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시 캠프에서 마주한 풍경과 가장 어울리는 색이 있다면 가을의 황금빛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게 가을의 빛깔은 단체 사진 속 사람들의 웃음에 담긴 따스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관령으로 출발하는 날, 태풍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아침의 바람은 유난히 세차게 불어왔다. 하지만 서울은 여전히 여름의 더위를 떨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목적지인 대관령에 도착했을 때, 서울에서 불던 바람은 대관령까지 나를 따라와 후덥지근한 늦여름을 어느새 선선한 초가을로 바꾸어 주었다. 그날 오후, 낭독회가 시작되기 전 이미 도착한 사람들은 책방 ‘선인장’에서 서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책방 밖에서는 강아지 방글이의 짖는 소리가 우리를 환영하는 듯 반갑게 들렸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의 대화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그리고 방글이의 발톱이 나무 바닥을 탁탁 울리는 소리가 우리가 있는 공간을 부드럽게 메우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분명 소란스러운 듯했지만 그 속에서도 생동감 넘치는 이 소리들은 낯선 장소에서의 긴장된 마음을 서서히 진정시켜 주었다. 문득 이번 낭독회에서 함께 읽을 김고니 시인의 시들 중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동시에 숨을 쉬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 외롭지 않다고.”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며칠 전, 잠 못 이루던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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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선물 같은 하루,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선물 같은 하루,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 문장서포터즈 배연주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선선해진 날씨가 마음을 사색에 잠기게 만들어서 그런 것 같다. 나에게는 ‘가을’하면 독서 말고 떠오르는 게 또 있다. 혜화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보이는 단풍으로 물든 마로니에공원. 약간 쌀쌀한 아침 바람 냄새. 외투를 입고 접수처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 나는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에 참가할 때마다 가을이 왔다는 걸 실감한다.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은 올해 42회째로 개최됐다. 보도 자료를 보면 ‘미등단 여성이 참여 가능한 국내 여성 백일장 중 가장 오래된 대회’라는 수식이 붙어 있곤 하다. 그 의의를 빼고 보아도 백일장이 42회째 사라지지 않고 지속해서 열리는 건 크게 가치 있는 일이다. 42회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원고지에 자신의 마음을 펼쳐 놓고 갔을까. 헤아려 보면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은 존재 자체가 문학계의 한 역사 같다. 나도 그 역사에 38회부터 함께 하고 있다. 올해까지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에 5회 연속 참여했다.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라인으로 백일장이 열렸다. 백일장 당일 실시간으로 글제가 공개되었고, 시간 내에 원고지 형식 한글 파일에 글을 써서 제출했다. 친구를 만나러 부산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노트북을 펴고 참여했던 것도 이색적인 경험이었지만, 역시 백일장은 오프라인 현장에서 즐기는 게 더 좋았다. 2022년부터는 원래 역사대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진행 중이다. 백일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프로그램 구성과 이벤트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작년에는 ‘마로니에 온라인 백일장’이 신설되었고, 올해는 당일 프로그램 중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할 수 있는 ‘어린이 도슨트 투어’가 생겼다. 이처럼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은 글만 쓰고 끝나는 단순한 백일장이 아니라 참여자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 행사이기도 하다. 올해도 사전에 열린 ‘제2회 마로니에 온라인 백일장’의 대상 수상자 분을 개회식에서 뵐 수 있었다. 이재숙 님은 환한 미소를 띤 채 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말씀하셨다. 개회식이 끝나고 인터뷰를 요청드렸다. 제2회 마로니에 온라인 백일장 대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마로니에공원에 오시면서 많이 설레셨을 것 같아요. 마로니에 온라인 백일장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온라인 서핑하다가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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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기 위해서 거꾸로 걷기

[문장서포터즈] 문장서포터즈 1기 '몽글' 6명은 만 18세 이상 미등단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몽글'은 직접 작성한 활동계획서를 기반으로 문학 관련 콘텐츠를 취재하며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하는 기획자로서 문학을 탐구합니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1월까지 6개월간 문장웹진 '모색'에서 문장서포터즈의 다양한 기획을 만나보세요. *몽글 : 문장서포터즈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몽글몽글 뭉치어 있게 해주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기 위해서 거꾸로 걷기 - 현장 방문 및 문장서포터즈 이유빈 지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된 제20회 에 방문했습니다. 올해의 주제는 ‘공존으로의 여정’이었어요. 이는 팬데믹과 기후 위기, 그 밖에 다양한 사회적 갈등 등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공존이란 단순히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타자를 통해 내가 변화할 수 있으며, 나 역시 타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에서 출발해요. 문학과 예술, 자연과 인간, 기술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대화하는 장이 바로 이번 이었습니다. 20여 곳의 출판사가 참여한 만큼,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도서 판매 부스들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페미니즘, 기후 위기 등과 관련된 사회학 서적부터 다양성과 포용력을 주제로 한 동화책까지 다양한 도서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었으며, 업사이클링 굿즈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건물 내부에서는 제10회 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어린이 독자들을 위한 컬러링 체험존도 한창이었어요. 이외에도 에서는 다양한 포럼들을 통해 작가와 독자가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10월 12일 서교스퀘어에서 진행된 에 참여해 보았어요. 한국과 캐나다의 작가가 국경을 초월하여 ‘다양성과 포용’을 주제로 협업한 앤솔러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해』를 출간했으며, 기념행사와 책 판매를 이번 에서 진행했습니다. 이번 앤솔러지에는 한국 작가 김멜라, 김애란, 윤고은, 정보라와 캐나다 작가 리사 버드-윌슨, 얀 마텔, 조던 스콧, 킴 투이가 참여했어요. 그중에서도 제가 들은 에서는 박혜진 평론가가 진행을 맡았으며 김멜라, 윤고은, 조던 스콧, 킴 투이 작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작가들의 각기 다른 사회적 배경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의 의미와 힘, 정체성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가장 먼저 「판사님」이라는 단편소설로 엔솔러지에 참여하신 킴 투이 작가의 이야기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킴 투이 작가는 난민이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사랑과 포용의 가치를 말씀하셨어요. “퀘백의 난민 캠프에 있던 어린 시절에 너무 추웠던 기억이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나는 아시안으로서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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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이수정 - 제브라다니오

제브라다니오 이수정 수돗물 소리에 가려 자경은 영수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용케, 도배란 단어는 건질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작은 방을 도배할 때가 됐다고 말했을 터였다. 자경은 대꾸 없이 싱크대 한쪽으로 가 요리책 사이에 낀 상가 전화번호부를 꺼내 들었다. - 마음에 안 드는군. 돌아서 가는 영수의 등에서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주체가 누군지 바로 짚이지 않았다. 자경일 리 없었다. 로라가 쓸 방의 도배를 새로 하자고 한 사람도 자경이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랬다고···. 이 말도 했다. 열세 살 아이를 놓고 쓸 비유는 아니었다고 금방 후회는 했다. 도배한 지 얼마 안 된 방에 도배를 또 하게 생겼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자경은 불만이 없었다. 아주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긴 했다. 같은 말을 되뇌고 또 되뇌는···. 땀 찬 고무장갑을 힘겹게 벗으며 자경은 그 말을 또 중얼거렸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그 말은 늘 존댓말로 나왔다. 별일 아니에요. 아기가 시간을 뛰어넘어 열세 살이 되어 나타나는 것뿐이에요. 출근하고 오전 내내 문자 한 줄 없다가 영수는 점심나절에 이메일을 하나 보내왔다. 문자로 말하기엔 긴 내용이란 뜻이어서 이메일을 열 때 자경은 숨이 한번 깊게 쉬어졌다. 다행히, 도배에 관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제 물잡이만 끝나면 되니 당신도 하나 골라 봐. 베타, 몰리, 비파, 보티아, 네온테트라, 프리스텔라···. 적도 가까이에 있는 이국의 여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그 속에서 얼핏 ‘로라’를 본 것 같아 자경은 저도 모르게 눈을 모니터에 바짝 댔다. 맨 끝의 ‘엔젤피쉬’ 덕분에 그게 다 물고기 이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영수는 자경에게 물고기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건 영수가 로라하고만 나누는 이야기였다. 정말 어쩌다 자경더러 할 때도, 로라 엄마와 이혼하기 전에 길렀던 구피 이름을 로라가 알더라는 식으로, 여지없이 로라가 등장했다. 고작 두 해 같이 산 부녀의 취미가 희한하게도 같다고 말할 때면 참는데 안 된다는 듯 영수의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올라갔다. 일요일 저녁마다 부녀가 나누는 화상통화에서 영상으로만 보는 로라가 자경은 가끔 가상의 인물처럼 느껴졌다. 로라가 곧 이 집에 살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실감 안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로라는 물고기를 골랐을까···. 티브이 옆에 들인 수조는 영수가 로라를 위해 준비한 환영 선물이었다. 수조가 차지하고 앉은 자리에는 원래 장식장이 있었다. 삼 년 전, 신혼집을 꾸밀 때 영수가 고른 소파는 사방 각이 분명해 자경이 점찍은 고풍스러운 장식장과 어울리지 않았다. 드물게 길었던 대화 끝에 두 사람은 각자 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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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기

[에세이] 낯선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기 이주라 역사 없는 사극 언젠가부터 사극과 시대극에서 역사가 사라진 지 오래다. 2000년대 초반 팩션(faction)의 열풍을 시작으로 역사적 자료는 상상의 원천이 되었고, 역사극은 역사적 사실에 현대적 상상력을 덧입힌 트렌디한 드라마로 재탄생하였다. 영화 나 드라마 은 조선왕조실록의 단 한 줄짜리 기록에서 시작하였다. 역사적 공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일이 판타지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대중문화 속에서 역사극은 더 이상 역사적 고증이라는 부담을 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실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서 역사극을 볼 때 역사적 고증이 잘 되었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기준은 의미 없다. 역사극 자체가 역사적 허구이고, 이미 허구적 상상의 세계로 재구성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허구의 세계 속에서 대중이 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재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재미가 있다고 해서 역사적 왜곡을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대중 수용자는 역사적 허구를 허구로 인지하고 있으며, 허구적 재현 속에서 왜곡된 부분에 대해서는 관련 논쟁을 통해 문제 사실을 인지하고, 스스로 정보 검색을 통해 역사적 왜곡을 수정할 만한 충분한 판단력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극을 볼 때 너무 고지식하게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재현했냐 아니냐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요즘에 역사극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다른 걱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팩션의 시대 이후로 최근 역사극 드라마들이 대부분 ‘한복 입은 로맨스’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역사극을 볼 때 역사적 고증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기는 하지만, 그래도 계속 마음에 찜찜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하게 잡아낼 수 없어서 아예 역사극을 보지 않는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재밌자고 보는 드라마 아닌가. 알 수 없는 답답함 때문에 휴식의 시간을 날릴 수는 없었다. 그러다 최근 우연히, 일 년 전쯤 방영한 ‘한복 입은 로맨스’를 보게 되었다. 조선 시대 양반가의 딸이 자신만의 옷을 몰래 만들어 팔다가 타임슬립을 하여 21세기 한국에 오게 되고 거기에서도 한복 디자이너로 활약하면서 조선 시대 자신에게 닥쳤던 곤경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다. 여주인공은 조선 시대에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갑작스럽게 죽게 되었는데, 현대 한국으로 타임슬립해 보니 조선 시대의 인간관계가 똑같이 반복되었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여주인공은 이 살인 사건에 숨겨진 전모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조선 시대로 돌아가 자신을 죽인 범인을 잡는다. 예상외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국 걸리는 부분이 생겼다. 문제는 조선 시대로 돌아간 여주인공이 범인을 잡는 장면이었다. 여주인공이 갑자기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범인을 쫓아가는 것이다. 마침내 여주인공이 범인을 잡는다. 이 범인은 덩치 큰 남자 하인으로, 몽둥이를 들고 쫓아온 여주인공 집 노비들도 이미 물리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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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자전거 도둑

[에세이] 자전거 도둑 장은진 나에게는 15년 된 자전거가 있다. 생김새는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여성용 삼천리 자전거다. 분홍색 프레임에 분홍색 안장과 스테인리스 바구니가 달린, 작고 낮은 자전거. 본래는 엄마 거였는데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자전거 타는 게 자신 없다며 나에게 물려주었다. 그렇게 그것은 가족 공용이 아닌 내 개인 소유의 자전거가 되었다. 자전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배웠다. 그러나 내게는 배우기 과정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장면들을 찾아볼 수 없다. 보호 장비를 착용한 아이의 자전거가 넘어질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부모가 뒤에서 잡아 준다거나 흔들흔들 비틀대다 서너 번 정도 넘어지며 균형 잡는 법을 터득해 가는 모습들. 애초부터 자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부모를 가진 아이는 혼자서 자라고 혼자서 배우는 일에 익숙하다. 익숙하기에 그런 아이는 혼자 뭔가를 이뤘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혼자 하게 내버려둔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걸 눈치로 알고 몸으로 단단히 익혀서다. 일테면 그것은 겨를 없는 부모의 아이라면 일찍부터 습득하게 되는 자립성이다. 눈치 있는 단단한 몸을 가졌기에 초등학생의 나는 자전거를 단번에 배웠다. 보호 장비도 없이. 뒤에서 잡아 주는 부모도 없이. 넘어지는 시행착오나 하나의 상처도 없이. 그것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패를 모르던, 완전무결한 성공이었다. 너무 식은 죽 먹기라 인생도 자전거 타기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하지만 시시할 만큼 쉽게 이룬 건 인생을 통틀어 그때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자전거를 탈 때의 기분은 절대 시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단숨에 성공했을 때는 물론이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시시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상하게 그랬다. 지상에서 두 뼘쯤 떠올라 있는 몸과 발이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하늘을 난다고 생각했다. 새가 된다면 꼭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나는 새가 아니므로 자전거를 탈 때마다 새가 되는 기분이 시시해질 리 없었다. 수백 번 수천 번을 타도 그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전거가 시시할 수 없는 이유는 자가용 없는 나에게 특히 소중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기름이나 전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 몸의 에너지로 움직여서 환경에도 무해한 이동 수단. 차를 타기에는 가깝고 걷기에는 먼 거리일 때 자전거의 위력은 더 대단해진다. 애매한 거리에서 자전거는 나의 빠른 발이 되고, 애매한 거리인데 그것이 없으면 눈앞을 막막하게 해 필수품이 된다. 자전거는 부지런한 이동 수단이라서 그것을 애용하는 사람은 매사에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려면 멈추지 않고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하므로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내 주변만 봐도 게으르고 움직이기를 귀찮아하는 사람은 자전거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인데도 콜택시를 부른다. 추우니까, 더우니까, 비가 내리니까, 짐이 무거우니까란 핑계로. 게으른 사람에게 자전거는 쓸모와 필요가 약한 물건이라서 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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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흑건(黑鍵)

흑건(黑鍵) 임희강 요셉이 정수용을 만난 건 약 두 달 전의 일이다. 요셉은 좁은 골목의 치킨 가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치킨집 바로 오른쪽에는 50년 전통의 순두부 가게가 있었다. 치킨집의 왼쪽엔 50년 전통의 순두부 가게 사장의 아들이 운영하는 아구찜 가게가 있었다. 그 외에도 갈비찜, 감자탕, 굴보쌈과 족발을 파는 가게가 차곡차곡 잘 맞춘 블록처럼 쌓여 있는 골목이었다. 두 사람이 지나기도 빠듯한 골목에는 서로 다른 음식에서 사용한 간마늘과 참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예스럽고 한국 음식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지만 누가 봐도 서양의 클래식 음악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요셉은 가진 옷 중 가장 깔끔한 재킷을 챙겨 입고 치킨 가게로 출근했다. 치킨 가게 사장은 바로 요셉의 이모부였다. 가게를 인수할 때 내부에 있던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를 보고 이모부는 놀고 있던 요셉을 불러 연주를 부탁했다. 요셉이 가장 좋아하는 연주곡은 〈흑건〉이었다. 〈흑건〉은 쇼팽의 에튀드 G Major. Op.10 No.5를 말한다. 백건반이 아닌 흑건반으로만 주요 선율이 이뤄져 있어서 ‘흑건’이란 별칭이 붙었다. 어느 대만 영화에 메인 테마곡으로 등장해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곡이었다. 〈흑건〉의 박자는 비바체였다. 대단히 빠르지만 급한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점에서 프레스토 박자와 구분된다. 프레스토를 사용하는 곡으로는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Flying of bumblebee)〉이 있다. 요셉이 생각하기에 그 곡은 손가락 훈련 곡에 지나지 않았다. 우아함을 따지자면 〈흑건〉이 훨씬 우세하다. 요셉은 품격을 잃지 않는 선에서 경쾌하게 연주를 이어나갔다. 건반에 묻어 있던 기름때가 손에 묻으며 쩍쩍 소리가 났다. 연주자만 들을 수 있는 소리라는 점에서 요셉에겐 특권처럼 여겨졌다. “제대로 밟을 줄 아는군요.” 연주가 끝났을 때 정수용이 다가와 말했다. 페달을 다루는 스킬을 알아봐 주는 손님은 드물었다. 그럼에도 요셉은 그가 말을 걸어온 게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가게에서 말을 거는 사람은 십중팔구 취객이었다. 요셉은 처음 연주를 했을 때 60대 남성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는 이미 옆 가게에서 지인들과 굴보쌈에 소주 6병을 해치우고 넘어온 상태였다. 등산복 차림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반갑진 않았지만 연주를 알아봐 준 것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요셉이 인사를 하려고 그의 곁에 다가갔을 때 남성은 몸을 휘청거렸고 그대로 바닥에 뒹굴었다. 요셉은 이후 손님과 대화를 삼갔다. “시끄럽지 않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요셉이 수용에게 말하곤 카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가게는 피아노 연주를 듣기 위해 찾는 곳은 아니다. 요셉이 소리가 증폭되는 뎀퍼 페달 대신 소리를 줄이는 시프트 페달을 밟은 이유다. 손님들은 치킨 가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 준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소리가 너무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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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다른 겨울

다른 겨울 최유안 음습한 바람이 무리의 발소리를 갑작스레 가뒀다. 육중한 무게가 계단을 수시로 눌러 내리는 탓인지 천장에 붙은 낡은 철제 안내판 한쪽이 불규칙하게 덜컹댔다. 거, 애도 있는데 앞으로 자꾸 밀지 마시고. 신경질적인 영어에 앞쪽 무리에 끼어 있던 몇이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녀 한 쌍이 눈치를 보며 그의 주위를 빙 돌더니,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빠져나가는 지하철 입구를 올려다봤다. 나 말고도 작은 소요에 신경 쓴 사람이 더 있었는지 고개를 튼 방향에 시선이 여럿 뒤섞여 있었다. 출구 끄트머리 너머 작은 간판이 눈에 띄었다. 남자가 안정을 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츄러스 먹을까?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아이가 신이 나는지 까르륵 소리를 냈다. 빨간 털모자가 단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두 돌 정도 되어 보였다. 아이 소리에 힘이 난 남자가 끙 소리를 내며 큰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같은 줄에 서서 걷는 남자와 내 뒤로, 수십 명이 굴리는 발걸음이 코뿔소 떼처럼 광광거렸다. 계단참에 짧은 치마 차림의 여자가 카메라를 들고 멈춰 섰다. 사람들이 그를 피해 둥글게 호를 그리며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혹은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구도로 앵글을 잡았다. 한데 몰려 있던 찬바람이 안쪽으로 거세게 밀려 들어왔다. 지하철 입구가 아랑곳없이 사람들을 쏟아냈다. 단어들이 하얗게 내뿜는 입김을 타고 구슬처럼 흘러나와 공기 중에 분사됐다. 북적이는 관광객 틈에는 한국인도 여럿 섞여 있었다. 깔깔거리는 소리에 익숙한 단어들이 튀어나와 저마다의 파동으로 멀어져 갔다. 누군가는 여행을 오기 전에 유럽에서 동양인 경멸이나 무시가 빈번하다는 조언을 들었다고 했고, 여긴 그나마 괜찮아, 하는 자조 섞인 말도 들렸다. 게다가 지금이 연초보다 더 멋질 게 분명해, 하고 아직 마주하지 않은 새해 풍경을 확신하기도 했다. 불안을 기만하는 방식으로 불가해한 미래를 정당화하는, 인간은 오만하다. * 간간이 부는 시린 바람 사이로 빵 굽는 냄새가 옅게 났다. 멀리 성당 종소리가 아득했다. 걷는 행위에 극심한 피로를 토로하는 나를 배려해 희용과 혜미는 속도를 조절하며 앞장섰다. 희용은 오른편에, 혜미는 왼편에 있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탓에 희용은 약간 비틀린 채 서서 인도와 차로를 번갈아 걸었다. 한 아이가 다가와 거칠게 희용의 옆구리를 밀치며 지나갔다. 앞서간 아이를 멈춰 서 바라보는 희용의 곧게 선 뒤통수가 홧홧해 보였다. 희용을 치고 지나간 아이 뒤로 비슷한 또래의 아이 둘이 장난치며 뛰었다. 뒤따라 어른 몸집만 한 아이가 달려들더니 희용의 어깨를 치고 지났다. 희용의 귀에서 에어팟이 빠져나와 바닥에 내리꽂혔다. 아, 씨. 희용은 포장된 도로 위를 굴러가는 에어팟을 주워 올리며 멀리 아이들을 바라봤다. 벌써 저만치 뛰어가는 중이었다. 얼굴을 구긴 희용은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걷던 내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내가 물었고 희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는 목소리가 걱정스러웠는지, 에어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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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나의 갈색 골덴 점퍼

나의 갈색 골덴 점퍼 조성래 1 나의 갈색 골덴 점퍼는 햇살을 막아 주느라 고시원 창문에 1년 동안 걸려 있었습니다 밤일을 하고 돌아와 잠을 청할 때 얼굴로 들이치는 빛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나보다 커다란 등으로 해를 가려 주던 나의 갈색 골덴 점퍼 봄과 여름과 가을이 지나는 동안 그것은 커튼이었습니다 서울은 추웠고 서울은 밝았습니다 겨울에는 낙향을 결심하고서 나의 갈색 골덴 점퍼를 창틀에서 떼어 냈습니다 등 부분에 세로로 길게 색이 바랜 부분 있었습니다 어쩌면 나의 1년은 무색무취 강서구의 찬 공기와 같은 것이었을지 모릅니다만 옅은 레몬색의 그 무늬는 합정과 홍대 어느 구제 숍에서도 볼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이었습니다 이후로 나의 갈색 골덴 점퍼는 나의 특별한 갈색 골덴 점퍼가 되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갈색과 골덴을 좋아하고 겨울이면 기다란 빛 하나 등에 지고서 길을 다닙니다 2 사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친구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못 보았던 그가 여태 써 놓은 시를 읽어 보았습니다 카페의 창문으로 들이치는 빛의 갈피가 종이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돌아온 후에도 나의 눈에 그 빛이 길게 남아 있었습니다 3 인간의 정신에는 큰 창이 나 있고 거기엔 주야로 사철 내내 강렬하게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가끔 커튼이 달리지 않은 채 그 방에 살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내가 보는 책을 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정신에는 작은 창이 하나 나 있었습니다 그렇게나 창을 막아 보려고 애를 썼던 옷가지들이 어머니의 방에 정신없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응급실, 대학병원, 어머니 머릿속 사진 한가운데 빛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부분을 신경외과 교수가 가리켰습니다 4 소중한 나의 창문은 커튼을 기필코 거부합니다 알 수 없이 무참히 태양은 빛이 나고 하늘은 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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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1월 일기

1월 일기 조성래 1월 9일, 행복한 날들이 지나간다 1월 10일, 아니, 내가 직접 지나간다 거리의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직접 1월 12일, 2008년 교원동, 어머니 들어 오시지 않던 날, 나는 잠든 동생과 함 께 누워 두려움에 떨다가 문득 먼지 쌓 인 예수상의 가슴에서 초록색의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1월 13일, 관상을 좀 배웠다는 시청자 가 라이브 방송에 출연한 나더러 도깨 비상이라고 했다 도깨비불의 인(燐)ㅡ 외롭고 슬픈 인간은 스스로라도 불빛을 만들어 낸다 1월 16일, 교회들의 첨탑이 피뢰침처럼 뾰족하다 벼락불과 지옥으로 떨어질 영 혼들 끌어모아 천국으로 갈 단 하나의 영혼을 마련하기 위해서일까 그 끄트머 리에 빛 하나 걸어 놓은 윤동주 1월 17일, 어머니가 쓰러졌다, 세상의 좌반구 마비에서 건너오는 천사들이 불 타는 강에 가로막힌 채 1월 18일 그런데도, 불타는 강 너머에 서 불타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살 아갔다 수화기 너머의 당신도 그것을 살아 내고 있는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가 없었다 1월 19일, 순간에서 순간으로 차원 이 동하는 전화가 가득한 사무실의 번잡, 아무 물질도 전달되지 않는 와중에, 누 군가 가만히 눈물을 흘리고 있다 1월 20일, 외롭고 슬픈 인간은 스스로 라도 불빛을 만들어 낸다 불빛은 불안할 때에도 나타나지만, 그 나타남 자체로 또한 안도감을 준다 그렇기에 빛이라고 불리는 그 순간에는 불안감과 안도감이 모두 혼재하는 것이다 1월 22일, 아픈 이들이 건강한 이들을 이해하고 돌아가기 위한 길들은 어디로 나 있을까 1월 28일,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한쪽 장갑마저 다 떨어지고 온 걸 모르는 원 룸이었다 창밖 세상에서야 내 짝이 맞 는구나 오랜 고집 하나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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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벌에 쏘인 이야기

벌에 쏘인 이야기 안도현 하룻밤 우리집에 묵은 후배가 아침에 형님 텃밭에 풀 같이 뽑아요 하기에 나갔다가 여기 벌집이 있어요 어디 어디 하고 다가가서 풀덤불을 헤치다가 그만 쏘이고 말았다 오른쪽 정강이와 종아리 서너 군데가 몹시 따끔거렸다 아내가 물파스를 찾아왔고 냉동실의 얼음덩이를 꺼내 문질렀다 뭐 괜찮다 했지만 반바지로 나간 게 화근이었다 침을 찾아 빼내야 한다며 그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쏘인 데를 짓눌렀다 침은 보이지 않고 발갛게 부어오른 부위가 동전 크기만 해서 그러다가 말겠지 하면서 긁었다 손톱으로 긁었는데 손등이 내 손 아닌 것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가만 놔두지 읺겠어 에프킬라와 가스 토치를 들고 나가 화풀이하듯 벌집 쪽을 분탕질하고는 마당 가 의자에 점잖게 앉아 또 긁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사타구니로 가려운 게 퍼지는 것이냐 나는 차마 사타구니가 가렵다고 말도 못 하고 돌아앉아 벅벅 긁고 나니 이번에는 발등이 부어올랐다 그가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물었고 나는 어릴 적에 풀밭에서 놀다가 벌에 쏘인 적 있지 외할머니가 된장 발라 줘서 끄떡없이 나은 사람이라고 태연한 척하면서 대범한 척 이까짓 거 이까짓 거 하면서 아침을 먹으려고 물을 한 모금 삼키는데 넘어가지 않았다 목구멍이 부었나 봐 손등을 긁으며 발등을 긁으며 사타구니를 긁으며 목구멍을 긁을 수가 없어 이놈들 때문에 밥을 굶게 생겼네 그러다가 결국 응급실을 가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번졌다 거 참 벌에 몇 방 쏘였다고 쩔쩔매는 내 꼴이 말이 아니어서 샤워를 하려고 훌러덩 벗었는데 양쪽 겨드랑이와 허벅지가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적화통일된 것처럼 붉은 두드러기가 창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재난도 아니고 환란도 아닌 그렇지만 쏘이고 부어오르고 가렵고 긁은 이 뜻밖의 이야기를 시를 잘도 쓰는 후배가 벌에 쏘인 이야기를 먼저 쓰면 어떡하나 먼저 발표를 하면 어떡하나 나는 조바심이 나서 옹졸하게 부랴부랴 종이 위에 볼펜으로 몇 줄 적어 두고 나갔던 것이었다

  • 관리자
  • 2024-12-01
별서(別墅)

별서(別墅) 안도현 배롱나무가 손을 연못에 담가 물을 퍼 올리네 연못에는 발목을 끌어당긴다는 소(沼)가 있지마는 나무는 매끈하게 몸을 씻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네 천지에 초록을 펼쳐 놓은 다음 홍등을 내걸고 불이 꺼지면 다시 등을 분주히 달면서 부풀어지네 저 백일 붉다는 꽃에게도 사나흘은 파란이 있었으리 한 꽃이 수면에서 뛰어올라 가지 끝에 달라붙네 그러자 또 한 꽃이 덩달아 따라 뛰어오르느라 연못에는 발 딛는 꽃들이 찍어 놓은 발자국들이 왁자하네 때로 번개가 찢어진 수면을 꿰매려고 달려들었지마는 가련하고 무례하고 성의 없는 호통은 밀쳐 두었네 평생 꽃을 달고 싶으면 꽃자루나 되라지 나는 연못을 움켜쥔 저 배롱나무의 밑동처럼 봉당에 널브러져 비천하게 늙어 갈 궁리를 하네

  • 관리자
  • 2024-12-01
삶의 권유

삶의 권유 나지환 내리막길 여행에의 권유를 받았다. “내리막길 여행은 내리막길을 찾아 내려가는 여행입니다. 이 여행에서 경사를 오르는 일은 허용되지 않고, 내려가는 것만이 가능합니다. 이를테면 북한산 정상에서 하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점점 해발고도가 낮은 인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경로를 상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내리막길 여행자에게는 더 완벽한 경로가 요구됩니다. 새하얀 종잇장은 펼쳐 놓으면 평평해 보이지만 공구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작게 구겨진 굴곡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사전자현미경 수준에서 파악한다면, 펄프의 압연차로 인한 높이 공차 ±0.005mm 안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산맥과 미세한 골짜기로 등고선마저 그려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곳에는 내리막길이 있습니다. 내리막 여행자는 완벽한 내리막 여행을 하기 위해 최대한 신중히 걸어 다녀야 할 것입니다.” 선호는 숙련된 내리막 여행자였고, 우선 자신의 여행을 봐 주기를 원했다. 나는 한강공원에서 그가 동료들과 내리막 여행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북한산 정상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듄』에서 모래걸음을 밟는 이들처럼 기묘한 보폭으로, 하나의 보폭이 발생시키는 수천 개의 선택지 중에서 단 하나의 높낮이를 채택하며,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하루살이들이 쏟아지는 노을에 가려진 채 역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한 내리막에 도달할 때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자 했다. 선 채로 가방에서 김밥과 물을 꺼내어 먹은 뒤 다시 내리막을 탐지했다. 다음날 직장에 갔다가 돌아오니 그들은 여전히 한강 대교를 건너지 못한 채로 있었다. 단지 어제에 비해 수십 미터를 옮겨 간 것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선두에서 나아가는 선호의 엄숙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그들만의 완벽한 내리막 경로가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이 정말로 서울에서 인천을 이어 내는 단 하나의 기다란 내리막, 연속적인 하향 궤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수로 미세한 오르막을 밟아 버린 내리막 여행자들은 그룹으로부터 낙오되었다. 그들은 그길로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낙오자들은 가끔 내리막 크루를 찾아와 식료품을 공급하고 그들이 내려가는 것을 응원하거나 걱정했다. 내가 회식하고 취한 채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드는 순간에도, 선호와 그의 크루들은 힘차게 내려가고 있었다. 선호는 휘황찬란한 목동의 먹자골목쯤 이르렀을 때, 요란한 불빛과 대중가요 소리 속에서도 정확히 내려가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그때 양꼬치집에서 놀고 있었다. 선호를 지켜보겠다던 약속을 잊고 말았다. 내가 뒤늦게 연차를 내고 인천에 뛰어갔을 때, 선호는 버려진 야적장에 있었다. 나뒹구는 컨테이너 사이에서 선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내리막 여행자들은 모두 낙오되었고, 선호만이 모든 내리막을 완주했다. 그는 몇 달 동안 내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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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계절의 적재 창고

계절의 적재 창고 나지환 계절을 일곱 개로 나눠서 생각한 지는 오래되었다. 일곱 계절 1월~2월은 라고 한다. 눈어깨에 내리는 눈은 군중의 뒷모습처럼 눈부시다. 3월~4월은 . 봄에 당신은 꽃이 아니라 꽃의 뿌리들이 구름을 작명하는 소리를 듣고, 5월~6월은 . 6월의 구름은 버섯 모양으로 피어오르고, 그것은 일제히 지나간 이들의 발걸음 같다. 7월~8월 21일은 이다. 수집된 여름의 증거들이 모두 모였다가 8월 22일~10월은 . 다시 흩어져 가던 숲의 너머로, 지붕의 너머로 11월은 . 흘러내리던 단풍 다음에는 가지들도 흘러내린 끝에 12월은 . 찬 숨이 그곳에 남는다. 시립문화센터의 옥상 공원에 앉아 나는 할머니들과도 어울렸고, 아이들과도 어울렸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던 아저씨들과도 어울리며 계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지난 분기에 독서 강좌를 진행했다고 하자 모두들 믿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 나름의 계절에 대한 소고를 들려주었다. 특히나 자신이 문화센터의 모든 비상구와 탁자의 개수를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3학년의 그 아이는, 이라는 계절을 삼등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건의했다. 삼등분된 1차 여름 7월~8월 10일은 , 사라진 것들이 모기가 되어 돌아오는 여름. 8월 10일~8월 21일 오전은 , 은하수 너머에서 지상에 자식들을 보낸 모기의 큰 부모들이 웃고 있는 여름. 8월 21일 오후, . 지구상의 모든 모기가 한 마리의 모기가 되어 한 사람을 깨물러 간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조용히 벤치 뒤편의 흡연소로 갔다. 담배 하나를 꺼냈다. 반팔 티셔츠 속에서 움찔거리는 날개를 참았다. 기다란 주둥이를 꺼내어 불을 지폈다. 내뿜으며 겹눈으로 연기의 향방을 좇았다. 그리고 다시 주둥이를 숨긴 뒤 옥상 공원으로 돌아갔다. 3학년의 아이는 팔뚝에 커다란 모기 물린 자국을 보여 주며, 자신이 4학년이 되어 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듣는 건 나에게도 너무 간지러운 일인지라, 오늘 8월 21일, 을 또 여러 개로 나누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계절을 초 단위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종합열람실 하나가 품고 있는 수백만 장의 종잇장이 살랑거리듯이, 계절이 순간 속에서 넘쳐흐르려고 한다. 선풍기의 목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도서관장이 눈을 감고, 빛에 물든 벌들이 되돌아간다. 그 아이가 책장 속에 숨고, 시립문화센터의 가장 깊은 지하 매점, 그 앞 창고에 계절들이 무서운 속도로 쌓이기 시작한다. 나는 계절의 적재 창고에 계절들이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모기 주둥이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이 시작된다.

  • 관리자
  • 2024-12-01
지도에 없는 집에서

지도에 없는 집에서 아타세벤 파덴 우리는 서재를 합쳤습니다 밤이든 낮이든 문을 항상 지키는 사람이 있었기에 더 밝은 빛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을 좋아한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전투기가 날아가는 동안 눈 내린 적이 없었지만 율마가 말라갔습니다 연락을 기다리지 않아도 점심이나 저녁 혹은 이른 아침이나 새벽 때가 되면 그가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밥 먹을 거예요 물었습니다 없는 전쟁을 매일 준비하는 그는 머리를 끄떡였습니다 서로를 낳느라 갇혀 살기도 했습니다 틈만 나면 비행기 추락 다큐를 틀었습니다 나가자고 할 때면 눈꺼풀에 졸음이 앉았습니다 나는 누텔라를 숟가락으로 파먹는 동안 그는 젤리곰 한 마리를 내일을 위해 아꼈습니다 갈라지지 않는 잎을 자르기로 했습니다 같이 밤을 새우고 나면 태어나지도 않은 국가를 지키는 것 같았습니다 지도에 없는 집에서 잠시 그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아무리 닦아도 아침에 피어오른 곰팡이처럼 저렴한 연둣빛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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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자꾸 긁히는 사이

자꾸 긁히는 사이 아타세벤 파덴 손 시린 날 역 근처를 헤매다가 툭 하면 끊어진 머리카락처럼 우리는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다 함께 하는 행동에 늘 석류알 같은 다짐이 필요했지만 때로는 네가 찾아오고 때로는 내가 찾아갔다 흰 셔츠를 입고 잠이 들어도 나무는 한쪽으로만 기울어졌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하나씩 형체를 잃어 가고 배게 깊숙이 스며들었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 숨이 찼다 겹겹이 무너진 외벽 틈으로 서로에게 내민 손이 거미줄에 걸렸다 우리는 이대로가 괜찮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귓가에서 속삭이는 말들은 단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 나는 혓바닥 위에 돋아난 초록을 보여 주지 않을 생각 깔리거나 차이거나 칼을 든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기에 눈 감아야 나타나는 반짝이들처럼 우리는 서로를 씻어 준 적이 없어서 그 어디서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목이 마르고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꾸 긁으면 터지는 물집처럼 우리의 온기가 떨어지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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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흔들려 움직이는

흔들려 움직이는 구윤재 그것이 내가 걸을 때마다 따라 움직인다 그것은 단단하고 각이 많아 언뜻 둥글게도 보이는 형상으로 내가 걸을 때 이미 삼보 정도 굴러가 있다 나를 앞지르는 것이 존재의 성질인 그것은 이미 이리저리 차인 모양 차인 모양으로 매끄러워진 모양 30도에 육박하는 이곳에서 갈수록 왜소해지는 모양 밀짚모자를 쓴 내 밑으로 떨어지는 평평한 그림자를 이리저리 비껴가는 모양 내가 주저앉아 그것에 얼굴을 들이대면 그것은 무생물인 양 딴청을 부린다 그러나 나는 알지 내 발밑을 굴러가며 자글자글 점점 더 작아지는 작아지면서 분포하는 저 돌이 감정을 느낀다는 걸 그러나 내가 관찰하는 지금 이 돌 밀짚모자 아래로 떨어지는 그림자에 포함된 이 돌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는 모양 볕에 바짝 말라 시들시들 졸린 모양 그늘이 존재하는 잠깐 동안 낮잠을 때리려는 모양인 이 돌은 나의 고양이를 닮았군 나의 고양이를 닮았다 나의 고양이는 길에서 1년 정도 생활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름다운 고양이로 자외선 차단 능력이 없어 삼색으로 곱게 타 버린 그러나 살성이 말랑하여 만지면 주르륵 흘러내리던 그 고양이는 해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커튼을 쳐도 커튼 속에 들어가 햇볕을 쬐던 고양이인데 그 고양이는 그렇게 되었다 어느 날 녹아 버려 창틀이 되어 버린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열 수 있는 창문을 앗아가 버린 못된 삼색 고양이를 닮았다 지금 내 밑에서 꾸벅꾸벅 조는 이 돌을 한참을 보다가 다리가 저릿저릿하여 고개를 떨어트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을 그러거나 말거나 돌은 내가 만든 이 그늘이 좋은 모양 떨어지는 물방울이 못내 간지러운 모양 양옆으로 조금씩 굴러 눈을 비비는 돌을 나는 조심스레 내 손바닥 위에 올려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는다 찢어지게 하품을 하는군 내심 마음이 좋아진 내가 서서히 일어나 돌과 함께 걷는다 돌이 깨지 않도록 천천히 걷는 내 발걸음을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 않는 돌이 그늘 밑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잘 준비를 마쳤다는 듯 눈을 완전히 감아 버린다 나는 돌이 녹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로 살금살금 그림자와 함께 돌을 데려간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미지근한 물로 표면에 묻은 흙을 닦아 내자 투정을 부리는 돌 나는 안절부절 돌을 마저 씻기고 찬 바람 밑에 놓는다 돌은 또 돌대로 기분이 좋아져 다시 긴 잠을 자기 시작한다 나는 커튼이 빈틈없이 쳐져 있는지 확인한 후 돌이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도록 방석 위에 돌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돌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방석에서 미끄러져 바닥에서 완전히 뻗는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런 돌을 바라보고 에어컨 바람이 이토록 상쾌한 한여름의 오후 나는 잠든 돌을 보다가 그 옆에서 스르르 잠이 드는데 찬바람 아래서 꿈이 돌과 나를 비껴가는 동안 바람이 슬쩍슬쩍 건드는 커튼 새로 들어오는 빛을 돌이 먼저 알아채고 왠지 모를 평온함에 잠겨 틈새의 빛이 만든 통로로 데구루루 굴러가는 동안 나는 예외적으로 질 좋은 잠을 잔다 돌이

  • 관리자
  • 2024-12-01
티피

티피 구윤재 티피1), 부르면 총총총 걸어온다 끌어안는다 티피라고 부르면 반응하는 너를 티피는 명도에 차이가 있는 세 가지 갈색 털과 그것을 아우르는 하얀 털로 덮여 있다 티피는 눈이 절반만 녹은 운동장 같다 돌아보면 흙 발자국이 남는 티피 끌어안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무게를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티피 부르면 몸보다 큰 공간을 가지고 오는 티피 품에 안는 순간 나는 진입한다 티피의 공간에 티피와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티피에 머무른다 티피와 내가 티피 속에서 하는 일은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이다 미끄럽고 질척질척한 운동장에서 티피와 나는 멀리 보는 연습한다 시선을 멀리 두면서 배우게 되었지 멀리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외계의 안녕을 비는 일이 발치로 날아온 공을 날려 주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티피는 이미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놀란 내가 눈을 쓸어내리자 눈 아래 어디에선가 티피가 기분 좋을 때 내는 고르릉 소리가 들렸다 티피야 그거 아니야 얼른 나와 말해도 좀처럼 티피를 찾을 수 없었지 눈을 덜어 낼수록 멀어지는 티피의 몸처럼 완전히 망연자실하여 주위를 둘러봐도 전부 하얀 이곳에서 어떻게 티피를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 나는 티피가 좋아하는 간식으로 큰 원을 만든 뒤 그 안에 몸을 구긴 채 잠을 청했다 깨어났을 때 커다랗고 무거운 솜이불에서 티피를 꼭 안고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티피, 넌 정말 못 말리는 평원이었지 어느새 눈이 다 녹은 자리에서 티피를 부른다 바람을 맞다 보면 알게 된다 멀리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눈이 녹은 자리에 빛이 고인다 쓰다듬으면 티피가 고르릉 고르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이 들린다 1) Tipi 보금자리.

  • 관리자
  • 2024-12-01
두루미떡

두루미떡 안중경

  • 관리자
  • 2024-12-01
소리

소리 안중경 소리가 반죽으로 피어올랐다. 소리가 물방울로 생겨났다. 물방울은 나무를 타고 내려왔다. 소리가 얇고 길게 미끄러졌다. 소리는 반쯤 투명해 보였다. 깨물면 이빨 자국이 오래 남을 피부를 가졌다. 껍질 깎는 소리로 어제 일을 이야기했다. 툭툭 느리게 떨어지는 소리였다. 새벽 물안개를 가지고 온 날 소리의 덧니가 왼쪽에 매달려 나를 엿보고 있었다. 덧니와 시선이 마주쳤다. 시선은 알을 닮았다. 깨트리면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하루에 한 번 거울이 소리를 냈다. 아무도 듣지 못했다. 소리가 웃었다. 언제든 굴러갈 수 있었다. 소리가 자꾸 끊어졌다. 자음과 모음이 낯설게 배열되어 있었다. 소리가 끌려갔다. 모닥불 속에서 소리가 타고 있었다. 불꽃을 벗어난 소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밤이 지나는 소리가 났다. 길 끝에서 다시 소리가 나타났다. 밤을 샌 소리가 흔들렸다. 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소리가 물을 흘렸다. 옆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 관리자
  •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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