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호
- 작성일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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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문장웹진》의 커버스토리는 문학을 이미지로 재해석하는 특별한 시도입니다. 편집위원이 선정한 작품을 일러스트레이터가 시각화하며, 문학의 감각을 새로운 형태로 확장합니다. 문학과 그림의 만남이 만들어낼 다층적 감상을 기대합니다.
김민주(리피워크스)
김민주(리피워크스) 작가 한마디
죽은 선생님의 사회 속 선생님, 내가 읽는 선생님,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 파편이 되어 버린 교단을 문학이 사유할 수 있을까?
문장웹진 4월호 살펴보기
입생로랑 낭떠러지 김엄지 1 E는 걸으면서 여자 친구를 떠올린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다. 지갑을 선물하리라. 메탈릭 컬러의. E는 결정했다. 메탈릭 컬러가 여자 친구의 취향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거리에 눈발이 날리고, 때늦게 웬 눈인가. 인도로 걸어야 하는데 보도블록을 까뒤집어 놓은 날이다. 찬바람에 흙먼지가, 눈보라가 휘날린다. 이런 날씨에 무슨 공사를. 보도블록과 공원 터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다. 중장비 두 대가 덩그러니 멈춰 있다. E는 카페로 가는 또 다른 길, 크게 우회하여 걷는 경로를 떠올린다. E는 천변으로 내려가 물을 따라 걷기로 한다. 2 축복이라는 건 그저 그런 상황에서 주시는 게 아니야. 핑크빛, 막 그런, 좋고, 그런 게 아니라. 코너로 몰아. 사람을 몰고 몰아서. 상황 중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 보증된 건 천국이라는 자리뿐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거. 여기서의 생활이 너무 괴로우니까. 갈등이, 사람을 끝까지 몰아가는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얼마 전에 급식 봉사하는 분 간증을 들었어. 오늘 밥 열심히 나눠 주고, 내일 밥할 돈을 또 구해야 하는 게 너무 큰 고난인 거야. 밤새 기도를 한대. 내일 밥값이 없습니다. 내일 밥값이 없습니다. 그럼 신기하게 다음날 딱 급식할 밥값만 입금되어 있대. 넉넉하게 편안하게 안 해 주는 거야. 하루만 딱. 항상 하시는 일이 그거인 거야. 딱 그거. 하루치. 너무 신기한 거야. 신기한 가운데 이틀치 주시면 안 되나요, 싶은 거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실 때는 사용할 그만큼만 하시는 거야. 하나님 음성 듣는다고 행복하고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내가 열성분자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아. 내가 교회를 못 갈 일이 생기면, 오늘은 교회에 오지 말고 모임에 나가라, 하신다고. 내가 하나님 모를 때는 팝송도 듣고, 이거저거 다 들었는데, 하나님 알고 나서는 찬송가만 들었어. 그랬더니 어느 날 하나님이 네가 듣고 싶은 것 들어라, 하시는 거야. 그래서 알게 됐지. 아 하나님은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구나. 하나님이 너무 응답해 주시니까 신학대학에 가려고 했거든. 신학대학 가기 전에 히브리어 띠고 가는 게 좋다고 해서, 히브리어 시작하려는데 그때 또 들렸어. 그 길은 네 길이 아니다, 음성이 들리더라고. 그래서 신학대학원은 안 가기로 했어. 하나님 왜 그러시냐고 물을 때는 답이 없으셔. 사람은 모르는 거야. 하나님만 아시는 정확한 때에. 정확한 방법으로 딱 그만큼만 알려 주시는 거야. 내가 구한다고 해서 그때마다 알려 주시고, 들려주시는 게 아니야. 성령이 임한다고 마냥 핑크빛이 아닌 거야.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내 몸으로 보여 주셔. 물집이 똑 떨어지고 그 자리에 반점이 생기는 거야. 나 심장도 멈춰 봤어.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멈추면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 나를 그렇게 움켜쥐고 있던 게 내 숨이었던 거야. E는 카페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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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파사칼리아의 거울 ―배수아 소설과 음악들 인아영 최초의 소리 배수아의 신작 단편 「눈먼 탐정」(『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 나온다.1) 스스로 탐정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으므로 아마 무언가를 추적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추적하려는 것일까. 살인 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간 살인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과 발자국?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끔찍한 비극? 그런데 그는 “뭔가를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232쪽). 그에게는 살인 사건을 파헤치려는 목적이 없다. 대신 그는 뭔가를 보기를 원한다. 아니, 그러나 그는 ‘눈먼’ 탐정이 아닌가.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뭔가를 보기 위해서 눈이라는 시각 기관이 아니라 다른 도구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영혼의 막대기’로, 그의 삼촌이 오래전에 쓰던 물건인데 “수맥의 파장이나 지하 단층의 미세한 진동, 특정 물질의 방사선 에너지”(226쪽)를 감지해서 살인자가 달아난 방향을 추적한다. 다른 하나는 ‘귀’로, 이 청각 기관을 통해 그는 사람과 사물의 사소한 움직임, 동물과 식물의 은밀한 상호작용, 이를테면 돌의 속삭임 같은 것을 감지한다. 눈먼 탐정은 ‘나’에게 말한다. “그 속삭임을 들어 봐”(239쪽). 배수아의 근작들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의미를 가진 어휘들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의미로부터 멀어져 은은하게 울리는 음향들로 가득하다. 말이라기보다는 소리. 언어라기보다는 음악. 그러니 우리는 이 소설들을 읽기보다는 들어야 한다. 미지근한 여름 강물 위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매미 울음, 오래된 동굴의 광물에 축적되어 있는 음향, 짙은 숲속을 달려가는 기차 신호음, 끝나지 않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는 누군가의 발소리. 확실히 해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들리는 이 소리들은 때로는 웅성거림이나 속삭임, 파장이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배수아의 소설들에서 서로 부딪치고 뒤섞이거나, 부풀어 올랐다가 잦아들거나, 되풀이되고 메아리치면서 무언가 아름다운 것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서사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것을 보태는 장식이나 에두르는 묘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다른 차원의 서사를 만들어 내는 섬세한 구조물. 「눈먼 탐정」에는 이 아름다운 구조물의 기원이라고 할 만한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체국 앞 우체통에 잠시 멈춘 여인은 우리가 한눈을 파는 사이 한 통의 편지를 재빨리 우체통에 던져 넣었다. 그날 이후 귀에는 최초의 소리가 산다. 묵직한 편지가 어두운 우체통 깊숙이 툭 하고 떨어지던 소리. (230쪽) (강조는 인용자) 지금도 기억나는, 우체통 깊숙이 편지가 툭 하고 떨어진 후에도 오래오래 울리던, 어둠을 닮은 최초의 소리. (234쪽) (강조는 인용자) ‘나’는 자신을 키워 준 젊은 여인이 바닷가 소나무숲에서 우체통에 은밀하게 넣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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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틱-택-토 김지윤 당신은 O와 X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O를 고르는 순간 상대는 X가 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 상대는 당신에게 결코 닿을 수 없다 상대를 막고 대립하라 모든 선들이 일어나 벽이 되도록 당신의 길은 상대에겐 벼랑 O와 X는 같은 칸 안에 존재할 수 없다 당신의 세계엔 칸수가 정해져 있으니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하라 참 멋지네요, 그렇죠? 당신은 승리하고 싶어요. 그렇죠? 이것은 O와 X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O를 골랐다 당신은 계속해서 칸을 채울 수 있다 빈칸이 남김없이 사라질 때까지 그러나 당신이 이긴다는 뜻은 아니다 둘 다 지게 되는 경우가 흔한 게임 너무 작은 세계의 너무 단순한 규칙 당신들은 서로 지나치게 닮았으므로 반복해도 결과가 비슷할 것이다 한 수를 잘못 두어도 다음 수가 남아 있지만 당신은 상대를 방해하느라 정신이 팔려 번번이 기회를 놓쳐 버린다 당신은 규칙을 바꿀 수 있지만 정녕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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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파레이돌리아 김지윤 어떤 결정은 문을 등진 채 해야 한다 길이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이다 흩어진 구름의 문양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림자의 속삭임을 알아듣는다면 어두워져 가는 시간도 그리 지루하진 않다 모든 물방울들이 거울이 되어 내가 되기 전의 내가 내가 될 수도 있었던 내가 그 안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흘러야 할 것은 흐르게 하자 괜찮아, 라는 말을 버리고 싶은 날 종말 한 시간 전 꼭 해야 할 말처럼 삼킬 수 없는 언어가 있다 참을 필요가 없는 재채기처럼 좀 헛되이 다급해져도 좋다 비 내린 후에 다시 비가 오고 땅이 마를 틈 없이 젖게 놔두자 진흙 위 남은 발자국들이 지나간 걸음의 무게를 기억하듯이 어떤 슬픔은 형태를 만들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단단한 테두리를 그려 놓는다 부서진 마음도 마음이다 잃고 싶지 않은 슬픔도 있다는 게 오늘의 희망 길이 없는 데선 별을 더 자주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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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택시 이원석 새벽마다 나를 태우려는 택시가 집 앞을 지나갑니다 나는 타지 않습니다 하지만 타고 있습니다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택시는 밤거리를 달립니다 기사는 라디오를 켭니다 채널이 한 바퀴, 두 바퀴 돌기 시작합니다 치익-칙 한곳에 머물고 음악이 흐립니다 비가 옵니다 와이퍼가 작동합니다 소매로 우는 아이처럼 빗물을 닦습니다 기사는 어디까지 가는지 묻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 가고 싶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아니 현실입니다 아니 꿈입니다 아니 마음입니다 차가 멈출 때마다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됩니다 기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봅니다 아는 얼굴입니다 그런데 누군지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말하고 싶습니다 빨간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택시가 나를 내려 줍니다 높고 긴 벽을 끼고 돌아 언덕 위입니다 멀리서 한 사람이 올라옵니다 당신이 맞습니다 당신에게는 내가 맞습니다 손을 들어 알은체를 합니다 당신이 가까이 옵니다 나는 손을 내밉니다 당신이 내민 손을 바라볼 때 택시가 옵니다 집 앞에서 택시가 나를 지나칩니다 당신이 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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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겨울 편지 이원석 날이 매우 추워 독감이 유행이래 한번 걸리면 일주일을 아프다고 했어 로이는 전자식 자연관찰소에 박제되어 있으니 가끔 만나 보러 가도 좋을 거야 다행이다 그치 고통도 수치도 망각하고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 멈춰 있을 테니 시간을 탈각시킨 고통은 중심을 잘라 얇게 저며 낸 뇌의 단면처럼 아주 잠깐이자 영원일 테니까 플래시처럼 터지는 한순간의 고통이 영원의 기억 속에 끼얹어져 그걸 불러일으킨 존재를 쉼 없이 재생시키고 있을 거야 행복하게 그가 떠나기 전에 내게 메시지를 남겼는데 읽어 보지 않았어 타이레놀과 알코올은 함께 먹으면 안 된대 〈Duo showdown〉은 잘 읽었어 둘의 이야기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아주 세세한 것까지 그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일로 돈을 벌고 어디에 집을 얻었는지 사는 곳 근처에 차이니즈 레스토랑은 있는지 아직도 양장피를 좋아하는지 그 둘의 친구 이야기와 우리의 맹세와 어릴 적 이야기까지 하나하나 생각하다가 보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나의 세계가 완성되고 그러면 너는 거기 가서 너의 슬픔을 위해 울 수 있을 거야 전자식 자연관찰소까지 찾아와 로이를 만나 줘서 고마워 아마 로이도 조금은 외롭지 않았을 거야 -This is Roy. I sent you a reply, over. -I'll run to you, Roy··· over. -This is Roy, c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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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면 김병호 베란다 한켠에 죽은 화분이 있습니다 겨울 내내 숨을 내놓는 동안 어찌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어둠은 여기서 피어나 끝없이 나를 두드리고 서성이는 먼 걸음을 흉내 내었습니다 숲이었다가 詩이었다가 당신이었다가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면 가만히 빛나며 꿈틀거리는 가장자리를 후회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화분같이 깊은 구멍 속에 산산이 흩어진 눈동자 나는 그게 달 같아서 홀로 키운 마음 같아서 내내 가까스로의 날로 지웠습니다 여러 빛들이 겹쳐 봄을 흔들고 나는 얼마나 멀어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베란다 창 가득 홀로 지운 마음처럼 발자국이 생겼습니다 간곡한 마음도 없이, 조심한 마음도 없이 부르면 다시 돌아오는 이름처럼
- 관리자
- 2025-04-01
자꾸 먼 곳을 보는 버릇 김병호 이월 마지막 날에 내리는 비는 끝도 시작도 없는 것이어서 어디 물어볼 노릇도 없다지, 이런 밤의 귀신은 정도 많아서 이웃이라도 되려나, 길가 눈먼 돌멩이에게 비는 마음 낭떠러지 시커먼 파도에 비는 마음쯤은 밤새 겨우 버려지려나, 누군가는 돌아오고 누군가는 떠나가는 밤이어도 나는 돌려줄 게 없지, 어찌할 수 없는 일들만 가득하지 언젠가 나도 봄에 떠날 것이라는 생각을 오래 따라다녔지, 할 수 있는 일은 아프고 다정하게 기꺼이 毒으로 살아가는 일, 오늘은 숨을 데가 없어 불현듯 생을 빠져나갈 수 없는 밤, 각자의 형편을 지우고 봄이 되어서도 겨우 떠나는 마음을 다 헤아리진 못하지, 서둘러 일어난 자리처럼 아침이 오면 울 것 같은 마음이 생기려나 틀린 마음은 아니지만 밤이 지나면 떼어낼 수 없는 내막도 다정해질까, 네가 지닌 밤 중 두어 밤은 온전한 나의 몫이 될까, 오늘은 귀신들과 다정해지는 일이 무난하겠다,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 나는 지나가겠다 이런 밤이 네게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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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너는 다만 나는 그만 정끝별 모니터에서 눈을 떼면, 잠시 잠이 왔다 난방이 안돼 전기담요 밖으로 내뱉은 네 숨이 나갈 곳을 잃고 모서리에 내려앉아 푸른 꽃을 피웠다 잠시 잠에서 눈을 뜨면, 다시 모니터에서 떼지 못한 눈에서도 나갈 곳을 잃은 물이 샜다 푸른 꽃이 더 푸르렀다 냉동 볶음밥에 다른 세상의 온도를 불어넣고, 너는 다만 늘 푸른 모니터로 하라는 거 다 하고도 여전히 여기에요 하지 말라는 거 다 하지 않, 았, 는, 데, 도, 다른 날이 떠오르지 않아서다른 퀘스트가 떠오르지 않아서 문을 열고 나가면, 걸음걸음이 돈이다 아니 돈벼락이다 세상에는 눈이 너무 많아 눈치를 보게 된다 행운이 아니 돈이 너무 적어서다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전도사일까 의심이 든다 그러니 날씨가 좋은 날엔 빛을 불러들여선 안 된다, 안 되니 잊은 것들에게도 잊혀진다 모자와 마스크 속에서 또 안 되겠죠? 집 밖을 나가면사람들로 식은땀이 흘러요눈사람처럼 흘러내린 물 자국들을 사람들이 눈치챌까요?그러니 못 본 척 오늘도 못 들은 척 엎어 놓은 깔때기처럼, 바닥이 없으니 내려갈수록 심해다 그냥 혼자고 매일 혼자라는 닿지 않는 푸른 수압에 숨이 차다 아니 짜다 네잎클로버를 구매하려는데, 한도액 초과라며 거절하는 신용카드에 베인다 아무도 보지 않는대도, 납작해진 넙치랑 나란하다 나는 그래도 너랑은 튀르키예 검은 장미 아이스크림은 꼭 먹어 보고 싶은데, 언제 나만 혼자는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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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캐리어 걸 정끝별 캐리어를 끌고 길 위를 레일로 매일을 내일로 화요일에 인-서울 해 목요일에 탈-서울 하는 너는 편도 2시간 거리 소도시에서 자영업 하는 부모님과 고3 동생과 산다 캐리어의 생명은 바퀴 길 위에서 튀는 바퀴의 비명이 매일을 끌고 낮에는 강의실 도서관을 오가며 편의점 패스트푸드점에서 잠깐잠깐, 하루 한 끼는 꼭 학식을, 밤에는 24시 도서관 열람실 스터디 카페 아니면 찜질방에서 컨베이어 길을 벗어난 캐리어가 파손되는 건 순식간 토요일 아침에 인-서울 해 대치동 학원과 24시 맥도날드를 오가다 일요일 저녁에 탈-서울, 그렇게 공부해 인-서울 대학에 합격했는데 팬데믹이, 다시 너는 캐리어를 끌고 인-서울 캠퍼스와 탈-서울 집을 간헐에서 정기로 캐리어의 안전은 강도와 잠금장치가 캐리어의 가치는 경도와 크기가 보장한다고 졸업을 유예한 너는 인-서울과 탈-서울을 오가며 아직 캐리어를 끌고 기타 등등의 커리어 케어를 캐리어에는 끌어당겨 대출한 삼색 고양이와 초록 바질과 사원증과 원룸 비번이 있으니 지치지 않는 내일과 지지 않는 매일을 캐리어에 끌고 커리어가 너를 인-서울에 체크인 해 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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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망각 진은영 유실물을 찾으러 갔는데 무얼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사랑을 했었는데 누굴 사랑했는지 모르겠다 증오심이 머릿속을 이처럼 기어다녔는데 그래서 여기는 어디인가 세 나라가 만나는 지점에, 증오와 슬픔과 사랑의 국경이 모여든 지점에 내 자아가 살았다 분쟁이 잦았다 시는 입천장에 설탕 부스러기보다 작은 별들을 뿌린다, 나는 별들이 혀로 떨어질 때 느껴지는 그 어렴풋하고 슬픈 달콤함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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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이별의 직유 진은영 지나가는 곳은 매번 달랐지만 양옆으로 붙은 두 개의 녹색 기차 좌석처럼 우리 둘은 붙어 다녔잖아 펼쳐진 책의 좌우 페이지처럼 의견은 달랐지만 늘 같이 있었잖아 흰 비행기에서 동시에 불을 뿜는 두 개의 엔진처럼 같은 일들에 분노했잖아 우리는 오전과 오후처럼 완벽한 하루였잖아 하나의 옷에 달린 단춧구멍과 단추처럼 우린 다른 모양이지만 이어지고, 꼭 맞는 열쇠 구멍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유쾌했었잖아 어디로 향하는 문인지도 모르면서― 어디서 떨어진 단추인지 잊어버렸잖아, 문이 열리자 너는 가 버렸잖아 백합은 꽃, 기린은 동물, 오렌지는 과일, 에펠은 탑이고 죽음은 잠긴 문, 단 한 번 열리는 영화 속에선 헤어진 연인이 반지를 멀리 강물을 향해 던지잖아 약속은 더 먼 곳으로 던져질 뿐 깨지는 것은 아니라서, 심해로 흘러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빛나면서도 반지는 기다렸잖아, 우리의 약속이 지켜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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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교장 선생님 권창섭 그는 심심하다 세상은 그가 없이도 너무나 잘 돌아가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인사를 받아주는 일일 뿐‧‧‧ 인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것일 뿐‧‧‧ 인사는 존중을 전제로 하며 존중은 인정을 전제로 하며 인정은 판단을 전제로 하며 판단은 인식을 전제로 하며 인식은 자극을 전제로 하는데 그는 자극되지 않는다 세상은 그가 없이도 너무나 잘 돌아가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인사를 받으러 돌아다니는 일일 뿐 인사를 위해 존중받기 위해 존중을 위해 인정받기 위해 인정을 위해 판단되기 위해 판단을 위해 인식되기 위해 인식을 위해 자극 주기 위해 보이기 위해 돌아다닌다 복도를, 계단을, 급식실을, 운동장을, 교무실을, 학생들이, 선생들이 인사를 한다 과연 존중하는지는, 얼마나 인정하는지는,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뭐라 인식하는지는, 좋은 자극인지 나쁜 자극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그에게 인사를 한다 그러면 그는 덜 심심하다
- 관리자
- 2025-04-01
변호사 권창섭 그는 삐졌다 왜 삐졌냐고 묻는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는 더욱더 토라지고··· 할 수 있는 말이란 “삐지다”란 말은 나쁜 말이란 것일 뿐 자신의 언행은 살피지 않고, 기분이 상한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말이란 것일 뿐 “삐지다”는 표준어가 아니므로 “삐치다”가 맞는 표현이란 것일 뿐 아뇨 2014년부터 “삐지다”도 표준어가 되었습니다 라는 검사의 말에 그는 더욱 삐져서 내 말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내 말의 본질은 표준어고 자시고가 아니다 울부짖기 시작했는데 법정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판사와 검사와 그뿐 셋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던 피고와 원고와 방청인들은 모두 삐진 채 퇴장해 법원 앞 해장국집에서 뼈를 발라내고 있는데 사건의 진실을 오도하지 말라 그는 말하고 그 맥락에선 호도가 더 적절하다 검사는 말하고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판사는 말하고 혼자 있고 싶으니 다 나가 달란 말에 검사도 자리를 뜨면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몇 번이고 자신의 언행을 곱씹는다 해장국집에는 살을 다 발라내지 못한 뼈들이 쌓이고 그는 살을 내어 주고 뼈를 취한다 그러면 그는 삐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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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Do You Remember?* 최민우 파티 룸에 모인 친구들을 보다가 모두 흩어지고 나 혼자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네가 보고 싶어 너랑 있으면 그런 불안은 안 생겨서 우리는 만나는 날마다 서로의 피곤을 걱정한다 너와 함께 갔던 아늑한 조명의 카페들은 임대료가 올라 어느새 문을 닫았어 맛난 커피에 보늬밤 먹고 싶어 다음 주에 이 영화 보고 싶어 현대음률 또 언제 가지 엄마에게 배운 돌려 말하기로 너에게 혼잣말했어 너의 습관은 독특한 폰트 발견과 인테리어 사진 찍기 같이 고른 빈티지 체크 재킷과 네가 리폼한 청바지 향수도 뿌리지 않으니까 그날 마신 커피가 너의 향기 내가 맛난 거 먹고 싶다고 혼잣말하면 볶음밥에 양배추 넣으니 맛있다고 답하는 게 좋아 산다는 것 자체가 수치를 견디는 일 같아 감자 없는 독일 요리 같고 내면의 평화를 가지라는 사칭 스팸 계정 같지 우리는 서로의 한탄을 들을 줄 알고 누가 이별하면 대수롭지 않게 묻지도 않고 옆에 있어 준다 만화 속 악당과 주인공이 서로의 변신 시간은 끝까지 감상한다는 조약이 있는 것처럼 네 앞에선 무표정으로 웃기는 드라마가 되고 싶어 하느님의 실소가 터져 나온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와 오래 맞장구치는 일 다음에 또 만나면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덮인 길로 뛰어들자 목적을 잊고 딴 길로 새는 게 우리의 주특기니까 거실에서 자고 일어나니 모두 사라졌네 다 어디 갔니 얘들아 각자 즐겁거나 괴롭니 * 파블로 베르헤르의 영화 〈로봇 드림〉의 OST로 쓰인 Earth, Wind & Fire, 〈September〉(1978)의 가사.
- 관리자
- 2025-04-01
허둥지둥 엉덩이 최민우 꿈에서 죽을 위기에 처할 때 눈이 번쩍 뜨인다 고양이가 기분 좋다고 오른쪽 명치를 눌러대고 있어서 슬기는 일어나면 기지개를 켜고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전날에 남겨 둔 사료를 마저 먹고 해가 드는 낮 2시쯤 베란다에 앉아 창가를 내다본다 고양이가 나를 몰아내고 나를 대신해 살아가고 있다는 의혹이 들 때 지난 일기에서 이상한 메모를 발견했다 나는 캣파워를 들으면서 축제를 준비했다 얼마 전에 산 캣타워에서 슬기가 영춘권을 연습한다 고양이과의 특징은 급소를 노리는 것 넌 어쩜 그렇게 자극적이야 나도 허둥지둥 엉덩이 갖고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뭔가를 차곡차곡 정리할 때만 맘이 편하다 그러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지칠 때까지 샌드백을 치고 싶었다 타이머가 끝난 걸 알면서도 숨이 차오를 때까지 두들기다가 야옹 울어 버리는 일 같은 슬기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다가 말라 떨어진 풀잎에 달려들기를 반복한다 고독하면서도 슬퍼하지 않는 고집 이별하기 전에 그가 내게 말했다 나는 화분을 버렸는데 너는 씨를 심었네 내일은 뭐 할까 물으면 슬기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싹이 나길 바라듯이
- 관리자
- 2025-04-01
성한 입 이현석 아기 앓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박명이었고 아직 분유 먹일 시간은 아니었다. 어두운 잠귀를 이유로 밤 당번을 자처한 것은 나였으나 의지와 달리 본성은 강했다. 아내가 자리끼 컵을 산산조각 냈을 때도 세상모르고 코만 곯았다는데 율이와 둘이 잔 뒤로는 아이가 내는 작은 소리에도 눈이 금방 뜨였다. 바닥에 깔아 둔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아기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율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오물거렸다. ‘아빠가 또 속았네.’ 잠은 설쳤어도 흐뭇했다. 이 작은 목숨이 간밤을 또 무사히 넘겼구나. 그 마음을 얹고 도로 몸을 뉘었는데 다시 잠에 들지는 못했다. 아기방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거슬렸다. 창문은 밤새 돌린 가열식 가습기 탓에 부러 흩뿌린 것처럼 흥건했다. 문득 재건축 조합 단톡방에서 보았던 잡담이 떠올랐다. 유명 로펌을 다니느라 바쁜 딸과 얼마 전 개원한 의사 사위를 대신해 손주 둘을 보느라 겨우내 가습기를 틀었더니 옷장 안에서부터 피어난 검은 곰팡이가 벽면 한쪽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였다. 시황 따라 일이 억은 우습게 에누리하는 아파트에서 곰팡이 걱정이라니. 직면한 현실과 지난봄 우리 부부가 치른 비현실적인 가격 사이의 뚜렷한 차이에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현실만 따지면 놀랍지 않았다. 아파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삼화토건 회장 도예종, 매일신문 기자 서도원,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여정남 등 여덟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사형을 선고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형을 집행했던 바로 그해에, 여의도의 다른 구축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명령으로 완공됐다. 반세기가 넘은 건물이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곰팡이는 당연했다.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보아도 놀랄 것이 없었고, 개수대에서 썩은 내가 올라와도 그러려니 했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여름밤에는 통통하니 살이 오른 쥐가 아파트 복도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기함할 듯 놀란 나와 달리 아내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 견뎌. 이게 실거주 투자의 현실이야.” 아내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나는 그 말을 묵직이 받아들였는데 싱글일 때부터 정석대로 자산을 늘려 온 아내의 투자 이력을 알아서였다. 현관문을 잽싸게 닫은 나는 만삭이 된 아내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충성충성”이라고 촐싹댔다. 사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벌레나 쥐가 부르는 본능적인 혐오도 자산 증식이라는 대명제 앞에선 한낱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곰팡이조차 농담일 수 없었다. 집에는 율이가 있었다. 가습기를 끈 나는 전날 벗어 둔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율이가 깨지 않게 까치발로 창문에 다가갔다. 물기를 닦고서 창문을 미세하게 열었다. 서늘한 외풍이 실낱처럼 들어왔다. 재건축 단톡방에 상주하는 어르신들은 아침에 잠깐씩 이렇게 해 두면 곰팡이도 예방하고 아이
- 관리자
- 2025-04-01
흰옷 빨래의 날 안담 오늘은 마지의 기일이니까 흰옷을 모아 빨래를 한다. 마지가 유니폼처럼 자주 입던 크림색 티셔츠도 잊지 않고 꺼내서 빤다. 아마도 처음 살 때는 흰옷이었을 거다. 내가 애용하는 독일 브랜드의 캡슐 세제는 성능이 뛰어나다. 이 티셔츠에서는 마지의 냄새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나도 마지의 냄새를 잘 떠올릴 수가 없다. 꽤 강한 냄새였는데, 그런 냄새가 잊히기도 한다는 게 신기하다. 가끔 그 냄새를 다시 기억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4년 전 마지와 내가 처음 만났던 장소인 모둠 전집에 간다. 전을 굽는 작업대가 가게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서 포장 손님도 많은, 반은 노점인 그런 가게. 튀는 기름을 막기 위해 조리대 틈새와 철판 모서리에 은색 호일이 덧대어져 있고, 그럼에도 철판 가장자리나 작업대 위 처마에 쌓이는 기름때를 막을 수는 없다. 조용히 질색하며 지나치는 행인들, 저 시커먼 데서 맛이 나오는가 보다고 농담하는 손님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냄새를 맡는다. 이 냄새와 비슷했던 것 같아. 열과 기름과 사람이 합쳐서 내는 냄새. 전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내 동거인의 냄새, 홍제천 스리룸의 주방 맞은 편 작은 방의 냄새, 마지의 냄새. 앞으로는 누구와 같이 살 생각이 없다. * 윤석열 나이로 스물아홉이 되던 2021년 겨울, 나는 당근마켓을 통해 홍제역 인근 스리룸의 하우스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마지는 그 글을 보고 연락한 세 번째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좋은 집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련산과 홍제천이 코앞이고 인왕산이나 북한산도 비교적 멀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프라랄 게 없는 집. 인적 드문 가파른 언덕에 있고 북향이라 볕이 잘 들지는 않으며 어떤 역에서든 멀었다. 낡은 건물인데 월세는 70만 원으로 센 편이었다. 월세를 제외하면 그 집의 여러 요소는 내게는 장점이었다. 크고 힘 좋은 내 개와 오를 산이 있고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는 게. 스리룸에 방들이 크고, 연식이 오래된 집의 컨디션을 의식한 집주인이 못 박기를 포함해 여러 변화를 허용해 준다는 점도 좋았다. 나부터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흡연자도 좋았다. 내가 대형견과 산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장점이고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단점이었을 테다. 내 개는 순하다 못해 맹한 편이었지만, 글에는 남자나 키 큰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보인다고 적었다. SNS로 하메를 구하는 여자에게 피곤한 사람이 얼마나 꼬이는 줄 아냐고 으름장을 놓은 지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인 소개가 낫지 않냐는 조언도 숱하게 들었지만, 지인의 지인이 길거리에 다니는 아무개보다 더 좋은 사람일 거라는 전제에 동의가 잘 안되었거니와, 하우스메이트가 맘에 안 들었을 때 소개해 준 지인의 체면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의 구인 글은 짧아졌다 길어졌다를 반복하다가 이런 형태가 되었다. ‘홍제역 인근 스리룸 하메 구합니
- 관리자
- 2025-04-01
너희가 신처럼 이승우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창세기」 3장 1-6절, 새번역성경) 1.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신이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다는 게 정말이냐?” 지나치게 기다랗고 몸에 털이 없는 뱀은 동산의 어떤 생물과도 같지 않았다. 여자는 그렇게 느꼈다. 하기야 동산의 모든 생물은 다 달랐다. 모습과 소리와 걸음걸이와 습성이 제각각이었다. 모든 생물은 그렇게 지어졌다. 다른 이와 다르다는 것, 고유하다는 것, 그것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의 ‘있음’을 담보하는 것이 고유함이다. ‘나’는 ‘나’ 외에 누구도 아니고 ‘나’만 ‘나’이다. 있음은 선언이 아니라 상태다. 모든 있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남다르다. 나는 남과 다르고 남은 나와 다르다. 남다르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말과 뜻이 같다. 그러니까 있음의 상태는 다른 있음, 즉 다른 남다름에 의해 보장된다. 한 고유함/있음은 다른 고유함/있음에 의존한다. 한 고유함/있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고유함/있음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있는 것들은 홀로 있지 않고 더불어 있다. 그러나 뭉쳐 있지 않고 따로, 다르게, 고유하게 있다. 뱀은 동산의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길고 매끈하고 또 은밀했다. 그것이 뱀의 남다름, 뱀의 고유함이었다. 뱀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고 소리 내지 않는 것처럼 소리 냈다. 그래서 뱀이 아주 가까이 다가오기까지, 심지어는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를 때가 많았다. 그래서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듣기까지 여자는 뱀이 곁에 온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뱀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였고 소리 내지 않는 것처럼 소리 냈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들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동산 안에는 나무들이 많았다. 나무들은 줄기가 가늘거나 굵고
- 관리자
- 2025-04-01
새로움의 경제2 (1) 강동호 1. 일전에 나는 「문학의 경제학–문학적 ‘배움’과 ‘세대’에 관한 이론적 검토」라는 글에서, 문학의 자율성에 관한 새로운 이론적 관점을 모색하기 위해 ‘문학의 경제’라는 다소 생경한 용어를 제안한 바 있다.1) 당시 내가 경제(economy)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문학 작품의 가치’(문학성)가 측정·평가·유통되는 과정을 ‘경제적 현상’에 비유했던 까닭은, 문학 작품을 생산·소비하는 데 관여하는 남다른 교환(exchange)의 원리 및 체계가 상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 역시 경제적 교환의 대상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일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적 교환은 시장에서의 행위를 지시하는 제한된 단어가 아니라, 특정한 ‘가치’(value)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경제란 특정한 가치 위계 내부의 가치들을 거래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모든 사람에게 사회적 삶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는 그중 한 부분이다.”2) 누군가가 특정 행위를 시도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비용(cost)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요소(물론 이때의 비용은 금전적 비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가 따르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주체에 의해 어떤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행위의 선택을 통해 얻게 되는 가치의 편익이 지출된 비용보다 크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가 행위의 동기이자 목적이면서 동시에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치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거나 그에 대한 기대가 교환 주체 사이에서 어긋난다면, 거래는 즉각 중단되고 더 이상 유의미한 교환 행위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한 가치를 거래하는 교환의 네트워크는 삶의 국면들에 광범위하게 편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교환을 원활하게 하고 정당화하는 경제적 원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중이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품 거래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일상에서의 대화, 사회적 의례의 실천, 문화적 재생산, 심지어는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행위에서도 우리는 특정한 가치들의 거래 현상, 즉 경제적 교환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2.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교환의 양태를 이해하고,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고유한 경제적 체제들을 변별하는 데 있다. 이를테면 욕망의 경제(프로이트), 선물의 경제(마르셀 모스), 숭고의 경제(리오타르), 구별의 경제(부르디외), 권력의 경제(푸코) 등과 같은 개념들은 인간의 다채로운 행위를 관통하는 경제적 논리가 정신분석학, 인류학, 미학, 사회학, 정치학 등의 광범위한 분야에서 관측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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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사실은 아주 조금 망했을 뿐이므로 -김지연의 『조금 망한 사랑』이 번역한 ‘반려(종)-되기’에 대해 김영삼 1 한국문학의 숲을 지배했던 우세종으로서의 퀴어 서사는 면역 정치의 배제성(팬데믹)과 죽음 정치(차이 나는 존재에 대한 절멸을 기획했던 정치 기술)의 강박을 거쳐 새로운 관계성의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젠더 권력의 신화에 맞서 퀴어적 친연성에 주목했던 김지연의 서사가 동성 연대(또는 소수자 연대)의 친밀성이 모종의 불안으로 인해 균열되는 순간으로 그 시선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에 없는 소리』와 『조금 망한 사랑』1)의 변별 지점은 김지연의 서사가 퀴어적인지 아닌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겪는 불안의 원인이 다르다는 데 있다. 관습화된 젠더 권력의 얼굴 없는 폭력이 전자의 불안이라면, 소수자끼리의 관계성 파괴 또는 연약한 주체들 간의 관계 위기가 후자의 불안이다. 김지연의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은 이러한 불안의 감정이 연약한 주체들이 새로운 관계성의 레시피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오류와 마주하게 했는지에 대한 보고이자, “우리는-(모두)-여기에-함께-있지만-하나가-아니고-똑같지도 않”2)은 연약한 주체들 간의 차이 그 자체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들이 겪은 사랑과 이별에 대한 김지연의 이야기들은 지워지거나 누락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경유하여 공동체에 공동 거주하고 있는 모든 우리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때 김지연 소설의 미덕은 혐오와 차별에 얽힌 ‘차이 없는 반복’을 답습하지 않으면서 돈, 불안, 사소한 균열, 약자다움의 감성 등과 같은 현실적 문제를 직면했다는 데에 있다. 2 확장된 의미에서 김지연의 소설이 퀴어적인 것은 그(녀)들의 이야기가 ‘연약한 주체’(주변화, 성차화, 인종화되면서 상징적 자격이 박탈되는 ‘소문자 인간’)들이 경험하는 장면들을 서사화하기 때문이다. ‘대문자 인간’이 생산한 관습과 경계선들을 들춰내고 폭파하면서 그것의 패권을 의문으로 대상으로 만들고 그러한 세계의 문법이 모종의 사건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문제 삼을 때, 김지연의 소설은 퀴어적이고 때로 그것을 넘어 우리 사회 공동체 전체에 대한 사유가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조금 망한 사랑』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동성-이성에 얽힌 관계성을 더 이상 전경화하지 않으면서, 세계와 직접 부딪고 있는 소문자 인간들의 삶의 지속성에 주목함으로써 전진하고 있는 듯하다. 끝끝내 ‘우리’를 떠나지 않는 반려종은 ‘불안’이라는 것, 그 불안으로부터 파생된 서툴기 이를 데 없는 사랑과 이별이 ‘빚’으로 남는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을 겪은 연약한 주체들이 그 빚의 청산 유무와
- 관리자
-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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