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호
- 작성일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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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문장웹진 20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선정한 대표 작품들을 다시 읽습니다. 시간을 넘어 되살아난 문학의 순간들과 함께, 그 의미와 감상을 새롭게 나누며 문장웹진의 아카이브를 확장합니다.
김민주(리피워크스)
김민주(리피워크스) 작가 한마디
기원을 좇는 여정
문장웹진 5월호 살펴보기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 - 김멜라의 「이응 이응」1)을 읽으며 ‘사랑’을 생각하기 송연정 동그란 이응 “성욕은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 다를까.”2)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만, ‘사랑 없는 섹스’라는 말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든 다르긴 다를 것만 같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무수한 열망 중 하나가 성적인 끌림으로 발현될 수는 있지만. 성적으로 결합했다고 해서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다소 난감하다는 쪽이 우리에게는 훨씬 익숙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이러한 태도에서라면 성욕과 사랑 중 우위를 점한 쪽은 아마도 사랑이다. 사실 성욕은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감정과 붙어도 대부분 진다. 적어도 성욕이 순전히 육체적인 충족만을 위해 발동된다는 전제하에서는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끌려 마침내 두 영혼이 공명하는 일은 낭만적이며 아름답고 심지어 숭고하지만, 몸과 몸의 결합은 충동적일뿐더러 한때이고 가끔 추잡하기까지 한 것 같다. 몸을 열등한 것으로 깎아내리며 그와 관련한 일체의 욕망을 부정하고 터부시하는 일은 우리의 오랜 습관이기도 하다.3) 그러나,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은? 상대를 만지고 싶고 또한 상대의 손길이 나에게로 향했으면 하는 애욕은, 어쩐지 성적인 뉘앙스를 함의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정서적인 이끌림을 수반하는 것도 같기에 더욱 미묘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김멜라의 「이응 이응」은 ‘이응’이라는 둥근 캡슐을 통해 성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나아가 앞선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마련해 본다. 「이응 이응」의 세계관에서 이응은 공원이나 목욕탕, 미술관이나 도서관, 학교와 주민센터와 병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용화된 기계이다. 사람들은 거대한 물방울처럼 생긴 캡슐 형태의 이응으로 들어가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생긴 은색 띠를 머리에 두르기만 하면 됐다.”(32쪽) 남성과 여성 혹은 그 너머의 스펙트럼 속 정체성의 명도를 조절하고, 성적 끌림 대상과 정서적 끌림 대상, 끌림의 크기, 받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곳··· 이외에도 몇 단계의 설정을 완료하고 나면 이응이 작동한다. “근육의 수축과 경련 그리고 이완. 오감을 채워 주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양극과 음극의 전기 자극에 따라 맥박수와 혈압이 상승하고 나중에는 모든 긴장이 풀리며 상쾌해진다. 무의식 상태로 들어서게 하는 델타파부터 휴식과 이완을 주는 알파파까지. 이응은 단계별로 뇌파의 변화를 유도해 우리의 몸과 의식을 열린 상태로 만들어” 주는(30쪽), 그야말로 청결하고도 건강하며 합법적인 성욕 해소 기계인 것이다. 이응의 현자는 바야흐로 새로운 로맨틱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번식과 성욕, 사유재산이 만들어 낸 오랜 통치술의 사슬을 끊어 내고, 진실로 사랑의 의미를 깨우친 이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반려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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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1
새로움의 경제 2(2) 강동호 1. 새로움의 역설 광인은 입을 다물고 청중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청중들도 입을 다물고,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등물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등불은 산산조각이 나고 불은 꺼져버렸다. 그가 말했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방황 중이다. 이 사건은 아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천둥과 번개는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은 시간이 필요하다. 행위는 그것이 행해진 후에도 보고 듣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 니체, 『즐거운 학문』1) ‘새롭다’라는 말은 대개 ‘다르다’ 혹은 ‘최근에 생산되었다’라는 의미가 결합된 단어로 통용되곤 한다. 새로움이라는 개념이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까닭은 그것이 대상의 특징적 차이를 지시하고, 그 특별한 가치를 강조하는 데 있어 가장 직관적인 기호에 해당해서일 것이다. 시장(market)은 이러한 ‘기호 가치’로서 새로움이 이견 없이 유통되는 대표적인 시공간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어떤 자동차를 일컬어 ‘새로운 자동차’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해당 자동차가 여타의 자동차들과 다르며, 상대적으로 최근에 출시된 신상 모델이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이때 새로운 자동차가 사람들로부터 더 큰 매력과 구매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새로움은 해당 제품의 기능적 우월성을, 그리고 그로부터 얻게 될 한층 차별화된 만족과 유용성을 표현한다. 여기서 새로움이라는 기호에 함축되어 있는 ‘차이’(difference)의 기제는 새로움이 일종의 비교적 가치라는 점을, 나아가 차이의 비교 우위를 정당화하는 원리가 발전·진보·개선 등의 시간적 내러티브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 시대에는 차이가 최우선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2)는 바우만의 진단처럼, 새로움의 가치화 현상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차이의 경제(economy of difference)이다. 차이적 가치 혹은 가치로서의 차이야말로 교환·거래를 활성화하는 매혹의 원천이자, 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원리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차이의 경제는 예술 작품의 미학적 의의를 규명하는 과정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듯 예술은 작품들 사이의 차이를 판별하고, 원본성·독창성·창의성 등의 이름으로 작품의 새로움을 조명하려는 제도적 장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예술 작품의 새로움이 차이의 논리를 통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적지 않은 이견이 제기되어 왔다. 이를테면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새로움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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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1
연차 김용희 늦게 잤더니 아침 일찍 변덕이 깨었다 변명을 궁리 감기 두통 몸살 엄살을 보태 반장에게 전화를 한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변명 아닌 병명을 읊는다 나약한 몸이라 다행이다 주인공이 아니라 부품이라서 조연이라 어렵지 않게 시간을 벌었다 늦잠을 자고 브런치를 먹고 오늘은 종일 흐리다 했는데 하늘은 맑고 빗나간 예보처럼 사람의 미래도 빗나갈 수 있을까? 공원을 산책하며 비타민 D 챙기기 시간 소비하기 행복한 강아지 훔쳐보기 공장의 소음 대신 새소리가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허기는 금방 찾아오고 갈증을 느낀 적은 오래인데 싫증을 느낀 적은 너무 많은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온갖 고난을 겪다 웃으며 주인공이 죽는 영화를 보고 영화의 분위기를 옮겨 놓은 어둠 깔린 거리를 걸으며 오늘 하루의 평점을 매겨 본다 가로등과 가로수의 호의를 받으며 앞으로 걷는 사람들과 앞으로 나아가는 중 일은 연차가 쌓여 수월해졌는데 사는 건 연차가 쌓여도 여유 없는 건 무슨 연유일까? 포장해 온 저녁을 먹고 넘치는 포장 용기를 분리하고 포장되지 않은 나를 보는 건 너무 불편하단 생각 잃어버린 용기를 찾는 방법은 어디서 알 수 있을까? 감기 두통 몸살 오늘의 변명에 창의력 하나 없는 게 씁쓸한 아픔 설 연휴까지 연차 없이 열심히 일해야지 다짐은 늘 갱신되지만 의무는 아니다 오늘은 일찍 자려고 누웠는데 생각은 방과 거실을 오가며 허밍을 하고 불면이란 증상은 왜 아직도 변명처럼 들리는지 늘 성실한 밤과 아침에 물어볼 수 없어 뒤척이며 이불을 찼다 덮었다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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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1
호수 김용희 너는 투명한 피부를 지녔다. 맑고 투명한. 호수 옆에 머문 지 며칠이 지났다. 집이 아닌 숙소를 안식처라 불렀다. 우리는. 늦은 아침을 만들어 먹고 이른 저녁을 챙겼다. 음식보다 이야기가 풍성한 식탁에서. 왼손으로 든 젓가락은 실패를 거듭하며 엑스를 그렸다. 웃으며 실패의 맛을 알아 갔다. 시간이 나면(시간은 늘 우릴 바라보지만) 호수를 돌았다. 그럴 때면 시간은 시골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고. 호수엔 오리가 있어 단조로운 풍경은 흩어졌다. 흐물흐물한 수초 사이 물속으로 들어간 오리가 오래 나오지 않아 걸음을 멈춘 적이 있었다. 중심으로부터 퍼지던 원호가 사라질 때까지. 오리는 어떻게 된 걸까? 혼자 있던 오리였다. 물속으로 사라지던 오리발의 가는 떨림.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니 평온한 오후의 한때처럼 보였다. 아직 찬바람이 불고 창백한 낮달이 자릴 지키던. 번성한 뭉게구름이 북쪽으로 그늘을 옮기고 있었다. 덩굴식물이 한 벽면을 집어삼킨 안식처로 돌아오고. 측광이 부드럽게 네 얼굴을 쓰다듬는 것을 바라봤다. 입을 꾹 다문 채 잠이 든. 금빛이었다. 책장의 사전에서 창백함과 투명함을 찾아보고. 고요한 정물의 방식으로 회복기를 가졌다. 풍요로운 적요가 낮을 흐르고 풀벌레의 울음이 수놓는 밤을 지났다. 여러 날. 장을 보러 언덕을 찾았다. 천천히 오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 오래 기억하려 했다. 포장이 화려한 와인을 사 들고 와 느슨한 분위기를 깨웠다. 사용하지 않는 벽난로에 양초 여러 개를 놓아두고 불을 붙였다. 발화하는 향내가 실내를 맴돌았다. 창밖으로 비가 내렸다. 명랑한 소리가 실내로 쏟아지고 있었다. 호수는 범람하지 않았다. 우산살이 부러진 우산이 현관을 지켰다. 인공눈물을 넣으며 코믹 영화를 봤다. 경화되는 영혼을 위해. 끝난 후부터 새로 시작되는 영화가 있지. 문이 닫히지 않은 채. 신발만 가지런히 놓인. 호수 옆에 우두커니 머문 적이 있었다. 아침이면 젖은 안개가 찾아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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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1
밤의 경비병 여성민 나는 한두 사람의 시인입니다 독자가 많지는 않아요 그래도 밤에는 책상에 앉아 이모저모 씁니다 계속 써 쓰면 물질이 돼 밤의 경비병이라는 말은 당신이 해 준 말입니다 당신은 나를 속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높은 곳에 올라 죽음에 이르러야 내려오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은 공기에 가깝군요 나는 밤의 북 속에 앉아 있군요 북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손이 북에 닿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밤하늘에는 인간의 손이 닿았던 자리도 있습니다 북이 닳은 곳 인류가 손으로 두드린 은하수라는 말 농담이지만 빛을 따라 인류가 이동했다는 설과 인류를 따라 빛이 이동한다는 믿음 중 하나는 진실입니다 그것을 인류의 시간이라 부릅니다 빛무리로 몰려다니는 마음 그 마음을 써요 죽으면 어느 날의 저녁이 되겠다고 씁니다 하루만 인간의 저녁으로 머물며 당신을 보겠다고 쓴 후 인간의 저녁은 물질이 됩니다 동방박사처럼 북 속을 걸었습니다 거대한 북 속에서 북을 향해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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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1
입맞춤 여성민 치과에 갑니다 흐려지는 방법입니다 봄에 갔다가 겨울에 돌아옵니다 치아 하나가 눈사람이어서 따뜻한 밥을 먹을 때 눈사람이 녹습니다 밥을 먹지 않고 갑니다 치과 의사가 내게 청혼하네요 그는 진심이에요 눈사람을 사랑합니다 나는 집게에 들려 의자로부터 떠오르고 있습니다 눈송이처럼 눈송이처럼 네 죄를 사하노라 입을 벌리고 치과 의자에 누워 눈사람의 설교를 했습니다 의사는 손이 시렸습니다 치과에는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치위생사들은 눈삽을 들고 뛰어다닙니다 눈사람의 입을 틀어막아라 나는 사랑스러운 풍경을 믿음으로 내려다봅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은 눈사람입니다 잘 보세요 몇 번째 치아가 눈사람일까 눈사람을 찾으며 치과 의사는 아름다워졌고 나는 흐려집니다 무엇이 인간을 흐리는지 다 모르지만 서로의 죄를 사하려고 사랑하는 사람과 입을 맞추면 눈사람이 이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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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1
세상에 없던 페이지를 열고 정우영 박소란 시집 『수옥』을 읽으며 111과 112페이지를 넘기는데 111에는 없던 무엇인가가 설핏 번진다. 어라? 112로 향하던 눈을 흘깃 111로 되물린다. 그림자 같은 게 내 흘깃에 멈칫거린다. 틈새에 미처 스며들지 못한 건가. 부러 슬근 늦춘 것인가. 이봐요, 누구신가요. 낱장을 손에 쥔 채 흔들며 눈과 귀 바짝 기울인다. 어떤 물상이 저기에서 여기로 움직였다.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111과 112페이지 이쪽저쪽 조심스레 살핀다. ‘쏟아지는 빛이 젖은 동공을 사정없이 찌를 때조차’ ‘그냥 걸었다는 말’* 사이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창졸간에. 내 눈동자에 경기가 흘렀다. 미친 거 아니야? 당신은 내게 착시를 들이대겠지만. 분명코 어린 시절 깜씨**였다고 말해야겠다. 세상에 없던 페이지를 열고 죽은 옥이가 다녀갔다고. * 시집 『수옥』의 111페이지 「옥상에서」 마지막 행과 112페이지 작품 제목임. 이 글자들은 앞면의 맨 뒤와 뒷면의 맨 처음이며 그 사이는 비어 있다. ** 얼굴이 까맣게 탄 아이를 부르던 별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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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1
어쩔끄나, 저 봄꽃들 정우영 너 혹간 댐배 태우냐. 아뇨, 담배는 무슨. 그 쓴 것을 어찌 입에 대겠어요. 요 메칠 거북선 댐뱃갑이 자꼬 비워져 가는디 귀신이 곡헐 노릇이다야. 등허리에 땀방울이 고였다. 청자를 피울걸. 너무 독해서 거북선만 빼내 물었더니 확 티가 났던가. 그럼에도 아닌 척 딴청을 피우며, “아부지, 인자 올라갈랍니다.” 무릎 꿇고 큰절드리는디. 윗주머니에 꽂아 놓은 거북선 한 개비가 툭 떨어져 방바닥을 뒹군다. 나보다 더 당황한 아버지, “오냐, 매사에 진중해라.” 얼떨결에 호통조차 놓치고 갈라진 음성 바닥에 깔으시는디. 집안 여기저기 둘러앉은 봄꽃들이 하얗게 질려 봉오리 봉오리 터진다. 절하다 말고 부리나케 일어난 나는 무릎걸음으로 재바르게 거북선 쫓아가는디. 하필이면 이것이 아랫목 아버지께로 기를 쓰고 내달린다. 서라, 서. 쫌! 속으로 애타하며 손가락 쭉 내뻗는 것인디. 담배 한 개비는 여지껏, 아버지도 안 계시는 아랫목으로 사십오 년을 굴러간다.
- 관리자
- 2025-05-01
클리셰 백인경 몸에 좋은 걸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몸을 좋게 만든대요 상담사는 다정하게 말한다 내게 다소 작위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도 사장님이 미쳤어요! 라는 가게에 들어가 정신과 소견서를 요구하는 사람이 없듯이 레몬이 상했다는 것이 슬픔의 이유가 되게 두지 말라고 그저 가니시일 뿐이니까요 알아요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그런 짓을 하는 꼴을 숱하게 봐 왔다 저렇게 인상 좋은 사람은 위험하다 입술에 거품을 묻히지 않고 카푸치노를 마실 줄 알아야 해요 진짜 사랑을 하려면 등장한 총이 발사되지 않고 낯모르는 행상의 수레를 뒤엎지 않고 그녀들의 유쾌한 반란 없이 갈등이 해결되고 먼저 가! 꼭 뒤따라갈게! 하던 동료가 곧 따라오고 해치웠나? 짐작한 악당이 정말 죽어 버리고 돌아가면 청혼할 겁니다. 하던 동료의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을 내는 것 그 어떤 부모도 초라해지지 않고 깨진 거울이나 타일 조각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멋쩍은 표정으로 마침내 고도가 카페 문을 열며 들어오고 뜨거운 차가 식기 전에 이별을 합의하는 너만 그런 거 아니랍니다 라는 말에 얼굴이 홧홧해질 때 어떤 장면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진부해지고 만다
- 관리자
- 2025-05-01
돌연변이 백인경 스쿠터를 타다가 공원 벤치를 들이받은 이후로 두 발 달린 것들은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은 보기보다 잘 미끄러지고 심장이 무방비하게 노출된 자세다 손으로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는 가설조차 징그럽게 인간스러워 시동을 끄고 핸들을 움켜쥔 채 바퀴와 나란히 머쓱하게 걷는다 요란한 배기음과 함께 떠나려는 마음과 쉬어 가려는 마음이 충돌하는 세계에서는 무릎이 무너지기 쉽고 네 발로 달리면 빠르게 사라질 수 있지만 두 발로 달리면 멀리 달아날 수 있지 지구의 끝까지 인간처럼 직립보행을 하는 동물로는 펭귄이 유일하다 펭귄의 날개는 납작하고 단단하며 먹이를 구하기 위해 헤엄치거나 때리는 데에 사용된다 바퀴 두 개 다리 한 쌍 스쿠터와 나는 협의한다 극지대까지 가지는 말자고 다리가 많아질수록 불균형해지는 생 그것은 제법 멋지게 보인다 사고를 목격한 강아지들의 정신적 위자료로 백육십만 원이 청구되었다
- 관리자
- 2025-05-01
마음 3 이효영 피아노 위에 잠든 마음을 본다 안전하게 비치되어 있다 마음이 바로 저기 있다 내 입과 가깝다 마음의 똥구멍이 커다랗다 저거 불고 싶다 충분히 불 수 있다 악기를 다룰 줄 안다 나는 거의 연주가다 구멍이 있으니까 마음은 닿아야 열리는 물질이니까 음악처럼? 그러나 지금은 악어 떼 모인 정글처럼 후줄근하다 물 먹는 하마처럼 축축해진다 스스로 음악처럼? 오히려 내가 열린다 마음이 내 밤 침대를 더듬는다 코를 박고 나의 구석구석 킁킁거린다 마음은 냄새가 흐르는 곳을 안다 입을 앙다물어 보아도 입만 문제인가 나 너무 많은 구멍을 가졌구나 마음이 분다 나를 분다 나는 악기다 내가 악기야 내가 닿기만 하면 열린다 내가 음악처럼? 자의 없이 반복되는 멜로디 다스릴 수 없는 것은 전부 통증이다 이기지 못할 몸 구멍을 다 찾아낸다 귓구멍 눈구멍 콧구멍 숨구멍 땀구멍 앞에도 뒤에도 구멍 구멍 전부 입보다 더 벌려 합창 나를 내게서 토해 내며 합창 꿈보다 더 신명이 나서 줄줄 흘리는 나는 이미 조율됐다 악기는 전부 마음의 것
- 관리자
- 2025-05-01
마음 2 이효영 동생이 죽고 마음이 왔다 두드리고 있었다 들이박고 있었다 찌그러지다 마침내 문을 부서뜨렸다 어디 멀리서 불쑥 오는 그렇구나 마음은 네발짐승 마음은 짧고 뭉툭한 다리로 바닥을 쿵쿵 쿵쿵 찧으며 발자국 보라고 새긴 것과 남긴 것 비교해 보라고 “왔어, 왔어, 마음이가 왔어요.” 동생은 그날 조개를 한 소쿠리 먹었다 상 위에 조개껍데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속을 깨끗이 다 파먹었다 그렇게 들었다 들으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껍데기 하나하나 벌린 뒤 속살을 이로 물어 남김없이 먹는 동생 내장인지 몸인지 모를 그거 다 먹고 죽었다 그렇게 들었다 상상해 보았다 그런 마지막은 다를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하거나 혹은 바다를 보러 밤의 국도를 달리거나 어둠에 흔들리는 침묵이 되는 것과 얼마큼 다를까 조개를 먹고 죽는 것은 좀 더 부드러운 것일까 단단한 것일까 마구 때리고 부수고 그래서 열었다 흉기 같은 머리를 가졌다 두꺼운 표피를 가졌다 원래 그래 마음은 굉장하고 마음은 괴상하고 마음은 사납다 “집이 왜 무너지고 있어요?” “왜 이 모양이어요?” 그러게, 나의 집은 왜 더럽혀지고 부서지고 찬란하지 봄날 황사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왜 동생이 죽고 오는가 마음은
- 관리자
- 2025-05-01
벌룬 김연숙 가스가 안 빠져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을 때도 뚝뚝한 함경도 시아버지가 매일 전화를 했다 그, 그 가스는 어찌 됐나 맹장 수술할 때도 가스를 기다리다 입원 기간은 마냥 길어지고 의사는 그냥 섭식을 허락했다 풀어내지 못한 무언가 가득해 지금도 내 배는 선릉 둥둥 뜨는 거 아닌가 몰라 떠오르며 사지를 버둥거리다 고공 어디에선가 피시시시식 바람이 빠지며 핑글핑글 한없이 돌며 낙하하다가 찌부러진 몸체로 강변북로를 달리는 어느 차의 지붕에 내려앉을지 몰라 검은 차 흰 차 물론 그건 랜덤이지만 잘 안 떼어질 거야 질긴 나의 고무 재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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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1
페미니즘 김연숙 일본 국토 생성 신화에는 육지가 되고도, 너무 되어서 불쑥 나온 부분이 있고 다른 육지는 약간 모자라 움푹 패인 부분이 있어 그들은 서로 맞닿아 하나가 되고 싶었다 합체하고 싶었다 일본 지도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왜 한쪽은 튀어나오고 다른 한쪽은 패여 있을까 원치 않는 침습과 흡수는 참혹하게 기분 나쁜 일 기억을 씻어 내는 독한 락스가 있을까 태생학적 차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일 체액과 체액의 어떤 뒤섞임에 대하여 다른 건 다 목청만 돋우는 지엽적인 문제들
- 관리자
- 2025-05-01
초과근무 안수현 가난해야 시가 써진다는 옛말이 있다 “최근 운동량 부족과 야근, 야식 등의 생활 습관이 누적되면서 배와 허리 부분에 체지방이 집중으로 축적되는 ‘복부비만’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몸무게로 나타나는 비만보다 복부에 지방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복부비만이 더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앉아서 일하다 보면 왜 그렇게 배가 고플까요, 주말에 집에서 뒹굴뒹굴하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정신도 말똥말똥한데 회사에서는 자꾸 지루하고 잠이 오고 그래서 뭘 집어먹고, 당이 오르니까 또 졸리고 커피는 이제 와서는 뭐 마시면 잠이 깬다기보다는 안 마시면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마시는 것 같아요 처리 기한 언제까지로 드리면 될까요 소요 시간이랑 정확한 수량 기록해 주세요 하라는 대로 해 보고 먹으라는 대로 먹어 보고 그때뿐이죠 뭐,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한 가지 착각하시는 게 있는데요 지금 당신이 돈 받으면서 하는 일, 돈 안 받고도 하겠다는 사람 많아요 하기 싫으면 그만두세요 건물을 나가면 자유로워지나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있어요 언제 어디를 가든 계약을 했든 안 했든 내 손에 뭐가 들려 있는지 내 이름에 뭐가 달려 있는지 알 만하면 잃어버리고, 알 만하면 잊어버리고, 제 이름보다 우리, 우리, 우리라는 이름이 너무 커서 가진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먹어요 솜사탕 같은 텅 빈 마음을 삼켜요 맞아요, 그것도 가난입니다 가난은 시를 씁니다
- 관리자
- 2025-05-01
홍조 안수현 석류알을 떼어 나누어 주다가 아주 조금 서둘렀을 뿐인데 손톱에 베인 낱알이 피를 흘렸다 뱀에 물린 상처에서 독을 빨아내듯이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런데 깊은 마음 한 알이 통째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단단하고 시큼해서 뱉고 싶었다 그이도 도망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석류알 혼자서는 말을 할 줄 모르고 입에 무언가 넣고서는 나도 말을 할 줄 모르고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법도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알아차리는 법도 모르는데 심장 깊은 곳에서 진심이 으깨어질 때까지 오래도록 괴롭힐 수밖에 없는, 터뜨리기 전까지는 저 스스로도 도대체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는 그런 말 한마디가 있다 서운해할 것 없잖아, 원망할 자격도 없잖아, 내맡기고 기대한 건 나잖아, 이제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아무리 참으려 해도 서서히 온몸이 붉게 물들어 가는 그런 병이 있다 상처에서 피가 나듯 줄줄 새는 진심, 잇새에 시리게 물들어 오는 사과하고 싶다가도 뻔뻔하게 굴게 만드는 울퉁불퉁한 그다지 둥글진 않은 그래도 괜찮은 우리 멍든 심장의 모양새
- 관리자
- 2025-05-01
빅 웨이브 정용준 1. 약속 시간을 십 분 앞두고 음료를 절반 넘게 마셨다. 초조하다. 열아홉 여자는 아이일까. 어른일까. 만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마흔셋. 열아홉을 두 번 곱해도 다섯이 남는 나이. 둘 사이에 가능한 게 있기나 할까. 좋아하는 가수가 누군지, 취미는 뭔지, 최근 본 영화와 드라마, 그런 이야기 하면 되겠지? 커피 마시고,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렇게 하면 되는 거겠지? 얘기 좀 나누고 깔끔하게 바로 헤어지는 것도, 조금 걷거나 이르지만 밥을 먹는 것도, 좋겠다. 할 말이 없으면 난감하겠지만 만나자고 한 건 내가 아니니까. 무슨 말이든 그 애가 할 거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검정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얼굴과 표정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쪽도 나를 한눈에 알아본 것 같았다. 그는 시선을 돌린 뒤 휴대폰을 들었다. 탁자 위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수양’ 그는 휴대폰에 손대는 나를 확인하더니 전화를 끊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태양, 씨?” “네. 맞아요.” 네. 맞아요, 라니. 그렇게 답한 내가 어이없다. 수양은 맞은편에 앉아 영수증을 내려보며 말없이 있었다. 사 주겠다는 것을 굳이 거절하고 자기가 주문했다.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다. 막막했다. 설상가상 장 대표에게 계속 연락이 왔다.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쉴 거라고 했다. 알겠다고, 해 놓고 ‘어디.’ ‘뭐해.’ ‘언제 끝나.’ ‘중요한 퀵이야.’ ‘지역이 맞는지만 맞춰 보자.’ 집요하게 메시지가 왔다. 나중엔 전화까지 와서 모드를 무음으로 바꾸고 액정이 보이지 않게 휴대폰을 뒤집었다. 최대한 들으세요. 똑똑한 이들의 충고를 마음에 새겼다. 입 닫고 듣기만 하자. 다짐했지만 별수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못 견디고 먼저 말을 했다. 수양은 대꾸도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말하는 나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자꾸 말하다 보니 아무 말이나 하게 됐고 퀵서비스 업무 시스템을 필요 이상으로 설명했다. 픽업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진상 손님을 험담할 때 수양은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카페는 조용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있는데 말하는 이가 없었다. 대부분 혼자였고 함께 있어도 대화 없이 노트북을 보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우리를 노려보거나 시끄럽다고 항의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귀가 곤두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수양이 말했다. “자리 옮길까요?” 오후 세 시 반. 할 것이 없고 갈 곳도 없었다. 밥 먹기는 애매하고 영화 보자는 말을 할 자신은 없었다. 봄이 온 것 같지만 오래 걷기에는 추운 3월 초. 천변 도로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스몰 토크가 중요하다고 했다.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해서 나중엔 서로의
- 관리자
- 2025-05-01
뉴 잭 스윙 박서련 시작은 사이렌 소리였다. 일하던 사람들이 별안간 화들짝 놀라 공장에 불이라도 난 게 아닌가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전주. 무슨 테이프인지, 가져온 사람은 또 누군지 같은 건 몰라도 하필 〈바꿔〉 시작 부분에 딱 맞춰 테이프를 감아 왔다는 점이 괘씸했다. 이정현을 좋아해서 공장 사람들과 함께 그 노래를 듣고 싶었든 단순히 전주 부분 사이렌 소리로 골탕을 먹이고 싶었든, 즉 선의든 악의든을 떠나 고의인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길고 신경질적인 전주 뒤 모두 제 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쳐 가고만 있어는 동감이었지만 그 노래를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매우 계속 듣고 싶다, 계속 듣고 싶다, 그저 그렇다, 듣고 싶지 않다, 전혀 듣고 싶지 않다 중 뭐냐고 하면 씨발 제발 그만 틀어 정도. 귀를 막으려면 손이 한 쌍 더 필요했다. 기존 왼손은 작업판을 누르고 기존 오른손은 인두기를 조작해야 하니까. 이정현한테는 큰 감정이 없었지만, 좋고 싫고를 떠나 아무 생각이 안 들었지만, 테크노 댄스 테이프를 굳이 공장에 가져와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야간 특근 시간에 튼 인간은 인두기로 대가리를 갈겨 주고 싶었다. 젊다는 건 뭘 모르는 거. 유행이랑 자기 취향을 구분 못 하는 거. 결정적으로, 자기한테 뭐가 맞는지 모른다는 거. 그런 젊음이 공장 안에는 썩어지게 넘쳐 났고 나를 그들과 구별 지을 힌트는 나 자신에게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씨발 너무 젊고 젊다는 게 이제는 조금 질린다. “오늘까지 이번 달 총 열일곱 날 일했고 하루에 열 시간 곱하기 이천이백 원, 곱하기 십칠 더하기 만근수당, 여기다가 특근수당 삼천 원 곱하기 이십일 시간···.” 귀에다 납땜을 해 버릴까 진짜. 시끄럽게 울려 대던 테크노 곡이 끝나고 조성모 노래가 나오기 직전 도요 언니가 근무 시간 내내 끊임없이 중얼대는 급여 셈법 소리가 들려왔고, 그러자,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기절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화가 났다. 인두기가 기판 대신 왼손 엄지를 지지고 있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은 것도 그래서였다. 잠깐이나마 열이 잔뜩 오른 머리가 300℃ 넘는 인두 팁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 앗, 뜨거, 씨발, 나는 덴 엄지손가락을 반사적으로 입에 물었다. 이끼 낀 불상을 핥을 때나 날 듯한 기이한 맛이 혀에 닿았다. 인두기에 얇고 집요하게 눌어붙은 겹겹의 땜납 자국이 그제서야 떠올랐고 입에서 나온 엄지손가락 옆구리는 희고 퉁퉁한 모양으로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꼴을 보고서야 화가 식었다. 몸 안에 꽉 차 있던 열기가 작은 틈을 찾아 새어 나간 것처럼 맥이 탁 풀린 거였다. 그래 씨발 관두자. 화내 봐야 나만 손해지. 멍청하게 인두기로 제 손 지지는 꼴을 어디 들키지나 않았을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야 청승 맞다 노래 꺼라, 누군가 큰 소리로 지청구를 놓았고 또 누가 대거리를 했다. 조성모가 왜 싫으냐 네가 나가라. 이만 이천 곱하기 십칠은
- 관리자
- 2025-05-01
미시적 동물 서이제 아무리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렇게까지 비가 내리는 건,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지난 새벽부터 내린 폭우는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하천은 범람했고, 교통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지하철역이 폐쇄된 것은 물론이고 버스 운행마저 중단되었다. 지대가 낮은 지역에서는 자동차들이 배처럼 떠다녔다. 뉴스에서는 하루 종일 각 지역 홍수 피해 현황과 구조 소식을 보도했다. 강풍에 간판이 날아가고 백 년 된 나무마저 쓰러졌다고 했다. 곧이어 집이 침수되어 대피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돼지나 오리와 같은 농가의 동물들이 물살에 휩쓸려 가는 모습이 나왔다. 누군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산사태 영상이 나왔다.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며 순식간에 도로를 덮치는 장면이었다. 지금쯤 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혹시라도 흙더미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린 건 아닐까. 아마도 비가 그치기 전까지, 아니, 비에 젖은 땅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너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슬프게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안에 틀어박혀 실시간 뉴스를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면서, 망가진 일상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저녁에는 설상가상으로 전기마저 끊어졌다. 창문을 열어보니 온 세상이 어두웠다. 거리는 이미 시커먼 흙탕물에 잠긴 상태였고, 불 꺼진 신호등과 가로수만 물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어디에서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미리 대피했거나 꼼짝할 수 없이 집안에 갇혀 있겠지. 나 또한 물이 빠지기 전까지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날 밤 무서운 꿈을 꾸었다. 집안까지 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물은 점점 불어 침대 높이만큼 차올랐고,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흙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내 몸은 물에 젖은 스펀지마냥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어마어마한 물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느낌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거대한 힘에 짓눌려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폭우로 기압이 낮아진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비가 오면 항상 몸이 피로했으니까. 한편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엄마는 내게 화를 낼 때마다 아빠를 들먹이곤 했다. 너는 어떻게 네 아빠랑 하는 짓이 똑같니. 내가 아빠를 연상케 하는 게 불쾌하다는 듯이, 내게 눈을 흘기면서. 그러나 정작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꼴 보기 싫다는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 둘을 모두 닮아 있었다. 외모나 성격, 심지어 건강 상태까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딱 반반씩. 어디에선가 듣기로 자식은 부모의 얼굴을 닮는 게 아니라, 장기를 닮는 거라고 했다. 장기가 닮아 얼굴이 닮는 거라고. 아빠는 간이 안 좋았고, 엄마는 위와 갑상선이 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행한 사실은 둘 다
- 관리자
- 2025-05-01
주황 신민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는 여름 해변에 누워 있었다. 아버지는 양손에 모래를 담아 내 몸을 덮어 주었다. 바람 없는 날이어서 파도 소리는 한 음밖에 내지 못하는 악기처럼 단조로웠다. 유령 게가 집게발로 귓불을 건드리더니, 안쪽의 깊은 어둠을 훔쳐보곤 슬금 물러났다. 나른했다. 모래로 만든 이불 아래에서 심장이 느슨하게 뛰었다. 피는 천천히 헤엄쳤고, 뼈는 나보다 먼저 졸았다. 이것들이 다 유리가 된단다. 아버지가 말할 때 나는 거의 잠들어 있었다. 눈을 감고, 유리로 만든 드레스를 입은 상상을 했다. 그 드레스는 크고 작은 천 개의 유리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어디에서 보는지에 따라 각각의 조각들이 금세 표정을 바꾸므로 누구도 이 드레스의 온전한 생김새를 모를 것이다.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새 드레스가 태어날 테니까. 깨어났을 땐 모래 이불이 헤집어져 있었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배와 발가락들. 잠든 동안 아버지가 이불을 고쳐 주지 않아서 화가 났다. 아버지는 내게 등지고 앉아 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을 돌아보기를 바라며 몇 차례 콜록거리고, 끙끙거리는 소리도 내보았는데 아버지의 등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유리 공장의 공장장이자 제조공이었다. 술병과 비커, 램프, 접시들, 뭐든 만들었다. 작업 도중 불에 데거나 파편에 베이면서 그의 팔에는 우둘우둘한 자국이 남았다. 이쪽의 가죽과 저쪽의 가죽이 다시 만나기 위해 환부의 강 너머 서로를 잡아당기며 생긴 상처. 땀에 절어 번쩍거리는 데다가 흉으로 얼룩진 아버지의 피부는 탈피를 여러 번 거친 도마뱀 같았다. 우리 집은 유리 공장에서 십 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담벼락 없이 적색 벽돌로 쌓아 올린 빌라의 맨 아래층이었다. 낮에는 공장 쪽에서 쉼 없이 불량품을 깨부수는 파열음이 들렸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깨진 조각들은 버려지는 게 아니었다. 모래, 실리카와 함께 가마로 들어가 또 유리물이 되었다. 어떻게 부서지든 다시 태어날 가능성을 영원히 지닌 것이다. 제조공들이 자리를 비운 점심시간에 나는 쥐새끼처럼 공장으로 숨어 들어가 가마 근처를 얼씬거렸다. 이글루 형태의 가마는 철판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정수리부터 땀이 비질비질 흐르고 숨쉬기가 어려웠다. 가마는 열을 내는 도가니를 몇 개 품고서 종일 끈적한 유리물을 끓였다. 제조공들이 파이프를 찔러 넣어 유리물을 퍼 올리는 창문 모양의 구멍, 거기에 태양이 갇혀 있었다. 이글거리는 주황. 일렬종대로 놓인 취관, 오목하거나 불룩한 금형들, 매서운 그라인더, 평평한 집게, 토치와 에어건, 걸쭉한 상태일 때의 유리를 자르는 플라이어, 다이아몬드 가위, 왁스를 묻혀 머리통이 번들거리는 잭, 끝이 고깔 모양으로 꺾인 퍼퍼, 나무 패들, 테그리올과 클램프, 온갖 호스, 물을 채운 양동이들, 검게 젖은 신문지 뭉치를 살폈다. 곳곳에 파유리를 모아 둔 드럼통과 수레도 보았다. 언젠가 한 몸이었던 그 조각들은 서로를 비추며 자기들만의 미로에 들어가 노는 것처럼 보였다.
- 관리자
- 2025-05-01
[문장웹진 REWIND]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파문과 파도와 파장으로 기록되는 무늬. 무늬를 밀고 가는 저녁 공기와 그것을 완성하는 밤의 지문으로 가득한 곳. 그곳이 기원이기 때문이다. 2.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시작, 20
- 관리자
- 2025-05-01
네버랜드 탈출기 ― 김희준론1) 최다영 1. 신(新) 아카이브 프로젝트 선행 평론에서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듯 “근원이나 태생에 대한 감각”이나2) “원형 회귀본능”을3) 말하지 않고서는 김희준의 시에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현상의 내밀한 원인을 해명하거나 김희준의 시적 작업이 내포한 고발과 대항 의식을 읽어 내기엔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키워드이기도 하다. 수록작이기도 한 ‘사기(史記)꾼’이라는 제목은 충실한 아키비스트(archivist)이자 교란하는 트릭스터(trickster)라는 상반된 함의를 모두 내포한다. 혹은 아키비스트의 본령이 트릭스터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기(史記)꾼’으로서 김희준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화와 성서, 동화 등 무수히 집적된 공동체적 기억의 편린을 환상적으로 중첩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변형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비틀고 왜곡하는 지점에서 김희준만의 원형적 이미지가 접속 면의 틈을 찢고 출현한다. 그의 시의 근간을 형성하는 태(胎)가 익숙한 공통의 근원 서사에서 발생했을지언정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성교와 번식, 근친과 식인의 모티프는 공포스러운 재생 감각으로 연결되며 그만의 개인적 이미지로 일관되게 수렴하는 것이다. 바르부르크의 언급대로 이미지가 생물학적 필연성의 산물이라면, 김희준이 강박적으로 봉합하고자 한 거대 명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류는 종교,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방법을 경유하여 원초적 두려움으로부터 자신과 공동체를 보호하며 종의 계승을 보존해 왔다. 출생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인간도 피해 갈 수 없기에 해결할 수 없는 보편타당한 종의 운명 앞에서 이를 추상화하고 거리를 둠으로써, 또 사회적 집단 기억을 대를 이어 계승함으로써 두려움을 봉합하고 파토스를 안정시켜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희준은 그 자신의 개인적 이미지를 개발하고 반복적으로 중첩시킴으로써 이미지의 기원에 대한 대답을 동시대에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며 등장했다. 김희준에게 있어 기원을 더듬는 일은 그 계보를 추적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화적 세계관을 축조하고 공고히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때 감지되는 건 신화와 동화의 알레고리 이면에 자리한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고발과 저항 의식이며 더 나아가 발생과 소멸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엄윤채 (@90r1p) 2. 재생하는 네버랜드 김희준의 시 속에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주로 ‘소나기’이지만 때로는 “불”이기도 하고(「인류도감」) “아이”이거나 “유성”(「백색소음」), “사내”(「페스티벌」), “밀도 높은 당신” 혹은 “저녁”(「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테트리스 적응기」), &ld
- 관리자
- 202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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