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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호

  • 작성일 2025-08-01

인사의 말

2025년 8월호부터는 윤재민, 이주란, 정다연 세 명의 새로운 편집위원과 함께 합니다.
문학광장 20주년을 기념한 문장웹진 리와인드 기획 원고와 함께 10월부터는 편집위원이 직접 기획하고 참여한 글을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편집위원들과 함께 국내 좋은 작가들과 작품들을 소개하고 모두의 일상에 문학이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새로운 편집위원과 함께
문장웹진 8월호를 엽니다.

  여러분은 이번 여름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요? 이번 8월호 신작 시에는 이건청, 유진목, 박남준, 황유원, 장혜령, 장희수, 원수현, 이수빈 시인께서 옥고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윤보인, 조시현, 김덕희, 김근수 소설가의 새 소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록적 극한 호우와 역대급 폭염의 나날 속에서 여전하기란 쉽지 않지만, 네 편의 소설에서 이 세계를 둘러싼, 진실을 향한 진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네 편의 비평에서 정의정 평론가는 김초엽과 우다영의 ‘소프트 SF’에서 ‘알 수 없음’의 미학적 의미를 섬세하게 길어 올립니다. 조대한 평론가는 필명과 픽션을 종횡하며, 문학적 가상의 동시대적 맥락을 질문합니다. 이한나 평론가는 ‘최진실’이라는 당대 최고의 아이콘에 주목한 여성주의적 메타비평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박동억 평론가는 ‘고통의 증언’이라는 묵직한 질문으로 9월까지 연재를 이어갑니다.

 ‘스무살’의 단상과 감각에 주목한 두 편의 에세이, 고수리 님의 고단한 서울살이와 서솔 님의 ‘이십대 풍물시(風物詩)’ 그리고 유지혜 작가의 체스 입문에서 폰(Pawn)으로 마무리되는 아름다운 글도 놓치지 마시길.

 ‘문장 서포터즈’ 코너도 풍성합니다. 김선우 님의 북디자이너 홍성우 인터뷰, 김소리 님의 ‘도슨트는 문학이 될 수 있을까’라는 도발적인 질문, 박소희 님의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방문기가 8월호를 든든하게 ‘서포트’합니다.



10기 문장웹진 편집위원

윤재민

 안녕하세요. 문학 평론가 윤재민입니다. 지난 연말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듯도 하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요지부동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을 어떻게 간직하고 계실까요. 궁금합니다. 많은 변화가 시작될 문턱에서 <문장웹진>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한국문학의 현장 한복판에서 세상의 흐름과 한국어 글쓰기의 최첨단에 한껏 휩쓸려보고자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윤재민 - 문학평론가.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HK연구교수(2022-2024)

이주란

 안녕하세요. 이번 호부터 <문장웹진>에 합류하게 된 소설가 이주란입니다. 거칠고 뜨거운 여름입니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문장웹진>이 앞으로도 다양한 이야기들을 더 멀리 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이주란 - 소설가. 2012년 《세계의문학》 신인상. 『한 사람을 위한 마음』, 『별일은 없고요?』, 등 집필. 김준성문학상,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가톨릭문학상 신인상 수상

정다연

 안녕하세요. 이번 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시인 정다연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여름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요? 저는 며칠 전 출간된 새 시집을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보냈습니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기다릴 수 있다는 건 참 기쁜 일 같습니다. 고여 있던 일상을 환기하며 작은 설렘을 가져다 주니까요. 연이은 폭염으로 몸과 마음이 쉬이 지치는 요즘인데요. 모두가 안전사고 없이 무탈하게 이번 계절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하루에 선선한 바람이 들게 하는 다양한 기획으로 찾아뵙도록 할게요. 많은 응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정다연 : 시인. 2015년 《현대문학》 당선. 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 산문집 『마지막 산책이라니』 등 집필



[기획] 문장웹진 REWIND

문장웹진 20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선정한 대표 작품들을 다시 읽습니다. 시간을 넘어 되살아난 문학의 순간들과 함께, 그 의미와 감상을 새롭게 나누며 문장웹진의 아카이브를 확장합니다.

"감각 너머에서 켜지고 흐르는 것들"

[커버스토리] 안중경 작가, 최하연의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그 슬픔의 음역」을 읽고

문장웹진 8월호 살펴보기

가짜들의 문학

가짜들의 문학 조대한 이상의 실제 이름은 김해경이고 이상은 그가 만든 가명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름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과 추측들이 존재하는데, 전기적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정도이다. 하나는 동생 김옥희의 증언이다. 경성고공에서 건축을 전공했던 해경은 졸업 후 공사 현장에서 종종 일을 하곤 했다. 당시 일본인 인부들 중 해경을 김 씨가 아닌 이 씨로 착각했던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김 상(金さん)’을 ‘이 상(李さん)’이라고 오인하여 부른 까닭에 해당 이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1) 다른 하나는 친우 구본웅이 선물한 상자와 관련된 설이다. 김해경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구본웅이 그에게 오얏나무로 만든 화구 상자를 선물로 주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해경이 자신의 이름에 ‘이(李)’와 ‘상(箱)’자를 넣었다는 것이다. 실제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서 발견되는 이상이라는 이름과 반평생 지속된 구본웅과의 교류 등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충분히 수긍이 가는 설명이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이후 이상은 김해경을 대신하는 이름이 되어 한국문학사 내에 영원히 박제되었다. 한데 김해경에게 이상 외에도 다양한 여분의 이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그는 이상을 포함하여 비구(比久), 보산(甫山), 하융(河戎), (H)R 등의 가명을 자신의 글에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비구’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은 소설 「지도의 암실」이다. 이 작품이 이상의 창작물일 것으로 추측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작품 속에서 ‘리상’이라는 이름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는 것, 이상이 비구라는 호를 썼다는 친우 구본웅의 증언이 존재한다는 것, 「지도의 암실」에서 나온 표현이 이상의 다른 작품 속에서 유사한 정황을 두고 되풀이된다는 것이다.2) 비구는 이상의 다른 필명임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보산’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은 소설 「휴업과 사정」이다. 이 소설이 이상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휴업과 사정」 이전에 발표된 이상의 소설 두 편은 모두 잡지 『조선』을 통해 공개되었는데, 「휴업과 사정」 역시 앞서 게재된 「지도의 암실」과 1개월의 시차를 두고 『조선』에 발표되었다. 「휴업과 사정」은 한 달 먼저 발표된 「지도의 암실」과 비슷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띄어쓰기와 한자 사용 방식도 이상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휴업과 사정」이 발표될 당시 사용된 삽화가 이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또 다른 잡지에서 똑같이 발견된다는 점3)도, 이 소설이 이상의 작품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라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전집에서 「휴업과 사정」을 이상의 작품에 포함시키고 있고 여러 정황적 근거를 고려해볼 때 보산을 이상의 필명으로 간주하는 것은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하융’이라는 이름은 이상이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 조대한
  • 2025-08-01
새로운 인생

새로운 인생 유진목 거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허리를 숙여 지폐 한 장을 두고 갔다. 그것을 돌려주려 했지만 그는 빠르게 걸어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지폐를 주머니에 넣을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거리를 떠돌던 개가 가까이 다가와 웅크리고 자리를 잡았다. 몇 몇 사람들이 동전이나 지폐를 내려놓고 갔다. 동 틀 무렵 나는 돈을 세어 보았다. 이대로 내일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개와 함께 수퍼마켓에 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조금 샀다. 그러고 그것을 나눠 먹었다. 아침이 되자 분주한 사람들이 돈을 두고 갔다. 돈을 주는 사람보다 주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개와 나는 서로의 목덜미를 베고 잠이 들었다. 삶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삶이 죽음 말고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것처럼. 나는 뒤척이는 개에게 사람의 말로 속삭이고서 다시 잠이 들었다.

  • 유진목
  • 2025-08-01
폴라로이드

폴라로이드 유진목 나는 달린다. 천천히 달려간다. 바라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골목은 못생겼다. 아무렇게나 생긴 곳에서 살아왔다. 거기에는 우산을 쓴 남자가 있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행상이 구름 모양의 콘을 내밀고 있다. 나는 달려간다. 죽지 않고 살아왔다.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사랑만 남고 다른 것들은 천천히 말라 죽을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손에서 녹고 있다. 아이가 운다.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빼앗는다. 거리에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출발하실 분들은 지금 바로 게이트로 모여 주십시오. 담배 한 보루를 사러 갔던 그가 오고 있다. 어제도 그랬다. 그는 담배를 사서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갔다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그것을 사진으로 남긴다. 나는 달려간다. 도시는 못생겼다. 죽지 않고 살아왔다.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나는 사진을 열어 본다. 그가 웃고 없다.

  • 유진목
  • 2025-08-01
불면증

불면증 장혜령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메드 빈 살만 왕자는 거울 도시 프로젝트1)를 발표했다. 홍해를 떠다니는 친환경 산업단지, 인공 호수와 스키장과 골프장이 있는 친환경 관광단지와 친환경 리조트, 그리고 이 모든 꿈을 낱낱이 비춰줄, 총길이 170km 높이 500m의 저탄소 친환경 거울 도시! 당신은 최근, 한국 대통령2)이 사우디 왕자를 찾아가 친환경 꿈 산업 계약에 사인한 일을 알고 있는가3)? 이것은 그저 사우디 왕자 혼자 외롭게 꾸는 꿈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자신도 모르게 꿈의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거울 도시를 밝힐 100% 저탄소 친환경 재생 에너지 생산에 일조하고 있다.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진실을 하나 더 말해 볼까? 이 저탄소 친환경 거울 도시를 위해서는 매일 거울에 부딪혀 살해될 빛과 모래와 바람과 새들과, 그들의 핏방울을 걸레로 닦아 줄 저탄소 친환경 걸레 여자들이 필요하며, 그들의 그림자들이 항의 집회를 하기 위해 지금 우리의 꿈속으로 날아오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 20%가 만성불면증에 시달린다고 보고하는 대한수면연구학회 통계 지표의 진짜 원인이다. 1) ㅇㄱㄹㅇ☞ www.neom.com 2) 구) 대통령. 3) 「韓-사우디 21조 투자 협약‧‧‧ “대규모 방산 협력 논의”」, TV조선, 2023.10.23.

  • 장혜령
  • 2025-08-01
전화영어

전화영어 장혜령 나는 한국의 가사 노동에 대해 멜라니와 이야기한다. 멜라니는 필리핀의 활화산 가까이 살고, 그래서 멜라니의 와이파이는 심장 질환자의 맥박처럼 날뛴다. a.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사 노동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요? b. 작년 한 해, 여성에 의해 제공된 가정 내 근로의 가치는 얼마였습니까? 당신은 아는가? 매일 밤 수천수만 고학력 필리핀 여자들의 와이파이 공유기에 파란불이 켜지고, 우리의 이야기가 전화 회선을 타고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것을. 이것은 가정을 소재지로 둔 거대한 신자유주의 꿈 산업이다. 그러나 그 어떤 뉴스도 필리핀 상공에서 실종된 알파벳들이 한국인의 꿈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보도하지는 않는다. c. 집안일 해 주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는 필리핀의 독재자 부인 신발장에 구두 삼천 켤레가 있다고 들었다. 또, 한국의 독재자 부인이 남편에게 꼬리 친 여자의 자궁을 들어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건 집안일일까, 집 밖 일일까? 독재자는 용서해도 독재자 부인은 용서 못 한다는 이 이야기는 먼 옛날 구파발 시장 아줌마들에게서 우리 엄마에게로 왔고, 자궁이란 단어도 몰랐던 나는 무시무시한 가위 손이 나를 종이처럼 오리는 꿈을 꾼 적이 있다고 멜라니에게 말하지 않는다. d. 집안일을 직접 하실 건가요? 혹은 집안일 해 줄 사람을 고용하시겠습니까? “영부인이 되었을 때, 날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 해서 힘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빛나는 별을 찾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리핀 독재자 부인이 했다는 말이고 그래.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빛나는 별을 찾지. 나의 별은 정말로 필리핀 하늘에 있다고, 나는 오늘도 멜라니에게 말하지 않는다.

  • 장혜령
  • 2025-08-01
투명도

투명도 원수현 공감을 말하면서 슬픔을 버리고 나왔다고 했다 도착할 사람은 비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짜내자 짙게 변하는 바닥 스며들기 위해 안달 난 마음이 사방으로 튀었다 굴절된 마음이 유독 크게 보였다 네가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 유독 까만 눈 빈 의자에 홀로 올라가 앉았니 얼음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녹아야 비로소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 이렇게나 많잖아 너는 눈치를 보며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사라지지 않겠다는 듯 태초부터 물은 언제나 흔적을 남겼음에도 돌을 쪼개도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했으면서 너무하지 않아? 세상 모든 눈물이 다 내 잘못인 것만 같잖아 그럼 뭐라도 된 것 같잖니 눈물로 속죄의 기도를 올리는 동안 네 손에 물기가 어렸다 그건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어쩌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걸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나 물기를 털어 내는 손이 있고 물기를 피하고 싶은 우산이 있었는데 우산은 손으로 쥐어야 했지 어떻게든 서로를 부둥켜안아야 하는 공생의 관계 떨어지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만났지만 다시 곧 스며들게 되는 두 사람이 비 오는 거리를 나서고 있었다

  • 원수현
  • 2025-08-01
등가교환

등가교환 원수현 거울에 비친 마음을 자랑하지 않듯이 초점이 흐려진 물 얼룩이 가득한 세계에서 너는 늘 외롭지 않다고 말하니까 아타카마 사막 옆 아마존같이 서로에게 거칠지 조약돌을 입에 넣었어 평생 녹지 않는 알사탕일 것 같았지 달콤하지는 않지만 입천장이 까지지도 않을 것 그렇게 우린 손을 포개 맹세했다 하나가 되려면 한껏 녹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모르고 타는 것 같지만 타지 않고 녹을 것 같지만 녹지 않는 도무지 붙지 않는 손을 붙잡으며 탈피해도 그대로인 입술을 핥았다 그때 알았던 거지 무거운 추 하나가 입안에서 부식되고 있었다는 걸 한쪽 다리가 개미지옥에 빠졌다는 걸 손끝이 충분히 그을렸다고 했다 사람은 물과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너는 이 건조함을 참을 수 없다고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풍화되지 못한 모래가 따가웠다 끝내 사라지지 않을 까끌함을 남긴 채 돌 씹은 표정을 한 네 앞에서 모래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 원수현
  • 2025-08-01
18

18 황유원 인생은 시발역도 종착역도 사랑이다 라는 람 다스의 말은 욕처럼 들린다 원문은 그렇지 않고 번역문만 그렇다 그리고 인생은 한바탕 욕을 퍼부어 줄 때 더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욕을 먹어야 비로소 웃고 재미있어하며 시발역과 종착역 사이를 미친 듯이 오가는 것 같기도 하고 시발역과 종착역 사이가 몇 광년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이미 하루하루가 종착역에 다다른 것만 같은 기분일 때 시발‧‧‧ 역이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올 때 시발역이 그립다기보다는 가짜 종착역이 아니라 이제는 그만 진짜 종착역에 이르러 그냥 확 내려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고장 난 굴뚝 같을 때 갑자기 람 다스의 저 말이 나를 웃기고 인생은 나를 웃기고 그럼 나는 갑자기 인생의 한복판을 달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사랑 사이 지나간 사랑과 앞으로 도래할 사랑 사이를 신나게 달리며 아니, 실은 나 대신 달려 주는 기차에 한가로이 몸을 실은 채 온몸에 힘을 빼고도 아주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고 있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시발역도 종착역도 사랑이라니! 고개 돌려 바라보는 곳마다 온통 사랑으로 넘쳐나서 인간은 실은 모두가 다른 모두의 연인이라니! (아이 좋아) 너무 좋아서 하마터면 또 욕할 뻔했다

  • 황유원
  • 2025-08-01

쳇 황유원 쳇, 삶 따위 알 게 뭐람 내일 죽어도 돼 아니 지금 이 술집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콱 고꾸라져도‧‧‧ 하고 말하는 것 같다 지금 이 목소리는 쳇, 그딴 소리 집어치워 하고 말해서 듣는 사람의 힘을 빼놓는 게 아니라 땀을 쥔 손에서 과도한 긴장감을 빼앗아 주는 것 같다 허무해지는 대신 이제 좀 살아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주입된 나는 비로소 삶을 살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 같다 바텐더가 따라 준 술처럼 적당한 수위에 이르러 딱 마시기 좋은 삶에서 멈춰 들고 원샷한 다음 탁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 망설임 없는 발길로 걸어가는 것 같다 알 게 뭐람 알 게 뭐람 이 걸음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주든‧‧‧ 집으로 가긴 싫다 그럼 어디로? 쳇, 고작 술집과 클럽과 집이나 오갈 수 있을 뿐인가 산꼭대기 아니면 산 아래‧‧‧ 하지만 삶은 늘 그 사이에만 존재하고 삶이 시시하다고 한탄할 시간에 시시한 삶의 멱살을 붙잡고 마구 뒤흔들어 주면 된다 어이! 농담 하나만 해 봐 집은 술집 빼기 술이고 집 더하기 술은 술집이지 같은 우스갯소리나‧‧‧ 쳇, 시시하군 그러면 시시한 삶 따위 마음껏 비웃어 주면 된다 쯧쯧 혀를 차다가 쳇 베이커의 무너진 가슴 위로 무너져 내리면 된다 그 시절 쳇 베이커는 한물가고 두물 가고 세물 간 인간쓰레기였고 썩은 쓰레기가 풍기는 코를 찌르는 냄새는 이 밤을 극도로 흥분시킨다 코를 찌르지 않는 것들은 도무지 엄두도 낼 수 없는 시큼한 쇠락함의 기운으로 코를 찌르고 가슴을 후벼 파서 밤의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다 그 구멍 속 구름이 잠시 걷히자 환한 달무리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음색으로 퍼지고 구멍 속으로 쳇이 부는 트럼펫 소리가 천천히 스며든다 스며들 때마다 녹이 슨다 그 녹 냄새가 이 밤을 미치게 만들어 그 녹 냄새에 취해 어느덧 다시 어느 술집에 앉아 삶을 대략 포기한 자만이 줄 수 있는 힘을 빨대로 마시듯 천천히 빨아들이며 이만 하루의 문을 쾅, 닫아 버리면 된다

  • 황유원
  • 2025-08-01
오래된 천사

오래된 천사 이수빈 천사의 곁을 떠나고 싶은데 버스에서 잠깐 졸다가 눈을 뜨면 옆자리에 천사가 앉아 있다 천사는 조용히 책을 읽는다 다정한 말이 잔뜩 적힌 슬픈 어른들이 쓴 책을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을 때도 천사는 내 옆구리를 끌어안고 있다 내가 졸거나 딴짓을 할 수 없도록 천사의 몸은 아주 차갑지만 천사는 살아 있다 천사는 그저 죽은 척을 잘할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을 때면 천사는 소리 내서 운다 한번 울음이 터진 천사는 쉽게 그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이 닿을 때면 불에 덴 듯이 깜짝 놀라고 천사는 캐릭터가 그려진 반소매 티셔츠를 좋아한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장화를 신는 걸 좋아한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폭력적인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건물이 부서지고 피가 낭자하고 이름 모를 조연들이 카메라 밖에서 손쉽게 죽는 영화를 좋아만 하고 실제로 그런 것들을 행하진 않는다 나는 천사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랑스러운 천사의 곁을 나는 떠나고 싶은데 내가 밤길을 혼자 걸을 때면 천사가 슬며시 다가와 내 손을 아주 꽉 쥐고 놓지 않는다 그러곤 자기가 목격한 지옥을 천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곳을 내게 낱낱이 말해 준다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을 나는 전부 다 듣는다 천사의 말은 한 번 들으면 잊히지도 않는다

  • 이수빈
  • 2025-08-01
투명한 사랑

투명한 사랑 이수빈 자주 슬프고 가끔 기뻐요 그러면 오래 산다 사는 일에 중독된다 말씀하시는 선생님 청소하느라 바쁘시고 교실이 깨끗해지기 전까진 집에 가지 못하신다고 이런 건 제게 시키셔도 되는데 저도 잘할 수 있는데 잘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가 네게 기대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선생님 나무로 된 교탁을 닦으시고 푸른 방울토마토 열매에 물을 주시고 햇빛이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한다 아이들처럼 가볍게 그러나 선명하게 선생님 친구들이 너무 똑똑해요 친구들은 화를 내도 울어도 예뻐요 저는 친절해도 웃어도 예쁘지 않고요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1) 그런 말을 한 시인이 있단다 너는 시인이 될 테니 괜찮다 선생님께 하고 싶었던 말을 하려고 집에 가지 않고 남은 건데 할 수가 없다 선생님의 사랑이 내게 닿는다 교탁과 창문과 책상과 칠판에 화분과 사물함과 커튼과 바닥에 닿듯이 선생님의 손길이 닿는 곳은 전부 깨끗해지고 나는 맨 앞자리에 덩그러니 앉아 이상한 생각을 한다 선생님은 하나인데 너무 많은 세균과 바이러스와 미생물에 대해 내가 구분할 수 없고 있어도 없는 척하는 것들에 대해 1) 에밀리 디킨슨,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

  • 이수빈
  • 2025-08-01
원죄

원죄 장희수 우리가 마주앉아 나무블록을 당기는 동안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이 먼 옛날에 그랬대 있잖아, 인간의 몸통에서 갈빗대 하나를 뽑아버린 적이 있었대 너는 내 갈비뼈가 네게 닿을 때까지 나를 꽉 끌어안아 준 적 있었지? 규칙은 간단했다 나무로 쌓은 탑에서 나무를 뽑아내는 게임 함께 쌓은 나무탑을 한 사람이 무너트릴 때까지 계속해서 뽑아내는 게임 신은 인간을 사랑한댔어, 사랑으로 빚었다고 그런데 결국에는 내쫓아버렸잖아 내가 말을 하면 네가 말없이 듣는 동안 나무탑에는 송송 구멍이 늘어나고 있다 엑스레이 사진 속에 나타나던 갈비뼈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면 블록 하나를 잡아당기는 속도로 천천히 천천히 생각을 해본다 나의 손으로 너의 손보다 나의 손을 더 자주 붙잡기 시작하던 때를 양손을 맞잡은 모습이 꼭 신에게 기도하는 것 같았는데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건, 사랑하던 사람을 내 손으로 쫓아내야 하는 건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 장희수
  • 2025-08-01
구피에게

구피에게 장희수 시간이 약이라더니 구피는 시간 때문에 낡아가는 것 같았다 오래된 인형처럼 털이 자꾸만 말라갔다 아무 말이나 읊어본다 처방전 늘어놓듯 모르는 게 약이래 그런데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지 그렇다면 구피는 얼마나 더 많은 똥을 누어야 했던 걸까 너의 등은 언제 쓰다듬어도 따듯했는데 구피가 이름을 불러도 뒤돌아보질 않는다 기다리란 말에 곧 잘 기다리던 너를 너무 많이 기다리게 둔 탓인지 그래서 더는 기다리지 않으려는 것인지 죄 없이 조그만 네 앞발을 바라보며 누군가 잘못한 거라면 그건 나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겠는 건 나였으니까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병도 약도 아니었으므로 가죽이 늘어난 목줄만 매만져보다 강아지, 언제나 작은 나의 강아지야 우리는 오랫동안 산책을 하기로 했었잖아, 하고 말했었다.

  • 장희수
  • 2025-08-01
카시오페이아

카시오페이아* 이건청 늦가을 북쪽 하늘 단풍 깊은 나무 한 그루 서 있었으리 잎 다 떨어뜨린 채 혼자 서 있었으리 흰 구름 조금 스쳐 가고 난 거기 거기, 너 서 있었던 자리 250광년 거리 밖 세상, 단풍들 다 져 버리고 난 후 너 있던 빈자리에 희미한 윤곽으로 뜨는 별 카시오페이아라 부르는 * 카시오페이아(Cassiopeia): 북반구 밤하늘에 뜨는 별자리.

  • 이건청
  • 2025-08-01
푸록시마 센터우리

푸록시마 센터우리* 이건청 나 어릴 적 외갓집 마당 멍석 위에 누우면 하늘 그득 펼쳐진 은하의 별들이 강물처럼 출렁이는 것이었는데 하늘에 뜬 별들을 헤아리며 가물가물 잠이 들기도 했던 것이었는데 부쩍부쩍 키 더 크면 가까운 곳의 은하부터 찾으리라 은하를 따 가슴에 품으리라 제일 가까운 은하부터 꼭 찾으리 다짐 다짐했었는데. 나 이제 먼지 세상 헤매 다니다 보니 은하의 기억 다 잃어버린 파파 노인 되었는데 여름밤 하늘에 뜬 4천억 개 우리은하의 별에서 태양계 제일 가까운 곳에 뜬다는 은하의 별 하나를 눈 익혀 알게 되었는데 태양에서 40조(兆)Km 1초에 17km씩 달리는 보이저 우주탐사선으로 7만 년쯤 걸린다는 별 푸록시마 센터우리 나, 언제 피도 살도 뼈도 다 바리고 가비얍게 날아올라 별한테 가면 외갓집 마당의 옛별들이 알아는 볼까 몰라. 알아는 볼까 몰라. * 푸록시마 센터우리(Proxima Centauri): 4천억 개쯤 된다는 우리은하수 은하의 별들 중에서 태양계의 최근접 자리에 뜨는 별의 이름

  • 이건청
  • 2025-08-01
연 날리는 노인

연 날리는 노인 박남준 무릎 수술 끝났다 따닥따각 스물아홉, 서른, 몸에 박아 넣는 스테이플 숫자를 센다 날마다 비명 같은 고통이 잦아드는 입원 20일 아예 다리 공사를 하나 저거 몇 개야 쇠기둥을 박고 침대에 실려 옆자리가 들어왔다 옆은 둬 차례 치매의 배설로 입실 신고식을 이부자리 냄새나게 칠갑하기도 했다 초보운전 휠체어를 타고 잠시 병원의 안마당 중정을 서성이다 들어오니 누구냐고 우리 집에 왜 왔냐는 경계가 날카롭다 노인의 두 손이 허공을 오르내린다 연을 날린단다 206호 병실이 솟구쳤다 내리꽂으며 재주부리는 연의 비행으로 바쁘다 노인의 연은 병실의 하늘 너머 어느 불시착한 꿈을 날고 있을까 잠시 정신이 돌아왔을 것이다 오죽했을까 요양병원 2층에서 뛰어내렸다는, 죽지 못한 노인은 오늘 또 나머지 다리에 투창 세례를 받은 원형 격투장의 패배한 검투사처럼 쇠막대들을 박고 조여 빈 깡통처럼 실려 왔다 격을 잃지 않은 노인의 예전은 간신히 남아 있는 짧고 어눌한 언행으로나마 엿볼 수 있을 뿐 수시로 발동되는 본능은 치욕처럼 취급되고 생떼를 쓰는 아이의 막무가내처럼 거절당하고 있다 존엄사의 방법을 깊이 생각한다 악물며 다짐한다 동생과 함께 대나무를 깎아 연을 만들고 날리던, 더듬을수록 또렷해 오는 기억 밖의 풍경들이 연줄의 궤적을 따라 잊혀진 퍼즐을 맞춘다 “바람아 너는 어딨니 내 연을 날려 줘 저 들 가에 저 들 가에 눈 내리기 전에”* 그때 내 유년을 날아간 연은 어린 새와 작은 나무의 노래가 되었을까 아퍼, 아프다고 노인이 운다 엄마를 부르며 운다 누군들 옆 노인처럼 연 날리고 싶을까 연이 난다 꼬리에 꼬리를 문 사연을 달고 내가 띄운 꼬리연이 난다 그때 연필심에 침을 묻혀 꾹꾹 눌러쓴 뭐였더라 그러니까 꼬리에 단 그 아이의 소원이, 떠올리는 이름들이 자꾸 소환되지 않는다 * 정태춘의 노래 〈들 가운데서〉 중에서

  • 박남준
  • 2025-08-01
조문 받고 사과 대접

조문 받고 사과 대접 박남준 풀밭처럼 자라는가 둬 달 병실에 묵인 몸이 차츰 거울 깊이 숨겨 둔 성질머리며 울화를 호명한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튀어나온다 깨진 마음 밑바닥 들여다보는 것도 다 공부라지만 안 되겠다 부러진 무릎 재활치료를 위해 달방 빌려 들인 침대를 창가로 옮겼다 하소연하고 싶었다 동박새도 올까 창밖 동백나무를 청해 그 아래 과일 부스러기 밥상을 차렸다 새가 왔다 새들의 문안이라 여기다가 저 조문(鳥問) 혹시 조롱하는 조문(嘲問)인가 주검의 조문(弔問)인가 못난 마음 꾸짖으려 찾아오는 동박새가 딱새가 검은이마직박구리의 행렬이 머리 숙이게 하는 아침 날 일깨우는 스승들께 감사의 사과 한 쪽 대접해야겠다

  • 박남준
  • 2025-08-01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그 슬픔의 음역

[문장웹진 REWIND]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그 슬픔의 음역 -강성은의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문장 웹진》 2008년 6월호) 최하연(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떠오른 첫 문장은 이랬다. 이 첫 문장의 그 앞 문장은 없으므로, 돌아갈 곳이 없으니, 불능의 세계인데, 나는 없는 출발점으로 자꾸 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나는 몇 덩어리의 문장을 쓴 뒤에, 원래의 첫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는지도 모른다. 쓰던 글을 재차 읽어 가며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면, 그땐 첫 문장을 또 고치게 될까. 그렇게 고친 문장이 사실 저 앞의 문장이라면―아니 고친 뒤에 읽어 보니 아까 것이 나은 듯싶어 고민 끝에, 원래대로 돌려놓은 문장이라면―출발점 없는 출발점은 글 안에 있고, 여전히 불능한 첫 문장은 불능을 모른 채 남게 될 것이다. 2008년 5월호 문장 웹진엔 강성은의 시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이 실려 있다. 이 글의 진짜 출발점은 사실 여기이다.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 구름의 얼룩진 편지를 읽은 어떤 이들은 울음을 멈추고 검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도시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녹색의 박쥐 떼가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창백한 입술을 잃은 자들은 곧 두 손과 머리털을 잃고 두 눈알과 심장을 잃었지요 점점 희미해져 우리는 우리를 잃었지요 당신과 나의 비밀 이야기는 입속에서 입속으로 공기와 밤의 중얼거림을 통과하고 얼룩진 편지는 얼룩 고양이가 물고 밤의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 빗방울은 때로 격렬하게 내립니다 한 방울 뒤에는 수천만 우주의 모든 물방울들이 뾰족하고 오래된 첨탑 위의 편지는 전해 오는 이야기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 갑니다 우리는 첨탑 위로 답장을 보내는 법을 모르고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 전문 회고가 실패의 알리바이를 지워 내듯, 전망이 이 지울 수 없는 실패의 유예이듯, 지속 가능한 내일에 대한 일반의 믿음 또한 불능을 모르는 불능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언제나 힘이 셌다. 우리는 그것을 산문의 세계로 불렀고, 시는 산문의 세계로부터 이격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가 그곳에서 늘 첫 문장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시작한 시는 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산문의 세계로 붙잡혀 돌아오는 “내일의 악몽”이다. 이 정황에는 하나의 커다란 허방이 있다. 누가 누의 내일이 될 수 있는가. 혹은 되어야만 하는가. 시인은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발견한다. 그런데 빙점은 과연 물의 내일일까, 얼음

  • 최하연
  • 2025-08-01
보호 구역

보호 구역 김근수 애랑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애랑의 몸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아서 주검을 수습하지 못했다. 수직으로 바다를 막고 선 해안 단애의 절벽에서 애랑이 몸을 놓아 버릴 때, 덕배는 한달음에 마당바위로 달려 내려갔다. 갈매기들이 날아오르며 떼를 지어 울었다. 바다 어디에도 애랑의 모습은 없었고 허연 파도가 마당바위를 다그치고 있었다. 덕배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소용돌이에 휘말려 실신했다. 마당바위 위에서 덕배가 눈을 떴을 때, 깨져 버리는 하늘을 보았다. 덕배가 종적을 감추던 날, 일본 군인 두 명이 돌에 맞고 칼에 찔려서 죽었고, 헌병 분소가 불탔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끄지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일본 군인이 몰려와 군홧발로 밟는데도 누구도 덕배의 행방을 말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몰라서 말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밟혔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날들 앞에서 애랑은 죽었고 덕배는 사라졌다. 애랑이 몸을 던졌던 절벽 위에 도라지 두 뿌리가 자라서 긴 세월 꽃을 피워 내었다. G사의 발전소 건설 부지는 B읍 항구에서 해안 단애 넘어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의 방파제 안쪽을 매립해서 들어서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수도권의 장기 전력 수요 조사와 전망에 근거해서 발전소 추가 건설 필요성을 확인했다. 정부는 발전소 입지 최적지에 대한 발표와 철회를 거듭하다가 결국 B읍의 북쪽 해안 마을을 최종 선정지로 확정 발표했다. 바다가 깊이 밀고 들어간 마을은 새끼손톱 모양의 백사장을 거느리고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산맥의 능선을 배후로 취락하고 있었는데 인근 마을에 비해 거주 가구 수가 적고 어장의 규모와 어장주의 연대가 비교적 미미하다는 현장 실사팀 보고서를 바탕으로 발전소 건설 부지로 선정되었다. 해병전우회, 읍민발전대책위원회, YMCA, 환경단체는 즉각 발전소 건설 백지화를 위한 비상 대책위를 구성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발전소 건설 절대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정부 발표 이튿날부터 B읍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변에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청정해역 동해안에 발전소가 웬 말이냐 -주민 의견 개무시한 발전소는 전면 무효 도로변을 쓸면서 마파람이 불어오면 현수막이 팽팽하게 부풀면서 B읍의 허공은 시끌벅적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년 전이었다. 마을 이주 계획이 확정되었다. G발전소는 마을 부지 매입과 해안 매립권을 확보했다. 이주 계획의 골자는 23개 취락 가구를 인근에 새로 조성할 부지로 이주시키는 것이며 새 부지는 G발전소가 구입하여 23개 가구에 무상 분배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읍내에서 서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자락을 허물고 개토하여 새 마을을 조성한다는 말이었다. 손무근은 마을 주민 대표단과 회동을 가졌고 한 가구를 제외한 스물두 가구 세대주의 인감 날인을 받은 보상합의서를 건네받았다. 그동안 십수 차례 주민 설명회를 가졌고 보상 문제와 향후 이주 계획을 포함하여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분기에 한 번꼴로 마을회관과 G발전사 현장 임시 가설 사무소,

  • 김근수
  • 2025-08-01
이상한 고리

이상한 고리 김덕희 * 나. 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불빛, 등불, 전기, 스위치, 조명··· 단어들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천장 중앙에서 쨍한 빛을 내고 있는 저것의 이름은 등이다. 천장을 비롯해 네 벽과 바닥은 같은 색이다. 빛의 모든 파장이 모여 있는 색, 색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아직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색이다. 공기 중에는 어떤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고 있다. 역시 냄새라는 것만 알고 냄새의 이름은 모른다. 감각을 조금 더 예민하게 세워 본다. 벽을 뚫고 들어와 지나가는 전파들이 복잡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구성의 파동들인데 파장과 진폭이 뒤섞여 있으니 복잡해 보인다. 삼원색, 사이언, 마젠타, 옐로우, 흰색, 백색, 화이트, 소독, 클로드헥시딘, 에틸알코올, 포르말린, 차아염소산나트륨, 초저주파, 초장파, 초단파, 극초단파···. 분출하듯 솟아나는 정보들이 모두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이름과 개념들 속에 아직 나에 관한 정보는 없다. 나는 바닥에 고정된 침상 위에 반바지만 입은 채 누워 있고 내 몸 이곳저곳에는 유선 센서들이 붙어 있다. 나에게서 어떤 정보들을 빼내려 한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다. 나는 일어나 앉은 다음 내 이마와 관자놀이, 목과 가슴에 붙어 있는 것들을 떼어 연결된 선과 함께 침상 빈 곳에 아무렇게나 치워 놓는다. 캡슐. 눈앞에 환영 하나가 머문다. 금속성 재질의 커다란 알이다. 환영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떠올리려 애써 봐도 은빛 달걀 모양의 잔상만 허공에 떠돌 뿐이다. 갑자기 왼쪽 벽 전체가 투명해지는 바람에 캡슐은 잠시 잊기로 한다. 나와 아주 닮은 존재들이 벽 저편에서 나를 향해 앉아 있다. 세 줄짜리 계단식 공간에 다섯 명씩 배치되어 있고 저마다 자기 앞의 기판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확인하는 중이다. 저 멀리 뒤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누구랄 것 없이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이 키 큰 여자에게는 맵시 있게 보인다. 여자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긴 머리카락 안쪽으로 넣어 귀에 가져다 댄다. 통신장치로 짐작되어 재빨리 신호를 가로챈다. 예상한 대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아직 나는 저들의 언어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학습, 강화학습. 나의 내부에 있는 무엇이 나를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껍데기일 뿐이고 이 껍데기를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것과 마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조차 그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무엇에게도 그 무엇이 있을 테고··&mi

  • 김덕희
  • 2025-08-01
목소리들

목소리들 조시현 언제나 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 열렸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처럼. 무방비하게 책을 읽던 주하는 일순 얼어붙었다. 어디에도 남지 않을 목소리를 마음껏 낭비하는 그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있던 차였다. 신발장 옆 화장실, 왼쪽에 침대, 오른쪽에 주방이 전부인 한 뼘짜리 원룸은 현관에 서면 한눈에 전부 들어왔다. 계약 내용은 27일 하루를 온전히 비워 주는 것. 지금껏 한 번도 어긴 적 없었기에 주하는 대처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섞인 질책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검지로 뺨을 긁었다. “어,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려고 온 건 아니고. 매달 27일마다 뭘 하는 거냐고, 여자 혼자 종일 웃었다 울었다 별짓을 다 한다고 하도 그래서. 여기 방음 잘 안되거든요. 방 빌려드리는 거야 돈도 받고 어렵진 않은데 혹시나 불법적인 일은 안 되니까 확인차 온 거예요.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쫓겨나면 곤란하거든요.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저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하지만 남자의 눈은 안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미처 감추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주하가 가져온 거라곤 책 두 권과 머그컵, 도라지청이 전부였다. 남자가 거기서 뭔가를 알아챌 것만 같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야 불법적인 일이 맞았으니까. 주하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별안간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구재정. 인공지능융합대학원. 학번까지. 주하는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 멀끔한 얼굴. 무엇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있는 사람. “다른 뜻 있는 거 아니고요. 저 정말 여기 살거든요. 이 이름으로 입금 주셨잖아요.” 이름은 맞지만 학생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단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더 맞겠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인공지능융합대학원이었다니. 침묵이 이어지자 눈을 굴리던 남자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음, 일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저는 갈게요. 계약 파기하는 거 아니죠?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정말 조심해야 하거든요. 아르바이트를 또 할 수는 없어서요.” 횡설수설하던 구재정은 머리를 박박 긁더니 재빨리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건 맞지만 그걸 보니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위아래층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방음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층에 세 개여야 할 집에 가벽을 세워 열한 개로 늘려 놨으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몰랐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 번 깨어진 감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하는 다시 차를 끓였다. 굳이 도라지차. 이렇게 된 와중에도 목을 관리하고 있다니. 멍청하기는. 이제 연극을 보

  • 조시현
  • 2025-08-01
연변에서 만나 샤넬 백을 줬을 뿐

연변에서 만나 샤넬 백을 줬을 뿐 윤보인 “뭐어? 연변이라고? 연차를 내고 거기를 가요?” 며칠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회사 대표에게 말했을 때, 옆에 있던 조 실장이 끼어들었다. “갈 수도 있지 않겠어?” “거길 왜 가요?” “으음.” 굳이 자세한 얘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조 실장은 팔짱을 끼고 나에게 다가와서 다짜고짜 캐물었다. 내가 별말이 없자, 회사 대표인 자기 오빠를 쳐다보면서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거기 가 본 적은 없는데, 조선족 많지? 또 뭐 있어?” “백두산 있잖아요.” 고작 동갑인 놈에게 머리를 조아려 가며 매달 월급을 챙긴 지 벌써 2년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입사 초반에는 회사에서 왕따를 당했으며, 모욕에 무시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걸 겪었다. 원래 회사 생활이 개 같은 데다 남의 돈 받아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나 말고도 이런 일을 겪는 인간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알겠어. 연차 써.” 대표가 냉담하게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이거 얼마 만에 쉬는 거냐? 주말 끼고 이틀 연차 내면 총 4일을 쉬는 건데, 연변에 가서 종희도 만나고 양꼬치도 먹고 술도 마셔야지. 그래 봤자 먹고 노는 일뿐이었지만, 하필 종희 년이 중국에서 그것도 연변에서 조선족 남자와 결혼해서 산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오빠는 그야말로 개판인 인생을 살았는데, 여동생이라도 타국에서 잘 지낸다면 멀리서 박수를 쳐 줄 수 있었다. 내 나이 마흔이 넘었고, 그동안 가까운 인간들에게 배신을 당했고 이제 정신 좀 차리고 회사를 다니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창밖에 있는 개 두 마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논현동 단독주택이 짱이야. 저 집구석은 얼마나 하려나?” 회사 맞은편 주택은 세월 가는 것도 모른 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잘 만나서 그래. 부모 말고 그 위 세대.”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나 오대길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얼마나 잘 만났는지, 돈도 많고 땅도 많아서 이거 친일파 활동을 했나, 남몰래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런 활동을 했어도 남들만 모르면 되지, 그렇게 중얼거렸는데 과거 할아버지가 어울렸던 사람들이 은행장, 정치인 등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서울의 중심가 뚝섬이며 성수, 왕십리 지역의 땅을 사들였고 할머니와 본인의 외아들, 그러니까 내 아버지에게 많은 땅을 증여했고 그 덕에 나까지 웃음꽃이 피게 되었다. 돈이라는 게 참 좋은 것이어서 어릴 적부터 걱정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너 초장 끗발 개끗발이

  • 윤보인
  • 2025-08-01
스물의 체스

[에세이] 스물의 체스 유지혜 생애 처음 체스를 배웠다. 체스는 내 왕을 사수하면서 상대의 왕을 공격하는 전략 게임이다. 내 편에는 총 16개의 기물이 주어진다. 앞줄에는 폰(pawn)이 줄지어 서 있고, 뒷줄에는 왕, 퀸 등 다양한 말들이 대칭을 이루며 자리하며 각 기물마다 고유한 움직임이 있다. 킹(king)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움직임이 적다. 생존이 최우선 인지라 보통 다른 말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리를 보존한다. 반면 작은 몸집으로 제일 많이 싸우는 건 앞줄의 작은 말 폰(pawn)이다. 그러나 나는 폰의 쓸모를 무시했다. 한 칸씩만 움직이는 폰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비숍(bishop)으로 판을 압도하고 싶었고, L자로 움직이는 나이트(knight)로는 상대가 시야에서 놓친 구석을 공격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근사하고도 빨리 이기고 싶었다. 결국 큰 말을 무리하게 내세우다 졌다. 그때 게임을 같이 두던 상대가 내게 말했다. 폰, 이 쫄병을 쭉쭉 내보내는 것도 중요해. 하찮아 보여도 얘가 뭘 지켜줄지 몰라. 체스판처럼 인생에도 전략과 기세, 무엇보다 여러 번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너무 빨리 망하지 말라고, 인생에는 젊음이라는 폰이 주어지는 줄도 모른다. 폰처럼 젊은 날은 가치는 적은 대신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기껏해야 한두 걸음 내딛는 시기. 젊음은 헐값에 좋은 것을 쟁취할지도 모를 기회이다. 하지만 스물엔 그 누구도 전지적 작가 시점에 있지 않다. 앞수를 읽는 노련함은 없다. 가장 작은 몸집으로 큰 세상을 향해 나가는 폰의 시점일 뿐이다. 스스로의 위치조차 가까스로 가늠할 수 있을 뿐. 좀 더 가면 헐값에 잡아먹힐 것 같다는 불안이 몰려올 수도 있다. 더 대범했어도 되었다는 건 순전히 그 시기를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갓 성인이 된 2011년, 나에게도 스물이라는 핑계로 얼떨떨한 용기를 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도, 술을 마시지도, 첫 애인을 사귀지도, 여행을 가지도 않았다. 대신 압구정에 있는 모델 학원을 등록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인 내게 모델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지망했던 대학에 불합격한 나에게는 아득할 만큼 시간이 많았다. 뉴코아 아울렛에서 5만원을 주고 산 빨강색 게스 구두를 신고 몸매를 드러내는 옷차림의 나는 한쪽 벽 전면이 거울인 연습실에서 워킹을 연습했다. 우리 기수에는 타고난 것으로 먹고 살고자 하지만 그렇다 할 독기는 보이지 않는 이십 대 초반 언저리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자신감이 충만한 건지 없는 건지 분간하지 어려운, 겉멋이 잔뜩 들었지만 그로 인해 활기찬 사람들이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몇몇 친구들과 나는 금세 친해졌다. 그들은 당시 유행했던 발렌시아가 가방을 어디서 제일 싸게 구할 수 있는지를,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립스틱의 품명을, 이마 보톡스의 효과를 알았다. 그들은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 이들이었으나 나는 아니었다. 다들 택시를 타고

  • 유지혜
  • 2025-08-01
날마다 한 걸음

[에세이] 날마다 한 걸음 고수리 상경했던 날을 기억한다.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강남터미널에 도착했다. 대합실을 나서자마자 길을 잃었다. 인파 속에 덩그러니 나 혼자. 서울 한복판에 뚝 떨궈진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의 첫인상은 삭막한 회빛, 그리고 몹시 추웠다. 눈이 푹푹 내리던 강원도는 사방이 희고도 따뜻했는데. 나는 목도리를 둘둘 고쳐 매고 한 걸음 내디뎠다. 서울은 복잡하구나. 시끄럽구나. 무심하구나. 아무도 웃지 않는구나. 애꿎은 지하상가를 헤매다 얽히고설킨 출구를 빙빙 돌다가 겨우 개찰구를 찾아 전철표를 샀다. 전철을 타 보는 것도 혼자선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전철 손잡이를 붙들고 서서 노선도를 올려다보았다. 풀빛으로 주욱 이어진 선을 따라 도착할 역사는 ‘온수(溫水)’. 따뜻한 물이라는 이름이 그나마 위안처럼 스몄다. 온수역에 내려 자취방을 찾아갔다. 대로변 가로 이어진 인도를 한참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새겨진 해태상을 맞닥뜨렸을 때, 기이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돌아보니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특별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바로 맞은편에는 ‘어서 오십시오 경기도 부천시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나는 경계에 서 있었다. 아니, 이 기이한 기분의 실체는 기시감일지도. 불안하고 난처한 마음 한구석에 익숙하고도 지긋한 체념이 몰려왔다. 나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서울과 부천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한 걸음 넘어섰다. 거기에 내가 살 방이 있었다. 내 사정 역시 고학생들의 유구한 상경의 역사와 다를 바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집세는 감당할 수 없으니, 학교 근처에 가장 싼 방을 수소문해 들어갔다. 상경해 처음으로 얻은 방은 월세 18만 원짜리 남녀공용 고시원 방이었다. 한낮에도 침침한 복도를 걸어가 방문을 더듬어 열 때마다, 엄마가 이 방을 안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형광등부터 켰다. 창문 없는 길쭉한 방. 방문을 걸어 잠그고 웅크려 누우면 어둡고 눅눅한 관 속에 눕는 기분이었다. 얇은 합판을 덧대어 가른 방은 방음이 되지 않았고, 간간이 들리는 기침 소리와 통화 소리, 텔레비전 소리에 사람들이 나란히 누워 살아 있구나 실감했다. 아침마다 등교하는 대학교는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 있었다. 밤마다 돌아가는 고시원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에 있었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3년을 유학하고, 졸업 후에 잠시 강원도 삼척시에서 지냈다. 삼척은 엄마의 고향이자 내가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도시지만, 거기도 선뜻 내 고향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려웠다. 나는 오래전부터 떠돌며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함구해야 할 사정이란 게 삶을 짓누를수록 나는 가벼워져야 했다. 짐 하나만 꾸리면 잠시나마 살아갈 사람처럼, 짐 하나만 꾸리면 언제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갑작스럽고 비밀스럽게

  • 고수리
  • 2025-08-01
담배와 새치

[에세이] 담배와 새치 서솔 S#1. 아파트 앞의 오피스텔 화단 멍하게 앉아 있던 여자. 무언가 떠오른 듯 가방을 뒤진다. 가방 앞주머니에서 빨간색 말보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낸다. 여자는 머뭇거리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손에 쥐어 보지만 불을 붙일 용기는 없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여자는 담배를 구겨 가방에 넣는다. 부러진 담배에서 재가 쏟아진다. 스무 살, 나는 이모 집에 얹혀살았다.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받았던 가장 큰 충격은 발바닥을 뜨겁게 데우는 화장실 대리석의 온기였다. 화장실 바닥에 보일러가 들어올 수 있구나. 그것은 ‘폐업’ 종이가 붙어 있는 단골 카페를 마주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는 사건이었다. 방배동의 방 네 개짜리 브랜드 아파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속까지 가닿는 훈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내 마음에는 야멸찬 비바람만이 몰아쳤다. 흔쾌히 방을 내준 이모가 지금 듣는다면 뒤통수가 얼얼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무렵 나는 어떻게든 집에 늦게 들어가기 위해 아파트 주변을 배회했다. 야심한 시각에 일어나는 술자리에 굳이 참석한다든지, 카페베네에 앉아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시시한 문자를 보내곤 했다. 이모와 이모부가 잠든 사이 들어가는 것이 하루를 끝마치는 일과였다. ‘이모에게 빚을 지고 있다’라는 빚쟁이의 감각은 해가 지면 더욱 선명해졌다. 선명해질수록 무거워지는 감각은 나를 언제나 주눅 들게 했다. 등록금이 너무 비싼 예술대학에 입학한 것은, 아무래도 그 시절 나에게 큰 짐이었다. 아직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졸업하지 않은 시점. 먼저 미대에 진학한 언니를 따라 덩달아 영화과에 진학한 나는 나의 선택이 우리 집의 기둥을 뽑아 먹을까 봐 입학 전부터 전전긍긍했다. 그러면 조금 눈을 낮춰 장학금을 받은 학교에 진학했어도 됐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선뜻 욕심과 타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타협보다는 욕망을 선택한 나는, 그때부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수능이 끝난 친구들이 하릴없이 시간을 죽일 때, 엄마 친구 딸들의 집을 전전하며 영어 과외를 했다. 그렇게 ’입학하면서 용돈을 받지 않은 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이모 집으로 들어갔다. 내방역 3번 출구에서 나와 언덕에 있던 아파트로 올라가던 길. 하늘에 보이지 않는 별을 억지로 찾던 의미 없는 행동은 발걸음을 늦추기에 제격이었다. 서울의 밤은 언제나 칠흑같았다. 이렇게 진행되는 에세이는 무릇, 그 시절 내가 겪었던 슬픈 사연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에세이 주제로 전달받은 ‘스무 살’ 키워드에서 떠올랐던 건, ‘스무 살의 내가 지녔던 비대한 자아’뿐이었다. 당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자아 중, 내가 가장 중요하게 지녔던 것은 ‘나 때문에 엄마 아빠가 너무 고생할 것‘이라는 명제였다. 거기서 오는 자기연민과 우울에는 세상의 중심이 나의 우울함

  • 서솔
  • 2025-08-01
‘최진실’이라는 아이콘 1

‘최진실’이라는 아이콘 1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한나 1. 1990년대, ‘깜찍한’ 등장 1990년대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잡지나 신문을 뒤적이다 보면 꼭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작은 인터뷰든, 신문 한 면을 다 차지하는 대기업의 광고든 ‘최진실’, 그녀의 이름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이에 따라 몇 계간지에선 ‘대중성’의 확산과 견제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하던 이 무렵, ‘톱스타’ 최진실은 그 진중한 분위기와는 유리된 곳에서 한껏 포즈를 취한다. 대개 컬러로 인쇄된 그녀의 그 포즈를 바라보는 일은, 처음엔 호기심이었다가, 나중에는 한 번은 살펴보아야 할 책무로 남았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최진실을 CF 스타로서 발돋움하게 해 준 대사는 나도 어릴 적 들어 본 적이 있다. 90년대로 진입하기 직전, 통통 튀는 새댁의 모습을 한 그녀는 단숨에 “최진실 선풍”1)을 불러온다. 인기의 비결이 “누이 같고 딸같이 부담 없는 분위기를 귀엽게 보아준 결과”2)라고 일컬어지듯 최진실은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부담 없고 솔직하여 친근감 있는”3) 이미지로 만인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90년대 문화의 상징적 존재”인 “우리 시대의 스타”4), “구김살 없이 상큼한”5) 그녀는 일찍이 CF로 빚어 낸 외적인 이미지 외에도 한 PD의 발언을 보태면 “좋은 집안, 좋은 대학이 아니라도 건강하게, 제멋에 살아갈 수 있는 본보기를 마련한 인물”6)이었기에 선호된 것으로 보인다. 최진실이 답한 그 수많은 인터뷰를 따라 읽다 보면 그녀가 X세대, 오렌지족의 자유롭고 방탕한 생활과는 동떨어져 착실히 살아온 인물임이 재차 강조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섣불리 투기에도 나서지 않고 온 수입을 차곡차곡 저금하고 있는 모범적 인물로서 심지어 당시 주택은행장이었던 김재기와의 만남까지 추진되곤 한다.7) 특히 “깜찍함으로 대표되는 우리 시대 스타”8)와 같이, ‘깜찍하다’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최진실의 옆에 꼭 붙어 있다. 아마 탤런트 중에서도 작은 그녀의 체구와 귀여운 언행들로 인해 불러들여졌을 이 말은, 동시에 최진실이라는 아이콘이 ‘깜찍함’을 경유하여 관통하고 있던 것은 과연 90년대의 무엇이었을까? 라는 물음을 던지게도 한다. 이를 찾기 위해 이 자리에서는 최진실이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영화고 최진실 그대로 미영이 역을 기쁘고 편안하게 할 수 있었던 영화”라 밝힌, “최진실의 매력과 재능이 제 물을 만난 시네마 스페이스”9)였다고 일컬어지는 〈나의 사랑 나의

  • 이한나
  • 2025-08-01
왜 고통은 증언되어야 하는가

왜 고통은 증언되어야 하는가 ―고통과 쟁론 입론 2 박동억 1. 고통의 서열 몸에 남은 물의 기억을 다 태우는 당신과 당신 물의 기억이 다 지는 것을 들여다보는 나는 어쩔 것인가 허수경, 시 「불을 들여다보다」 중에서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아니 나 자신이 나의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게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손쉽게 체념한다. 우선 자기 몫의 삶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지쳐 있기 때문이고, 그다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기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신중함 때문이다.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은 공감의 여력을 기르기에 충분치 않고, 타인의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거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멀게 느껴진다. 더욱이 내게 뚜렷한 것은 오직 자신의 고통뿐이어서 그것을 벗어나 생각하는 일은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일단 공감할 여력을 갖춘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말기암 환자에게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이웃들을 심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또한 하루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에게 동물의 고통을 숙고해달라고 요청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타자의 고통을 배려할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고통에는 서열이 있다. 누구에게든 나의 고통은 가장 긴급한 것이고,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의 고통은 중요한 것이며, 그 밖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서열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우리의 공감 능력은 ‘나’를 기준으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비 카렐이 『아픔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조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눈앞의 고통받는 자를 연민하지만 그의 고통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림프관평활근증(Lymphangioleiomyomatosis, LAM)이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은 것은 서른다섯 살의 일이었다.1) 그녀는 진단받은 지 3개월 만에 폐 기능의 10년 치를 상실했다. 순식간에 삶이 변화했다. 한 층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각오가 필요했고,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꺼낼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견뎌야 했으며, 잠들 때마다 언제든지 숨이 멎을 수 있다는 공포에 전화기를 머리맡에 두게 되었다. 누구도 그녀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병원에 가면 의사는 그녀의 ‘사례’를 진단할 뿐 그녀의 ‘고통’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이 느끼는 아픔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 사람들은 마치 ‘도대체 누가 의사야’하고 묻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구들은 그녀의 연락을 불편해했다.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다가도 그녀의 비참한 하루하루를 설명하려고 하면 아예 연락을 끊어 버리기도 했다. 해비 카렐에게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녀를 연민하는 시선이었다. 자신을 가엽게 쳐다보는 눈빛만으로도 그녀가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고 끔찍한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 박동억
  • 2025-08-01
영혼이 파기된 자리에 남은 것

영혼이 파기된 자리에 남은 것 -김초엽과 우다영의 SF를 읽는 한 방법 정의정 1. 소프트 SF, ‘하드’하게 읽기 일론 머스크의 우주 탐사 기업 ‘SpaceX’는 화성을 식민지화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형 우주선 ‘스타십’을 여러 차례 하늘로 쏘아 올렸다. 올해 1월에는 스타십의 일곱 번째 시험비행이 어김없이 실패했는데, 그때 공중에서 분해된 우주선의 잔해물들이 마치 유성우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영상에 담겨 각종 SNS로 퍼져나갔다.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X(구 트위터)에 그 영상을 업로드하며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재미는 보장된다!(Success is uncertain, but entertainment is guaranteed!)”라고 썼다. 이에 대한 주류적인 반응은 긍정에 가깝다. 혹자는 무료로 불꽃놀이를 봤다며 좋아했고, 혹자는 실패에 담긴 아름다움의 역설을 발견하는 식이었다.1) 지난 5월 9차 시험비행에 실패한 우주선의 잔해가 멕시코 땅에서 발견된 사태를 비롯하여 일론 머스크가 전 지구적으로 끼치는 해악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반응들은 감상적이기만 하다. 물론 지금도 어딘가에서 꾸준한 환경 운동가들은 그의 우주 탐사 계획에 비판을 제기하는 중일 터이다. 과학기술을 둘러싸고 생성되는 담론들의 충돌은 때로 우습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어쩌면 이는 라투르적인 의미에서 번역이 만들어 낸 혼합체, 정화된 개념을 넘나들고 교차하는 난맥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2) 경계를 가로지르는 혼합체 중 하나는 과학소설, SF다. SF는 더 이상 문학(literature fiction)과 구별되는 장르픽션(jenre fiction)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매니아보다 더 넓은 독자층에게 읽히며 한국문학 장의 한 경향이 되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스티븐 샤비로는 『탈인지』에서 과학소설이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의 경계까지 탐색할 수 있도록 하며, 인간의 지각 너머에 있는 감수성의 형태들에 간접적으로나마 접근할 수 있게 해줌을 강조한다. SF야말로 인간중심주의적 철학을 넘어서는 미학이라는 것이다.3) 그러나 한국에서 발표된 SF가 과연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설득력과 일관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SF의 장르 문법을 충실히 계승하지 않은 텍스트의 경우, 근미래에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과학적 사실과 기술에 기반하기보다 인문학적 가치와 사유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엄밀한 과학소설인 ‘하드 SF’라고 볼 수 없는 (멸칭의 뉘앙스가 있는) ‘소프트 SF’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다시 샤비로를 참조해서 말하자면, 과학소설의 의의는 직접 체험할 수 없는 개체-존재자의 경험을 유추해 보고 인간종의 우월성과 자기동일성에 대한 환상적 관점을 뒤바꾸는 데에 있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최근 한국의 단편 SF들을 알레고리로만 취급하는 것

  • 정의정
  • 2025-08-01
대만 감성(臺灣感性) 속 믿을 구석을 찾아서

[문장서포터즈] 대만 감성(臺灣感性) 속 믿을 구석을 찾아서 ―2025 서울국제도서전 방문기- 문장서포터즈 2기 소희 누구에게나 믿을 구석이 있다. 힘들 때 생각나는 것, 기대고 의지하게 되는 것 말이다. 나에게는 김연수 작가의 책 속 문장이나 영화, 가족 등이 그렇다.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속에서 느끼는 유대감은 나의 가장 큰 믿을 구석이다. ‘믿을 구석’은 2025 서울국제도서전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주빈관이 대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최근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믿을 구석 중 하나였던 영화는 지난 몇 년간 내가 줄곧 빠져 있는 것이었다. 작년 여름 에드워드 양 감독의 〈독립시대〉를 통해 처음 대만 영화를 본 후 나는 대만이라는 나라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됐다. 설렘과 호기심으로 첫 대만 여행을 앞둔 전날 밤 비상계엄이 선포됐었다. 그때의 나는 대만에 있으면서도 실시간으로 뉴스를 보며 우리나라의 상황을 지켜봤다. 민주주의와 독립의 개념 속에서 대만과 조금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후 대만은 더 궁금한 곳이 되었다. 영화를 통해 짐작했던 대만의 역사, 대만의 문학이 독자와 유대하고 연결되는 방식들이 말이다. 그러한 마음들을 가지고 2025 서울국제도서전을 찾았다. 대만 감성(臺灣感性) 속 믿을 구석을 찾아서. 방문한 주빈관은 크고, 전시를 보는 사람도 많았다. ‘대만 감성(臺灣感性)’이라는 주제 속에서 문화, 생활 풍격, 음식과 오락 등 6가지의 문화적 측면을 조명해 전시가 꾸려져 있었다. 책의 수가 무려 500여 권이라는 소개 글을 보고서는 규모에 놀라기도 했다. 또 천쉐 등 14명의 작가, 6명의 그림책 작가 그리고 3명의 만화가가 참여하는 강연과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었다. 나는 이날 등구운 작가와 우샤오러 작가의 강연을 듣기로 했다. 다양한 프로그램과 강연, 전시의 규모 때문인지 몰라도 대만 현지에서 도서전을 방문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마치 작은 대만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뻔한 대답일지라도··· 창작과 읽기가 믿을 구석” 등구운 작가의 강연은 첫 장편 소설인 책 『조연 여배우』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등구운 작가는 배우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이 있는 작가였다. 한국어를 전공으로 공부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간 유학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배우로 연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대학로에서 본 연극에 매력을 느껴서였다고 말했다. 책 『조연 여배우』에는 일본 여배우와 닮았다는 이유로 주목받으며 연기를 시작하는 주인공 ‘황청’이 등장한다. 배우로서 연기하는 삶 그리고 자신의 인생 등 여러 관계나 상황 속에서 언제나 조연으로 비치는 황청의 삶 전반이 책 속에서 그려진다. 등구운 작가는 “가상의 빛, 거짓의 희망을 굳이 전달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 소희
  • 2025-08-01
도슨트는 문학이 될 수 있을까

[문장서포터즈] 도슨트는 문학이 될 수 있을까 문장서포터즈 2기 김소리 우리는 해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각국의 작품을 언어로 재해석하여 비로소 ‘읽을’ 수 있게 된다. 상상해 보자. 전시회장의 수많은 작품들은 비언어적으로 표현되지만, 도슨트를 통해 비로소 언어적으로 완성된다. 이처럼 다양한 작품을 언어로 재해석하는 연결고리 속에서, 문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흐름을 짚기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우리를 바꾸는 다섯 가지 대화〉 전시회를 관람하고 왔다. 전시는 총 다섯 가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슨트에 따르면 이 공간은 “‘언어적 차이’가 만들어 내는 틈이 서로 다름을 이해하는 채움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발견하기 위한 곳이다. 다른 체험형 전시와 달리 언어는 만질 수도 없다. 재미있는 ‘놀이‘ 같은 체험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상상과 달리 언어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언어를 만질 수 없다는 인식에 스스로 가두고 있던 것이 아닐까? 여기, 언어를 직접 보고 만지고 만들 수 있는 갖가지 체험의 현장이 존재한다. 같은 작품이더라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바는 다르다. 〈백개의 눈〉과 〈목소리의 형태〉는 이러한 의도 아래, 같은 작품을 보고 느끼는 감정을 각각 언어와 조형물로 표현하고, 타인과 공유할 수 있도록 전시함으로써 작품이 재해석되는 순간을 완성 시킨다. 이 과정에서 재해석은 언어로 표현될 수도, 다른 작품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반드시 언어적 표현 방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 작품을 보고 나만의 언어 또는 문학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 3차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앞선 코너에서 작품을 짧은 문장과 조형물로 재해석하는 체험을 했다면, 이번에는 나만의 ‘언어’로 새롭게 써 내려간다. 〈연결된 세계〉에서는 수많은 단어 카드 중 3장을 랜덤으로 골라 그 감정을 활용하여 나만의 일기를 쓰는 것이 목적인데, 하필이면 ‘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기란 나만의 감정과 일상을 오롯이 나의 감상만으로 쓸 수 있는 글이다. 어떠한 가공도 필요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꾸밀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한 감정을 쓸 때 머뭇거리기도 한다. 정제되지 않은 나만의 것. 그것은 스스로에게조차 보여 주기 싫은 감정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단어 카드를 활용해 문장을 만들게 했다는 점이 해당 코너의 주안점이라고 보았다. 단어 카드에 빗댄 나의 감정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구의 것도 아닌 게 된다. 그 과정에서 모든 작가는 더 솔직해질 수 있으며, 직접적으로 탐구해 보지 않은 감정까지 깊이 있게 생각해 보게 된다. 일기로 시작한 감정이 세계를 이루는 감각과 비스듬히 연결되어 만나는 축에서 발생하

  • 김소리
  • 2025-08-01
활자 뒤의 설계자, 또는 조언자 ‘북디자이너’

[문장서포터즈] 활자 뒤의 설계자, 또는 조언자 ‘북디자이너’ ―홍선우 북디자이너 인터뷰 문장서포터즈 2기 김성호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 하면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다소 가려져 있는 존재는 바로 북디자이너일 것이다. 책의 판권 면에 작가와 편집자만 기재되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은 북디자이너와 마케터 등 말 그대로 책을 ‘만들고’ 온전히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힘쓴 모든 사람들이 대체로 기재되는 편이지만. 나는 북디자이너가 책의 외형을 만들고, 꾸미고, 문자 그대로 독자들에게 가닿는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한다. 동시에 활자 뒤에서 소리 없이 책을 설계하는 설계자라고도. 그러던 차에 이번 문장 웹진 지면을 빌려 평소 친분이 있던 자음과모음 출판사 북디자이너이자 독립 출판을 시도하는 홍선우 디자이너와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다. Q: 평어로 인터뷰를 하는 것도 처음이고, 북디자이너를 실제로 만나는 것도 처음이라서 조금 떨리네. 너는 어때? A: 나도 평어로 이렇게 대화하는 건 처음이야(웃음).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그래도 이번 기회에 이렇게 대화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Q: 먼저 자신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 줄 수 있어? A: 자기를 소개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어디에서 일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나의 일부분이니까, 그걸로만 나를 설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북디자이너가 궁금한 사람들을 위한 인터뷰니까 일단 북디자이너라고 소개할 수 있겠네. 홍선우 북디자이너의 대표작 1 (『할도』,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Q: 내가 인터뷰 제목을 지을 때 북디자이너를 활자 뒤의 설계자라고 명명했는데, 어떻게 생각해? 공감하는 편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 A: 활자 뒤의 설계자라는 표현이 참 멋있어. 다만, 내가 실무에서 느낀 걸 토대로 생각해 보면 설계라는 표현에 조금 독단적인 뉘앙스가 있어서 그 부분에 대해선 정정이 필요할 듯해. 작가와 편집자, 마케터, 일러스트레이터 등 여러 사람들과의 협업을 통해 책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북디자이너 혼자 설계해 나가는 과정은 아니라고 느껴. 그리고 재미있는 점은, 내가 뭔가를 설계한다고 한들, 언제나 그 의도대로 독자들이 읽어 주진 않는다는 점이야.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자유롭기도 하고, 일방적이지 않아서 좋아. Q: 좋아, 활자 뒤의 설계자라고 이름을 지었을 때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많았구나. 독자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너도 알다시피 요즘은 텍스트힙이라고 해서 책에 주목하는 현상이 있기도 해. 그럴 때 표지에 이끌려 책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단 말이지.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A: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책을 미적으로 소비하는 것에 반감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이런 식의 접근이 조금 우려스럽기도 해‧‧‧. 그 이유는, 획일

  • 김성호
  • 202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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