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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호

  • 작성일 2025-09-01

문장웹진 9월호를 열며

지나간 시절은 왜 다시 돌아오는 걸까요? 여름의 막바지에 저는 저의 한 시절을 보낸 장소에 다녀왔습니다. 저를 포함한 친구들 모두 그곳을 떠났고, 그때를 이루던 물질들은 사라졌고, 그리하여 그곳은 이제 모르는 사람들과 새로운 풍경과 색채뿐이었지만, 마치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오래전 그날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습니다. 결국 오지 않았을 무언가를 기다리며 골목을 서성이던 그때의 저는 아마, 조금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요.

그때, 그곳으로부터 멀어진 뒤 남겨진 마음과 기억들을 문장으로 읽는 일은 언제나 제게 진정한 경험으로 돌아옵니다. “그 여름의 저녁 골목들처럼 따라가면 모퉁이가, 돌아가면 또 다른 모퉁이가, 거듭 나타나는 악몽과 환몽 속에서”(정한아_「명륜동(明倫洞)」)존재하던 “이름들”. 어쩌면 저는 지금을 살아가는 일만큼이나 그 시절을 돌이키는 일을 꾸준히 해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매 순간, 뒤섞여있었던 거지요. 그러니 어느 늦여름 오후에, 다시 첫여름을 떠올려보는 일 또한 지금을 사는 일이라 여겨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9월호 문장웹진은 과거의 문장웹진을 다시 읽는 20주년 기획 특집, 시와 소설, 비평과 문장서포터즈 활동 등 다양한 콘텐츠를 준비했습니다. 다음 달부터는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참여하는 새로운 기획 원고도 시작될 예정입니다. 길었던 여름을 갈무리하며 함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문장웹진 편집위원 이주란 소설가 외 편집위원 일동




[기획] 문장웹진 REWIND

문장웹진 20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선정한 대표 작품들을 다시 읽습니다.
시간을 넘어 되살아난 문학의 순간들과 함께,
그 의미와 감상을 새롭게 나누며 문장웹진의 아카이브를 확장합니다.

"굽어서 포개지는 것 곡선의 삶"

문장웹진 > 기획 > 삶은 곡선이다 게시글로 이동

- 안중경 작가, 고봉준의 「삶은 곡선이다」를 읽고

문장웹진 9월호 살펴보기

미치고 싶거나 미쳐가는, 미친 여자들

미치고 싶거나 미쳐가는, 미친 여자들 소영현 사이보그 글쓰기는 본원적 순수함이라는 기반 없이, 그들을 타자로 낙인찍은 세계에 낙인을 찍는도구를 움켜쥠으로써 획득하는 생존의 힘과 결부된다. - 도나 헤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72쪽. 1 은유로서의 미친년 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2019)에는 젊은 여직원에게 집요하게 이른바 ‘작업’을 걸고 “사적인 접근”1)이 여의치 못할 때 “공적으로”(200쪽) 폭언을 쏟아내거나 고압적인 태도로 업무를 지시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을 일삼는 남성에 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만나는 에피소드이다. 그만큼 현실에서 상시 발생하는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례에서 정의가 구현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 특히 가부장적 성격이 여전한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 이런 일은 대개 불쾌나 모욕감이 쌓인 끝에 여직원 혹은 피해자가 퇴사하는 경우로 끝나게 된다. 그나마도 자발적 퇴사보다 더한 피해를 입는 일이 허다하니, 최소한의 피해로 상황이 정리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흔하디흔한 여성혐오적이고 비윤리적인 상황에 대한 사례 모음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디디의 우산』 속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작가는 화자 김소영의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동생 김소리의 입을 빌려, “미친년이 되더라도”(202쪽) 사무실 사람들에게 김소영이 겪고 있는 불쾌와 모욕감,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위협과 불안”(202쪽)을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짚는다. 거꾸로 이해해보자면, 위협과 불안을 말함으로써 그녀 자신이 미친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미친년은, 말하자면, 스스로 사회의 상식, 그것은 황정은 식으로는 종종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 상식이 된 악의 세계 바깥으로 자신을 내보내는 일이 된다. 여기서 미친년은 상식의 세계 너머의 정상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를 갖는 말이 된다. 2 낙인으로서의 미친년 미친년은 그런 의미에서 현실 너머 정상성을 역설하는 말이 된다. 바로 그런 초월성의 획득을 통해서나 가닿을 수 있는 지점이라는 점에서, 삶의 비정상성을 바로잡기 위해 억압적인 사회적 틀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도약이 ‘미친년 되기’라고 한다면, 『디디의 우산』에서 작가도 밝히고 있지만, 그 ‘미친년 되기’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로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그만큼의 의미를 획득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현실의 차원에서 보자면 스스로 미친년이 되는 일보다는 미친년으로 낙인찍히는 일이 더 많다고 해야 한다. 미친년이 되기를 원하지 않지만, 미친년으로 지목되거나 명명되어 내쳐지는 일, 어쩌면 ‘미친년 되기&rsquo

  • 관리자
  • 2025-09-01
시간에는 시곗바늘이 없다

시간에는 시곗바늘이 없다* 강성은 어느 날 밤 누가 내 몸을 분해했다 낱낱이 흩어진 채로 나는 서랍에 담겨 잠들었는데 요양병원의 늘어선 침대들처럼 침대 위에 묶여 있는 아기들처럼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고 이 세기에서 저 세기로, 저 세기에서 다른 세기를 떠도는 망령처럼 꿈인지 삶인지 묻지 않고 어느날 아침 누가 나를 다시 조립했을 때 나는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 다정한 사형집행인처럼 네가 따뜻한 손을 내민다 *헤르타 뮐러,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 관리자
  • 2025-09-01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성은 겨울 하늘에 떠 있는 먹구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숲은 더 울창해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은 메르스 중입니다, 라고 썼던 2016년이 지나가고 코로나로 많은 친구들이 죽었습니다,를 읽던 2020년이 지나가고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를 듣던 2024년이 지나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올림픽이 열리고 우주여행 상품권이 팔리고 쥐들이 암을 정복하고 AI가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갑자기 우리 모두 나이가 어려졌지요 이 나라에는 원래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극장이 없어지고 식당이, 카페가 없어지고 학교가 없어지고 사람이 없어지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언젠가는 봄과 가을이, 서울과 평양이, 달과 지구가 그렇지만 꿈속에선 변함없이 우리가 거기서 영화를 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천천히 커튼이 열리고 투명한 창 너머 정원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와 어두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울면서 잠에서 깨어나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얼빠진 얼굴로 사랑에 빠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늘도 모르는 개와 산책하고 모르는 개와 산책하고

  • 관리자
  • 2025-09-01
괜찮은데?

괜찮은데? 김보나 안녕하세요, 보내 주신 치약 16갑 잘 받았습니다. 써 보고 싶던 거라 바로 이부터 닦아 봤어요. 거품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더라고요. 이는 어찌나 반질대는지 놀러 온 친구에게도 자랑했죠. 이거 써 봤냐고, 써 보라고 이빨 좀 털었어요. 친구가 그러데요. 뭐냐고. 저는 이가 튀어나와라 막 웃었어요. 콜게이트 처음 보냐고요. 그러니까 녀석이 읽어 주더라고요. c-r-o-g-a-t-e, O, 크로게이트! 제 눈에 뭐라도 씌었던 걸까요? 낯이 뜨거워지는데 친구가 저한테 악어새냐고 놀려요. 악어새의 배를 불려 준 악어는 튼튼해진 이빨로 물속에 잠겨 다음 사냥감을 물색하고 있겠죠. 저는 무심코 녀석을 깨물어 버렸어요. 얼마 전에 동생이 그러더라고요. 언니, 얼굴이 좀 길어졌다? 저는 치가 떨리게 화가 났지만 좋은 거라고 하면서 치약을 나눠 줬어요. 이가 오복 중의 하나라고 하잖아요. 얼룩덜룩 물때 낀 거울에 치약을 문질러 볼 수도 있죠. 옆 자리에서 냄새가 날 때 인중에 톡톡 묻혀도 좋고요. 괜찮아요. 저는 마음을 닦기로 했거든요. 콜게이트라면서 크로게이트를 팔아넘기고 사라진 당신이 선명하게 비칠 정도로 번뜩거리게.

  • 관리자
  • 2025-09-01
좋은데?

좋은데? 김보나 흔들리는 창밖으로 모래 구름이 몽개몽개 피어오른다. 오장육부가 뒤집혀서 웩, 소리 나오는데 더 쥐어짤 것도 없고. 누가 솜이라도 밀어 넣은 듯 귀는 먹먹해지고. 타이어 하나 펑, 터진다. 계속 가요? 오래된 버스가 구불구불한 흙길 오른다. 속이 빈 채 흔들리는 몸으로 시금털털한 맛이 넘나든다. 황색 구름. 나는 이만 눕고 싶은데 문이 열렸다. 나는 쏟아져 내렸다. 한낮의 열기가 방울뱀처럼 다리를 타고 올랐다. 뭐가 타오른다. 올려다보면 이글거리는 하얀 햇덩이. 땀방울을 훔치며 내가 묻는다. 이게 다예요? 흰 천을 두른 쪼글쪼글한 노인이 푸른 이를 드러내며 말한다. 이게 다야. 빛.

  • 관리자
  • 2025-09-01
쓰레기 줍기

쓰레기 줍기 송승언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항상 나중이었고 따라가며 주웠다 쓰고 남은 것들 쓰다 버린 것들 쓰지 않은 것들 넓은 곳에서 쉴 때마다 먼저 본 것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고 공중에 떠오르는 흰 것을 보며 봉투에 담긴 것들의 처지를 생각했다 썩고 싶어도 마음 같지 못해 나보다 오래 남아 있을 것들 그런데 꿈틀거린다, 봉투 속에서 아직 남아 있던 꿈들이 손을 더럽혀 가며 처리하고 나니 또 먼저들 가고 없다 따라가며 줍는다 누가 쓰다 만 것들 누가 쓰려 한 것들 끝내 쓰지 못한 것들

  • 관리자
  • 2025-09-01
어두운 방에 갇힌 보이지 않는 실체를 어루만지며

어두운 방에 갇힌 보이지 않는 실체를 어루만지며 송승언 눈앞의 손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방에서 마음에 손을 얹는다 어둠 속을 부유하는 벌레들을 바라보며 WWW의 역사에 관해 생각한다 내가 태어날 때는 없었던 세상 그곳에 갇힌 여자아이가 있다고 했다 가족이 들어올 수 없는 방을 얻으려고 돌이킬 수 없는 거래를 했다 제사를 지내고 영혼을 업로드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아이 잠깐 끝없는 자유를 느꼈지만 그런 자유는 그저 공포라는 사실 내가 자유를 느끼는 게 아니라 자유가 나를 응시하는 거야 깨달아 버렸다 늘 그랬듯이 너무 늦게 구조 신호를 허공에 띄웠지만 아무도 자신을 검색할 수 없어 어둠에 갇힌 채 영영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그런 괴담 알고 있어? 마음에게 묻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괴담들은 도대체 누가 만들고 퍼뜨리는 건지 하지만 어떤 말도 안 되는 것들은 어째서 숨어 있던 것들을 밝히는지 손 닿는 곳에서부터 마음이 썩어 가고 썩은 마음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 군집 우화하며 펼치는 수백 장의 날개들이 살갗을 간지럽히며 환하게 퍼져 나가는 동안 알던 사람을 떠올린다 오래전, 아마도 고3 여름쯤 내 안에 갇힌 채 영영 나오지 못하게 되어 버린 여자아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관리자
  • 2025-09-01
손 받쳐 물 주기

손 받쳐 물 주기 김현 실도라지 화분을 샀다. 죽일 거면서, 예전 같으면 생각 한 번으로 스쳐 갔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라. 살(리)고 싶어. 보랏빛 꽃바람에 흔들려도 투명했다. 영혼이 있니? 사람과는 달라. 나와는 달라. 짐승과도 달라. 꽃 파는 사람은 매일 물을 주세요, 빛을 충분히 쬐게 해 주세요. 내가 듣고 싶던 말을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 다음날 한 손 받쳐 물을 주었다. 이번 생도 망칠까 봐. 그 행위가 알려 주었다. 식물이 어떻게 인간을 깨우치는지. 볕 잘 드는 창가에 두고 보았다. 미동도 없이 하루가 지났다. 소파 위에 여러 권의 책을 펼쳐 놓고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기억해 둔 것. 그때 한덕수를 족쳐야 했는데. 손가락을 넓게 벌리면 물줄기 세차고 좁게 벌리면 가느다랗고 벌리지 않으면 물은 다른 행방을 찾는다. 손 받쳐 식물에 물주는 사람이 된다고 무얼 배우겠는가 중얼거리는 사람이 되면 알게 된다. 정성을 다해 가꾸지 않으면 죽는다. 우리가 그랬다.

  • 관리자
  • 2025-09-01
바다Ⅲ

바다Ⅲ 김현 저는 지금 홀로 있습니다. 청정한 마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마음은 여전히 지난밤입니다. 지난밤에 벌어진 일은 적지 않을게요. 그날, 조용히 책장을 덮으며 제가 읊조린 말을 기억하시나요? 눈이 왔으면, 바다에 가고 싶다. 밤 기차를 타고 홀로. 완행으로. 작은 모래알로. 해변에 앉아, 눈, 눈, 눈, 눈 위에 갈매기 똥 바다, 바다, 바다, 바다 위 천사의 나팔 소리 홀로라는 메아리 되기. 홀로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을 잊은 채 살고 있다는 것. 지난밤에 나는 뛸 수 있었지만, 나는 헤엄칠 수 있었지만, 나는 건널 수 있었지만, 나는 변할 수 있었지만, 홀로 되면 더는 나를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땐 내 안의 나를 너라 부르고 너를 생각합니다. 안의 너. 아네가 이사 가자 합니다. 다 버리고 새살림을 차리자고 합니다. 아네의 헌 살림에는 너무 많은 구멍과 누수 자국, 그을음과 깨진 손톱, 눈물 부스러기 찍어 먹으면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마음에 벽지가 들뜨면 찢어 버리는 수밖에. 찢겨야만 드러나는 금빛 해변과 흰 파도의 나날. 홀로 노래하는 사람이 좋아요. 둘도 싫고 셋도 싫어요. 어쩔 땐 그래요. 눈이 와서 그래요. 눈 오는 날엔 우리 모두 홀로 내버려둬요. 그러다 죽어 버려도 모르게. 남모르게 하는 생각 속에 사는 짐승을 홀로라 이르면 아네는 기어이 자기 뺨을 후려칩니다. 천천히 차오르는 분홍빛 물듦. 청아한 눈물. 울려 퍼지는 메아리. 저는 지금 홀로입니다. 리얼 탄산 100% 청정 라거를 두 컵 마셨고 지난밤과의 사투 끝에 기어이 이 시를 적었습니다. 지나가겠지, 지나갈 리 없어. 쓰고 싶었는데 쓸 자리를 찾지 못하여 이렇게나마 당신께 보냅니다. 홀로 되어 네 발 달린 완행에 몸을 싣고 넘실넘실 안의 너에게 당도하거든 얼얼하게 말해 주세요. “여기가 끝이야, 다시 시작할래?”

  • 관리자
  • 2025-09-01
명륜동(明倫洞)

명륜동(明倫洞) 정한아 그리고 또, 이제 거기에는 행과 연이 구분되지 않은 기억들이 가을 은행잎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기도 했을 것이다 행방을 알 수 없는 너를 찾으러 돌아다니던 좁은 골목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은 너의 발자국 여름 햇볕에 소금이 말라붙은 팔뚝에 코를 대고 킁킁 자신의 탄내를 맡으며 처마 밑을 서성이던 조증의 나날들과 환한 밤들과 번쩍이는 신경 다발로 바짝 마른 목구멍에 바닷물을 들이부으며 자기를 갈증으로 끝장내려 했던 스물넷 시계꽃을 수없이 삼키고도 조각난 자기 자신을 데리고 눈꺼풀이 간혹 정전처럼 꺼질 때마다 두꺼비집 머릿속을 열고 누가 자꾸 전원을 올리는데 거기에는 또, 모래처럼 셀 수 없고 단조롭고 개별적인 모든 이름들이 저마다 자기를 주장하고 있어 그 여름의 저녁 골목들처럼 따라가면 모퉁이가, 돌아가면 또 다른 모퉁이가, 거듭 나타나는 청춘의 악몽과 환몽 속에서 먼 파도 소리가 너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내 청춘은 네가 그린 그림처럼 녹아 흘러내리는 바람에 눈코입이 뒤섞여 표정을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 관리자
  • 2025-09-01
체불

체불 정한아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채소와 기름과 식초에 버무린 삶은 국수처럼 슴슴한 일요일 당도하지 않은 재앙들은 사절하고 지나가 버린 불운을 하나씩 헤아리면서 여름의 벌판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벌판이 식어 가기 시작할 때 부엌 창문으로 붉은빛이 흘러들어 식탁에 흥건했지 누가 울고 있지? 훔쳐도 닦이지 않는 날마다 갱신되는 그러나 때마다 봉합하시는 어둠의 신 깊어 가는 밤 늙어 가는 고양이의 등줄기를 쓸고 벌판의 무성한 수풀 속에 숨겨진 것들을 합창하게 하고 밟으면 발이 푹 꺼지는 우거진 낱말들 한 덩어리로 버무려질 오직 한 사람의 몫

  • 관리자
  • 2025-09-01
오토바이 탄 물총새

오토바이 탄 물총새 이원규 길 위에서, 섬진강 861번 지방도 샛노란 중앙선 위에서 어린 새 한 마리가 길을 막았다 다 저물녘에 질주하던 나의 오토바이 앞에서 울며불며 물총새 새끼가 길을 물었으니 급브레이크를 잡았다 구례 플라타너스 카페에 가수 안치환의 공연 보러 가는 길, 어두워지는데 트럭은 막무가내, 어미 새는 보이지 않았다 착한 척하는 것도 큰 병이라는데, 일단 물총새 새끼를 오토바이 뒷자리 짐통에 태웠다 남도대교 건너 화엄사 입구까지 알피엠 3500 이하의 저공비행으로 19번 국도를 달리며 나의 마지막 직업이고픈 퀵서비스를 자처했다 가출한 물총새인지, 어미에게 버림받았는지, 얼떨결에 유괴된 새 새끼인지, 오토바이 엔진 소리에 울고 안치환 노래에 울고 왕복 이백 리 밤길을 돌아와 우리 집 현관에서 밤새 울었다 행여 우리 집 고양이 별이와 몽희가 덮칠세라 고양이집 철망 속에 가두었다 물을 주고 찬물에 불린 멸치를 먹였으니, 어린 새를 노리고 멸치를 노리는 고양이가 없는 고양이집 속의 물총새여, 난생(卵生)처음 오토바이 탄 물총새 새끼여! 날이 밝자마자 섬진강 861번 지방도 노란 중앙선, 다시 그 자리에 풀어놓자 폴짝폴짝 강변 풀숲으로 나뒹굴더니 왕버들 아래로 신나게 몸을 날렸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으니 이토록 다정한 무관심이라니! 저는 저대로 사라진 것들이 어디 물총새뿐이랴 나는 언제쯤 나의 길을 막고 물어보며 울어나 볼 것인가 나는 아직 40년 지나도록 낡고 다정한 오토바이를 떠나지 못했다 한반도 남쪽에서만 지구 30바퀴 넘는 거리를 달리고 또 달리지만 아무 상관도 없이, 아무 질문도 필요 없이 내 오토바이 뒷자리에는 오늘도 아직 어린 물총새가 울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아비 없는 그 소년이 앉아 있다

  • 관리자
  • 2025-09-01
은하수 한 모금

은하수 한 모금 이원규 목덜미에 땀띠 나도록 덥지요? 찬술을 마셔도 목이 마르고 밤새 눈꺼풀 파르르 잠도 안 오지요? 걸어서 더 캄캄한 곳으로 가요 잠시 핸드폰이며 헤드라이트 끄고 “밤하늘의 별빛을 보며 길을 찾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크 루카치를 잊고 살아도 북두칠성 큰 국자는 하늘물을 담고 있으니 견우직녀 울며불며 만나는 칠월칠석날도 좋지요 남쪽 하늘의 은하수 남두육성이 한 바가지 퍼부어 주는 시간에 딱 맞춰 은하수 한 모금 마시러 가요 강원도의 고랭지 배추밭 경북 상주의 폐사지 천년 석탑 서해 신안의 증도 도초도 제주도의 아부오름 분화구 별 볼 일 없는 세상에 별을 보여 드릴게요 영혼의 양수가 벌써 다 말랐지요? 골수 얼얼하도록 은하수 한 모금 마시러 가요 눈이 나빠도 별은 보이지요 남두육성 삼신할매가 다시 한 국자 별빛 생명수를 퍼부어 주네요 정수리 확 열고 다 마셔요 별침을 맞고 별빛 내시경을 받아 봐요 늙어 갈수록 자주 영혼을 헹구며 고향의 초롱초롱 소년 소녀로 돌아가요 잠시 용량초과의 세상사 다 내려놓고 우울증 분노조절장애의 얼굴도 지우고 가요, 제2의 화살이 별빛으로 쏟아지는 곳 빠진 머리카락보다 더 많은 별침이 내리꽂히는 그곳으로

  • 관리자
  • 2025-09-01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불 꺼진 약국의 마음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불 꺼진 약국의 마음 조혜정 첫 베개는 작은 바윗돌이었지 의자의 마음은 처음에 다리가 하나였어 약국에서 훔친 마음은 기침처럼 가볍고 그 후로 비어 있는 꽃병처럼 우리는 잘 넘어진다 십 대 사내아이의 붉은 목덜미에서 빠른 비트의 마음이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희미하게 웃는 언니들은 이제 음악처럼 늙어서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 그림 앞에 앉아 하루하루 멀어지고 있다 영원히 볼 수 없는 마음도 목이 마를까 궁금해 삼킨 알약들이 점점 느려지고 있는 마음을 두드린다 가끔 물을 마시러 약국에 들러 볼까 해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불 꺼진 약국의 마음 약국엔 사람보다 의자가 많아 가끔씩 넘어진 의자의 마음이 사람을 내려다본다 여기까지 잘 도착했어 곧 사라질 거란 마음이 다리가 하나였던 의자에 공기처럼 앉아 있다 아직 돌려주질 못했구나 검은 바코드가 찍힌 처방전을 들고 그러고 보니 오래전 약국에서 훔친 마음이 두근두근해

  • 관리자
  • 2025-09-01
재단사 프랑켄슈타인

재단사 프랑켄슈타인 조혜정 당신 옆구리에 예술적 상처가 아름다워요 재단사는 부드러운 목소리 속에서 피 묻은 바늘을 꺼내 포도주에 씻었다 누군가 처음 우릴 이렇게 죄로 꿰매어 만든 것 같지 않나요 속죄와 희생의 양털 펠트 조각을 들고 자, 이것이 바로 내가 만들 당신입니다 침묵을 깨뜨려 부서진 조각들을 흰 뼈에 꿰매어 완성하기까지 982단계의 바느질이 필요합니다 * 재단사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실밥들이 양복점 실내에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백만 번째 눈송이가 막 떨어지고 있을 때 흩어지는 눈송이들에게 아우구스투스, 크리수스, 칼리굴라, 네로, 갈바, 오토‧‧‧ 이제는 사라진 옛 로마 황제들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런 바느질을, 예술적 패치워크를 정말 나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요? 재단사의 이야기가 순결한 박음질처럼 마침내 우리를 관통하여 서로에게 눈부시게 봉합될 때까지 눈은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자, 이것이 바로 내가 만들 당신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아웃핏을 상상해 보세요 우리는 유리창에 떨어져 흘러내리는 흰 눈송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 〈The Outfit〉 대사

  • 관리자
  • 2025-09-01
바이킹을 타자

바이킹을 타자 윤성희 1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겁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먼 곳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요일이면 걸어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호숫가의 트럭 카페에 가서 삼천 원짜리 커피를 사 먹거나,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정자에 가서 가끔 맥주 한잔을 마셨다. 그게 나에겐 여행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그 장소들을 잃어버렸다. 먼저 정자에 불이 났다. 정자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문 옆에 있었다. 학교는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해서 늘 숨을 헐떡이며 등교를 해야 했다. 여름에는 교복 겨드랑이가 땀에 젖곤 했다. 교문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고 거기에는 운동기구와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거기서 매일 철봉을 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늘 철봉을 했다. 그리고 지각을 하는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지금은 조금 늦는 거지만 나중에는 아주 많이 늦게 된다고. 이제 운동기구는 없어졌고, 아마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겠지만, 정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이면 나는 그곳에 갔다. 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닭 다리 모양의 과자와 맥주 한 캔을 샀다. 맥주는 텀블러에 옮겨 담았다. 너네는 공부해라. 나는 맥주나 마시지. 하교하는 아이들을 보며 몰래 맥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다. 텀블러 안에 술이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통쾌했다. 바람까지 불어 주면 근심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자에 불을 낸 사람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시험을 망쳐 기분이 우울한데 정자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는 걸 보니 화가 나서 그랬다고 뉴스에서 아이는 말했다. 나는 불에 탄 정자 사진을 찍어 민정에게 보냈다. ‘헉, 낙서도 사라졌어?’ 민정이 물어서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정자 기둥에는 연경의 낙서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는 거기서 치킨을 시켜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 학교는 점심시간에 몰래 나가 치킨이나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는 게 유행이었다. 그날 연경은 닭 다리를 우리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정자 기둥에 이런 낙서를 남겼다. ‘닭 다리 양보한 사람은 평생 복 받을 것!’ 연경은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닭 다리 과자를 살 때 꼭 프라이드맛만 샀다. 핫숯불바베큐맛은 절대 먹지 않았다. 민정에게 새로 정자가 지어지면 같은 자리에 같은 낙서를 하자고 말했다. 민정이 꼭 그러자고 답을 보냈다. 그날 밤에 나는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훌라후프를 하는 꿈을 꾸었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보며 서로 웃었다. 삼 년 전, 나는 엄마의 병간호를 핑계로 고향에 왔다. 그 전에 나는 서울의 한 무역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상사인 경리실장이 횡령을 하고 잠적하는 일이 생겼다. 동료 직원과 함께. 퇴근 후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렸다. 우리는 같은 먹방 유튜버를 좋아했다. 그래서 새 영상이 올라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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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1
법의 아름다움

법의 아름다움 길란 출근 시간이 되기 20분 전에 부속실에 도착했다. 우선 판사님들의 책상을 청소했다. 강 판사님의 책상 위에 올려진 커피잔도 치우고,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있는 사도신경이 새겨진 크리스털도 지문 자국 하나 남지 않게 조심히 닦았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교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사도신경의 내용만큼은 다 외워 버렸다. 크리스털을 닦고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정 판사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사님께서 읽으시기 편하게 글씨 크기를 키워서 출력한 자료도 옆에 두었다. 남들은 나보고 오버한다고들 하지만, 엄마는 이런 게 다 업무 능력이라고 했다. 판사님들께서 안 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을 거라고. 책상 청소를 마치고 책장과 벽에 걸린 십자가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때 정 판사님께서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권 기사,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하세요 판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럼 좋지.” 그렇게 말하며 판사님은 책상에 앉으셨다. “매번 고마워요. 따로 뽑기 힘들 텐데.” 판사님이 큰 글씨로 뽑은 자료를 들어 보이셨다. “아니에요. 제가 판사님 업무 도와드리는 거로 돈 받는 거잖아요.” 최대한 사교성을 끌어올려 너스레를 떨었다. “내년에 부서 바뀌면 어떡하나. 권 기사가 아주 내 버릇을 나쁘게 들여놨어.” 판사님이 웃으며 말하셨다. 머신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으니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서도 부속실에 들어오셨다. 강 판사님과 이 판사님께도 인사를 하고 커피를 드렸다. 판사님들께서는 고맙다고 하시고는 안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으라고 말해 주셨다. 나는 판사님들께 인사를 하고 부속실 안에 있는 속기실에 들어왔다. 판사님들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이었다. 법원에서 일하기 전에는 판사들이 권위적인 사람들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 본 판사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속기용 키보드와 공판 자료들을 챙겨 법정에 들어왔다. 대기석에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 앉아 있었다. 속기사석에 앉아 그들을 둘러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부터 60대 남성까지 성별과 나이가 다양했다.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었다. 곧 검사분들이 재판장에 들어와 검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 판사님께서도 공판 시간에 맞춰 입정하셨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님께서 첫 번째 사건의 번호를 부르고, 피고인의 이름을 부르고,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검사가 기소의 이유를 밝혔다. 횡령죄였다.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법정 안에서 발화되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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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1
고통의 서열과 증언의 권리

고통의 서열과 증언의 권리 ―고통과 쟁론 입론 마무리 박동억 1. 인간의 범주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고통으로 향하려는 실천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고통은 섬이다. 고통을 겪는 이는 말할 여력을 가지기 어렵고, 듣는 자는 판이한 삶의 입장에서 고통을 오독하며, 사회제도는 고통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결국 모든 존재는 자기 몫의 고통을 홀로 짊어지며, 한 존재가 끝까지 살아 낸 고통은 그의 오롯한 비밀로 남는다. 하나의 고통은 하나의 침묵 속에서 죽는다. 사실 그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고통은 아주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겪었던 고통을 내가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부끄럽지만 다행이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사람에게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그러한 욕망을 간절한 것으로 만든다. 어떤 참혹한 사건과 그러한 참혹을 겪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그것은 고통의 우주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그저 한 줌에 지나지 않음을 죄악으로 느끼게 한다. 수많은 애도 행위와 추모 행사, 그리고 기도는 그저 당신의 고통을 잘 이해했다는 착각을 만들어 낸 뒤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을 합리화하는 과정이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쓴다. 문학은 당신이 ‘아직 여기 있다’라고 말하기 위한 형식, 이 작품의 언어가 당신이 겪는 고통 자체이기를 꿈꾸는 하나의 몽상이다. 물론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설령 그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조차 그들의 고통을 미화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데 그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환부를 드러내고 그의 고통을 향하기 위한 단초로서 문학은 하나의 탐구이다. 그런데 주디스 버틀러가 『불확실한 삶』(2004)에서 강조했던 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윤리적 소명을 간직한 상태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눈길조차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전쟁터의 적군이나 제3세계의 국민이 그렇다. 버틀러는 미국의 저널에서 이스라엘 병사와 국민을 위한 추모란은 존재하지만, 팔레스타인 국민을 위한 추모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어떠한 선량함은 더 윤리적인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제약한다. 여기서 그가 제안하는 용어는 ‘애도의 서열’1)이다. 애도의 서열이란 이웃은 소중히 애도하고 타인의 죽음에는 반응하지 않는 차별의 원칙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누군가의 고통으로 향하려는 우리의 의지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러한 의지의 방향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허수경은 그러한 애도의 서열이야말로 그가 극복해야 하는 과제임을 자각한 시인이었다. 그는 독일에 체류 중인 한국인 학생이었고, 한국인의 시선으로든 독일인의 시선으로든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은 낯선 이국이었다. 허수경은 2000년대를 전후로 그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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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1
빛의 실패가 사과 한 알을 생성하는 순간

빛의 실패가 사과 한 알을 생성하는 순간 -심지아, 『로라와 로라』(민음사, 2018) 이채원 1. 유폐된 모든 것을 향해 글쎄, 라고 답하며 기존의 언어 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목소리를 발화하는 일은 시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시작(侍作)에 있어 고정화된 관념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존의 언어가 초래한 대상의 고정된 내부를 새롭게 모색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기존에 상징화된 기호와의 연결 선상 위에서 재구성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실재를 포착하려는 일, 현존하는 이미지에 언어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선언을 끌어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여기, 여러 가치가 충돌하는 이 세계에서 끊임없이 무언가에 실패하고 있는 시인이 있다. 모든 풍경 앞에서 “글쎄”(「부엌의 부흥」)라고 답하며, “나는 나의 이야기를 믿지 않”(「여름 자르기」)는다고 말하는 이, 바로 심지아다. 시인은 뭔가를 선명하게 확정이나 확신하는 대신 이탤릭체의 목소리나 상반되는 개념을 배치하고, 동일한 단어를 일관되지 않은 감각으로 무한히 번복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발화하며 언어의 간극을 부러 형성하는 듯싶다. “한 땀 한 땀 꿰매진”(「풍경의 예절」) “단단한 문장”(「우리들의 테이블」)에 의도적으로 틈을 벌리는 듯한 시인의 방식은 현실에서 달성할 수 없는 언어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의미화의 지연으로 연결되며, “언어가 잊은 것들”(「소유자」)에 대해 사유하는 시선의 토대로서 작동한다. 시의 가능성이 새롭고 낯선 목소리로 우리를 둘러싼 견고한 지반을 허무는 것이라면, 심지아는 언어의 틈새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류와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가령 본고에 수록된 시에서 로라, 글쎄, 서랍, 사과와 같은 기표의 연쇄를 통해 “당신은 몇 개의 허용을 가졌습니까”(「소유자」)하고 성찰하듯 던지는 질문이 그러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심지아의 첫 시집 『로라와 로라』을 읽어 보기로 하자. 로라와 로라,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로라와 로라 (‧‧‧)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 (‧‧‧) 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 ―「로라와 로라」1) 부분 표제작 「로라와 로라」를 보면, 로라는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분열하며 증식한다. 로라는 단일한 존재가 아닌 동명이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이름은 다르지만 외양이 유사한 “쌍둥이”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나아가 화자는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 “코끼리”나 “시체”, “외계인”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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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1
삶은 곡선이다

[문장웹진 REWIND] 삶은 곡선이다 -염승숙의 「곡선을 걷는 시간」(《문장 웹진》 2009년 8월호) 고봉준(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염승숙의 「곡선을 걷는 시간」은 ‘곡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곡선’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단어이며, 이때의 ‘곡선’은 ‘직선’이 아닌 것, ‘직선’과는 다른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곡선을 걷는 시간’이라는 제목은 이미-항상 대척점, 즉 ‘직선을 걷는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직선’과 ‘곡선’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곡선을 걷는 시간」은 ‘곡선’의 의미를 해석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부러 그렇게 만들어진 경우를 제외하면, 세상 모든 휘어진 것들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휘어진 것이란 “노인의 굽은 등과 허리, 사춘기 아이의 비뚤어진 성격이나 오래된 연인들의 등 돌린 마음, 사고에 의해 부러진 뼈, 아주 추운 겨울날 주머니 안에서 곱아드는 손, 허리가 꺾인 붓의 단면 등”처럼 유무형의 곡선 형상을 모두 포함한다. 곡선에 대한 화자의 해석은 “부러 그렇게 만들어진 경우를 제외”하므로 결국 여기에서의 ‘곡선’은 원래는 곡선이 아니었던 것이 어떤 이유에 의해 휘어졌다는 의미이다. 화자는 “어쩌면 휘어진다는 건 ‘충격’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진술처럼 그 이유를 정신적․물리적 ‘충격’에서 찾는다. 요컨대 화자에게 ‘곡선’이란 원래는 곡선이 아니었던 것이 정신적․물리적 충격을 받아 휘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이전 상태의 회복, 즉 “곧아지기 위해 일생을 견뎌야 하는 불행한 존재들”로 인식된다. 이 소설의 핵심적인 사건은 주인공이 “내 아버지의 집이며, 내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붉게 웃다 떠난, 그런 공간”으로 돌아온 것, 즉 귀향(歸鄕)이다. 이때 ‘귀향’은 고향에 돌아왔다는 공간적․장소적 의미보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긍정한다는 정신적 의미에 가깝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아버지에 대해 “이유 없는 분노”를 갖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제아무리 팽개쳐도 부서지거나 깨어지지 않는 내 아버지란 사람에 대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굴레 같은 것을 알아 버린, 사춘기 아이의 치기(稚氣)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는 아홉 살 무렵 엄마가 식도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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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1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조재윤 그녀는 공원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녀의 퇴근길이 비탈이 될 즈음, 공원은 나타난다. 사 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는 공원은 아스팔트의 바깥이 아닌 일부처럼 보인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너비의 내부엔 몇 개의 운동기구와 나무 벤치밖에 없다. 옅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놓여 있는 나무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느 공원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흐느적거리며 산책하는 사람 또한 없다. 그녀는 자정에 가까운 퇴근길의 경로를 공원 입구로 바꾼 적이 없다. 공원 뒤편 아파트 단지가 있지만 단지 내에 이미 공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주민 또한 없다. 과자 부스러기를 뿌려 주는 주민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 또한 없다. 공원엔 나무도 없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참새 또한 없다. 그녀는 공원 앞에 놓여 있는 낡은 표지판을 들여다본다. 공원의 이름은, 무슨무슨 혹은 땡땡 공원이다. 무슨무슨 혹은 땡땡에 적혀 있던 글자는 칠이 벗겨져 알아볼 수 없다. 없는 게 너무 많은 공원은 이름 또한 없다. 그녀의 원룸 창문을 열면 또, 공원이 나타난다. 언덕 위 원룸에서 보는 공원은 더 작고 조악해서 뭉쳐 놓은 모래 더미 같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유추해 본다. 본래의 이름. 무슨무슨에 들어갔던 글자들. 하지만 머릿속엔 텅 빈 공원이나 길옆 공원 같은 공원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름만 떠오른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아무것도 없는 공원으로 지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기엔 공원이 가엾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지운다. 시간은 밤 열두 시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힘겹게 나무 벤치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락을 떠올린다. 락에게 공원의 이름짓기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락이 오는 시간은 아직 멀고 멀었다. 오후 한 시. 한낮의 해가 지구의 정수리에 오도카니 설 때, 락은 온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며.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방 안을 울리는 소리를 따라 해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보다는 자전거의 경적 같다고 생각하지만 따르릉만큼 자신의 벨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다고 수긍하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흥얼거린다. 전화를 받자 락이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그늘이 많은 날이야. 그녀도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햇볕이 따뜻한 날이야. 근데 따뜻하다는 말은 여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 락이 웃으며 말한다. 그늘이 필요한 날이었는데 딱 좋네. 서늘해. 그녀가 답한다. 바깥에 까마귀가 많아. 까마귀가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으면 글씨 위를 까맣게 그은 밑줄 같아. 락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 오늘 점심은 소고기뭇국이었어. 나는 무보다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길 바라지만 언제나 무가 더 많아. 그래서 소고기뭇국의 이름은 소고깃국이 아니라 뭇국이지. 락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이어 말한다. 해가 따뜻할 땐 이불을 널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여름은 언제나 이불을 널어놓기가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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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1
별개의 문제

별개의 문제 박민경 내가 병주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버즈랑? 의외다. 버즈는 친구들이 붙인 병주의 별명이었다. 맞다. 〈토이 스토리〉의 버즈 라이트이어. 크고 동그란 눈매에 능글맞은 입꼬리도 닮았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도 버즈 그 자체이긴 했다. 친구들이 의외라고 한 것도 이해는 갔다. 병주는 나랑 워낙에 정반대였으니까. 간디와 처칠, 잭슨 폴락과 앤디 워홀, 스폰지밥과 징징이, 기쁨이와 슬픔이처럼···. 내가 나쁘게 말하면 방구석 회의론자이자 소심한 현실주의자라면, 병주는 아침 햇살 같은 낙관과 긍정 엔진을 탑재한 채 지치지 않고 광야로 달려가는 로봇이었다. 성향이 정반대인 커플의 경우, 서로의 영토를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는 한 같은 성향의 사람을 만날 때는 느끼지 못한 달콤한 상호 보완성을 경험할 수 있는데 나와 병주가 딱 그랬다. 병주는 나에게 없는 고출력 엔진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감정 기복이 큰 병주의 정서적 지지대 역할이었으므로 우리는 함께 있을 때 자신을 더 나은 사람처럼 느꼈다. 그래선지 결혼을 결심하기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나는 우리의 관계성이 서로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잭슨 폴락과 앤디 워홀, 스폰지밥과 징징이···) 우리의 핑크빛 미래를 의심해 마지않았다. 그래서 결혼 준비를 하면서 싸우지 않는 커플은 없다는 진리에 불경하게도 코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우리는 다를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Oh, love is blind···. 어쩌면 사랑이란 두 사람만 맹신하는 종교 같은 걸지도. 하지만 본격적인 결혼 준비를 시작하자마자 수많은 결혼 선배님들이 고꾸라졌다는 그 수렁 맛집에 우리도 보기 좋게 빠져 버렸다. 병주는 체면을 중시하고 있어 보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유명 브랜드와 격식 있는 예단, 누가 봐도 신경 쓴 티가 나는 살림살이에 돈과 마음을 쏟았다. 반면 나는 허례허식이라면 질색이었고 가성비와 실용성이 우선이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고 자주 불거졌다. 싸움은 집을 계약하고 살림을 들일 무렵 극에 달해서 만약 어느 한쪽이라도 ‘파혼’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냈다면 정말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식이라는 메인 퀘스트를 해치우고 나서는 동지애가 생긴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싸울 기력이 바닥난 탓인지 일단의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나는 적과의 공동생활이라는 사회 실험에 자처한 피실험자의 마음으로 신혼집에 입주했다. 서로의 예민함이 빵빵한 풍선과 같은 상태라는 걸 알고 있기에 우리는 가능한 상대를 긁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 손톱이 드러나는 순간은 찾아왔다. 사건의 발단은 내가 만든 음식물처리기였다. ‘오천 원으로 미생물 음식물처리기 만들기’라는 영상을 보고 혹해서 다이소에서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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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1
시를 품은 도시, 광주

[문장서포터즈] 시를 품은 도시, 광주 -제34회 용아 박용철 백일장 르포 문장서포터즈 2기 이시우 1. 초여름, 시의 정원에 들어서다 2025년 6월 21일, 나는 광주 소촌아트팩토리에 도착했다. 소촌아트팩토리는 광주 송정역 근처에 위치한 곳으로, 과거 농공단지의 관리사무실과 민방위대피소로 쓰이던 건물을 개조, 전시실과 도서실 등으로 개조한 공간이었다. 하얀색 컨테이너 철제 기둥과 유리천장이 혼재되어 있는 곳. 쌀과 무기가 쌓여 있던 공간이 지금은 광주 시민들의 문화예술 향유 거점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날은 제34회 용아 박용철 전국 백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주제는 ‘초여름 시의 정원’. 이름부터가 한 편의 시 같았다. 문학제는 백일장과 문학 전시, 기념식, 문화 공연, 미디어아트 개막까지 다채롭게 이어졌다. 문학의 도시, 광주의 한편이 조용히 들썩이는 날이었다. 이번 백일장이 특별한 이유는 추계예술대학교 특기자 전형 인정 대회이기 때문이다. 백일장 수상 실적만으로 수시모집에 지원할 수 있는 특기자 전형은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인데(이제 단 2곳–중앙대학교와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만이 남았다), 추계예대는 중앙대에 비해 비교적 많은 백일장들을 인정해 주고 있다. 문예창작과 진학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생들이 많은 만큼, 이번 백일장은 또 다른 입시의 관문이기도 했다. 2. 백일장의 풍경, 고요한 전쟁 문학제와 동시에 진행된 이번 백일장은 시화전 등 다른 행사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즐기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선 날씨 문제. 계속되는 비로 인해 참여자들은 소촌아트팩토리의 다른 공간들을 둘러보기 힘들었다. 야외에 덩그러니 주차되어 있던 푸드트럭, 그 슬러시 간판 옆에 서 있던 사장님의 표정만이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시간 배분의 문제도 있었다. 보통의 백일장은 오전에 이루어지고, 오후에는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시 낭송 등이 진행되는데, 용아 박용철 백일장의 경우 오후에 시제가 발표되었다. 참가자들은 자기 글만 쓴 뒤, 각자의 우산을 펼친 채 말없이 자리를 떴다. 그래도 백일장은 백일장이었다. 초등부부터 일반부까지, 운문과 산문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나는 고등부 참가자로 광산구지역경제활력센터 건물 안을 배회했다. 지하 1층부터 민방위 교육장까지,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학생들이 가득했다. 고요한 전쟁 같은 분위기였다. 펜 끝은 바삐 움직였지만, 모두 말이 없었다. 시제는 “약속”과 “그림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단어를 곱씹었다.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막상 쓰려니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백이 두려웠다. 이상하게도 어떤 이야기를 써야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잡을 수 있을까, 어떤 글을 써야 ‘3등 이상의 상’을 받을 수 있을까, 자꾸 그런 생각들만 떠올랐다. 3.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까요?&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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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1
셀프캠 시뮬레이션;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의 시작법

셀프캠 시뮬레이션;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의 시작법1) -황인찬과 배시은의 시를 중심으로 신은조 1. 왜 그리움은 이 세상에 없는가 이창동의 영화 은 “나 돌아갈래!”라는 외침으로 포문을 연다. 기차가 달려오는 선로 위에서 절규하는 남자 “영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행복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으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선택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후 미쳐 버린다. 그래서 영호의 비명은 만약 시간을 멈추고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이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때 앞으로만 나아가는 기차의 이미지는 역행을 불허하는 시간의 특성과 매우 흡사하며, 선로에 서서 기차를 막아서는 영호의 행동 또한 시간의 흐름을 멈춰 세우려는 의지의 표명 그 자체라고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만 흘러가며, 이 장면과 함께 그의 삶은 막을 내릴 것이다. 과거는 그것이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매혹적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고향 땅의 꿈을 꾸거나, 기행을 일삼는 사람들의 주변에 사진, 비디오, 일기와 같은 기록 매체가 놓여 있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지나간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독자적인 물성을 부여하는 이미지들. 시리즈와 같이 과거의 사건들을 그대로 되살려 내는, 그 자체로 노스탤지어인 매체는 대중들이 시간을 넘나들 수 있도록 권능을 행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등장하는 미디어·매체·창작물에 드러나는 노스탤지어는 조금 다른 선로에 올라타 있는 듯하다. “베이퍼웨이브2) 음악 장르에 조악한 영상을 짜깁기해 놓은 에스테틱 영상”이 유행하는 현상과, 80년대 미국 올드스쿨 힙합 패션의 대표 격인 펑퍼짐한 바지와 브라탑을 입고 춤을 추는 톱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의 뮤직 비디오에는 일본 도쿄 외곽의 풍경이 비추어지며, 등장하는 인물은 90년대의 전자 제품들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앞서 언급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떨어져 있음은 물론, 실존하는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는 “복고”나 “레트로” 등의 키워드와도 거리가 있다. 이상한 일이라면 일련의 작품들을 감상한 대중들이 해당 영상에 공감하며 심지어는 그리워한다는 것이겠다. 이하림은 시대적, 정서적으로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매개 삼아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현대 매체들의 동향을 “액체 근대(지그문트 바우만)”로 통칭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파편화된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해 파열된 역사성의 형상이라고 정의한다.3) 세계화와 개인주의로 인해 “집단 기억”이랄 만한 상실의 경험을 갖추지 못한 현대인의 집단적 무의식이 정체성 혼란을 불러일으키므로, 경험한 적 없는 것을 기반으로 한 ‘보철 기억’이 그 자리를 메우고

  • 관리자
  • 2025-09-01
문학이 있는 곳: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문장서포터즈] 문학이 있는 곳: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 첫 번째 편지 문장서포터즈 2기 김이성 1.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네요. 여름의 복판을 통과하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시간들을 보내셨나요? 저는 올여름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어요. 이번 도서전 주제는 ‘믿을 구석’이었는데요(그러고 보니 여러분들의 믿을 구석은 무엇일지도 궁금하네요). 운이 좋게도 저에게는 믿을 구석이 여러 개 있죠. 그중 하나가 바로 ‘문학’인데요.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던 것 같아요. 문학은 한 번도 저에게 상처 주지 않았죠. 상처 주는 건··‧ 굳이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요?ㅎㅎ 아무튼 그래서인지 도서전에서 문학책이 유독 많은 사랑을 받는 걸 보고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저는 문학이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어도 한 사람의 삶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는 있다고 믿거든요. 때문에 항상 더 많은 사람이 문학을 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죠. 그런데 도서전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나는 ’문학‘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문학이 있는 곳‘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여기서 말하는 ‘문학이 있는 곳’이란 때에 따라 사람이기도 하고, 장소이기도 하고, 시간이기도 한데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문학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오늘은 제가 알고 있는 ‘문학이 있는 곳’ 하나를 소개해 보려고 해요. 문학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면서 문학을 매개로 시민들과 가장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문학적 ‘시간’과 자산이 축적되어 있는 아주 특별한 곳이죠. 바로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노작홍사용문학관’이에요. 도서전에 다녀와서 느낀 게 있다면 시대와 세대가 변모해 갈수록 문학의 쓰임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이곳 ‘노작홍사용문학관’은 문학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문학의 쓰임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해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상주작가지원사업’ 우수 시설로 선정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길 위의 인문학’, ‘지혜학교’ 시범 사업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문학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문화 진흥을 이끌어 가고 있는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함께 문학과 문학의 다양한 쓰임을 발견해 보는 건 어떨까요? 2. 저는 2025년 여름, 장마가 시작될 무렵 ‘노작홍사용문학관’에 다녀왔어요. 제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문학관 2층에 위치한 ‘기획전시실’에서 최두석 시인의 시(詩)사진전 〈꽃에게 길을 묻다〉가 한창 진행 중이었죠.

  • 관리자
  • 2025-09-01
사랑하며, 자유롭게

[문장서포터즈] 사랑하며, 자유롭게 -광주 책방 ‘러브앤프리’를 다시 다녀오며 문장서포터즈 2기 수현 여름이 다가왔다. 더위에 지쳐 밤새 뒤척이는 날이 늘어나고, 손 선풍기와 양산 없이 거리를 걷기 무서워지는 시기.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여름을 보낸다. 음악 차트 속에서 더위를 식혀줄 청량감 넘치는 노래를 찾아보기도 하고, 냉장고에 넣어 둔 수박을 꺼내 잘라 먹기도 하고, 서늘한 공기가 가득한 카페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을 뒤적거리다 한때 사랑했던 이의 계정을 몰래 들여다보기도 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시간을 보내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서 한 해 중 가장 뜨거운 시기를 지나는 각자만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가장 먼저 갤러리를 정리한다. 그러나 무언갈 비우겠다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본 처음과 달리,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무엇도 지우지 못한 적이 허다하다. 내게 갤러리는 사랑하는 책들로 빼곡하게 채운 책장과 같았다. 몇 년이 지나고도 곱씹게 되는 소설 『조이』 속 문장. 스무 살이 된 이후 나와 네 번의 여름을 함께 맞이했던 테일러 스위프트의 〈Daylight〉 가사. 그렇게 올해에도 지나간 여름의 흔적을 들여다보던 중, 나는 우연히 한 책방에 방문한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는 해, 사랑하는 것을 쫓아가겠다는 다짐으로 광주에 왔다. 나는 문학이 좋았던 막연하고도 순수한 마음만으로 소설을 공부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 우연히 양림동을 걷다 발견하게 된 첫 책방이 ‘러브앤프리’였다. 책방 앞에 멈춰 서게 된 건 이름 때문이었다. 사랑과 자유. 내가 문학을 좋아하게 된 계기 역시 그 두 단어와 같았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게 숨 쉴 구멍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끈끈한 취향 공동체를 끊임없이 찾고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기를 반복하곤 했는데, 그마저도 지치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종종 책방을 찾았다. 신기하게 나를 아는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가장 깊은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지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연한 방문으로 특별한 기억을 선물해 준 곳. 혹시 나와 같이 취향 공동체를 찾고 있는 이들에게 러브앤프리를 소개하기 위해 나는 다시 광주를 찾았다. 가장 먼저 책방 안을 들어서자 ‘사랑하며 자유롭게’라는 문구가 적힌 벽면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책갈피와 인덱스 등 독서 용품을 위한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상품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양쪽 벽을 따라 책이 진열되어 있다. 각 도서 위에는 추천 이유, 책을 읽은 소감과 같은 간략한 메모가 붙어 있었는데, 책방지기의 사소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 같아 ‘러브앤프리’라는 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 관리자
  •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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