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 작성일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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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12월호를 열며
2025년의 마지막 달을 목전에 두고 있네요. 올해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찬찬히 더듬어보려 하는데 이상하게도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올해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당최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비통한 사건과 함께 시작된 탓일까요. 되돌아보니 어느 정도는 그런 듯도 합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닐 텐데, 라는 찝찝한 기분에 작년 12월에서 올해로 넘어오던 시점을 회상하다가 번뜩 깨달았습니다. 바로 지난 연말연시에 올해의 목표를 설정하지도 소원을 빌지도 않았기 때문이더라고요.
저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간에 항상 지난 12개월을 반성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며 마음을 다잡아왔습니다. 딱히 대단한 목표나 소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죠. 어쩌다 보니 몇십 년 동안 이어오던 연례행사를 건너뛰고 올해를 다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개인적인 목표를 생각할 겨를없이, 지난 연말연시를 진심으로 분노하고 슬퍼하며 때때로 거리에서 보낸 탓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이대로 사라져선 안 된다는 염원이 컸습니다. 어쨌든 개인적인 반성과 목표 없이 시작된 한 해가 이렇게 끝나가네요. 여러분의 2025년은 어떠셨을지 궁금합니다.
이번 연말연시에는 지난번에 못 했던 반성도 하고 새해 목표도 세워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년 몫까지 두 배로요. 이런 개인적인 야심(?)을 담아, 2025년 마지막 기획으로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이었나>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져봅니다. ‘21세기 문학’은 이미 상당한 시대적 지층을 형성한 과거이자 현재요, 이보다 훨씬 긴 시간 우리가 숙고해야 할 미래 지평입니다. 이번 호에 실린 풍성한 시·소설·비평을 각자의 자리에서 음미해가며 ‘21세기 문학’의 향방을 상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 문장웹진 편집위원 윤재민 평론가 외 편집위원 일동
[기획] 문장웹진 REWIND
문장웹진 20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선정한 대표 작품들을 다시 읽습니다.
시간을 넘어 되살아난 문학의 순간들과 함께,
그 의미와 감상을 새롭게 나누며 문장웹진의 아카이브를 확장합니다.
“우리 아파트는요. 그런 일이 없어요. 그 아가씨가 그냥 원래 그랬던 거라니까 그러네.”
- 글래스카이만(glasscaiman) 작가, 김경욱 「스프레이」, 김미월 「RE 한없이 축축한 이야기」를 읽고
문장웹진 12월호 살펴보기
낯익고도 불친절한 미래에 대한 단상 임지훈 세상의 속도를 점점 감당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 간다. 변화하는 속도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이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낀다. 스팅의 노래 〈Englishman in New York〉의 화자는 자신을 “legal alien”, 합법적인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신사다움’이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여전히 “Manners maketh man”이라 말하고,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당신답게, 누가 뭐라고 하든’이라 말하는 사람. 그 노래 속에서, 이 합법적인 이방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Modesty, propriety Can lead to notoriety You could end up as the only one Gentleness, sobriety are rare in this society at night a candle’s brighter than the sun - Sting, 〈Englishman in New York〉 겸손과 예의범절이 악평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흔치 않은 감정이 된 세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이미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건 단지 착각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어쩌면 그 또한 자신의 착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미치광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건 아마 이중의 의미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가 정말 착각에 빠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겠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또한 미친 것이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겸손과 예의범절이 더 큰 이익을 위한 술책이 되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그것들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런 세상 속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들고요, 당신은 당신답게 살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 광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종종 이방인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그와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와 달리 우리는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뿐더러, 현실 속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와 그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처럼 보이는데, 기술적 환경의 변화에 휩쓸려 떠밀리듯 살아가는 우리와 달리, 그는 마치 좌표계의 원점에 선 것처럼 세계를 바라보며, 그 변화의 속도를 측정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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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K-컬처의 그림자, 혐중이라는 문화정치 : 2020년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자부심은 어떻게 배타적 혐오가 되었나 허희 1. 정동적 역설의 면면 2020년대 한국 사회는 기묘한 정동적 역설 가운데 작동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K-팝‧K-드라마‧K-웹툰‧K-게임 산업까지 확장된, 이른바 K-컬처 복합체가 가시적 성취를 축적하면서 한국의 상징체계를 재편 중이다. 이것은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정동적 보상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화적 자부심은 경제 양극화를 포괄하는 저성장 국면‧불안정 노동‧청년 세대의 좌절과 같은 내부 불안을 상쇄하는 역할로 작용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K-컬처는 문화 산업만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국가 정동을 생산‧관리하는 체제로서, 문화적 자부심은 일종의 집단 감정 자본으로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였다.1) 동시에 한국 사회는 ‘혐중(Sinophobia)’으로 대표되는 조직화된 집단 감정의 분출을 목도하고 있다. 이 글은 그것을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동시대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부심이 혐오로 전이되는 정동 형성의 정치적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니까 혐중은 자부심의 어두운 파생물, 정동의 이동과 변조가 빚어낸 적대의 결과라는 논점이다. 여기에서 비판과 혐오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비판은 특정 행위나 정책, 제도적 불투명성이나 권력 작동 방식과 같은 대상을 향한다. 이는 사실 검증과 토론 가능성을 전제한다. 예컨대 중국 정부의 신장 위구르 지역 내 강제 수용 의혹, 홍콩 보안법의 인권 침해 문제,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 등은 어떨까. 이상의 논란은 분석과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국제사회가 공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안이다. 반면 혐오는 문제를 특정한 정치·사회 행위에서 찾지 않는다. 증오의 대상을 일반화하고 전체화함으로써 제거의 정동을 발생시킨다. 이때 중국(인)은 특정 행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문명적으로 열등하고 비도덕적이며 반인권적인 타자로 폄하된다. 이 같은 혐오의 메커니즘은 정동의 순환—감정이 사회적으로 이동하며 타자를 구성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작동한다. 더불어 그들을 향한 정서가 실체적 검증 없이 사실처럼 굳어지는 탈지성적 담론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0년대 한국 사회 내 반중—혐중 세력은 합리적 비판과 비합리적 망상의 경계가 붕괴된 상태에서 광적으로 결집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제재가 대증 요법에 그치지 않으려면 면밀한 분석이 요청된다. 오늘날 혐중은 SNS·커뮤니티·유튜브 생태계의 유통망에서 집단 감정의 양극화를 선동한다. 김치·한복 공정 논란처럼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문화 투쟁은 팩트에 근거한 학술 논쟁이나 국제문화 비교 연구의 영역이 아니라, 무분별한 감정 투쟁의 장으로 격화되었다. K-팝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이른바 사상 검증(중국 시장을 겨냥한 발언을 했는가, 홍콩·대만 문제에 침묵했는가)의 사례는 집단 감시된 순응주의가 디지털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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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2 -웹소설이라는 가능성 류수연 1. 지금은 웹소설의 시대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 능력일까, 모국어 능력일까? 물론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요소지만 부득이 한 쪽을 골라야 한다면? 수년 전이라면 당연하게도 ‘외국어’라는 답변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성형 AI를 활용한 초벌 번역이 보편화된 오늘의 관점에서라면, 그 답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아주 결정적인 장면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바로 2022 한국문학 번역신인상에서 말이다. 웹툰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40대 일본인의 한국어 실력이 초급 수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당선자는 AI를 활용해서 초벌 번역을 진행했고, 그 뒤 자신이 일본어 표현을 가다듬었다는 것이었다. 당락을 결정한 것은 만화적 표현과 리듬에 익숙한 당선자의 표현력이었겠지만 번역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언어능력 없이 AI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뒤로 채 2년도 되지 않아 생성형 AI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으니, 어쩌면 그 혼란은 이러한 기술 변화에 대한 예고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웹 서사의 달라진 위상을 공공연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AI 번역만큼이나 문학번역의 부문에 웹툰이 있다는 점도 큰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웹 콘텐츠에 부여되었던 수많은 평가절하를 떠올린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웹-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여러 콘텐츠가 등장한 지 불과 20여 년, 그 확장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웹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시장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선발 주자인 웹툰과 후발 주자인 웹소설 모두 대중문화의 절대적 강자로 부각되었다. 거기엔 이들 콘텐츠 자체의 매력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들 콘텐츠가 다양한 미디어믹스 과정에서 원천IP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웹 기반 서사가 트랜스미디어의 확실한 강자로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웹소설의 경우에는 선발 주자인 웹툰의 원천IP로도 활용되고 있으니, 웹 콘텐츠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난 회차에 살펴보았던 케이팝 스토리텔링 역시 이러한 웹 콘텐츠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바, 오늘날 한국 대중문화를 이끄는 콘텐츠로서 웹 기반 서사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의 한 정점으로 다가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그 중심에는 또다시 이야기가 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각축을 벌이는 웹 플랫폼이라는 가상공간, 그리고 그곳을 종횡무진하고 있는 웹소설의 의미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2. 취향의 타파스? 일반 문학과 함께 웹소설을 비평적 연구 대상으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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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화이자와 셀트리온 -김사과 혹은 21세기 한국-소설의 한 표정 윤재민 1. 비물질 도시공간 김화진의 소설 「새 이야기」는 오늘날 서울에 홀로 거주하는 도시적 존재의 일상과 욕망에 대한 낭만적인 우화이다. 소설의 일인칭 화자인 진아는 아직은 자리 잡지 못한 웹툰 작가다. 그녀는 어렵게 연재를 따내고 독자들의 실시간 반응을 살피면서 하루하루를 버텨 낸다. 매 순간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도 자신의 일상을 놓치지 않는, 이 고단한 일인가구 여성 창작자의 낙은 소소하다. 성수동이나 불광천같이 서울 시내 한강 북쪽의 정비된 수변 일대를 산책하거나 썸남 천희가 선물한 대파를 잘라 자취방에서 떡볶이나 닭발 같은 매운 음식을 해 먹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지루하고 불안정한 시간을 견뎌 내는 중이다. 어느 날 진아의 일상에 기이한 환상이 찾아온다. 그것은 갑자기 천희가 선물한 대파가 진아에게 말을 건네면서 시작된다. 대파는 대뜸 썸남 천희가 오래전부터 진아를 짝사랑해 온 청둥오리임을 폭로한다. 대학 시절의 진아를 보고 첫눈에 반한 청둥오리가 어렵사리 인간이 되어 그녀 곁을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진아는 살아남기 위한 지극히 ‘인간적인’ 시절을 통과하는 서울에서의 모든 순간이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한 시절이었음을 느끼며 잠시 위로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기 어려운 사적 환상을 웹툰의 소재로 사용하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도시인 진아의 환상 체험 그리고 이를 소재로 한 창작의 욕망은 흥미롭다. 도시에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익명적 존재의 삶의 양태와 그들에 의해 생성되는 도시의 비물질적(immaterial) 공간 양식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도시공간은 막강한 위정자나 위대한 건축가의 기획을 한참 초과한다. 인간적인 양태의 모든 것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각양각색의 과밀함으로 끓어오르는 공간이다. 그 안으로 수많은 익명적 존재들이 각자의 욕망과 꿈을 안고 모여든다. 그들의 비전은 실현되기 전까지 어느 정도 망상적 성격을 띨 터이다. 하나 실은 바로 그 망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그들을 도시에 현전하게 하는 비물질적인 역량이다. 도시는 무차별적으로 이들을 일단 받아들이고 그들의 적합성을 매 순간 시험한다. 모두에게 365일/24시간이 ‘평등하게’ 주어지는 가운데, 각자가 점유하고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요령껏 살아 내야 한다. 그렇게 극도의 혼잡과 과밀함 속에서 척도 없이 흘러가는 존재들이 그저 자신에게 귀속되는 욕망 혹은 망상과 관련된 공간을 스스로 창안하며 밀집한다. 「새 이야기」는 성수동이나 마포·은평구 일대 수변 지역을 불안하게 점유하며 살아가는 도시적 존재 양태를 비물질적 공간 양식과 결부시켜 포착해 낸다. 척도 없이 증식하는 인간적인 욕망을 담지한 비물질 공간은 20세기 후반기 소설의 도시적 사유와 글쓰기에 첨가된 가장 흥미로운 스타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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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텅 비어 있는 ‘나’들의 우주(적 연대) 김수이 1. ‘자아의 무화’와 ‘무위의 주체’에 대한 열망 과거로 회귀하는 일은 늘 가능하다. 기억과 글 속에서는 더욱더. 십여 년 전 우리 사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격한 열망을 뿜어내는 말들로 즐겁게 소란했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세상에서 피로와 불안에 찌들어 있었지만, 찌들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 기획된 광고가 먼저였는지, 대중 사이에서 싹튼 유행어가 먼저였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2015년에 한 신용카드사가 내세운 이 문구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일상의 곳곳에서 이 말들은 가볍게, 그러나 강력하게 번져나가면서 아무 행동과 생각을 하지 않는 ‘나’에 대한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열망을 공론장에 풀어놓았다. 대중이 열광한 ‘아무것도 안 함’의 의사 표명은 ‘주체성의 반납/포기/해체의 의지’나 ‘무위(無爲)의 주체성’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시대의 정신적 편향성의 사태를 한껏 부추겼다. 동시에, 경제와 사회 발전을 위협할 수 있는 ‘무위’의 사태를 광고와 유행어라는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언어 유통 장치를 통해 무마하는 이중의 역할을 했다.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개인이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 주체’로 광적으로 변신해 가는 비극을 파헤친 한병철의 명저 『피로사회』(문지, 2012)가 출간되어 널리 읽히던 무렵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나’에 대한 사회적 열망의 기원을 찾아 조금 더 회귀해 보자. “난 누구? 여긴 어디?” ‘멘(탈)붕(괴)’의 비명을 대신하는 이 말이 처음 유행한 것은 1990년대였다. 역시 유행어가 먼저였는지 히트곡이 먼저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인기 힙합 듀오 ‘듀스’가 부른 「우리는」(1993년 발표)의 후렴에 유사한 문장이 들어 있다.2)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지금 저 멀리서 누가 날 부르고 있어./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이젠 우린 앞을 향해서만 나가겠어.” 정체성과 처소를 상실했으나 “누가 날 부르고 있”기에 “앞을 향해서만 나가겠”다는 외침은, 희망에 차 있으면서도 무모하게 다가온다. 앞으로만 무한히 질주하라는 파시즘적 자본주의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다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 곡의 제목이 ‘나’가 실종된 세상의 ‘우리는’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 ‘우리’는 사회의 문제점과 위험한 방향성이 그대로
- 관리자
- 2025-12-01
조망 손원평 도시는 언제나 빛났다. 낮이면 유리창마다 반사된 햇빛이 먼 산자락까지 닿았고, 밤이면 네온사인이 어둠을 밀어내며 깜박였다. 하나의 거대한 발광체처럼 도시는 스스로를 밝혔다.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혹한 속에서도 사람들은 꿋꿋했다. 더위와 추위가 무자비하게 덮쳐도 그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곳에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성공하지 못할 거라 여긴 허허벌판에 세워진 도시. 도시의 이름은 명함이었고 긍지의 상징이었다. 도시 한복판의 호수는 절반은 자연, 절반은 인공의 산물이었다. 여름에는 해수욕장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 태양을 즐기고, 겨울엔 얼어붙은 호수 위로 스케이트 날이 반짝였다. 애초에 이 분지는 물을 품도록 생긴 땅이었다. 오래된 지도를 펼쳐 보면 파란 선과 옅은 음영이 겹쳐져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 척했다. 하천 자리에 도로가 뚫리고, 논과 습지가 메워진 자리에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두가 품은 희망도 높게 쌓여 갔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 도시는 단단한 땅이 아니라, 한때 분지였던 곳을 억지로 길들여 그 위에 세운 도시라는 걸. 그럼에도 사람들은 더 높이, 더 거대하게 쌓아 올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물 위에 도시를, 도시 위에 또 다른 미래를 약속하는 이름들을 붙여 가며. 도시로 향하는 길에는 경계가 하나 있었다. 도시로 들어가는 자와 빠져나가는 자를 가르는 협소한 목구멍 같은 톨게이트였다. 낮이면 끝없이 이어진 차량이 통로를 밀고 들어오다가 밤이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곳에 유리로 둘러싸인 작은 부스가 있었다. 작은 창문을 통해 하루 종일 팔이 뻗었다가 돌아왔다. 팔을 뻗고, 카드를 거두고, 결제한 카드를 다시 내민다. 끊임없이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것. 그것이 수하의 일이었다. 차들이 일정한 리듬으로 브레이크를 밟는 동안 창문 너머로 무표정한 얼굴들이 흘러갔다. 남는 것은 팔의 무게와 몸을 짓누르는 피로뿐이었다. 수하의 하루는 새벽에서 낮까지, 낮에서 밤까지, 밤에서 다시 새벽까지 세 토막으로 이어졌다. 화려한 도시의 입구에 앉아 그녀는 빛을 향해 몰려드는 차들을 감정 없이 맞이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날카로운 배기음이 더 이상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은 것도 오래였다. 그곳에서 수하는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냉기를 고스란히 느꼈다. 몇 안 되던 근처 자리 동료들은 차츰 사라졌고, 먼 곳에서 근무하는 동료들과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교대인과의 짧은 접촉, 오가는 차 안의 사람들 외에 사람을 대면할 일은 거의 없었다. 드물게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을 때, 텅 빈 차도에 사람이라곤 자기 혼자라는 걸 섬뜩하게 자각할 때조차도 수하는 자신이 유일하게 이곳에서 버텨 낸 사람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특별히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놀랍도록 단조로운 직업생활을 영위하는 게 전적으로 운의 작용이라고 누군가 말해 줬다면 수하는 누구보다 빨리 수긍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행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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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한없이 축축한 이야기 - 김경욱 『스프레이』 (문장웹진 2011년 5월호 수록) 읽기 김미월(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11년 5월 에 게재되었던 김경욱의 단편소설 「스프레이」는 709호에 사는 어느 남성 화자의 이야기이다. 그의 실수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의 강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은 화자가 실수로 다른 사람의 택배를 집에 가져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렇다. 처음에 그것은 단순한 실수였다. 그러나 문자 메시지 하나도 퇴고를 거듭해서 보낼 만큼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실수에 당혹감과 불쾌감을 느낀다. 그의 손이 곧 땀으로 축축해진다. 화자에게 ‘축축한 손’은 일종의 재앙과도 같다. 축축한 손으로 첫사랑의 손을 잡았다가 차인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화자는 실연보다 실수에 더 신경 쓰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첫사랑에게 차였다는 사실보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불상사를 겪지 않기 위해 타인과 실수로라도 손이 닿는 일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 한 번의 실수는 넘어갈 수 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는 명제가 더 중요하다. 물론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실수할 때가 있고 그때마다 긴장으로 손이 축축해진다. 그럴 때면 그는 늘 자신에게 고함치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 축축한 놈……. 왜 손이 축축해졌을까. 그는 원인을 하나씩 분석해본다. 손이 축축해진 것은 실수로 남의 집 택배를 들고 왔기 때문이다. 남의 집 택배를 들고 온 것은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떨어진 것은 피로감 때문이다. 피로감은 밤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밤잠을 설친 것은 옆집 고양이의 울음소리 때문이다. 정리하면 옆집 고양이가 울었기 때문에 그의 손이 축축해진 것이다. 실수의 원인을 알았으니 실수를 반복할 확률도 줄어들 것이라며 그는 안도한다. 공교로운 상황들이 겹치면서 택배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화자는 별수 없이 집으로 다시 가져온 택배를 충동적으로 개봉한다. 묘한 쾌감과 해방감을 느끼는 가운데 잡다한 물건들 속 스프레이가 눈에 띈다. 그의 손을 땀으로 축축하게 만들었던 원흉인 택배의 정체가 알고 보니 땀 냄새 제거용 스프레이였다니. 그는 스프레이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버린다. 그날 이후 화자가 다른 사람의 택배를 집으로 가지고 오는 일이 반복된다. 실수라면 용납할 수 없지만 고의니까 괜찮다. 그에게는 행위 자체의 윤리성보다 그것이 실수인지 고의인지 의도 유무를 따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옆집 여자의 택배를 집으로 가져오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옆집 고양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자신의 항의를 번번이 묵살했던 무례한 옆집 여자에게 타격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상자를 연다. 이 대목이 이 소설의 미드 포인트이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옆집 고양이의 사체였다.
- 관리자
- 2025-12-01
달빛 현호정 너울로 나란히 더 갈 수 없는 데까지 아마도 내가 머무를 물가에 닿아 숨 쉬듯 우릴 어르고 달래 줄 땅 (이제) 영원할 이 이름이 기를 하얀 바깥이지 놓을 수 있어 볼 수 있었네 ‘땅에서 죽어 하늘로 내리는 이’ ‘이 땅에서 죽어 저 하늘로 내린 이’ 믿을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한 믿어야 하는 앞길로 아득한 믿지 않아도 저절로 문득 환하던 ···별 ···별 ···별 달 빛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구름 속에서 들었다. 우리는 그리고 냄새였는데 푸른 우유의 냄새 같았다. 푸른 우유가 있다면, (여기) 푸른 염소가 있어 푸른 새끼를 낳는다면, 아니 (여기서는) 염소가 아니라 양이라도 상관없었다. 카라칼이나 바위너구리, 알을 낳는 새들까지 푸른빛을 가정할 수 있었고 새끼에게 원하는 걸 먹일 수 있었다. 새뽀얀 물.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필요했던 것. 향료가 되는 풀들처럼 자연의 법칙을 배반하면서, 그것은 마지막까지 싱싱하고 그 후에 더 생생하고, 푸르고 계속 풍부할 거고, 우리는 계속 올라가면서 하늘을 떠다니는 이 냄새였고 그게 아니라면 이 냄새와 함께 떠다니는 하늘이 바로 우리였다. 이제는 그런 게 우리였다. 이제는 그렇게 우리인 거였다. 나는 혼자서도 꽤 아래로 내려가 보았는데 여전히 붐볐고 공중이었다. 속삭임으로 가득 찬 구름들은 제각기 몇 군데 뜯어진 채로 자신의 깃털을 바람에 그냥 날려 보냈고, 그건 살짝 뭉치면 붙는 작은 문제였다. 하지만 우리는 고치고 치유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우리는 아주 많아.” 누군가 말했고 그는 어른이었다. 나는 어른이 아니어서 알 수 있었다. “아저씨, 제 발을 밟으셨어요.” 또 어른이 아닌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발이 없는데···.” “전 있어요! 전 살아 있을 때 발이 없었거든요. 그러니 지금은 있어야지요.” “네 말이 맞다. 발을 밟아서 미안하구나.” 그때 나는 우리가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넓지만 둥글고 우리는 움직일 때 돌아야 했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러면 아직은 우리 중 하나를 하나의 몸으로 만나 말할 수 있었다. 말하고 만지고 끌어안기. 그리고 싸우기. 그건 사는 일의 거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물론 우리는 싸움에 대해 생각했다. 심지어 지금도! 그러니까 아직도 그랬다. 만약 여기서도 뭔가 나빠진다면, 결국 우리는 전부 나쁘게 변해 버릴지 몰랐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게 세상 전체에 꼭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
- 관리자
- 2025-12-01
[문장서포터즈] 계절을 보내는 방법 -무화과나무 한 그루와 오팔 라이트 문장서포터즈 2기 김수현 올해 10월 초에 발매한 테일러 스위프트의 신곡 〈Opallite〉는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시작된다. I had a bad habit of missing lovers past (나는 지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나쁜 습관을 가졌어) 이후 가사를 통해 테일러는 “사실 나는 망령 같은 추억 속에서 살았던” 것이라고 위 ‘습관’에 대해 덧붙인다. 망령과도 같은 추억. 너무 좋았거나 너무 좋지 못한 과거 중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무의식 한편을 둥둥 떠다니는 기억들. 아마 모두 공감할 이야기리라 생각한다. 어떠한 기억은 묻어 둬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매번 그러길 실패하니까. 어쩌면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일지 모른다. 내게 있어 문학은 보낼 수 없는, 애도 불가능한 기억의 반복이다. 테일러가 곡을 낸 시월은 올해의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이다. 나는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 들어가서 도서를 구매하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해 왔는데, 이번 가을은 독서와 더불어 테일러의 신곡과 함께하고 있다. 오늘은 〈Opallite〉와 덧붙여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 가을 2025》을 소개하려고 한다. 사진1. 문학과지성사 《소설 보다 : 가을 2025》 먼저, 《소설 보다》는 문지문학상 후보작을 세 편씩 묶어 낸 얇은 단행본 시리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맞춰 4권씩 해마다 출간되므로 젊고 개성 있는 한국 작품을 빠르게 접할 수 있는 도서이기도 하다. 사진1. 문학과지성사 《소설 보다》 시리즈 표지 올해 《소설 보다》의 표지는 해마다 다른 디자인을 선보인다. 이번 2025년에는 각 계절에 어울리는 과일나무를 콘셉트로 하고 있는데, 아직 덜 익어 푸릇한 딸기나무와 싱그러운 포도나무가 그려진 봄, 여름에 이어 가을에는 무화과나무가 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아무래도 각 시즌에 맞춰 출간되는 책이다 보니 다음 계절, 해의 표지 디자인을 기다리는 나름의 재미를 찾을 수도 있다. 《소설 보다》 시리즈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좋은 작가들의 글을 모아 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좋은 작가라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돌이켜 보니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은 모두 이 책에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각 소설 한 편을 마치면 문학 평론가와 작가의 인터뷰가 실린 페이지가 등장하는데, 그 속에는 글을 쓰는 동안 작가가 구상하고 골몰했던 내용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문학잡지보다 임팩트 있고 기성 작가에 대해 내밀하게 알 수 있는 위 시리즈에 더 손이 가는 것 같다. 이번 《소설 보다 : 가을 2025》에는 서장원의 「히데오」, 이유리의 「두정랜드」, 정기현의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가 있다. 먼저, 「두정랜드」는 지방 소도시의 놀이공원인 ‘두정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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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문장서포터즈] 읽고 쓰는 일을 지속하기: 조시현 작가님과 함께 문장서포터즈 2기 김소리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을 지속하고 싶다. 몇 년 전부터 생각해 온 바람이다. 그 바람을 실천하기 위해 문학동인 ‘창문’을 만들고, 꾸준히 창작 스터디 활동을 해 오고 있다. 한 번쯤 모임을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모으는 일이 어렵고,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게 모임을 유지하는 일이다. 우선 ‘창문’이 반년 이상 별 탈 없이 이어지고 있음에 감사하다. 함께 읽고 쓰고자 하는 비슷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다행이라고 느낀다. 문학은 늘 혼자 쓰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고독을 함께 감당할 사람이 있을 때 오래간다. 동인을 꾸리며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지속 가능한 문학의 장(場)’을 만드는 일이었다. 문학이 개인의 내면에서 비롯되더라도, 그것이 계속 숨을 쉬기 위해선 공유의 자리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사라지기 쉬운 문학적 대화의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누군가는 글쓰기의 리듬을 잃지 않기 위해, 또 누군가는 자신의 언어를 타인의 시선 속에서 단련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다. 동인 ‘창문’은 그런 의미에서 각자의 방을 열고 서로의 문장을 통하게 하는 하나의 창문이 되고자 한다. 대표로서 나는 ‘창문’이 단순한 합평 모임을 넘어, 지속성과 관계성을 실험하는 문학적 커뮤니티로 성장하길 바란다. 한때의 열정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동인이 아니라, 문학을 삶의 습관으로 만들어 가는 작은 공동체 말이다. 매달 작품을 나누고, 동시대 문예지와 신진 작가의 언어를 함께 읽으며, 동인 내부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 목표다. ‘창문’이 누군가에게는 창작의 첫 무대가, 누군가에게는 다시 문학을 붙잡게 하는 이유가 되기를 바란다. 문학동인으로서 활동하는 일의 의의는 결국 ‘함께 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작업이지만, 그 고독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문장은 더 멀리 닿는다. 타인의 언어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문장을 비춰보는 경험은 나에게 매번 새로운 자극을 준다. ‘창문’의 활동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창작의 지속이 아니라, 동시대의 문학이 서로를 비추며 살아 있다는 증명이다. 그러나 어려움도 있다. 나름 ‘문학동인’이라고 만들어 놓았지만, 어떤 활동을 해야 할지 혹은 어떤 식으로 더 발전해 나갈 수 있을지···. 이런 고민들에 대한 조언을 얻고, 신춘문예 투고를 앞두고 작품에 대한 합평도 받고자 조시현 작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시현 작가는 시와 소설 부문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문학 활동을 이어감과 동시에 문장서포터즈의 모더레이터로 함께하고 있다. 올해 소설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과 시집 『시뮬레이션 제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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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문장서포터즈] 푸른 소리가 울리는 교실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방문기 문장서포터즈 2기 카페라떼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하루에도 수십 편씩 올라오는 청소년 작품, 백일장에 참여하는 열정적인 친구들, 그중에는 문학을 진로로 삼고 싶은 학생들도 있죠. 그렇다면 이 친구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우며 성장하고 있을까요? 이번 취재에서는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이하 안양예고 문창과)를 직접 찾아가 그 현장을 들여다봤습니다. 국내 예술고등학교 중 문예창작과가 있는 학교는 단 두 곳뿐이에요. 고양예술고등학교와 안양예술고등학교죠. 안양예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고이고, 연극영화과·음악과·미술과·무용과·문예창작과 총 다섯 학과가 있어요. 학교가 자리한 언덕은 ‘한라산보다 가파르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사진1,2. 안양예술고등학교 본건물과 문예창작학과 실기실 문예창작과는 한 학년당 40명으로 구성돼 있어요(총 3반). 재작년부터 지원자 수가 늘기 시작해 올해 경쟁률이 2.98 대 1로 점점 문학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이 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최근 몇 년 사이, 안양예고 문창과 학생들이 다양한 청소년 문학상에서 이름을 올리며 학교의 문학적 저력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어요. 그 덕분에 문예창작과에 관심을 두는 학생들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사진3. 올해 안양예고 학생들의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 문예창작학과라는 특성 덕분에 글쓰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곳이죠. 시 창작 실기, 소설 창작, 문학 이론 등 전공 수업 외에도 문학 감상이나 독서 토론 수업을 통해 사고력을 넓혀 갑니다. 작가 선생님 특강과 합평 수업이 활발히 이어지는, ‘문학의 공기’가 가득한 교실이에요. 예고의 장점인 학과 전시회, 안양예고 문창과는 ‘눈시울전’이라는 학생들의 작품 전시회를 매년 5월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로 2학년생들이 참여하며 가끔 3학년 학생들도 조금씩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로 안양아트센터 갤러리 미담에서 전체 전시 후, 서울 교보문고에서 지원하는 학생들 중 일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요. 이런 공간에서 매일같이 글을 쓰는 학생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요? 그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습니다. 사진4,5. 안양예고 눈시울전 작품 사진(이현교, 최아원 학생 작품) 2학년 학생들의 이야기, 교실에서 들려오는 연필 소리 2학년 이현교(시 전공), 최아원(소설 전공) 학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Q: 문창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요? 처음 마음을 먹게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현교: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행사로 시를 써서 우수 작품으로 선정 받은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경험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같습니다. 최아원: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 왔는데요, 초등학교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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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동도지 이혜미 아마도 불안의 힘을 믿던 겨울이라서 갖가지 꿈을 옮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봄잠에서 깨어나 여름 저녁의 먼동으로, 새벽안개를 팔아 복숭아나무 잎을 얻어 가며 환하고 독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도망침의 연속이더군요 숲길을 걸으면 줄지어 견디고 있을 나무들, 두려움이 우리의 신이란 걸 깨닫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지요 걸음 딛는 사이마다 잿더미였습니다 나무의 그림자를 밟으며 약속의 기한을 짐작했습니다 고독도 오래된 미신이라서 부를수록 제 몸집을 키워 갑니다 껍질 터진 고목을 껴안으면 떠난 자들의 정념이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빛과 바람은 갈라지지 않고 물줄기는 몸 없이 스미는데 인간의 욕심만이 끝없이 파묻힐 안온함을 찾는군요 신목에 깃든 혼백인들 가지 하나 붙들고 버티겠습니까 벽사(辟邪)도 축귀도 내내 머금은 기척은 건드리지 않는 법입니다 상처를 부적처럼 지니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재가 불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쇠락한 자리에 나앉으면 허기도 재앙도 다정한 내 편이었지요 대문에 뿌려 둔 붉은 술과 흰쌀밥으로 내내 배부를 수도 있겠지만 다녀간 자취에 자꾸 생각을 엮으니 훗날 껴묻거리로 삼을 어리석음입니다 겨울빛에 새로 돋은 가지 끝 남청 깃발로 융숭해집니다 작은 매듭으로 어려움을 다 묶어 둘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저 나무의 방향을 벗 삼아 오랜 홀로를 여며 두는 잠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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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니트의 농담 이혜미 아니 근데 오늘따라 더 멋지네 미치고 싶은 계절에는 옷을 잘 입었다 불빛처럼 젖은 사람도 있었고 밤마다 액정을 닦던 시간도 있었다 멀쩡한 얼굴로 인사하고 손톱만 깨물다 헤어졌어 기억으로 모습을 모아 둘 수 있다 안심했던 것 같아 남겨진 한때를 바라볼 시간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찍는 순간 잊어버리고 마는 장면들이었는데 지나간 사람들은 왜 다 웃고 있을까 보풀처럼 희미해진 얼굴들이 멀어서 더 예뻤다 아름답다는 말은 닿지 못해도 좋다는 뜻이래 근데 이거 혼자 들기엔 너무 무거운 마음인데 조금만 같이 들어 주면 어떨까 사실 미치기는 어렵지 않아 정확히 미치기가 어렵지 제정신이었다면 지금 여기 있겠어? 진작 결혼했겠지 좋았던 건 다 미쳤지 사라진 뒤에도 말을 걸어 멀리를 향해 춤을 추게 해 올 풀린 스웨터처럼 웃었다 제정신으로는 의미도 여기도 틈새의 춤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 관리자
- 2025-12-01
수북이 쌓인 바닥 심지아 나의 말과 멀어지려고 생겨나는 거리에서 단어 그림자 보행자 너의 남은 것 이해가 떨어져 나간 발치에서 흐려지는 발 입이 흘리고 다니는 음절의 분절들 가만한 바람 그것이 나의 근력 단어를 따라 정지한다 거기 와 있고 도착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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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근대 고르는 법 심지아 Wet floor - Safety Cone 젖은 바닥 주의해야 할 표면 머핀 틀, 빈 머핀 틀 정오에는 그런 것들이 보였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풀 한 포기 없는 텍스트가 내게는 없다 흐르는 물에 그것을 씻었다 쥐고 있는 것을 나는 몇 가지 이유를 듣게 될 것이다
- 관리자
- 2025-12-01
봄비는 힘이 든다 최호일 고기를 구워 먹다가 밖에 내어 놓으니 푸시시 푸시시 비에 젖는다
- 관리자
- 2025-12-01
첫눈 내린 거리 최호일 눈이 사십 대 여자처럼 내린다 이미자 씨의 첫눈 내린 거리라는 슬픈 노래도 있지만 그것보다 약간 더 슬프게 내린다 약국의 간판 위에도 쓰레기통 위에도 어떤 눈은 나뭇가지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 있다가 누군가의 손처럼 떨어지기를 반복하는데 그것을 십 분 동안 바라보는 개도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일이야 누구나 흔한 일이지만 첫눈을 맞으며 개를 바라보는 것은 드문 일이다 시간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 첫눈이다 그냥 놔두면 녹을 것 같다 기억의 여왕들이 그녀의 어깨 위에 가슴과 허리와 종아리와 이데올로기와 통증을 지나 눈으로 만든 입술처럼 걸어 다닌다 첫눈은 내리고 저 여자가 거리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전 국민이 바라보는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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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1
고백 강이현 내 안의 창문은 전부 닫혀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이라는 옷을 입고 다녔다. 옷은 무거웠다. 괜찮고 괜찮지 않은 날에. 미안하고 미안하지 않은 날에. 너는 자주 물었다. 내가 한 질문을 나에게 돌려주었다. 물음 하나쯤은 지울 수 있다고 믿었지만 어떤 말은 하지 않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방 안 어딘가에 눌어붙어 있음을 나중에 깨닫는다.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 내일도 그와 함께 밤을 견디고 싶다.
- 관리자
- 2025-12-01
열매 강이현 이 호텔엔 과일이 없었다. 당신이 들어온 이후로 나는 매일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너무 익으면 검은 점이 생기고 먹을 수 없게 된다고 하지만 모든 상처는 문장이다. 나는 방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무언가의 침입을 준비하는 상태로. 룸서비스는 감정을 배달한다. 얼음과 따뜻한 수건. 그리고 보이지 않는 열매 한 알. 내가 과일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얼굴을 가늠하다 말고 벗어 놓은 신발을 보고 기억을 더듬는다. 언제부터 이곳에 와 있었지. 하루가 더 지나면 색이 변하고 말 것이다. 예정보다 이른 퇴실을 망설인다.
- 관리자
- 2025-12-01
여우의 빛 권기덕 나는 악역 배우다. 한때는 유명한 서부극 주인공이었다. 지금은 추락하는 중이다. 방금도 TV 시리즈 촬영장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다. 쓰러진 것은 그래도 쓰여지는 것, 쓸모 있는 시절은 언제나 나 자신보다 빠르다. 나로부터 악마를 꺼내 어린이 앞에 마주하게 한다. 악마 또한 배우의 실감 나는 죽음을 기대한다. 배우는 삶에서 끊임없이 배우는 자다. 어느 날엔 세트장에 이상한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빛은 호텔 기둥에 매달린 밧줄에 한동안 머무르다 술통 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술통은 스스로 굴러 가기 시작했다. 술통에서는 어떤 여행자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울부짖는 짐승의 거친 포효가 들리기도 했다. 술통은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 술통은 새가 되어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어떤 빛에 대해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다 그곳에서 길을 잃었다. 빛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불안했다가 섬세해졌다. 빛을 향해 대사를 던지니 그림자가 걸어왔다. 사라진 빛은 자유로웠고 나는 끊임없이 솟구치는 분노가 이 세트장을 불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불타는 세트장에서 대역 스턴트맨이 나 대신 죽고 영화는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나는 그제서야 이곳이 어린 여우와 대화를 나눴던 트루디 프레이저* 의자 앞이라는 걸 깨달았다. 빗속에서 빛이 다시 보였다. 빛을 따라 다시 걸었다. 개가 뿔 달린 인간의 다리를 물어뜯고 있었고 총에 맞은 히피족들은 머리가 없었다. 살인 영화를 보며 자란 살인자는 공중에 칼을 휘두르다 빛에 눈동자를 잃는다. 빛은 누군가에겐 빚이 되어 공공의 적이 되기도 했고 누군가를 위해 추억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저 빛의 동작을 흉내 냈다. 가끔 빛이 내 안에 머물다 빠져나갔다. 그해 배우의 수영장에는 이웃에 사는 여우들이 밤새 술을 마시며 빛과 함께 놀곤 했다. * 영화 〈원스 어 폰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등장하는 소녀.
- 관리자
- 2025-12-01
시계 권기덕 영상을 촬영했다 시계를 톱으로 잘랐다 말복이었다 너는 졸업작품전에 내 행위가 담긴 영상을 발표한다고 했었다 여치 울음소리가 들렸다 타조가 죽은 타조를 찾아 도롯가를 뛰어가는 내일 뉴스가 오늘 흘러나왔다 비가 내렸다 해가 쨍쨍했다 해가 배구공처럼 탱탱했다 나는 배구공을 톱으로 잘랐다 너는 공산품을 자르는 내 얼굴이 시계 같다고 했다 배구공 같다고 했다 영상은 되감기의 방식으로 재생된다고 했다 내가 톱에 잘렸다 시계가 완성되고 배구공이 탱탱해지고 죽은 네가 돌아왔다 가창 백숙집에 갔다 예전에 집단 총살 희생이 있었던 곳이 멀지 않다고 했다 닭을 잘랐다 7월이었다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까마귀 떼였다 영상 속에서 바다제비를 봤다 버려진 생명에 눈을 맞추다 보면 눈에서 멀어진 사람이 울었다 눈물은 금지였다 시를 발표했다
- 관리자
- 2025-12-01
내일의 국화 임솔아 씨발년이었나, 썅년이었나. 그때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마냥 당황스러웠다. 잠시 후에는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기억을 되짚어 봤다. 그러고는 그랬구나 했다. 국화가 처음으로 전한 진심이었다. 몇 번인가 궁금한 적은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를 씨발년이나 썅년 같은 거라고 여겨 온 것은. 비로소 진심을 전하기로 한 계기가 뭐였을까.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내게 정말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지금 나는 왜 굳이 국화를 만나러 가는가. 오후 두 시에 기차에서 내렸다. 약속은 내일 오후 세 시였다. 내가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게 덜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국화만을 위해 이 먼 거리를 이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것이 여행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겸사겸사 국화도 만나는 것이어야 했다. 기차역을 빠져나오자 막상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 이 도시에서 유명한 건 빵집뿐이었다. 이 도시는 볼 것 없고 놀 것 없는 곳으로 유명했다. 어린 시절에 살았던 주공아파트나 지금은 없는 개와 함께 산책을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 삥을 뜯기는 것으로 유명했던 팬시용품점 뒷골목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가기는 싫었다. 이미 다 가 봤으니까. 이 도시를 떠난 지 십 년째가 되었던 일월 일일이었다. 내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분주히 존재하던 나의 동네가 실재하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기억을 가볍게 만들고서 다시 기차를 타고 내 원룸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앞으로 조금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굣길마다 찾아갔던 비닐 천막 떡볶이집이 거기 계속 있다는 것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아주머니가 여전히 떡볶이를 푸짐하게 퍼서 접시에 담고 있었다는 것에 나는 반가워했다. 그러나 내부에 들어섰을 때 한눈에도 위생 상태가 처참해 보였다는 것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천막 안에 기름 쩐 내가 떠다녔다. 떡볶이 맛도 형편없었다. 씹자마자 어떤 냄새가 코끝을 쏘았다. 옆에서 아이들이 컵떡볶이를 냠냠 먹고 있었다. 남아 있는 국물을 먹기 위해 종이컵 속에 혓바닥을 밀어 넣고 있었다. 이토록 맛이 없는 떡볶이를 그토록 맛있게 먹었던 건지, 시간이 지나 떡볶이의 맛이 변해 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입안에 있는 것만 삼키고 천막을 나왔다. 간판이 유난히 깨끗한 국숫집이 눈에 띄었다. 개업을 축하하는 화분들이 가게 입구에 쪼르륵 놓여 있었다. 어느 동네에나 있는 프랜차이즈였다. 그 국숫집에서 국수를 먹는 동안 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방 카운터에 앉아 있는 주인 할머니, 주방 안쪽에서 식재료를 다듬고 있는 젊은 여자, 그리고 카운터와 주방을 오가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드는 아이. 창가에 다육이를 놓는 건 어때. 깔끔한 게 낫지 않니. 할머니 나 이 다육이가 뭔지 알아. 같은 말이 오갔다. 어른들의 대화는 아이 때문에 자주 끊겼다. 질문과 대답 사이에 아이의 말이 끼어들면 어른들은 대꾸를 하느라 대화가 띄엄띄엄 흘러갔다. 그 점이 나는 편안했다. 국수를 거의 다 먹었을 즈음 주방에 있던 여자가 나왔다. 내
- 관리자
- 2025-12-01
우리는 심윤경 “남양주에 가셨다고요?” 전화기 속에서 딸이 물었다. “아버지 내가 정말! (딸깍딸깍) 오늘 영하로 떨어진다고 하는데, 못 들으셨어요? (딸깍딸깍) 환절기에 가장 많이 쓰러지는데 (딸깍딸깍) 하라는 것도 아니고. 제가 지금 (딸깍딸깍) 하는 거예요?” 전화가 걸려 오고 있다는 신호음이 겹쳐 딸의 목소리는 자꾸 뚝뚝 끊어졌다. 마음이 급해지면 종종 그러듯 눈앞이 하얗게 아득해졌다. 친구들이 전화하고 있을 것이다. 딸이 전화를 끊어야 걸려 오는 전화를 받을 텐데, 딸은 거센 잔소리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래, 알았어. 일찍 들어갈 거야. 조심할게. 걱정 말아라.”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딸의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 딸의 전화를 중간에 끊어 버린 것은, 그의 기억에는 한 번도 없었다. 딸이 마음 상하지 않고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친구들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하나하나 무사히 모여서 택시를 타야 한다. 이전에 와 본 적이 없는 낯선 곳에서 여기저기 부실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조급해질 것이다. 구십 세가 되는 것이 어떤 기분이냐고, 구순 생일에 찾아온 조카들이 물었다. 딸이 예약해 놓은 한정식집은 유명세가 있는 곳이었지만 시장바닥처럼 번잡하고 시끄러웠다. 오래 담아 놓은 나물 윗부분이 말라 가고 있었다. 그의 자식들은 예약했던 것과 메뉴가 다르고 방도 원하던 곳이 아니었다고 한정식집에 항의했다. 자식들의 밝지 않은 얼굴을 보다가 마음이 무거워져서, 그는 여태까지 살아도 알 수가 없는 게 인생이라고 답하고 말았다. 모두 모인 자리에서 더 화창하게 대답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딸이 화를 내고 있지만 (큰소리로 “제발 자식 말 좀 들으세요!”라고 했다) 하필 모이기로 한 날의 기온이 갑자기 영하로 내려갈 줄을 미처 몰랐을 뿐이었다. 옥희는 골반이 아팠고 신성이는 방향감각이 깜빡깜빡했다. 옥희보다는 신성이가 좀 더 걱정이라서, 딸의 전화를 끊고 신성이의 전화를 받았을 때 드디어 안도했다. 신성이는 오십 대 남자의 도움을 받아 나타났고 옥희는 누구의 도움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옥희와 신성이는 지팡이를 짚었고 성훈은 아직 두 발로 다닐 만했다. 세 친구 모두 한 대뿐인 엘리베이터를 잘 찾아 고생 없이 나타났으니, 일단 모험의 첫 단계는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지하철로 오니까 참 쉽다. 여기까지 지하철이 닿는구나.” 요새는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지하철이 닿았다. 지하철 4호선이 진접역까지 닿는 걸 알았을 때 그는 만세를 외치고 싶었다. 안양, 용인, 일산에 사는 구십 대의 세 친구가 누구 도움 없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남양주 은혜와 평화 요양원에 찾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양원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사릉역이었지만 친구들이 경춘선을 갈아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멀어도 익숙한 지하철이 좋았다. 어차피 택시를 탈
- 관리자
- 2025-12-01
현재의 작은 증명 강지이 나의 편리, 안온, 양식(糧食)과 취향은 어디서 오나. 세련됨을 사랑하는 게 언제나, 너무나 부끄럽다. 다만 살아가는 것, 인간인 나의 역겨움을 알고 부끄러워하며 견디는 것. 공간이 있어 소리가 나타나듯 공간이 있어 나는 아직 있다.
- 관리자
- 2025-12-01
물오리, 샬레, 전자음악 강지이 여기 샬레가 있다. 샬레의 은빛 테두리, 물오리들 전자음악에 맞춰 미끄러지듯 떠다닌다. 하우스? 프로그레시브 하우스? 리믹스, 리믹스! 무한한 은색 철골 쏟아진다. 너희들이 미끄러지는 건 빛의 연주, 수성이 숨겨 둔 윤기 나는 날개가 되어, 비를 가로지르는 번개. 동그란 눈에 가득 찬 섬광, 샬레에 퍼진 성단. 이 미끄러지고 계속되는 삶에서 어떻게 잘 들으셨을까요? 당신 손바닥 위 자라나는 나무에 우리의 성단을 부어 보세요.
- 관리자
- 2025-12-01
빗소리 김현서 지붕에서 후드득 빗소리가 새어 들어온다 통증처럼 온몸으로 퍼진다 소리는 침묵을 잃고 집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열다섯 평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는 이 빗소리 셋돈 내는 날이면 바람을 동반한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밤새 빗물은 빗소리를 내뱉고 집은 빗소리를 받아 삼킨다 저도 나도 살아 본 적 없는 생을 힘껏 퍼붓고 나면 집은 구석부터 괴사되어 간다 너무 아프지 않게 살아가야지 작디작은 이곳, 어디부터 절단해야 할까 제 몸에 맞지 않는 집에 몸을 끼워 넣는 이 빗소리 두 개 세 개 네 개의 머리로 버티던 춥고 배고픈 소리 방음이 잘되도록 방수가 잘되도록 천막을 치고 빗물에 젖지 않으려는 이불을 만지작거린다 또 한 계절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 빗물은 얼마나 더 퍼부을까 빗소리는 얼마나 더 제 살을 베어 내야 할까
- 관리자
- 2025-12-01
이웃의 이 옷 김현서 헌 옷 수거함에 라벨 태그를 떼지 않은 오리털 패딩이 버려져 있다 버리는 건 버려진다는 건 우리가 늘 해 오던 일 서로가 서로를 꾹꾹 누르며 깃털에 묻은 햇살을 짜내는 일 인연이 닿기도 전에 인연이 다한 것처럼 이미 버려질 것을 직감한 이웃의 이 옷 꽉꽉 꽥꽥 울어도 보고 꽉꽉 꽥꽥 웃어도 보고 수거해 가지 않은 저녁은 폐허처럼 저물어 간다 추위를 뒤집어쓴 채 우린 어디로 수거될지 간절했던 시간은 다시 정신이 들고 이 옷의 이웃 잡풀들은 일찍 늙어 버리고 밀매된 결말은 번번이 엇나가고 속 시끄러운 수거함에 밤이 되면 중고매장으로 나가는 한 생이 버려져 있다
- 관리자
- 2025-12-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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