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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호

  • 작성일 2026-06-01

 [6월호를 열며]

   최근에 저는 어느 자리에서 한 편의 단편소설을 소개했습니다. ‘사실 제가 살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바로 (모든 것은/이) 이상하다, 라는 것입니다.’ 고백을 하며, 이것은 참 이상한 소설이라고, 이 소설을 쓴 작가님은 삶의 이상한 순간과 감각들을 포착하여 참 잘 쓰는데, 그것이 너무나 좋다고 말이죠.

   이상한 봄을 보냈습니다. 몇 주 전 친구가 제게 한 출판사 앞에서 만나자고 하기에 거기 볼 일이 있나 보다, 하고 나갔더니 만나자마자 다른 목적지로 향하기에 ‘그럼 왜 거기서 만나자고 한 거죠’ 물었더니 그냥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또 며칠 전엔 제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주인분이 제가 집에 없는 줄 알고 통로 페인트와 방수 작업을 하여서 종일 집 밖에 나가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 전주에는 오랜 친구와 만나고 헤어지는 길에 왠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 라는 직감이 든 적도 있었고, 그 이틀 뒤부터 돌연 무언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느라 일주일 내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운 것이 아니라 눈물이 흐른 것이었는데, 그 둘은 몹시도 다른 거라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진짜 이상한 일들은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초여름입니다. 이른 여름이 오면 왜인지 낯선 기분이 되어 조금 전까지 봄이었던 시간에 대해서, 다가올 한여름에 대해서, 그 후의 늦여름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기상학적으로 이런 나날은 너무 짧을 것이기에 모두들 제게 순간을 즐기라고 말해주지만, 지난 것들과 다가올 것들을 지금 생각하는 일은 이상하고도 재미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가볍게 생각하다 결국 글로 쓰게 되는 일이 그렇습니다. 어떨 때는 한 줄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싶을 때도 있고요.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여름으로 가는 무성한 어느 날들에 문장웹진 6월호와 함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ㅡ 이주란 소설가 외 문장웹진 편집위원 일동




2026년 6월호 <계절 틈> ⓒ 정김소리



6월호 표지 그림 작가의 말

“어제의 볕은 덜 마른 흔적처럼 머물러 있는데,
내일의 바람은 저만큼 날아오르고 있다.”


문장웹진 2026년 6월호 목차

구분

작가

제목

강상헌

  친구

  똘추 코어

강은진

  

  생선이 왔어요

김세희

  한 변의 길이가 나머지 두 변의 길이를 합한 것보다
길거나 같을 수 없다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도 본 적 없는

박은형

  오동꽃

  슬기로운 깁스 생활

배선옥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풍랑경보

전호석

  빛고리

  한밤과 낡은 사도들과

정미주

  붉은 커튼이 있는 만찬의 밤

  잃어버린 귀가  

단편소설

김정우

  제(第)

민병훈

  용4

최미래

  킬링 파트

최형경

  프롬프트의 딸들

평론

이은지

  [연재]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1)

서희원

  고독의 정치경제학
― 정영수와 임솔아의 단편에 대하여

최선재

  ‘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  이유리론의 방향을 모색하다

기획

문장웹진 다시읽기

최예솔

  [연재] 소설적 소설과 인간적 인간
― 정영수 「지평선에 닿기」(2016년 7월호 수록)

모색

문학의 곁

하유정

  어디로든 데려가는 것
― 열심히 책과 흘러가는, 출판 마케터 ‘파도’(@pado.sil)

레지던시 일기

서윤빈

  당신 이야기의 유령 콘셉트는 낙관적인 것이지요? 유령이란 존재 자체가 사후세계의 존재를 전재하는 것 아니오? 그러니 낙관적이지요.

하신하

  나미나라공화국의 이야기 요정을 보았니?

윤슬빛

  자유롭게 길 잃기

문장웹진 6월호 살펴보기

‘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나’와 ‘너’가 사라진 불편한 기이함 ― 이유리론의 방향을 모색하다 최선재 1. 두 개의 기이함 처음 이유리 작가의 소설을 읽은 건 등단작인 「빨간 열매」(『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가 대학 전공 수업에서 발췌되었던 때다. 아버지의 화장한 뼛가루를 화분의 흙과 섞자 아버지가 나무의 몸으로 부활하고, 이웃 남자의 어머니-나무와 아버지가 결합하여 “빨갛고 작은 열매”(29쪽)를 낳는 이야기는 당시엔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정말 당황스럽고 기이하게 여겼던 것은, 나무가 된 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물.”이라고 아버지가 말을 걸자 ‘나’는 “깜짝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뭐야 이러면 살아 있을 때랑 똑같잖아, 하고 투덜거리”(15쪽)기만 할 뿐이니 말이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듯한 천연덕스러움은 이유리 소설을 다른 작가의 소설과 구분 짓는 특징이다.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의 해설에서 소유정 평론가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유리의 소설에서 환상은 현실에 아주 밀착되어 있다”1)고 설명한다. 이것은 이유리 소설의 독특한 리얼리즘이기도 하며, 현실과 매우 흡사한 세계에 환상이 삽입되어 독자를 낯선 감각에 빠뜨린다. 나는 이러한 특징을 ‘환상’과 ‘기이함’ 중 어느 것으로 부를지 고민했다.2) 비현실적 사건과 대상에 집중한다면 환상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나는 환상을 현실적 사고방식으로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까지 아울러 기이함이라 부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내가 「빨간 열매」를 읽고 당황했던 것은 잠깐 놀라고 마는 ‘나’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려는 기이함은 앞서 말한 기이함과 다시 구분 지어야 한다. 이유리 소설의 기이함은 독자에게 불편하고 해소될 수 없는 문제로 남지 않는다. 기이함은 인물들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촉매제이기 때문이다. 이유리의 소설이 따뜻함과 발랄함을 전하는 주된 이유이며, 독자 역시 기쁨과 편안함, 소설적 상상력이 빚어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작품은 독자가 명료하고 만족스러운 감상을 얻기 힘들어 보인다. 잘 유지되고 발전하는 줄 알았던 인물 관계가 갑작스레 재검토되고 파멸의 예감까지 남길 때, 독자는 이유리 소설에서 예상하지 못한 불편한 기이함을 느낀다. 전자가 소설 구조로서의 기이함이라면 후자는 독자의 감상으로서의 기이함이다. 그리고 두 기이함은 작품에서 반비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이유리 소설의 균열이자 징후라 할 수 있다. 2. ‘나’와 ‘너’를 바라보는 따뜻한 기이함 사실 이유리 소설을 아우를 수 있는 특징은 또 있으니, 거의 모든 작품이 일인칭 주인공 시

  • 최선재
  • 2026-06-01
고독의 정치경제학

고독의 정치경제학 - 정영수와 임솔아의 단편에 대하여 서희원 1. 메피스토펠레스는 많은 것을 말했다. 2025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스즈키 유이의 장편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에 등장하는 괴테 연구자 히로바 도이치는 홍차 티백 꼬리표에 달린 하나의 문장을 읽고, 그것이 평생 괴테를 연구한 자신도 모르는 괴테의 문장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티백 문장의 진위와 출처를 찾던 도이치에게 젊은 연구자 스즈키는 이렇게 말한다.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1) 스즈키에게 이러한 감탄을 이끌어낸 작품은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흥미롭게도 『파우스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담기진 않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오래 간직해도 좋을 의미 있는 말들이 가득하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인이라면 『파우스트』의 서사를 역노화와 건강,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파우스트』에서 삶의 열망을 잃은 학자 파우스트의 정확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학식과 절망, 즉 내면을 가득 채운 지적 충만, 육체와 재산의 결핍을 통해 계산하면 대략 오십 대 이후로 추정이 된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저 놀기만 하기에는 너무나 늙었고,/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기에는 너무나 젊도다.”2) 이후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영혼을 담보로 계약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 열망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삶을 살아간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은 마녀의 부엌으로 그곳에서 파우스트의 육신을 열정으로 타오를 수 있는 젊음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정체불명의 역겨운 액체와 신뢰하지 못할 마술이 탐탁지 않았던 파우스트는 젊음을 되찾기 위한 좀 더 좋은 방법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요구하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이 다른 책에서 읽은 자연요법을 소개한다. 좋아요! 그건 돈도 안 들고, 의사나 마술도 필요 없는 요법이지요. 당장 저 바깥 들판으로 나가셔서, 괭이로 갈고 땅을 파는 일을 시작하시고, 당신의 몸과 마음을 극히 제한된 생활권 안으로 국한하고, 가공되지 않은 음식으로 몸을 보양하고, 가축과 더불어 가축으로 살면서, 추수할 밭에다 몸소 거름 주는 일을 약탈이라고 언짢게 여기지 마시오. 이것이 믿을 수 있는 최선의 요법이니, 팔십 고령에도 당신을 젊게 유지해 줄 것이요! (1권 115쪽) 메피스토펠레스가 알려주는 자연요법은 대체의학이나 스트레스를 만병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정신신체의학(심신의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솔깃할 그런 내용이다. 사실 『파우스트』의 서사는 두 가지 지식의 충돌이 생성하는 긴장감을 통해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나는 “철학”, “법학”, “의학”

  • 서희원
  • 2026-06-01
제(祭)

제(祭) 김정우 한밤에 아버지의 부고를 전한 이는 여동생이었다. 연락이 끊긴 지 십여 년이 훌쩍 넘었으나 안부는 서로 건네지 않았다. 아버지가 위암 4기로 투병했다는 사실과 날이 밝으면 발인한다는 것.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느라 삼일장 중 이틀이 지났다는 것. 그래도 장남이니 이제라도 내려와 보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것. 그녀는 그런 말을 장례식장의 소음 속에서 이어갔다. 나는 주소를 제대로 듣지 못했음에도 전화를 끊었다. 어느 도시로 가야 할는지는 아무래도 알 수 있었다. 장례식장이 있을 만한 곳은 남쪽 끄트머리의 신도시였다. 광역시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쯤 이동한 뒤 기나긴 터널을 통과해야 나타나는 그곳은 도시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면서 언덕 지형이었다. 소각장과 원자력발전소와 농공단지가 신도시의 입구에 모여 탄내나 분진 냄새를 게워냈다. 몇 되지 않는 아파트 단지는 농공단지와 공동묘지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곧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명문 대학교의 분교가 이전해올 것이라는 말은 노인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경전철이 들어선다는 소문만 십수 년째 무성할 뿐. 실상은 버스 배차 간격마저 멀어서 젊은이들은 취업과 동시에 그 고인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십오 년 전에 그곳을 떠나왔고 젊은 사기꾼 소리를 듣다 전과가 몇 개 생겼으며 카지노에서 일하고 도박판에서 구르다가 부동산 투기로 운 좋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그러는 동안 한 번도 그 도시에 돌아간 적 없었다. 그 도시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냄새가 배어 있는 곳.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로 자주 하늘이 때 타고 콧구멍에 까만 먼지가 끼는 곳. 원자력발전소가 언제 터져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법하며 송전선로가 사방을 꺼멓게 두르고 있어서 투기꾼들도 들어가지 않는 곳. 공장을 닫고 파산한 뒤 대리운전 혹은 일용직 노동이나 전전하며 살았을 아버지에게나 어울릴 만한 곳이었다.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간략히 짐을 꾸렸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 도시가 장례를 치르기에 꽤나 편리한 곳이라고 여겼다. 병원과 장례식장은 물론이고 화장장과 공동묘지 심지어 절간까지도 차를 타고 움직이면 십여 분 안에 닿을 수 있었다. 도시의 슬로건은 기억이 가물거리긴 해도 미사여구가 잔뜩 붙은 희망적인 문장이었다. 차라리 ‘죽음이 쉬운 곳.’ 정도가 도시의 입구에 걸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관 뚜껑을 덮듯 트렁크를 닫았다. 날이 밝기 전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네 시간 넘게 차를 몰아야 했다. 그렇게까지 장거리 운전을 해본 적은 없었다. 차 안이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해질 때까지 기다린 뒤 회전 진입로를 통해 올라갔다. ‘환영합니다.’라고 벽에 프린팅된 글자들이 거꾸로 감기고 새벽빛이 주차장 입구로 틈입해왔다. 눈에 빛이 닿으니 시야는 잠시 암전되고 미시감이 들었다. 이 순간 나는 스무 살 같기도 하고 서른다섯 살 같기도 하며 불혹을 넘어선 것 같기도 했다. 앞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아이 같았다

  • 김정우
  • 2026-06-01
잃어버린 귀가

잃어버린 귀가 정미주 산속을 헤매다 한쪽 귀를 두고 왔다 가지가 없는 앙상한 나무들은 비슷해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종의 탄생을 기원하는 실험은 계속된다 나도 모르는 심장을 건너뛴 박동1)처럼 남은 귀는 이제 안으로 들어가면 좋을 텐데 멀어져도 열렸다 닫히는 신호를 보내는 기관이 있다고 미신을 계속 믿어도 될까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어도 산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이 잠들지 않는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데려다줄게 밤이 깊었지만 맨 발로 열을 식히려는 너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 혀가 짧아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딱따구리 같기도 하고 앵무새 같기도 한데 너는 어떤 것 같아 나는 목탁을 두드리며 늘 때리기만 하는 사람 같아 눈을 감지 못해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 작은 구멍의 어둠이 옅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 사는 동안 듣기만 하는 다른 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밤이 있어 산을 찾는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듣기만 하는 내이가 그곳에 있다고 말해야지 작은 어류의 아가미가 귀로 바뀐다고 해도 이제는 믿을 수 있다 1) Jacques Audiard 감독,

  • 정미주
  • 2026-06-01
붉은 커튼이 있는 만찬의 밤

붉은 커튼이 있는 만찬의 밤 정미주 커튼 뒤에 숨겨 둔 연인을 볼 수 없어 크게 실망했어요 당신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놓친 요리가 무엇인지 맞추었을 텐데요 우린 식탁보 아래 얼굴을 숨기고 당신의 요리를 기다렸을 뿐인데 그래요, 우리는 여럿이 아니면 얼굴을 보이지 않죠 얼굴이 불콰해질 때까지 기다렸어요 메뉴판을 쾅쾅 울리며 웨이터를 다그쳤지요 목이 없는 얼굴들이 식탁을 장식하고 있는 모습 여전히 우리가 아름다운가요 수치심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감정인가요 우리는 모든 상징을 사랑하는 존재들 목 뒤로 흐르는 불협화음에 당신의 칼질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길 바라는 마음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디어 마이 디어 알고 있다면 우리의 부정을 부정할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모든 것이 잘 짜여진 대본이라는 것을 당신은 눈 감을 때까지 알지 못하겠죠 잠들지 않아도 눈 감으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먹으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 우리는 왜 인류인가요 짐승이면 안 되나요 아름다운 생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웨이터가 회전하는 사람이라면 환생을 위해 그를 숭배하겠어요 우리는 모든 것을 지불할 수 있고 그는 떠나는 관성이 없는 사람 내기는 무게가 없고 노름은 패배만 있다지만 우리는 당신을 벗어날 수 없어 먹고 먹으려고 당신을 찾아왔어요 붉은 휘장을 걷어줘요 우리는 요리하는 모습조차 욕망하는데 놈의 연인을 보려고 마음이 큰 대가를 치렀는데 디어 마이 디어 아직도!! 식전주가 안 나왔는데 왜!! 놈은 요리만 하고 있나요 상징이 게임이 된다는 것을 놈은 부정하고 우리는 한가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들 본문이 있는 텍스트를 누가 부정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해부하고 해체당하고 있지만 놈을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안타깝게 무너지는 우리의 친절을 감싸 안아주세요 주저앉아 최선을 다하려는 우리의 배려를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왜 모두가 행복해야 되나요 사랑받는 철학자를 보았어요 제대로 알면 알수록 사랑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사람 우리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완벽한 교육이란 태어난 마을을 벗어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것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것이 인류라는 것 머리가 어지러워요 깨지지 않는 편두통은 완벽한 요리를 기다리는 머리들의 연산 당신은 어디까지 계산하고 있나요 맛과 멋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없지만 이 악연이 당신과 우리의 심장을 얼마나 단단하게 만드는지 죽어가는 동물의 애간장을 느끼려는 인간의 역사가 거만하다고요 사랑스럽고 가련한 당신의 희생양을, 발견된 적 없는 귀를 가진 바닷속 분홍 돼지를 이제.

  • 정미주
  • 2026-06-01
한밤과 낡은 사도들과

한밤과 낡은 사도들과 전호석 나는 상위 버전에서 저장된 문서입니다 오목하고 정련된 글씨체입니다 아구창입니다 오지 않는 손님입니까? 말줄임표입니다… 조명이 답답하고 수사슴은 뜯어먹을 풀을 찾는 뿔 소매가 넓은 사람 헛기침을 자주 하는 사람 숙면을 취하지 못해요 죽고 싶어요(사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문제가 많아요 다들 그러지마는 요즘 가상 세계 같아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닌 거 같아 죽으면 다음 스테이지로 가는 게 맞나요? 별 끝에 닿을 것 같아 에너지가 넘쳐서 그 무엇도 구분할 수 없고 그럴 필요가 없어지고 싶다 잔인하고 단순한 도구가 되고 싶다 피아노 건반 가장자리 건반이 되어 일 년에 한 번쯤 눌리고 청중들이 그 소리에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스테이지에서 당신은 나를 조율하세요 풍족한 삶을 마다하지 마세요 차라리 무기물이었으면 좋았을 걸 무너지는 동상의 눈빛이 무너지지 않은 동상의 눈빛보다 많이 맑아요 그거 다 각도 차이인데, 감정이 그런거죠 전병을 주세요 사슴 먹이려고 파는 거 굶주리는 일이 제일 어색해 울다가 아무것도 못 하다니 악기는 우는 게 일이라서 좋겠다 준비된 슬픔을 꺼내두기만 하면 악기는 밥 안 먹어도 되는데 붉은 신호와 떠드는 사람들 이제 시작인데 뭐 하는 거지 뭘 해요 남은 건 남들뿐이야 나는 새가 된다 키위가 되어서 벨벳 바닥을 종횡무진한다 연주 준비를 마친 오케스트라 사이를 질주한다 만연하고 돌덩이 같은 문장을 구비하세요 지휘자의 당부였다 인공지능 모델이 탑재된 악기들이 스스로 연주되기 시작한다 관객석을 가득 메운 사슴들이 앞발을 들어 일제히 박수친다 다그닥 다그닥 기쁨과 슬픔 나는 단순한 것들이 좋았다 좋다는 말이 좋았다 보이는 성곽과 보이지 않는 성곽이 함께 좋았다 잠을 잔다 어긋난다 풀들이 그러하듯 자라라 악기가 그러하듯 울어라 사슴이 그러하듯 핥아 쉬지 말고, 핥아

  • 전호석
  • 2026-06-01
빛고리

빛고리 전호석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빛고리들이 땅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새벽 누가 버린 걸까 순례자들 무엇을 순례하나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쓸모없다면 순례입니다 구름이 밀려나는 모양으로 사람들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간다 나는 다리가 아파서 어디에도 갈 수 없는데 빛고리를 만들어 버리는 일 순례 그러니까 주저앉아 담배 피우는 거, 구경하면 악취를 생각해 보세요 거짓말과 권태를 극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함과 이상한 날씨가 계속되는 날들 음식이 썩고 꽃이 거기에서 피어나고 코가 없으면 평온할 수 있습니다 눈이 없으면 빛고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없다 빛고리 모두들 다른 모양과 질감을 상상한다 길 위에는 응당 있어야 할 돌무더기 넝쿨 광포한 강줄기 주저하는 어떤 순례자 그리고 눈부신 빛고리 다시 시작하고 싶어

  • 전호석
  • 2026-06-01
풍랑경보

풍랑경보 배선옥 풍향기의 바람자루가 터질 것처럼 팽팽하다 갈매기도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텅 빈 하늘 유리창을 긁는 바람을 마주하고 앉아 그 남자 잠자코 바지락만 깐다 출입문엔 사흘 가게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얼마 전엔 평생 손 익은 연장이었던 배를 팔았고 얼마 전엔 병실을 예약했다고 말하는 그가 증명사진 같다 한껏 설정 온도를 높인 온풍기에선 한여름의 공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그의 어깨는 선착장 끝 바다에 반쯤 발을 담그고 선 가로등 같다

  • 배선옥
  • 2026-06-01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배선옥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나의 영토는 늘 우기였다. 날마다 비가 내렸고 풀들만 자라나 영토를 넓혔다. 나는 동그란 발뒤꿈치에 반짝이는 발톱을 가졌지만 그대에게 보여준 적 없다. 나의 발은 늘 목 긴 장화 속에 들어있어 때때로 맨발일 때도 진흙에 묻혀 있었다. 그대는 나의 발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므로 저녁이면 우물가에서 발을 닦으며 오래도록 네모난 발톱을 혼자 들여다보았다. 어느 날엔 밀입국자처럼 그대의 마음으로 스며들어본 적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때를 기다리며 오래도록 학습했던 지명은 이미 사라져 새로 생겨난 사거리에서 돌아갈 길 너무 까마득해 눈물지었지만 기왕에 그대는 그런 곳이려니 미워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다만, 사랑이니 하는 말은 붙이지 않기로 했다.

  • 배선옥
  • 2026-06-01
슬기로운 깁스 생활

슬기로운 깁스 생활 박은형 그만 환부를 뜯어내고 팔을 보살피기로 했다 그러자 선택형 관계 동작과 의무형 생활 동작이 동시에 면제다 부작용 같기도 하고 포상 같기도 하다 일조량 제로인 딸아이 서울 살림에 노란색 비닐 연(鳶)이 끼어 볕 노릇을 한다 길 건너 공원에 가야겠다 짧은 봄날을 붙드는 번 자리라도 얻는다면 쓸 만한 일인용 추억이 될 것이다 누가 매긴 슬픔의 광고 문안이 저리 얇을까 고치 같은 노파가 건네주는 공짜 전단지 아는 사람을 본 듯 인파는 멀찍이 비켜서 가고 금연 구역 현수막 밑 늙고 젊은 끽연가들 소나무 꼭대기에 비 새는 집을 얹는 까치 부부 구애란 단연 부풀리기지 깃털부터 세우는 비둘기 공원에는 각종 심취가 자못 버젓한데 고향 물가에 버려둔 정분인 양 만개한 도화 높다란 건물 사이 짧은 너의 분홍은 신이 젖먹이였을 때 잇몸에 착색된 신표(信標) 같아 자꾸 흘러버리는 내 안의 무언가를 누군가 최선을 다해 이리저리 바꿔치는 오늘 기분은 원래가 들키는 게 사명인 것처럼 문드러진 사랑을 다시 보살필 것처럼 바람도 없이 효율의 문제는 더욱 아닌 채로 제 한껏 들이친 타지의 봄날이 꾸려준 것

  • 박은형
  • 2026-06-01
오동꽃

오동꽃 박은형 채혈하는 동안에는 골몰할 딴생각이 필요합니다 재채기용 꽃가루 총성 세 발이나 허락 없이 구름 도어락을 눌러댔던 어제의 비밀 또한 달가운 딴생각의 후보군입니다만 사흘 내리 그 집 앞 우우우 난 아직 떠날 수 없*던 오동나무를 낙점합니다 휘영청 대낮의 월담을 마친 빈집지기 오동꽃 가지 끝 반쯤 오므린 연보라 손바닥이 수백 개 사방 백 리는 족히 틔울 종소리가 수만 개 빼돌린 정인처럼 꽃은 공중 높이 올라가 도심의 번듯한 청맹과니 빌라촌에 한갓진 봄날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악수도 고백도 심드렁한 시절입니다만 나는 빈집지기에게 기린 같은 흠모의 팔을 양껏 뻗어 보았습니다 채혈 양이 많으니 쉬었다 가라는군요 다 지고 사과 씨만치 남은 내 안의 미혹마저 꽃가루 총성 한 발로 못질해 둔다면 혹여, 사나흘 혼곤히, 오동 말쑥한 폐에 들었다 헤어질 수 있을까요 *노랫말

  • 박은형
  • 2026-06-01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도 본 적 없는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도 본 적 없는 김세희 일광 삼성리 산8번지 일대가 신도시가 된단다 브라질 상파울루에 사는 산8-2번지 땅 주인 박상용 씨는 그동안 자신의 땅만 보상 계획에 빠져 배가 아팠었다 그러던 중 고국의 신문에 산8-2번지가 도로에 흡수되게 되어 보상 계획 공고문이 실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골똘히 멀리서 온 신문을 들여다보다가 주변 땅 주인들 산8-1, 산8-3 지그재그 산으로 오르는 번지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을 지그재그 떠올렸다 마당에 동그랗게 맺는 열매를 보다가 어떤 마음이면 요렇게 까매지는 걸까 했는데 산8-13번지에 블루베리 나무 1주, 무화과나무 1주, 사과나무 1주를 심어 놓은 사람은 계절마다 먹을 과일을 계획하는 사람 물통과 농자재를 치워 달라는 공고의 땅 주인도 알 것 같은 이름이다 박상용 씨는 뒤늦게 기쁜 소식이라는 조카의 말을 생각해 본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박상용 씨의 경계는 흐려지고 일광 구석진 땅 귀퉁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기억은 도로가 될 것이며 그의 것들을 밟고 자동차가 지나가고 신호등이 설 것이다 공룡 뼈 같은 소식이구나 돋보기를 끼고 다시 신문을 본다 앞집 마당에 불이 켜지고 장바구니를 든 가족들이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의 이웃은 브라질 상파울루에 있다 그의 이웃은 일광 삼성리 산8-2번지 일대에서 사라졌다 현재 주소지 브라질 상파울루주 상파울루시 봉헤찌로구 반데이란 찌스기리 이 주소를 갖고 죽어도 될까 묻히지 않은 곳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을까 일광 무너져 내린 그의 집에 도로를 들이자 앞으로 밀고 들어온 트럭이 등 뒤로 빠져나가 버린다 뚫린 마음에 어떤 보상이 필요할지 대문이 있던 자리 우사가 있던 자리 발자국 남기러 가야 한다는 박상용 씨. 산8번지 일대 아파트가 다 세워지면 누가 돌아오나 마음 없는 마음이 지그재그 돌아오나 박상용 씨는 도로에 우두커니 서 있다

  • 김세희
  • 2026-06-01
한 변의 길이가 나머지 두 변의 길이를 합한 것보다 길거나 같을 수 없다

한 변의 길이가 나머지 두 변의 길이를 합한 것보다 길거나 같을 수 없다 김세희 석 달에 한 번 만나는 남자는 말이 짧고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속속들이 나를 보여줘도 이러시면 곤란하다는데 곤란하다 삼각관계도 아주 그냥 모서리로 서 있는 상태 당신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지금 화내는 건가요 위험하다면서 위험한 사람 협박하는 거죠 피를 찍은 손가락을 내 입속에 넣어 준다 눈을 감는다 에그타르트 맛인가 고구마 고구마 맛이네요 삶은 고구마 고구마 말고 또 뭐냐고 다그친다 믿지 못해서 일어나는 전쟁 핵폭탄을 가져야 생기는 믿음 파 보면 다 나온다는 끈적한 관계도 굴러가지 않으면 한 면 위에 쌓일 거라고 말한다 저 남자가 섭섭한 건 아니고요 부도덕한 습관과 악당을 다스리는 분이시죠 석 달에 한 번 심판받는 위기 나쁜 몸 간디가 말하는 세 번째 사회악 양심 없는 쾌락의 결과쯤 구원은 죽기 전에 부탁해도 될까요 채혈한 자리에 붙인 뽀로로 밴드를 쳐다본다 1분 대화 다시 석 달 동안 만나지 못할 테지 약국 소파에 앉아 나쁜 것 나쁜 것 나쁜 것 중에 포카칩은 그나마 당류가 없다는 인스타그램을 보았다 야호 아파트가 하나밖에 없어서 우울한 살을 빼야겠다는 의지만 있는 악당 스타일 병원 홈페이지에는 끝까지 책임진다고 쓰여 있다 삼각관계는 셋 다 피가 터져야 하는데

  • 김세희
  • 2026-06-01
생선이 왔어요

생선이 왔어요 강은진 이 동네에는 아직도 생선 트럭이 옵니다 갈치나 오징어를 팔아요 아마도 목요일 어쩌면 수요일 생선이 왔어요, 생선이, 우렁차게 확성기를 울리며 생선이 왔다고요 우리에게 생선이 가차없이 이름처럼 머나먼 빅토리아 케이크 같은 걸 녹여 먹고 있는 오후에도 창틈으로 방충망 사이로 암막 커튼을 들추고 막무가내로 할 말이 있다는 듯 자꾸 생선이 옵니다 일방적으로 온몸을 훑고 가는 이 비린내 나는 다정함 오래 전 그는 내 음식을 먹고 싶다며 자취방에 찾아왔어요 하필 온갖 비린 것들을 넣어서 해물탕을 끓여 줬죠 그는 연신 맛있다고 했지만 반도 먹지 않았어요 몇 번씩 비누로 씻고 맥주로 씻어도 손에서 비린내가 없어지지 않아서 나는 내내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어요 우리는 말없이 눈을 감고 노래를 몇 곡 들은 후 헤어졌지요 비린내 때문이었어요 그랬어야만 해요 내 사랑은 비린 해물탕 같은 거였는데 이름도 멀고 마음도 머나먼 빅토리아 케이크가 되려고 수식어가 설탕처럼 가득 뿌려진 문장들 속에 얼굴을 가둬 놓고 라즈베리 오렌지 바닐라 버터밀크 실은 갈치 오징어 고등어 사라진다는 걸 믿지 않으면서 마치 사라질 수 있을 것처럼 오늘은 목요일, 아니 어쩌면 수요일 지도가 펼쳐지고 길바닥에 주소가 적힙니다 기어코 생선이 옵니다

  • 강은진
  • 2026-06-01

집 강은진 하루에 두 번 파란 알약을 삼키다가 만져지지 않는 모든 것을 당신이라고 부른다 마주 선 거울과 거울이 끝없는 미로를 서로에게 새겨 넣으면서 조금씩 기억을 잃고 있다 여름마다 주황색 꽃이 피었다가 노랗게 떨어지던 나무가 있는 집 옆으로 빨간, 어쩌면 하얀, 어쩌면 빨갛고 하얀 오토바이가 세워진 작은 우체국이 있고 저녁 여섯 시, 아니, 다섯 시, 해가 지려 할 때, 어쩌면 해가 뜨려 할 때, 뒤꿈치 들어 올리는 소리와 끼이익 나무문 열리는 소리가, 어쩌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하루에 두 번 시동이 켜지던 오토바이 그 위에서 참새처럼 늙어간 배달부 보고 싶었고 보기 싫었고 가고 싶었고 가기 싫었던 나의 창백한 진창 딱딱한 잠자리에 누워 책상 아래 머리를 넣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보는 것이 좋았지만 밥 냄새에 자주 구역질을 하며 나는 거기서 조개껍데기가 자라듯 한 줄씩 얇고 고요하게 자라나 어른이 되기 전에 서둘러 떠났다 어째서 우리는 마주 보며 밥을 먹고 밥상을 엎고 서로 미워하는 방식으로 기억되려 했을까 내 기억은 당신이 낳았던 고아 내게 새겨진 미로에서 개처럼 헤맬 때 당신도 어딘가에 갇혀 있었을까 지금은 쓸모 없어진 우표들만 나뒹구는 텅 빈 방 오래전 죽은 아이들이 뛰놀고 기억을 잃기 위해 어쩌면 기억에 조금씩 더 다가가기 위해 하루에 두 번 파란 알약을 삼켜야 한다

  • 강은진
  • 2026-06-01
똘추 코어

똘추 코어 강상헌 나는 제목 학원에 앉아 있었다. 차례가 되자 암기하던 쪽지를 구기며 교실 앞으로 나갔다. “제가 쓰고 싶은 글의 제목은…… 「수용성 공주」, 「다짐의 왕자」, 「테너가 되고 싶은 아침」,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화장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깔깔 웃기 시작했다. 문밖으로 선생님이 지나가다 교실 문을 쾅 열었다. 안을 쓱 둘러보더니 칠판 앞에 서 있는 내게 소리쳤다. “얘, 너는 제목들이 왜 다 똘추 같니?” 교실은 꺄하하 웃는 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이 제목 학원은 특이하다. 다른 학원에서는 이상하거나 웃긴 장면을 보여주고 어울리는 제목을 붙이는 식으로 공부한다. 이 학원에서 장면 같은 건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제목만을 발표한다. 무엇에 붙이는 제목인지는 상관없다. 장면이든 글이든 음악이든. 제목을 읊으면 나머지 학생들은 그게 좋은지 나쁜지 판단한다. “오……” “별론데?” “죽어!” 선생의 역할은 아이들의 판단을 확증해 주는 일. 그것이 가르침이다. 아이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호불호의 판단에는 맞고 틀리고가 없다는 걸 알려준다. 나는 그 학원을 떠나왔다. 같이 다니던 애들은 모두 사기꾼이 됐고 나는 시인이 되었다. 내 안에 남아있는 건 아이들의 웃음소리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라는 것은 너무도 청량해서 진짜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분간할 수 없다. 위에서 말한 평가의 말들은 아무리 좋더라도 웃음보다 아래 위치했다. 언젠가 봤던 일본 영화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여 비웃음을 산다. 그걸 애정이라고 착각하고 다른 이들에게 똑같이 굴다 자존의 추락을 겪는다. 나의 성장은 이와 다르다. 똘추라는 말을 통해 학원 교실에 더 많은 웃음이 울려 퍼졌다는 점에서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학원에 다닌 적 없다. 내가 다닌 학원이라곤 단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매질을 하고, 학원 버스에서 단어장을 보며 멀미하다 구역질한 기억만 남겨준 곳이다. 같이 엉덩이를 맞던 애들은 이제 풍파를 맞고 있다. 세월과 직장과 혼사의. 나는 풍요로운 백수다. 유년기의 외상을 밝고 웃긴 장면들로 덧칠하여 일관된 자아상을 회복했다. 요즘 만나는 누나는 “우리 똘추……” 하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똘추의 어원이 스모 선수의 뒤를 닦아주는 하인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틀렸다. 스모 선수는 유연해서 자기 똥을 닦고도 남을 거다. 서구인의 스모라고나 할까, 레슬링에선 몸을 풀 때 뒤구르기와 옆돌기에 뒤통수를 땅에 박고 활처럼 허리를 늘인다. 처음 갔을 때 백이십 킬로짜리 동갑내기가 나를 깔아뭉개고 두 팔로 겨드랑이를 팠다. 아늑한 중압감. “할 만해요?” 거칠고 다정함. 학원의 마지막 날, 나는 아이들에게 제목이 다가 아니라고,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너희

  • 강상헌
  • 2026-06-01
친구

친구 강상헌 친구에게 전화해 네가 잘못한 게 있다고 말했다 그 전에 다른 친구에게 전화해 이게 잘못이 맞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다시 친구에게 전화해 네가 잘못한 게 있다고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그래 미안하다 말해줘서 고맙다 나도 들어줘서 고맙다 그때 생각이 난 다른 친구에게 전화해 내가 잘못한 게 있느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는 전화를 피했다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해 그가 전화를 피하는 이유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하고 이야기했다 턱없이 부족한 주말이 갔다 사소한 문제들 우리들 죽음에 비해 전혀 문제되지 않는 문제들 우리는 이제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저 이번 주에도 함께 죽음을 비껴갔구나 그러나 다음 주에도 그것은 기다리고 있겠구나 그래서 우리는 주말에 친구에게 전화해 다음 주말에도 친구에게 전화해 그다음 주말 그다음 주말에도 죽었으면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고

  • 강상헌
  • 2026-06-01
프롬프트의 딸들

프롬프트의 딸들 최형경 AI 프로그램에 갈색 가죽 가방을 든 이십 대 여자의 반신 사진이 만들어졌다. 민정은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았다. 사진 속 얼굴은 카리나의 얼굴형과 장원영의 눈매, 제니의 입술을 닮았다. 단추 두 개를 푼, 하얀색 셔츠 의상도 마음에 들었다. AI 작업 보드를 조작해 AI 영상 프로그램으로 모드를 바꾸었다. 민정은 영상 프롬프트를 쓰기 시작했다. 사진 속 여자가 아래 대본을 읽게 해줘. 저는 진짜 사람이 아니라 AI 모델입니다. AI 패션 룩북 만드는 법, 이제 어렵지 않습 작성을 멈췄다. 사진의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민정은 여자를 다시 살폈다. 갈색 가죽 가방이 눈에 띄었다. 로고가 없는 직사각형 모양의 숄더백이었다. 민정은 인터넷에 접속해 샤넬 시즌 백을 검색했다. 캐비어 가죽에 금장 샤넬 로고가 가방 덮개에 붙은 천이백만 원짜리 샤넬 백 이미지를 저장했다. 민정은 다시 AI 작업 보드를 조작해 AI 이미지 프로그램으로 모드를 바꾸었다. 민정이 샤넬 백 이미지를 첨부하고 프롬프트를 썼다. 여자의 가방을 첨부된 이미지와 같은 걸로 바꿔줘. AI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민정은 프로그램 화면과 시간을 번갈아 확인했다. 아이의 하원 전에 인스타그램 계정에 새 게시물을 올리고 장도 봐야 했다. 뿌연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았다. 이미지가 만들어지다가 오류가 났다는 알림창이 떴다. 민정은 다시 엔터를 눌렀다. 몇 분 뒤 완성된 이미지를 보니 가방 뚜껑의 샤넬 로고가 찌그러져 있었다. 한숨이 났다. 민정은 작업을 그만두고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이 닫히자 민정이 작업을 하던 부엌 식탁 너머로 생활동화 전집이 보였다. 거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백 권의 책들은 민정이 작년 삼 개월 할부로 팔십오만 원을 주고 구매한 것이었다. 민정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오늘 분의 쇼츠는 오늘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돈을 번다. 민정은 다시 노트북을 열어 작업 창을 켰다. 민정이 AI 강좌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을 시작한 건 딸 때문이었다. 자라나는 아이 아래로 돈은 쉼 없이 들어갔다. 발달에 필수라는 국민 아이템부터 영유아 방문 수업, 유기농 식재료까지 성장에 좋다는 건 AI 결과물처럼 끊임없이 생겨났다. 생활동화 전집도 국민 아이템 중 하나였다. 판매 사이트에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빌려, 두 돌에서 네 돌 사이에 생활동화를 읽히면 예의 바른 아이로 큰다고 홍보했다. 전집은 차례차례 줄 서기, 친구에게 양보하기, 싸우지 말기 등의 주제로,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주인공들이 착하게 되는 스토리를 담았다. 하지만 민정은 딸을 옆에 앉혀놓고 전집의 책을 읽을 때마다 다른 생각을 했다. 차례를 기다리고만 있는 건 소극적인 태도 아닐까. 양보를 잘하면 착한 사람은 되지만 성공하긴 어렵겠지. 내 것을 지키려면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야 해. 민정은 생활동화를 읽을 때마다 혀 아래까지 차오른 불순한 마음을 딸 앞에서 삼켜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먹은 마음을 왜 가지게 되었는지 누구도 묻지 않기를 바랐다. 큰 계기가 없었기 때문

  • 최형경
  • 2026-06-01
킬링 파트

킬링 파트 최미래 연애는 그리워할 연에 사랑 애. 단순히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야. 그리움을 팍팍 집어넣어야 한다. 상대와 눈 맞추는 와중에도 나는 네가 그리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더 자세히. 연애의 포인트는 거기에 있다고.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 연애의 주라고 여겨지지만 그게 아니야. 심적인 친밀감, 동경, 흠모. 왜 그리워할 연이겠어. 연애 감정은 거기에서 온다. 그러니까 재밌는 거지. 하지만 정말 성적 매력을 뺀 연애가 가능할까? 일반인이 등장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서 백진주는 진정으로 연애를 즐겼던 자신의 한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연애 프로그램에 나간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할까 곰곰이 망상에 젖었다. 얼굴과 직업 등 개인 신상을 드러내고 출연하는 방송 특성상 연애 프로그램의 진짜 연애는 다른 출연자들이 아닌 시청자랑 하는 거였다. 방송 나온 후에 인플루언서로 전향해서 공동구매하고 유튜버하고. 끼 발산하면서 돈까지 쓸어 담으면 얼마나 좋아. 조금 더 멀리 봐야 할 텐데. 민숙 님, 갑갑하네. 짜증 난다고 티를 그렇게 내면 안 되지. 민감한 이야기일수록 천진하되 차분하게 찔러넣어야지. 상대 눈 제대로 맞추고. 카메라는 절대 의식하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려 센 척하거나 기분 나쁜 티 내면 조지는 거지 뭐. 백진주는 참으로 답답했다. 민숙이라는 닉네임의 참가자 때문이었다. 민숙은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남성 참가자들에게 데이트 선택을 받지 못하면 표정과 말투가 날카로워졌고 다른 참가자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도 서슴지 않았다. 반대로 기분이 좋으면 카메라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듯 콧노래를 불렀다. 애교 섞인 말투와 윙크 등 플러팅도 마구 해댔다. 으 어떡해. 백진주는 그런 민숙의 행동 하나하나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이 민숙이라도 되는 듯 대리 수치심을 겪었다. 엄마도 연프 나가 봐. 요즘엔 돌싱 특집이 더 인기 많더라. 근데 민숙 저 여자는 진짜 이상하다. 저러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할 텐데. 그치? 소파에 옆으로 누워 뻥튀기를 먹으면서 서준은 민숙의 언행을 평가했다. 남자 출연자의 머리숱과 직업, 여자 출연자의 명품 아이템을 줄줄이 읊고 점수를 매겼다. 앞머리를 내면 더 귀여울 거라는 둥 스타일에 대한 조언도 아낌없이 퍼부었다. 백진주는 서준을 멍하니 바라본 후 텔레비전을 껐다. 아무리 사춘기가 빨라졌다지만 무슨 초등학생이 이래.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딸이 낯설었다. 서준은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바짝 올려 묶은 머리카락 옆으로 작은 링 귀고리가 반짝였다. 방송 댄스 학원에 다니게 된 이후, 어지간한 일에는 한 마디 짜증 없이 컨디션이 좋았다. 좋겠지, 그럼. 보름 동안 방문을 잠그고 울기만 해서 쟁취한 건데. 이렇게 좋아할 거였으면 진작에 보내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춤을 배우면서 점점 더 되바라져 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되었든 당장은 나아졌으니까. 백진주는 덮어놓았던 걱정과 불안이 올라오기 전에 눈을 감았다. 어쩌면 컨디션 조절은

  • 최미래
  • 2026-06-01
용4

용4 민병훈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면 창문 너머로 은빛 알루미늄 패널들이 보인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공사 중이고, 나는 밀리오레 건물 12층에서 그것을 늘 아래로 내려다본다. 직선이 없는 곡선으로만 채워지는 비정형의 패널들을 보며 완성된 모습을 상상한다. 거대한 우주선이 되어 사람들을 싣고 날아가는 게 아닐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얼마 전 일을 그만둔 사람은 유니폼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은색이 뭐야, 갈치 같잖아. 나는 창밖으로 태양 빛에 반사되는 패널과 거울 속 유니폼을 번갈아 본다. 무전기를 챙겨 탈의실을 나선다. 이어폰을 귀에 꽂자마자 용1이 용14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야, 대답 안 해? 같은 층에 배정받은 용13이 대신 다급하게 대답한다. 배터리 교체 중입니다. 용15부터 용1까지, 수신 상태를 체크하고 현재 위치를 보고한다. 무전을 할 때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내 차례에서 나는 발음을 조금 흘린다. 용5니까. 용5가 될 때까지 삼 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나는 경륜 경기를 송출하는 브라운관의 전원을 켠다. 희망나눔 전자카드를 손에 쥔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창구와 가까운 자리에 앉기 위해 항상 우리보다 더 일찍 도착해 줄을 선다. 객장에서도 건축 현장이 보인다. 커다란 크레인이 패널을 지붕에 안착시킬 때 금속성의 타격음이 무전기의 노이즈와 함께 겹쳐 들려온다. 용1이 개장, 이라고 소리친다. 또 왔어요.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용9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한다. 가면 난리 친다. 멀리 있어. 폐장 직전 큰돈을 걸었다가 잃고는 의자를 던지며 난동을 부린 적이 있다. 그때 나를 포함한 세 명의 보안요원이 그를 엘리베이터로 끌고 갔다.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자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나는 볼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닦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쫓아낼 때까지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팀장은 손수건을 건네며 내게 참을성이 좋다고 말했다. 이런 일은 잘 참아야 돼. 침을 닦자 손수건에서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약 있는지 확인해. 생수통에 소주를 담아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약이라고 부른다. 식당가에서 밥을 먹다가 가방에서 소주를 꺼내 몰래 컵에 따라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다. 은갈치 같은 새끼들. 우리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말하곤 그날은 객장에 오지 않았다. 나는 용9를 불러 그가 앉은자리를 확인하라고 말한다. 노란 걸 마시던데요. 건물 앞에서 아침에 무료로 나눠준 음료일 것이다. 명절을 앞두고 본부에서 직접 기획한 행사였다. 계속 주시하라고 말한 뒤 객장을 천천히 돌아본다. OMR 구매표와 컴퓨터 사인펜을 손에 쥔 사람들이 고개를 젖혀 브라운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배당판이 움직인다. 단승과 연승, 복승과 쌍승의 배당률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화면에 표시된다. 이번 경기는 쌍승식 역배당에 배당률이 높게 형성된 것 같다. 이제 곧 바닥에는 베팅에 실패한 경주권이 쌓일 것이다

  • 민병훈
  • 2026-06-01
소설적 소설과 인간적 인간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설적 소설과 인간적 인간 ― 정영수 「지평선에 닿기」(2016년 7월호 수록) 최예솔 최근 나는 단편소설을 한 편 썼다. 작년 7월에 처음으로 한 문단 정도를 써두었고 그 후로는 내내 생각만 하다가 올해 3월과 4월을 거치며 20매, 50매, 90매로 늘어났다. 매번 소설을 쓰면서 하는 생각이지만 소설은 결코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흘러가지 않는다? 써지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아무튼 계획대로는 되지 않는다. 사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번 소설을 쓰면서는 어떤 생각을 가장 많이 했느냐면 도대체 소설적인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건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라는 어느 아이돌 그룹의 노래 가사처럼 너무도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소설이…… 소설적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또 괜찮은 일일까? 지금까지의 나는 보통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소설을 생각했지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본 일은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그야 읽는 사람으로 작동하는 나는 ‘즐겜러’처럼 그냥 ‘즐감러’로 존재하니까. 하지만 내가 모든 게임을 마냥 즐겁게 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모든 소설을 마냥 즐겁게 읽지는 않는다. 어떤 소설은 읽고 나서 불편하기 때문에 좋고 어떤 소설은 하염없이 생각나기 때문에 좋고 어떤 소설은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좋다. 사실 소설은 ‘즐겁다’기보다는…… ‘이상하다’에 가까운 게 아닐까. 나라는 독자가 소설에 바라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는 삶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상하고 또 합리적인 삶. 매사에 지루한 동시에 절절매는 삶. 나는 그런 것을 인간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런 삶은 그다지 소설적이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삶은 매일같이 씻고 먹고 자고 입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잠들기 싫어하며 잠들고 일어나기 싫어하며 일어나고. 출근을 앞둔 휴일에는 미리 울적해졌다가 일하기 싫어하며 일하는 것이다. 그러다 잠깐 웃기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슬프기도 하다. 그것의 반복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반복이야말로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소설적’인 동시에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소설은…… 거창하지 않은 소설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국엔 일상으로 끌어내려지는 소설. 이건 나라는 독자에 한정되어있음을 다시 한번 밝힌다. 왜냐하면 내가 그다지 거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무언가에 오래 골몰하는 사람은 아니다. 저게 뭐야. 그런 생각으로 잠시 멈추기는 하지만 금방 잊고 다른 일을 한다. 내게는 멈추는 마음과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적당히 섞여 있고 가끔은 더 오래 멈추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서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으니까 어

  • 최예솔
  • 2026-06-01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1) 이은지 1. 프락시스로서의 포이에시스 대중에게 다소 신화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가의 은둔과 고립은 창작을 위해 불가피한 존재 방식으로 여겨지곤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절연하고 뉴햄프셔의 시골에서 평생 은둔하다가 사망한 J. D. 샐린저는 은둔 기간 동안 단 한 편의 작품도 공개하지 않았다. 불교의 선(禪) 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전쟁에 참전했을 때부터 “글쓰기와 명상이 동일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고립된 상황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명상으로서의 글쓰기”를 위해 대중과 유명세를 철저히 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필립 로스 또한 “매해 반 이상을 뉴욕에서 백 마일 떨어진, 숲이 우거진 농촌 지역”2)에서 보내며 철저히 고독 속에서 작업했다. 그에게 “문학적 소명에 따른 고립―단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방에 혼자 앉아 있는다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고립―은 밖에 나가 야단법석 속에서 감각을 축적하거나 다국적 기업을 다니는 것만큼이나 인생과 큰 관련이 있”3)는 것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은둔 작가 마루야마 겐지 또한 23세의 나이에 화려하게 등단한 직후 도시와 문단을 등지고 시골에서 칩거하며 집필에만 전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며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4)고 일갈한다. 가히 고독 예찬이라고 할 만한 그의 ‘창작론’을 들여다보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몸 전체를 예민한 레이더로 만들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몸을 단련하는 나날을 거듭하다 보면”5)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원고지 앞에 앉게 된다는 진술이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소설에서 확실하게 멀어지기 위한 방법으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인다”6)는 증언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자아를 안팎으로 일치시키는 데서 문장을 산출해내는 창작의 원리로 읽힌다. 극단적인 은둔과 고립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창작을 위해 일정량의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서 투여하는 모습은 여러 작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하루 몇 시간, 하루 몇 장의 꾸준한 집필은 자기 안으로의 철저한 고립을 전제하며 이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스스로 변형하는 ‘자기 수행’과 같은 모습을 띨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lsq

  • 이은지
  • 2026-06-01
자유롭게 길 잃기

[레지던시 일기-협성마리나 G7] 자유롭게 길 잃기 윤슬빛 유난히 길을 잘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난히 길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들도 있지요. 아무래도 저는 후자 쪽이라 어딜 가나 비슷비슷해 보이는 길 앞에서 매번 난감해지곤 합니다. 누군가에게 정확한 위치를 설명할 수도 없고 이 방향이 맞는지 저 방향이 맞는지 확신할 수도 없으니까요. 다행히 “모든 길은 다 연결되어 있다!”라는 아버지의 강건한 호언장담을 들으며 자란 터라,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하는 대책 없는 낙관으로 매번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간답니다. 언제든 어떻게든 가고자 하는 곳에 다다르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이랄까요. 오도카니 앉아 지난 기억을 되새기며 레지던시 일기를 쓰자니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낯선 부산역 주위를 하염없이 빙빙 돌았던 첫날이 떠오릅니다. 분명 지도에는 길이 있는데, 거의 다 온 게 맞는 것 같은데…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어김없이, 도무지 목적지가 보이질 않았지요. 안내문을 꼼꼼히 읽지 않아 자주 곤란해지는 사람에 대해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자분자분 오래 걸었습니다. 무작정 헤매고 있는데도 전혀 조급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오롯이 읽고 쓸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게 그저 기뻐서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았거든요. 일상으로 돌아와 비슷비슷한 하루를 무심코 흘려보내다 보면 문득문득 부산역 10번 출구를 가로질러 걷던 하늘광장이 떠오릅니다. 멀리 내다보이던 희부연 바다와 거세게 불던 바닷바람과 공사장의 소음이 제 안에서 소란스럽게 되살아납니다. 흔들거리는 그 길을 빈번히 걸으며,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과 어디선가 돌아온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 도시를 잠깐 사랑하러 온 사람들도요. 혼자, 혹은 여럿이 빚어내고 있는 찰나를 슬쩍슬쩍 엿보며 ‘다들 이렇게 흔들리면서 사는 거겠지’ 싶어 괜스레 애틋해지곤 했지요. 일부러 비워둔 시간 사이사이에 모르는 사람들의 표정과 그림자가 천천히 스며들었습니다. 차근차근 쓰다 보니 사람, 사람이란 말을 참 많이 적고 있네요. 문학을 하는 일이 삶을, 사람을 들여다보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인가 봅니다.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이 불가해한 세계에서 불완전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무엇을 붙들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지 헤아려보려면 잠깐 멈춰야 한다는 걸 다시금 배운 날들이었습니다. 돌이켜볼수록 참 귀한 3월이었어요. 호된 꽃샘추위에 웅크리고 다니면서도 종종 등 뒤가 뭉근히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더운물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것 같던 오롯한 충만함 덕분이겠죠.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잘 상상할 수 없었는데 별 의미도 없이 느긋하게 사위를 둘러보던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이렇게만 살면 참 좋겠다’ 싶기도 했답니다. 헐겁던 읽기 목록이 다시 빼곡해졌고 흘려 쓴 것과 흘려보낸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쉼표와 마침표를 들여다보고, 물음표와 느낌표의 질감을

  • 윤슬빛
  • 2026-06-01
나미나라공화국의 이야기 요정을 보았니?

[레지던시 일기 – 남이섬 호텔정관루] 나미나라공화국의 이야기 요정을 보았니? 하신하 편집회의까지 마치고 마감을 이미 한번 연기한 장편 동화의 원고를 머릿속에 짊어지고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배에 올랐다. 배는 물길을 헤치고 유유히 남이섬으로 다가갔다. 나는 저 섬을 거나한 술판이 벌어지는 대학생 MT 장소로, 한여름의 활기와 젊음의 싱그러움이 가득 담긴 노래가 흘러나오는 강변가요제로, 또 유명한 드라마의 한 장면을 찍어 관광객이 북적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원지로 알고 있었다. 이후 남이섬에서 국제 규모의 어린이책 축제가 열린다는 유명세는 익히 들었지만, 직접 참여한 경험은 없었다. 배 안에서 들리는 말들이 서로 다른 걸로 보아 아시아의 다양한 국적으로 짐작되는 낯선 관광객 무리 속으로 조용히 스며 들어갔다. 남이섬에 도착해 배에서 내렸을 때 나는 ‘나미나라공화국’이라는 소인국 안에서 눈을 뜬 거인 걸리버가 된 기분이었다. 언제나 함께하는 물리적인 몸의 무거움에 마감을 넘겼다는 마음의 무게까지 더해져 나는 이미 거인만큼 천근만근이었다. 내가 지낼 숙소인 YUSOF 방의 문을 열자 말레이시아의 그림책 작가 유소프가 그린 코끼리들이 나를 반겼다. 나에겐 2주 안에 원고를 마무리해서 보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코끼리보다 더 무거웠기 때문에 벽을 가득 채운 코끼리 그림은 한없이 천진난만하게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여행의 즐거움에 들떠 남이섬 안을 훑고 다니는 관광객들의 무리에 속해있었던 터라 레지던시 숙소 근처의 한적함은 다른 시공간에 들어선 듯 낯설었다. 관광객들이 배를 타고 빠져나간 밤에는 침묵과 어둠이 숙소 주위에 깊게 내려앉았다. 남이섬을 산책하는 새벽과 저녁 시간에 나는 거인국에 도착한 작디작은 걸리버가 되었다. 화려한 깃털로 있는 힘껏 자신을 뽐내는 공작과 내가 방문을 열고 나오면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와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견과류를 뺏어가는 토끼들. 일정한 동선으로 직원처럼 일하는 듯한 오리와 거위 무리. 뺏어갈 천적이 없는 듯한데도 무언가를 숨기느라 바쁘디바쁜 다람쥐와 청설모, 그리고 마감의 시간 또한 지나가리라며 천천히 흐르는 물과 이 모든 풍경을 내려다보며 감싸주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서 나는 작고도 작은 사람이었다. 자연의 한구석을 차지한 작은 걸리버는 조용하고 겸손하게 다른 생명체들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으며 돌아다녔다. 식당이나 카페, 도서관이나 미술관에는 최대한 관광객처럼 위장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지켜보고 있던 남이섬의 직원들이 “작가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며 반갑게 웃으며 다가온다. 어디를 가든 늘 한 사람쯤은 다가와 혹시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무리 속 위장술이 뛰어난 내가 관광객이 아니라 레지던시 작가라는 것을 남이섬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다. 직원들은 미소를 띠고 심리적 안정을 보장하는 일정한 사회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지만, 내가 신호만 보내면 당장이라도 뛰어오겠다는 서비스

  • 하신하
  • 2026-06-01
당신 이야기의 유령 콘셉트는 낙관적인 것이지요? 유령이란 존재 자체가 사후세계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 아니오? 그러니 낙관적이지요.

[레지던시 일기-서울프린스호텔] 당신 이야기의 유령 콘셉트는 낙관적인 것이지요? 유령이란 존재 자체가 사후세계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 아니오? 그러니 낙관적이지요.1) 서윤빈 우선 하나 고백하면서 시작하겠다. 나는 여태 진실한 에세이를 써 본 적이 없다. 일곱 권의 책을 냈으니 적어도 일곱 번은 에세이 내지는 에세이격에 해당하는 작가의 말을 썼다는 뜻인데, 그중에 환상적인 요소가 가미되지 않은 것은 단 한 편도 없었다. 아주 현실적으로 보이는 몇 편의 글에서도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할 거짓말을 섞어 넣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쓸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별로 인기가 없는 사람이고, 인기가 없다는 건 내가 별로 흥미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일 테니까.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건 작가로서 죄를 범하는 일처럼 느껴졌으니까. 문제는 이 글에서는 거짓말을 하기가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원고 청탁 내용 자체가 호텔 프린스 ‘소설가의 방’ 사업에 선정된 작가의 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소설가의 방’이 10년이 넘는 연식을 가진 장수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상반기, 하반기에 각각 6명의 작가가 머물렀다고 치면 대충 추산해 봐도 여태 120명 이상의 소설가가 호텔 프린스에 머물렀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무언가를 꾸며내어 쓴다면 그들 중 누군가는 분명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깨가 딱딱하게 굳으면서 글이 턱 막혔다. 망상과 기현상 없는 글은 어떻게 쓰는 거였더라? 일단은 내가 벌인 조금이라도 재미있는 일들을 떠올려 보자. 틀렸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유튜브 영상을 몇 편 찍은 것, 장편 소설 원고를 쓴 것, 가능한 조식을 챙겨 먹으려고 애쓴 것 정도가 전부였다. 남들 다 한다는 산책도 거의 하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명동에 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없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시트를 갈아주는 새하얀 침대의 느낌이 꽤 각별하기는 했으나… 그거야말로 120여 명의 작가가 다 아는 지루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그게 꼭 내 잘못이기만 할까? 지금 객실에 관해 생각하면 객실의 공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먼지 냄새와 함께 감돌던 어떤 끈적한 기운. 그 기운은 내 몸에 부드러이 달라붙어 나를 잠으로 이끌곤 했다. 혹시 그 기운이 수많은 작가가 거쳐 간 흔적이었던 건 아닐까? 얼핏 깨끗해 보이는 객실의 벽지와 침대 시트에 사실 앞서 머물렀던 작가들의 땀과 한숨, 권태가 지층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작가 레지던시답게 ‘소설가의 방’ 중 한 객실에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 귀신 역시 축적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귀신은 한밤중에 슬쩍 나타나 소설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렇게 속삭이겠지. — 특별한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아. 너도 알잖아. 물론 내 방에는 귀신이 나오지 않았으니 귀신이 정말로 어떤 스타일인지 나는 잘 모른다. 내가 오해했다면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하지만 나도 서

  • 서윤빈
  • 2026-06-01
어디로든 데려가는 것

[문학의 곁] 어디로든 데려가는 것 ― 열심히 책과 흘러가는, 출판 마케터 ‘파도’(@pado.sil) 하유정 책만 믿고 서울로 온 지 4년이 지났다. 옷이 좋아 패션디자인학과에 진학했던 스무 살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할 전개라 종종 미안할 때가 있다. 하지만 더 미안한 건, 나는 항상 20대 초반의 기억을 늘 지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실습이 많은 과라 돈은 권력 같았는데 나는 그 한 글자가 없어서 항상 눈치를 살폈다. 필요한 재료를 사기 위해 시장에서 발품 파는 친구들 옆에서 나는 가성비를 따진다는 번지르르한 말로, 그저 저렴한 것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값비싼 브랜드를 이야기하는 대화에서도 나는 그 옷을 사기 위해 몇 시간을 일해야 하는지 계산하다 실소를 터뜨리며 꿋꿋이 생계를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패션은 얼마나 유행이 빠른지, 일주일만 지나도 비슷한 옷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혼란에서 트렌드라는 생애 주기에 맞춰 가격을 보지 않고 턱턱 사는 동기들을 보며,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흘기며 참던 날들이 계속 마음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게 죽도록 싫었던 나는 점점 작아졌고 결국 권태기가 온 연인처럼 옷과 멀어지게 되었다. 좋아하면서 관심 없는 척하는 현실이 쪽팔려서, 그 알량한 자존심이 싫어서 가장 더럽게 헤어지는 일, 옷과 잠수 이별을 택했다. 좋아하는 게 싫어지면 도망칠 구석이 없어진다. 인생에 불호만 남은 날이 이어지자, 이렇게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방을 둘러보았다. 책상에 언제 산지 모르는 몇 권의 책이 있었다. 두껍고 단단한 물성,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그대로 남아 있는 글자들이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알려주는 듯했다. 몇 장을 읽으니 내가 그토록 원했던 그 말,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라는 위로가 곳곳에 묻어있었다. 비어 있는 지갑이 티 나지 않는 곳, 모두가 공평한 자격으로 둘러볼 수 있는 서점을 자주 갔었다. 유명한 작가와 책, 출판사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아는 거 없지만 갈 곳이 없어서 틈만 나면 갔다. 그 당시 가장 놀랐던 것은, 분명 한 달 전에도 순위에 있던 책들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그 의미가 베스트셀러 혹은 스테디셀러라는 것을 알지만, 내가 알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만 지나도 흥미가 떨어지는 게 당연한 거였는데, 사람들은 책을 질려 하지 않는구나.’ 감출 수 없는 의아함을 품은 채 책 한 권을 집었고, 그때 만난 장류진 작가의 책 『달까지 가자』가 내 인생을 전혀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 나의 고향 부산은 제2의 수도라고 하지만, 결국 지방이기에 작가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고 그때는 더욱더 없었다. 책을 향한 관심이 깊어지던 어느 날, 부산 동구 초량동에 있었던 창비부산에서 ‘4인 4색 소설 토크’ 행사 진행 소식을 접했고, 장류진 작가가 온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신청하여 운 좋게 선정되었다. 더불어 출판사 측에서

  • 하유정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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