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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호

  • 작성일 2025-11-01

문장웹진 11월호를 열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날씨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람들은 가을이 너무 짧고, 곧 겨울이 올 것 같으니 모두 감기를 조심하자고 말하고, 작년 시월에는 분명 눈이 내렸었다고 말합니다. 몇몇이 그랬던 것 같다고 동의합니다. 진짜 그랬던가, 그건 재작년 아니었나, 누군가 검색을 해보려다 그만두더니, 세상에는 사실 확인이 중요한 일도 있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일들도 많다고 말합니다.

   저는 한때 제가 저의 몸과 마음과 나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엔 마음이란 것을 전부 남에게 주고도 내 것 같았고, 또 어느 날엔 그것을 도통 내 안에 두는 것이 불가능할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두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웠던 날이 떠올랐기에, 유병록 시인의 「선물」에서 ‘마음 둘 곳이 없군,’이란 시구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아무래도 11월이란 그런 것 같고, 그리하여 조금 따뜻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제 저녁 여덟 시쯤, 퇴근길을 함께하던 동료가 가방을 열심히 뒤져 건네준 핫팩처럼요.

   이번 11월호 문장웹진에서는 시와 소설, 비평 등 소중한 작품들과 함께 시인과 소설가와 평론가의 하루를 관찰한 기획 콘텐츠를 준비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한 장면으로 남았던 독자 여러분들의 어느 날을 떠올리며 편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문장웹진에 발표된 작품을 다시 읽는 20주년 기획은 이번 호에도 계속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다음 호에도 다양한 작품과 기획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 문장웹진 편집위원 이주란 소설가 외 편집위원 일동




[기획] 문장웹진 REWIND

문장웹진 20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선정한 대표 작품들을 다시 읽습니다.
시간을 넘어 되살아난 문학의 순간들과 함께,
그 의미와 감상을 새롭게 나누며 문장웹진의 아카이브를 확장합니다.

“집을 나섰다. 별다른 목적지는 없다. 어쩌면 만남이 있다. 아직은 길에 있다.”

문장웹진 > 기획 > 삶은 곡선이다 게시글로 이동

- 글래스카이만(glasscaiman) 작가, 이영주의 「우리의 고백」를 읽고

글래스카이만

북디자인, 그래픽디자이너, 책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문장웹진 11월호 살펴보기

간결하고도 복잡한

간결하고도 복잡한 이주란 헤밍웨이의 소설 「깨끗하고 밝은 곳」에는 카페 손님들이 모두 떠난 시간까지 전등빛 아래 앉아 집에 가지 않는 노인 한 명이 등장한다. 박인성 평론가가 그 노인과 겹쳐보였다는 뜻은 아니다. 노인과 그는 좋은 손님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많이 취하면 돈을 내지 않고 가는 버릇이 있는 노인과 달리 그는 우연히 카페에 들른 친구에게 종종 커피를 사는 버릇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몇몇 날 내가 보았던, 박인성 평론가와 그를 둘러싼 풍경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1. 서울역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는 일주일에 절반은 부산에서, 나머지 절반은 서울에서 움직인다고 한다. 나는 그가 부산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는 목요일 저녁, 7시 18분에 도착하는 열차에서 내리는 그의 표정을 관찰하기 위해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 광장 앞에서 한 사람이 END가 아니라 AND, 명심해라 이것들아, 하는 행동은 꼭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다, 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을 지나쳐 역사 안으로 들어가면서는 어쩌면 END가 아니라 AND,가 아니라 AND가 아니라 END라고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후 열차를 타기 직전까지 세 개의 수업과 세 개의 회의를 마쳤고 먼 거리를 이동했기에 짐도 좀 있고 다소 지친 표정일 거라 짐작한 것과 달리 그는 크지만 무겁지 않은 가방을 왼쪽 어깨에 걸친 채 바쁘지 않은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회색 쓰리피스 수트와 똑딱이 체크 셔츠를 입은 그는 플랫폼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에스컬레이터 안 타세요? 저는 그냥 계단으로 갑니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사람들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 속에 뒤섞여 그는 빠르게 걸었다. 이제 어디로 가세요? 오늘은 성수로 갑니다. 그는 여러 개의 출구 중 맨 오른쪽 출구를 향해 걸었다. 걸음걸이는 눈에 띄는 것 없이 평범했으나 힐리스라도 신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내 기준 너무)빠른 걸음이었기에 그의 마음은 이미 성수에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왜 이렇게 빠르세요? 진짜 눈을 감고 간다면 이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렇게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익숙한 길이죠. 서울에 오면 저는 보통 성수 아니면 상수에 있는데요, 상수에 갈 때는 삼각지역에서 갈아타거든요. 삼각지역에서 상수역으로 갈 때는 맨 끝에서 갈아타면 빨라요. 성수로 가면서 상수로 가는 길을 설명하던 그는 상수로 갈 때 절반쯤은 가야 할 맨 끝의 반대편 맨 끝으로 가는 결정을 하는 바람에 더 먼 길을 걷게 되곤 한다고 말했다. 걷기의 날들이죠. 차라리 중간에서 타는 게 나으려나. 늘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려요. 틀리면 무슨 생각을 하시냐고 물었더니 내가 그렇지 뭐, 하는 생각을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앞서 걷던 그에게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 그래. 거기서는 삼십 분쯤 있을 것 같은데 너도 그때까지 있게 되면 봐. 간결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은 그는 내게 저리로 가서 2호선 타고 가시면 돼요, 간결하게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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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우리의 고백

우리의 고백 - 진은영 『고백』 (문장웹진 2010년 11월호 수록) 읽기 이영주(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시 쓰기는 재미있다. 인간의 언어란 흥미로운 것이니까. 인간의 언어란 오염과 환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그것을 이상한 쾌락으로 즐기게 해 주는 수수께끼의 세계. 시는 이런 언어의 가장 예민한 촉수이다. 우리에게서 가장 멀리 가고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 내부에 가장 깊이 침투해 있다. 시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이런 멀고, 가깝고, 깊은 주름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 존재들. 시인들은 주름을 펼쳐 보이고 때로 섬세하게 접기 위해 늘 몸이 열려 있다. 열린 몸이란, 복잡하고 구불구불하고 황폐하고 어지럽고 축축하고 미끌거리고 우수수 돋는‧‧‧ 아무런 규정도 할 수 없는 무정형의 상태. 시인들이 몸을 열고 받아 적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고백 진은영 내 죄를 대신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내 병을 대신 앓고 있는 병자들에 대해 한없이 맑은 날 나 대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 버린 사람들에 대해 나의 가득한 입맞춤을 대신하는 가을 벤치의 연인들 나 대신 식물원 화단의 빨간 석류를 따고 있는 아이의 불안한 기쁨과, 나 대신 구불구불한 동물내장을 가르는 칼처럼 강, 거리, 언덕을 불어 가는 핏빛 바람에 대해 할 말이 있다 달콤한 술 향기의 전언을 빈틈없이 틀어막는 코르크 마개의 단호함과 확신에 대해 수음처럼 또다시 은밀해지려는 나의 슬픔에 대해 할 말이‧‧‧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 나 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 하늘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 나 대신 울고 있는 어머니에 대하여 잠깐 딴 이야기를 해야겠다. 시인인데 시인이 아닌 채로 살아야 하는 순간들에 대하여. 내가 생활의 우악스러움을 드러내면 누군가 내게 시인 아니에요? 라고 미묘한 공격성을 띠고 물어볼 때, 그러니까 시인은 삶에 대해 초연해야 하고, 가난도 자랑스러워해야 하며, 슬픔도 웃어넘기는, 여유로운 포즈로 뭐든지 받아안고 가는 존재여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강요할 때, 그러니까 시인이 (과장해서) 영양실조에 걸려도 역시 시인이란 그런 존재지‧‧‧ 하고 동정의 포즈를 보낼 수 있는 존재여야만 할 때(전근대적인 낭만성이 아직도 있긴 하다‧‧‧), 나는 시인 아니에요? 라는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깊은 함정에 빠진다. 시인은 원고료나 특강비 등 돈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일종의 허상에 가까운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여러 시선에 대하여‧‧‧ 나는 종종 공중누각에 던져져 온몸이 찢겨 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지? 시를 쓰지 않는 순간들이 더 많은 ‘나’의 생활과 삶은 어떻게 하지? 그 생활과 삶의 세부들이 모여 하나의 시를 탄생시키는데, 결국 시를 쓰지 않는 순간에도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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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파고

파고 한영원 그날, 은선 씨가 나를 데리러 와 주었다. 은선 씨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빨간 잠바를 입고 갔는데 은선 씨 역시 빨간 카디건을 입고 있었기에 차에 타면서 멋쩍게 조금 웃었다. 은선 씨는 내게 음악 하는 A와 만난 적이 있냐고 물었고 난 그렇다고 대답했다. 은선 씨가 자신이 그와 친구라고 대답해서 나는 어쩐지 그 둘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조근조근한 어조와 노래를 부를 때 예쁠 것이 분명한 음색이 비슷하다고.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처음 들을 때 그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마음대로 상상해 버린다. 그리고 잘 부를 것 같은 목소리를 짐작하고 그러한 짐작은 대부분 잘 맞는다. 차는 영종도로 들어가고 있었고 공항 가는 목적이 아닌 영종도 놀러 가는 일은 꽤 오랜만이라 생각했다. 은선 씨가 내게 말했다. 바다를 좋아해서 자주 가요. 아, 저도요. 그렇게 대꾸했다. 나는 바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인천에서 태어나서인지 내가 여태껏 본 바다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차는 영종도 안에 작은 섬인 무의도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해루질을 하러 가나요? 내가 묻자 은선 씨는 첫 만남에 해루질을 좀 그렇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것도 꽤 시인 같고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시인을 관찰하러 간다니 나의 소설가 친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 멋있을 것 같아. 비 오는 해변을 마구 걸을 것만 같고···, 라고 말한 적 있다. 나는 당신에게 시인이란 그런 이미지냐고 물으려다 그냥 관두었다. 물론 나는 시인이 되기에 조금 모자란 것만 같지만 은선 씨는 정말로 시인이다. 시집을 몇 권이나 냈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시인. 은선 씨는 내게 오늘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일단 엄청나게 맛있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갈 거예요. 그리고 갯벌을 좀 걸을 것이고요. 갯벌은 모래펄이라 부드럽고 더럽지도 않아요. 은선 씨의 계획은 멋져 보였다. 나는 어떤 것이든 좋다고 말했고 근사한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더 섬의 안쪽으로 몇십 분 들어간 뒤 우리는 곧이어 무의도에 있는 한 식당의 주차장에 내렸다. 나는 내리며 언뜻 식당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길래 영업을 하나 보다 했으나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였다. 들어간 사람들과 우리는 불이 꺼진 식당 안에서 화요일은 영업을 안 한다는 문구를 보곤 헛웃음을 지었다. 식당에서 나오며 은선 씨는 그럴 줄 알고 다른 식당 두어 군데를 더 찾아 놓았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차에 탔다. 은선 씨는 내게 식당에 가면 메뉴를 많이 주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다 먹지도 못하면서 음식 욕심은 많아요. 나도 조금 그런 편이라 답하고 우리는 깔깔 웃었다. 그러나 은선 씨가 두 번째로 찾은 식당 역시 닫혀 있었다. 은선 씨는 당황해하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고 했다. 나는 아까 지나가다가 보인 그 쌈밥집에 들어가자고 했다. 은선 씨가 고개를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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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내 솔직한 마음

*아래의 글은 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강연의 강연록을 개고한 글입니다. 은 말과활 아카데미 북클럽 [산책:자]의 일환으로 2025년 10월 16일부터 11월 6일까지 총 4주간 진행되었습니다. 내 솔직한 마음 현재 인생에서 수많은 적수를 만났지만, 아내여. 그대 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바이런의 격언, ···이라고 알려진 격언 1. “My soul is dark!” 솔직한 사람들은 이기적 오늘 제가 다뤄 볼 시인은 김수영이고요, 그리고 주해할 시는 「풀」입니다. 너무 유명한 시인이고 너무 유명한 시죠. 그렇지만 결국에는 고백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고백’.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수영은 고백의 달인이었습니다. 숨기는 게 좀 나을 법한 일상적인 치부까지도 굉장히 적나라한 발화로 시에다 풀어내곤 했었죠. 그런데 시만 그런 게 아니라 생활에서도 말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나 봐요. 예를 들어 「성(性)」 같은 시에는 외도를 비롯한 시인의 성생활이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는데, 실제로도 당시의 출판사 접대 자리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른 아침이면 아내인 김현경 여사에게 전날 밤 다른 여성과 동침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곤 했었더래요. 눈까지 반짝여가면서 말이죠. 그러면 김현경 여사는 또 그 얘기에 장단 맞춰가면서 재미나게 들어주었다고 하고요. 서로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유쾌해 보인다기보다는 약간 닳고 닳은 부부간의 기싸움 같기도 한데, 하여간에 이런 고백은 생전에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감안하고서라도 상대방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진솔함이죠. 그러니까 김수영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 살다 보면 자기 기분이나 생각이 얼굴에 바로바로 드러나는 사람들 있잖아요? 좋으면 좋다든지, 싫으면 싫다든지, 도대체가 갈무리가 안 되는 사람들. 김수영이 딱 그런 타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좀 완전 반대인데, 면전에서는 눈치 보느라 쩔쩔매다가 집에 가서 끙끙 앓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도 좀 나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제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사장님이 저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는 거예요. ‘하아···.’ 뭐지? 손님 나밖에 없는데. 혹시 방금 나 들으라고 그런 건가? 제가 독서대 들고 다녀서, 갈 때마다 허름하게 이거저거 펼쳐 놓고 죽치고 앉아 있거든요. 이런 일 있으면 항상 역지사지해 봅니다. 아니 짜증이 날 수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 같으면 좀 안 들리게 할 것 같은데···. 아니, 자기 심기가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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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안산 산책

안산 산책 -소설가 정용준 씨의 일일 글‧그림 도재경 설레는 아침입니다. 저는 지금 한 연구실 앞에 있는데요, 굉장히 조용하네요.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독자 여러분이 좋아하는 소설가이자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정용준 작가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평소 너나들이하는 친구지만 오늘은 작가님의 그림자가 되어 어떠한 일상을 보내고 계시는지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평소 작가님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책을 통해 접하거나 넌지시 들은 적은 있지만 작업 공간을 직접 찾아온 건 처음이라 무척 두근거립니다. 자, 이제 그림자가 될 시간인데요, 노크를 해 보겠습니다. 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리네요. 은은한 커피 냄새가 코끝에 스칩니다. 때마침 커피를 내리고 계셨군요. 안녕. 작가님은 생글생글한 미소로 저를 반깁니다. 어떻게 지냈어? 예나 지금이나 작가님은 한결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작가님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기에 앞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열심히, 구체적으로 듣습니다. 작가님의 동그란 두 귀에 얼마나 많이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미주알고주알 근황을 늘어놓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이십여 분 후에 오전 강의가 시작될 예정이라 여담은 저녁에 나누기로 하고, 저는 작가님의 그림자로서 본분을 다하며 잠자코 곁에 있을 거라고 약속합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스피커에서 잔잔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네요.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실내는 아늑한 카페 같아서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합니다. 반면 작가님은 정말 분주합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이런저런 업무를 처리하는 중인 것 같아요.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자 연구실을 슬며시 둘러봅니다. 책장엔 문학, 철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혀 있는데요, 단연코 소설책이 가장 많이 눈에 띄네요. 작가님이 읽은 책들에는 어떤 메모가 적혀 있을지 정말 궁금한 거 있죠. 하지만 그림자가 제멋대로 움직이면 곤란할 것 같아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립니다. 또 다른 책장에는 손때 묻은 공책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데 마치 오래된 책을 보는 듯합니다. 다시 한번 펼쳐 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릅니다. 블라인드가 쳐진 쪽창 아래엔 통기타와 전기 기타가 세워져 있고요, 통창을 가린 광목 커튼에는 아기자기한 엽서가 붙어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 소설의 표지 엽서도 보이네요. 그 옆 나무 선반에는 여러 색깔의 도미노를 쌓아 놓은 듯한 일고여덟 개의 키보드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접대용 탁자 위에는 매끄럽게 깎아 놓은 한 다스 분량의 연필이 필통에 꽂혀 있고, 머그잔에는 알록달록한 사탕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어쩌면 소설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연구실에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을 때 그 사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땝니다. 타닥타닥. 작가님이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사실 제가 가장 기다렸던 순간인데요.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가님의 손을 카메라에 꼭 담고 싶었거든요. 우리가 좋아하는 수많은 소설을 쓴 그 손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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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K-pop, 변화하는 스토리텔링 류수연 2020년대 한국 문학계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을 꼽는다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 첫 번째에 놓일 것이다. 그것은 근대문학 이후 세계문학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오랜 콤플렉스에 종지부를 찍은 동시에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외연을 스토리텔링으로 좀 더 넓힌다면 한 사건이 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방영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등장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노벨문학상과 OTT 오리지널 영화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문학의 일이며, 그의 노벨상 수상은 지극히 문학 그 자체의 사건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다르다. 애초에 그것은 문학 텍스트가 아닌 영상이지 않은가? 원작이 있는 작품도 아니니 미디어믹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루는 것에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대단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필연적으로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선택했다. 그것은 현재의 한국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OTT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현 단계 한국문학과 한국적 이야기가 전 세계인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지표이다. 그 사이에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대문자 ‘K’로 지칭되는 K-컬처가 놓인다. 이 연재에서 나는 ‘K’를 화두로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를 그려낸 스토리텔링의 3가지 국면을 탐색하고자 한다. 1. 바깥, 또 다른 중심 스토리텔링으로서 한국문화를 말하는 첫 번째 장에서 가장 먼저 선택한 키워드는 한강이 아닌 K-pop이다. 이 연재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결국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단계에서 한국을 둘러싼 모든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K-pop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다. 오늘의 세계인이 실감하고 상상하는 한국문화의 첫 장면은 매력적인 아이돌이 등장하는 K-pop 퍼포먼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K-pop의 성공은 여전히 놀라운 사건이다. 세계 문화의 가장 변방에 있는 한국이 이토록 많은 세계적 스타를 배출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때로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엔 수많은 ‘왜&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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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허병식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에 새로이 등장한 주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가 있다. 세계문학이란 세계화 혹은 지구화 이후 도래한 지구화시대 문학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논의 속에서 등장한 담론이지만, 그 시작은 이른바 괴테-맑스의 논의가 그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듯 근대의 전지구적 도래와 시점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말한 “민족문학이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한 것과, “어느 한 국가의 정신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의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많은 민족문학과 지방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이 탄생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세계문학 담론의 기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괴테와 마르크스의 선언이 곧바로 세계문학을 근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도록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민족이 제국주의와 식민의 결과라면, 그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험이 정련한 것이 각국의 민족문학이었고,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국가로 이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족문학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이 지니고 있는 ‘영향의 불안’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새로이 만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 타자의 문화를 의식하게 된 순간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던 것이다. 이후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경험이 식민종주국과 식민피지배국에 미친 영향관계를 분석하면서 비교문학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지배의 승인이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시작했다. 비교문학과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식민지의 경험 이후에도 이어지는 문화적 지배와 혼종성의 문제와 씨름하였다면, 포스트식민주의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개되면서 그에 대한 문화적 응전으로 재귀한 것이 세계문학일 것이다. 괴테 이후의 세계문학의 전개를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문학이란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비교문학이자 포스트식민을 경유하여 새롭게 등장한 ‘제국’에 대항하는 문학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1세기 이후 ‘세계문학론’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이다. 그들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소개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모레티와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이 강조하는 세계란, 일차적으로 “하나이면서도 불균등한” 세계체제, 혹은 서로 진입하기 위해 각축하고 경쟁하는 세계문학 공간으로서 주로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해된다. 즉 이들의 세계 개념은 문학을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환경 내지 배경에 가깝다.1) 김용규는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와 그들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세계문학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정을 보면,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는 중심부의

  • 관리자
  • 2025-11-01
윤유월 성곽 돌기

윤유월 성곽 돌기 손유미 그거 아세요? 윤년 윤유월에 성곽을 한 바퀴 돌면 삼 일만 앓다 죽는다고 합니다 귀신이 쉬는 날, 귀신이 잡아갈 만한 일들을 고백하며 지난 왕조의 성곽을 돌면 그렇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휘휘 내 할머니의 할머니는 그 지복을 누리고자 휘휘 어린 내 할머니의 손을 붙들고 강화산성을 기를 쓰고 도셨답니다 머리에는 죽음을 이고 손에는 어린이를 붙들고 중얼중얼 휘휘 나는 그때 내 할머니의 할머니가 고백한, 귀신이 잡아갈 만한 일들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합니다만 세월도 휘휘 몇 바퀴를 돌아 이미 땅에 묻혀 백골도 흙이 된 지난 세기의 고백 그리고 휘리릭 내 할머니는 내 손을 붙들고 휘리릭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수원화성을 돕니다, 관광열차를 타고 마침 인간의 쉬는 날과 귀신의 쉬는 날이 맞아서 휘리릭 바람에 날아갈까 삶을 누르며 손에는 다음 세대의 손을 붙들고 할머니, 이렇게 쉬운 방법으로 귀신을 속일 수 있을까? 직접 땅을 밟지 않고 말이야 이다음 세대야, 팔십 년을 넘게 살아남으면 귀신 속이는 건 일도 아니란다 궁금하면, 죽어라 살아남아 보렴 이 관광열차는 십 분 후면 다시 출발지로 도착할 것이고, 이 열차를 함께 탄 이들은 제각기 돌아가 몇십 년 후 혹은 짧으면 몇 분 후··· 각자의 삼 일을 앓다 죽을까? 궁금하면, 죽어라 살아남아야 할 일 그런데 귀신은 무엇으로부터 쉬려나? 묻자, 지겨운 고백들로부터 고만고만한 인간들의 오만함으로부터 짧은 해방 쉬쉬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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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청화백자

청화백자 손유미 백자에 푸른 학을 앉힌다. 푸른 소나무를 뻗치고. 푸른 솔잎들, 푸른 솔잎들, 손끝을 찌르고 싶은 푸른 솔잎들. 푸른 안료에 붉은 피의 리듬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아, 이 푸른 선은 내 것이다. 이 청화백자는 내 것이고 나는 고유하다. 그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 살아 있는 청화백자에 무엇이든 넣고 싶다. 불로장생하는 무엇이든 넣고 싶어. 드글드글 생명이 끓는다. 생명과 엎치락뒤치락하며 고독은 익는다. 청화백자 열기에 푸른 모란이 핀다, 다 잡아먹을 듯이 입을 크게 벌리며 활짝. 푸른 모란의 속에는 생명과 범벅된 나의 사랑‧‧‧ 우글우글 나의 욕망들. 나는 천삼백 도가 넘는 가마 속에 나의 생명, 나의 고독, 나의 욕망을 넣는다. 나의 생명, 나의 고독, 나의 지리멸렬함, 나의 분노, 나의 권태, 나의 인내 인내 인내, 나의 사랑, 나의 욕망을 굽는다. 아니 충분치 않다. 나의 수치, 나의 공포, 나의 비관, 나의 좌절, 나의 파렴치함, 나의 살의, 나의 간절함, 나의 어쩔 수 없음 어쩔 수 없음 어쩔 수 없음까지 빠짐없이 굽는다. 서로가 서로를 참견하여 균열을 내더라도‧‧‧ 내 것이기에. 아, 이 균열은 내 것이고 나는 비로소 고유하다. 그것은 정말로 중요했다. 이 청화백자를 갖기에 가난하다는 것,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중요하지 않았어. 학이 어깨 넘어 날아간다. 기를 쓰고 날아간다. 다른 시대에 발견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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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0과 1의 매력

[문장서포터즈] 0과 1의 매력 문장 서포터즈 2기 수현 여름을 보내는 각자만의 방식이 있듯, 문학을 사랑하는 것에도 여러 방식이 존재한다. 도서 전시회를 간다거나, 북토크를 간다거나, 한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본다거나. 그중에서도 나는 같은 단편을 읽고 또 읽는 편에 해당한다. 한 게으름뱅이가 꽤나 오랫동안 소설과 시를 즐길 수 있었던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필사와 전자책이다. 무엇보다 ‘북스타그램’ ‘텍스트 힙’ 같은 단어들이 유행하며 이북 리더기를 통한 독서와 필사 다이어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두 키워드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늘은 《문장웹진》을 통한 독서를 소개하고 싶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의 독서 방법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보려고 한다. 먼저,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다이어리와 펜을 꺼내 든다. 필사. 누군가의 문장을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그 행위는 언젠가부터 나의 오랜 취미이자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언젠가 꺼내 보겠다는 마음으로, 비록 외우지는 못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 새겨 보겠다는 마음으로 한 자 한자 쓰고 있다 보면 작가에 관해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 왜 이런 단어를 썼을까. 왜 이런 문장 구조를 만들었을까. 하루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필사를 통해 나는 바쁜 삶 속에서 조금이나마 문학을 생각하는 시간을 남겨 둘 수 있었다. 이젠 손으로 문장을 쓰는 행위가 나만의 독서 버튼을 켜는 것과 같달까. 우울한 날이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찾아본다. 내 손 글씨로 쓴 문장을 천천히 읽어 보기도 하고, 처음 마주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종이에 문장을 써 보기도 한다. 달달 외우고 다녔을 만큼 사랑한 문장들이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에는 오랫동안 부대에 담가 둔 술을 열어 본 사람처럼 설렘을 느끼기도 한다. 세월이 만들어 내는 새로움은 또 다른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필사도 좋지만 종종 시간이 부족하거나 손이 아프면 타이핑을 하기도 한다. 문장을 따라오는 생각들을 모두 남기기엔 타이핑만큼 좋은 기록 방법이 없었다. 내가 독서 기록을 남기는 가장 큰 이유는 예쁜 글씨와 다이어리가 아니니까. 언제라도 다시 꺼내 보기 쉬울 것. 나의 필사는 그렇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갔다. 만화책보다 텔레비전, 방송국보다 유튜브 채널들이 익숙한 세대이기 때문일까. 책장에 꽂아 둔 종이책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전자책 어플에서 ‘내가 구입한 도서’ 항목을 훑어보는 것이 내겐 훨씬 익숙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북마크 등록을 해 두며 자주 드나드는 곳은 《문장웹진》이다. 베스킨라빈스의 맛보기 스푼이 있듯, 《문장웹진》에는 다양한 작가와 콘텐츠를 구경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좋은 글이라고 해도 기본 설정에 따라 달리 읽게 된다. 웹진 사이트에서는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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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전기로 꿰맨 사람

전기로 꿰맨 사람 천선란 그녀에게서 답장이 온 건 3개월 만이었다. 답장이 늦었습니다. 그녀에게 여러 차례 메일과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희에게 달랑 저 한 문장 쓰인 메일 제목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희는 로그인된 메일이 업무용 메일이 맞는지, 실수로 개인 아이디로 로그인한 것은 아닌지 다시 확인했다. 아주 가끔 희의 핸드폰과 PC가 연동되며 PC의 로그인 정보가 희의 개인 정보로 전부 변경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개인 메일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연락을 간절하게 기다리지 않았기에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로그인은 업무용 아이디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광고성 메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희가 메일을 클릭했다. 고민이 길어져 답장이 늦었습니다. 업무에 지장이 생기진 않았을지요. 개인 메일로 연락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담당자님이 먼저 읽으시고, 판단하시길 바라서요. 괜찮으시면 이 메일로, 담당자님 개인 메일 주소로 답장 주세요. 내용을 보자 당혹스러움이 더 짙어졌다. 메일의 미궁이 더 깊어진 기분이었다. 광고성 메일은 아닌 듯했고, 그렇다면 피싱 메일인가? 이런 식으로 지인인 척 혹은 중요한 메일인 척 개인 메일을 알아내려는 수단일 수도 있겠다. 이 시대의 피싱이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의심해서 나쁜 건 없었다. 이전에 주고받은 메일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면 편했겠지만, 데이터 용량 기준법이 시행된 뒤로 메일을 한 달에 한 번씩 전부 비워야 했다. 이전 내용이 없는 것을 보고 희는 제목의 ‘늦음’이 적어도 한 달 이상 되었다는 걸 그때야 알아차렸다. 정말 급한 일이었다면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재차 독촉하는 메일을 희가 보냈을 것이다. 희는 그 메일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원칙대로라면 쓰레기통을 바로 비워야 했지만, 알 수 없는 찜찜함에 희는 ‘1’이 표시된 쓰레기통을 그대로 두었다. 메일의 출처가 떠오른 건 그날 점심시간이었다. 팀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칠 즈음 희는 오전에 왔던 의문의 메일을 대화 소재로 꺼냈다. 아무래도 신종 피싱 수법인 것 같다는 희의 말에, 팀원 막내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맞을 거라고 맞장구쳤다. 막내도 몇 달 전 이런 식의 피싱을 당했었더랬다. 자신이 ‘신체 포기자’인데 ‘자원소비세’가 독촉 메일이 자꾸 온다는 항의 메일이었다. 너무나도 옴 직한 내용의 메일이었기에, 막내는 의심 없이 답장했는데 머지않아 욕설이 가득 담긴 메일이 도착했다. 자원소비세를 내지 않기 위해 신체까지 포기했는데 독촉 메일을 받았다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고 공무원들의 안일함과 무능함을 정치 스트리머들에게 알릴 거라는 협박과 함께 이 사태를 막고 싶으면 개인 메일로 답장하는 끝말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개인 메일로 답장했느냐며, 동기가 묻자 막내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스트리머들에게 잘못 걸리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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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미라의 바다

미라의 바다 유영은 0 참 까맣고 짧다. 정숙은 갓 태어난 미라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다음 말을 생각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너 꼭···, 하면서 말을 고르던 정숙은 드디어 딱 맞는 말을 찾아냈다. 너 꼭 미라 같구나! 시간이 갈수록 검고 바삭바삭해지는, 살점이 까맣고 얇은 조각이 되어 손을 대면 후두두 떨어져 나가는 미라. 그렇게 미라는 미라가 됐다. 미라라니, 잔인한 이름이라고 언젠가 지희는 말했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였다. 미라가 된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정숙은 그때 미라를 보고 그러니까 너 꼭···, 시체 같구나! 외칠 뻔했으므로. 시체보다는 미라가 되는 게 낫지 않은가? 시체는 완전히 끝난 거지만, 미라는 이어진다. 미라는 평생 검었으나 열여섯 살부터 더 이상 짧지는 않았다. 자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열네 살까지 백사십 센티미터를 넘지 않던 미라는 열다섯 살, 열여섯 살, 두 해 동안 삼십 센티가 넘게 컸다. 하룻밤 새 일 센티가 자랄 때도 있었다. 그 시기 미라는 아침마다 갈색 개털 무덤을 빠져나와 똑바로 서서 양팔과 다리를 쭈욱 뻗고 그 끝의 손과 발을 쳐다봤다. 손과 발은 미라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팔과 다리는 길고 가늘어졌다. 부슬부슬한 갈색 털이 꼭 같은 개 세 마리가 아침마다 가늘어지는 미라의 발목을 핥았다. 미라는 키가 자라고 난 후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갑자기 자란 팔다리의 피부가 얇아지다 못해 모두 벗겨져 버린 듯했기 때문이다. 내리꽂듯 떨어지는 소나기, 동네 뒷골목의 쓰레기 냄새, 더위, 추위, 바람, 햇살, 살에 닿는 모든 것이 따가워서 마당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 엄마. 정숙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미라가 집에 계속 머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어미 새가 되는 것은 정숙의 오랜 꿈이었다. 정숙은 월, 수, 금요일에는 17층짜리 오피스 건물에서, 화, 목, 토요일에는 4층짜리 상가 건물에서 청소일을 했다. 새벽 여섯 시에 나갔다가 두 시쯤 대낮의 길을 걸어 미라가 개들과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며, 정숙은 자신이 둥지로 돌아가는 어미 새라고 생각했다. 아기 새들이 바글바글 들어 찬 둥지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목젖이 보이게 입을 벌리고 삐악삐악 울며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라를 위해 정숙은 퇴근할 때마다 집 앞 빵집에서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을 사 갔다. 비슷하게 생긴 조각 중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조각을 고르는 시간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었다. 미라는 크림만 떠서 먹었다. 딸기와 빵은 흙 마당에 던져두면 가장 날쌘 개들이 달려와 먹어 치웠다. 잠깐, 그 애들 이름이 뭐였지? 몽글이, 구름이, 별이···. 미라는 매일 부대끼는 개들의 이름을 헷갈렸다. 미라의 개들이 아니라 모두 정숙의 개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숙의 개들은 처음에는 아홉 마리였다가 곧 서른세 마리, 스물여덟 마리, 마흔두 마리, 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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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굴은 구르지 않는 돌

굴은 구르지 않는 돌 함윤이 함윤이의 소설 「굴은 구르지 않는 돌」을 위한 사운드트랙 ⓒ 이해인 “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 영어 속담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 - 두보의 시 「팔전도」 중 그 동굴에 관한 말 중 열에 여덟은 거짓이다. 내가 사실을 알려 주겠다. 물론 내 이야기를 듣고도 이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헛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을 테다. 어쨌든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걸 얘기하려 한다. 동굴은 2019년 7월 말, 뼈까지 침식되는 듯한 더위 속에서 장차 미술관이 될 부지를 측량하던 일꾼들이 발견한 것이다. 미술관을 ㅂ기업의 새로운 문화적 간판으로 삼고자 한 용 회장은 동굴의 소식을 듣고 긴긴 고민에 잠겼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을 나는 어쨌거나 지지하고 싶다. 그는 자신이 사들인 광막한 땅에 난 균열의 시작점처럼 보이던 공동(空洞)을 활용키로 마음먹었다. 곧 동굴을 개조한 미술관 ‘별관’을 만든다는 소식이 ㅂ기업 산하 문화재단에 퍼졌다. 당시 문화재단의 직원들이 느낀 암담함이야 추측할 수 있을 뿐, 여기에 대해선 나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별관 설립을 곁들인 공사가 시작된 2020년에는 모두가 알 전염병이 세계를 사로잡았다. 많은 사람이 열을 앓았고, 연달아 기침했으며, 멍한 얼굴로 집안에 갇혀 있었다. 한번 몸에 깃든 병증은 다른 몸들로 옮겨 다녔다. 죄지은 마음이 곳곳에 퍼졌다. 용 회장은 늘그막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 시기를 주름잡을 지렛대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여러 겹의 우연에서,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의 교차점에서 오는 것이었다.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외려 지금이야말로 별관의 공사를 진척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어차피 동굴을 다듬는 작업자들은 모두 두터운 마스크를 써야 했다. 산업용 방진 마스크가 코비드 바이러스를 막기에 적절치 않다는 연구 결과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한여름의 굴속에서 마스크를 쓴 인부들이 호흡 곤란을 호소해도 용 회장은 그저 밀어붙였다. 시대의 흐름이야 어쩔 수 없어도 공사장 인부들은 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인부들은 매일 땀 흘리고 번갈아 기침하며 동굴을 파고 들어갔다. 굴은 외부의 빛과 습기 속으로 서서히 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4년 후에야 이 흐름에 끼어들었다. 전염병이 지나가고, 지나갔다, 는 표현과 상관없이 외상과 내상을 받은 이들이 남고, 무수한 마스크가 쓰레기 더미가 되어 우리가 모를 곳에 묻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해의 예술지원사업에 모두 떨어졌다. 국가나 서울시, 민간이 운영하는 지원사업의 선정자 목록 중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각종 웹사이트를 들락거렸다. 뒤늦게라도 창작자를 모집하거나 후원한다는 재단 또는 기관의 공고를, 아니면 카메라를 다룰 줄만 알아도 곧장 일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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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시를 배우는 교실, 그리고 은하수 같은 무대

[문장서포터즈] 시를 배우는 교실, 그리고 은하수 같은 무대 ― 글티너 대리석, 멘토 성현아·서윤빈 인터뷰 문장서포터즈 2기 이시우 학교 동아리실 같은 공간 ― 글티너 ‘대리석’ “문학광장 글틴에서 주로 시를 쓰고 있는 대리석이라고 해요.” 인터뷰의 첫인사는 담백했다. 글틴에서 활동하는 십 대 창작자로서, 대리석은 자신을 ‘학교 동아리실 같은 공간에서 시를 배우고 있는 학생’이라 소개했다. 그는 글틴에서 시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또래들과 소통하며 글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사진1. 문학광장 글틴(https://munjang.or.kr/teen) 글틴은 한글 ‘글’과 영어 ‘TEEN’이 만나 붙여진 이름으로, 문학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과 소통을 연결하기 위하여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2005년부터 운영해 오고 있는 국내 유일한 청소년 온라인 문학 플랫폼이다. 글틴의 ‘쓰면서 뒹글’은 글틴 친구들이 쓴 시, 소설, 수필, 감상&비평 장르의 작품을 직접 올리고 공유하는 창작 공간이다. 이곳에 글을 올리면 분야별 멘토들이 각 작품에 댓글로 작품에 대한 의견을 작성한다. 이후 다음 달 중순이 되면 담당 멘토들이 월 장원을 뽑아 주시고 월 장원으로 뽑힌 작품들은 이후 문장청소년문학상 후보작들이 된다. 대리석에게 글틴은 우연히 찾아왔다. 먼저 활동하던 친구의 권유가 계기였다. 학교 내신과 시험 속에서 ‘시’는 언제나 어렵고 난해하게만 느껴졌지만, 글틴에서 만난 다양한 작품들은 그의 시각을 바꾸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쓴 시였는데, 멘토님께서 정성스럽게 피드백을 주셨고, 그 작품이 월 장원 후보에 오르기도 했어요. 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사진2. 월 장원 후보 선정 공지 멘토링 경험은 그에게 글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양안다 멘토님께서 현대 시 독서가 부족하다고 말씀해 주셨을 때, 머리가 띵해졌어요. 그전에는 시를 시험공부처럼만 접했거든요. 그때 이후로 시를 더 진지하게 읽고 쓰게 되었습니다.” 사진3. 대리석의 시에 대한 멘토링 의견 글틴 속 또래들과의 관계는 아직 서툴다. “카톡방이 있긴 한데 활발히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대신 글틴을 알려 준 친구와 가끔 만나 같이 글을 쓰곤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여러 사람들의 작품에서 각기 다른 색을 발견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자기 신념을 담아내고, 어떤 이는 고전 시가 같은 문체로 글을 쓰기도 한다. “매일 올라오는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여러 스타일을 접하면서 시 쓰는 재미가 커졌습니다.” 대리석에게 글틴은 단순한 사이트가 아니라, 문학을 처음 제대로 배우게 해 준 공간이다. “학교 동아리실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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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2020년대 문장웹진 중간결산 특집 좌담

[문장서포터즈] 2020년대 문장웹진 중간결산 특집 좌담 ─신인 작가가 바라본 요즘 시와 소설 문장 서포터즈 2기 김이성 1. 안녕하세요. 두 번째 인사드리네요. 지난 9월 1일 게재된 편은 어떻게 보셨나요? 문학이라는 ‘다정한 네트워크’를 매개로 더 많은 분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저의 바람이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가닿았다면 좋겠네요. 저는 1차 활동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2차 원고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어요.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이전보다 더 특별한 활동을 기획해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지난 며칠간 《문장웹진》에서 기획했던 여러 콘텐츠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어요. 소설과 시, 비평과 기획, 모색 코너까지 전체적으로 훑어보면서 작고 사소하지만 확실하게 《문장웹진》의 지난 20년을 돌아보았지요. 오늘은 《문장웹진》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다가 흥미로운 콘텐츠 하나를 발견해서 여러분들께도 소개해 보려 해요. 바로 2020년 1월 《문장웹진》 ‘기획’ 코너에 올라온 시리즈인데요. 시집, 단편소설, 장편소설 부문으로 나누어 평론가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호명된 작품을 대상으로 젊은 작가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기획 좌담이에요. 해당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을 동료 작가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직접 들어볼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부문별로 해당 시리즈를 살펴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2020년대의 절반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 비슷한 형태로 ‘중간 결산’을 해보면 어떨까. 10년이라는 시간을 총결산하는 것도 좋지만, 중간 시기에 한 번쯤은 어떠한 흐름과 경향이 두드러지는지 파악해 보고 그와 함께 무심코 놓쳐 버린 과거의 작품들을 재조명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곧바로 계획을 세웠지요. 대상 작품은 지난 5년(2020~2024) 동안 《문장웹진》에 게재된 시와 소설로 한정했고, 작년과 올해 각각 《문장웹진》에 첫 시와 소설을 발표한 작가님들을 섭외해 해당 주제를 가지고 함께 좌담을 진행해 보았어요. 아래 좌담을 따라가며 여러분들도 함께 《문장웹진》의 2020년대를 추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2. 이번 좌담은 지난 5년간(2020~2024) 《문장웹진》에 발표된 시와 소설을 함께 읽고 해당 기간 우리 문학을 중간 결산하여 지나간 과거와 나아갈 미래를 동시에 살펴보려는 취지로 기획되었습니다. 작년과 올해 각각 《문장웹진》에 첫 시와 소설을 발표한 젊은 작가 두 분을 섭외하여 작품 선정을 부탁드렸고, 그렇게 해서 선정된 9편(시 5편, 단편소설 4편)의 작품을 가지고 함께 얘기 나눠 보려 합니다. 본 좌담에서 언급된 작품은 본문 아래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김이성: 안녕하세요. 문장 서포터즈 2기 김이성입니다. 오늘은 지난해와 올해 각각 《문장웹진》에 첫 시와 소설을 발표한 작가님들을 모시고 ‘2020년대 문장웹진 중간결산 특집 좌담’을 진행해 보려 합니다. 먼저 작가님들 한 분씩 자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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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눈물

눈물 이현아 무덤 나란히 다섯 개. 풀숲이 무성해질 때마다 집안 남자들이 찾아가 깎았던. 이곳은 연안 이씨 가문의 선산이고 무덤은 크고 봉긋하다. 무덤은 크고 무겁다. 조상의 무덤을 파 본 적 없지만 무덤 안은 깊을 것이다. 아빠는 그곳에 부모를 묻었을 것이다. 묻다니. 묻는다니. 아빠는 오른쪽 무덤을 가리키며 엄마라 부르고 왼쪽 무덤을 가리키며 아버지라 부른다. 아빠는 무덤 앞에 납작 엎드린다. 나도 납작 엎드린다. 무덤은 크고 봉긋하다. 무덤 안은 김장독처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할 것 그곳에서 시체는 천천히 썩어 갈 것 감히 나를 묻다니 나는 무덤 안에 있고 아빠는 내게 납작 엎드린다. 엄마도 오빠도 선생도 친구도 엎드리고 내 남자 친구는 저 옆에 서서 오열하고 내 전 남자 친구도 찾아오고 저들끼리 엄숙하고 슬프지만 나는 아주 깊은 곳에 있을 뿐이다. 나는 내 위에 엎드리는 당신들을 보며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지만 나는 그저 크고 봉긋할 뿐이다. 당신들은 나를 두고 떠나며 이제 차를 타고 식사를 하러 갈 뿐이다. 나는 언덕에서 내려와 밤을 줍고 차를 타고 선산을 떠난다. 아빠가 죽으면 내가 어떻게 해 줄까 묻어 줄까 태워 줄까 묻고 아빠는 자기를 데리고 다니라고 한다. 어이가 없어 허허 웃고 차 사고가 났다. 나는 봉안당 안에 있고 이곳은 계약 기간이 20년이라는 관리자의 말과 부모님이 늙으시면 관리를 못 하실 테니 저희가 하겠다는 당신들의 포부와 매년 찾아오겠다는 눈물의 다짐과 이제 당신들은 식사 중 나도 식사 중 내가 죽는다니 난 안 죽어 여긴 봉안당도 선산도 장례식장도 아니고 차 사고 따윈 없었고 아무도 죽지 않았으므로 그곳들은 다 텅텅 비었고 장례 업체 사람들은 실업자가 되어 눈물을 흘리고 여긴 그냥 극장이야. 죽음에 대한 영화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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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1
매 정

매 정 이현아 복싱을 하던 언니는 훈련 중 관장님에게 세게 맞고 화장실에 가 엉엉 울었다고 했다. 너무 아파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그때 느꼈던 감정에 슬픔과 분함과 좌절감이 섞여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언니는 너무 좋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매 정이라는 게 드는 것 같기도 하다고, 관장님이 너무 좋았다고 그랬다. 나도 누군가에게 죽을 때까지 두들겨 맞아 본다면 혹은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패 준다면 나도 엉엉 울 수 있을까? 정들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 정도쯤은 나도 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저 잠시 내게 헤드기어를 씌워주고 나를 링 위에 올려 보내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상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는 당신들에게 두들겨 맞는다. 당신들은 글러브를 끼고 훅을 날린다. 나는 복싱을 배운 적 없으므로 처참해질 뿐이고 내가 바닥을 굴러도 당신들은 끝낼 생각 없다. 나를 짓밟고 걷어차고 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나는 걸레짝이 되어 화장실에 들어간다. 울지 않는다. 왜 울지 않지? 이 화자는 왜 이곳에서 울지 않나요? 이건 내가 나에게 한 질문이 아니다. 저도 모르죠. 저는 이 화자가 아니니까요. 이 화자에게 주어진 것은 무참한 폭력이지, 눈물이 아니다. 눈물은 화자가 아닌 나에게 주어진 것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다. 화장실에서 만신창이가 된 애를 보며 엉엉 우는 내게 그 애가 묻는다. 왜 울어요? 불쌍하잖아요‧‧‧

  • 관리자
  • 2025-11-01
weirdo

weirdo 김진선 까마귀의 지능은 다섯 살에서 일곱 살 인간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한다 그 나이대의 인간 어린아이는 까마귀를 보고 신기해한다 집이 없다 까마귀는 뚫어져라 쳐다보는 인간 어린아이는 겁이 없다 까마귀와 대화하는 법을 배운 적 없는데 달려든다 부딪혀 온다 겨우 소동 요동 뒤통수를 얻어맞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조류에 대한 공포는 인간 어른이 되어서야 생기고 극복할 수 없는 게 생겼을 때 인간은 인간 어른으로서 대우를 받기도 한다 문밖은 위험한데 침대 모서리를 이리저리 돌면서 자는 인간 어린아이의 두 발은 푸석한 날개의 가속처럼 잠시나마 세차다 까마귀에게 바깥은 너무 많다 밤이 방해물이 아니듯이 각자의 울음으로 애정으로 서로를 식별한다 까마귀를 반기는 인간 어른을 만나면 인간 어린아이는 기쁠 것이다 그런데 훈육은 생명을 다루는 것일까 생존을 다루는 것일까 내 탓이야 내 탓이다 말하고 싶은 심정으로 뒤척이다 까악까악 억울함을 듣는다 까마귀든 인간이든 부모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을 때 뒤통수는 잘 보이는 법이고

  • 관리자
  • 2025-11-01
경우의 수

경우의 수 김진선 왼손 약지의 치수를 알게 된 날이었어 세상이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우리 사이를 설명할 수 있는 숫자가 하나 더 생겼지 백 일 이백 일 삼백 일 금세 삼백육십오 일이 되는 독차지하고 싶은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미루어 봐 만약 내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했어? 가까스로 도착했는데 목이 쉬도록 시비를 건다면? 만약 나랑 갑자기 연락이 안 돼 그럼 얼마나 기다릴 거야? 어디까지 찾아다닐까 찾아올 수는 있어? 바닥을 기어다니는 바퀴벌레도 제 짝이 있다고 생각하면 쉽게 때려죽일 수 없는 것처럼 단 일 분이라도 눈 감았다 뜨는 사이 줄어드는 숫자를 보는 것과 부른 배처럼 더해지는 숫자를 보는 것은 다르지 적막 속에는 적막을 깨우는 소리가 사랑 속에는 사랑을 깨는 말이 있어 어떤 사랑은 천천히 다 마시고 일어나자는 말이 식으면 이만 일어나자는 말로 변하는데 만약 태어날 아이가 누구를 닮으면 좋겠어? 나는 지치지 않고 물어 그것이 졸릴 때의 이목구비인지 딴청을 부리는 말투나 식성에 대한 것인지 당신도 물어 구체적으로 걸음짓 머릿결 숨소리 작고 옅은 점 이루는 모든 것 바람에 흔들리는 조화 같은 날들을 유심히 모아서 어떤 사랑은 세상에 없는 경우를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고 우리는 그 재주를 잘 낚아챘지 빈틈없이 깍지 낀 열 손가락에 꼭 맞는다

  • 관리자
  • 2025-11-01
누가 나를 나가라 합니까

누가 나를 나가라 합니까1) 희음 선아는 오늘 아버지의 두꺼운 손이 언젠가의 하나님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도를 가르쳐 준 적도 없으면서 그 기도가 틀렸다고 불 한가운데로 내던지시는 하나님. 손자국이 뒤덮인 끈질긴 몸으로 선아는 도망쳤습니다. 기도도 가족도 없는 곳에서 선아는 다시 시작했습니다. 밥이 있고 화채가 있고 언니들이 있는 곳. 누구도 누구를 함부로 구원하려 들지 않는 곳. 사랑은 몰라도 멸시와 천대와 내동댕이가 무언지는 너무 많이 알아 버린 사람들이, 마른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곳. 이곳에서 선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인 채로도 두 번 세 번 살아진다고 자꾸 중얼거립니다. 현수는 어릴 적부터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건 대개 삶과 죽음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이었는데 어른들은 웃어넘기기 바빴습니다. 그런 어른이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하자 현수는 열심히 살고 싶지가 않아졌습니다. 눈만 뜨면 놀고 또 놀았습니다. 너무 놀다 보니 무엇도 새로 시작하기엔 늦은 때가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도 현수의 서툴고 가난한 출발을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수는 출발 없이 도착했습니다. 출발 없이 도착할 수 있는 곳은 비탈지고 울퉁불퉁한 바닥을 가졌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이유로 먼저 도착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원하고 마을이 원하고 가족이 원하고 애인이 원해서. 굶주린 배가 원하고 목숨이 원해서. 이런 이유로 그들은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 옆에 있다 보면 현수는 웅크리고 있을 때도 피가 도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 찾지 못했던 대답이 여기에 고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선아는, 현수는, 우리들은 발그레한 뺨으로 밥을 먹고 웃고 울고 땀 흘리며 일하고 욕하고 인사하며 살았는데요, 어느 날 어떤 창백하고 낯익은 얼굴들이 몰려와 그게 다 가짜라 말합니다. 이 집도, 이 삶도 다 틀렸다고 합니다. 또다시 나라와 마을과 가족과 애인의 이름표를 달고서 선한 얼굴로, 이번에는 여기서 나가라고 합니다. 이봐요, 대체 여기란 어딥니까. 이 집과 이 삶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말입니다. 내 집에서 누가 나를 나가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내 삶에서 누가 나를 나가라고 할 수 있습니까. 1) 2023년 6월 29일 성 노동자의 날 집회 때 지어 낭독한 것을 다듬은 시. 지금도 용주골과 미아리에서는 성 노동자의 삶터를 강제 철거하고 그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려 하고 있다.

  • 관리자
  • 2025-11-01
흰 긴 꼬리연 이야기

흰 긴 꼬리연 이야기 희음 거리 위에 짝 없는 신발들이 나뒹구는 것을 본다 피하지 못한 몸들이 그곳에 있다 작은 몸, 작은 몸을 돌보던 몸, 주름진 몸과, 목발을 짚던 몸, 병원 창문이 터지는 것을 본다 침대 난간을 붙들던 손이 연기에 휩싸인다 인큐베이터가 깨진다 그걸 끌어안으려던 몸,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본다 보던 것을 다시 본다 빵을 기다리던 줄을 향해 총탄이 발포되는 것을 본다 한 사람이 쓰러지고 그 주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붙든다 사람들은 격렬히 항의하고 울부짖으면서도 줄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줄 위에서 주저앉는다 나는 본다 보던 것을 다 볼 수 없다 “복음”이라는 말이 “청소”라는 말과 나란히 놓이는 걸 듣는다1) 한 무리가 두 단어로 불을 지핀다 잠도 자지 않는 로봇에게 고요히, 조준을 맡긴다 작은 집들이 불탄다 나는 듣는다 무너지는 선 옅어지는 숨 내가 듣는 것을 끝까지 다 듣지 못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멈추지 않는다 이름은 끝나지 않는다 마을의 동물들은 서로의 냄새를 찾아 울고 또 운다 불탄 집터 지붕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이들은 살아 내려 한다 허기의 명령을 따라 헤매다 죽은 몸 앞에 멈추어 선다 그 몸을 먹으며 목숨을 잇는다 시를 쓰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죽는다면 나의 살림을 팔아 흰 천과 실을 사서 사랑의 천사처럼 보이는 연 하나 만들어 주길···2) 그는 폭격으로 죽었고 그의 시를 전해 받은,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음이 이어지는 땅 위에 남아 있다3) 너무 많은 복음과 불빛이 흘러들어 오는 틈 눈을 감고 그 안을 노려본다 누가 이리로 온다 너를 알아본다 내가 본 것을 듣는 네가 있다 네가 본 것을 듣는 내가 있다 우리는 본다 끝까지 다 보지 못한 채 본다 우리는 듣는다 끝까지 다 듣지 못해도 듣는다 세상 절반의 높고 빛나는 복음의 고요를 향해 우리는 떠든다 어디든 가는 꼬리 긴 연처럼 끝도 없이 떠들기로 한다 1)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폭격할 때 AI 표적 생성 플랫폼 “복음(the Gospel)”이라는 이름의 무기 시스템을 사용한다. 이것이 “인종 청소”에 동원되는 것이다. 2) 리파트 알아리르의 시 「내가 죽어야 한다면」에서 차용. 이 시는 정새벽 시인·번역가의 인스타그램에서 처음 접했다. 최근

  • 관리자
  • 2025-11-01

천 박술 그건 천이었는데 우리가 꿰매어서 옷이 되었다 없는 것이 많았지 좋을 때는 그래서 추억은 어두운 곳에 대한 게 많고 가로등 아래라던가 굴다리 앞 개울이라던가 지하실 파티라던가 아니면 음 마음이었는데 미루어 생각해 보니 구조였다던가 괴롭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고 흥분되지도 않는 어지러운 낮잠 같은 그런 게 아니라 반드시 포착하고 싶은 게 우리에겐 있었는데 잠자리채를 쥐고 놀던 때처럼 왜는 없고 어떻게만 있었지 얼굴 뒤에 추가된 얼굴만 반드시 사진을 찍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누굴 위한 건지 몰랐다던가 반드시 보고 싶은 건지 반드시를 보고 싶은 건지 분간이 잘 안되었다던가 이런 건 철학하는 애들 고민이지만 검은 천을 두르고 밤새 춤추는 너를 보고 주전자 가득 물을 끓였던 적이 있지 다음 날 아침 차가운 액체 옆에서 깨어나 보고 싶어서

  • 관리자
  • 2025-11-01
구월

구월 박술 벌레가 누워 있는 여름의 얼굴을 더듬다가 문득 내 얼굴이라는 걸 알았다 생명이 흐르는 걸 과거형으로 바라볼 때 미세하게 변하는 행인들의 표정 포크처럼 갈라져 나가는 여름이 죽는다. 여름이 죽는구나, 내가 거기 없어도. 살았던 삶과 살아도 되었던 삶이 갈라지는구나. 마로니에 가시 돋친 껍질이 갈라지듯이. 무책임한 가정법을 밀어내듯이. 보리수 검붉은 과즙은 겨우내 도보 블록을 물들이겠지. 무한 정렬 패턴을 반복하며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 잊겠지. 상징을 긋겠지. 맹세를 잊고서 허전함을 자유와 바꾸겠지. 그때 그랬더라면, 을 무수한 낙엽의 그랬겠지, 로 덮겠지. 이런 날을 노파들의 여름 Altweibersommer이라고 한다. 여기서 다 늙었는데 빛은 쬐어 뭣하나, 이렇게 말할 사람은 없다. 그런 식으로 굽은 나무는 여기에선 자라지 않는다. 뿌리를 파보면 모를까. 그럼 아직 약동하는 미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라는 나무는 여기 없다. 처음으로 은는이가를 설명하려고 했던 때의 당혹감을 생각한다. 어둠 속 네눈박이 같았지. 사실은 그 이후 모든 순간이 은는이가의 반복이다. 그러니까 이건 전부를 떠받치는 미세한 틈들에 대한 이야기다. 죽는 여름을 죽은 여름으로 바꾸는 경외에 대한 이야기다. 그건 빛 속에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무언가를 닮았다. 보도블록 위 아름다운 비단벌레가 움직이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지속된다

  • 관리자
  • 2025-11-01
껍데기

껍데기 신수형 밤을 열고 바다로 내려간다 해변에서 죽은 별들을 수집한다 아직 살아 있는 메아리를 듣는다 여기 모두 다 있네 고생대의 밤이야 석탑을 세 번 돈다 더 깊은 바다로 내려간다 왜 여기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왜 반복되고 있는지 혹시 갑자기 깨어난 적이 있는지 누군가 꿈을 해석한다 해석되는 꿈을 꾼다 당신은 개를 키우는 사람 테이블 위에 개를 올려놓고 빗질을 한다 개와 함께 골목을 돈다 같이 가요 이건 아니잖아 그래도 같이 가요 당신은 개를 낳고 개를 씻기고 개를 가르치고 고생대의 밤이다 거듭되는 당신은 이제 거울 앞에서 내게 묻는다 어울리나요 우린 아주 먼 곳까지 갈 수 있나요 당신은 돌아보지 않고 거울 속의 내게 묻는다 나도 거울 속의 당신을 본다 개들이 짖는 한 여긴 영원할 거예요 이제 당신은 개들과 함께 물고기를 그리고 종이를 오려 붙이고 나는 죽은 별들을 수집한다 메아리들과 함께 더 깊은 바다로 내려간다 고생대의 밤이다

  • 관리자
  • 2025-11-01
그는 일박을 한다

그는 일박을 한다 신수형 양평으로 가는 길 위에서 세 개의 터널을 연달아 통과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 문득 자신이 지나온 몇 개의 터널들이 떠올랐다 그 터널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터널이었을 뿐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터널은 깜깜했으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기억할 만한 것이 없다 터널은 기억이 아니다 사라진 시간이다 없는 시간이다 몇 개의 터널을 지나고 나자 갑자기 늙어 버리지 않았던가 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긴 노래를 부른다 마당 한구석에 키가 작고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는 그 나무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와 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찍는다 나무의 옆에 서 있는 것인지 앞에 서 있는 것인지 혹은 뒤인 것인지 알 수 없고 그 속을 사방을 가진 나무의 속을 알 수가 없다 마른 가지들이 된 나무를 만질 수 없다 밤이 오면 불을 피우리라 하고 그는 생각한다 불 속에 잠겨 일렁이리라 생각한다 떠올리는 모든 것들이 다 타오른다 떠올리자마자 불길이 된다 계속 생각을 던져 넣는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또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자 노래도 타오른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계속 노래가 필요하다 계속 노래가 필요해서 키가 작고 앙상한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본다 나무를 바라보자 나무도 타오르기 시작한다 잠시 일렁이더니 조용히 사라진다 키가 작고 앙상한 나무가 더 필요하다 모든 것이 타오르는 가운데 그는 일박을 한다

  • 관리자
  • 2025-11-01
선물

선물 유병록 마음이라는 게 내 안에 있고 그걸 꺼낼 수 있다고 믿어 온 사람처럼 마음 둘 곳이 없군, 생각했다 마음이라는 게 내 안에 있고 그걸 꺼낼 수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너에게 주어야겠다 마음먹었다 이걸 받고 너는 선물이라 여길지 모르겠지만

  • 관리자
  • 2025-11-01
간다

간다 유병록 큰 슬픔 앞에서 작은 슬픔이 쓰러진다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일으켜 세우고 무릎을 털어 준다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등에 업고 먼 길을 간다 그 걸음이 늠름해서 멀리서 본다면 큰 기쁨이 작은 기쁨을 업고 나들이 가는 줄 알 것이다

  • 관리자
  • 2025-11-01
빨간 만년필

빨간 만년필 차영은 과장이 신제품 매출 통계를 달라길래 구글 스프레드시트 링크를 팀 채팅방에 올렸다. 요약해서 뽑아 와. 과장의 답장이었다. 통계를 A4용지 한 장에 담기는 어려웠다. 어떤 항목을 숨길까요? 재량껏 해. 글자 크기를 9포인트로 줄여도 인쇄 미리보기를 누르면 표는 여전히 용지를 벗어났다. 신제품은 최근 일 년간 출시된 것으로 한정했다. 지난해 전체 합계와 월별, 월평균,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월별 매출액, 그리고 증감률 위주로 표에 모든 정보를 눌러 담았다. 내 재량은 A4용지 다섯 장 분량이었다. 과장은 첫 장만 훑어보고는 종이들을 자신의 책상 위로 툭 던졌다. 과장이 종이를 던졌어요. 인영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답답하네. 너 이명박 때 몇 살이었니? 선배가 답장했다. 초중고 때 대통령이 이명박이에요. 취임부터 퇴임까지 다 봤죠. 난 대학 때도 대통령이 그 사람. 선배는 나보다 일 년 먼저 입사했고 다섯 살 많다. 나이 많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선배가 과장의 자리로 갔다. 링크 한 번 띄워봐 주시겠어요. 이거 깔때기 모양 누르시고. 필터를 깔때기라고 표현하는 선배의 눈높이 교육에 감탄했다. 여기 나오는 항목 중에서 보시고 싶은 거, 체크박스에 체크하시면 표가 바뀌거든요. 나도 그건 할 줄 알아요. 과장이 말했다. 과장님 애플 모니터, 거의 영화관인데요? 뭐든 잘 보이겠어요. 선배가 과장의 모니터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자 과장은 의자를 뒤로 뺐다. 과장은 선배를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했다. 선배는 가족이나 연인처럼 친한 사이에나 침투할 수 있을 법한 좁은 틈을 순식간에 뚫고 들어갔으니까. 선배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과장은 네가 표를 한 장짜리로 만들어서 뽑아 가도 뭘 생략했냐고 일일이 물어볼걸? 엑셀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귀찮은 거지. 과장이 귀찮은 걸 싫어하는 사람일까. 나는 뭔가를 도모하려 할 때마다 과장과 마주쳤다. 작년 말 대학 선배의 소개로 경영 컨설팅 회사의 면접 제안을 받았다. 이직되면 어떡하냐는 내 말에 대학 선배는 말했다. 되고 나서 걱정해. 청약 사이트에 시세 30억짜리 아파트가 15억에 나왔을 때 친구가 물었다. 돈 없는데 당첨되면 어떡하냐고. 나도 같은 말을 했다. 오만 명이 몰려서 서버가 다운됐어. 되고 나서 걱정해. 회사 근처 카페에서 헤드헌터와 통화를 마친 뒤에야 옆 테이블에 과장이 앉아 있었음을 알아챘다. 몇 시간 뒤 내가 이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곧이어 헤드헌터의 전화가 왔다. 내가 새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돼 이직을 못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컨설팅 회사는 나를 꼭 뽑을 필요는 없었는지 면접도 취소했다. 그 프로젝트는 과장이 맡을 예정이었고, 지원자 모집 공고는 뜨기도 전이었다. 인영 선배와 점심으로 포케를 먹고 옥상정원에 갔다. 스프링클러가 헤드뱅잉을 했다. 물은 찔끔 나왔다. 애쓰는 모습이 가련

  • 관리자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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