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호
- 작성일 2026-02-01
- 댓글수 0
문장웹진 2월호를 열며
종이 달력을 1월에서 2월로 넘깁니다. 일상은 늘 변함없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이토록 가볍게 넘어간다는 게 놀랍습니다. 올해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뒤처진 기분이고, 서둘러 남들의 보폭에 맞추며 걸어야 할 것 같은 조급함도 듭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흔들림에 걸음을 맞출 게 아니라 제가 원하는 속도로 유연하게 오늘과 내일을 오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목표를 향해 달리다가도 어느 날엔 좋아하는 책과 음악에 한없이 머무르기도 하면서요.
그런 머무름을 생각하며 이번 2월호에서는 기획 특집 ‘단 한 권의 책’을 준비했습니다. 한 권의 책이 품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이 지닌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여러 세대 속 작가들의 치열한 삶과 시대의 아픔을 다시금 톺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독자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저희 문장웹진 편집위원은 다음 호에도 색다른 기획으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문장웹진 편집위원 정다연 시인 외 편집위원 일동

2026년 2월호 <동식(動息)의 경계> ⓒ 피츠(pits)
2월호 표지 그림 작가의 말
“빠르고 정신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시계가 쉼 없이 밤하늘의 별로 움직이고,
그 아래 온전히 내 것인 빛에 의지해 시간을 보내는 인물을 그렸습니다”
문장웹진 2026년 2월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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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작가 |
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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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신작시 |
김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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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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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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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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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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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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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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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
단편소설 |
장은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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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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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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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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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평론 |
윤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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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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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문장웹진 다시읽기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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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단 한 권의 책’ |
박진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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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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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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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월호 살펴보기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소심록(素心錄)』, 그 마음의 울림과 여운 정혜경 연주홍빛 표지 배경에 민들레 씨앗이 날아다니고 있다. 표지 왼쪽에는 한자 세로쓰기로 素心錄(소심록) 柳達永(류달영) 著(저)라고 저자가 직접 쓴 글씨가 굳건하게 새겨져 있다. 성천(星泉) 류달영의 수상록 『素心錄(소심록)』(경문사, 1961)이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우선 성천의 수상록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웠고, 소박하면서도 여운 있는 표지가 마음을 끌었다. 장정을 맡은 월전 장우성은 농민이 ‘생각하는 민들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성천의 뜻을 이렇게 담았다. 1961년 초판본 민들레 씨앗 하나가 이제사 마음터에 내려앉았다. 저자 성천 류달영(1911~2004)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농촌 계몽의 최용신 소전』을 저술해서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양정고보 스승이었던 김교신은 최용신을 만나 보았던 성천에게 이 책을 쓰도록 권유했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직 중이던 성천은 제자들에게 최용신 전기를 읽히고 싶었다. 일본 경찰 검열을 의식하며 어려움 속에 완성한 최용신 전기는 초판 1천 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품절되었을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에 민족 사랑과 계몽 운동의 불씨를 심어 준 책이었다. 그 시절부터 성천의 글은 독자를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되어 6·25전쟁과 4·19혁명 후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발표했던 성천의 글이 했던 역할을 『소심록』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소심록』은 ‘평소의 마음을 기록한 책’이란 뜻으로 근래에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모아 내었다는 겸손한 제목이다. 성천은 이 글모음이 자신에게만이라도 사람다운 사람을 위하여 훗날까지 격려하는 힘을 가질 것으로 믿었다. 그 ‘격려하는 힘’은 충분히 전해져 강렬한 울림으로 왔다. 가로 12.5cm 세로 19cm의 이 아담한 책 405쪽에 51편의 글이 빼곡히 담겨 있다. 『소심록』의 글들은 1959년 3월부터 1961년 2월까지 이 년 동안 《사상계》, 《새벽》, 《사조》, 《신태양》, 《식량과 농업》, 《여원》 그 밖의 여러 잡지와 《조선일보》, 《대학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에 발표한 것이다. 이 책은 1961년 5월에 출간되었으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지 일주기가 되는 시점이었다. 마지막 장 ‘사월혁명’의 다섯 편은 혁명 때 쓰러진 꽃다운 젊음들과 같은 행진 속에서, 거친 호흡을 함께 하면서 쓴 글들이었다. 성천은 4·19혁명은 학생들의 피로 성공했으니, 그 정의로운 피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깊은 존경으로 명복을 빌었다. 성천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특별했던 점은 나라의 현실에 대해 고뇌하면서 비전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현실에서의 타개책까지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성천은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 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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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거대한 사랑의 기록 - 김명순 창작집 『생명의 과실』 박소란 사진1. 『생명의 과실』 (한성도서주식회사, 1925) 표지 지난 2025년은 『생명의 과실』(한성도서주식회사, 1925)이 출간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생명의 과실』은 김명순(金明淳, 1896~1951 추정)이 쓴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창작집이다. 국내 서지 기록에 등록된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 문학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명의 과실』도 김명순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때문에 100주년은 터무니없이 고요했다. 별다른 의식이나 언급 없이 우리 문학장은 지난 한 해를 지나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전 김명순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난과 핍박을 떠올리게 된다. 혹여 김명순이라는 선구적 예술가를 아직까지도 과거 그늘진 그 자리에 세워 둔 것은 아닐까, 못내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조금만 검색을 해 봐도 대략의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김명순은 쉽게 소거될 수 없는 이름이다. 1917년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문예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친 한국 문단 최초의 여성 작가다. 1920, 30년대 누구보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친 김명순은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하는 등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피아노를 잘 치고 독일어로 곡을 만들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신문기자, 영화배우로도 활동할 만큼 다재다능했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첩'이라는 이유로,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자유연애’를 주창한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을 받았다. ‘부정한 혈액’ ‘문란한 여자’ 등 모욕적인 꼬리표가 일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공부와 집필에 힘썼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힘겨움이 잇달았고, 결국 1951년경 일본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명순은 생전 시, 소설, 수필, 희곡(각본) 등을 한데 묶은 두 권의 창작집을 냈다.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회동서관, 1929 추정)이 그것이다. (세 번째 창작집을 준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과적으로 불발되었으며, 때문에 창작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도 상당하다.) 이 중 『생명의 과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으로 그 의미가 각별하다. 1 『생명의 과실』에는 등단작 「의심의 소녀」를 포함해 소설 2편, 시 24편, 수필(목차에는 ‘감상(感想)’이라 표기되어 있다) 4편이 수록되었다. 소설 「돌아다볼 때」나 시 「유언」, 「저주」, 「탄실의 초몽」, 「유리관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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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100년 전 멋진 신혼여행의 기억 -염상섭의 『해바라기』와 나혜석의 결혼 전후 박진영 노처녀 결혼 풍경 신부 나이 스물넷이면 노처녀인 시절이었다. 서른넷의 신랑이라고 첫혼인일 리 없었다. 암만해도 결혼식을 버젓하게 치러야 했다. 둘 다 유명 인사다 보니 결혼 소식이야 진작에 왁자그르르 퍼졌고, 신문에 신랑 신부 사진까지 실렸건만 그래도 아쉬웠다. 내친김에 결혼 기사 아래 청첩장을 내기로 했다. “저희는 목사 김필수 씨의 지도를 받자와 4월 10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옵나이다. 이날에 귀댁 왕림의 광영 주심을 엎드려 빕니다. 경신년(1920) 4월 3일, 김우영 · 나혜석.” 신문에 청첩장을 광고한다고 발칙한 일은 아니다. 대체 뉘 집 아들딸인지 이름이 없는 게 문제다. 1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청첩장은 신랑 신부가 아니라 부모 이름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무릇 결혼이란 당사자들의 일이기에 앞서 엄연히 집안 대사인 까닭이다. 요즘에야 신랑 신부가 나란히 팔짱 끼고 걸어 들어가는 일도 흔하다지만 여태 청첩장 문화는 그대로 아닌가? 이만한 기세라면 혈기 넘치는 청년들이야 박수 칠 법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못마땅하다 못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둘 다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 내로라하는 집안 자식들이었다. 그나마 넷째, 다섯째 자식이라서 불행 중 다행이지만 대체 무슨 남부끄러운 짓이란 말인가? 시아버지는 기어코 폐백을 물리치고 술잔이나 기울이러 나갔다. 하기야 목사 주례에 답사랍시고 감히 신부가 한마디 아니라 일장 연설을 떠든 예식이었으니 결혼식이고 피로연이고 애당초 안 들어선 게 차라리 나은 지경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신랑 신부는 이튿날 식전 댓바람부터 양가에 차례로 들이닥쳐서는 신혼여행 떠난답시고 들썩여 놓고는 훌쩍 기차를 탔다. 신부는 두 주일쯤 예정이라고만 무지르고는 어디로 가는지 신랑에게도 도통 알려 주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잡아끌다시피 했다. 이쯤 되고 보면 아무래도 웬만한 신혼여행이 될 리 만무했다. 신랑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의 변호사 김우영, 신부는 진명여학교 최우등 졸업생이자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의 화가 나혜석이다. 사진1. 나혜석 결혼사진 (1920) 출처: 수원시립미술관 남도 신혼여행 사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전에서 잠시 여관에 들렀다가 호남선으로 갈아탄 신혼부부는 한밤중에 목포에 도착했다. 열 시간 넘게 걸린 곤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인력거 잡아타고 곧장 여관에 들어서서는 하녀 이름부터 대는 신부가 영 수상쩍다. 초행길이 아니었던 셈이다. 신부는 3년 전 그 여관 2층에서의 하룻밤을 홀로 추억했고, 영문 모르는 신랑은 얼추 짐작이 나섰지만 섣불리 입을 열 계제가 아니었다. 아직 신혼 둘째 날 밤이었으니. 부산 유곽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하녀와의 사연인즉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신부는 3년 전 도쿄에서 다니던 학교를 빼먹고 홀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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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악의에 찬 아기들 김해솔 악의에 찬 아기들이 울고 있다. 악의에 차지 않은 아기는 없다. 악의는, 갓 태어난 자만 지닐 수 있는 특권이니까. 나는 삼신할매. 악의에 찬 아기들을 생으로부터 도주하고 싶은 자들에게 점지해 주는 일을 한다. 이제 나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악의에 찬 아기들이 태어날 수 있는 통로를 물색한다. 악의에 찬 아기들은 할 말이 많다. 할 말이 많지만, 아직 말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울기만 한다. 아니, 어쩌면 말을 한다는 건 울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말이 너무 많은 사람들, 그들은 울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언어를 너무 세분화해서 잘 구축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너무 다층적인 눈물을 쏟아 본 적 있는 사람들일지도. 물론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쏟지 않은 채 울기도 한다. 음, 한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만 흔들렸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말이 너무 많은 사람들. 너무 많이 울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사람들. 그런데 눈물은 안 쏟는 뭐 그런. 지금은? [삼신문화정보도서관] 김아기 님이 대출하신 도서 나는 나와 밀착되어 있는 이 징그러움이 마음에 든다. 가 연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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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레네-파! 김해솔 영상은 두 컷으로 분리된 채 서로 다른 두 사건이 동시에 상영되고 있었다. 좌측에서 상영되는 일은 내가 본 적 있는 일을 각색한 일처럼 보였고 우측에서 상영되는 일은 내가 본 적 없고 이후에도 볼 일 없는 일처럼 보였다. 좌측의 영상을 편집하며 나는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끝이다.” 이후 내가 기록할 일은 우측의 영상에서 벌어진 일이다. 우측의 영상 속 인간1은 사과를 줍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인간2에게 사과를 주고 있었다. 사과를 받고 인간2는 웃었다. “이건 사과가 아니라 모래잖아?” 중얼거리면서. 인간1은 울었고. 그러자 난데없이 몰아치는 모래 폭풍, 에 휩싸인 인간1과 인간2를 내가 편집하고 있던 그때, 인간3이 등장했다. 인간3은 인간2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뻗고, 말했다. “레네-파!” 그러자 인간3의 손바닥에서 공기파 같은 게 튀어나왔다. 나는 인간3을 흉내 내며 말했다. “레네-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상 속에서, 인간1은 인간2에게 말했다. “넌 왜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봐?” 나는 손바닥을 폈다. 말했다. “레네-파!”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손바닥이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지금까지 내가 보고 있던 장면들이 사라졌고, 분리되어 있던 두 영상이 하나로 통합되며 모니터를 통해 메일을 확인하고 있는 당신이 보였다. 메일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너무 빨리 포기한 인간은 다시 그 공간으로 돌아간다.” 당신이 메일에 답장을 쓰려던 찰나, 문자 한 통이 내게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겠다고, 지하 3층에서.
- 관리자
- 2026-02-01
기계와 황새 양선형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네가 저질렀던 끔찍한 죄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쩌면 인간으로 살았던 시간을 초과할 만큼 오랫동안 작동했다. 너는 네게 주어진 원통형의 한계 속에 틀어박혔다. 그것이 너였다. 배터리와 부품이 망가지면 너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착했고, 너는 네 작동을 중지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음은 물론 작동을 중지하고 싶은 욕망 또한 갖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형벌이 단호하게 집행되었고, 너는 눈을 감았으며, 숨이 끊어지기 직전 너는 이후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줄곧 반복해야만 하는 한 줄의 기억 타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었던 시절의 작은 파편으로서 오토마타로 개조된 네 머리통 안에 각인될 예정이었다. 누군가 드러누운 네 팔뚝에 주사를 놓았다. 나른한 의식은 감은 눈 속으로 어른거리는 박쥐 모양의 환영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기억 타래는 네가 과거에 살과 피를, 얼굴과 자의식을 가졌던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의미했다. 인간인 너와 오토마타인 너를 잇는 개체로서의 동일성을, 속죄를 끝마치고 형기가 만료될 때까지 네가 감당해야만 하는 과오와 책임의 연속성을 말이다. 따라서 기억 타래는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인해 극형에 처해진 바로 그 범인임을 증명하는 전자 신분증이자 영혼의 낙인으로 비유될 수 있었다. 네가 죄수임을 공인하는 사법 기관의 서명, 특수한 일련번호, 기계의 머리통 안쪽에 새겨진 자아의 조각, 네 유한하며 어리석었던 시절의 잔류 데이터. 그러나 너는 네가 다른 기억들 가운데 하필이면 이 기억 타래를 골랐던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각별했기 때문인지, 각별했던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무의미했기 때문인지. 너는 카메라처럼 무감하게 눈을 떴으며,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딸깍거리는, 앵앵거리고 번쩍거리는 전자 신호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네 머리통 안에는 한 줄의 기억 타래만이 남아 있었다.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정확하게 움직이는 효율적인 무력함이었고, 그 무력함 속을 공회전하는 짤막한 분량의 이미지 찌꺼기였다. 너는 스크린을 향해 강제로 조향된 인형의 냉담하며 거짓된 눈알처럼 기억의 이미지를 주시했고…… 주시하지 않았으며, 사나운 파도처럼 우윳빛으로 들이닥치는 심신상실이 환하게 빛나는 스크린 주위를 에워쌌다. 네 머리통 안의 암실에서는 언제나 한 줄의 기억 타래가 상영되었다. 너는 기억 타래를 출력하는 영사기이자 영사막이자 영사기사였으며, 성자와 성부와 성령과…… 세 가지 작동인 사이를 그치지 않고 순환하는 자율적인 엔진에 가담하고 예속된 상태였으나, 대부분 네 기억의 관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엔 네 기억의 관객일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ON이었다. 너는 네 신경망에 폭포처럼 흐르는 전류를 자발적으로 차단할 수 없
- 관리자
- 2026-02-01
[문장웹진 다시 읽기]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오한기 「더 웬즈데이」(2012년 5월호 수록) 현재(문학평론가) 독자일 때는 몰랐는데, 글을 직접 쓰게 되고서야 느끼는 바가 참 많다. 그중 제일 뼈저리게 다가오는 것은(그리고 이전에는 차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자기가 쓴 지난 글들을 들춰 보는 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나는 사실 들춰 볼 용기조차 없는 타입이라서 가능하면 이 세상에서 흔적을 아예 지워 버리는 편인데, 그럼에도 어떤 글들은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만으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그리고 이런 갑작스러운 기습을 하루에도 수십 번 당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전에는 이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 잘 몰랐다. 습작이 몇 없어서 그랬던 것도 있고, 습작할 땐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야말로 무색무취한 글들을 썼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쓰는 글에 나만의 개성이랄 게 생기면서부터 고통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 기저에 깔려 있는 내 흉한 자의식과 대면해야 한다는 고통 말이다. 이 지면에서 나는 《문장웹진》에 발표되었던 지난 작품 중 하나를 골라 다시 읽는다. 그래서 청탁을 받고 잠시 고민했다. 편집위원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경우에 따라 이는 작가를 공개 처형하는 기획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기획 단계에서 어떤 악의가 있으셨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운을 떼는 바람에 적어도 이 글에 한해서는 그런 기획이 되고 만 것 같다(제 책임). 이왕에 부관참시를 할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평소에 골탕 먹이고 싶었던 작가를 하나 골라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호감이 가는 쪽은 최대한 배려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과는 무관하게 나는 오한기의 「더 웬즈데이」를 다루기로 했다. 「더 웬즈데이」는 2012년 《문장웹진》에 처음 공개된 이후 그의 첫 소설집인 『의인법』에 수록되기도 한 작품이다. 오한기는 『의인법』을 출간한 뒤로 단 하루도 숙면을 취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그의 끔찍한 악몽을 다시 헤집는 걸 그도 그리 달가워할 것 같지는 않기에, 곧장 그의 얘기를 하는 대신 차라리 내 얘기로 잠깐 둘러 가 볼까 한다. 방 안에서 책만 읽던 독자일 땐 몰랐는데, 나와서 보니 또 하나 깨달은 것은 막상 문인들을 실제로 만나 보니 다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많은 문청들이 공감할 만한 얘기겠지만 나도 작가들을 처음 만나고 충격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뭐야, 글이랑 너무 다르잖아···.’ 나는 아직 많은 문인들을 만나 본 편은 아닌데, 그래서 면역이 없어서 그런가 대개의 경우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작가들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이 괴리가 반드시 모든 작가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작가는 조금 더 솔직하
- 관리자
- 2026-02-01
또 이사 온 사람 강보원 일본에서 티셔츠를 산 적이 있다 펭귄이 그려진 티셔츠로 옷감이 튼튼하고 장식이 요란하지 않아서 좋아하는 옷이었다 어느 여름에 바다에 입고 들어갔다가 옷이 망가진 뒤로는 잠옷으로 쓰다가 올해 일본에 가서 펭귄 티셔츠를 샀던 매장을 찾아갔다 펭귄이 그려진 티셔츠를 달라고 하니 직원이 창고에서 가져다줬다 정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입어 보니 몸에 꼭 맞았다 나는 동생에게 선물할 것까지 두 장을 샀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잠옷으로 가져온 펭귄 티셔츠를 꺼내 봤는데 새로 산 것보다 한 치수가 컸다 갑자기 새로 산 펭귄 티셔츠가 갑갑하게 느껴졌고 움직일 때마다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다음날 다시 그 매장으로 돌아가 펭귄 티셔츠를 한 치수 큰 것으로 샀다 “이 티셔츠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네··· 많이 좋아해요”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펭귄 티셔츠가 새로 생겼으니 다 괜찮았다 그건 그렇고 서울 집들은 늘 냄새가 문제다 적어도 내가 살았던 곳들은 그랬다 싱크대 배수관을 눕힌 S자로 하면 냄새가 역류하는 걸 막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질 않는다 도대체 왜일까··· 도통 알 수가 없다
- 관리자
- 2026-02-01
진짜 커피의 힘 강보원 옷 만드는 장인이 초대를 해서 미아동 골목에 있는 그의 작은 집에 방문했다 그가 마중을 나왔고 겨울치고는 날씨가 포근해서 외투를 들고 함께 걸었다 집에 도착해서 옷을 걸어 두려는데 그가 의아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뭐 해? 옷 입어야지.” 그가 말했다. “뭘 사러 나가야 돼?” 내가 물었다. “환기 때문에 창문을 열어 둬야 하거든.” 그가 말했다. 방을 소개하다가 그는 새 침대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 새로운 침대의 좋은 점은 오후 열 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밤 아홉 시에 자서 다음 날 세 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야.” 얘기를 나누다 나는 우리는 사물들과의 연결이 끊어져 버린 지 오래인데 아직도 몇몇 사물들이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는 게 신기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뭔가를 더 잘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이렇게 돼 버린 거지.” 이게 그의 대답이었다. 그가 준 ‘진짜 커피’를 마시며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 관리자
- 2026-02-01
‽1) 허진경 중요한 문장마다 형광펜으로 칠한다 한 문장을 제외하고 샛노랗게 빛나서 이 시를 어둠에서도 읽을 수 있다 2연이 시 안에서 시의 구조를 지칭한다 자신을 가리키면서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아서 겉보기엔 불필요해 보이지만 형광펜으로 칠해져 있다 2연이 없으면 이 시를 이해할 수 없다 형광펜으로 칠하지 않은 문장은 낮까지 기다려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문장이라서 읽지 않아도 이 시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이 시는 어둠에서 읽어도 낮의 독해와 다르지 않다 낮에는 빛이 포화 상태이다 넘치는 빛이 시 바깥으로 밀려난다 지면을 타고 2연이 흘러내린다 2연이 수용성 문장이고 형광펜은 광분해성을 띠므로 이 시는 낮밤의 영향을 받는다 문장 부호 규정을 참고하면 물음표와 느낌표를 동시에 쓸 수 없다2) 1) 감탄과 의문을 동시에 나타내는 비표준 문장부호. 영어로 인테러뱅(Interrobang)이라 하며, 국제 표준 문자부호 체계인 유니코드는 U+203D이다. 2) 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의 한 답변.
- 관리자
- 2026-02-01
귤껍질의 기하학 허진경 지구는 둥글고 지도는 네모나다 우리는 도형의 비약을 통해 세계를 이해합니다 수학자가 말하는 동안 나는 사각 방에서 귤을 까 먹는다 귤이 원에서 멀어질수록 나는 귤을 조금씩 이해하고 완벽히 이해했다고 믿은 순간엔 껍질이 남아 있다 사각 방에 귤껍질이 쌓인다 이해를 뭉치면 가루눈처럼 흩날린다 속이 빈 원은 지구본이라고 불리는데 우리는 크기의 비약을 통해서도 세계를 이해하지요 수학자가 말하는 동안 나는 가랑이 사이에 있다 도형을 따라가다 찢긴 귤껍질에 각진 모서리가 없다 까도 까도 손이 베이지 않는다 찾을 수 없는 가장자리 피스 완성할 수 없는 사각 퍼즐은 한 손에 꼭 들어맞던 둥근 세계였다 손끝으로 툭 치면 굴러가지만 발아래선 짓이겨 터지는 즙 이곳이 우리의 세계라면 쪼그라드는 귤껍질이 나의 이해입니다 나는 서서히 변하는 모양과 크기를 바라보며 수학자에게 말한다 껍질이 원형에서 멀어질수록 버리거나 말려서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한 내가 도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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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오딘 김현진 평균적이라는 말에 매달린 평균을 생각합니다. 매달리기를 하면 평균적으로 이십 초 정도는 버틸 수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꽉 잡은 손가락에 열이 납니다. 그다음에는 팔이 저려오고요. 아파트 앞 놀이터 철봉에 매달린 건 내 팔인데 굽혀진 무릎 위 허벅지는 왜 흔들리나요. 떨리는 몸으로 안간힘을 쓰다 보면 저절로 눈가에 주름이 꽉 잡히도록 눈을 감게 됩니다. 언젠가 본 얼굴을 떠올립니다. 누군가 매달려 있던 카드. 타로 카페에서 카드 세 장을 골랐습니다. 두 번째 카드를 열었을 때 남자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어요. 살아 있는 나무에 자발적으로 매달린 상태라고 했습니다. 지혜를 얻기 위한 거라고. 정방향인데도 위아래가 뒤집힌 것처럼 보인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때부터 거꾸로 매달리는 일은 내가 언제든 통과해야 하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철봉에 매달려 눈을 감은 이후에 나는 거꾸로 매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놓을 수 없어요. 아이들이 왔나 봐요. 그네를 타는 환호성과 미끄럼틀 오르내리는 쿵쾅 소리가 요란합니다. 자전거가 지나갑니다. 공원에 들어오면 안 되는 오토바이도 지나갑니다. 사람들도 지나갑니다. 개소리도 들립니다. 어떤 무리가 나를 보며 낄낄거리는 게 느껴집니다. 나는 매달리기에만 집중하려고 아무것도 보지 않아요. 버티기 좋게 고개를 치켜듭니다. 온몸이 부들부들 흔들립니다. 언제 그만둬야 하나. 생각 없이 생각합니다. 철봉 아래에는 모래가 있습니다. 인제 그만 모래 위로 올라서라고. 꽉 쥔 손가락을 펴라고.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라고. 제발 철봉 아래에 둔 물병의 물을 마시라고. 스스로 애원합니다. 나는 턱을 더 들어 보려고 애쓰다가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핍니다. 가로등이 켜진 밤입니다. 저쪽 편에서 어떤 아이가 혼자 시소를 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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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스테레오타입 김현진 시계는 날카로운 시각을 유지하는 틀림없는 바늘을 가졌다 믿어야 다음으로 갈 수 있으니까 기차를 타러 갈 때면 서울역 광장 시계탑을 보았다 한 번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내 방 벽시계는 자주 틀린다 배터리를 갈 때마다 세심하게 맞추어도 귀가 없는 바늘은 말귀가 어두워 일 분씩 이 분씩 어긋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조금씩 느려지지만 혼자 어떤 순간을 가리키고 있는 게 좋아서 방문을 열면 벽시계에 먼저 눈이 갔다 내 방과 시차가 큰 체코에서 오를로이를 본 적 있는데 고장 나지 않은 천문시계 중 제일 오래되었다고 정각이야!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을 지날 때 누군가 외쳤다 종이 울리면서 쇼가 시작되었고 시계 위 창문으로 열두 명의 인형이 지나갔다 나는 수백 명과 함께 오를로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짧은 공연이 끝나고 일제히 흩어지는 군중 속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나침반의 바늘은 북쪽에 멈추어 있다는 말을 떠올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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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투명인간 주영중 옹알옹알새를 날려 보낼게요 인간 별거 없습니다 화장실에 가야 합니다 밥을 먹어야 합니다 결국 죽습니다 잘난 척해도 시계는 갑니다 스트론튬 동위원소 불상 변사자 부패 백골 이야기 치아 뼈 DNA 지금 여기 시대성과 교환되는 것들 고난받고 싶어졌습니다 수난받기 위해 손끝을 굴리며 시간의 날카로운 뼈들과 송곳니를 매만집니다 그건 당신의 오랜 내력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여기 있어요 저 여기 있어요 외칠게요 그게 옳은 일이라면 그래도 없다고 여기신다면 없을게요 여기 있어요 여기 있어요 꿈틀거릴게요 바람을 만들게요 나무를 뽑아 버릴게요 여기요 여기 당신의 심장으로 옮아앉을게요 심장을 격발시키는 노래를 부를게요 여러분의 시간만큼은 행복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됩니다 즐거우셔야 됩니다 나의 촉언도 지평이 될 거니까요 작은 신화의 단초가 될 테니까요 그것뿐이에요 다만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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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유사 숭고 영화관 주영중 압도되기 위하여 네모 상자에 스스로를 가두고 빛과 소리의 향연에 몸을 맡기지 거대한 화면 속으로 일동 몰입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 속으로 일동 몰입 진격해 오는 최대치의 소리와 디테일하고 화려하다 못해 리얼한 색채들 떨리는 몸 어둠보다 더 어두운 어둠 그 속에서 또렷이 번져 오는 빛 감각을 열개하는 긴장된 시간 속 과잉된 서사와 자극에 몸을 맡기지 공포 총소리 풀잎 스치는 소리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 숨을 죽이고 자발적 포로가 되기 위하여 기관이 열리기를 부디 기관이 열리기를 여기 팝콘과 콜라만이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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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팬덤 장수양 팬 옷장에서 너를 꺼내. 표정이 왜 그러니. 황당하단 표정. “네가 날 왜?” 너를 추궁하지 않아. 다만 가슴 위에 꾹 눌러. 이제 말해 봐. 입이 붙어 버린 너에게 나는 열려 있어. 나처럼 말해야 해. 안 그러면 도망치고 싶어. 레지 이제야 솔직해지는군. 우리가 싫어하는 옥색 건물 위에 불이 켜졌다. 노을이다. 해는 언제부터 노을로 승진할까. 궁금하지 않지만 물어는 본다. 답은 이미 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해는 노을의 지위를 얻는다. 우리는 언제나 그 배반자를 봐준다. 노을은 얼마나 순식간에 하루를 배반하는가? 반면 우리는 아무것도 배반하지 못했다. 김 같은 밤하늘이 구워지고 있다. 팬 구운 김을 각별하게 요구하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야. 레지 그럼 어느 나라 사람인데. 팬 팬 사람. 이렇게 말함으로써 시민권을 따내지. 레지 지금 이 순간? 팬 명실상부한 이 순간. ‘지금’은 아니. 그것은 우리의 지갑에만 있어. 레지 누구도 널 보증하고 싶지 않을걸. 잘 들어. 나는 결코 네가 이 하루를 떠나도록 허락하지 않으리. 팬 팬을 외면하는 거니? 레지 넌 차라리 유승준이야. 가슴은 수박밭이다. 대포 같은 수박이 영근다. 우리는 겨울에도 수영장처럼 찰랑거리는 화채에 뛰어들기를 원한다. 술 대신. 음. 거짓말이다. 우린 술병을 보석처럼 부수기를 원한다. 누구와 함께든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와 술을 나눈다는 것은 몹시 위험하다. 술을 원하기 위한 도구로 상대를 이용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짓은 이제 금지다. 팬과 레지, 우리는, 우리의 이 우아한 덤 앤 더머는, 고급 오피스텔에 살며 주차장 한 칸에 고객의 카니발을 주차해 두는 사람을 좋아했다. 항상 카모 바지와 카모 블루종을 입고 다니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그가 군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레지 카모 패턴을 각별히 즐겨 입는 사람은 군인이 아니야. 옷장 속에는 여섯 개의 헤어드라이어가 있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헤어드라이어가 많은가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가 말하길 글쎄, 아무튼 그중 네 개는 엄청 비싸. 에스메랄다*) 귀걸이보다 비싸다고. 팬 편지를 쓸 때마다 생각해. 넌 날 반드시 비웃을 거라고. 그래서 보내지는 않아. 이런 일은 익숙해. 너는 지인들 중 누구도 만나기를 고대한 적이 없다고 말했어. 그것이 지인들이라고 말이야. 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만 누구를 만나고 싶어진다고 했지. 레지 앞으로 날 부를 때마다 원하는 술과 안주를 캡처해서 보내요. 비비노(vivino)**)의 캡처를 보내도 좋아요. 동네에 주류 상점이 있으니까. 미리 주문을 해 놓을게요. 저번처럼 동물의 사진을 보내지는 마세요. 사람도 사양입니다. 구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는 길고양이를 그 집에 데려가고 싶진 않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할게요. 그 집은 고급 오피스텔이고 옵션도 멋지지만 드나드는 사람들은 돈만 주면 뭐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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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사나이와 사보이 장수양 아름다운 피자를 훔친 사나이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는 달아났습니다. 낮은 언덕들이 나이야, 하고 여러 번 불렀습니다. 사나이는 답하지 않았습니다. 닷새가 지난 어느 날 나는 우연한 계기로 사나이의 주소를 알아냈습니다.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의 이름은 사보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나의 자매가 되어 주면 어떻겠습니까? 이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자매란 뭐든 서로 안다고 전해집니다. 사나이, 아직 나는 당신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름다운 피자를 먹지 않았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러한 이해관계를 상습적으로 파악하는 교집합 속에 당신과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나이는 나에게 사진을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나이는 아름다운 피자를 둘둘 말아서 들고 다닙니다. 사람들이 버스킹하는 거리, 맞은편에서 피자를 깔고 누워 있습니다. 펠리컨이 다가와 큰 부리로 피자와 사나이를 이리저리 찌르며 삼킬 수 있는지 알아봅니다만, 피자도 사나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진은 부리에 올리브 하나 묻힌 펠리컨이 사나이의 뺨에 뽀뽀하는 순간입니다. 사나이는 아름다운 피자를 하늘 높이 돌립니다. 피자의 날씨를 만들어 냅니다. 별도, 달도, 밤도 피자의 토핑이 됩니다. 그리하여 피자의 명예를 드높입니다. 사진 속 사나이는 헬터 스켈터의 모자를 쓴 것 같습니다. 사나이의 생일인 모양입니다. 아름답지만 조금 낡은 피자 위에 촛불만큼의 사나이가 올라갔습니다. 이런, 우리는 나이가 같습니다. 쌍둥이는 서로 텔레파시가 통한다고 전해집니다. 나는 여전히 사나이를 잘 모릅니다만 사진을 찍을 때면 언제나 웃고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 서른 해가 지났습니다. 찌그러진 주방장 모자를 쓴 이가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어두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소. 평생을 바쳐 만든 아름다운 피자를 사나이가 훔쳐 달아났다오. 무구한 피자 도우의 지옥 속에 서른 해를 보냈소. 수소문 끝에 이렇게 찾아왔소. 당신이 그의 소식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오. 자, 사나이가 있는 곳을 말하시오. 나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깊숙이 눌렀습니다. 군데군데 밀가루가 묻은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갑시다. 그가 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구겨진 모자를 곱게 펴는 동안 나는 사나이가 보낸 사진들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썼습니다. 자매여, 마지막 편지입니다. 앞으로는 당신이 아는 주소 끝에 사진을 받아 볼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나는 이제부터 절대로 당신을 만나지 않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슬퍼하지 마세요. 나만은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압니다. 당신이 얼마나 멋진 일을 하고 있는지.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보이로부터 편지를 부친 나는 반듯한 모자를 쓴 이와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낮은 언덕들이 보이야, 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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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시체 김언 시체가 집으로 왔다. 어찌 알고 찾아왔을까? 거리를 떠돌고 있어야 마땅한 저것이 집으로 왔다. 똑똑 노크도 하지 않고 들이닥치는 저것을 막을 방도는 우리에게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맞자. 반갑게 맞자. 웃는 얼굴로 시체를 맞고 시체의 외투를 벗기고 시체를 위한 자리를 식탁에서 내어 준다. 시체는 무엇이든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무엇이든 물어뜯고 삼킬 준비가 되어 있는 시체를 손님이라 부르자니 너무 무례한 손님 같고 가족이라 부르자니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가족 같아서 일단은 시체라고 계속 부르자. 그러면서 맞자. 웃으면서 맞고 즐기면서 맞고 싫어도 맞아 줘야 하는 존재가 지금 우리 식탁에서 먹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말없이 시취를 흘리면서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어울리는 음식은 많다. 살아 있는 것을 가져다주면 된다. 죽은 자는 죽은 자답게 살아 있는 것을 요구한다. 살아 있는 것은 많다. 동물도 식물도 심지어 미생물도 살아 있는 채로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것들이 많다. 뭐부터 가져다드릴까? 그는 죽은 닭을 원하지 않는다. 아픈 닭도 원하지 않는다. 싱싱한 닭을 원한다. 그래서 산 채로 잡아 온 싱싱하고 튼튼한 닭을 식탁에 내려놓고 시체를 본다. 닭도 시체를 본다. 시체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손을 뻗는다. 살아 있어서 손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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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사랑 김언 조금 더 사랑했으면 조금 더 행복했을까? 이미 지나간 사랑인데, 지나간 사람이고 지나간 불행인데 아직도 남은 불행이 겁나서, 겁나게 무서워서 무섭게도 노려보는 사랑. 너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니? 빈 껍데기밖에 안 되는 그 말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니? 사랑은 아닌데, 사랑은 아니라고 또 무얼 가져와서 사랑이라고 하나? 사랑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세 번 정도 부정하면 세 번 정도 긍정하고 인정하고 작정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다르지. 달라도 너무 다르지. 행복과 불행이 다르듯이 불행과 불안이 다르듯이 불안과 불길이 다르듯이 불길은 불길로 그치지 않고 꺼지지도 않고 계속해서 온다. 불길하게 온다. 그만 만나자고 말해도 온다. 저기서 사랑이 온다.
- 관리자
- 2026-02-01
도래의 얼굴 최정나 한 남자가 길을 걷는다. 남자의 이름은 웅현이다. 웅현은 은행나무길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노랗게 물든 황금 터널 안에서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본다. 바람이 일자 은행잎들이 햇살을 따라 휘돌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웅현은 꽃잎처럼 흩날리는 노란 잎사귀들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위로도 햇살이 부서진다. 바람을 받은 잎사귀들이 다시 허공으로 번져 오르다가 방향을 살짝 틀어 다른 데로 이동한다. 웅현은 눈에 비친 풍경을 화면에 담아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웅현은 얼마 전 도래와 이별했다. 그래서 길에서 스치는 사람이 모두 도래로 보인다. 도래가 홀로 걷고, 도래가 누군가와 함께 걷고, 떨어지는 낙엽을 올려다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내려다보고···. 도래는 출몰하듯 나타나 웅현 곁을 스쳐 지난다. 옆에 있는데도 먼 얼굴, 도래가 자신을 불러내는 건지 자신이 도래를 불러내는 건지 웅현은 알 수 없다. 이윽고 수많은 도래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로 변한다. 도래와 함께 떠난 얼굴들,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웅현은 하늘을 본다. 사랑을 놓쳤니? 황금빛 사이로 겹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다. 왜 웃는 거지? 웅현은 누군가 보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놀림 받은 기분이다. 하지만 웅현은 그들이 남겨진 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렇더라도 역시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을 바꾸고, 곧이어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먹먹해진다. 나를 이해해 줘···, 도래의 마지막 말은 웅현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변형되다가 서서히 형태를 찾는다. 빛은 따뜻하고 세상은 노랗게 물들었지. 황금빛 계절이거든. 웅현이 말을 건넨다. 빛의 터널을 나오는 웅현의 눈에 그들이 비쳐 든다. 도래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웅현의 발걸음은 더디다. 노란빛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거리는 붉은빛에 휩싸인다. 사랑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웅현의 귓가에 닿는다. 여자는 붉게 물든 나무 아래 붉은 낙엽을 밟고 서 있다. 이어 들려오는 맞은편 남자의 웃음소리, 여자가 낙엽을 그러모아 허공에 뿌린다. 그러고는 다시 외친다. 사랑한다고! 붉은색이 그들 주위로 날아올라 빛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소리칠 기세지만 남자는 계속 웃기만 한다. 웅현은 그들이 붉은 구체 안에 있는 듯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나도 사랑해!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번져온다. 연인이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웅현도 소리 나는 데로 시선을 돌리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고 조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은행나무길이 보일 뿐이다. 웅현은 가벼운 듯 장난스러운 남자의 목소리를 아는 듯하다. 웅현은 도래와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걸으며 그녀와 함께였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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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아직 이른 마음 박하신 섬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성했다. 초여름을 맞는 버드나무 녹음이 무성했고, 고속도로에 바닷가 갯강구들처럼 달라붙은 자동차 정체 행렬이 무성했고, 하늘에 모둠 지은 뭉게구름 떼가 켜켜이 무성했다. 구름으로 말하자면 경부 고속도로 운전자들의 한숨이 한데 모인 것 같은 풍성함이었고 눅진함이었다. 사이사이 파고드는 여름 볕은 쨍쨍하기만 해서 자동차 갯강구들이 아지랑이 같은 김을 뿜어내며 느릿느릿 익어 가고 있었다. 올여름 재해에 가까운 폭염이 찾아온다고 했다. 창문을 내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끊어야 할 텐데. 지난 건강검진에서 의사는 금연을 강한 어조로 권고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라디오에선 올해 메탄가스와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다시 한번 고점을 돌파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 솥단지를 가득 메운 자동차 행렬을 보니 이해가 안 갈 바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차도 노후 경유차라며 폐차를 권고하던데··· 때마침 창밖에서 도로변 축사 냄새가 매연에 엉킨 채 훅 끼쳤다. 과연 오존을 뚫어 버릴 것 같은 유독함이다. 이게 다 나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앞차 배기의 색깔도 심상치 않다. 그래, 어차피 다 같이 찜 쪄지는 마당에 잘잘못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이미 벌어진 일과 잃어버린 것. 재해에는 고민한들 거스를 수 없는 면이 있고 그렇기에 말 그대로 재해인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암 같은 거다. 분명한 업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건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그래, 평일 오전부터 고속도로에 갇혀 소들 방귀나 맡고 있게 된 것도 말하자면 재해 같은, 암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그건 폭발에 대한 것이었다. 동선의 묘지가 폭발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 이른 열대야에 허덕이던 어제저녁이었다. 낯선 번호로 수차례 전화가 걸려 온 것인데 상대방은 대뜸, 동선 씨 친구분 되십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을 매봉도 수호행동위원장이라고 간략히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틀림없이 폭발합니다··· 땅속에 매설된 니트로글리세린과 질산암모늄 수천 킬로그램이··· 당신 친구의 묘지를 박살 내 버릴 거라구요···. 상대방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거대한 세력이 묘지를 파괴하기 일보 직전이라며 호소했다. 그것도 폭약을 심고 아주 섬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고 했다. 그는 동선의 묘소를 지키고 싶다면 나더러 당장 매봉도로 달려오라고 촉구했다. 여기··· 당신처럼 무언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가능하면 내일까지 와 주십시오···. 불가능해도 내일까지 오십시오. 체념하지 않는다면··· 지킬 수 있습니다. 모
- 관리자
- 2026-02-01
불태울 시간 장은진 고모 집 마당에는 나무가 많았다. 3년 전 돌아가신 고모부가 심고 가꾼 나무들이었다. 고모부는 멀리까지 산책 나갈 필요 없이 마당에 한 발만 내디뎌도 숲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좋다고 말했다. 은퇴 전까지도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던 고모부는 힐링을 위해 그 ‘착각’이 몹시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착각이 아닌 게 고모 집 마당은 진짜 숲 같아서, 누구라도 바라보면 숲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고, 숲이라 말하고 생각할수록 진짜 숲이 되어 갔다. 그러니까 고모부는 마당이 진짜 자신의 숲이 되어 주지 않아서, 그 착각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해서 일찍 돌아가신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넘어섰다면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었을 거라고. 나 또한 숲의 놀라운 힘을 어느 정도는 믿으니까. 숲 때문인지, 고모 집으로 내려온 지 나흘 만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맑아졌다. 내 발로 문을 박차고 나온 망할 회사도, 말싸움 끝에 토라진 여자 친구도 숲을 보고 있으면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재취업을 준비 중인 내게 고모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아버지를 통해 침울한 상황을 전해 들었는지 고모는 나한테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다고 했다. 자기 집으로 내려와 머리도 식히면서 취업 준비를 천천히 하라는 것이었다. 공기도 좋고 조용해서 몸과 마음이 금방 건강하고 편안해질 거라는데, 통화가 길어질수록 힐링을 누리고 싶은 사람은 정작 고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화를 마칠 즈음 나는 고모가 집 봐줄 사람이 필요해서 전화를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고모는 스페인 코스타 블랑카에 사는 여고 동창생을 만나러 일주일 후 출국한다고 했다. 동창생도 사별 후 혼자 지내고 있어서 며칠 쉬다 올 거라고 했지만, 뉘앙스는 겨울이 끝날 때까지 푹 눌러앉을 계획인 것 같았다. 고모는 벌써 여고생으로 돌아간 듯 흥분된 목소리였다. 나는 재취업을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데다, 마침 월셋집 계약 기간도 끝나 가서 그러겠다고 했다. 살고 있는 원룸이 풀 빌트인이라 짐 때문에 번거로울 일도 없었고, 월세를 몇 달분이라도 아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결정은 쉬웠다. 고모 말대로 조용한 곳에서 지내며 힐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고모는 전화를 끊으며 마당으로 들락거리는 독수리 5형제 밥도 좀 챙겨 주고, 라고 말했다. 눈을 뜨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지금처럼 마당을 마주 보고 서서 숲이라 말하고 숲이라고 생각하는 것. 진짜 숲이 되어 가게 입속에서 바람을 불며 숲, 하고 발음한 뒤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깊이 들이마시며 숲이다, 하고 여기는 것. 이어서 그 기운을 받아 가슴에 덕지덕지 묻은 답답함을 빡빡 지워 내는 것. 얼마간 투명해졌다 싶으면 빽빽한 나무 사이를 지나 돌담 밑에 독수리 5형제가 하루 동안 먹을 물과 사료를 세 개의 그릇에 나누어 부어주는 것. 그러고 돌아서면 숲은 마루에서 보던 것과 다른 모습과 빛깔로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늘 보던 곳도 등을 지고 반대 방향에서 바라보면 새로
- 관리자
- 2026-02-01
가려진 (아픈) 몸들, 지속되는 광장-들 -최진영, 이서수, 최은미의 소설을 중심으로1) 민선혜 1. 광장이라는 ‘사건’, 서로에게 감응-연결된다는 ‘환상’ 슬라보예 지젝은 ‘사건’을 안정화된 도식을 뒤엎을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가 출현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사건은 기존의 틀 자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광장은 ‘사건’이었을까. 우리는 정말 같은 ‘사건’을 통과한 것일까. 이번 광장의 특징적인 면은 내란 사태를 경험하며 민주주의의 훼손을 온몸으로 막고자 한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이 모인 곳인 동시에, 내란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장은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사건들의 격전지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가 통과한 광장이 새로운 ‘빛’과 ‘연대’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광장을 빛과 연대의 광장으로만 의미화하는 것 역시 어딘가 석연치 않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개진시키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표하는 삼보일배의 순간에도 여성의 몸은 너무 손쉽게 남성적 언사로부터 훼손되고, 이때 여성의 몸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버리고 만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광장 안에 존재하는 억압, 대상화, 전시와 혐오의 광장. 광장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광장. 광장의 빛남을 이야기하는 동안 표백되고 괴리되어 미끄러지는 외따로 놓인 또 다른 작은 광장들. 이것을 ‘가려진 몸들’이라고 불러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어떤 몸들이 경험하는 광장은 다른 이들이 경험한 광장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다. 탄핵 구호를 외치는 동안, 뉴스 속보를 확인하는 동안 고통에 응답하는 정치를 원했다. 마땅한 고통에 마땅한 응답을 내놓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2030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이 광장에서 보여 준 활약과 그들이 들고 있던 깃발들의 이채로움에 대한 찬사 대신, 광장 속에서 부글거리고 있던 ‘우리’ 사이의 작은 차이들과 어긋남에 세심히 주목해 주는 정치를 원했다. 광장이 파한 이후에도 이들이 오롯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런데 그 자리는 마련되고 있는 것일까. 그 많던 ‘우리’는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광장에 나타났던 ’몸‘과 다시 사라져 버리고 있는 ‘몸’.2) 지금 우리는 이 나타남과 사라짐을 경유하여 광장을 소급적으로 재사유할 필요가 있다. 광장에 부재했던 몸들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목소리와 보란 듯이 현전했음에도 다시금 사라져 버린 몸들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하지 않는 목소리, 광장을 사이에 두고 발생하는 이 미끄러짐은 민주주의가 얼마간 성차화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
- 관리자
- 2026-02-01
소설로 촉발되는 신정론(神正論) 윤인로 신이 하는 일, 하려는 일, 그 일·의지의 정당성·정의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함. 곧, 신이 집행하고 관철시키려는 힘과 뜻의 부정의·부당함·악함을 의로워야 할 신에 근거하여 항소함. 이와 반대로 그런 항소·항고를 불가항력적으로 취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신의 의로움·정당함·선함을 불가피하게 인정함. 부당하고 불의한 신에 대한 항고와 뒤이어지는 그것의 취하·철회, 신의 정의에 대한 변호·변론·변신(辯神). 줄여 말해 신정론(神正論·Theodizee, 신+정의theós+díke의 합성어), ‘신≡정의’라는 상보적 합동체로 구성되는 신의 일·뜻·앎·말·법·힘의 복합체론. 이 복합성의 구축 상황으로서, 그런 상황의 재구축을 위하여, (연작)소설집 『사랑이 한 일』의 문장들을 다시 배치해 보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사랑이 한 일』(이승우, 문학동네, 2020), 다시 달리 촉발되는 「욥기」. §1. 롯의 환대를 받은 두 방랑자가 실은 소돔을 멸하도록 신에 의해 파송된 천사들임을 밝히자, 그 임박한 절멸 앞에서 롯과 그의 삼촌은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 “삼촌이 항의하고 호소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삼촌은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취급해서 같이 죽게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그 성안에 의인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 결국 의인이 열 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신의 답을 받아낸다) 롯은 항의도 하지 않고 호소도 하지 않”는바, 불의의 도시 소돔에 “의인은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모든 삶·관계에 고지되고 발효되는 정지·절단으로서의 신의 절멸·폭력. 신을 대신해 두 천사가 행하는 의인과 악인의 무차별·무분별, 그렇기에 신의 공정(公正/工程)에 제기되는 항의와 호소, 이에 대한 신의 조건부 응답. 항의자 삼촌과는 반대로 롯은 신의 일·폭력을 변론하는데, 신의 그 공정을 증거하고 보증하는 정초력으로서 그렇게 한다. 아래 두 대목 중 하나는 그런 롯을 표시하며, 다른 하나는 집-주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부당하게 추방당한 하갈의 ‘울부짖음’을 표현하고 있다. 아래, 인용에 의한 배치, 그 배치 속에서 발생되는 모종의 의미를 살펴보게 된다. [a] 사람을 울부짖게 하는 것이 악이다. 울부짖음은 고발이고 증언이다. 울부짖음이 신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유죄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확실한, 어쩌면 유일한 증거이다. 신은 ‘규탄하는 울부짖음’만을 유죄 증거로 인정하고 판결한다는 것이 천사가 롯에게 한 말의 내용이다. 롯은 이 성을 위해 울부짖지 못한다. [b] 이
- 관리자
-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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