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호
- 작성일 202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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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2021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구름, 종이에 아크릴 잉크, 2020
시간이 많고 항상 심심했던 어렸을 적엔 구름을 보면 항상 모양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사람 얼굴이라든지 강아지, 말 같은 동물이든 닮은 모양을 찾으면 꼭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손으로 그려 가며 알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구름의 모양을 찾을 정도의 여유 부리기는 현재 내 집과 일터 주변에선 할 수 없고 적어도 바다를 가거나 수목원을 가거나, 아예 쉬기로 작정하고 나왔을 때나 가능하다.
W는 개인 작업을 하며 그림을 가르치는 강사 일을 함께하고 있다. 계약의 형태는 느슨하지만, 여러 곳을 거쳤던 이전보다는 계약의 주기가 길어지고 정착하게 되었다. 작년 겨울 5년 차가 되어 가며 안정적이라는 느낌을 가지려는 찰나 황당한 전화를 한 통 받고는 안도했던 마음이 우스워졌다.
구름의 평균 수명이 10분이라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하나의 식별 가능한 모양처럼 명확한 형태가 되려는 부지런한 노력들은 곳곳에서 보인다. 뜬구름이 되지 않고 단단한 덩어리가 되거나 그것에 귀속되기를 바라는 시도는 막연한 안정감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되지만, 사라지는 수증기처럼 결국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다.
문장웹진 1월호 살펴보기
종자는 먹어 치우지 않고 김복희
- 관리자
- 2021-01-01
부드러운 마음 임유영 어데 그리 바삐 가십니까, 동자여. 바지가 다 젖고 신도 추졌소. 뜀뛴다고 나무라는 게 아니라 급한 일이 무엇이오. 이보, 여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 지금 아랫마을 개가 땅을 판다기에 바삐 가오. 개가 주인도 안 보고 밥도 아니 먹고. 빼빼 말라 거죽밖에 남지 않은 암캐가 땅만 판다 하오. 그 개 물 주어 봤소? 그 물 주러 가는 길이요, 그래 내가 이래 다 쏟아 온데 사방이 추졌소. 동자승아, 동자여, 뚜껑 단단히 닫고 가소. 여기 물 더 있으니 모자라면 부어 가소. 보온병에 뜨신 커피 있으니 이것도 가져가소. 필요 없소, 필요 없소. 무슨 개가 커피를 먹는답디까? 당신 행색 보아하니 혹 땡중이오? 우리 주지스님 힘이 장사다. 그 개 다 틀렸다, 개가 땅을 파면 죽는다. 동자가 쌩하게 뛰어 개 키우는 집에 가보니 개는 벌써 구덩이에 죽어 늘어져 있었다. 동자가 개에게 물 뿌리려는 것을 주인이 잡아 옷을 싹 벗겨 빨아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개 무덤에 흙을 뿌리게 하였더니 동자가 엉엉 울다가 개 무덤에 대고 아이고 개야, 개야, 너 전생에 사람이었는데 외로이 죽고 개로 태어났다가 또 혼자 죽으니 두 번 다시 태어나지 말라, 태어나지 말라 수차례 외쳐 일렀다. 동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 관리자
- 2021-01-01
[제38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 아동문학 부문 장원? 〈동화〉] 친구까지 삼십 센티 안보라 ? 수상자의 목소리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교실 문을 열어젖히자 맞은편 창으로 바람이 가득 들어왔다. 나는 친구들과 교실을 나가다 멈칫했다. ‘문어왕!’ 뒤를 돌아보니 창가 책장 위에 놓인 문어왕이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뛰어가 문어왕을 바람이 덜 닿는 자리로 옮겨 놓았다. 친구들 가운데 선 주리가 핀잔했다. “김희진, 뭐 해? 그깟 플라스틱 쪼가리가 뭐 중요하다고. 빨리 가자. 선착순 오십 명이랬잖아.” 새로 연 분식집 이야기였다. 분식집에서는 오늘 하루만 떡볶이 한 접시 가격에 두 접시를 준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주리는 아침에 자기 생일 파티 때 초대했던 친구들을 불러 함께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사실 나는 주리 생일 파티에 끼지 못한 아이였다. 그런데도 주리는 나를 특별히 떡볶이 모임에 데리고 가 주겠다며 인심을 썼다. “넌 발이 빠르잖아. 네가 달려가면 일단 떡볶이 두 접시는 우리 거지. 잘 부탁해.”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설레던지. 주리는 우리 5학년 3반 여자아이들 중에 제일 인기가 많다. 뭐든지 잘했고 뛰어난 말솜씨로 아이들을 휘어잡았다.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는 문어왕이 제대로 서 있는지 거듭 확인하고서 창문을 닫았다. “미안해, 주리야. 다 끝났어. 얼른 갈게.” 서둘러 발을 떼는데 난데없이 비명이 들렸다. “아야!” 화들짝 놀라 두리번거리다 은서를 발견했다. 은서라고? 워낙 작고 조용한 아이라 곁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은서는 허리를 반쯤 숙이고서 내 가방을 가리켰다. “가방, 가방에 머리카락.” 그러고 보니 은서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가방의 지퍼 손잡이에 걸려 있었다. 당황해서 지퍼를 만지작거리자 은서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아야! 멈춰!” 나는 어쩌면 좋을지 몰라 은서와 주리를 번갈아 보았다. 상황을 파악한 주리가 이마를 찌푸렸다. “재수 없게 하필 쟤 머리카락이. 쟤는 왜 긴 머리를 저렇게 풀고 다닐까? 귀신처럼. 희진아, 시간 들이지 말고 대충 끊어.” “그, 그럴까?” 손을 뒤로 돌려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려는데 은서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올려다보는 은서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손에서 힘이 빠졌다. “주리야, 안 되겠다. 먼저 가. 잘 안 되네.” “그럼 우리끼리 간다. 쳇, 괜히 기다렸잖아. 희진이만 아니었으면 진작 줄을 섰을 텐데.” 주리는 신경질을 팍팍 내며 무리를 이끌고 사라졌다. ‘주리랑은 망했
- 관리자
- 2021-01-01
[제38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 시 부문 우수? ] 달리기 김현진 ? 수상자의 목소리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바람이 구멍 난 나뭇잎사귀 곁을 지날 때마다 잎맥을 갉아먹던 애벌레가 나뭇결 같은 갈색 주머니 안에서 흔들리며 꿈을 꾼다. 그 곁으로 사소한 발길질에도 구르는 돌멩이처럼 그녀의 구부린 등허리가 꺾어진 그늘을 이루며 언덕을 오르고 숨소리마저 햇살의 거미줄에 사로잡혀 소거되는 오후, 길 위를 지나는 분주하고 소란한 세상의 소리를 등지고 달팽이 같은 그녀가 손수레를 머리에 이고 느린 보폭으로 기어가고 그녀의 그림자가 달팽이 진액처럼 달라붙은 길에는 땅거미가 기어오른다. 가스비를 종이박스 무게로 물물교환하는 초인류가 멍이 든 뼈들을 따뜻하게 녹여 줄 하루 동안의 잠을 위하여 사족보행을 감행하는데 그녀의 구공탄 같은 날들이 나무공이 속에서 겨울채비를 시작한 애벌레의 고치들처럼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꿈을 꾸었으면, 펴지지 않는 생의 분절들을 땔감으로 모으는 굽은 손등 위로 위로처럼 흔들며 지나는 바람을 향하여 어깨가 짓무르고 등허리가 내려앉은 그녀가 빈 수레로 돌아가는 하얀 길 위로 허기진 비둘기들이 눈알을 굴리며 그녀의 그림자를 쪼아댄다. 느리고 지루한 한 생애가 부리에 해체되어 날아오르듯 언덕 위를 바람처럼 달리며 굴러가고 있었다. 제38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수상작 구분 시 산문 아동문학(동화) 장원 박다은, 「지나가는 것」 오유경, 「미완의 영화」 안보라, 「친구까지 삼십 센티」 최영희, 「백발의 기수」 우수 김현진, 「달리기」 전앤, 「영화」 - 《문장웹진 2021년 01월호》
- 관리자
- 2021-01-01
[제38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 산문 부문 장원?] 미완의 영화 오유경 ? 수상자의 목소리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나는 동전 교환원이었다. 대학을 그만두고 한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내게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몸이 겨우 들어가게 만들어진 부스. 허리까지 내려오는 투명 아크릴판. 얼굴 높이로 송송 뚫려 있는 구멍. 그 위에 손님들이 오가며 만들던 침 자국. 작은 책상 위 똑같이 쌓여 있던 일렬종대의 동전들. 지폐와 동전이 오고 갔던 반달모양의 창구. 혀를 내밀 듯이 미끄러져 들어오던 꾸깃한 지폐. 재빨리 밀어낸 동전의 탑. 속도를 못 이겨 쓰러지던 동전들. 동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 손가락을 훑던 축축한 손의 감촉들. 거스러미.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읽던 백년 묵은 소설들. 속삭이듯 들려오던 라디오 소리. 나의 노트, 노트, 노트. 뿌연 창을 통해 보이던 차와 사람들. 나와 외부가 유일하게 연결된 구멍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햇살, 먼지. 그리고 거친 숨. 이런 것들을 열거하다보면 그는 말한다. 너의 청춘은 불운한 시대를 맞이했던 거라고. 어떤 이는 아버지를 잘못만난 탓이라고도 했다. 몇 수만에 어렵게 들어간 연극영화과였다. 어설픈 첫 단편영화를 찍었다. 기대와는 달리 교수님께 호평을 들었고, 동기들에게선 날선 시선을 받았다. 나는 내 앞에 투포환처럼 둔탁하게 떨어진 탁월이라는 단어를 툭툭 차며,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기울고 있었다. 거래처들 사이에 자잘하고 복잡한 빚을 지게 되었고, 해결할만한 뾰족한 방법이 보이지 않는 시점이었다. 그 중 한 채권자는 돈이 없다면 준비될 때까지 품삯으로라도 갚으라며 일꾼을 보내라고 했다. 정 안되면 그 집 딸이라도. 딸이라도. 오빠는 군대에 있었다. 엄마는 며칠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샜고, 이게 다 그 망할 놈의 임프(IMF)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학교를 쉬어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몇 친구들은 이미 제작비 마련을 위해 전공 수업을 빠지고 아르바이트에 전념하기도 했으므로, 이상할건 없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곳은 서울 근방의 세차장이었다. 사장은 아버지와 관련된 자동차 부품사업과 별개로 카센터와 대형 세차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새로 도입된 셀프세차장이었는데 동전을 넣으면 제한 시간동안 기계가 돌았다. 샤워-거품-헹굼-왁스로 이어지는 시간은 10분 내외. 각 코스마다 동전이 들었다. 내가 맡은 일은 지폐를 500원짜리 주화로 바꿔주는 것 이었다. 이미 입구에는 동전교환기가 여러 대 있었으나 사장의 의견은 달랐다. 동전 바꿔주는 아가씨가 있어야 세차장이 환해지지. 여직원이 있는 걸 알아야 기사들이 몰려. 만 원짜리는 기계가 바꿀 수 없잖아. 그럼 사무실로 들어와서 직접 돈도 바꾸고, 아가씨 엉덩이도 한번 쓰다듬고. 기분 좋아지면 방향제라도 하나 사고 그러는 거지. 사업이 쉬워? 음, 그래도 인물이 애비보단 낫네. 라며 그는 나의 위아래를 훑었다. 달팽이가 지나간
- 관리자
- 2021-01-01
이번 달 비평은 쉽니다.
- 관리자
- 2021-01-01
[단편소설] 도서관은 마지노선 백민석 우리는 가끔 좀 같을 때가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갉아 먹는 좀. 책 먹는 좀이 15년이나 살 리는 없으니까 우리가 진짜 좀은 아니다. 우리는 Z세대 다음에 온 A세대다. Z 뒤로는 알파벳이 더 없으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A가 된 것이다. 우리는 A세대, 아포칼립스 세대다. Y와 Z세대가 우리 부모 세대다. 상이 부모님은 Y세대고 소월이 부모님은 Z세대다. 유정이는 Y와 Z의 결합에서 나왔는데, 그 Y와 Z가 작년에 갈라섰다. 유정이는 이혼하는 날에도 도서관에 나와 우리와 함께 책을 쏠아 먹었다. 저녁엔 우리 모두를 지하식당으로 데려가 잔치국수를 먹였다. 우리는 A세대로서, 약간 장엄한 표정으로 앞선 세대의 종말을 예견하고 축하했다. 예전에는 Y세대와 Z세대를 밀레니얼 세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밀레니얼 세대는 5G의 열광적인 추종자 세대였다. 4G보다 열 배나 빠른 이 5세대 이동통신이, 유치원 화단 위로 귀여운 소리를 내며 지루하게 날아다니던 지구의 꿀벌들을 멸종 위기에 놓이게 했다. 우리가 아포칼립스 세대라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내 건강 상태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우리 가족은 용산의 20층짜리 아파트의 15층에 살았다. 나는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 창문을 투명한 벽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가 있는 동안은 창문을 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긴 했다. 아빠는 날 베란다로 데려가 안아 올리고는, 우리 아파트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리버 뷰라며 뿌듯해하곤 했다. 하지만 한강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내 눈엔 그저 뿌연 대기 아래로 하찮게 반짝이는 오염된 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첫 번째 도서관 회원증을 끊을 즈음이었다. 지상 주차장에서 우리 집이 있는 15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빠는 우리 명수, 집 어디 있어? 찾아봐, 하고 즐거운 목소리를 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아래층부터 소리 내 세어 보았다. 1층, 2층…… 13층…… 우리가 방금 나온 리버 뷰 아파트는 희미하게 보이는 층까지 13층까지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 위론 구름이 짙게 걸쳐져 있었다. 아빠가 자랑스러워하는 리버 뷰 아파트는 구름의 아가리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 구름이 내 삶도 삼켰다 뱉어 놓았다. Y와 Z세대로부터 무슨 전염병의 후유증을 물려받은 것도 아닌데, 초등학생이 되고부터 내 삶은 뭘 해도 심드렁하고 피곤할 뿐이었다. 내가 도서관의 좀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15층을 집어삼킨 게 안개나 구름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식을 앓기 시작하고 알았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집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엄마를 돕겠답시고 창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렸는데, 그날 저녁부터 이마가 끓고 허파가 뒤집힐 듯이 기침이 튀어나왔다. 우리 가족의 주치의는 흘깃 진료실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저게 구름 같지?” “네.” 내가 답했다. “얘 또래면 원래 잘 아프잖아
- 관리자
- 2021-01-01
파리공원 조해주 공원 한쪽에는 작은 코트가 있다 같이 해도 되나요? 농구 골대를 중심으로 하나 둘 모여드는 사람들 서로 밀어내거나 서로의 뒤에 있거나 몸을 낮춘다 인기척이 가까워지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는다 드리블하는 동안에 공은 아주 잠깐씩만 바닥에 붙어 있다 점점 가늘어지는 공 사람들과의 거리가 좁혀질 때쯤 패스하려고 팔을 뻗는다 공이 벗어난 순간 이미 알고 있다 잠시 후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지 아닌지 타인의 손끝이 살짝 닿은 것만으로 날아가던 공의 각도는 바뀌고 코트 바깥으로 튕겨 나간다 하고 있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 공이 놓인다 나는 멀찍이 서 있는 사람을 부른다 저기요, 그것 좀 이쪽으로
- 관리자
- 2021-01-01
글라디올러스 정화진 빵에 버터를 바르고 밤을 응시하다 저 어둠의 강을 건너왔을 때 누군가 빈 들판, 황무지 드문드문 풀숲에 꽃을 꽂아 두고 갔었지 미셸 세르가 글라디올러스를 발음할 때 그것은 물의 식물*이라 했었어 사람들에게 다치거나 아플 때면 꽃잎 말아 넣듯, 자책하고 움츠러들던 네 모습처럼, 뾰족한 잎 속에 너라는 존재를 꼬깃꼬깃 구겨 넣는 오래된 습관이 있었지 핏물이 배어 나오거나 상처가 덧나면 가까운 이들에게 유독 가혹하게 굴었지 오래된 습관, 알 수 없는 마음 물소리가 들려오면 그제야 눈을 뜨고 먼 숲을 바라보던 너 어둠은 너의 배경이 되고 너의 아픔을 위로했지만 빈 들판에 꽃을 꽂아 두고 가던 이름 모를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단다 글라디올러스는 물의 이름을 닮은 것도 같네 그렇지? 물소리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던 네가 본 건 뭘까?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 아니면 둥실 구름, 솜털처럼 가벼운 존재, 존재의 공중부양, 아니면 조금씩 자라 오르는 글라디올러스, 글라디올러스, 햇볕 아래 몽상, 뭐 그런 거였니? * 『헤르메스』(미셸 세르 지음.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09) / 217쪽에서 빌려옴.
- 관리자
- 2021-01-01
[단편소설] 얼굴을 비울 때까지 최윤 어찌 보면 특수하다고 할 수 있는 내 직업으로 인해서 나는 인생의 매 단계에서 예외적인 사람들을 만났다. 예외적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상식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예외적이니 말이다. 그들은 나와의 관계에서 예외적이 된다는 뜻이다. 나는 초상화를 그려 주는 화가다. 초상화가의 관점으로는 매우 그렇다는 얘기다. 초상화만 그리지는 않지만 나의 생활원은 주로 내게 초상화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지불하는 작품 값에서 나오므로 사람들이 나를 초상화가라고 부른다 해서 서운해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초상화 이외의 그림들, 일테면 풍경화나 추상화 같은 여느 그림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그 반대다. 사실 나는 조금씩 이 협소하고 고루할 수 있는, 게다가 자칫하면 매우 형식적일 수 있는 초상화 장르에 대해 무언가 파격적인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게다가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어 가는 추세이기에 잠시 나의 행보를 멈추고 잔잔한 마음으로 다음 단계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초상화가 아주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내게는 있다. 언제부터인가 초상화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나를 찾게 되었고, 최소한 그림이 완성되는 동안은 그 사람과 자주 만나며 시간을 지내다 보니,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나는 사람들과 조금은 특수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자주 놓였다. 나는 어쩌다가 초상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막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와 함께 입시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수강생으로 들어온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우리 또래나 많아야 서너 살 위의 사람으로 딱하게도 여느 사람들처럼 정규적인 직업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는 흠이 있는 남자였다. 그는 한 초로의 남자 손에 이끌려 우리 미술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초로의 남자는 젊은 남자의 아버지였다. 이미 나이 들어버린 한 젊은 남자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미술학원에 학생으로 오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즈음은 그를 생각할 때면 어느새 귀에 고통이 감지되며 귀마개를 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독특한 심리적 문제를 가진 남자였다. 간판을 달지는 않았지만 입시생들은 그곳을 〈말타〉 미술학원이라고 알고 찾아왔다. 내가 보기에는 어디 특별히 광고를 내지도 않는 것 같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미술을 전공으로 택해 볼까 생각하는 중고등학생들이 알음알음으로 네다섯 명 정도는 늘 등록해 있었던 것 같다. 친구는 대화법이라고 부르는 특수한 방법으로 학생이 미술 쪽에 재능이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미술과는 무관한 사적인 질문을 던져 아이들을 당황케 했다. 그러고는 그림을 그려 보라고 주제를 준다. 그들이 애써 그린 그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어떻건 그런 식으로 상담을 거친 아이들에게 미술 개인교습을 하는 학원이었고 친구는 이미 대학 재학 중에 이 학원을 시작했다고 했다. 물론 친구는 그럴 수 있는
- 관리자
- 2021-01-01
[단편소설] 잘 자라, 우리 배지영 바뀐 비밀번호 따위는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고작 세 번의 시도 끝에 알아냈다. 시시하게도 핸드폰 뒷자리 번호였다. 비밀번호를 누를 때 안에선 개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캥캥 짖으며 잔망스럽게 현관문을 긁어대고 있었다. 들어가서 보니 요크셔테리어였다. 유난히 까만 눈깔을 가진 하얀 솜뭉치는 팔짝팔짝 뛰며 짖어댔다. 안에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거실 한복판엔 빨래건조대가 놓여 있었다. 제대로 탁탁 털고 널지 않아서, 수건은 주름진 상태에서 굳어지듯 말랐고 바닥엔 마른 지 한참 지난 양말과 속옷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남자 팬티도 보였다. 화투가 그려진 요란한 빨간색 팬티였다. 한쪽 구석엔 뜯어 놓은 택배 상자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개껌과 개 옷, 케이지가 보였다. 개 영양제도 주문한 모양이었다. 준비해 온 비닐장갑을 꺼내 양손에 꼈다. 걸을 때마다 솜뭉치가 계속 짖어대며 그의 발뒤꿈치를 물었다. 배를 발로 가볍게 걷어찼다. 캐캐캥 하며 나뒹굴더니 다시 발딱 일어섰다. 그러곤 맹렬히 짖어댔다. 그는 개를 화장실에 가두고 문을 닫았다. 안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못 보던 침대가 놓여 있었다. 레이스가 잔뜩 달려 있는 킹사이즈의 침대였다. 침대가 방을 채운 데다가 벗어 던져 놓은 옷들이 널려 있어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문을 열자 개는 튀어 오르듯 밖으로 나왔다. 이번엔 안방에 가뒀다. 그는 세탁기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예상대로 남자의 목장갑이 들어 있었다. 한 켤레를 조심스레 찾아 들어 올려 준비해 온 비닐 안에 집어넣었다. 주방으로 곧장 가서, 개수대에 아무렇게나 박혀 있는 과도도 하나 집어 들어 비닐에 넣었다. 그는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섰다. 거실 구석에 놓인 초록색 소파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그곳에 벌렁 누웠다. 천장을 올려다봤다. 거실 천장의 엘이디등엔 먼지 자국이 보였다. 그것을 계속 노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불빛의 잔상이 계속 남았다. 그는 누운 채 팔을 두 눈에 꾹 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눈물이 날까 두려웠다. 곧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랍과 걸어 놓은 옷, 가방을 뒤졌다. 현금 7만 원이 나왔다. 그는 그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목장갑과 과도를 넣은 비닐을 메고 온 가방에 집어넣은 후, 밖으로 나왔다. * 승태가 “저기요.”라고 하자, 여자는 얼굴을 찡그렸다. “엄마라고 불러야지. 식당 아줌마도 아니고.” 그 말이 승태에겐 용기와 기쁨을 줬다. “너 어렸을 때 살던 동네 기억나?” 기억은 났지만 기억하고 싶진 않았다. 승태의 기억 속엔 ‘누나’라 불렀던 남자의 딸만 선명했다. 남자는 엄마의 동거남이었다. 어쩌면 엄마는, 남자가 딸이 있다고 하니까, 자신도 아들을 데려와야 셈이 맞는다고 생각한 것인지 몰랐다. 엄마라는 여자가 나타나 보육원에 있던 승태를 데리고 들어간 집은, 단층짜리 적
- 관리자
- 2021-01-01
[책방곡곡] 경기도 김포시 꿈틀책방(제1회) 박지원, 『열하일기1』(돌베개, 2017) 사회/원고정리 : 이숙희(꿈틀책방 책방지기)참여 : 곽민희, 김보영, 양승주, 오민수, 최수이 백 년이 넘은 김포 원도심의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꿈틀책방. 이 낡고 작은 곳에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드나든 지 어느새 6년 차가 되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새로운 독서모임이 생겨나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처럼 탄생한 모임에서 『열하일기1』을 완독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꾸준히, 함께, 우리 문학을 읽어 나갑니다. 코로나에도 지지 않고. 사회자 - 560쪽의 책을 낭독으로 읽어낸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열하일기1』을 읽은 소감을 나눠주시겠어요? 오민수 – 사람 박지원에 대한 그림이 좀 그려졌어요. 호기심 가득한 성격이 열하 여행에서 빛을 발했다고 봐요. ‘왜’라는 질문을 항상 품고 답을 찾으려고 애쓰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사람이더군요. 곽민희 – 연암도 연암이지만, 조선이라는 시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가 이 책을 통해 연결된 느낌이에요. 조선시대에 관심이 없었는데 책 읽는 동안 조선에 발을 내디딘 듯 가까워졌어요. 구체적인 존재로 다가온 거죠. 역동적이었다고나 할까요. 양승주 - 정말 공감해요. 역사드라마를 통해서만 만들어진 추상적인 이미지가 당시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이나 풍습 등 다방면으로 구체화되더라고요. 곽민희 – 자연스럽게 이 당시뿐 아니라 앞뒤 역사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중국의 역사와 문학까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역사를 너무 몰랐다가 호기심을 품게 된 좋은 계기였어요. 김보영 – 반성도 많이 했어요. 풍자와 해학이 끊이지 않는 글을 읽는 내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색과 내 귀에 들리는 소리가 허상일 수도 있겠다, 얼마든지 틀릴 수도 있겠다, 깨달았어요.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사람 사는 건 200년 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했고요. 최수이 – 서양 고전에만 익숙했는데, 학교 다닐 때 극히 일부만 알았던 우리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에요. 사회자 – 이 책은 서문 외에 압록강을 건너며 쓴 「도강록」, 심양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성경잡지」, 달리는 말 위에서 기록했다는 「일신수필」,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 「관내정사」, 북경에서 열하까지의 이야기 「막북행정록」 이렇게 총 다섯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느 장이 제일 재밌었는지, 혹은 오래 마음에 남는지 궁금해요. 양승주 - 「도강록」에서 말한 ‘경계인’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경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상식적으로는 한양에서부터 시작했어야 할 여행기를 압록강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어요. 최수이 – 저도 「도강록」을 읽으며 ‘경계인의 자세’, ‘도는 경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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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제38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 아동문학 부문 장원? 〈동화〉] 백발의 기수 최영희 ? 수상자의 목소리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가을 끼 발표회가 시작됐다. 강당 무대 단상 위로 붉은 색 막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다음 차례인 우리는 강당 뒤 대기실에서 마지막으로 동선을 확인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앞 무대가 끝났는지 박수소리와 함께 함성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자, 하던 대로. 알았지? 긴장하지 말고. 파이팅!” 댄스부 선생님이 주먹을 꽉 쥐며 응원해주었다. 우리는 무대 위로 올라가 자기 자리에 섰다. 막이 쳐 있는 뒤쪽이라 어두웠다. 잠시 뒤 주위가 조용해졌다. 우리 팀 소개와 함께 막이 서서히 열렸다. 박수소리가 들렸다. 이어 우리를 향해 밝은 조명이 켜졌다. “신기수 파이팅!” 꽤 앞 쪽에 자리 잡은 건지 엄마 목소리가 내 귀에까지 와 닿았다. 그리고 그 모든 소리를 잠재우듯 커다란 음악소리가 우리의 시작을 알렸다. 쇼는 시작됐다. 개학을 앞두고 엄마가 염색을 해 준다며 화장실에서 나를 불렀다. 늘 하던 건데도 짜증이 밀려왔다. 얼마 전부터 속눈썹 몇 가닥까지 하얗게 변해버렸다. 속눈썹까지 하얀데 머리카락 따위 염색해서 뭐하나 싶었다. 방문을 벌컥 열고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싫어. 속눈썹도 염색 해주던가. 안 해!” “아, 싫으면 관둬. 누군 염색하는 게 좋아서 하는 줄 아나. 아무튼 성질은.” 엄마도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방문을 확 닫았다. 거울을 봤다. 방학 사이 흰 머리카락이 늘어난 것 같았다. 오른쪽 한 움큼. 그리고 오른쪽 속눈썹 몇 가닥. 그리고 희끗희끗 얼룩진 내 얼굴이 보였다. 나는 거울을 뒤집어 치워버렸다. ‘그냥 할 걸 그랬나?’ 후회해도 소용없는 후회를 잠깐 했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뭔가 창피했다. 염색한다고 아이들이 모르지도 않았다. 영원히 머리카락이 자랄 때 마다 염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지 싶었다. 아이들 놀림거리. 까짓 거. 한 번 해주면 그만이다. 댄스부만 생각하자. 나는 학교에 가기 싫어질까 봐 일부러 생각을 돌렸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교실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인규가 시비를 걸었다. “오, 백발의 기수. 브릿지 염색 하셨나 봐? 한쪽만 하얗게?” “하지 마라!” 내가 낮게 말했다. “뭐야. 염색했냐고 물어보지도 못하냐? 우리 엄마는 염색했는데 내가 딱 알아보면 좋아만 하던데.” “우리 엄마도.” 인규 말에 인규 짝이 맞장구를 쳤다. “야, 염색한 걸 어떻게 알아보냐? 난 암만 봐도 모르겠더라.” 또 한 녀석이 끼어들었다. “그게 다 관심이지, 관심. 쟤는 형님의 따뜻한 관심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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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제38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 산문 부문 우수? ] 영화 전앤 ? 수상자의 목소리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윤과는 사내 영화 동아리에서 친해졌다. 직원들은 부서가 다르면 좀체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다. 회사는 다양한 동아리를 만들어 직원들 간의 친분도 쌓고 업무의 효율을 높이고자 했다. 영화 동아리는 사람이 제법 많았는데 윤은 자신을 공포 영화광이라고 소개했다. 어느 금요일 저녁, 나와 윤은 우연히 상영관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는 공포가 다가올 장면에서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나중에는 배경 음악만 나와도 몸을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궁금증을 참지 못해 손가락을 살짝씩 벌려 보았다. “간단해요, 똑바로 보세요. 절대로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피하면 안 돼요. 그리고는 짧고 굵게 비명을 지르세요.” 어둠 속에서 윤은 내 귀에 가까이 대고 말했고 나는 그 다정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충고대로 잔인하게 살해된 시체를 똑바로 보고는 짧지만 큰 소리로 악, 하고 소리를 질러보았다. 곁에서 귀가 따가울 정도로 먼저 소리를 지르는 윤이 있어 쉽게 용기가 났다. 정말이지 윤은 정말 무서운 건지, 아니면 작정한 건지 내내 악, 악,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 후 우리는 탕비실이나 화장실에서 마주치면 왠지 친근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회사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영화 동아리를 비롯해 모모든 대외 활동이 정지되었다. 중국으로 수출하던 화장품은 회사 창고에 박스째 그대로 쌓여갔다. 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지면서 인원 감축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출산 휴가를 다녀온 윤을 일 순위로 뽑았다. 윤이 속했던 부서가 해체되는 바람에 윤의 역할이 애매해진 상태라고 했다. 거기다 아기 때문에 조퇴가 잦아 상사들이 윤을 싫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그날 나는 외근 때문에 윤이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살아남았지만 평소보다 업무량이 많았다. 팀장은 위기에서도 돌파구를 찾고자 팀원들을 자주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나 역시 해내고 싶었고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수록 더 무기력해져 갔다. 두팔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의자에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회의실 유리창은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밖이 훤히 보였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칸막이 속에서 움직이는 까만 머리의 모습이 마치 일개미들처럼 보였다. 귀로는 팀장의 말을, 눈은 사무실을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텅 비어가던 순간이었다. 윤이 회사에 다시 나타났다. 나는 궁금증과 반가움을 느꼈는데 일 초 이 초의 시간이 지나서는 어, 하고 그만 입이 벌어졌다. 바깥 역시 어딘가 이상한 기운이 도는 분위기였다. 사무실에 있는 모든 공기가 윤을 향해 바짝 조여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윤을 주시했다. 몇몇은 일어나서 윤의 동선을 살폈다. 윤은 가슴을 펴고 책상들 사이를 지나 걸어오더니 직원들을 등지고 나를 바라보는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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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단편소설] 샐리와 케이와 그런 여자들 조남주 학부모 총회라니.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유치원 가서 잘 먹고 잘 놀다 오면 되는 거 아닌가. 대체 뭘 상의하고 건의하겠다고 학부모 총회씩이나. 은주는 그런 마음으로 새봄을 영어유치원에 보낸 게 아니었다. 퇴근한 용근에게 메시지를 보여주며 물었다. “나가지 말까?” “왜? 가서 엄마들도 사귀고 정보도 얻고 그러면 좋지 않아? 궁금한 거 많았잖아.” “새봄아빠 이런 거 기겁할 줄 알았더니.” “그냥, 다들 모이는 자리잖아.” 새봄은 세 살 가을부터 인근 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다녔다. 어린이집은 교회와 같은 건물이고 교단에서 운영을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좀 성대하게 하고, 부활절에 달걀을 나누어주고, 밥 먹기 전에 식사기도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다. 보육 포털에 대기했다가 차례가 되어 등록했을 뿐, 은주와 용근은 종교가 없고 어린이집은 만족스러웠다. 선생님들이 다정하고 느긋한 게 가장 좋았다. 새봄이 낮잠을 거부할 때도 숟가락질을 못할 때도 목덜미 피부가 빨갛게 일어났을 때도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이 흔히 겪고 지나가는 일이라고 은주를 안심시켰다. 선생님 말대로 새봄은 곧 곤히 잠들었고 숟가락질도 능숙해졌고 계절이 바뀌며 피부 발진도 좋아졌다. 게다가 정부지원금 이외에 따로 들어가는 비용이 행사비와 특별활동비 등을 다 해도 한 달에 10만 원 정도로 저렴했다. 어린이집은 7세 반까지 있었다. 은주는 새봄의 발달 상황을 봐서 여섯 살에 유치원으로 옮기거나 쭉 어린이집에 보내다가 곧바로 초등학교에 입학시킬 생각도 있었다. 천천히 고민해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봄이 네 살 되던 여름부터 같은 반 엄마들이 유치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5세 반으로 처음부터 들어가지 않으면 6, 7세 때는 증원 인원만큼만 추가 선발하기 때문에 유치원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은주의 마음도 일렁거렸다. 용근은 출근하고 새봄은 어린이집에 간 평일 오전, 은주는 자연드림에서 채소 몇 가지와 유기농 사과주스를 사오다가 충동적으로 어린이집을 찾아갔다. 그냥 창 너머로 교실 분위기나 보고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새봄이네 반 아이들이 앞마당 텃밭에 나와 있었다. 은주는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새봄을 한참 지켜봤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새봄이 늘 무리의 뒤편에서 머뭇거리다가 다른 아이가 비키고 나서야 흙을 파고 꽃향기를 맡고 열매들을 만져 본다는 것을. 그러다가 누군가 슬금슬금 밀고 들어오면 다시 멀뚱멀뚱 밀려난다는 것을. 저리 비키라고, 아니면 같이 보자고 말하는 아이들 틈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것을. 모종삽을 빼앗기고도, 분무기를 빼앗기고도 울거나 소리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고 걸음도 뒤뚱뒤뚱 야무지지 못하다는 것을.은주는 집에 돌아와서야 눈물을 쏟아냈다. 대체 나는 뭐 하는 사람이지. 이러려고 10년 넘게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었나.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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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느린 기린 큐레이션] 〈느린 기린 큐레이션〉2021년 1월(웹진 편 1) 조시현, 조온윤 안녕하세요, 2021년의 느리미와 기리니가 인사드립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지나가고, 어느새 새해가 되었네요. 모두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신년이 되면 새로운 다짐과 함께 시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느리미는 수영을 배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요,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답니다. 여러분도 각자가 새로운 마음과 계획으로 새해를 맞이하셨겠죠? 올 한 해, 좋은 기운을 잔뜩 받아서 시도하시는 일이 모두모두 잘 되기를 항상 바라고 있겠습니다. 한편 우리 큐레이션도 새 기획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는데요, 3회에 걸쳐 이어졌던 ‘문예지’ 소개에 이어 이번에는 ‘웹진’들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이동하거나 여가를 보낼 때 앉아서 책을 펼치기까지, 마음먹는 일이 쉽지 않아 핸드폰을 보는 분들도 많으실 텐데요, 꼭 종이책을 펼치지 않아도 우리는 문학 텍스트를 만날 수 있답니다. 어쩌면 직접 작가가 될 수도 있을 거구요. 바로 웹진을 통해서요! 웹진은 휴대폰이나 노트북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죠. 또한 온라인 매체라는 특성상 좀 더 빠른 속도로 의견을 주고받거나 문학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실시간 이벤트, 기획이 가능하다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어떤 문학 웹진들이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요? 걱정 마세요! 느리니와 기리니가 소개해 드릴게요! ① 어디에나 있는, 당신의 《아는사람》 《아는사람》은 기획자 한소리 씨를 중심으로 전세은 씨와 한윤희 씨 등 세 명의 팀원이 함께 만들어 나가고 있는 웹진입니다. 일방향적인 청탁과 게재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누구나가 글을 올릴 수 있고, 또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자독자 체인지〉라는 코너명으로 창작자들이 독자로서의 자신을 조명해 보는 코너나, 선정된 시 낭독본을 배경음악으로 재생하는 〈문학 스트리밍〉을 제공하는 등, 매달 문학 콘텐츠와 관련된 다양한 기획과 이벤트를 통해 문학을 텍스트 너머로 확장시켜 더 많은 창작자와 독자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를 선보이고 있죠. 지난 12월에는 광명시가 주최한 ‘2020년 청년 생각펼침 공모사업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어요. 그러면 지금부터 《아는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할까요? Q.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는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작품 게재가 가능한 웹진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특별한 것 같아요. 이번 취재가 작가와 독자들에게 《아는사람》이 좀 더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먼저 《아는사람》을 간단하게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안녕하세요. 《아는사람》은 1인 기획자를 중심으로 프로젝트마다 팀원이 달라지는 다회성 프로젝트 팀이었는데요. 독립 출판 프로젝트 『아마도 익스프레스』
- 관리자
- 2021-01-01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김준현 일본식 가옥을 보존해 만든 까페였다 죽은 사람의 일본어는 갈 데가 없어서 방황하는 개가 되었다 2층에 앉아서 보았다 그 개가 돌아다니는 모양을 보며 빨대의 내부에 대해 빨대의 허기에 대해 호흡이 많이 필요한 외국어에 대해 적었다 ‘창밖에는 밤비가 속살거려’로 시작하는 메모였다 윤동주의 귀를 천 원에 산 적이 있지 작은 종이에 사인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네 번 접었다 이 어지러운 굴곡을 수평선처럼 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몇 년이었을까? 문학을 많이 해서 수학이 낯설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면서 한 층을 빼기 위해 걷는 일이 전부라는 것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디디며 몸을 굽히며 창밖에는 밤비가 속살거려 창밖에는 밤비가 속살거려 타고난 라벤더 향기가 한평생인 비누처럼 오른손에만 익숙한 필기처럼 윤동주 이곳을 떠나야 했다 서둘러 바닥에 떨어뜨린 두루마리 휴지가 경사를 만날 때 귀신이 육체를 가지고 놀듯이 심心만 남을 때까지 아래로 아래로 계속되는 대代를 잇는 일 이곳에서 나는 햇빛이 가득한 창문과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와플 사진을 남겼고 [횡단 내내 러시아인들은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다, 해와 무관하게]라는 문장과 정신이 이어져 있었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오징어 말리는 냄새를 느꼈다 어둠이 오면 수평선이 사라지고 오징어잡이 배들의 빛이 별빛의 어머니처럼 번뜩인다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노동을 멈추고 싶었다
- 관리자
- 202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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