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호
- 작성일 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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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2021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너와 나 둘만 아는 조용한 행복,
매일 밤 조금씩 자라
주렁주렁 열리는 비밀
문장웹진 7월호 살펴보기
투성이 신이인 여기 뭐 묻었어요 모르는 사람이 제 팔을 낚아채고 가리키면서 일러주었습니다 팔이… 간호사가 주사를 놓으려다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멍이야? 타투야? 무슨 뜻이야? 외국인 친구는 팔을 스스럼없이 만지며 물어봅니다 한국인 친구가 당황해서 말을 돌립니다 사려 깊은 당신들이 티 나지 않게 투명 수건을 돌려 가며 가려 주는 행위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목욕 후 거실을 지날 땐 바다 바퀴벌레처럼 사라져야 합니다 수건 한 장만 앞면에 달고 아빠: 애써 티브이로 시선을 고정함 엄마: 안 본다 안 본다 손사래 침 소리 내며 저절로 열리는 서랍 앞에 안 봤어 다정하게 말해 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 다행인 저는 더욱 혼자서만 고장입니다 수건을 스스로 내릴 즈음엔 술 끊기 일찍 자기 점잖게 말하기 어른스러운 연애 다 가능할지 모르겠다만 저 아직도 저에게 뭐가 붙어 있는지 몰라요 볼 수 없어요 환해질수록 눈치 빠른 그늘들은 뒤로 사사삭 얼룩의 머리채를 잡고 숨어버리고 팔짱 낄래요? 저는 약간 바보처럼 잇몸 안쪽을 열어 두었어요 상가 건물 공공 화장실 같은 거니까 와서 숨어도 되고 저처럼 웃어도 돼요 깨끗해요 씻겨도 무늬가 어지러운 들고양이를 편애할 수밖에요 이 서랍에 제가 개켜 모아 둔 사랑이 엉망진창 앞에서 팔을 자꾸 벌려요 엉망진창 앞에서 유독 깨끗합니다 선천적으로 이랬습니다
- 2021-07-31
너는 네가 맡은 역할과 배역을 충실히 이행한다. 나는 하나의 규칙에 몰두하고 있다. 낙하산이 든 가방을 메고 우리는 심하게 흔들린다. 불투명한 안경 너머의 하늘이 꾸준히 어둡다. 악역이 없는 사건을 상상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젊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제단 위의 약과에 손이 닿지 않아서 어린애가 울고 있었고, 할머니가 어린애의 손등을 내리치고 또 내리치는 장면이었다. 어린애의 엄마가 발을 구르는 바람에 아름다운 영정 사진에 금이 가고 있다. 이러한 장면은 일종의 게임인 것이고 그 장면에서 악역이 누군데? 일부러 고개를 기울이며 네가 물었다. 이렇게 무겁고 거대한 것이 하늘을 날다니. 나는 흔들리는 철골구조물로 시선을 돌린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믿어진다. 이런 말들을 너는 듣지도 못하지. 높은 곳에 올라가면 바라는 게 많아져. 우리는 함께 기다린다. 눈 덮인 화산이 폭발하거나, 큰 산이 우르르 무너지기를 이 장면의 악역을 알 것 같아. 뛰어내리기 전에 네가 말한다. 네가 웃어서 기내에 웃음의 잔상이 남아버렸고 나를 내려보내기 위해 모르는 사람이 나를 끌어안았다.
- 변혜지
- 2021-07-31
피로연 김민식 그날 목서는 무대 위에서 울지 못했고, 울지 못했던 걸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불타는 나무 앞에서 숲의 귀신과 약혼할 때 눈물이 나올 줄만 알았어. 근데 얼음 생각만 나더라. 불타는 나무 속에서 빛나는 하얀 얼음…” 냉면이 미지근해지는 동안 목서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둥근 식탁보가 거무튀튀하게 젖고 있었다 나는 목서에게 어떻게 얼음이 녹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불은 주황색 부직포, 얼음은 투명한 사각 전구라고 목서가 설명해 주었다 앞으로 불타는 나무 앞에서의 일을 생각하면서, 꼭 필요할 때마다 울 수 있지 않을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을 거야 나와 목서는 옥상정원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아래층에서 올려다본 에스컬레이터 수리 현장은 톱에 베인 살점 같았고 누군가 우리를 위쪽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 김민식
- 2021-07-31
분홍색 서랍장 한준석 소년의 서랍에는 마개가 없는 물병이 굴러다닌다 사랑하는 해양동물 백과사전 속 이름들을 소년은 하나, 둘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눈먼 기린, 속눈썹이 긴 외국인, 멀리 사는 그녀 비스듬해서 서랍장의 서랍은 혼자서 가끔 열린다 찰랑, 구르는 물병의 남은 물기가 서랍의 안쪽을 느리게 적신다 물 자국을 견딜 수 있었나 서랍장은 고장 나기 쉬운 입안이다 서랍장은 기울어져 있다 수평을 위해 모서리에 두 번 구겨졌던 해양동물 백과사전의 찢겨진 페이지들 서랍장 밑 깊숙이 사라진 그 페이지들은 아가미가 없다 둘, 셋 그런 종種들은 소년의 맨발로 잡을 수 있나 새카맣게 먼지 묻은 찢어진 양말 바다에 가라앉는 잠수부의 부서지는 호흡 별 모양 형광 스티커의 흐려진 빛 이런 기척들이 남아 어제와 자주 섞인다 제자리에서 종아리가 붓는다 소년은 긴 손가락으로 서랍장 밑을 뒤적인다 둥글게 뭉쳐 있는 새떼들이 손끝에 가볍게 묻어 나온다 끔찍한 운명을 피할 수 없어요 태양의 수명을 다룬 책의 페이지를 펼친다 창문이 열린다 여러 겹의 걸음소리가 들린다 서랍장은 빨간색에 가까운 분홍색 서랍은 앞으로 몇 번이나 혼자 열릴까 모래를 손에 쥐어 본 일이 생각나 소년은 입을 벌리고 고장 나 있다 소년은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낸다
- 2021-07-31
켤레 윤혜지 나는 나로 감겨 있구나 알게 된 뒤로 신발을 주우러 다녔다 역 플랫폼과 번화가 식당 입구 해변과 강가의 젖은 흙 사람들 모였다 어디론가 들어가 버린 곳이면 어김없이 신발이 있었다 어린 연인들의 메리제인을 주우며 생각했다 개와 늑대가 한 켤레라면 사람은 무엇과 한 켤레일까 사람은 사람끼리 켤레겠지 어쩔 수 없이 부지런히 일하고 밥을 먹고 친밀한 사람을 골라 화를 내다가 내려다보며 생각하는 것이다 또 신발을 벗어 놓고 왔구나 태울 수도 없다 불이 닿으면 불씨를 먹어치우고 도자기처럼 빵처럼 부풀어 오른 신발을 신고 산책했다 따라오는 검정 안으로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꺼내면 내가 가장 잃어버린 것 내 손목을 움켜쥔 채 놓아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래그 페이퍼 끝도 없이 뱉어내는 목록들: 사람은 왜 이렇게 생겨먹은 걸까 늑대의 배를 가르고 어린 양을 찾도록 검은 털과 보드라운 속눈썹을 지닌 나의 양들 계속 계속 꺼내도록 괘종시계 뒤에 숨어 있던 마지막 양이 외친다 나는 아직 잡아먹히지도 못했는걸요 개는 늑대 바깥에 벗어 둔 신발 저리 사람을 따르다니 저것은 말끔한 홀로그램 기도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에 잠긴 채 기도했다 멀리 보며 우는 사람보다 웃는 사람의 뺨이 더 파랗게 패이도록 모두를 풀어 헤치는 돌풍 속에서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을 줍는 사람이 있었다
- 윤혜지
- 2021-07-31
5월 이근석 돌을 던지다 왔다 걸어가고 있었다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따라오고 있었다 대열을 맞춘 장면 장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길가에 떨어진 돌들 하나 주워 아무렇게나 던지면 그것에 맞은 사물과 사물들이 사정없이 태어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있지 않았는데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걸어가는 만큼 확장되고 던지는 만큼 생성 생성되는 정물들이 돌을 던져서 깨지는 창이 있었다 돌을 던져서 망가지는 화단이 돌을 던져서 이거 어떤 새끼야 하는 구체적인 목소리 쫓아오고 있었다 달아나고 있었다 사방이 그때 생겼다 과거와 미래가 유년과 소년 중년과 노년이 한데 어우러지는 방식이었다 그 길에는 내가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의 구별이 없었다 기억이 없었다 기억이 없어서 나는 귀신이 아니고 헤아릴 수 있는 세계에 있었다 내가 헤아리는 세계에 있었다 하나와 둘이 셋과 넷처럼 있었다 다섯처럼 있었다 사람이 한 사람의 얼굴로 울고 있을 때 그 얼굴 안에 그보다 더 울고 있는 얼굴 생각을 하면 거기 있었다 거기 혼자 있었다 꽤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금방이었다 근방이어서 천천히 나는 돌아오고 있었다
- 2021-07-31
갱년기 김수원 발톱이 자라지 않는 밤 기차는 누군가 떨어뜨린 머리카락 쪽으로 휘었다가 펴지길 반복하고 차창에는 네가 달린다 나를 달린다 우리는 우리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엄지발톱은 엄지발가락이 아리는 이유를 모르면서 자라지 않고 동해는 끝도 없이 기차 밖이다 승무원은 지정석을 지켜줄 것을 당부한다 잘 아는 사람처럼 상냥하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눈을 감지만 마주 보면 정작 보이지 않거나 물에 붇은 발바닥 같은 기분 너는 나인 척 나는 너인 척 지금껏 서로를 속이고 아닌 척 서로를 죽이고 우리를 견디려고 기차를 견디고 발가락과 발톱 사이, 바다가 있다 파도는 파도로부터 부서지고 어둠 속에서 하얗게 일어서고 처음인 양 다시 부서지고 통증이다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는 빠삐용의 시간 우리는 지정석을 탈출한다
- 2021-07-31
파피루아 강우근 우리는 선생님의 인솔 아래 스케치북을 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팻말이 꽂힌 나무를, 짹짹거리는 작은 참새를,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그리기 시작하고 나의 눈앞에는 푸른 나비가 어른거렸다. 일회용 카메라를 드는 사이 다른 세계로 떠난 나비를 스케치북에 되살렸다. 방과 후에는 도서관에서 나비 도감을 펼쳐 보았다. 삼천 종이 넘는 나비를 한 마리씩 넘기는 사이에 책을 읽던 친구들은 떠나가고, 해는 저물어 가고, 공원에서 본 나비를 찾지 못했지만 도서관을 나온 푸른 저녁에 나는 문득 파피루아라고 불러 본 것이다. 그리고 파피루아는 종교가 없는 내가 대성당에서 처음 기도를 올릴 때 떠올랐다. 군복을 입은 전우들은 각자의 소원 속에서 눈을 감았다. 내가 파피루아라고 속으로 말하면 검은 세상에서 푸른 불과 같은 날개를 저으면서 유년의 나비는 오고 있었다. 눈을 뜨면 우리는 각과 열을 맞추면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연병장을, 숲의 계단을, 사격장을, 어쩌면 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는 슬픔으로 옮겨가는 장소로 흔들리는 총을 어깨에 메고, 물통을 허리춤에 차고 여기서는 반딧불이가 보인다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그건 파피루아같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2021-07-25
물 아래 저녁 남수우 졸린 눈을 비비며 이야기를 들었다 이 안개가 다 지나면 올 거랬다 목소리는 나를 잠 속에 밀어 넣고 연거푸 문을 닫았다 세 번 닫았다 물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물소리는 닫히고 너는 안 들리고 너는 안 보이고 내가 속삭인 쪽부터 사라지는 눈사람이 있었다 너는 저물녘마다 붉은 망토를 걸치고 난간에 걸터앉아 구구단을 외우던 작은 아이, 불러 세우기엔 모자란 두 손이 등 뒤에서 마주칠 때 철썩이고 있었다 들이쉴 때마다 발치가 젖는 모래 위 누군가 집을 그리라고 했다 나무를 그리라고 했다 누군가 사람을 그려 보라고 했다 나는 그리고 그리면서도 자꾸만 지우개에 눈이 갔다 누군가 이제 집과 나무와 사람을 시작하라고 한다 산책자는 왼쪽에서 태어나 오른쪽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가 지나친 창속에는 물푸레무늬목으로 엮은 책장이 보이고 책상과 의자가 놓입니다 여러 날씨를 오가며 창문은 하나뿐인 얼룩을 기를 테지만 물가에 정박한 누운 나무를 그가 두고 갑니다 더미는 시작되고 있었다 굽은 등으로부터 물가의 나무는 멈춰 있지 그곳에 못을 박았지 누운 나무 곁에 누워 오래 미뤄 둔 잠에 들었지 백지를 넘기다 보면 언제나 너는 4 곱하기 9를 마저 닫고 있었다 그림 속을 헤집던 누군가 눈 비비며 묻는다 벽으로 뛰어든 햇살은 오늘의 것입니까 모래 아래 두 손을 두고 너는 떠났다 두 번 떠났다 마지막 문턱이 안 보이고 안 닫히는 동안 그림자 같은 비밀을 끌며 등 뒤가 자랐다
- 남수우
- 2021-07-25
[리뷰] 월간 〈읽는 극장〉 3회 - 우리가 그‘여름’으로부터 배운 것 아르코예술극장 개관 40주년 기념 월간 읽는 극장 3회, 우리가 그 ‘여름’ 으로부터 배운 것연극 〈다른 여름〉을 관람한 두 작가의 문학 낭독회 안희연, 「면벽의 유령」 중 이젠 정말 다르게 살고 싶어 …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리십시오 … 기껏해야 안팎이 뒤집힌 잠일뿐이야 …너를 잃어야 하는 천국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현실에 불만을 갖기도 하고 나 스스로가 저평가 된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합니다. 별로인 나를, 그리고 내가 놓인 여기를 불만족스럽게 여기는 것이지요. 그럴 때 “다른 데로 가고 싶다. 여기만 아니면 돼”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다른 곳,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갈망합니다.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은 자신의 어떤 지점, 내가 놓인 환경, 관계, 상황에 대한 회피이자 부정일 것입니다. 시 「면벽의 유령」 속 존재는 다른 삶을 상상하지만, ‘지금’ 역시 잃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렇게 현재를 살아가기로 마음 먹지요. 우리는 현재로부터 도망갈 수 없기 때문에, 동시에 어떤 변화도 사실 현실로부터 출발하기에 우리가 놓인 자리에서 마주하며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 월간 〈읽는 극장〉의 세 번째 시간은 진행자 양경언 문학평론가와 함께 안희연 시인이 자리해 주었습니다. 연극 〈다른 여름〉을 보고 만난 두 작가는 우리가 이 ‘여름’으로부터 배울 것이 무엇인지에 생각을 나누었고 시인은 공연과 연결되는 안희연 시인의 작품을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월간 〈읽는 극장〉 3회 우리가 그 ‘여름’으로부터 배운 것 연극 〈다른 여름〉 연극 〈다른 여름〉은 한 고등학교 핸드볼 체육관에서 일어난 방화사건의 용의자를 찾아가는 ‘스포츠 심리 추리극’입니다. 추리극이 흔히 ‘범인 찾기’를 목표로 흘러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다른 여름〉은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는 것에만 몰두하지 않습니다. “범인이 누구냐가 중요한 연극은 사실 아니었고, 자기가 왜 범인이 아니라고 말을 하는지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거나 혹은 결국은 인정해 나가는 과정 … 범인이 분열된 많은 자기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이 있었기 때문에, 부인하면서 다른 곳으로 자꾸 가려고 하는 내면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더 보여주는….” (안희연) “범인으로 지목된 그 사람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그 사람만의 일이 아닌, 어떤 사회적인 이슈랑 연결되는 부분들도 있고,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시화되지는 않지만 늘 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내용들도 좀 찾아서
- 2021-07-02
사계 차원선 죽었다는 꿈을 꾸었다 탐욕스러운 오렌지가 마른들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 아파도 좋으니 피를 흘릴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기이하구나 함부로 살아 있는 아픔에 대하여 빌었다 아픔은 즐거워지리라 여름이면 우리는 싸우지 않고 멀어질 수 있다 이 피부를 뚫고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어떤 빛을 먹고 멀어질 수 있다 무언가 열린 것들이 깔려 있을 것이고 어린 천재의 손에는 노래의 음계가 강강술래, 강강술래 죽은 아들은 오렌지에 칼을 꽂아 상자에 던져 넣는다 누군가는 낫질을 하러 나가 한참을 서 있을 것이다 서 있는 당신을 한참을 보고 서 있을 것이다 맞아 죽는 무료한 오렌지들이 여러 개 겨울을 기억할 것이다 표정보다 긴 뒷모습으로 깨지기 쉬운 기억 석양이 오래도록 지지 않는다 이 열매는 누군가의 배를 부르게 하고
- 차원선
- 2021-07-01
유성 강우근 수업 시간에 창 바깥만 보는 유성이의 외가에는 염소 목장이 있고 높은 지대에 있어 여름에도 서늘했다. 펄럭이는 셔츠를 입고 목장을 달릴 때면 우리는 언제나 날지 못하는 비행기가 되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염소 떼를 따라 풀이 자라나는 목장은 울퉁불퉁했다. 우리가 건초 더미를 주면 염소들은 몰려오고, 유성은 진흙이 묻은 손으로 하얀 염소의 몸을 어루만졌다. 염소들이 모두 얼룩덜룩해질 때까지 유성은 건초 더미를 먹였다. “하얀 염소는 돌아오는 여름마다 사라져. 눈에 띈다는 건 무서운 일이야.” 점심을 먹는 동안 어른들은 살이 찐 염소, 출산을 앞둔 염소, 죽어가는 염소에 대해 얘기하고 창고에는 건초 더미가 한가득이다. 우리는 목장을 등지고 연을 날렸다. 푸른색의 연은 하늘이 되지 못했다. 내가 잡아끌고 있는 연 하나가 끊어졌을 때 연은 순간의 빛을 내면서 떨어지는 별처럼 상상할 수 없었다. 유성은 자신이 쥐고 있는 하나의 연도 끊어버렸고 우리는 어린 염소처럼 들판에 풀썩 주저앉았다. “가장 하얀 염소는 여름마다 울타리 너머로 가는지도 몰라. 하얀 세상으로 가는 거야.” 우리는 졸업할 때까지 학교의 늘어나는 고양이들이 다양한 색깔로 난간을 타고 넘는 것을 보고 또 보았다.
- 2021-07-01
[책방곡곡] 경북 영주 샘터서점(제1회) - 모임 / 2021-06-25, 저녁 7시, 샘터 3층: 동시, 똑똑! 사회/원고정리 : 권화빈참여자 : 의상대사, 우옥영, 김미경, 우병훈 책읽기 모임 ‘영주시 100인 독서클럽 휴(休)’ : 책을 통해 삶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임 권화빈(사회) :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벌써 올 한해도 절반이 다 돼 가는군요. 그 6월 막바지에 “휴”를 만나 책 이야기를 진행할 사회 권화빈입니다. 오늘은 박덕희 동시인의 동시집 『호랑이는 풀을 안 좋아해』를 가지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동시집은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20년 제3차 문학나눔에 선정된 도서이지요. 다들 잘 읽어보셨나요? 쉬울 듯하지만 생각보다 잘 읽지 않는 책이 동시집일 수 있어요. 어른이 되어 자꾸 닳아져 가는 동심을 생각하니 내가 어쩐지 자꾸 미워지기도 합니다. 이 동시집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간의 근황을 조금씩 주고받았으면 해요. 아직도 코로나가 끝나지 않아 여전히 불안하시지요. 우옥영 : 불안, 초조, 긴장, 된장 간장의 연속! (박장대소) 김미경 : 뭐랄까. 내 생활이 박제된 기분입니다. 하루하루가!!! 그래도 이런 독서 모임이라도 있어서 퍽 다행이지요. 큰 위로와 삶의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 듭니다. 아마 이런 때를 대비해서 이런 모임을 만들어 둔 것 같아요. (웃음) 여기 오면 마음이 엄청 맑아지고 내가 지금 살아서 숨 쉬고 있구나! 하고 생각해요. 의상대사 : 미경 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갑자기 팔팔해집니다. (웃음 진동) 우병훈 : 저도 그래요. 그냥 숟가락과 젓가락 하나 얹어놓을게요. 세상 그 어느 모임보다 맘 편한 모임인 것 같아요. 천국이 따로 없어요. (웃음) 참 잘 들어왔다는 생각, 자주 해요. 달콤하게 ~~ ㅎ 한 달에 꼭 책 한 권씩 잊지 않고 읽게 하고 문학답사도 가게 하고. 참 행복합니다. 만나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맘속에 쌓였던 스트레스도 날아가고. 차 한 잔씩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어느새 내가 말끔히 정화되어 가슴이 시원해집니다. 권화빈 : 아이고, 좋은 말씀 다 하셔서 제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요! 저도 여기에 오는 날이면 왠지 아침부터 맘이 설레집니다. 꼭 금모래 반짝이는 강으로 봄 소풍 가는 기분입니다. 그럼 이제 슬슬 동시집 이야기 좀 하기로 해요. 긴장은 푸시고 맘 편히 동시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보도록 해요. 이 시집을 다 읽고 마지막 쪽을 덮을 땐 괜히 맘이 애쪼근해지고 한편으론 잔잔한 웃음이 번져나게 하기도 하지요. 갑자기 팝콘 같은 게 떠올라요. 경쾌해진다고나 할까. 뭐 그런 것 같은 게 느껴집니다. 시를 읽는 재미도. 아마 이때가 내가 가장 행복해지는 시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의상대사 : 예. 저도 김밥 챙겨 나들이 가는 것 같아요. 아직도 가슴이 콩닥콩닥 멈추지 않아요.
- 2021-07-01
[단편소설] 새 이야기 김화진 내가 아는 어떤 빈티지 옷가게에서는 정기적으로 옛날 영화 상영회를 열곤 했다. 옷가게 손님들이 각자 음료와 다과를 가져와 조용히 먹으면서 빔프로젝터로 빈 벽에 쏘아 주는 영화를 보는 시간이었다. 가게 벽에는 그 주 상영작을 적은 에이포 용지가 붙어 있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사랑의 블랙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그런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첨밀밀〉을 상영하던 날,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천희가 앉아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갈까 하다가 천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상한 부분에서 우는 나를 천희가 흘깃흘깃 보는 게 느껴졌다. 손수건을 꺼내 주려나? 싶었는데 주지 않았지. 대신 천희는 자신이 가져온 간식을 건넸다. 사또밥이었다. 후에 사또밥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영화를 보는 도중에 너무 아삭거릴 과자를 제외하고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나도 쥐고 있던 젤리 봉지를 내밀었다. 내가 챙겨 온 간식은 마이구미였다. 천희는 옷을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우리가 만난 그 옷가게는 천희의 회사에서 멀지 않았고 또 영화를 상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업사이클 제품을 팔기도 해서 관심을 가지고 자주 들르곤 한다고. 무엇보다 예쁘잖아요. 걸려 있는 빈티지 셔츠들을 손으로 차르르 쓸며 천희가 말했다. 그 순간도 잊을 수가 없다. 천희에 관해서라면. 잊고 싶지 않은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천희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을 때 친구들은 얄궂게 굴었다. 빈티지숍에서 처음 만나서 같이 영화를 봤다고? 우우…… 그리고 단호했다. 뭐 하는 사람이래? 옷 만든다고? 게이 아님 양아치네. 나는 당황해서 그저 천희 욕하지 마…… 했다. 친구들 말이 맞을까 봐 떨려서 그랬다. 친구들은 다시 물었다. 영화 보고 뭐 했는데? 떡…… 나눠 먹었어. 떡? 떡을? 먹기만 했어? 너무 걸쭉하다 너희…… 나 말 안 해 이상해……. 얘기해 봐. 그럼 먹기만 했지. 백설기. 속에 흑설탕 든 거. 달았겠다. 맛있었겠다. 출근한 지 30분 이내에 이루어지는 직장인들의 카톡은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간다. 나도 그랬다. 출근을 무사히 하고 나면 천희 생각을 시작했다. 사또밥과 젤리를 먹으면서 봤는데도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배가 고팠고 저녁을 먹기에는 시간이 애매하게 늦어 옷가게 사장님이 마침 옆 건물에 새로 가게를 연 사장님이 넉넉히 주셨다며 나눠 준 백설기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눴다. 옆방에서 재봉틀 작업을 좀 할 테니 편히 계시다 가시라고, 상냥하게 안내해 준 사장님은 사라지기 전 영화를 보기 위해 꺼뒀던 음악도 다시 켜주셨다. 어둑어둑한 가게 한쪽 살롱 공간에서 재즈가 흘러나오는데 천희하고 나란히 앉아 백설기를 뜯어먹었다. 그날 천희는 데님 점프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멋있었다. 회사 근처에 살고 자주 이 동네를 산책한다고 했다. 나는 천희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 김화진
- 2021-07-01
[창작 - 그래픽노블]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동병상련 강 산 작가소개 / 강산 만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문장웹진 2021년 7월호》
- 강산
- 2021-07-01
돌아가는 나비 이서영 사람이 죽으면 빚이 다 청산되는 거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니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한쪽이 죽으면 된단 말이지? 다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비행기는 이륙하고 있었다 발끝을 오므리고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설 수 있을까 눈을 꼭 감았다 떴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팡 터뜨렸다 누군가 알려준 우스운 요령들 전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면 꼭 날아가는 형식이 아니어도 괜찮아 그냥 아무거나 이런 식이 아니면 좋겠어 작아지는 집들을 바라본다 멀어지는 자동차들 저 많은 길들 아 그리울 바닥들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았다 무엇인가 정리해야 할 것이 있는 것처럼 손가락 열을 다 접고 어쩌면 아무것도 변할 리 없겠지만
- 이서영
- 2021-07-01
[단편소설] 그래비테이션 윤치규 어느 집안에나 아웃사이더가 한 명쯤 있다면 우리 가족 중에는 작은누나가 그런 역할이었다. 어렸을 때 우리는 미용실에 딸린 방에서 네 형제가 함께 지냈는데 그 방은 누군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 다 함께 리듬을 탈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다. 그렇게 밀도가 높은 공간에서는 아주 작은 충돌도 곧 폭발로 이어졌다. 불이 꺼지면 졸리지 않더라도 잠드는 게 그 방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하지만 작은누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고 가끔은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지겨워. 목적어가 없는 그 한마디는 모두의 잠을 달아나게 했다. 그렇게 불이 다시 켜지고 큰누나와 형이 화를 내면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몸을 모로 돌리고 누워 잠든 척 끝까지 눈을 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은누나는 곧바로 집을 떠났다. 혼자서 학비를 벌며 대학교 기숙사와 하숙집을 전전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굳이 혼자 사는 걸 고집했다. 가족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저 함께 있는 게 불편할 뿐이라고. 우리가 자신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그냥 자신이 괴로움을 느끼는 거라고. 타인은 반드시 어떤 행동을 통해서만 자신을 괴롭힐 수 있는데 가족은 존재만으로도 그럴 수 있다고.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작은누나는 집을 떠난 게 아니라 쫓겨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작은누나는 언제나 가족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했지만 모든 중대사마다 우리와 함께 있었다. 큰누나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라든지, 아버지가 결국 객사했을 때, 형이 군대에서 폭행 사건에 연루됐을 때, 그리고 어머니가 폐암 선고를 받았을 때도 어느새 돌아와 둘째의 책임과 역할을 다했다. 그래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연락이 완전히 끊겼어도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여기며 지금이라도 부디 원하는 대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랐다. 작은누나의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날 찾아와 중력파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정말로 그런 마음뿐이었다. “중력파를 이용하면 우주 전역에, 아니 그 이상을 넘어 전혀 다른 차원과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대요. 중력파는 그 모든 곳에 어떤 저항도 없이 퍼지니까요.” 그는 작은누나와 연인이었다는 걸 증명하려고 사귈 때 찍었던 사진을 내게 몇 장 보여주었다. 딱히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그동안 작은누나가 만났던 사람들과 너무나도 비슷한 분위기라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누나와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동생인 내게 인스타그램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다음 날 곧바로 회사 앞에 찾아올 만큼의 미련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저는 할 만큼 했어요. 설득도 해보고 화도 내고 다 해봤어요.” 그의 말에 따르면 작은누나는 중력파를 통해 다른 차원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한 단체에 빠져 있었다. 그는 내가 따지지도 않았는데 그런 사이비 단체에 빠진 건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변명부터 했다. 그건 어쩐지 내게는 익숙한 장면이었다. 작은누나와 사귀었던 사람은
- 윤치규
- 2021-07-01
[리뷰 - 그래픽노블]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오늘의 그래픽노블 이야기 1 - 열세 살부터 시작되는 여성 생존 보고서 김유진 1. 열세 살의 여름 바다와 겨울 반달 『열세 살의 여름』(이윤희, 창비, 2019)에서 시작하자. 『열세 살의 여름』은 제목대로 6학년 여름방학부터 시작해 겨울방학에 끝나는 사랑 이야기다. ‘1998년 여름’이라고 첫 문장에서 밝히고 있으나 작품에서 자전적 성격이 강조되고 있지는 않다. 2021년의 열세 살이 아닌 1998년에 열세 살이었던 이야기가 지니는 의미는 다른 데 있어 보인다. 1998년의 열세 살에만 집중한다는 것. 그러므로 1998년의 열세 살로 2021년의 열세 살을 넘겨짚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1998년의 열세 살과 2021년의 열세 살은 책 어디쯤에서 반드시 만나리라는 것. 20여 년이라는 시간 차이로 그때의 열세 살과 지금의 열세 살은 다르겠지만, 열세 살은 열세 살이어서 같기도 할 테니까. 다른 점과 같은 점을 동시에 가진 얼굴로 마주할 것이다. 여름방학 때 우연히 바닷가에서 만나 천천히 서로에게 밀려드는 해원과 산호의 마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 교차로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우진과 려희의 마음. 매 갈피마다 섬세하게 그려낸 이 마음들은 지금의 열세 살에게도, 이십 년 전의 열세 살에게도 비슷해 보인다. 그렇게 이 작품은 지금의 열세 살과 서른세 살에게 동시에 다가간다. ‘1998년 여름’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열세 살의 연애라 하면 종종 풋사랑으로 여기고 만다. 성인이 된 후 사랑과는 다른 경계에 두고, ‘첫사랑’이란 단어로 이상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이 그려내는 사랑은 생생하고 진지하다. 사실 사랑이라 부를 만한 마음은 언제나 그러했다. 가장 처음 시작된 사랑이라고 해서 그 마음이 오롯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열세 살을 무엇에든 오롯할 수 없는 나이라고 보는 편견에 가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열세 살의 사랑이 오롯하다면 열세 살의 불안과 공포와 고통도 마찬가지다. “열세 살,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겨울까지 반년 동안 나는 지하 계단 아래 반달 모양의 무대 뒤에 있었다.” 『반달』(김소희, 만만한책방, 2018)의 첫 문장이다. 이 책 역시 열세 살의 이야기지만 똑같은 열세 살을 보내고 있지는 않다. 송이는 ‘카시오페아’라는 이름의 지하 ‘라이브 노래 주점’, 반달 모양 무대 뒤, 작은 창고에 산다. 주점을 운영하는 엄마가 밤새 손님들의 안주를 만들 동안 송이는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무대 뒤 창고에 꼭꼭 숨어 잔다. 송이의 반달은 옛 동요에 나오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인 반
- 2021-07-01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공정과 인정, 그리고 감정〉― 이미상 소설을 중심으로 박서양 1. 능력주의와 감정의 종속 2021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공정’과 ‘능력주의’ 담론은 한정된 자원의 바람직한 분배를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를 점하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자녀 입시 비리 의혹과 더불어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논란, 공공의대의 설립 반대 사태 등 공정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여전히 그 합의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입시, 취업, 인사 평가, 임금 및 근로조건의 결정 등 생애 주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이 공정이라는 잣대로 판단되며, 불평등의 심화로 인해 분배의 몫 자체가 줄어든 상황에서 공정성에 대한 높은 민감도는 때로 절차와 형식의 공정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거나, 차이를 둘러싼 적대심이나 박탈감 등의 태도로 표출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청년 세대는 공정의 가치를 드높이며 능력주의를 철저히 체화하면서도 대안적 사회질서를 상상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집단으로 재현된다. 잘 알려져 있듯 능력주의(Meritocracy)는 영국의 철학자 마이클 영이 이론화한 것으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배분하는 보상 시스템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의 분배 질서가 어떠한 개인의 ‘특정’한 자질을 ‘특별’한 능력으로 규정하는 방식을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사회가 특정한 자질에 인정을 부여하는 기준에 따라 어떤 능력은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어떤 능력은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능력을 규정하는 잣대는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나 사회적 필요에 의해 구성되고 선택되는 것임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 능력주의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능력의 발생적 기원은 크게 언급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의 질서만을 따지는 맹목적 사고는 사회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지위와 서열의 순서가 능력에 따른 가치의 절대 지표라는 믿음을 재생산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사회의 보상 기준 자체가 능력 그 자체를 판단하고 가늠하는 기준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능력은 누가, 어떠한 기준으로 규정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일은 지금의 상황에서 유의미하지 않을까. 이미상1)의 소설 속 인물들 이러한 능력의 규정성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이와 같은 맥락 속에 내재된 모종의 불평등한 구조를 가시화시키고 있다. 1) 본고에서 다룰 이미상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하긴」(『2019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
- 박서양
- 2021-07-01
[단편소설] 나는 나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 채 정 무대 조명은 눈부셨다. 손을 투영시키면 뼈마디가 비칠 듯 강렬했다. 박은 얼마 전에 찍었던 엑스레이를 떠올렸다. 흑백필름에 찍힌 어깨뼈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다른 뼈를 누르고 있었다. 의사는 너무 오래 방치했다고 말했다. 투명한 컵에 담긴 얼음 알갱이가 부딪쳤다. 박이 뒤를 돌아보았다. 박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청년이 무대를 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박은 청년의 손에 들린 음료에 온통 신경이 갔다. 흥분한 청년이 움직일 때마다 음료가 박의 어깨를 스쳤다. 통증으로 인해 박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고통 앞에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우리나라 만세 후렴구를 장송곡처럼 느리게 시작한 「애국가」는 곧 귀를 찢는 록(Rock)으로 이어졌다. 빠르고 강렬한 비트에 귀가 먹먹했다.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은 박수와 환호로도 모자라 몸까지 흔들었다. 밝고 환한 웃음, 그늘 없는 그들의 표정, 생동감 있는 몸짓까지……. 이 모두가 박에겐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군중의 환호에 음악은 극으로 치달았다. 박을 발견한 총무가 손을 흔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빈 의자를 가리켰다. 박은 총무를 외면한 채 무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박의 꽉 다문 입매는 몹시 예민했다. 사람들의 환호에 가수가 무대 아래로 내려섰다. 등 뒤에서 쏘는 조명 앞에 선 가수는 깜짝 마술을 부리듯 시야에서 사라졌다. 작은 일에도 쉬 목이 타고 현기증이 이는 계절이었다. 오월은. 강한 기시감에 박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정신 차려!” 총무가 박을 흔들었다. 박이 고개를 들었다. 박은 애초에 이 자리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총무는 박을 앞에 내세우길 좋아했다. 몇 년 전, 간첩단에 몰렸던 사람들의 보상 문제가 다시 거론되고 박이 매스컴을 탄 뒤부터였다. 박은 자잘한 행사 때마다 불려 다니는 것이 싫었다. 잊고 싶은 기억을 헤집어 놓는 것 같았고, 불분명한 명목에 휩쓸리는 것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목줄에 매달린 듯 불편했다. 박이 총무의 옆자리에 앉았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박의 옷차림은 눈에 띄었다. “옷이라도 좀 챙겨 입지.” 총무가 자신의 연회색 양복을 매만지며 말했다. 총무의 노란색 넥타이가 봄 햇살처럼 환했다. 박은 급한 주문을 마치고 오느라 미처 갈아입지 못한 자신의 옷차림새를 훑었다. 일하기 편해서 입은 등산복과 운동화에 먼지가 부옜다. 투덕투덕 옷에 붙은 먼지를 털었다. 무대의 강한 불빛에 먼지가 부유했다. 「애국가」가 끝나자 다음 곡의 자막이 대형 스크린에 떴다. 목련꽃이 한낱 목련꽃이 진다 해도 무에 그리 그리 슬프랴 피었다가 피었다 지는 것이 어디 목련꽃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꽃보다 더 하얗고 순결한 영혼 영혼들이 꽃잎처럼 아프게 떨어진 것을……. 열여섯의 소년이 쓴 시에 곡을 붙였다는 「목련이 진들
- 채정
- 2021-07-01
[단편소설] 프렌치프레스 이서안 롱 테이크(Long take) 이팝나무 가지 사이로 짙푸른 호수의 물빛이 드러났다. 롱샷의 화면처럼 물새 한 마리가 천천히 선을 그으며 지나갔고 게으른 바람이 잠시 시선을 흔들었다. 이 씬을 볼 때마다 장은 한낮을 정신없이 태우다 지쳐 스러져 가던 캘리포니아의 그늘진 바다가 떠올랐다. 각인된 기억에는 그 어느 누구도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풀어 놓을 듯 장의 기억은 또렷했다. 오늘도 그는 어김없이 각도 하나 틀리지 않고 평소 앉던 자리에서 창을 통해 이 경치를 직시했다. 옅은 태양은 벌써 산언저리를 물들였고 숲의 짙은 장막은 호수 아래로 드리웠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휑한 카페에는 직원들이 뒷정리로 바빴고 빈자리에는 기약 없는 시간의 타종이 울러 퍼졌다. 오후 5시 35분, 폐점 시간 25분을 남겨 두고 여러 사람이 가려진 식물 잎사귀에서 보였다 가려졌다. 장은 일순간 어린 시절의 숨바꼭질이 떠올라 속으로 피식 웃었다. 카페가 문을 닫으면 에어컨이 멈춤과 동시에 히터가 가동돼 환풍기와 함께 실내공간을 누빌 거였다. 사람들은 그 변화를 사소하게 여길지 몰라도 잔뜩 움츠렸다가 다시 잎사귀를 늘어트릴 녀석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임에 틀림없었다. 수목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하기 위한 배려라지만 장은 하루 종일 냉기에 혹사당한 식물들을 생각하니 정수리가 찌릿했다. 카페가 자리를 차지하기 전 이곳은 열대식물로 빽빽했던 식물원이었다. 위에서 결정 내린 사항이라 받아들여야 했지만 공간의 변화로 인한 대가는 언젠가는 치르게 될 터였다. 호숫가를 따라 빛의 잔영들이 서늘한 유리에 실루엣처럼 아른거렸다. 그러면서 30분 동안 이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자신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년간의 수목원 폐쇄조치는 생태계를 눈부시게 바꾸어 놓았다. 인간의 발걸음이 뚝 끊어진 곳에는 언제든 식물과 동물의 무한한 안식이 누려졌다. 어떻게 보면 자연은 내버려두는 게 보존과 회복을 더 빨리 돕는 거였다. 그 바람에 장도 꽤 큰 실적을 건질 수 있었다. 페이드인(Fade in) 먼 산을 타고 내려온 바람 한 줌이 장의 볼을 가볍게 스쳤다. 동풍이었다. 지난주부터 바람의 세기가 잔잔해지면서 급격히 포근해졌다. 주변이 온통 기지개를 켜듯 바람에 한껏 들떠 순식간에 숨죽이던 모든 게 아우성칠 것 같았다. 백신이 공급되면서 사람들은 맑은 공기에 목말라했다. 생존 전투를 겪어 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갈구하는 이들은 생명 공급을 절실히 느꼈기에 떼거리 지어 밀려올 거였다. 사람들로 가득 찰 수목원을 생각하자 그의 머릿속에 종내 바빠질 일정이 그려졌다. 유리천장까지 솟은 종려나무 가지 아래로 은엽 아카시아가 유리 전체를 에둘러 가지를 뻗어 나간다. 초록과 노랑의 조화는 마침맞게 싱그러움을 선사했다. 개점 시간에 맞춰 들어온 관람객들은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봄의 제전을 알리는 노랑의 속삭임에 탄성을 자아냈다. 조경을 맡은 담당자들의 섬세한 배치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인생 사진을 안겨 주
- 이서안
- 2021-07-01
베란다 숲 기억 남수우 1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말란 말은 썩 괜찮았다 단추는 빛나다 사라지고 내게는 빈 들판이 남았다 그곳에서 내 뒤를 밟으며 사냥감들은 여러 날을 살았다고 한다 빈손을 보고도 말이 없던 마망 숲을 흔들며 쌀뜨물 같은 안개를 흘려보내던 마망은 어느 날 자신의 녹슨 총구를 닦고 있었다 그날 마망이 겨눈 사냥감들이 새벽 내도록 내 발 앞에 척척 쌓여만 갔다 2 내가 태어날 때 마망은 울고 있었다 그날 움켜쥔 소맷자락이 손금으로 남았는데 어린 내가 어린 숲에서 주워온 것들을 하나씩 펼쳐 보였다 마망, 여기 반짝이는 것들을 봐요 마망은 차갑게 식은 총구를 고쳐 매며 네가 어른이 되어서도 이 숲은 자라야겠구나 내가 다 자라 숲을 떠맡았을 때 마망은 노을을 끌고 맴을 돌던 기억이었다 3 여기 내 빈손을 좀 봐요 이제 이곳은 나 혼자 말하고 나 혼자 태어나는 그늘 잠자는 녹색 그림자 죽은 가지를 매달고 달리는 이파리들이 두 손을 펼쳐도 드릴 게 없네요 밤에는 양털 언덕을 이마 끝까지 끌어 덮었다 4 단추를 채우던 내가 공터를 늘리는 동안에도 나무는 서서 죽는다 들판을 가로지른 검은 새들이 숲으로 뛰어들어 날개를 버리고 날갯짓을 버리고 꽃대처럼 흔들리면 총소리는 오래오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빈 가지에 걸터앉아 내가 말했다
- 남수우
- 2021-07-01
[느린 기린 큐레이션] 〈느린 기린 큐레이션〉 2021년 7월(문학 동인 - 시) 조시현, 조온윤 안녕하세요, 7월의 〈느린 기린 큐레이션〉입니다! 지난 6월의 소설가 동인 편에 이어서, 이번 7월에는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동인을 조명해 보았어요. 저희가 두 번째로 만나 본 동인은 이름처럼 문학으로 세상의 가려진 면면들을 밝게 켜 가는 시인과 평론가의 문학 동인 ‘켬’입니다. 켬 동인으로는 지난해에 연달아 첫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던 이서하, 이소연, 주민현 시인, 그리고 남다른 기억력과 섬세함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전영규 문학평론가가 함께 활동하고 있어요. 에코페미니즘과 같이 비슷한 관심사를 주제로 하는 ‘쓰레기 낭독회’, 문학주간 작가스테이지 ‘지구가 멸망해도 우린 명랑할 거야’ 등등 여러 문학행사를 기획하고 열기도 했죠. 마침 생일을 맞은 켬 동인이 있어 더욱더 기쁜 날이기도 했던 유월의 어느 날에 네 분 작가님을 만나 그동안 궁금했던 이야길 나눠 보았습니다. 문학이라는 스위치로 불을 켜요, 문학 동인 ‘켬’ 켬 동인의 로고. Q. 켬 동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바쁘신 와중에 네 분 모두 인터뷰에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 장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인을 취재하겠다고 하니 주변에서도 켬을 가장 먼저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먼저 돌아가면서 한 분씩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소개와 함께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간단하게 근황을 얘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주민현(이하 민현) : 저는 켬의 ‘러블리’ 시 쓰는 주민현이에요. 작년에 첫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를 출간하였고, 요즘은 회사 다니고 시 쓰며 집 근처 ‘마을회관’이라는 독립 서점에서 한연희 시인과 이런저런 작은 행사나 모임을 기획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답니다. 이서하(이하 서하) : 안녕하세요, 저는 켬의 ‘깜찍이’ 시 쓰는 이서하입니다. 저도 작년에 첫 시집 『진짜 같은 마음』을 출간했고요. 소연 언니와 민현 언니의 첫 시집과 나란히 나오게 되어서 더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예술은 전문적이지만 경제 활동으로 봤을 때는 그 전문성이 가려지는 것 같아요. 그런 고민을 한참 하던 때에 예술교육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3년차가 되었습니다. 이소연(이하 소연) : 네, 켬의 ‘귀요미’ 시 쓰는 이소연이라고 합니다. 저는 요즘 활동 반경이 도봉구와 노원구에 한정되어 있어요. 그래서 켬이 정말 사랑하는 동인인데도 불구하고 요즘엔 김은지 시인과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같은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기도 했고요. 작년에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라는 시집을 냈어요. 그렇게 시집이 나오고 나니까 상주 작가로 활동할 수 있게 돼서 고정적으로 수입이 생겨서 여러 가지 기획을 하고 있어요. ‘발굴문학&rs
- 2021-07-01
[단편소설] 수영장 이소정 판을 다시 만난 곳은 수영장이었다. 그곳에서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마치 물속에 표지판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수영장은 구 소방서를 개조해 만든 청소년수련관 안에 있었고 담쟁이넝쿨이 화상 환자의 핏빛 거즈처럼 건물의 반을 덮고 있었다. 판은 늘 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소방서가 옮겨간 것이 그것 때문인 것처럼 말했다. 더럽게 불을 못 끄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묻자 판은 그냥 알아요, 나는, 이라고 말했다. 한번은 세상의 모든 소방관들에 대해 생각할 때도 있다며 내 어깨를 쳤다. 해봐요, 라고 했다. 나는 소방관이 아니었다. 될 마음도 없었다. 체력 테스트가 문제구나, 라며 판은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대신 판과 함께 담쟁이넝쿨을 바라보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다. 차마 구하지 못한 사람과 목숨은 구했지만 인생의 절반을 날려버릴 만한 흉터가 남은 사람 중 누가 더 그들의 마음을 찢어 놓을까 궁금했다. 생각을 하는 동안 계절은 또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고 있었다. 담쟁이넝쿨은 불타올랐고 종종 우리는 영영 구조되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그 앞에 서 있었다. 수영장은 오래된 지린내와 소독약 냄새의 완벽한 콜라보였다. 월요일은 문을 닫았고 자유 수영은 이천 원이었다. 수영강습이 많은 주말에는 입장이 제한된다는 안내판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료였다. 우리는 항상 입장이 가능했다. 그냥 그랬다. 평일이라 한산하군. 평일의 수영장은 한산했고, 마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닥은 일관된 하늘색 타일의 지루한 동어반복 같았다. 수영장 물은 늘 사분의 삼쯤 차 있었고 약간 따뜻할 정도로 데워져 있었다. 수영장 물을 도대체 언제 가는지에 대해 판과 실랑이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이라고 했고 판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라고 했다. 우리는 자주 그 일로 싸웠는데 그때마다 물어볼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우리는 하루 정도 작정하고 수영장에서 밤을 새울 계획도 갖고 있었다. 별이 뜨면 수영장이 천문대 같을 거야, 판은 신이 나서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별관 수영장 천장은 거대한 돔이었다. 돔은 반구형으로 된 지붕이나 천장을 말했지만 나는 돔을 말할 때면 늘 물고기가 떠올랐다. 수영장을 볼 때도 그랬다. 그건 『우리나라의 물고기들』이라는 책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책을 쌍둥이에게 읽어 준 적이 있다. 생각보다 자주 그랬다. 『우리나라의 물고기들』의 구성은 단순했다. 참돔, 감성돔, 돌돔, 자리돔처럼 같은 종에 대한 사진을 주고 그 옆에 간략한 설명과 삽화를 곁들이는 식의 담백한 책이었다. 돔은 가시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그런 것처럼. 수영장에서는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말해야 했다. 목소리가 울려 왕왕거렸다. 이런 얘기를 그때 쌍둥이에게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의 판처럼 못 들은 척했을까? 나는 이제 그 일을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내 옆에는 대답 없이 돔 모양의 천장을 바
- 2021-07-01
Beautiful Stranger 신이인 돈 많은 영감탱이에게 편지를 쓴다 사탕 내놔 너네 가게 돈도 많으면서 줬다 뺏는 게 어디 있냐 한번 줬으면 구기고 다시 쓴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두루 평안하신지요? 덕분에 저는 오늘도 눈과 입이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장님의 제과점은 우리 마을의 명물이지요 이렇게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단종된 품목에 관해 여쭙고 싶어서입니다 예 그것이지요 잘 아실 겁니다 환각 버섯이 들어가고 껍질을 깔 때마다 색이 바뀌는 사탕이요 촌스럽지 않게 슬퍼했고 기쁘면 톡톡 튀었습니다 이해받지 못할 얘기를 좋아했고요 뒷맛은 천진하고 또 술 비슷했어요 여름에 잘 어울리고 축제에 잘 어울렸던 아니 사탕이 있는 곳이 곧 축제였던 그것은 제 첫 사탕이었습니다 사탕이 이렇다는 것을 처음 알아버린 거예요 (맞아요 저는 환자입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거 사장님도 아시겠죠 그러니까 그런 사탕을 만든 거잖아요) 혀가 세 갈래로 갈라지는 병이 있잖아요 어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고 또 어떤 이들은 학창 시절에 그렇게 되기도 하고요 어른이 되어서야 혀를 갈라뜨려 보고 놀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그걸 병이라고 한다네요 아무튼 한번 환자가 되면 단맛을 느끼기 쉽지 않으니까요 더 정확히는 이런 겁니다 달다는 게 달지 않고, 때론 떫고, 그런데 이상하게, 먹지 말라는 게 달아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개미를 주워 먹다가 아빠한테 들켜 머리를 맞았습니다 목조 건물의 벽을 핥다가 경비인을 기절시켰습니다 방문을 잠그고 주머니에서 쥐 발톱을 꺼내 허겁지겁 삼키는데 누가 보고 있을까 간담이 서늘해졌다가 서글퍼졌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 거울을 보고 입을 벌리면 괴물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환자라면 누구나 이런 기억을 갖고 있지요 그래서 대개는 군것질거리에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당신은 만들었던 겁니다 유리 조각을 벽과 벽지 사이의 곰팡이를 책장에서 기어 나오는 반투명한 벌레를 싱크대 뒷면에서 잊혀진 채로 있던 파리 알들을 먹으면 죽는다고 소문났지만 사실은 안 죽는 울긋불긋 버섯들을 넣어서 아름다운 사탕을 만들었습니다 화려했어요 이상했어요 내가 몰래 먹던 것들이 과자 가게에 나왔다는 게 예쁘다는 게 인기가 있다는 게 문전성시를 이루는 제과점에 슬쩍 줄을 서서 나도 과자를 즐기는 사람인 척 해보았습니다 일부러 다른 초콜릿이나 쿠키를 집었다가 놓기도 하면서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 티 나지 않게 끼어들면서 사탕을 샀습니다 달았습니다 아무도 제 병을 모를 것 같았어요 희한하게도 그건 평범한 사탕처럼 보였거든요 조금 개성적인 그렇지만 그래도 사탕인 돌려주세요 제발 그렇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지요 저도 알아요 그렇지만 돌려달라고 떼라도 쓰고 싶은 걸 어떡하나요 영감탱이야 나는 매일 기도했어 당신이 행복하기를 그러나 당신은 늘 행복하였고 그 사실은 우리의 행복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불행이 구구절절 길어져 당신의 불행에 닿기를 바라기 시작했던 거야 재수없게 진짜 싫다 이게 네 업보다 사람들에게 멋대로 마약을 팔아버린 죄 입맛
- 2021-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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