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마음
- 작성일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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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마음
백아온
선생님은 내 얼굴에 흰 천을 씌워 주며 말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온 편지는 함부로 뜯어 보지 말아요.
50분짜리 모래시계가 뒤집혔다.
*
열차는 어딘가를 지나치고 있었다. F열 13번 좌석에 앉아 소설의 도입부를 읽었다. 작가는 첫 페이지에 이 글은 20년 뒤, 사랑하는 딸에게 바치는 일기라고 했다. 작가는 딸이 자신을 ‘엄마’라고 불렀던 순간을 환희와 슬픔에 빗대서 쓰고 있었다. 마지막 줄엔 자기가 불행한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 열차는
바다와 숲과 절벽을 지났고
식물원에 다다랐을 때 쏟아지는 잠.
그때 선생님은 원래 있던 모래에 모래를 덧대었다.
먼 과거를 쓸어내리는 모래.
*
아이가 엄마에게 고래는 어떻게 울어요? 물었다. 고래는 푸우- 하고 울어. 푸우- 푸우- 푸우- 그렇게 고래 울음을 따라 우는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 밑에 숨은 아이가 보였다. 엄마가 아끼는 화분을 깨뜨린 아이는 겁에 질려 있었고
푸우-
푸우-
푸우-
*
난 찢어진 몸에 다른 말을 새겼어. 늘 그렇게 해 왔으니까. 당신은 나를 보고 말했잖아. 아름답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아니면 다른 말이라도. 당신도 내가 어떻게 될까 봐 두렵거든. 바다에 가면 모두 비겁해지는 거야. 당신은 내게 달려오지 않았지. 다그쳤지. 나를 안아 주질 않았지. 울지도 않았지. 조금도 머물러 주지 않았지.
이제 모르게 될 거야.
날짜를.
문제를.
피부를.
당신은 절대로 나를 도울 수 없지.
식물이 단단해지는 순간을 알고 싶어. 나는 매번 죽이기만 하니까.
*
식물원을 오래 비우면 안 됐다. 적당한 온도를 맞춰 놓고 매일같이 잎사귀를 살펴보고, 분갈이할 때는 식물에 금이 가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사람들이 많이 오는 날이면, 식물원의 조명이 나갔다. 두 시간에 한 번씩 조명을 점검했고 때로는 등을 갈았다. 모든 게 유리로 된 것들이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내가 유리 식물원에 살게 된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었다.
*
오피스텔 603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는 아이. 열아홉이었다.
소파 뒤에는 큰 창이 있었다. 건물 너머로 붉은 달이 뜨는 걸 남자와 함께 봤다. 너는 스스로 망가뜨린 아이구나.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남자는 커튼을 쳤다. 아이의 몸을 끌어당겼다. 저도 화분을 망쳐 봐도 될까요?
그럼, 물론이지.
아이의 일기장은 증거가 되기엔 부족했다.
거기엔 무한한 사랑만이 있었다.
이건 존재하지 않는 기록.
저는 모르겠어요, 선생님. 말하기 싫어요. 답답해요. 창문을 열고 싶어요.
선생님은 내가 한 말들을 받아적었다. 때로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때로는 밑줄을 치면서.
시간을 조금 더 줄게요.
모래시계가 한 번 더 뒤집혔다.
*
14번 좌석에 앉은 남자로부터 독한 잉크 냄새가 났다. 그가 내릴 준비를 해서 바깥을 봤다. 여전히 절벽이었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남자가 두고 간 신문을 건네주었다. 그는 나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버려 주세요, 했다.
유리 벽을 사이에 끼워 넣은 것처럼
순간들은 계속해서 펼쳐졌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병 속에서 자라는 병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용서받거나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머리칼을 쓸어 주는 손이 가진 온도나 감촉 같은 것들을 떠올리는 중에도
계속해서 쏟아져 내리는 모래.
시간을 초과한다면,
헐거운 시간을 어떻게 당겨야 하는지 생각했다.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고 싶다.
의심 없이 뜯어 본 편지. 알 수 없는 숫자와 기호들.
선생님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어디에 다녀왔나요.
*
입술을 열어 투명한 노래를 꺼내고 싶어.
절망하고 싶다.
여기가 아닌 곳에서.
나는 곧이어 날아갈 테지.
식물원의 유리들이 깨지는 순간을 바라볼 때 노래는 휘어지고 있었다. 조명이 하나씩 꺼졌다. 나는 꺼지지 않은 조명에서 전구 하나를 꺼냈다.
상처에 빛을 쏘았다.
기억과 그 기억을 지우는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어스름한 숲길을 걷는 장면과
진짜 나무들을 오래 바라보는 뒷모습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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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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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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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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