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
- 작성일 2026-04-01
- 댓글수 1
실명
이형초
이 가상안경을 벗으면
방금 본 장면은 신속하게 흩어질 수 있다
호숫가에서 아이가 허우적거리고 작은 배에 탄 여자가 아이를 지나치고 있었다
여자는 방관하고 새들은 사라지고
나의 배도 아이에게 가까워지는 중이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밀도 있게 짜인 숲의 구조와
자연에 속하지 않은 물결 소리와
기계에 대해 생각하느라
아이는 죽어 간다
안경 너머 전시장엔
사람들이 입을 살짝 벌린 채
저것 좀 봐···
벽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고
호숫가의 영상은 작은 유리알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되어서
이러다 우리는 몽땅 깨질 수 있겠다는 생각
아이의 영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에 대해 말하기를 멈출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상상은 안경알처럼 정교해서
두 눈을 가려도 너무 멀리 바라보게 되고
우리는 눈을 자주 잃어버려서
몸도 마음도 어두워진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고, 헤드셋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옆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면 아무도 없다
눈먼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오디오와 함께 작은 배가 거칠게 흔들린다
호수에 빠지는 것이 두려워 몸을 숙인다
진짜 같았어?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해서
흠뻑 젖을 것 같은
안경을 벗은 사람들이 유리문을 활짝 열고
비스듬하게 흩어지는 빛 속으로
화면이 꺼진다
아이가 물밑으로 가라앉고 여자의 뒷모습이 희미해질 때
내가 손을 뻗고 있던 곳은
환하게 열린 문틈
모두가 서로를 비껴가며 인도 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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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 자욱한 날 잔잔하게 내리는 비가 생각나게 하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