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일기
- 작성일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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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일기
조성래
1월 9일, 행복한 날들이 지나간다
1월 10일, 아니, 내가 직접 지나간다
거리의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직접
1월 12일, 2008년 교원동, 어머니 들어
오시지 않던 날, 나는 잠든 동생과 함
께 누워 두려움에 떨다가 문득 먼지 쌓
인 예수상의 가슴에서 초록색의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1월 13일, 관상을 좀 배웠다는 시청자
가 라이브 방송에 출연한 나더러 도깨
비상이라고 했다 도깨비불의 인(燐)ㅡ
외롭고 슬픈 인간은 스스로라도 불빛을
만들어 낸다
1월 16일, 교회들의 첨탑이 피뢰침처럼
뾰족하다 벼락불과 지옥으로 떨어질 영
혼들 끌어모아 천국으로 갈 단 하나의
영혼을 마련하기 위해서일까 그 끄트머
리에 빛 하나 걸어 놓은 윤동주
1월 17일, 어머니가 쓰러졌다, 세상의
좌반구 마비에서 건너오는 천사들이 불
타는 강에 가로막힌 채
1월 18일 그런데도, 불타는 강 너머에
서 불타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살
아갔다 수화기 너머의 당신도 그것을
살아 내고 있는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가 없었다
1월 19일, 순간에서 순간으로 차원 이
동하는 전화가 가득한 사무실의 번잡,
아무 물질도 전달되지 않는 와중에, 누
군가 가만히 눈물을 흘리고 있다
1월 20일, 외롭고 슬픈 인간은 스스로
라도 불빛을 만들어 낸다 불빛은 불안할
때에도 나타나지만, 그 나타남 자체로
또한 안도감을 준다 그렇기에 빛이라고
불리는 그 순간에는 불안감과 안도감이
모두 혼재하는 것이다
1월 22일,
아픈 이들이
건강한 이들을
이해하고
돌아가기 위한
길들은 어디로 나 있을까
1월 28일,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한쪽
장갑마저 다 떨어지고 온 걸 모르는 원
룸이었다 창밖 세상에서야 내 짝이 맞
는구나 오랜 고집 하나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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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박형준 핸드폰을 어디다 두었는데 찾지를 못하겠다 밤 산책을 나갔다가 길에 흘렸는지 풀숲에 앉아 있다가 빠뜨렸는지 고물 자전거를 타고 김포바다에 가 보거나 한강 하류 시골 읍내처럼 생긴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높은 언덕을 올랐다가 내려갈 때 삐걱대는 페달에서 다리를 떼고 속도를 즐겼다 울퉁불퉁한 산길의 초지를 달리다가 핸드폰을 빠뜨려 먹고 집에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대여섯 시간을 되돌아가 기적처럼 핸드폰을 찾아왔다 술 많이 먹던 시절 택시에서 핸드폰을 두고 내리던 때가 생각난다 다음 날 택시 기사와 간신히 내 전화로 통화가 되어 무슨 비밀작전처럼 택시 기사가 지정한 곳에 가서 구멍가게 옆 자판기 밑에 놓아둔 핸드폰을 찾고 사례비를 놓아두고 온 적도 있었지 운이 좋아 소중한 것을 모를 때가 많았다 내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잃을 때야 비로소 내 자신을 투명하게 본다
- 관리자
- 2026-03-01
완화계 박형준 님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종이를 만드네 그 위에 한자 한자 글씨를 쓰네 떠내려가는 물에 종이를 씻네 글씨들이 물에 풀려 완화계 푸른 물에 봄을 불러일으키네 완화계(浣花溪) 거닐며 두보를 닮으려 초막을 짓고 산 두 남녀의 사랑을 떠올리네 그들의 사랑이 새겨진 망강루(望江樓) 올려다보니 누각 사이로 테니스 코트가 보이네 서로 주고받는 공 소리가 연신 울리네 서로에게 전해지지 않는 편지를 쓰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지 누각 사이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테니스공 치는 소리에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잠자리 날개처럼 바스라질 듯 부드럽게 내 손에 잡히네 한 남자는 떠나고 한 여자는 종이를 만들며 그 위에 글씨를 쓴다네 쓰기만 하고 부치지 못한 편지는 완화계 시냇가에 창포 꽃잎으로 흘러가네 * 완화계 시냇가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중국 당나라 시인 설도에게서 착상을 얻었으며 인용 부분은 〈동심초〉 가사 중 일부임.
- 관리자
- 2026-03-01
인노첸시오 8세의 불멸 김혜순 먼지로 흐린 유리창 때문에 밖의 나무도 흐리고 안의 남자도 흐리다 벌레의 주검들로 거무튀튀한 유리창 때문에 피아노 소리도 거무튀튀하고 방안의 남자도 거무튀튀하다 더러운 주전자에 물이 끓고 남자는 주전자가 타도록 일어나지 않는다 전화선은 늘어져 있고 주전자를 태우는 불꽃만은 싱싱하다 검은 연기 속에서 시간을 가득 먹은 파리가 날고 전국의 공중전화 박스들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 흘러드는 연기로 폐는 쿨적거리고 눈물도 쿨적거리지만 그의 핵은 뛰고 있다 때 묻은 나무의 새로 돋은 이파리들은 방을 엿볼 생각이 없다 방의 남자도 밖을 내다볼 생각이 없다 태양이 거머리빛으로 창을 기어가면 창 안쪽에서 해파리들처럼 먼지구름들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인노첸시오 8세는 영원히 살아 있다 먼지로 흐린 유리를 열고 아무도 그를 방문하지 않지만 볼록한 배 검은 진주로 변한 눈동자 그는 나무였으나 기괴한 광물이 된 몸 안에 살아 있다 그의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고 그의 목을 조르는 형광타원형들이 계속해서 천정에서 떨어진다 인노첸시오 8세가 먹은 세 소녀의 피 창밖에 억울한 장미 세 송이 영원히 피어 있다 나는 그의 몇 번째 시녀인가 밤이 오면 등불을 끄고 집을 쪼개는 금들이 몰려드는 것을 그대로 둔다
- 관리자
- 2026-03-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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