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주문서
- 작성일 2025-01-01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419
침묵의 주문서
김도
지금
침묵이 온다.
달이 지나면 없을
팝업 스토어 세 개의
음악이 섞이는 골목길을
밀려가고 밀려오는 각양각색
인간의 파도를 따라
걷듯이 구르는 자동차의
활짝 열린 창문.
지글지글 끓는
베이스. 뿜어져 나오는
다소 동물적인 욕망으로
헐떡대는 노랫말만 골라서
외고 외치는 힙합 아티스트가
밥을 다 먹고
입을 헹군 물도 삼키고
다시 이빨에 끼우는
이빨 모양 금붙이의
반짝반짝.
있을까요? 물어본다. 그럼
끄덕인다. 무조건
다행이에요. 침묵은
흐뭇하다. 또 올게요.
다음에 다시
침묵은 온다.
예식장의 벨루체 홀과
르네상스 홀의 하객이 식사하는 뷔페
스테이크 철판 담당 직원을 마주하고
선 채로 굳어 버린 두툼한 사내 때문인지
유독 느긋하게 익는 여러 소의 살점들은
많이 죽었다. 죽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게
분명하게 살아 있다는 이유로 딱딱하고
화끈하게 떠나가는 종아리의 통증 때문인지
연기 때문인지 왁자지껄 사이사이를 누비는
한복 양복 일행이 오늘의 몇 번째 주인공들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이
두 눈을 꽉 감아도 충분히 어둡지 못한
어두컴컴. 있을까요? 물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있는 것을
침묵께 드린다. 침묵은 듣는다.
미소를 짓고 침묵을 기울인다. 통째로 쏟아
흥건한 침묵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고마워요. 잘 들었어요.
그럼
국도를 달리는 뒷좌석 창문의 보름달은요?
나는 끄덕이고
그럼 도착한 곳에 내려서 듣는 귀신새는요?
끄덕인다. 그러면
지난 전부가 일렁이는 폐허의 겨울 모닥불이 꾸는 꿈도?
쉿.
쉬시시시.
꺼지는 불도?
안 꺼지는 별도
흐릿해지면서 어쨌든
밝아오는 날도?
그럼
침묵은
추천 콘텐츠
길이 깊이 남을 이름 서효인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그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입에 올리며 익살맞고 괴팍하게 군다. 아이야 나쁜 소리는 그만해야지, 조그맣게 타이르다가 이내 그만두고 우리 둘은 시사 프로그램의 패널이라도 된 듯 같이 떠든다. 서로의 말에 말을 붙이며 나쁜 소리 맘껏 한다. 아이야, 그래도 욕은 말아야지, 아까 아빠한테 배운 건데, 아니꼬우면 커서 하든지, 크면 재미있고 나쁜 말을 많이 해야지. 이 말들이 뉴스보다 재미있고 뉴스보다 의미 있는데도 뉴스만 본다. 그런데 말이야,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지. 내 키가 너만 할 때 소풍이라 하면 꼭 상무대에 갔었다. 상무대에는 땅굴 모형이 있었어. 1호 땅굴에 다녀와서 2호 땅굴 모형으로 갔다. 2호 땅굴 모형에 다녀와서 3호 땅굴 모형에 갔다. 그들은 땅굴을 파서 무얼 하려 했을까? 땅굴을 나와 사람을 죽이려 했을까? 총과 칼로? 쏘고 찔러서? 이윽고 땅굴 끝에서 정훈장교가 물었어. 그래서 우리의 주적이 누구라고? 나와 친구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어. 전두환! 아이는 이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딸은 금세 뉴스에 흥미를 잃은 듯 제 방에 숨어 게임을 한다. 언젠가 저 방이 기나긴 땅굴이 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아이에게 너의 주적이 누구인지 아느냐 절대 묻지 말아야지. 아이가 사라졌으니 편하게 뉴스를 볼까. 다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것 좀 보라고. 아이의 땅굴에 조각칼로 판 어떤 이의 이름이 보였다. 그것은,
- 관리자
- 2025-01-01
자신만은 천국에 갈 것이라 굳게 믿는 이들이 모인 지옥 서효인 지상에 빛이 쏟아져 그들의 허연 입김과 몸을 섞었다. 내 할아버지에게서도 같은 냄새가 났었다. 하루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유황처럼 냄새를 뿜었다. 씻겨지지 않는 그것들을 매단 채 모로 누워 텔레비전을 보았다. 천국에 갔을지는 모른다. 그의 장례식에는 동네 교회의 집사와 간사가 여럿 모여 찬송가를 불렀다. 찬양하였다. 불쑥 쏟아지는 빛에 눈을 찡그렸다. 장창을 든 천사가 다가와 서명을 요청하였다. 나는 이름만 적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건지 물었다. 천사는 말했다. 믿는 자는 의심할 자격이 없거늘. 내 할아버지는 끝내 문맹이었으나 이름만은 적을 줄 알았다. 그렇다면 그는 천국에 갔을까. 하나 그는 여기에 없고 믿는 자들에게서는 할아버지의 냄새가 났다. 그들은 사역 중이었다. 일하는 중이었다. 매달려 있었다. 노동을 마친 할아버지는 기도 없이 저녁을 먹었다. 나는 천사의 연명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인지 빌듯이 말아 쥔 손을 인중에 대고 골똘했다. 할아버지는 산업재해로 손가락 둘을 잃었다. 봉합 수술은 실패했다. 스피커에서 천둥이 울린다.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겨울의 빛은 늙음처럼 공정하고, 그 아래에서 천사들의 얼굴이 허옇게 밝았다. 그것은 믿는 자의 얼굴 믿는 자의 찬양 믿는 자의 소문 믿는 자의 믿음 믿는 자들이 어깨를 파닥이니 몸이 지상에서 두 뼘쯤 떠올라 땅에 발이 닿지 않았다. 겨드랑이를 펄럭일 때마다 냄새가 온 세상을 쥐어팰 듯 퍼져 나갔다. 깃발이 펄럭였다. 문득 나는 우리 할아버지 천국에 갔을까. 아니면 이제라도 이름을 적을까. 고민인데‧‧‧ 어디선가 그의 음성 들린다. 저들은 저들의 죄를 모른다. 아니, 안다. 사라진 천사를 찾아 바닥에 코를 대고 개처럼 킁킁거리니 기도하는 자세가 되었다. 지상의 빛이 재가 된 이후에
- 관리자
- 2025-01-01
눈사람 공화국 신미나 눈이 오는 밤에 나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한 움큼의 눈으로 정부를 만들었어요 단 한 개의 초를 에워싼 빛 딱 그만큼의 빛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어둠을 지우는 것은 빛이 아니었어요 더 짙고 광막한 어둠이었어요 열이 백을 타고, 백이 천을 모으고, 천이 백만을 부르는 눈송이 그러니 이 나라에서는 그 누구라도 십자가를 홀로 지지 마세요 시대의 면류관을 씌워 한 명의 영웅을 만들지 마세요 광장에 선 소녀들의 뺨이 붉으니 평범한 하늘, 평평한 땅, 동등한 어깨를 주세요 소와 족제비와 잉어와 곰이 뺨을 부비며 노는 나라 할머니와 장미와 월계수와 소년이 꼬리를 달고 덤불 속에 뒹구는 나라 백 년 전의 민요가 광장의 가요가 되어 울려 퍼집니다 몸의 밑바닥을 울리는 북소리 둥둥 울려 퍼집니다 그때까지 우리 조용히 심지의 불을 키우기로 해요 피가 비치는 하늘 아래 한 번의 숨, 딱 한 주먹의 혁명으로 이룩한 정부를 세워요
- 관리자
- 2025-0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