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 작성일 2025-03-01
- 댓글수 1
폭설
임유영
눈보라 휘몰아친다. 이번에도 문전박대. 너무 매정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을 들이려면 집을 부숴야 하잖아요. 이해해 주세요. 거인은 이해한다. 이해해요. 거인이 말한다. 마을의 마지막 집 앞으로 거인을 데리고 간다. 사람들이 너무 놀라니까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시면 어때요. 어깨가 움츠러든 거인이 걸음을 멈춘다.
(똑똑 노크 소리) 누구세요? 죄송한데 하룻밤만 신세를 질 수 있을지. 들어오세요. 아니, 저 말고 제 친구인데요. 친구가 어디에 있어요? 제 뒤에 있는데 안 보이세요? 안 보이는데. 어, 어디 갔지? 어디까지 간 거야? 아무튼, 여기서 그러지 말고 일단 들어오세요, 눈이 너무 많이 오네. 눈이 정말 많이 오네요. 친구분은 어디로 가셨을까요? 그게, 정말 제 친구인 건 아니고요. 말하자면··· 털쥐하고 곰 중 누가 더 추위에 강할까 하는 문제랄까요. 음, 털쥐가 작으니 금방 얼어 죽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겠지요? 상식적으로다.
해변에 웅크린 거인은 골똘히 생각 중이다. 아마 내가 땅 위의 개미라면, 곰의 발자국을 한눈에 알아보긴 어렵겠지. 알아보긴커녕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거야. 하물며 곰과 마주친다면 어떻겠어?
거인은 손으로 밤바다를 조금 떠서 먹어 본다.
그에게는 무엇이든 아주 조금씩 먹는 습관이 있다.
털쥐가 말했다:
“털이 많다고 추운 곳에 살지는 않는다”라고.
곰이 말했다:
“아무래도 몸이 크면 추워지는 부분도 많지 않겠어요?” 하고.
거센 눈발이 어둠마저 촘촘하게 뚫어 버린다.
거인은 설풍 속에서 잠에 빠진다.
모두 잠든 사이, 구름이 걷히자 환한 달빛에 물과 대기의 입자들이 일시에 마법처럼 빛나며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하지만 달이 서둘러 먹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누구도 그 광경을 보지 못한다.
수천수만의 은빛 바늘이 다각도에서 내려꽂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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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유영
-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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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유영
- 202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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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유영
- 202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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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오래오래 천천히 곱씹어 읽어보고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만약 거인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거대한 존재, 즉 나의 내면이나 감정 또는 무의식이라면.. 그리고 털쥐가 나의 겉으로 드러나는 육적인 모습이라면. 우리들은 자신의 육체적 건강은 잘 챙기지만 내면을 돌아보고 감정을 다독여주진 않죠. 하지만 거인, 곰도 자신의 몸집이 크기 때문에 더 추울 것이라며 집에 들어가 보호받고 싶어 합니다. 감정의 총체이자 깊은 무의식인 밤바다를 조금씩 떠먹으며 자가치유를 하지만 잘 되지 않고요. 심리학을 전공하는 친구가 말하길 무의식은 원래 아주 조금씩 스멀스멀 새어나오는 거래요. 조금씩 밖에 집어먹지 못하는거죠. 결국 보호받지 못한 거인은 폭설 속에서 잠이 들고 우리는 꿈 같은 무의식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놓쳐버리고 말죠. 그래서 마지막에는 바늘같은 빗줄기가 내리나봐요. 너무너무 아름다운 시예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