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전화
- 작성일 2025-07-01
- 댓글수 0
생명의 전화
백아온
나의 사랑은 자살을 선언한 사이보그1)
사이보그는 다시 태어나도 리듬 없이 산다
그래서 내 사랑
날마다 무지개 노끈이 걸려 있는 나무 앞에 선다
노끈이 품은 색색의 가능성
내가 거듭나면 사랑해 줄래?
픽션도 즐겁지 않으니
나의 사랑은 심장을 부풀리고 싶겠다
풍선껌처럼 질겅질겅 씹다가
아스팔트에 길게 늘어져
누군가의 발바닥에 붙어 얼마간 미행을 즐기겠다
차갑지
사이보그는 죽을 수 없게 설계됐다
나의 사랑에게 쥐여 준 에너지
빈방은 폭발할 수 없어서 네 몸을 먼저 통과한다
검은 베일 너머로 전화벨이 울린다
신이 꼭 선해야만 하나요?
괴짜 같은 질문을 하는 나의 사랑은
자기가 정말 괴짜인 줄 안다
싸구려 시가의 단맛을 아는 척하고
나의 안부를 물어보고
날씨를 전해 주고
그렇게 예쁘고 철학적인 자살을 생각한다
이제 나의 사랑은 봄날의 신부가 되어 가볍다
나는 나의 사랑을 뉘앙스 없이도 사랑한다
질 나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우리는 꽃다발을 안고 펑펑 웃고만 있다
우리가 감은 눈꺼풀에
투명한 줄기가 비춘다
노끈의 매듭이 힘없이 풀어지고
전화선이 우리의 이야기를 흘리는 만큼
나의 사랑은 줄줄 샌다
이건 금속이 아니고
이건 쓸쓸하지 않고
사이보그답지 않고
건강한 듯한데
내 사랑
그만 운동화를 신으려고 한다
1) 김행숙,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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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시 최경민 뚜껑을 돌려 내용물을 꺼내야 합니다 온도가 낮은 장소에 두면 성능이 저하될 수도 있습니다 과량 섭취 시 질식의 우려가 있으니 한 알씩 드세요 뒤엉킨 머릿속을 정리하는 기술은 사막이 넓어지는 이유와 같습니다 짐 자무시의 영화를 본 적이 있나요? 별로 아름답지는 않지만 라디오에도 나왔습니다 호주의 검은 따오기는 빈 치킨이라고 부른대요 그리고 양파는 남성명사입니다 여섯 살 아들은 자고 있네요 저도 여백만 정하며 살고 싶은 기분을 알고 있습니다 세 시에는 면도를 하고 이불의 간격을 정리해 보세요 천국이 포함된 안내문은 두 번째 서랍에 있습니다 거의 모든 걸 담을 수 있다는 블록이 있습니다 가볍게 헹궈 준 다음 창가에 말려 주세요 다 마르면 한번 쪼개 보세요 검은 머리에 속은 노란색이라고 합니다
- 관리자
- 2025-07-01
독서 모임 최경민 매일 다른 장소를 열어 보고 있어요 처음 오시는 분에게는 상자가 있습니다 이달의 질문지가 있으니 집에서 작성해 보세요 어디에 내리면 좋겠습니까? : 애인이 사는 해변에 내려 주세요 그는 다시 미치게 될까요? : 캘린더에 날짜를 표시해 뒀습니다 저는 크림색 수정테이프를 좋아합니다 캘린더는 귤 모양 스티커랑 같이 샀습니다 금세기 말 출판계의 위대한 결실 오래된 띠지들은 사건을 모아 두는 통에 담겨 있습니다 책꽂이 옆 옷장을 열면 세계의 모든 체크무늬를 한 번에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린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걸어요 저는 예언에 취미가 있는 사람입니다 주인공은 여름 한정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그는 이국의 해변에서 발견될 예정입니다 묘지 안내원 역할을 맡고 있을 거예요 주인공을 찍은 사진으로 방을 꾸밉니다 계란 껍질에 흙을 담고 물을 줍니다 모종이 배경 역할에 심취해 있습니다 그럼 한번 나가 보시겠어요? 낮게 나는 비행기를 멈춰 세웁니다 출입문 비밀번호는 4736입니다 어디까지 올라가 보고 싶어요? 내려갈 일만 남은 이야기는 인기가 없습니다 흔들리는 컵은 코스터 위에 올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 관리자
- 2025-07-01
열다섯 번의 겨울이 지났다 최현우 여름에 버리지 못할 목도리는 없어 우리는 모든 옷장을 열었다 결심을 부추긴 건 파란 봉투를 소각장에 던져 놓고 돌아오다 본 어딘가 기울어진 집 무너질 듯 비틀거리는 중심축을 뒤틀리게 한 석양의 착시 유행했던 천국들 비만했던 계절들 가장 먼저 버려지는 건 너무 입어 형태를 잃었거나 한 번만 입고 입지 않았거나 어쩌면 한 번도 입지 않아서 영영 입을 수 없게 된 아쉽지 않을까 겨울은 올 텐데 너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가소로운 미련이었다 몸은 하나인데 대봉투 열세 묶음 너무 많이 입고 벗었고 그리고 돌아가지 않았고 몇 번을 왕복하며 버리고 다시 집으로 간다 집이 무게를 회복하기를 바라면서 운명이 더욱 세련되어지기를 바라면서 대문 앞에서 네가 잠깐만, 하고 먼지 낀 손을 놓고 뒤돌아 뛰어간다 소각장 쪽으로 다 없어질 곳으로 내가 본 너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목도리를 하지 않는다
- 관리자
- 2025-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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