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요구
- 작성일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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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요구
여세실
당신은 어느 날 나더러 미쳤다고 말하고 나는 알게 된다 내가 여자라는 것을
어느 날 문득 양배추의 맥박을 알아차리게 된다 입속에 샐러드를 넣고 천천히 씹을 때 사려 깊은 초록의 비명을 듣게 된다 산책을 하다가 발치 앞에 떨어진 꽃 뭉텅이를 줍고 사지가 찢길 것 같아 멈춰 섰다 급소를 걷어차인 구름의 표정을 읽게 된다 어느 날 문득 사슴의 뿔과 나뭇가지의 경로가 같아 보이고 그러다가 우리 집 앞 안양천 물비늘에서 혼잣말의 손금을 읽게 된다
접시 하나가 깨질 때 그 속에서 천둥 벼락을 보게 됨
그런 것을 알아보게 되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도 됨
실격임
일정하고 똑바른 패턴들 아기의 옷에 그려진 비행기는 셀 수 없어서
꾸준히 사랑하려면 더 느리게 뛰기 위해 전념해야 함
물비늘 저것은 동물이다 졸졸졸 포효하는 한 줄기 동물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 입술이 겨울마다 트고 시뻘겋게 뜯어져 피톨이 맺힐 이유가 없다 잠 못 들고 일어나 한밤 내내 나무 옆에 비뚜름히 서서 당신의 가장자리를 녹이느라 두 뺨이 붉어질 리 없다 어느 날 문득 귀가 멀고 눈이 멀 리 없다
구름을 팔려면 양식장에 가두어 한 마리씩 팔아야 할까
다발을 엮어 한 단씩 값을 매겨야 할까
조금씩 말라 가는 동안에도 불을 써서 밥상을 차려 낼 줄 알게 됨 배우지 않아도 칼을 잡는 법을 익히게 됨 계량 없이 양념을 한 줄 알게 됨
그리고 조용히 내 혀를 베고 손모가지를 비틀게도 됨
어떤 의사는 나를 마녀로 진단하고 또 우리 부모는 내가 신을 받은 줄 알고 치성을 드려야 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여자뿐인 여자, 숨길 수 없이 대번에 여자인 것이 탄로 난다
여자이기 전에 먼저 천치가 된 믿을 수 없는 여자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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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시 최경민 뚜껑을 돌려 내용물을 꺼내야 합니다 온도가 낮은 장소에 두면 성능이 저하될 수도 있습니다 과량 섭취 시 질식의 우려가 있으니 한 알씩 드세요 뒤엉킨 머릿속을 정리하는 기술은 사막이 넓어지는 이유와 같습니다 짐 자무시의 영화를 본 적이 있나요? 별로 아름답지는 않지만 라디오에도 나왔습니다 호주의 검은 따오기는 빈 치킨이라고 부른대요 그리고 양파는 남성명사입니다 여섯 살 아들은 자고 있네요 저도 여백만 정하며 살고 싶은 기분을 알고 있습니다 세 시에는 면도를 하고 이불의 간격을 정리해 보세요 천국이 포함된 안내문은 두 번째 서랍에 있습니다 거의 모든 걸 담을 수 있다는 블록이 있습니다 가볍게 헹궈 준 다음 창가에 말려 주세요 다 마르면 한번 쪼개 보세요 검은 머리에 속은 노란색이라고 합니다
- 관리자
- 2025-07-01
독서 모임 최경민 매일 다른 장소를 열어 보고 있어요 처음 오시는 분에게는 상자가 있습니다 이달의 질문지가 있으니 집에서 작성해 보세요 어디에 내리면 좋겠습니까? : 애인이 사는 해변에 내려 주세요 그는 다시 미치게 될까요? : 캘린더에 날짜를 표시해 뒀습니다 저는 크림색 수정테이프를 좋아합니다 캘린더는 귤 모양 스티커랑 같이 샀습니다 금세기 말 출판계의 위대한 결실 오래된 띠지들은 사건을 모아 두는 통에 담겨 있습니다 책꽂이 옆 옷장을 열면 세계의 모든 체크무늬를 한 번에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린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걸어요 저는 예언에 취미가 있는 사람입니다 주인공은 여름 한정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그는 이국의 해변에서 발견될 예정입니다 묘지 안내원 역할을 맡고 있을 거예요 주인공을 찍은 사진으로 방을 꾸밉니다 계란 껍질에 흙을 담고 물을 줍니다 모종이 배경 역할에 심취해 있습니다 그럼 한번 나가 보시겠어요? 낮게 나는 비행기를 멈춰 세웁니다 출입문 비밀번호는 4736입니다 어디까지 올라가 보고 싶어요? 내려갈 일만 남은 이야기는 인기가 없습니다 흔들리는 컵은 코스터 위에 올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 관리자
- 2025-07-01
열다섯 번의 겨울이 지났다 최현우 여름에 버리지 못할 목도리는 없어 우리는 모든 옷장을 열었다 결심을 부추긴 건 파란 봉투를 소각장에 던져 놓고 돌아오다 본 어딘가 기울어진 집 무너질 듯 비틀거리는 중심축을 뒤틀리게 한 석양의 착시 유행했던 천국들 비만했던 계절들 가장 먼저 버려지는 건 너무 입어 형태를 잃었거나 한 번만 입고 입지 않았거나 어쩌면 한 번도 입지 않아서 영영 입을 수 없게 된 아쉽지 않을까 겨울은 올 텐데 너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가소로운 미련이었다 몸은 하나인데 대봉투 열세 묶음 너무 많이 입고 벗었고 그리고 돌아가지 않았고 몇 번을 왕복하며 버리고 다시 집으로 간다 집이 무게를 회복하기를 바라면서 운명이 더욱 세련되어지기를 바라면서 대문 앞에서 네가 잠깐만, 하고 먼지 낀 손을 놓고 뒤돌아 뛰어간다 소각장 쪽으로 다 없어질 곳으로 내가 본 너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목도리를 하지 않는다
- 관리자
- 2025-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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