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 아닌 이상형
- 작성일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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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 아닌 이상형
김헤니
우리가 같은 시기 앙굴렘에 도착했을 때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나는 제일 먼저 너를 발견해
이곳에 하나뿐인 영화관 앞에서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너를 의식하면서
나를 보는 너를 본 적 없다는 표정을 지어
우리가 서로를 발견한 장면인 줄 알았는데
다음 해 다시 그려 본 그날의 너는
나의 얼굴을 하고 있어
버스 창문 밖으로 걸어가는 너의 시선은
나를 향해 놓고도 나를 보지 못해
그때 나는 내가 쉽게 다칠 수 있다는 걸 알았어
이 이야기를 너에게 들려주었을 때
우리가 닿지도 않았는데 서로의 팔이 닿았을 때처럼
미친 듯 뛰는 너의 심장 소리가 반가워
너는 멀지만 누구보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사람
나의 재능을 내가 가야 하는 길을 나보다도 더 멀리
나의 가능성을 믿어 주는 일이 너의 타고난 임무라는 듯
몇 년 만에 다시 찾아온 나를 위해 역에 나온 너의 웃음이
오늘 밤 한잔하러 오라는 친구에게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해
너는 잘 다려진 옷을 입고 할머니가 해 주던 대로 내게 요리해 줘
내게 무얼 마시고 싶냐고 물어 내가 더 먹어야 한다고 말해
남은 커피잔에 설탕을 녹이는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던 네가
오늘은 느리게 먹는 나를 보며 입술을 다문 채 웃고 있네
너는 설거지를 하다가 내 다리로 향하는 시선을 들켜
너는 내게 바짝 당겨 앉아 다리를 붙이고 나는 버텨 내
잠깐이지만 우리가 함께하면 어떨까? 정신이 아찔해져
내내 키스하고 싶었어 너를 본 이후로 쭉
내가 어릴 때 아빠가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났거든
내 어린 시절이 괜찮대 오늘 두 사람을 고문할 필요는 없대
나는 머리카락을 기르기도 하냐고 묻는 네가
어쩔 수 없는 이탈리안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는 긴 머리가 제일 잘 어울려 왜 예전처럼 머리를 기르지 않아?
나는 키스할 때 너의 얇은 입술에 실망하고
나와 전혀 다른 골격을 만지며 놀라지만
조각 같은 너의 손의 아름다움이
숨이 동기화되는 시간이
잠시나마 나를 구원해
우리는 원한다고 말하는 걸 보류한 사이
노랫말만 주고받는 시시한 사이
말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 맞지?
예전에 나는 생폴역의 출구에 서서
도착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어
바로 그 자리에
연인을 기다리던 한 여자의 기쁨이
너무도 강렬했던 나머지
여자가 떠난 뒤에도 고스란히 남아
내 몸에 스민 그녀의 바람이 황홀해
한참 동안 같은 자리에 머무르게 해
여자의 꿈이 남기고 간 선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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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6-03-01
완화계 박형준 님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종이를 만드네 그 위에 한자 한자 글씨를 쓰네 떠내려가는 물에 종이를 씻네 글씨들이 물에 풀려 완화계 푸른 물에 봄을 불러일으키네 완화계(浣花溪) 거닐며 두보를 닮으려 초막을 짓고 산 두 남녀의 사랑을 떠올리네 그들의 사랑이 새겨진 망강루(望江樓) 올려다보니 누각 사이로 테니스 코트가 보이네 서로 주고받는 공 소리가 연신 울리네 서로에게 전해지지 않는 편지를 쓰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지 누각 사이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테니스공 치는 소리에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잠자리 날개처럼 바스라질 듯 부드럽게 내 손에 잡히네 한 남자는 떠나고 한 여자는 종이를 만들며 그 위에 글씨를 쓴다네 쓰기만 하고 부치지 못한 편지는 완화계 시냇가에 창포 꽃잎으로 흘러가네 * 완화계 시냇가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중국 당나라 시인 설도에게서 착상을 얻었으며 인용 부분은 〈동심초〉 가사 중 일부임.
- 관리자
- 2026-03-01
인노첸시오 8세의 불멸 김혜순 먼지로 흐린 유리창 때문에 밖의 나무도 흐리고 안의 남자도 흐리다 벌레의 주검들로 거무튀튀한 유리창 때문에 피아노 소리도 거무튀튀하고 방안의 남자도 거무튀튀하다 더러운 주전자에 물이 끓고 남자는 주전자가 타도록 일어나지 않는다 전화선은 늘어져 있고 주전자를 태우는 불꽃만은 싱싱하다 검은 연기 속에서 시간을 가득 먹은 파리가 날고 전국의 공중전화 박스들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 흘러드는 연기로 폐는 쿨적거리고 눈물도 쿨적거리지만 그의 핵은 뛰고 있다 때 묻은 나무의 새로 돋은 이파리들은 방을 엿볼 생각이 없다 방의 남자도 밖을 내다볼 생각이 없다 태양이 거머리빛으로 창을 기어가면 창 안쪽에서 해파리들처럼 먼지구름들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인노첸시오 8세는 영원히 살아 있다 먼지로 흐린 유리를 열고 아무도 그를 방문하지 않지만 볼록한 배 검은 진주로 변한 눈동자 그는 나무였으나 기괴한 광물이 된 몸 안에 살아 있다 그의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고 그의 목을 조르는 형광타원형들이 계속해서 천정에서 떨어진다 인노첸시오 8세가 먹은 세 소녀의 피 창밖에 억울한 장미 세 송이 영원히 피어 있다 나는 그의 몇 번째 시녀인가 밤이 오면 등불을 끄고 집을 쪼개는 금들이 몰려드는 것을 그대로 둔다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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