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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신화

  • 작성일 2026-05-01

  소멸신화


강하라


  새하얀 생크림 위로 양말 신은 발목들이 꽂힌다

  다 모였니? 손 놓치지 않고


  설탕과 공기가 미끄러뜨린 겨울의 언덕

  수많은 발자국이 그 위에 찍혔을지도 몰라 

  그럼 너는 이 유령의 길을 따라오렴


  우리는 주저앉아 포크도 없이 손으로 

  흰 것을 퍼먹는다


  입안에서 스러지는 그것은 차갑고 부드러워 너와 내가 험하고 둥글게 잘라먹는 시간의 단면들 곧게 잘리지 않아도 젖은


  딸기향과 피의 색은 구분할 수가 없어

  네가 눈을 꼭 감았을 때 

  감긴 눈꺼풀의 핏줄과 미세한 떨림을 몰래 훔쳐보면


  방 안의 모서리가 지워지고 작고 뾰족한 빛들만 살아남아 파르르 떨리면서 나에게 무엇인가 묻는데 나는 대답을 해줄 수가 없고


  혀로 입술을 쓸다 보면

  지도처럼 발견되는 것 양각과 음각으로 피하려 할수록 이미 닿아버린 미로 속 

  그렇게 타고난 것들이 우리의 길이 되겠지


  바라는 게 없다 해도 바라는 게 있고

  바라는 게 진짜 없으면 바라야 할 게 생겨

  이를테면 건강 


  기뻐서 부르는 노래는 어째서 늘 조금 슬프게 들릴까

  슬픔을 미리 불러내는 건

  슬픔을 물러나게 하는 의식일지도 모른다고


  어서 와

  나이 든 것을 축하해, 소원을 빌어

  병들게 될 것을 환영해, 소원을 빌어


  은색 큐빅을 둘러 붙인 휠체어의 바퀴, 수액과 나란히 매달려 달랑거리는 분홍색 토끼, 알록달록한 깁스, 우리의 전시장, 이름 옆에 찌그러진 이름과 하트들


  그래, 소원을 빌기 위해 너는 

  더 아프게 될 거야

  이 순간의 불빛을 그냥 흘려보내기는 아까우니까


  괜히 이 세계의 규칙을 위하여

  태어났구나


  꿈의 멸종, 영원의 방랑, 사랑해

  참을 수 없는 가려움

  재채기하며


  색색의 밀랍이 녹아내린다

  시작과 끝의 우리로부터 하얗게 엉망진창 된

  기쁜 우리 젊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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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클

오라클 강하라 내가 아직 젖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우산을 건네줍니다 이건 너무 친절한 예언이어서 가끔은 겁이 납니다 내가 무엇을 잃어버리게 될지 나보다 먼저 아는 사람들이 창문 밖에 서성입니다 이별 노래가 먼저 도착해 있는 밤에는 어김없이 이별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이 계절을 밀어냅니다 따뜻한 수프를 젓고 있는 강아지를 보고 있었는데 눈을 깜빡이지 않으면 젤리 컵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유리 파편이 눈에 튄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교복 입은 어린이가 튀어나와 어른 춤을 춘다 나에게 총구를 겨누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속도로 어른 춤이란 건 대체 뭔지 아쉽지만 비명은 내지를 영혼이 없고 슬픔과 귀여움이 재난과 농담이랑 한집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슬픔은 표정을 짓기도 전에 떠나가 버립니다 그가 두고 간 일기장을 훔쳐본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슬프다고 적습니다 그러면 누군가 휴지를 건네줄까요? 우리는 서로의 날씨를 너무 잘 알아서 서로를 안아줄 수 없어요 해가 종일 떠 있거나 눈이 오는 일들은 빈번하고 나는 그런 세계의 사람들이 부럽거나 밉습니다 펼친 우산에는 아직 떼지 않은 가격표가 붙어있고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며 지금 휴지가 반값 세일을 한다고 친절히 일러줍니다 나의 결핍은 계산된 것입니까, 발명된 것입니까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세계를 구경만 합니다 내가 원한 적 없는 사랑이 내 방 가득 눈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젖지도 않고 유리 벽 너머의 날씨를 믿지 말자고 다짐하는 말만 믿습니다

  • 강하라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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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판다곰젤리
    감동했어요

    왜 슬프지? 슬퍼서 슬픈 게 아니고 아름다워서 슬프네.

    • 2026-05-10 20:55:09
    판다곰젤리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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