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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일기

  • 작성일 2022-09-01

미래 일기

박상수


비단벌레 차를 같이 타고 싶었던 사람에게 선물을 건넸다 새로 나온 음반이야, 덧붙일 말이 많았지만 그 정도로만 말하기로 했던 결심을 잘 지킬 수 있어서 돌아오는 길이 자꾸만 늘어났다 대답도 없이 간략한 눈빛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 내가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 얕은 멀미가 올라왔다


빙글, 길게 휘어졌던 여름의 구름과, 걸어 들어가고 있구나 커튼 뒤의 하늘로, 여름의 복판으로,


생도너츠와 홍차를 먹고 천변을 걸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못한 일들만 자꾸 생각났다 간판 없는 실비집에서 나를 야단쳤던 사람, 너에게는 결정적으로 빠진 게 있잖아, 그런 말을 듣는 일이 식물에 빛이 닿듯,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였다 커튼 뒤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하지? 고장 난 만화경의 무늬들처럼 지난날은 깨어져서 영원히 밀려갔다 밀려오고


그칠 새가 없었던 참매미의 울음, 방학이 되어버린 서가를 서성이다 보면 책보다는 책등에 새겨진 제목들을 읽어 나가는 게 좋았다 이건 파랗고 이상해, 모든 게 싫어지고 미워지고 가라앉고 다시 더 가라앉고,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게 맞는 거고 모든 결속은 없는 거고, 너는 모든 것과 아무도를 좋아하는구나 귀에 닿는 소리가 무서워서 눈을 크게 뜨면 쌀벌레가 나방이 되고 말라 가기까지의 일생이 전부 보이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건 주인공의 고통이래, 고난 속에서만 모든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부터는 무서운 일뿐일 텐데, 가름줄로 표시해 둔 문장들에 기대어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서면 빙글, 흔들리며 세상이 잠깐 나를 놓쳐서 멍이 든 것처럼 온몸이 아파 왔다


그래도 된다면,


미래의 나는 돌아오고 싶어 할지도 몰라, 방학이 끝나도록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이 여름으로, 밤에도 들을 수 없던 소리들이 한낮의 귓가에 무수히 들려오는 커튼 뒤의 그 여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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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핸드폰 박형준 핸드폰을 어디다 두었는데 찾지를 못하겠다 밤 산책을 나갔다가 길에 흘렸는지 풀숲에 앉아 있다가 빠뜨렸는지 고물 자전거를 타고 김포바다에 가 보거나 한강 하류 시골 읍내처럼 생긴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높은 언덕을 올랐다가 내려갈 때 삐걱대는 페달에서 다리를 떼고 속도를 즐겼다 울퉁불퉁한 산길의 초지를 달리다가 핸드폰을 빠뜨려 먹고 집에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대여섯 시간을 되돌아가 기적처럼 핸드폰을 찾아왔다 술 많이 먹던 시절 택시에서 핸드폰을 두고 내리던 때가 생각난다 다음 날 택시 기사와 간신히 내 전화로 통화가 되어 무슨 비밀작전처럼 택시 기사가 지정한 곳에 가서 구멍가게 옆 자판기 밑에 놓아둔 핸드폰을 찾고 사례비를 놓아두고 온 적도 있었지 운이 좋아 소중한 것을 모를 때가 많았다 내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잃을 때야 비로소 내 자신을 투명하게 본다

  • 관리자
  • 2026-03-01
완화계

완화계 박형준 님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종이를 만드네 그 위에 한자 한자 글씨를 쓰네 떠내려가는 물에 종이를 씻네 글씨들이 물에 풀려 완화계 푸른 물에 봄을 불러일으키네 완화계(浣花溪) 거닐며 두보를 닮으려 초막을 짓고 산 두 남녀의 사랑을 떠올리네 그들의 사랑이 새겨진 망강루(望江樓) 올려다보니 누각 사이로 테니스 코트가 보이네 서로 주고받는 공 소리가 연신 울리네 서로에게 전해지지 않는 편지를 쓰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지 누각 사이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테니스공 치는 소리에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잠자리 날개처럼 바스라질 듯 부드럽게 내 손에 잡히네 한 남자는 떠나고 한 여자는 종이를 만들며 그 위에 글씨를 쓴다네 쓰기만 하고 부치지 못한 편지는 완화계 시냇가에 창포 꽃잎으로 흘러가네 * 완화계 시냇가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중국 당나라 시인 설도에게서 착상을 얻었으며 인용 부분은 〈동심초〉 가사 중 일부임.

  • 관리자
  • 2026-03-01
인노첸시오 8세의 불멸

인노첸시오 8세의 불멸 김혜순 먼지로 흐린 유리창 때문에 밖의 나무도 흐리고 안의 남자도 흐리다 벌레의 주검들로 거무튀튀한 유리창 때문에 피아노 소리도 거무튀튀하고 방안의 남자도 거무튀튀하다 더러운 주전자에 물이 끓고 남자는 주전자가 타도록 일어나지 않는다 전화선은 늘어져 있고 주전자를 태우는 불꽃만은 싱싱하다 검은 연기 속에서 시간을 가득 먹은 파리가 날고 전국의 공중전화 박스들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 흘러드는 연기로 폐는 쿨적거리고 눈물도 쿨적거리지만 그의 핵은 뛰고 있다 때 묻은 나무의 새로 돋은 이파리들은 방을 엿볼 생각이 없다 방의 남자도 밖을 내다볼 생각이 없다 태양이 거머리빛으로 창을 기어가면 창 안쪽에서 해파리들처럼 먼지구름들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인노첸시오 8세는 영원히 살아 있다 먼지로 흐린 유리를 열고 아무도 그를 방문하지 않지만 볼록한 배 검은 진주로 변한 눈동자 그는 나무였으나 기괴한 광물이 된 몸 안에 살아 있다 그의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고 그의 목을 조르는 형광타원형들이 계속해서 천정에서 떨어진다 인노첸시오 8세가 먹은 세 소녀의 피 창밖에 억울한 장미 세 송이 영원히 피어 있다 나는 그의 몇 번째 시녀인가 밤이 오면 등불을 끄고 집을 쪼개는 금들이 몰려드는 것을 그대로 둔다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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