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사
- 작성일 20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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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
김연필
수명이 다한 낡은 집을 본다. 집은 언제까지고 어디까지고 살아 있을 줄만 알았다. 이제 집은 죽고, 집의 형체만 남고, 집의 형체만 남은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른다. 나는 이를 집의 잔해라고 부르련다. 집의 잔해를 보며 나의 잔해를 상상하련다. 나의 잔해 또한 이것처럼 단단할 것이고, 또한 이것처럼 초라할 것이고, 또한 이것처럼 아무런 입도 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수명이 다한 낡은 너를 본다. 수명이 다해 언제까지고 어디까지고 걸어가는 너를 본다. 나는 네게 잔해라 부르지 못한다. 너의 등에 어떤 문법이 붙어도 너를 잔해라 부르지 못한다. 나는 집의 잔해를 향해 다가가고, 나는 나의 잔해를 향해 다가가고, 나는 너의 잔해를 상상하고,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너의 잔해는 너무 단단하다고 생각하며, 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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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라도 반복하면 우스워진다어떤 것이라도 반복하면 우스워진다 김연필 한밤에 캐리어를 끌고 길을 가고 있습니다 황량한 주택가에 덜그럭 소리가 울립니다 긴 여행을 다녀왔는데 먼 길을 가야 합니다 공항에서 내려, 전철을 타고, 버스도 타고 왔지만 캐리어를 끌고 멀리 떠납니다 덜그럭댑니다 빈 수레는 요란하고 이 캐리어는 비었습니다 한밤은 정적이고 길가는 황량하고 가로등 불빛 하나 아스팔트 위에 서 있습니다 나의 캐리어는 텅 비어 시끄럽습니다 부끄러워 들고 가봅니다 들고 가기엔 또 조금 무겁습니다 팔이 떨어집니다 길가에 바닥에 땅에 떨어진 팔을 들고 어디를 얼마나 가야 할지 황량한 주택가, 나는 걸어야 할지 뛰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모두가 보고 있는 밤 이 길의 끝을 모릅니다 저기 가로등 끝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누군가의 눈이 마치 빛처럼 가벼운 인생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드륵드륵 끌려갑니다 가벼운 팔에 들려 가벼운 소리로 마음만은 가벼운 적 없습니다 로드무비의 끝은 그렇습니다 나는 독백자입니다 부끄러운 마음만은 가벼운 적 없어 마음을 들고 냅다 뛰고 싶지만 내 역할은 끝없이 황량한 주택가를 캐리어를 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긴 여행을 다녀왔는데 먼 길을 가며 생각하는 인물의 상황과 심리를 파악하자면, 사건을 알아야 하는데 인물은 끝없이 걸어 소실점 너머로 다가가고 나는 궁금합니다 감독은 언제까지 배우를 걸어가게 하려는 건지 한밤중에 감독이 캐리어를 끌고 걸어갑니다 그것은 무거워 보입니다 황량한 주택가에 덜그럭 소리가 울립니다 이제는 그것을 운명이라 말해 봅니다
- 2020-09-01
문장웹진 시
벽이 없는 대답벽이 없는 대답 김연필 서로와 홀로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홀로는 서로의 알레고리이다 - # 홀로와 서로가 대화한다. 나 여기 앉아도 돼? 여기 앉아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어도 돼? 무대에는 사람이 둘 서 있고, 기둥이 둘 서 있고, 무대 뒤로 원형 계단이 있고, 솟아오르거나 가라앉는 계단이야. 무대 위에 네가 서 있어도 돼? 말 한 번 걸어 봐도 돼? 무대에는 사람 둘이 회전하며 춤을 추고 있고 테이블보를 치워. 거꾸로 된 상자를 뒤집어. 파란색 상자. 조명을 끄고 무대에 작가를 앉혀. 작가를 뒤집어 봐. 작가의 뒤에 있는 계단으로 걸어 들어가. 작가의 바닥에는 두 마리의 뱀이 등장한다 뱀은 서로의 상징이다 상징적인 뱀을 들고 배우가 양옆에 선다 있어 봐 지금 연극 시작하잖아 극장에서는 떠들면 안 돼 핸드폰을 켜지도 마 메모는 조용히 종이에 펜으로 상징적인 뱀이 바닥을 기어간다 그것은 원형에 가깝다 원형은 서로의 상징이다 원형은 서로의 원형이다 서로가 일어서서 홀로에게 소리친다 홀로는 슬픈 것 같다 홀로 서서 바닥에 떨어진 상징을 바라본다 상징의 죽음으로 장면은 시작한다 # 이 연극은 상징을 찾기 위해 기획되었다 작가는 비유에서 상징의 단서를 발견한다 작가는 상징의 행방을 추리하며 무대에 오른다 너는 도대체 뭐 하는 애니? 교양이라고는 배워 처먹지도 못하고. 너무 그러지 마. 나도 내가 무식한 거 알아. 교양 같은 거 아무리 찾으려도 없어. 극장 같은 곳 오고 싶지도 않아. 이 돈으로 밥이나 사 먹고 싶어. 울고 싶다 진짜. 나 이제 일주일간 라면만 먹어야 돼. 너는 어떻게 된 애가. 나가려면 너나 나가. 공연이 시작하면 극장 문을 열면 안 돼. 뭐? 울고 싶다 진짜. 배우는 대사를 반복한다 배우의 대사는 상징적으로 투명하다 홀로 남아 의미는 확장된다 명백한 공간으로 남는다 무대에서 계속되는 대화는 집의 비유이다 집의 알레고리이다 존재의 집이다 존재는 뱀의 상징이다 원형적 상징이다 원형의 상징이다 상징이라는 거 다 원형 아니니 꼬리 잡고 물고 테이블보를 치워. 상자의 윗면을 찾아. 노란색 상자. 노란색 조명을 켜고 무대에 관객을 앉혀. 배우의 뒤에 이어진 계단이 혼돈을 향하고 있어 혼돈은 어린 시인, 혼돈은 서로의 알레고리야 기둥 뒤에 공간 있어요 공간 속에 혼돈이 숨어 숨바꼭질을 하고 있고 선명한 빛이 무대를 비춘다 창백한 무대가 빛을 받아 숨을 내쉰다 곧 죽으려는 듯 파랗고 선명한 무대가 비친다 # 너 괜히 더 시 쓴다고 하지 마 니가 뭘 너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렇게 특별하고 싶어? 너는 인생 낭비한 거야 그래 십 년간 시 써서 뭐가 됐냐? 집에 와서 가게나 도와 니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거 말고 더 있냐? 니 방? 너는 거실서 자도 모자라 월급이라니 자식 된 새끼가 집안일 도우면서 돈? 이 건물에 니 권리? 생각도 하지 마 너는 서로가 말한다 이거 치정극이었구나, 너도 좀 말해 봐. 혼돈이네? 언제 왔어? 너 요즘도 시 쓰니? 그거 해서 먹고는 살아? 그래, 잘 생각했다 그런 건 취미생활로나 좀
- 2020-09-01
문장웹진 시
사람사람 김연필 밤마다 어둠이 대지를 품어서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 밤마다 울고 밤마다 날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적 있다 목이 잘리고도 계속해서 칼을 휘두르는 사람을 본 일이 있다 목 없이 목 놓아 울고 목 없이 사방을 바라보는 이상한 사람을 본 일이 있다 아무 구멍 없이 둥그렇기만 한 어떤 얼굴을 본 적 있다 얼굴을 그려 줘도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어떤 얼굴을 본 적 있다 표정 없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한 어떤 얼굴, 얼굴에 아무런 글자를 적어 줘도 아무 뜻이 없는 둥그런 얼굴을 본 적 있다 무언가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을 본 일 있다 무언가를 더 붙여도 아무런 소용 없는 사람들을 본 일 있다 그들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아무렇지 않게 놀아 본 적이 있다 다리가 두 개든 네 개든 달만 보며 춤을 추는 이상한 사람을 본 일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지만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련다 살면서 바라본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짐승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물에서 살며 개처럼 짖어대는 사람들이 있고 죽어서 알이 된 사람이 있다 죽어서 곡식이 된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죽어도 아무런 먹을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일이 있다 나는 밤이 품어도 아무렇지 않게 출산하는 어떤 짐승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나는 사실 짐승이다 나는 목이 잘리고도 계속해서 목 놓아 울 수가 없다 언젠가 잘릴 목에서 아무런 곡식도 나누어 줄 수가 없다 나는 아무런 사람도 될 수 없어서 운다 밤마다 운다 밤이 품어 주질 않아서 밤마다 운다 나는 매일 운다 울어도 짐승이 되지 않는다 짐승이 되고도 울 것이다 울다가 죽어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저 많은 사람이 있다 나는 그중 어떠한 사람도 아니다 우리는 그중 어떠한 이야기도 아니다 또다시 어둠이 대지를 품는다 이윽고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진다
- 20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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