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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 작성일 2023-11-01
  • 조회수 398

한낮


이용임


   종이를 반절 접으면

   물 위를 날아 건넌다


   가지 위에 앉았다가

   흘러 수렁이 된다


   등이 젖어

   날개처럼 업혀간다


   캄캄하다 지워진다 하얗다 지워진다

   손발이 표백되어


   커다란 입 속에

   가지런히 돋은 이가 스물여덟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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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의 연속 김이듬 내 방은 함석지붕 아래 있다 비가 오면 두 사람이 내 방으로 온다 초콜릿 케이크 같은 진흙을 바짓단에 묻히고 빗소리 들으러 온다 나무딸기 덤불숲이 보이는 내 방은 빗소리를 녹음하는 작은 음악실 같다 오래전 연주 같아 이젠 아무도 안 듣는 클래식 같아 K가 말한다 대화가 아니라 독백처럼 무미건조하지는 않지만 무의미한 소리 누구든지 자신에게 말할 때가 있다 빗소리가 침묵과 섞일 때 P가 입을 연다 전쟁 중에 동료로부터 받은 생일 선물은 폭발물이었고 그 병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대 어제 기사를 봤어 아직도 함석지붕이 있고 녹슬지 않은 난로연통과 포금이 있고 아직까지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창문을 여니 비현실적으로 축사 냄새가 난다 빗소리를 재현하면 음악이 되겠지만 공기 중에 뒤섞인 어둠을 복제하면 그림이 되겠지만 누가 자연과 경쟁하겠는가 P는 화가 K는 작곡가 나는 시인 서로의 실패함을 시인하지 않을 만큼 친밀하다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서로에게 말하며 충돌하지 않는다 표현하고 싶어 가장 정확하고 간결하게 창 너머 보며 P가 중얼거릴 때 하염없이 쪼그라들며 조는 나 텁텁한 K의 목소리 수다스런 장식은 싫지만 불필요한 수사를 모두 없애고 핵심만 응축하면 뭐가 남겠어? 누구의 말도 틀리지 않지만 누군가의 말을 중복하거나 재현하는 것 같아서 자고 싶고 그만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 관리자
  •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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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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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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