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 작성일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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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R은 뜻밖의 질문이라는 듯 머뭇거리다가 두 번째라고 말했다. 아마도 두 번째. 두 번째면 두 번째지 ‘아마도’는 왜 붙여? 나는 장난스레 그를 추궁했다. 그는 이십 년 전 대학생 때 친구와 무박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무박? 잠은 안 자고 왔어?”
R에게 물었다. 요즘엔 서울에서 기차로 두 시간이면 닿을 가까운 거리지만 이십 년 전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밤기차를 타고 갈 정도로 먼 여행길이었다. 나 역시 스무 살 때 혼자 훌쩍 떠난 적이 있어서 잘 알았다.
“어렸잖아.”
“숙박할 돈이 없었어?”
“돈도 없었지.”
“그 여자랑 자는 사이는 아니었나 보네.”
“여자는 무슨. 그냥 애들이지. 학생이었잖아.”
“친구가 여자였어?”
R의 얼굴에 순간 뜨끔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냥 친구였어.”
“안 사귀었어?”
“그런 거 아냐. 왜 자꾸 그런 걸 물어 봐.”
“물어 본 건 이번 한 번뿐인데? 첫사랑이야?”
“아냐. 그냥 친구. 친구라고. 애들끼리 바다 한번 보겠다고 기차여행 한 거야.”
R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뭐야, 자기 지금 되게 변명조인 거 알지?”
“뭐가?”
“우리가 애들도 아니고 서로 알아 가면서 누구 만났고 하는 얘기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나이 아니야?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말을 왜 자꾸 돌려?”
나는 미소를 띤 채 차분히 말했지만 R은 그런 나에게서 공격성을 느낄 때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생각난 게 슬펐다. 나는 이토록 나 자신을 의식하고 상대방을 의식하는데, R은 그냥 편하게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싶고 내게 그럴 수 없다는 게 괴롭다고 했다.
“내가 언제? 언제 말을 돌렸다는 거야?”
“방금. 내 말은 듣지 않고 어렸다고만 반복하잖아.”
“어렸으니까 어렸다고 하지.”
“웃기지 마. 그때 정말 자기가 어리다고 생각했어? 난 아닌데? 난 책도 썼잖아. 이십 년 전에는 지금보다 더 잘 썼는지도 몰라. 그때는 지금처럼 마른 걸레 쥐어짜듯 억지로 쓰지 않았다고. 오히려 생각이 흘러넘쳐서 그걸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지. 당신도 요즘 내가 쓰는 것보다 예전에 쓴 걸 더 좋아하잖아.”
“그건 좀 다른 문제고.”
“그렇겠지.”
“그렇다니까.”
“옛날에 스무 살이면 결혼도 하고 대학교수도 하고, 또 뭐가 있나.”
“그때랑 지금은 다르지. 시대도 다르고 평균수명도 다르고.”
“다른가?”
“다르지.”
“평균수명이랑 정신연령이랑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다르다니까.”
R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다시 그 예의 시큰둥한 표정이 되었다. 무언가가 나를 건드렸는데 직감적으로 뭔가 거슬린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언제나 나중에 떠올려 보면 그때 그랬던 것 같다는 정도로 미미한 신호에 불과했다. 최근 들어 R에게 계속 시비를 걸고 있다는 생각에 나도 그만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거 봐.”
관심을 다른 데로 유도하고 싶었는지 R은 들고 있던 잡지를 내 쪽으로 펼쳐 보이며 사진을 한 장 가리켰다. 지방 소도시에 있는 어느 숙소에 관한 기사였는데 노부부가 오래된 여관을 개조하여 운영하는 듯했다. 푸른빛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풍경, 모던하고 미니멀한 건축, 손으로 만든 건강한 식사······.
“나이 들어서 이런 거 운영하고 살면 좋겠다.”
R이 나를 흘깃 보며 말했다.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당신은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었으니 그런 걸 정말 할 사람이었더라면 이미 하고 있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R이 상처받을까 싶어 말하지 않고 생각만 했다. 미리 부정적인 판단을 해버린 내가 좀 못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R과 있으면 나는 항상 더 못된 쪽이 되어버린다. 어째서인지.
“예전엔 지방으로 영화 촬영 다니고 세상 좋았는데, 요새는 세트장에서만 찍으니까 답답해. 어디 우리 임수란 작가가 소설을 좀 더 써줘 봐. 현장 로케이션이 아니면 안 되는 이야기로.”
“그럴까?”
별 의미 없이 하는 얘기라 해도 일단 솔깃했다. 다음에 영상화와 관련된 저작권료 협상을 하게 된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쪽은 소설과는 움직이는 돈의 단위가 아예 다르다는 것을 지난번엔 잘 몰랐다.
“사실 나도 국내 여행을 좀 다니고 싶어. 외국엔 많이 가봤는데 정작 한국은 잘 모르잖아. 기껏해야 부산이나 제주도에 몇 번 가본 게 다이고······.”
나는 복도 쪽 팔걸이에 무게 중심을 두고 비스듬히 앉아 R이 있는 통로 건너편 좌석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기차표를 늦게 예매한 덕분에 우리는 나란히 붙어 있는 자리를 얻지 못하고 통로를 사이에 두고 복도 측 좌석에 따로 앉아 가야만 했다. 그나마도 같은 줄 좌석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개를 숙여 R이 들고 있는 잡지를 더 자세히 보려는데 마침 다른 승객이 우리 사이로 지나가려고 멈춰 서 있길래 나는 굽힌 등을 도로 펴며 자세를 바로 했다. R 역시 공간을 터주기 위해 잡지를 든 채 상체를 자기 좌석 쪽으로 뺐다. 우리 사이로 사람들이 줄줄이 지나갔다.
“몇 쪽이야?”
내 자리에 비치된 잡지를 뽑아 펼치며 R에게 물었다. 좌석마다 똑같은 잡지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대단한 궁금증이 일어 물어 본 건 아니었지만.
“그냥 이걸 봐.”
R이 그렇게 말하면서 잡지를 건네려는데 다른 탑승객들이 또 우수수 우리 사이로 지나갔다.
“됐어. 피곤하네.”
나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손에 들었던 잡지를 앞좌석 등받이에 도로 꽂아 놨다. R이 그 말을 반기듯, 아니면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미소 지었다. R의 미소가 좋았다. 남은 인생에 남자를 좋아할 일이 더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얼마 전에는 사촌조카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들키고 ‘남미새’라는 말을 알게 됐는데, ‘남자에 미친 새끼’라는 말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맙소사. 나는 남미새가 되고 만 것인가. 부정하고 싶지만 지금은 영락없이 그런 모양새였다. 상대를 한심해하면서도 갈망하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남자와 있을 때는 대개 그러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니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인기척에 감았던 눈을 뜨니 젊은 군인 하나가 옆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는 비어 있는 내 옆자리로 들어가 앉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무릎 앞 공간에는 거의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나름대로 엉덩이를 의자 쪽으로 당겨서 자리를 내어주는 시늉을 했다. 군인은 그 사이로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얌전히 창가 자리에 앉았다. 옆모습의 턱선과 콧날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넋 놓고 쳐다보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런데 우등석이라니. 군인이 왜? 아마 우리처럼 뒤늦게 좌석을 예매해서 선택권이 없었거나, 어떤 사정이 있어 일정을 급히 바꾼 걸지도 몰랐다.
R이 내 팔을 툭 치더니 군인 쪽을 턱짓하며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자리 바꿔 달라고 할까?’ 했다. 나는 좌석을 늦게 예매한 나 자신에게 어쩐지 벌을 주고 싶어서 괜찮다고 사양했다. 애초에 미리 두 좌석을 예매해 놨더라면 R이 좀 더 일찍 동행을 결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서점 SNS 계정에 이미 공지가 나갔으니 당연히 같이 간다고만 생각했는데 별안간 안 하겠다고 버티는 걸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 순간을 기억해 둬. 나는 좀 더 비겁해질 필요가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인생에는 전략이라는 게 필요하고 때로는 상대를 압박하는 기술도 써야 한다.
“좀 자둬.”
타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R이 말했다. 미소뿐만 아니라 그의 목소리도 좋아한다. 나는 남자 목소리에 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R은 좀 달랐다. 외모 취향은 옆자리에 앉은 군인이 이상형에 가까웠지만, 그러니까 군인이 지금보다 열 살에서 스무 살 정도 더 나이가 들었다면 말인데······.
“눈 감고 있어. 어제 못 잤다며.”
“그러니까 내 꿈에 자꾸 나오지 말라고.”
내가 마지막으로 투정하듯 그를 탓하자 R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내가 나를 벌주고 싶었다곤 해도 R과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가지 못하는 것 때문에 괜히 심통이 나서 거듭 시비를 걸고 있었다. 첫사랑이니 뭐니 솔직히 관심 없었지만 물고 넘어진 것도 결국 그래서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만 입을 닥치기로 하고 눈을 꾹 감고 좌석을 뒤로 젖혔다. 우등석이 일반석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버스를 탈 걸 그랬나. 곧장 가는 버스 노선이 동서울터미널에 있었던가. 전날 밤 짧은 글을 마감하느라 세 시간밖에 못 자서 더 감정 컨트롤이 안 됐다. 원래 대중교통을 탈 때는 잠을 잘 안 자는 편인데 오늘은 커피를 마시지 않았으니 생각보다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그 순간 갑자기 어렸을 적에 엄마와 어린 동생과 내가 셋이서 함께 엄마의 고향 도시로 가던 때가 생각났다. 우리는 승객들로 만원인 고속버스에 탔고, 동생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듯 엄마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건너편 통로 좌석에 앉았다. 내 옆자리에는 이미 어떤 아저씨가 타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에게서는 지독한 담배 냄새가 났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를 정도로 먼길이었는데 나는 버스를 타는 동안 내내 잠들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왜냐하면 그때 내가 알기로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자면 아기가 생기고, 아기가 생기는 순간 곧 여자 자신만의 인생도 끝장난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동생이 태어난 뒤로 엄마는 나를 공동 양육자처럼 대하고 있어서, 그때의 나는 내가 여전히 ‘아기’라고 느끼면서도 더 어린 동생을 돌봐야만 했고, 어린 아기들이란 세상 귀찮은 존재라며 질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여라도 잠이 들어 담배 냄새 팍팍 풍기는 모르는 아저씨의 아기를 가지기라도 할까 봐 무척 겁에 질렸다. 나를 이토록 험한 자리에 앉힌 엄마가 미웠고 우리를 놔두고 혼자 외국에 간 아빠를 원망했다. 그 와중에 아저씨 옆에 앉은 채로 잠이 들 수 있다는 게 걱정된다는 말은 꺼내기조차 수치스러운 주제라는 건 또 알아서 나는 엄마에게 내 근심을 털어놓지조차 못했다. 엄마가 나를 달래려고 사준 통감자를 신나게 먹은 다음이니 휴게소에 다녀온 직후인 듯한데 버스를 탄 중간에 나는 아주 잠시 깜빡 졸고 말았고 그걸 깨닫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잠기운에서 번쩍 깼다. 사색이 된 나는 엄마의 고향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버스에서 내린 뒤 엄청난 토를 게워냈다. 동생 때문에 지친 엄마는 구토하느라 옷을 더럽힌 나를 혼냈고 나는 외할머니 집으로 가는 내내 아무도 모르게 망가진 나의 인생을 비관하며 몰래 눈물을 훔쳤다. 몰래 울었던 건 우는 모습을 보면 엄마가 더 혼냈기 때문이었다. 그땐 뭘 해도 혼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나는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이었을 텐데 그 후 며칠간은 아기가 생기기라도 하면 어쩌나 두려움에 떨었고, 이해할 순 없지만 어느새 그걸 잊어버린 채 수개월이 흘렀는데, 어느 날 엄마를 따라 간 극장에서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를 보던 중 남자와 여자가 아무 짓도 안 하고 그저 옆자리에 앉아만 있으면서 잠이 든다고 해서 아기가 저절로 생겨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극장에 데려갈 때 엄마는 우리 자매가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꼬맹이들인 우리는 아무런 제지 없이 극장에 입장했고, 동생은 관람석에 앉혀 놓자마자 기절하듯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충격에 휩싸여 영화를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영화 속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 그때, 그 극장 안에서 나는 내가 동양인 여자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나는 여자였고, 동양인이었다. 영화의 제목은 ‘인도차이나’였다. 그 영화야말로 내게 진정한 극장의 첫 경험을 선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인도차이나 말이다. 오, 인도차이나!
도착한 건 시간상으로 한낮이었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서점이 있는 시내가 아니라 바닷가로 먼저 향했다. 해변으로 가는 길에는 삼사 층 정도 되는 고만고만한 모텔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나같이 전성기가 지난 듯 외관이 허름했다. 그중 좀 번듯해 보이는 모텔 앞에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은 덩치 큰 여자가 짝다리로 서 있었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부채질하다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습관처럼 “방 찾아요?”하며 호객했고 우리는 둘 다 저도 모르게 키득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맨얼굴에 그려진 여자의 눈썹 문신이 무서울 정도로 짙었는데 말투가 나긋나긋해서 더 우스웠다. 우리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부부? 애인? 설마 친구? 뭐든 상관없었다. 문득 더 이상 어리거나 젊지 않아서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조차 의식한 지 한참 되었을 정도로 나는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조금 걸어가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물방울무늬 여자가 험상궂게 변한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해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신고 있던 샌들을 벗었다. 따듯하고 푹푹 꺼지는 모래사장의 촉감이 좋았다. 조개껍데기나 해조류가 거의 섞이지 않은 깔끔하고 하얗고 깨끗한 모래였다. 조금 걷다가 신이 나서 샌들을 양손에 들고 뛰어가자 R이 ‘아이쿠’ 하고는 나를 뒤쫓아 왔다. 우리는 어린애들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파도와 모래가 부딪치는 경계 지점에 이르러 멈춰 섰다. 한쪽 하늘에는 시커멓게 먹구름이 꼈지만 다른 쪽은 거짓말처럼 옅은 파스텔 톤의 하늘이 펼쳐졌다. 우리는 파스텔 톤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R이 긴 팔로 내 허리를 감쌌다.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이대로 인생이 끝나면 어떨까. 사는 게 별건가 싶었다. 이렇게 작은 즐거움들이 쌓이고 그걸 추억하는 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가끔은 내가 다람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들을 수집해서 볼에 한가득 넣고 다니는 작은 다람쥐.
R이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냈다. 요 몇 달 그를 골치아프게 하는 전화로 그가 속한 회사에서 해고한 제작부 스태프에게서 온 것이었다. 주의력이 산만해 실수가 잦아서 좋은 말로 둘러대며 그만 나오라고 했더니 왜 자기를 해고했는지 구체적인 사유를 대라며 따져 물었고, 수차례 대화에 응해 준 게 개인적인 반감으로 이어진 듯했다. 곤란한 얼굴로 전화를 받는 R을 혼자 두고 나는 해변을 좀 더 걸었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발목을 적시고 멀어지는 파도의 차가운 감촉이 상쾌했다. 이 정도로도 요즘은 만족스러웠다. 예전에 젊었을 때는, 그래 봤자 칠팔 년 전일 뿐인데, 기운이 넘쳐서 그 남는 기운으로 서핑을 하러 다녔다. 여름이면 매주 버스를 갈아타고 양양에 가곤 했다. 그때 속 편히 놀러만 다니지 말고 없는 돈이라도 모조리 끌어다가 양양에 집이든 땅이든 사뒀어야 하는데. 나는 전혀 작가답지 않은 상념을 하며 해변을 거닐었다. 누군가가 나를 엿본다면 이토록 속물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어느덧 해수욕장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니 풍경이 완연히 달라졌다. 크고 작은 검은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로 한 노인이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채 물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의 무언가가 압도적이었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내가 도대체 무얼 보고 있는 거지, 하고 시선을 돌렸다.
R이 있는 곳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왔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이마를 짚었다가 하며 심각한 분위기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너무 멀어서인지 확대한 사진이 흐리멍덩했다. 그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지 하다가 이대로 서울로 혼자 가버릴까 생각했다. 휴대폰도 다 꺼두고 말이지. 그냥 증발해 버린다. 내가 사라지고 그가 홀로 모래밭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전화 받는 동안 애인이 없어졌어요. 그는 경찰서에 신고하고 우리 관계가 그의 가족들에게도 알려진다. 그리고, 그리고,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이성적이었다. 일단 북토크에도 참석해야 하고······.
처음에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젖은 모래는 경사가 심해서 똑바로 걷기가 힘들었고 마른 모래 위를 걸으려니 발이 푹푹 꺼져서 그쪽도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안 쓰는 근육을 왕창 썼으니 내일은 죽었구나 싶었다. 지나는 길에는 아까 보지 못한 여자 두 명이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펴고 오순도순 앉아 있었다. 신경을 긁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 유심히 쳐다보니 양산을 든 사람의 어깨 위에 고운 연둣빛 앵무새 한 마리가 올라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고 계속 소리를 냈다. 새가 없는 다른 사람은 두 손으로 작은 새장의 프레임을 잡고 있었다. 새장 밖으로 나왔는데도 앵무새는 멀리 날아갈 시도조차 하지 않고 ‘안녕하세요’만 반복하며 제자리걸음을 할 뿐이었다. 날아가도 별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자유의 대가를 아는 앵무새라니, 기특하네.
“가까이 와서 보세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새장을 들고 있던 곱슬머리 여자가 말을 건넸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여자들 쪽으로 다가갔다.
“만지는 건 안 되는데 보는 건 괜찮아요.”
나는 돗자리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앵무새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앵무새라니. TV에서 보는 것과는 좀 달랐다.
“정말 예뻐요. 다른 말도 할 줄 아나요?”
“아니요. 안녕하세요밖에 못 해요. 바보예요.”
한 여자가 대답하고 다른 여자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앵무새가 ‘바보예요, 바보예요’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여자들을 따라 나도 크게 웃었다.
해변을 빠져나와 기차역 쪽으로 나오는 길에 급작스레 소나기가 내렸다. 서둘러 역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는데 영화제작자답게 R이 미리 날씨를 체크해 왔다며 가방에서 삼단 우산을 꺼내어 보였다. 나는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한쪽으로 메고 다니는 그의 가방 안에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항상 정확한 타이밍에 나오곤 했기에 이런 순간을 내심 기대하는 편이었음에도 나는 매번 놀랐다. 마침 기차가 도착한 직후라 옹기종기 좁은 역사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로부터 탈출하듯 우리는 당당히 우산을 쓰고 거리로 나섰다. 요즘 여름비는 동남아 지역의 스콜처럼 한꺼번에 대량으로 마구 쏟아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멈추기 마련이었다. 이 비도 조금 이따가 그치겠지. 아마 그렇겠지? 그러리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비를 피하지 않고 미련하게 우산 하나에 의지해 폭우를 헤쳐 나가기로 했다. 위험을 감지하고도 어디론가 뛰어드는 걸 멈출 수 없는 모험가들처럼 말이다.
비가 오는 바다 산책길을 십여 분 정도 걸어가니 어느덧 항구를 중심으로 모인 횟집 타운으로 들어섰다. 우리의 목적지는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R이 검색으로 찾아낸 횟집이었다. 꼭 거기일 필요가 있을까, 나는 언제나 좀 더 즉흥적인 여행을 원하지만 R과 다니려면 타협이 필요했다. 그는 꼭 거기여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 이유란 게 내겐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여도 말이다. 횟집 타운은 해수욕장과는 상이한 풍경이었다. 왼쪽에는 이차선도로 건너편으로 비슷비슷한 횟집이 한 줄로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울타리 너머로 가파른 낭떠러지 아래의 깊은 바다가 보였다. 비바람이 몰아쳐 검은 파도가 바위 곁에서 무참하게 부서지며 철썩였다. 휴가철이라 길거리에 넘치던 사람들이 비가 온다고 썰물 빠지듯 어딘가로 모두 사라져 버린 게 신기했다. 다 어디로 기어 들어갔는지, 이럴 땐 꼭 개미 같지 않아? 우르르 우르르. 내가 중얼거렸으나 R은 듣지 못했다. 내 목소리가 작은 건지 R의 청력이 약한 건지. 아마 내 목소리가 작을 것이다. 독립책방에서 마이크 없이 북토크를 하고 난 다음에는 작가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아쉬웠다는 후기를 여러 번 읽었다. 전혀 공격적인 뉘앙스가 아닌데도 그건 이상하게 나를 좌절시켰다. 어렸을 때부터 비슷한 얘기를 많이 들어서일 것이다. 난 언제나 주눅 든 아이였다. 내 앞에 세 사람만 앉아 있어도 수줍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이런 내가 남 앞에서 떠들겠다고 몇 시간이나 이동해서 다른 도시에 와 있다니. 그리고 그걸 이십 년이나 하고 있다니. 가끔은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회의감이 들 때도 없지 않지만 매번 행사를 끝내고 나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푼 것처럼 기분이 고양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해졌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격려를 받은 것도 같았다. 나는 결국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들이야 나중에 고민할 문제고 지금 당장은 이렇게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꼭 붙어서 빗속을 걷는 게 그저 행복해서 세상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고 생각을 바꿨다. 잠시 어떤 소속감이 생기는 듯했고 R이 한 팔로 내 어깨를 감싸는 촉감도 좋았다. 이상하게 보통 때는 어깨를 내리누르는 팔의 무게가 유쾌하지 않아서 금방 쳐내곤 했는데 우산 안이 외부로부터 고립된 작은 섬처럼 아늑하게 느껴지니 그 팔이 싫지 않았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럴 수 있겠어. 모든 건 지금뿐이야. 날씨 탓에 나는 맘껏 센티멘털해졌다. 언젠가 그와 헤어진다 해도 이 거리의 잔상과 지금의 이 감각만큼은 나만의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가 찾아 들어간 횟집은 작은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40년 전통의, 라고 쓰인 네온사인. 저건 언제 설치했을까. 낡은 상태로 짐작건대 50년 이상은 족히 된 가게가 아닐까. 사장인 듯한 포스를 풍기는 50대 여자가 우리를 보고 반기는 시늉을 했다. 다정한 태도였지만 저런 상대라면 전혀 싸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조리실이 있는 일층은 이미 손님들로 북적이는 통에 우리는 이층으로 안내되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이층은 ‘파리 날린다’는 말이 곧바로 생각날 정도로 휑했다. R과 나는 마음 편하게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 쪽 넓은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비 때문에 샌들은 물론이고 바지가 무릎 아래까지 반쯤 젖은 상태였다. R은 운동화를 신고 긴바지를 입었는데 발목 정도만 조금 젖었을 뿐이었다. 그는 매사에 행동이 조신했다.
모둠회로 메뉴를 정하고 소주를 주문할지 탄산수를 주문할지 망설이자,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하고 R이 오늘의 북토크 대상인 소설의 한 문구를 자기 대사처럼 자연스럽게 말하고는 당연하다는 듯 슬램덩크 티셔츠를 입은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소주 두 병을 추가로 주문했다. 자기 일이기도 했으니까 소설의 한 문장 정도를 기억하는 건 당연한데도 나는 약간 감격했다. 누군가에게 애정을 느끼는 데 이렇게 기대치가 낮아도 되는 걸까.
“아까 전화 온 거, 얘기는 잘 끝났어?”
나는 그가 해고했다는 사람을 떠올리며 물었다. 최근 들어 전화 오는 빈도가 잦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일이?”
“맞다. 명일 씨. 그 사람 예전에 같이 한번 술을 마셨는데도 이름을 계속 까먹어.”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R의 휴대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 양반은 아니네.”
“또 그 사람이야? 그냥 받지 마. 서울 가서 얼굴 보고 좋게 얘기해.”
R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옆으로 치워 놓았다. 진동이 한동안 계속되더니 한참 만에야 멈췄다.
“아 진짜. 얘 때문에 미치겠다.”
“뭐라는데?”
“똑같지 뭐. 자기 살려 달라고.”
“심각한 상태 아니야? 그게 그럴 일인가.”
“들어보니까 얘가 다른 현장에서도 사고를 많이 쳤더라고. 어릴 때야 서로서로 좀 봐주면서 넘어간 모양인데 제작부장이 돼서도 그러면 일이 커지지. 감당이 안 돼.”
“언뜻 봤을 때는 멀쩡해 보였는데. 그전엔 그렇게 유난한 걸 정말 몰랐어?”
내 말이 자기를 탓하는 것으로 들렸는지 R이 돌 씹은 표정이 되었다.
“아예 몰랐던 건 아닌데, 불쌍하잖아. 하는 일 없이 그냥 놀고 있는 게. 내 무덤 내가 판 거지. 됐어. 음식 맛 떨어진다. 그 얘긴 하지 말자.”
나는 궁금했지만 캐묻지 않기로 하고 그를 따라 소주를 한 잔 더 마셨다. 그사이에도 문자가 오는지 R의 휴대폰 진동이 여러 번 울렸다. 원래 잘해 주는 사람을 더 원망하고 탓하는 게 인간의 마음인데 R이 명일 씨를 확실하게 끊어내지 못하는 게 답답했다.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꿔놓고 울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R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갑자기 주섬주섬 가방을 열더니 내게 손을 내밀어 보라고 했다. 하라는 대로 했더니 이번엔 눈을 감아 보라고 했다. 다시 하라는 대로 했더니 그가 내 손에 넓적하고 차가운 물건을 내려놓는 감촉이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매끄럽고 완벽한 형태의 돌이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해변에서 주운 돌이었다. 기차역에서 우산을 꺼냈을 때처럼 나는 작게 감탄했다. 맘에 쏙 드는 선물이었다. 누군가를 해고하고 매몰차게 대해야 하면서도 애정하는 사람에겐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 수 있다는 게 인생의 아이러니이자 재미라는 생각도 들었다.
밖에는 그치지 않고 비가 쏟아졌다. 우리가 소주를 세 병쯤 비웠을 때 핑크색 야구모자를 쓴 여자 손님 하나가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 우리는 우리말고 이층에 손님이 왔다는 게 반가워서 주정뱅이들처럼 여자에게 한마디씩 하며 반겼고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우리와 제일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조심스레 앉았다. 홀로 여행하는 관광객인 듯했는데 앉자마자 그 자리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시 일어나 우리와 좀 더 가까운 쪽 테이블로 옮겨 앉았다. 구석에서 휴대폰을 보던 슬램덩크가 우리에게 그랬듯이 여자에게도 공손하게 물을 가져다주고 주문을 받았다. 일부러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실내가 조용해서 여자가 성게비빔밥 한 그릇을 시킨 뒤 추가로 맥주를 주문하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잠시 후, 슬램덩크는 어딜 갔는지 주인 여자가 직접 커다란 쟁반을 들고 와 야구모자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초고추장말고 간장 소스만 조금 넣고 살짝 비벼 드세요.” 주인 여자가 예의 그 싹싹하고 친절한 말투로 팁을 주고는 잽싸게 몸을 돌려 일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건너편 쪽의 여자를 유심히 보고 있자 R이 뒤를 한 번 흘끔 돌아보았다.
“우리도 성게비빔밥 시킬까?”
“아니.”
내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번엔 돌아보지 말아 봐. 저 사람, 내가 아는 사람하고 닮은 것 같아.”
“젊은데? 당신 소설 수업 듣던 학생인가?”
“아니. 학생들은 다 기억하지.”
“북토크 들으러 온 팬일까?”
“뭐래.”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내가 타박하자 R이 스스로 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게 있는데 슬램덩크는 사장 아들이겠지?”
“슬램덩크?”
슬램덩크가 아르바이트생을 지칭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내 말을 듣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을 꺼내려나 보다 싶었다. 여전히 목소리를 낮춘 채로 R이 말을 이었다.
“알바생 말이야. 사장 아들인 것 같아.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빈둥거리기만 하잖아. 그냥 방학 때만 잠깐 나와서 일하는 척하다가 나중엔 이 횟집 물려받겠지. 결혼하고 나면 아내한테 횟집 운영 다 맡기고 자기는 막 밖으로 놀러 다니고.”
“부럽네.”
R이 내심 슬램덩크의 운명을 질투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영화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걸까?
“그러고 보니 역 앞 모텔 기억나?”
내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 눈썹 문신?”
“여기 동네가 좀 그런가 봐. 일은 여자들이 하고. 남자는 없고. 여자들의 도시네.”
“참 아깝다 아까워. 나 같으면 새로 리모델링해서 뭔가 다른 거 하고 싶었을 텐데. 봐. 여름 성수기인데 손님도 별로 없잖아.”
R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문득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된 듯한 묘한 느낌. ‘여름 성수기인데 손님도 별로 없잖아’ 같은 대사에 이르자 특히 더했다.
“당신, 방금 한 말 그거 뭐야?”
“응? 뭐라고 그랬지?”
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되묻자 당황한 듯 R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자기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는지 되짚어 보는 듯했다.
“슬램덩크? 리모델링? 횟집 물려받는 아들?”
다 아니었다. 나는 긴가민가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딱히 내용이 겹친다기보다는 흡사한 상황이 반복된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모호한 감각을 붙잡으려니 꿈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대상이 흩어져서 금세 달아나 버릴 것만 같았다.
“이상해.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이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처럼 어디선가 들었던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 그 느낌.”
R이 뭘 이해한다는 듯 말했지만 반쯤은 또 시작이냐는 어투도 섞여 있었다. R에 따르면 나는 뭐 하나 작은 걸 예사롭게 넘기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진지했다.
“그리고 지금도 너무 이상해. 예전에 우리가 이런 대화를 이미 한 것 같아. 뭔가 연결된 부분을 건드린 것 같다고.”
R이 부정적인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도 알았다. 이런 대화를 한 적이 꽤 많았고, 그때마다 정체 모를 그 느낌만을 부르짖다 공허하게 대화가 수그러들었다.
“지금 상황을 이전에도 그대로 경험한 듯한 그런 느낌 있잖아. 그 뭔가 좀 아련하고 그립고.”
“데자뷔?”
“아니, 나도 알지, 데자뷔는. 그거 말고 다른 말이 있는데…….”
내 느낌을 좀 더 잘 설명하고 싶어서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 골몰했지만 이미 취기가 올라와서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좀 색다른 점이 그 느낌이라는 게 내가 현재의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고, 저 여자가 앉아 있던 저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약간 어긋난 느낌이야.”
나는 R의 어깨 너머로 여자를 다시 한 번 봤다. 내 시선을 따라 R도 여자가 있는 쪽을 돌아봤다. 여자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꿈꾸는 듯한 얼굴로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었다. 나는 기억 아닌 기억을 더 구체화하고 싶어서 온 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니까 저 야구모자의 시점으로 우리를 경험했다는 거지?”
“비슷해. 내가 저 여자고, 우리 자리에는 우리말고 다른 커플이 앉아 있었어. 그런데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어. 남자는 60대 초반, 상대 여자도 아마 그 정도겠지. 연인은 연인인데 부부는 아니고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같이 여행을 왔어.”
“그걸 어떻게 알아?”
“남자가 주인 여자를 부를 때 ‘고모’라고 하니까, 여자가 왜 ‘이모’라고 안 부르고 ‘고모’라고 부르냐며 의아해했거든. 보통 음식점에서 일하시는 분 부를 때 ‘이모’라고 하잖아. 그러니까 남자가 해명하기를, 자기는 어릴 때부터 이모보다 고모하고 더 친해서 그렇게 부르는 게 편하다고 했어. 그래서 난 이 사람들이 겉으로는 오래된 부부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은 부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챘지.”
“그럴듯한 추측이네. 비는? 비도 왔어?”
R은 반쯤은 포기한 듯 내 말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비도 왔지. 그리고 금방 그쳐.”
“그다음엔?”
“그다음엔…….”
나는 기를 모으려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지개가 있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해가 나와서 날이 환해진 뒤였다. 그리고 바다 위로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거대한 무지개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승용차 한 대가 도로변에 멈춰 섰다. R과 나는 부랑자들처럼 횟집 타운을 상징하는 플라스틱 문어 앞 벤치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차주가 밖으로 나오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그때까지 긴가민가하던 나는 휴대폰이 울리자마자 예상대로 그녀가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얀 셔츠를 입은 서점 주인의 말끔한 모습을 마주하자 곧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우리에게서 술 냄새가 날 게 분명했다. 자제한다고 자제한 게 다섯 병이었다. 원래는 회를 먹는 김에 소주 딱 두 병만 간단히 마시고 일어나자 했는데 그만 다섯 병이나 마시고 만 것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취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 이차를 갔겠지만 우리에게는 할일이 남아 있었다. 북토크. 아까는 둘 다 북토크 일정을 깜빡 잊어버렸다가 뒤늦게 서점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 안간힘을 썼는데 콜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R과 나는 번갈아 여러 어플리케이션을 돌리며 시도해 봤으나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 도시에는 운영하는 택시 자체가 몇 대 없는 것 같았고 그나마도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다들 운행을 멈추었다. 횟집 주인이 알려준 번호마저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나는 절망했다. 차를 타고 가는 시간만으로 보자면 가까운 거리겠지만 걸어가기엔 너무 멀었고 어쨌든 그러기엔 시간도 현격히 부족했고 대중교통 시스템 역시 서울처럼 촘촘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점 측에 전화를 걸어 우리를 좀 데리러 와주십사 하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네?”
서점 주인은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금방 달려가겠으니 전화나 잘 받으라고 당부했다. 서점 주인의 말이 전화‘를’이 아니라 전화‘나’ 잘 받으셔요, 라고 끝났다는 점이 신경 쓰였지만 상대방 말투에 비위가 상하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임수란 작가님이랑 피디님 맞으시죠.”
차에서 내린 서점 주인이 휴대폰을 들고 물었다. 걱정과 달리 선한 인상이었다.
“저요, 접니다.”
“타시죠. 지금 가면 많이 늦진 않겠어요.”
상대적으로 뻣뻣한 R을 의식하며 나는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도 너무 굽신거리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R은 고개를 한 번 까딱했을 뿐인데 어쨌거나 자기는 게스트고 사례비에 여행 경비는 포함이 안 되어 있으니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역시 상업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 마인드가 다르구나 생각했다. 나도 그처럼 당당해지고 싶었으나 R과 둘만 있을 때의 나처럼 못되고 할 말은 다 하는 내가 일할 때만큼은 쉽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십 분가량 차를 타고 가려니 마음이 차츰 진정됐다.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킨 듯했지만 그래도 이대로라면 제시간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녁인데도 날이 아직 훤히 밝았다. 조용히 운전만 하던 서점 주인이 문득 “작가님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랑은 좀 다르시네요.”라고 말했지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나는 바보처럼 그냥 웃기만 했다. R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눈을 한 번 굴렸다. 서점 주인은 우리를 먼저 내려 주고 자신은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다. R과 나는 그녀가 세워 주는 대로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서점은 역시나 규모가 상당했다. 서울보다 임대료가 저렴해서인지 넓은 일층 공간을 전부 서점으로 쓰고 있는 듯했다. R과 나는 유리창에 스스로를 비춰 보며 각자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바지와 샌들이 그새 다 말랐지만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보다는 어쩐지 추레해졌다는 생각이 들어 기운이 빠졌다. 내가 나인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어느 모로 봐도 오늘의 주인공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왜 나는 나일까. 우리는 왜 우리일 뿐일까. 나는 다 싫어져서 그대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힘을 내야지. 나는 맥없이 몸을 돌려 건물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 성난 얼굴의 젊은 남자가 엄청난 기세로 밖으로 튀어나왔다. 남자가 품안에서 꺼낸 번뜩이는 물체가 흉기처럼 보여서 소스라치게 놀랐고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남자는 필요 없는 물건을 옆으로 치우듯 나를 세차게 밀치고는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명일이 너······.”
R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아무런 예측도 대응도 준비하지 못한 목소리. 영원히 증발해 버릴 나의 과거. 나의 노스탤지어. 바닥에 쓰러진 채 나는 다음 장면을 상상하며 울부짖었다. 아빠가 나를, 우리 여자들을 두고 영영 떠나버린 다른 어떤 날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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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05-01
뉴 잭 스윙 박서련 시작은 사이렌 소리였다. 일하던 사람들이 별안간 화들짝 놀라 공장에 불이라도 난 게 아닌가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전주. 무슨 테이프인지, 가져온 사람은 또 누군지 같은 건 몰라도 하필 〈바꿔〉 시작 부분에 딱 맞춰 테이프를 감아 왔다는 점이 괘씸했다. 이정현을 좋아해서 공장 사람들과 함께 그 노래를 듣고 싶었든 단순히 전주 부분 사이렌 소리로 골탕을 먹이고 싶었든, 즉 선의든 악의든을 떠나 고의인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길고 신경질적인 전주 뒤 모두 제 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쳐 가고만 있어는 동감이었지만 그 노래를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매우 계속 듣고 싶다, 계속 듣고 싶다, 그저 그렇다, 듣고 싶지 않다, 전혀 듣고 싶지 않다 중 뭐냐고 하면 씨발 제발 그만 틀어 정도. 귀를 막으려면 손이 한 쌍 더 필요했다. 기존 왼손은 작업판을 누르고 기존 오른손은 인두기를 조작해야 하니까. 이정현한테는 큰 감정이 없었지만, 좋고 싫고를 떠나 아무 생각이 안 들었지만, 테크노 댄스 테이프를 굳이 공장에 가져와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야간 특근 시간에 튼 인간은 인두기로 대가리를 갈겨 주고 싶었다. 젊다는 건 뭘 모르는 거. 유행이랑 자기 취향을 구분 못 하는 거. 결정적으로, 자기한테 뭐가 맞는지 모른다는 거. 그런 젊음이 공장 안에는 썩어지게 넘쳐 났고 나를 그들과 구별 지을 힌트는 나 자신에게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씨발 너무 젊고 젊다는 게 이제는 조금 질린다. “오늘까지 이번 달 총 열일곱 날 일했고 하루에 열 시간 곱하기 이천이백 원, 곱하기 십칠 더하기 만근수당, 여기다가 특근수당 삼천 원 곱하기 이십일 시간···.” 귀에다 납땜을 해 버릴까 진짜. 시끄럽게 울려 대던 테크노 곡이 끝나고 조성모 노래가 나오기 직전 도요 언니가 근무 시간 내내 끊임없이 중얼대는 급여 셈법 소리가 들려왔고, 그러자,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기절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화가 났다. 인두기가 기판 대신 왼손 엄지를 지지고 있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은 것도 그래서였다. 잠깐이나마 열이 잔뜩 오른 머리가 300℃ 넘는 인두 팁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 앗, 뜨거, 씨발, 나는 덴 엄지손가락을 반사적으로 입에 물었다. 이끼 낀 불상을 핥을 때나 날 듯한 기이한 맛이 혀에 닿았다. 인두기에 얇고 집요하게 눌어붙은 겹겹의 땜납 자국이 그제서야 떠올랐고 입에서 나온 엄지손가락 옆구리는 희고 퉁퉁한 모양으로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꼴을 보고서야 화가 식었다. 몸 안에 꽉 차 있던 열기가 작은 틈을 찾아 새어 나간 것처럼 맥이 탁 풀린 거였다. 그래 씨발 관두자. 화내 봐야 나만 손해지. 멍청하게 인두기로 제 손 지지는 꼴을 어디 들키지나 않았을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야 청승 맞다 노래 꺼라, 누군가 큰 소리로 지청구를 놓았고 또 누가 대거리를 했다. 조성모가 왜 싫으냐 네가 나가라. 이만 이천 곱하기 십칠은
- 관리자
- 2025-05-01
미시적 동물 서이제 아무리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렇게까지 비가 내리는 건, 원치 않았을 것이다. 지난 새벽부터 내린 폭우는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하천은 범람했고, 교통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지하철역이 폐쇄된 것은 물론이고 버스 운행마저 중단되었다. 지대가 낮은 지역에서는 자동차들이 배처럼 떠다녔다. 뉴스에서는 하루 종일 각 지역 홍수 피해 현황과 구조 소식을 보도했다. 강풍에 간판이 날아가고 백 년 된 나무마저 쓰러졌다고 했다. 곧이어 집이 침수되어 대피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돼지나 오리와 같은 농가의 동물들이 물살에 휩쓸려 가는 모습이 나왔다. 누군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산사태 영상이 나왔다.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며 순식간에 도로를 덮치는 장면이었다. 지금쯤 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혹시라도 흙더미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린 건 아닐까. 아마도 비가 그치기 전까지, 아니, 비에 젖은 땅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너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슬프게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안에 틀어박혀 실시간 뉴스를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면서, 망가진 일상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저녁에는 설상가상으로 전기마저 끊어졌다. 창문을 열어보니 온 세상이 어두웠다. 거리는 이미 시커먼 흙탕물에 잠긴 상태였고, 불 꺼진 신호등과 가로수만 물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어디에서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미리 대피했거나 꼼짝할 수 없이 집안에 갇혀 있겠지. 나 또한 물이 빠지기 전까지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날 밤 무서운 꿈을 꾸었다. 집안까지 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물은 점점 불어 침대 높이만큼 차올랐고,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흙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내 몸은 물에 젖은 스펀지마냥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어마어마한 물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느낌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거대한 힘에 짓눌려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폭우로 기압이 낮아진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비가 오면 항상 몸이 피로했으니까. 한편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엄마는 내게 화를 낼 때마다 아빠를 들먹이곤 했다. 너는 어떻게 네 아빠랑 하는 짓이 똑같니. 내가 아빠를 연상케 하는 게 불쾌하다는 듯이, 내게 눈을 흘기면서. 그러나 정작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꼴 보기 싫다는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 둘을 모두 닮아 있었다. 외모나 성격, 심지어 건강 상태까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딱 반반씩. 어디에선가 듣기로 자식은 부모의 얼굴을 닮는 게 아니라, 장기를 닮는 거라고 했다. 장기가 닮아 얼굴이 닮는 거라고. 아빠는 간이 안 좋았고, 엄마는 위와 갑상선이 약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행한 사실은 둘 다
- 관리자
- 2025-05-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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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저도 참 좋아하는 속초와 양양에 대한 공간적인 배경에서 익숙한 경험과 기억을 추억하며 재밌게 읽었어요. 읽는 내내 극적인 상황을 마주하지 않겠구나하고 생각하며 읽어내려갔는데 끝끝내 예상치 못하게 반전을 마주했어요. 이게 소설이 인생과 삶을 담는 그릇인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들은 삶을 살아가며 일상이라 불리는 챗바퀴 속에서 내 앞에 나와 관련된 극적인 사건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극적인 상황을 마주하는 현재를 그저 살아가는 인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