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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웨이브

  • 작성일 2025-05-01

   빅 웨이브


정용준


   1.


   약속 시간을 십 분 앞두고 음료를 절반 넘게 마셨다. 초조하다. 열아홉 여자는 아이일까. 어른일까. 만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마흔셋. 열아홉을 두 번 곱해도 다섯이 남는 나이. 둘 사이에 가능한 게 있기나 할까. 좋아하는 가수가 누군지, 취미는 뭔지, 최근 본 영화와 드라마, 그런 이야기 하면 되겠지? 커피 마시고,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렇게 하면 되는 거겠지? 얘기 좀 나누고 깔끔하게 바로 헤어지는 것도, 조금 걷거나 이르지만 밥을 먹는 것도, 좋겠다. 할 말이 없으면 난감하겠지만 만나자고 한 건 내가 아니니까. 무슨 말이든 그 애가 할 거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검정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얼굴과 표정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쪽도 나를 한눈에 알아본 것 같았다. 그는 시선을 돌린 뒤 휴대폰을 들었다. 탁자 위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수양’ 그는 휴대폰에 손대는 나를 확인하더니 전화를 끊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태양, 씨?”

   “네. 맞아요.”

   네. 맞아요, 라니. 그렇게 답한 내가 어이없다.


   수양은 맞은편에 앉아 영수증을 내려보며 말없이 있었다. 사 주겠다는 것을 굳이 거절하고 자기가 주문했다.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다. 막막했다. 설상가상 장 대표에게 계속 연락이 왔다.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쉴 거라고 했다. 알겠다고, 해 놓고 ‘어디.’ ‘뭐해.’ ‘언제 끝나.’ ‘중요한 퀵이야.’ ‘지역이 맞는지만 맞춰 보자.’ 집요하게 메시지가 왔다. 나중엔 전화까지 와서 모드를 무음으로 바꾸고 액정이 보이지 않게 휴대폰을 뒤집었다. 

  

   최대한 들으세요. 

   똑똑한 이들의 충고를 마음에 새겼다. 입 닫고 듣기만 하자. 다짐했지만 별수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못 견디고 먼저 말을 했다. 수양은 대꾸도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말하는 나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자꾸 말하다 보니 아무 말이나 하게 됐고 퀵서비스 업무 시스템을 필요 이상으로 설명했다. 픽업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진상 손님을 험담할 때 수양은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카페는 조용했다. 여기저기 사람들은 있는데 말하는 이가 없었다. 대부분 혼자였고 함께 있어도 대화 없이 노트북을 보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우리를 노려보거나 시끄럽다고 항의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귀가 곤두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수양이 말했다.

   “자리 옮길까요?” 

  

   오후 세 시 반. 할 것이 없고 갈 곳도 없었다. 밥 먹기는 애매하고 영화 보자는 말을 할 자신은 없었다. 봄이 온 것 같지만 오래 걷기에는 추운 3월 초. 천변 도로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스몰 토크가 중요하다고 했다.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해서 나중엔 서로의 내밀한 부분까지 닿을 수 있는 마법의 대화법.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지, 밥은 뭐 먹었는지, 건강은? 요즘 컨디션은? 준비하고 있었다. 답을 들으면 그 답을 따라 하고 공감대를 확인한 뒤 삶의 영역 속으로 부드럽게 침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수양은 한 마디로만 답했다. 네. 그렇죠. 있죠. 괜찮아요. 글쎄요. 질문을 받으면 되묻는 것이 정상 아닌가? 수양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반드시 해야 할 질문을 했다.

   “만나자고 해서 놀랐어요. 혹시··· 제게 할 말이 있나요?” 

   수양은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좀 앉죠.” 

   

   복장을 갖춰 입고 줄지어 자전거 타는 사람들. 부드러운 후리스를 차림으로 느리게 걷는 노부부. 산책하는 연인과 솜뭉치처럼 작은 몰티즈에 끌려가는 아저씨. 등을 기대고 텅 빈 풍경을 바라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높아진 불안의 수위도 서서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수양은 말했다. 

   “엄마가 연락처 알려 줬어요.”

   엄마가, 라는 말을 듣자마자 긴장이 됐지만 이어질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수양은 잠시 하천을 바라보더니 깍지 낀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사라졌어요.”

   “엄마?··· 언제요?”

   “한 달 전.”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누나의 사라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안다. 지긋지긋했던 날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수양이 지금 무엇을 겪고 있는지,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았다. 모르겠는 건, 그래서 두려운 건, 누나가 내 연락처를 알려 줬다는 거다. 누나가 내게 원하는 건 한가지였다. 나타나지 않는 것. 찾아내지 않는 것. 그런데 내 연락처를 알려 줬다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수양이 내 휴대폰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또 장 대표였다.

   “중요한 전화 같은데··· 받으세요. 괜찮아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걸어가 수양을 등지고 전화를 받았다. 통화하면서 틈틈 뒤를 돌아봤는데 놀랐다. 구부정하게 앉아 턱에 손을 괴고 먼 곳을 바라보는 옆모습이 누나와 똑같았다. 좀처럼 감정이 보이지 않는 표정. 하염없이 깊어지는 눈동자.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주눅 들던 못난 내 마음도 똑같이 되살아났다. 

  

   “바쁘세요?” 

   “아뇨. 오늘 쉰다고 했는데 자꾸 연락하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수양은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봤다.

   “말 편하게 하시면 안 돼요?” 

   “어, 편해요. 이게.”

   “제가 안 편해요. 저한테 그렇게 말 높일 필요 없잖아요.”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한번 말이 높게 나가니 낮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 그래··· 말 편하게 할게.” 

   “배달은 오토바이로 하세요?”

   “아니. 승합차로.”

   수양은 으음, 소리를 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가요. 배달.”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수양을 봤다. 수양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얘기는 차에서 해도 되니까.”

  


   2. 

 

   앞으로는 승합차라고 말하지 않겠다. 핸들을 쥔 손바닥에 땀이 났다. 물건만 싣고 다녀서 몰랐다. 다마스는 분류하자면 승합차에 속하지만 너무 작고 허접해서 승합차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차였다. 보조석에 앉은 수양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좌석은 거의 직각이라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어야 했고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무릎이 대시보드에 닿았다. 속도를 줄였음에도 방지턱을 넘을 때 머리가 천장에 꿍, 부딪혔다. 민망함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안.”

   “괜찮아요.”

   표정이 없던 수양의 얼굴은 상기됐고 약간 들떠 보였다. 성남에서 물건을 받아 용산역에 배달하고 서울역에 들러 상자를 픽업해 하남에 배달해 주는 일정이었다. 지체와 정체를 반복하며 가다 서다 했는데 동부간선도로에 들어서니 한산해졌다. 답답했던 마음이 뚫리는 것 같았다. 기어를 5단으로 옮기고 속도를 높였다. 수양은 기어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스틱이에요?”

   “요즘 이런 차 거의 없지. 운전할 줄 알아?”

   “두 달 전에 땄어요. 재밌어 보이네요.”

   “이게 손맛이 있고 사실상 진짜 운전이라고 할 수 있지. 저속으로 빌빌거리다가 이렇게 뻥 뚫린 도로에 들어서면 기어를 고단으로 착착 옮기고 달리는 재미가 있어.” 

   “더 빨리는 못 가요?”

   계기판 바늘은 70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1차선의 차도 3차선의 차도 2차선의 다마스를 지나쳤고 뒤에서 따로 오는 트럭도 차선을 옮겨 다마스를 추월했다.

   “이 차는 70이 최대야. 80도, 오버하면 90까지도 가능은 한데.” 

   액셀을 깊게 밟았다. 속도는 조금 올랐지만 차체가 몹시 흔들리고 굉음이 났다.

   “이렇게 위험해져.” 

   수양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변북로에 들어서고 차 안엔 침묵이 고였다. 더는 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실패로 의기소침해진 것도 있지만 친해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둘 사이를 망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상하다. 예상했던 기분이 아니다.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미어지거나, 미안함에 고개를 들 수 없는, 그런 마음도 없었다. 뭐랄까, ‘닮았네. 말투나 표정이나 그냥 다 누나를 빼다 박았어. 유전자란 참 신기한 것이군.’ 이런 생각만 들었다. 딸을 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피의 당김에 속수무책일 줄 알았는데 담담했고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수양을 만나기 전엔 둘 중 하나의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웠던 아빠를 만나 눈물 콧물 쏟으며 엉엉 우는 다 큰 딸의 모습. 무책임하게 사라져 버린 아빠를 향한 증오심에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 둘 다 아니었다. 서운할 정도로 수양은 덤덤했다. 내내 한강만 바라보던 수양이 말했다. 

   “죽었을까요?”

   잠시 과거를 떠올리며 몇 개의 사건과 몇 개의 대화를 기억해 냈다. 딸에게 할 수 있는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빠르게 골라 봤다. 

   “기다리면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날 거야. 옛날부터 그랬어. 네 엄마. 취미자 특기지.”

   수양은 웃음을 터트렸다.

   “옛날부터요? 아, 정말.”

   수양은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누르며 비볐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요··· 불안해서. 전화도 계속 꺼져 있고. 돈도 많이 놓고 갔어요. 한동안 부족하지 않게. 냉동실을 봤거든요? 한 끼씩 먹을 수 있게 국과 밥을 다 소분했더라고요. 안 쓰는 물건이나 창고에 방치된 가전제품까지 정리해서 노트에 적었고 리빙 박스도 계절별로 포스트잇을 붙였어요. 여름 반팔. 가을 코트. 이런 식으로요. 이렇게까지 준비하고 사라진 적 있었어요? 정말··· 돌아와요?”

   사라진 적은 많지만 돌아온 적은 없었다. 그때마다 내가 찾아낸 것뿐. 처음 찾았을 땐 다른 지역에 있었고 두 번째 찾았을 땐 아이가 있었다. 세 번째는 나를 협박했다. 찾아오면 눈앞에서 죽을 거라고. 

   “모르겠네. 하지만··· 괜찮을 거야.”

   수양은 글로브박스를 손가락으로 톡 눌렀다. 문이 열리면서 동그랗게 말린 빨간색 목장갑이 튀어나왔다. 수양은 장갑을 다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궁금했어요. 어떤 분이실지. 가족 관계 증명서 뗄 때마다 발견되는 이름. 하남 거주. 성남에서 하남. 이렇게 가까운데 왜 만날 수 없는 걸까. 이혼한 것도 아니면서. 멀쩡히 가족이라고 나오는데. 둘 중 누가 잘못한 거예요?”

   “엄마가 내 이야기 한 적 있어?” 

   수양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별로.”

    돌아가는 길은 퇴근 시간과 겹쳐 많이 막혔다. 속력을 내지 못하고 켜지고 꺼지는 앞차의 빨간 브레이크 등만 바라봐야 했다. 창밖을 보는 수양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예쁘다.”

   일렬로 늘어선 자동차 불빛일까.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붉어지는 하늘일까.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한강의 물결일까. 무심코 말했겠지만 수양의 그 한마디가 무겁던 마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별걸 다 물어본다, 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수양은 사소한 것까지 궁금해했다. 사는 곳은 어딘지. 빌라인지 아파트인지. 같이 사는 사람은 있는지. 혼자 있으면 뭐 하는지. 취미는 있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오이를 잘 먹는지? 대화를 위함은 아닌 것 같았고 그냥 궁금한 것 같았다. 답을 들으면 오케이, 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취조당하는 것 같았지만 수양이 내게 말을 걸어 줬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았다. 수양도 종종 자기 이야기를 했다. 심리학과에 진학했지만 오티도 참석 안 했고 개강했는데도 학교를 안 갔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학교를 다닐 수 있겠어요. 그냥 휴학할 생각이에요.’ 엄마 이야기는 좀처럼 꺼내지 않았다. 나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엄마에 관해서는 더더욱.

  

  

   3.


   배달을 끝내고 상가 계단을 내려갈 때 견딜 수 없이 담배가 당겼다. 해는 지고 하늘은 짙은 파랑에서 검정으로 캄캄하게 물들고 있었다. 차는 편의점 앞에 비상등을 켜고 서 있었다. 수양은 보조석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의 작은 빛이 수양의 얼굴만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무엇을 보고 싶은 걸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음은 얼마나 깊고 감정은 어떤 상태인지, 예측조차 못 하겠다. 함께 있지만, 앞으로도 함께 있고 싶었지만, 끝내 알 수 없고 닿을 수도 없던 사람. 나는 사랑이라 믿었던, 하지만 그 사람은 아니었던, 그 절망감. 되살아나려 했다. 수양, 하고 소리를 내어 말해 봤다. 한 단어가 입 밖으로 나왔을 뿐인데 갈비뼈 안쪽에서 뭔가 징, 하고 울렸다.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애썼던, 누나의 부탁대로 상관하지 않으려 했던, 누나의 딸이지만 내 딸은 아닐 수도 있는, 그러나 내 딸이어야 하는, 내 성과 내 이름 한쪽을 물려받은 아이. 어떤 답이든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 물어보지 않았고 나중엔 궁금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깊은 잠에 빠져 무심히 펼친 손바닥에 검지를 갖다 대면 부드럽게 쥐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던 작지만 강한 손. 내가 붙잡지 않아도 이 아이가 나를 놓지 않겠구나. 수양을 품에 안고 양양 바다 앞에 섰을 때 맞던 바람의 느낌이 떠오른다. 강풍 앞에서 눈 감지 않고 빳빳하게 목에 힘을 준 채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이제 막 돌을 넘긴 아이의 의연한 눈동자도. 그때 난 다짐했다. 뭐든 하겠어. 무엇이든 감수하겠어. 용기가 필요하면 용기를 낼 것이고 능력이 필요하다면 더 노력할 거야. 눈물이 고였고 마음엔 파도가 쳤다. 시작은 이상했고 과정도 엉망이었지만 어쨌든 우린 필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야. 막연하게 믿고 또 믿었다. 

  

   끝내 나를 받아 주지 않은 누나 탓일까. 그런 누나를 핑계로 너무도 쉽게 놓아 버린 내 탓일까. 어쩌면 수양은 내 딸이라기보다는 상처 주는 사람을 사랑한 거지 같은 업보를 함께 나눠진 형벌의 동료가 아닐까. 무슨 아빠가 이런 생각을 하나. 수양이 내 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수양의 아빠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자격이 없다. 

   

   차 문을 열고 수양에게 말했다.

   “배고파?”

   “괜찮아요” 

   “하지만 먹을 수는 있는 정도?”

   수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허, 하고 웃고 말았다.

   “왜요?”

   “아니. 별게 다 비슷하다 싶어서. 엄마도 늘 그렇게 말했거든. 막상 먹으면 나보다 더 많이 먹으면서.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먹여서 보내야지. 딸을 만났는데.”

   수양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괜찮다면··· 나 담배 한 대만 피워도 될까? 그동안 뭐 먹고 싶은지 생각 좀 해 줄래?”

   수양은 대꾸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도, 라고 눈이 말하고 있었다.

  

   담배 한 개비를 수양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언제부터?”

   수양은 손바닥을 보인 뒤 파우치에서 전자담배를 꺼냈다.

   “고2요.” 

   빠른 거 아닐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입장이 아닌 것 같아 참았다. 수양이 내뿜은 연기에서 바닐라 냄새가 났다. 

   “뭐 물어봐도 돼요?” 

   나는 고개를 돌려 수양에게 닿지 않도록 연기를 뿜으며 끄덕였다.

   “제 이름 진짜로 두 분이 상의하고 지었어요? 한 글자씩 따서?”

   “맞아. 김수진의 수. 이태양의 양. 그래서 수양.”

   수양은 하, 하고 웃었다.

   “왜. 이름이 별로니?”

   “수양. 그게 다른 사람의 자식을 뜻한다는 것은 알고 계셨어요? 수양딸.” 

   최근 유행하는 이름으로 짓자고 했더니 누나가 반대했다. 살면서 김수진 이수진 박수진 정수진 셀 수 없이 많은 수진을 봤고 심지어 같은 반엔 김수진1 김수진2, 김수진A 김수진B, 큰 수진 작은 수진도 있었다고 했다. 뭔가 특별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름은 내가 반대했다. 태양으로 사는 삶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누나가 수진에서 하나 태양에서 하나 따서 정하자고 했고 이견 없이 동의했다. 

   “몰랐어. 와, 나 진짜 멍청하다. 그렇게는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 

   “됐어요. 엄마는 지금까지도 모를 거예요.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수양은 바로 묻지 않고 필터를 몇 모금 더 빨았다. 표정이 진지해졌다.

   “두 분 어떻게 만났어요? 나이 차이도 많이 나던데.”

   “네 살 차이. 많은 건가?”

   수양은 어깨를 한번 올렸다 내렸다.

   “남자가 네 살 아래. 흔치는 않죠.”

   어디에서부터 말해야 할까? 선생과 제자로 만났던 입시학원 시절? 대학에 입학하고 누나, 라고 처음 불렀던 3월? 군대 다녀와서도 같은 마음이면 그때 다시 찾아와, 라는 그 말을 믿고 늠름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던 9월의 어느 날? 잠깐 만나 줬던 한 달을 말해야 할까? 누나가 그 시절을 정식으로 취소했으니 그걸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수양이 궁금한 건 연인으로서 만남을 말하는 것일 텐데, 그런 순간은 없었다. 나는 누나를 좋아했지만 내가 좋아하듯 누나가 나를 그렇게 좋아한 적은 없었다. 

   “어떻게 만났다기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녔지.”

   “서로. 사랑하게 됐어요?”

   “나는 좋아했지. 엄마는 아니었고.”

   “··· 사랑도 안 하면서 애를 가졌어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누나는 경고했다.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말라고. 간지럽다고. 그런 특별하고 대단한 것 같은 감정 자기는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엄마가 한두 번 받아 줬어. 더 자세하게 말하면 아픈 기억이 살아날 것 같은데?”

   수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차도 수양도 조금씩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 

  

  

   4.

  

   밥 먹고 수양을 집까지 데려다줬다. 집이 어디냐고 물어봤지만 수양의 집은 잘 알고 있었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찾아왔으니까.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냥 오곤 했다. 근처에 있다 보면 우연이라도 누나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언제 또 볼 수 있는지, 수양은 물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라고 답했다. 수양은 뜸을 들이다 고개를 푹 숙이며 나직이 말했다.

   “조심히 가세요.”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수양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내가 떠나는 모습을 봐야 움직이겠다는 얼굴이었다. 저속으로 운전하면서 사이드미러로 수양을 봤다.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코너를 돌 때 수양은 움직였는데 아파트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근처를 한 바퀴 돌아 수양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수양은 거북이 같은 느린 걸음으로 근린공원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불 꺼진 공업사 앞에 주차하고 수양의 뒤를 따라 느리게 걸었다. 수양은 아무도 없는 테니스 코트를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도 안 하고 음악도 안 듣고 책도 안 보고 그냥 선인장처럼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수양은 나를 보고 놀란 것 같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 허세가, 그 허약함이, 마음 아팠다. 수양은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찾으려고요.”

   나는 알았다. 엄마 찾겠다는 그 말은 핑계고 엄마가 없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무서움이든, 그리움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엄마의 부재가 느껴지는 집이라는 공간이 저 애를 견딜 수 없게 한다는 것을. 그 견딜 수 없음이 존재하지 않는 아빠에게 연락이라도 해 보려는 마음까지도 만들어 냈겠지.

   “집에 놀러 가도 돼?”

   수양은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안 했다. 어떤 말로 거절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듯 꾹 다문 입술이 움찔거렸다. 나는 말했다.

   “집 더러워?”

   “아뇨.”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수양은 현관을 닫았다. 시간은 한참 흘렀다. 산을 등지고 선 복도형 구옥 아파트. 복도에 서서 어두컴컴한 산을 봤다. 등산로 입구에 가로등이 있었지만 산엔 한 방울의 빛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진짜로 누나는 어디에 간 걸까. 누나는 말하곤 했다. 당장 죽어야 할 것 같은데 사람들 때문에 어렵다고. 이렇게 사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데 죽어 버려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는 건 죽는 것보다 싫다고. 누나는 내 가슴을 밀며 울었다. 

   “살고 싶지 않아. 계속 그 생각만 하다가 겨우 잠드는 게 끔찍해. 살아 있다는 감각이 징그럽다는 거. 알아? 그게 뭔지 알겠어?”

   나는 바보처럼 서 있었다. 누나 말은 늘 너무 어려웠다. 

   “기쁜 것도, 기쁘지 않은 것도, 슬픈 것도, 그 슬픔이 지속되는 것도, 다 버거워. 무의미해. 무의미해도 의미가 있다는 그런 말도 끔찍하고.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당장 죽는다면 아쉬운 건 사용 못 한 쿠폰이나 물건이겠지. 다 읽지 못한 책과 누구도 이해 못 할 노트와 나한테만 의미 있는 사진들. 그런 것들을 지키려고 사는 게 삶이라는 것이 거지 같아.” 

   그 말을 듣고 나는 머저러처럼 말했다.

   “나는 안 지켜? 누나에게 난 뭐야?”

   그때 누나가 뭐라고 말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떨리는 눈동자 안쪽에서 흔들리던 작은 무엇. 그땐 빛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건 하얗게 휘도는 소용돌이였다.      

  

   식탁 의자에 앉아 누나가 없는 누나 집을 봤다. 거실이 넓고 방은 작고 베란다는 크다. 체리 몰딩임에도 전반적으로 블랙 앤 화이트로 꾸민 인테리어가 세련돼 보인다. 냉장고에 어린 시절 수양의 사진과 여러 엽서들이 붙어 있었다. 강아지. 고양이. 애니메이션 캐릭터. 주로 귀여운 이미지들이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누나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누나가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책장 절반을 채운 택배 상자와 향초를 만드는 용품들이 누나의 날과 달을 상상케 했다. 전반적으로는 깨끗했지만 집을 서둘러 치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베란다 한쪽 구석에 재활용 쓰레기와 라면 용기가 꽤 많이 모여 있었다. 빨래 바구니에 빨래가 가득했고 식기 건조대에 산만하게 쌓여 있는 그릇들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카메라처럼 서서히 움직이던 시선이 멈춰 섰다. 

  

   도쿄.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가족 여행. 두 살 된 수양과 함께 우에노 공원을 걷고 환하게 웃는 누나와 긴자에서 간식을 먹었다. 도쿄타워 앞에서 사진을 찍고 하라주쿠에서 부엉이 열쇠고리를 샀다. 야경이 보이는 작은 호텔방에서 맥주를 마실 땐 이 순간이 너무 완벽해서 행복했고 이 행복이 영원할 리 없다는 예감에 슬퍼지려 했다. 다음 날 아침. 누나가 가장 기대하는 우키요에 미술관에 갔다. 어차피 판화라서 원본이라는 개념이 없을 텐데도 누나는 유명한 그림 앞에 홀린 듯 서 있었다. 

   “대단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지만 솔직히 그저 그랬다. 바다를 표현한 쨍한 파랑과 발톱 모양의 파도, 세밀하게 표현된 물거품이 인상적이었지만 그뿐이었다.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는 많이 본 그림이었고 익숙했던 그 느낌 그대로였다. 저 파도는 일본, 하면 떠오르는 대표 이미지가 아닌가. 일본 미술관에서 봤다고 해서 다른 기분이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나의 눈동자에 맺힌 파도는 움직이고 있었다. 불안할 정도로 아름다운 물거품이 일고 있었다. 누나는 기념품점에서 그림이 인쇄된 엽서를 구입했다.

  

   그때 그 엽서. 누나의 주방 작은 창에 붙어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다가섰다. 비닐 포장 속에 들어 있지만 엽서는 흘러간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 줬다. 그때 그 모습이 아니었다. 빛이 바래고 채도가 빠져 쨍했던 파랑은 옅어지고 거의 흑백사진처럼 보이는 파도였다. 그러나 그때 모습보다 강렬했다. 미술관에서의 바다가 여름의 오후였다면 누나 집에서 발견한 이 파도는 겨울의 새벽 같았다. 춥고 날카롭고 사나운 물거품. 모든 숨을 빼앗는 잔인한 바다. 누나 말이 맞았다. 정말 대단했다. 엽서는 열두 시 방향에만 스카치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아랫부분을 살짝 들어 뒤쪽을 봤다. 

   - 수양. 태양. 수진. 도쿄에서. 

   누나의 글씨였다. 

          

   홈웨어로 갈아입은 수양은 훨씬 어려 보였다. 강아지가 프린팅된 연분홍색 후드티에 안경을 끼고 머리카락은 위로 질끈 묶었다. 편해 보였고 밖에 있을 때와 달리 표정도 많았다. 수양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다가 물었다.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무렇게나 불러도 돼. 너 편한 대로.”

   “편한 호칭이 하나도 없는데.”

   “아저씨라고 불러.”

   그건 좀 그런데···. 수양은 작게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엄마가 왜 그런 마음을 갖는지 알아요?”

   “어떤 마음?”

   수양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무 말도 안 해서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죽고 싶은 거?”

   수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몰라···. 늘 알고 싶었지. 옛날부터 그랬어. 죽는 건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슬픔과 고통은 삶 쪽에 있다. 그러니까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설득까지 하고. 너한테도 그랬지?” 

   “네.”

   “그랬다고? 어이없다. 무슨 딸한테까지 그러냐. 네 엄마는.”

   “맞아요. 진짜 짜증 나요.”

   “너도 반박 못 했지? 하도 말을 잘하고 논리적이어서.”

   “네.”

   “나도.”

   수양은 웃었고 나도 웃었다. 수양은 흐으, 하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은 바다에 갔는데요. 엄마가 절벽 끝에 서 있는 거예요. 거기 서서 바다 구경하는 사람 많았거든요. 달랐어요. 엄마는. 표정도. 자세도. 금방이라도 빠질 것처럼. 다이빙하는 사람처럼. 몸을 웅크리고.”

   수양은 의자에 두 발을 올리고 껴안으며 웅크렸다.

   “들어갈 수 있는 바다가 아니었어요. 파도가 높고 강해서 절벽 근처가 물거품으로 뒤덮여서 온통 하얀 색이었어요.”

   고개를 돌려 주방 창문에 붙은 파도를 봤다.

   “어디였어? 거기가.”

   “동해 바다였어요.” 

   “양양?”

   수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폰으로 양양을 검색하고 이미지를 살폈다. 묘사와 딱 맞는 사진이 바로 나왔다. 새까만 절벽과 주변을 감싸는 하얀 물거품. 사나운 파도. 하조대였다. 

   “여기야?”

   수양은 사진을 보고 말했다.

   “맞아요.”

   “진짜로 빠지려고 했어?”

   “아니요. 아니요. 그냥 느낌이 그랬다는 거고. 엄마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어요.”

   수양은 안경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오랫동안 눈을 비볐다. 

   “그동안 엄마‧‧‧ 진짜 애썼어요. 그건 내가 알아요. 최선을 다했다는 거.”

   수양은 손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중학교 졸업할 때 엄마가 정말 힘들다고, 못 살 것 같다고, 했거든요. 그때 내가 울면서 빌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힘들어도 좀 버텨 달라고.”

   수양은 울먹였고 다음 말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밤마다 엄마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침대에 누워서는 온갖 나쁜 상상에 시달린다는 낯선 딸에게 아빠라는 자가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몰라서 두 손으로 내 무릎을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겨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좀 자. 혼자 있게 안 할 테니까. 내가 찾아볼게. 알아볼게.”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봤다. 예능을 보고 지나간 홍콩 영화를 봤다. 바둑도 보고 낚시도 보고 고독한 표범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봤다. 시간이 흘렀다. 멍하게 있었다. 옥 목걸이를 팔고 있는 홈쇼핑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잠이 든 것도 아니고 눈을 다른 곳에 둔 것도 아닌데 화면이 언제 저렇게 바뀌었을까. 목걸이를 착용하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람. 너무 예쁘다고 박수 치는 사람. 사는 게 다 빡세 보였다.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눌렀다. 무거운 고요가 순식간에 거실을 채웠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천장을 봤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믿었다. 달라졌다는 누나의 말을. ‘아이가 생기니까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아.’ 거듭 확인했다. 정말이냐고.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달라지기로 결심했다고. 믿음이 생겼고 그 믿음대로 마음도 삶도 달라질 거라고 했다. 그렇게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누나는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놀라지는 않았다. 서운하지도 않았다. 달라졌다는 누나의 말.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아니, 달라졌을 것이다. 수양이 생겼고 내 끈질긴 요청에 혼인신고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삶의 질긴 관성이 원래의 자리로 끌어당겼을 것이다. 나는 모르는 누나의 그 지긋지긋한 무의미의 구덩이 쪽으로. 질질 끌려가는 누나를 보고도 멍청이 같은 나는 몰랐다. 

  

   사랑이라, 믿었다. 사라짐. 그것은 누나가 나를 사랑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누나는 자기 때문에 내가 불행하까 봐 걱정했다. 삶이든, 죽음이든, 엉망으로 무너진 자기 모습이 내게 발견될까 두려워했다. 누나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공허한 마음을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 빈 곳을 어떻게든 채워 넣으려고 발버둥 치며 오버하는 사람. 의욕 없이 누워 있는 자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는 사람. 암막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며, 환기! 소리치는 사람. 힘없이 늘어져 있는 이의 입을 벌려 억지로 알약을 밀어 넣고 필요하다면 폐든 신장이든 한 쪽씩 떼어 줄 각오로 기꺼이 자기 가슴과 배를 열어 보이는 사람. 누나가 의욕을 잃을 때마다 나는 누나의 혈관에 내 혈관을 이어 뜨거운 피를 콸콸 수혈까지 하려고 했다. 나는 내 마음과 행동에 자부심이 있었다. 긍정적인 사람 특유의 오만함이 있었다. 누나라는 차가운 얼음을 언젠가는 녹일 진짜 태양이라고 믿었다. 얼마나 질렸을까. 미안함에 한숨이 난다. 

  

   어슬렁거리며 거실을 맴돌았다. 냉장고를 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락앤락. 반찬가게에서 방금 사 온 것 같은 반찬들이 가지런하게 담겨 있었다. 하지만 상한 냄새가 많이 났다. 누나의 바람과 달리 수양은 저 반찬을 손도 대지 않고 라면만 먹었을 거다. 맥주 한 캔이 간절했다. 후우, 소리를 내며 길게 숨을 뱉어 낸 뒤 냉장고 문을 닫았다. 허공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딨는 거야.”

   창문에 붙은 파도를 봤다. 움직이는 것 같다.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희미하게 짠 내도 나는 것 같다. 파도 저 너머 우뚝 서 있는 후지산을 열심히 오르는 누군가를 본 것도 같다. 창문을 열었다. 캄캄한 산에서 무서운 해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수양에게 문자를 보냈다.

   - 자?

   - 아뇨.

   - 언제까지 안 자?

   - 노력 중. 평소 아침까지 못 자요. 

   - 어차피 안 잘 거면 엄마 찾으러 갈까?

   방문이 열렸고 수양이 걸어 나왔다. 

   “어디로요?”

   

  

   5.


   아침이 올 때까지 못 잔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수양은 차에 타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시끄러운 엔진 소리도, 텅텅 튀는 불편한 좌석도, 깊은 잠을 흔들지 못했다. 내비가 예상한 시간은 2시간 20분이었지만 다마스로는 더 걸릴 것이다. 그래 봐야 3시간, 늦어 봐야 4시간 안에는 가겠지. 좌석 뒤에서 박카스 한 병을 꺼내 마셨고 담요로 수양을 덮어 줬다. 새벽의 고속도로는 조용했다. 앞에도 뒤에도 차가 없었다. 캄캄하게 열려 있는 길고 긴 도로는 아득하고 부드러웠다. 끝없이 멀어지며 깊어지는 저기 어둠의 한 점을 향해 다 빨려드는 것 같았다. 우주 비행사의 고독한 항해가 이런 기분일까? 편안해서 좋았고 어떤 방심과 충동에 모든 것을 잃게 될까, 두려웠다. 평일 새벽의 고속도로를 홀로 달리는 못난이 승합차. 왜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려 했다. 캄캄한 우주를 떠도는 외톨이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나를 그리워하는 순간을 알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누나가 나를 그리워할 때 귀신처럼 전화하고, 누나가 나를 필요로 할 때 짠, 하고 나타났다면, 별수 없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자기가 죽고 싶든 말든. 그래서 내가 불행하든 말든. 그냥 함께 있어야 할 운명이구나, 같이 살 수밖에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귀가 먹먹해진다. 다마스는 높은 산 높은 능선을 달리고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만들어 내는 협소한 빛 웅덩이 바깥에서 과묵한 밤의 동물들이 열심히 달려가는 작은 자동차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누나가 운전석에 있고 내가 보조석에 앉던 시절. 내 품에 안겨 잠든 아기의 이마를 검지로 살살 어루만지며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던 그 시절 누나는 말했다.

   “태양아. 네가 그만 살고 싶어지면”

   “안 죽고 싶어.”

   “그냥 좀 생각해 봐. 만약에. 꼭 그럴 수밖에 없어진다면‧‧‧ 어떤 방법을 택할 것 같아.”

   “몰라. 난 자살 안 해. 누나가 그냥 나 죽여. 애가 듣고 있는데 못 하는 말이 없어.” 

   누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지 않았지만 불안함에 물을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죽고 싶어 환장한 누나는?”

   “몰라.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봐도 나 죽었는데 내 시체 보고 네가 놀라고 울고 자빠지고 전화하고 내 무거운 몸 들고 끌고 치우고‧‧‧ 그런 생각 하면 싫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내가 예상한 건 바다. 해변에 쓸려 오지 않도록 최대한 멀리까지 수영한 다음 깊이 잠수하는 거지. 그렇게 끝.”

   “누나 수영 잘하잖아. 숨 막히면 생존 본능으로 다시 헤엄쳐 나오게 될걸?”

   누나는 말없이 정면만 바라보다가 왼쪽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꾼 뒤 오른손을 뻗어 수양의 볼을 어루만졌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20분 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어두워지고 더 고요해지고 더 깊어지는 길. 바다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액셀을 밟는 발에 힘을 조금 빼며 속도를 늦췄다. 고속도로에서 고속으로 달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해성처럼 유성처럼 나를 스쳐 가던 승용차도 화물차도 지금은 없다. 하나도 없다. 한 달 전. 그러니까 2월의 어느 밤.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아파트 층계참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업무와 관련된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근무 중에 전화를 받지 못한 건 태반이다. 대부분 모르는 번호이고 귀찮은 요구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해대는 무례한 고객들이다. 나중에 누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꺼져 있었다. 밤에도 새벽에도 다음 날 아침에도 전화를 걸었다. 누나는 받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수양에게 연락이 왔을 때, 느닷없이 그때 그 전화가, 받지 못했던 누나의 전화가, 떠올랐다. 아파트 계단의 눅눅한 곰팡이 냄새. 돌계단의 차가운 온도까지 되살아났다.

  

   잠에서 깬 수양은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찡그렸다. 떠오르는 태양이 수양의 얼굴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덮고 있던 담요로 잠시 얼굴을 가렸다가 담요를 내리고 멍하게 태양을 봤다. 빨간 수평선과 일렁이는 바다도 봤다.

   “우와, 대박.”

   수양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도착했어요?”

   “응.”

   수양은 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머리카락을 정리한 뒤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 아닌 것 같은데.”

   “저기 보이는 돌산이 하조대고 여긴 하조대 해수욕장. 조금 더 자.”

   수양은 대답 없이 태양을 봤다. 조금씩 커지고 점점 하얗게 변하는 불덩어리. 

   “너 자고 있을 때 하조대 가 봤거든? 거긴 아니야. 걱정 마.”

   뭐가 아니에요? 라고 말하는 눈으로 수양은 나를 쳐다봤다.

   “내가 알아. 네 엄마는 파도를 좋아하는데 하조대 파도는··· 사람이 헤엄쳐서 넘을 수 있는 파도가 아니더라고. 네 엄마는 원하는 파도가 있어. 살든 죽든 나름대로 계획이 있는 사람이야.”

   수양은 반응하지 않고 해변을 봤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서서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 엄마가 있어요?”

   “글쎄. 찾아봐야지.”

   

   피곤하다. 눈이 뜨겁고 머리도 아프다. 수양은 해변을 거닐며 사진을 찍었다. 전신 슈트를 입은 여자가 자기 키보다 큰 패들보드를 들고 바다를 향해 걸었다. 목줄 없는 하얀 개가 전력으로 모래사장 위를 뛰었고 까만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뭔가를 나누고 있었다. 만약에 누나가 여기에 왔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진을 찍을까? 수영을 할까? 울까? 서핑을 할까? 아니면 어디 전망 좋은 작은 방을 얻어 하릴없이 바다만 보고 있는 걸까. 가끔 상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사고 맛있는 식당이 어디 있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어 내고 수양 옆에 섰다. 

   “수양.”

   “네.”

   “파도를 보면 타고 싶어. 아니면 그냥 막 휩쓸리고 싶어?”

   “둘 다 싫은데요.”

   “그래도 하나 말해 봐.”

   “타는 게 낫죠. 이제 겨우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그렇지.”

   수양과 나는 말없이 파도를 봤다. 사납게 다가왔다가 신기하게 발밑에서 스르르 녹으며 사라졌다. 하얗게 깨지고 부서지는 포말. 반짝이며 구르는 모래 알갱이들. 아름다웠다. 파도 다음에 파도. 파도 위에 또다시 파도. 

   “엄마가 아빠에 대해서 말해 준 적이 있었거든요? 엄청 좋은 사람이었다고. 멋있다고. 그랬어요. 엄마를 엄청 사랑해서 심장까지 뽑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진짜 심장 꺼낼까 봐 도망갈 수밖에 없었대요. 아빠 살리려고 헤어졌다는데요. 진짜예요?”

   “그런 셈이지.”

   흠, 수양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검지로 턱을 만졌다. 그리고 하아, 소리를 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질문이데‧‧‧ 엄마요. 진짜로 왜 그래요? 이유가 뭐예요?”

   “이유가 있겠지. 내가 많이 물어봤거든? 그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답도 들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이상하네. 하나도 생각이 안 나.”

   “이유가 있겠죠. 그나저나 진짜로 여기서 엄마 찾아볼 거예요?”

   “찾아보자. 이왕 왔으니까.”

   수양은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 전에 눈 좀 붙이셔야겠는데요. 눈이 빨게요.”

   수양은 몸을 돌려 차를 향해 걸어갔다. 배고프다. 뭐 좀 먹어야겠다.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아 라면을 먹어도 좋겠고 어차피 오늘은 글러 버렸으니 맥주 한잔하는 것도 좋겠다. 갑자기 맛있는 맥주가 먹고 싶네. 이런 바다에 어울리는, 시원하고 청량한, 병이 예쁘고 이름도 예쁜, 이를테면 빅 웨이브 같은. 물어봐야지. 술 마셔 본 적 있냐고. 아빠랑 술 한잔 어떠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걸음이 왜 이리 빠른지 수양은 저만치 멀리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폭, 폭, 박힌 종종 발자국. 새가 걸어간 자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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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오

히데오 서장원 히데오에겐 몇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친부가 일본인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일본 교토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어느 저녁나절, 한적한 거리를 걷던 중에 히데오는 이 사실을 내게 말해 줬다. 이후 히데오는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씩 더 들려주었고, 나중에 나는 히데오의 생애 초반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꿸 수 있게 됐다. 히데오가 태어난 곳은 교토 외곽으로, 한국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행지 교토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주택가였다. 히데오는 그곳을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습한 여름 날씨나 우듬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자기 기억인지 교토에 대해 보고 들은 뒤 상상해 낸 이미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덧붙이곤 했다. 교토에서 있었던 일 중 히데오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모두 나쁜 경험이었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시절 책상 가득 자이니치나 조센진, 총 같은 단어가 적혀 있던 풍경이나 동급생 남자애들이 그의 가방을 걷어차며 드리블 시합을 했던 일, 그를 조롱하려고 반 아이들이 케이팝 노래를 개사해 불렀던 일, 그런 사건들. 한번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에 히데오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 나고야로 이주하는 일을 의논했다. 히데오의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앉히고 나고야에서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경고했다. 히데오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히데오가 아는 한, 히데오의 어머니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기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남편도 아들도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계속 살 거니까,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날 밤, 히데오는 코의 통증과 식도로 넘어오는 피, 어머니의 고요한 얼굴과 나고야에서 보낼 새로운 나날의 환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히데오의 부모는 나고야행을 두고 갈팡질팡했고, 히데오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 후 히데오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일본에서의 삶을 철저히 숨겼다. 나에게 고백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첫 번째 이름 히데오를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히데오를 처음 본 건 연극원 강의실에서였다. 아직 벚꽃도 피지 않은 3월, 나와 히데오를 포함해 여덟 명의 학생이 강의실에 책상을 둥글게 붙여 앉았다. 그해 연극원에서는 입학이 예정된 학생들을 모아 15분 내외의 단막극, 일명 “짤막극”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신설했다. 입학 전에 그룹별로 모여 공연을 준비하고, 3월 개강과 동시에 연극원 소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이색적인 신입생 환영회라 할 수 있었다. 학보사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신입생 그룹 중 하나를 인터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해 들어 나에게 처음

  • 관리자
  • 2025-06-01
그리고 밤과 가을이

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

  • 관리자
  • 2025-06-01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 관리자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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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조이

    파도는 파도이고 파도는 원래 그런 성질을 지닌 것...자꾸만 부딪히며 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성난 기세로 달려오다가도 발 밑에서 연약하게 부서지는 것.수평선에 떠오른 태양은 자신에게서 멀어지려 애쓰는 파도도 비추는 것, 그 밖에 모든 존재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어두운 새벽을 찢는 빛의 원천인 태양은 누군가를 환히 비추려는 의지만으로도 이미 빛나는 존재, 남겨진 자를, 서로에게 온기를 전달하려는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

    • 2025-06-09 23:06:56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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