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고 잇는
- 작성일 202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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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고 잇는
진연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지냈다. 한 칸짜리 방. 침대가 있고 책상이 있고 책장과··· 새 둥지가 있는. 2년 전의 새는 죽었다. 좁은 방범창 안에서. 이틀을 울다가.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면서. 약해지면서. 나는 소리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러고도 며칠을 더. 안전해질 때까지. 며칠 더 기다렸다가. 숨이 죽을 때까지. 숨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당황하면 안 되니까. 당황이 수습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곤란한 일이니까. 며칠 더 기다렸다가. 딱딱해진 새를 치우고.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를 거둬 내고. 방범창의 패널을 깨고. 다시는 새가 갇혀 죽는 일이 없도록. 패널을 깨고. 새는 왜 나가지 못했을까. 들어왔는데 왜 나가지는 못한 것일까. 날개를 펴서 도움닫기를 할 만큼. 공간이 충분히 넓지 않았기 때문일까. 창문의 반을 가릴 만큼. 충분히 높았기 때문일까. 방범창이. 폴리카보네이트 방범창. 폴리카보네이트. 폴리카. 나는 꿈을 꾸고 새가 죽고. 꿈에서 매번 새가 죽고. 구구 쿼쿼. 소리가 줄어들고. 약해지고. 꿈을 꾸고 새가 죽고. 매번.
나는 그 새가 알을 밴 상태였고 새가 죽으면서 알도 함께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슬퍼졌지만 그러한 조금 더의 슬픔이 죽은 새에게는 약간의 좋은 일이겠거니 했다. 그렇더라도 내게 그 새의 죽음은 시간의 궤도 바깥에서부터 시작된 파열음처럼 당혹스럽고 얼떨떨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마주한 삶의 필연적 결말.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였을까.
처음부터 죽음을 예견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새가 마침내 남은 삶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라고, 구구 쿼쿼 우는 소리가 그러한 안간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켜보거나 지켜보지 않는 일만이 나의 것이었으나 그렇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그 새의 삶에 또는 죽음에 개입했어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랬어야 하나. 나는 한동안 가장 익숙한 골목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허둥대고 우물쭈물하고 두려워하고.
새로운 새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여름이었다. 지독하게 습하고 더운 여름의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반쯤은 정신이 나간 듯 갈팡질팡하며. 나는 새가 나뭇가지와 나뭇잎과 비닐 같은 것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새는 한동안 가만히 앉았다가 황급히 목을 빼 주변을 둘러봤고 부리로 털을 고르거나 몸을 움직여 자리를 고르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 떠나지 않다가 돌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멈추고 날아오르는 일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곳에서 작은 알 두 개를 발견했다. 덧문 밖의 햇살처럼 뽀얗고 눈부신 데다 아주 정교하게 빚어진 도자기처럼 매끈한 것, 완벽한 형태의 생명이 그야말로 덜컥, 거기 있었던 것이다. 철골조와 앙상한 밑바닥만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방범창의 한구석에 말이다. 하나의 존재와 하나의 장소, 그 둘의 대비가 너무도 강렬해서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창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또 한 걸음. 조심스럽게. 작은 알로부터 나를 치우는 것이, 나의 시선과 나의 그림자와 나의 심장 소리를 치우는 것이 알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기라도 한 것처럼.
방 한가운데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나의 하루하루를 묵묵히 지탱하고 있던 가구들이, 오래된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 벽에 붙어 있는 스프링 침대, 오른쪽 벽에 세워진 책장, 침대와 책장을 가로지르며 방 한가운데 놓인 책상, 그 옆의 협탁, 시시하고 자잘한 물건들. 이 모든 것을 옮겨야 했다. 깊고 큰 한숨. 매번 하는데도 매번 더 힘들어지고 매번 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왜 매번 이런 일을 벌이고 왜 매번 이런 상황에 나를 몰아넣는 것인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숨. 매트리스를 들어 올렸다. 팔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는 강철 케이블같이 솟아난 근육. 내게도 이런 근육이 있었던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매트리스를 벽에 세우고 프레임을 분해했다. 렌치가 돌아가며 둔탁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끼익 킥꺽 그것은 밤새 뒤척이던 불안의 소리였고 통제할 수 없는 무력감의 소리기도 했다. 내가 나에게서 맥없이 떨어져 나가던 소리였고 멈춘 시간의 소리였고 수많은 실패의 소리기도 했다. 렌치를 돌릴 때마다 소리도 점점 날을 세웠다. 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배열된 소리. 하지만 곧 단단한 프레임이 서로를 놓아 버리는 것과 동시에 소리도 수그러들었다. 나는 사라진 소리와 눈앞에 놓인 네 개의 얇고 길쭉한 나무 조각을 바라봤다. 그것은 더 이상 하나의 온전한 구조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한때 하루의 피로와 비밀과 불안 따위를 단단히 떠받치고 있던 것이 이제 언제든 다시 세우고 배치할 수 있는 물리적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나는 내게 지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곧바로 전동 드라이버를 집어 들었다. 으르렁거리는 기계음이 다시금 방을 메웠다. 책상에 고정해 둔 모니터암과 타공판을 분리하고 잡동사니를 박스에 담았다. 서랍에는 오래된 영수증과 유효기간이 만료된 신용카드와 낯선 사람의 연락처가 적힌 명함과 굳은 펜과 빈 안경집 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나는 잠시 그것들을 응시하다가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았다. 마침내, 파헤쳐진 기억처럼 비루하고 공허한 서랍이 몸체를 드러냈다. 폐허가 된 유적지.
빈 서랍을 툭 차고,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나는 왜 이런 짓을 반복하는 것일까. 가구를 재배치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이렇듯 무용한 소동을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변화를 꾀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가령 누운 책을 세워 놓는다든가 종이 상자에 든 것을 유리 상자로 옮긴다든가 펜을 거꾸로 놓는다든가 죽은 식물을 버린다든가 하는 것들. 조리개를 한껏 조여야 알 수 있는 것들. 너를 볼 때도 그렇게 할게라고 말하는 편이, 그런 대상을 기억하는 편이 더 쓸모 있지 않을까. 책상은 충분히 해체되었다. 상판과 상판을 지탱하는 다리가 앙상한 뼈를 드러냈다. 책상 상판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알 수 없는 굴곡이 만져졌다. 먼 과거의 유물처럼 해독할 수 없는 기호와 흠집이 손바닥을 스쳐 지났다.
책상 위에는 항상 읽다 만 책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고립된 채로 무심하게 책 속으로 빠져들곤 했는데 책을 펼치면 타인의 감정이나 현실의 불안, 실행되지 못한 계획 같은 것에서 얼마간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고.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얇은 송곳으로 책상을 헤집고. 나는 그런 일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다 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는 일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멍하니. 오후가 깊어지고. 비가 내리고. 연둣빛 나뭇잎이 푸른 파도로 변해 가고. 불안정한 붉은 색이 거리를 뒤덮고. 눈이 오고. 책상 앞에 앉은 내게 계절이 흘러 들어오는 걸. 말없이 지켜보고. 말없이 늙고. 그런 것을 나는 좋아했던 것 같다. 안전한 거리에서. 정리되지 못한 수많은 생각의 잔해를 잊고. 타인으로 가득 찬. 뜨겁고 감당하기 어려운 장소인 세상을. 말하자면 책상은. 나의 모든 무기력과 불안이 응결된 장소. 나와 세상 사이의 경계선. 그리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통로. 같은 것 아니었을까. 책상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만약. 책상이라는 물리적 경계가 사라진다면. 나는 책상을 들어내려다 말고 책상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해가 물러나고 있었다.
저리 가! 다시는 오지 마! 깡패 같은 놈! 나는 까마귀를 향해 우산을 휘두르며 외쳤다.
얼마 전 까마귀 한 마리가 앞 건물에 날아들었다. 깃털은 햇빛을 흡수하여 벨벳처럼 빛났고 흑요석처럼 어둡고 차가운 눈 역시 예리하게 번쩍였다. 검고, 끝이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부리는 어떤 것이든 찢어발길 기세였고 발은 죽은 나뭇가지처럼 말랐으나 무언가를 움켜쥐거나 무언가에 발톱을 박아 넣는 순간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까마귀는 그런 포식자의 위협적인 모습으로 건물 꼭대기에 앉아 이쪽을 몇 시간이고 주시했다.
나는 불안해졌다. 완벽한 형태의 알. 무결점의. 정밀하고 정교한. 완결된 미래를 품고 있는. 하나의 알. 그리고 그것에 손상을 가할 유일무이한 존재. 서두르지 않는. 힘의 과시. 까마귀는 침묵했고 그 침묵이 불안과 두려움을 서서히 증폭시켰다. 나는 이쪽을 주시하는 까마귀를 주시하면서 까마귀가 서서히, 아주 미세하게 자신의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곳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고 바람의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 그처럼 마땅한 계산법은 없을 터였다. 어쨌거나 그 미세한, 포착하기 어려운 움직임은 견디기 힘든 압박감을 느끼게 했는데 그러니까 까마귀는, 공격의 기미를 펼치는 대신 존재 자체로 주변의 공기를 위협하면서 심해의 차갑고 깊은 어둠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석양이 내리자 마침내 까마귀가 깃털을 부풀리며 비행을 시작했다. 촘촘하게 짠 갑옷 같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까마귀가 큰 날개로 허공을 베며 활강했다. 유유히. 그러면서도 쏜살같이. 연민 없이. 망설임 없이. 차가운 본능과 목표를 제거하려는 의지만으로.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방에서 죽은 삶을 살고 있었으나 죽음은 생생한 삶처럼 매 순간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이 돌연한 생각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한 번도 죽음과 삶을 병치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 둘이 합치하는 순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까마귀는 알을, 그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는 알을 곧, 곧이어, 덮칠 것이었다. 삶과 죽음이 생생하게 서로의 몸으로 파고드는 순간. 피할 수 없으며 거역할 수도 없는 운명. 존재의 소멸은 운명 앞에서 너무나도 하찮고 작은 문젯거리에 불과해 보였다.
나와 세상 사이에는 여전히 오래된 책상이 놓여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세상의 모든 소란을 느끼고 분별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에서 그것을 만져 본 적도 가져본 적도 없는 것 같다. 피로를 제외하고는. 나는 피로를 느꼈다. 피로가 점점 짙어졌다. 피로가 너무 많아서 피로했고 피로를 피하기 위해 벌인 모든 행위도 나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산책과 외침과 웃음과 울음 모두가 나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씨발. 더러운 세상. 엿이나 먹으라지. 누군가의 울분이 피로를 몰고 왔다. 그래서 어쩔 건데. 나는 내가 많아서 좋아. 너는 어디에나 있지만 나는 여기에만 있으니까.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버리는 사람과 버림받는 사람 사이의 먼 거리가 나를 피로하게 했다. 당신은 그래서 안 돼. 처음부터 알아봤어. 물러터져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 같으니. 어디에나 있는 무딘 평가가 나를 피로로 몰아갔다. 차라리 죽어 버려. 나가 뒈져. 함부로 다뤄지는 죽음이 나를 극도의 피로 속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이 모든 공허와 고통과 혐오의 풍경들이 나에게 자신과 함께 동행하자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움큼 떠나보내고 남은 나는 한층 더한 피로로 휘청거렸다. 나는 의자를 밀어내고 상판과 상판을 지탱하는 다리만 남은 장소에 웅크려 앉았다. 다시 피로. 더한 피로. 가능성은 사라지고 그 무엇도, 이 장소조차 나를 어쩌지 못했다. 허술하고 허름하고 허접한 장소. 나를 둘러싸지 못하는. 평온한 어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가능성이 소멸된. 생명의 과정이 최종적으로 멈춘 지점. 불가역적 세계. 피로가 고삐를 늦추지 않고 나를 하염없이, 끝없이,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 같았다.
까마귀를 향해 우산을 휘두른 순간 나는 새가, 자신의 전부를 걸고 만들어 낸 결과물과 나와 까마귀를 동시에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또 다른 건물의 난간 끝에서. 숨죽인 채. 새는 누구에게도 알을 보여 주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으나 본능적으로 적과 동지를 구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까마귀가 큰 날개를 펴고 비행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내가 우산을 휘두르며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새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앉아 있기만 했다. 그것이 내게는 나를 향한 호의와 신망처럼 여겨졌는데 어쨌거나 나는 새의 그 단호한, 비언어의 언어를 읽으며 언젠가 한 번, 이러한 일이 언제인가 한 번은, 있었던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 일은 기차 안에서 일어났다. 화창하고 말쑥하고. 하늘은 흠집 하나 없이 푸르렀고 공기는 막 정제된 유리처럼 맑은 날이었다. 태양이 황금빛으로 일렁이며 창문을 뚫고 들어와 무릎 위에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목적 없는 여행과는 퍽이나 어울리지 않는 날씨였다. 띄엄띄엄 앉은 승객들 모두 휴대폰을 보거나 잠들어 있었는데 내겐 그들이 긴 철로를 공유한 채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는 외톨박이로 보였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고 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기차가 규칙적으로 리듬을 타며 덜컹거렸다. 그 움직임 때문에 나의 정지 상태가 더 명료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오래도록 정지해 있었다는 사실과 앞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사이를 오갔다. 그 사람으로 인해 시작된 정지가 좀체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오래 앓다 간 사람. 앓느니 죽지,한 사람. 언짢고 노여운 사람. 저주를 퍼붓고 우는 사람. 그만 죽고 싶은 사람. 이미 죽은 상태로 오래, 아주 오래 살다 간 사람. 그 사람 곁에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에 쩔쩔매거나 화를 내거나 외로웠는데 그 모든 시간이 끝났을 때, 그러니까 그 사람이 결국 죽고 말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삶이 삶을 놓치고 작은 방에 봉인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둥근 시계판을 영원히 맴돌 뿐인. 기어코 창밖을 잃고. 그것은 죽음만을 오래 응시한 자에게 주어진 마땅한 결말 같았으나 나는 자주 분하고 억울해 주먹을 쥐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일 같은 건 아무래도 도리에 어긋난 것 아닌가. 나는 자주 분하고 억울했다.
생각을 추스르고 주변을 살폈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승객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낡은 베이지색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여성으로 화장기 없는 얼굴에 반백의 곱슬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모양새가 단정하면서도 고집스럽게 느껴졌다. 눈에 띌 만큼 유별난 행색이 아니었는데도 눈이 갔던 것은 그녀가 「화요일의 시에스타」에 나오는 여인을 떠오르게 만들었던 탓이다. 후텁지근한 공기와 차창 안으로 넘어오는 매캐한 연기. 창밖으로 보이는 소달구지. 종려나무. 장미덤불. 무르익는 더위. 평원을 달리는 기차. 불같이 뜨거운 바람. 기적 소리. 여인이 꽉 움켜쥐고 있던 것이 에나멜 가방이었던가. 에나멜 가방을 움켜쥐고 있는 여인. 아들의 무덤을 찾아가는. 어머니인 한 여인. 꼿꼿하게 앉아 땀을 훔치고. 시에스타. 잠든 거리와 움직이는 슬픔. 그런 것들을 떠오르게 만들었던 탓이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아들의 무덤을 찾아가는 여인과 함께 꽉 막힌 적막과 고요한 소요 속에, 무더위 속에 둥둥 떠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어쨌거나 그녀에게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그녀가 낡은 손수건을 에나멜 가방을 쥐듯 꽉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완전히 몰두한 채 창밖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나는 이상한 동질감을 느꼈는데, 말할 것 없이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그때의 감정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모두가 혼자구나. 화창한 날에도 모두가 슬픔을 느끼는구나. 중얼거렸을 뿐이다.
어느 순간 그녀가 창밖에서 시선을 거둬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꾸밈도 없고 의도도 없는. 오래된 그림에서 흘러나온 듯 희미하고 섬약한, 그러나 따뜻한 빛 같은 미소. 나는 안도했다. 찰나였지만 나는 괜찮았다. 심장이 뛰고. 나는 괜찮았다. 온기가 돌고. 나는 괜찮았다. 그녀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그 미소의 잔상이 한동안 가벼운 구름처럼 내 주위를 떠다녔다.
까마귀를 쫓고 난 뒤 나는 알 주변에 임시 보호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더할 나위 없이 신중한 태도로. 외과 의사의 손길처럼 섬세하고 정교하게. 나는 주차장 한구석에 쌓여 있던 골판지 박스 몇 개를 주워 왔다. 빗물에 젖어 얼룩덜룩했고 부풀거나 찢어진 곳도 눈에 띄었으나 임시방편으로 쓰기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나는 박스 밑단을 펴서 바닥에 고정한 뒤 테이프로 붙이고 그 위를 작은 돌멩이로 눌렀다. 그러고는 박스가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빈 화분을 박스 바깥에 덧대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 더미처럼 보였으나 나는 알았다. 그 안에서 작은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허름하고 조악한 작은 요새 속의 작은, 두 개의 알.
창문을 닫고 창가에서 얼마간 물러나 새를 지켜보았다. 새가 머리를 서너 번 주억거리다 난간 끝에서 중앙으로 몇 걸음 옮겼고 깃털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끝까지 믿어도 좋은지 재는 눈치였다. 나는 새의 그 용의주도함이 마음에 들었다. 지루할 만큼 단조로운 끈기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새가 고상하고 기품 있는 날개를 펼친 채 빈 화분 위로 미끄러지듯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인 것처럼 한 발 한 발 내디뎌 두 개의 알 위에 몸을 포갰다. 나는 그 풍경에 완전히 몰입됐다.
방 안의 다른 가구들은 이미 해체되었으나 책장만큼은 여전히, 지난 시간을 증언하듯 굳건히 서 있었다. 책을 잡고, 당겼다. 책등과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새삼, 책이 지닌 물성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던가 깨달았다. 수백 장의 얇은 종이가 책등에 단단히 묶여 만들어 낸 직육면체. 손때와 묵은 먼지를 흡수해 바랜 빛깔. 습기와 햇빛이 엉겨 붙어 토해 내는 쌉쌀한 냄새. 마른 잎 쓰는 소리.
아무래도 책장 옮기는 일이 가장 난이도 높은 작업이 될 것 같았다. 책은 물성을 지닌 사물이자 한 권 한 권이 서로의 무게중심이고 독립된 우주였기 때문이다. 탄생과 죽음, 질문과, 해답 없는 해답들이 얇은 종이에 압축돼 있는 우주. 내가 방에 숨을 수 있는 이유이자 유일한 질서. 그런 것.
책을 한 권 빼내고 또 한 권 빼냈다. 척, 척, 마찰음과 함께 깊고 긴 그림자가 몸을 드러냈다. 또 한 권 다시 한 권. 책을 빼낼 때마다 그림자가 옅어지면서 자리를 넓혀 갔다. 그리고 끝내 햇볕에 그을리지 않은 나무의 본래 빛깔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 빛을 막아 주던 책의 무게가 사라지자 방금 파낸 구덩이처럼 생소하고 무르고 서툰 자리가 가감 없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상상했던 형태가 아니었다. 내게 책장은 책의 연장이고 같은 시간을 살아 내면서 더불어 늙는 어떤 것이었는데 그을지 않은 바닥은 아무려나 낯설었다. 동시에 나는, 불현듯, 시간과 기억이 뒤섞이고 무너지는 느낌에 짓눌렸다. 책장의 시간도 나의 시간도, 책장의 기억도 나의 기억도, 모두 다 무너지는 듯했다. 오랜 병치레 끝의 그 사람을 볼 때처럼.
병실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고 그 사람의 몸은 점진적으로 해체되었다. 그 사람을 구성하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소실되기까지 시간은 더할 수 없을 만큼 느리게 흘렀다. 나는 미라처럼 거죽만 남은 그 사람을 바라보며 이 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안쓰러운 사람. 무서운 사람. 나는 그 사람이 안쓰럽고 무서웠다. 가까이하기 싫을 만큼. 싫고. 그런 내가 고통스럽고. 언제 끝나나. 왜 이리 질기나. 생명이. 생명은. 나는 그 사람을 손보고 살피기 위해 건강했던 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실금 같은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 우물처럼 깊고 어두운 눈. 날카롭게 솟은 쇄골. 가늘고 긴 팔. 굵은 옹이처럼 튀어나온 관절. 혈색 없이 칙칙하게 가라앉은 피부. 온몸을 돌아다니는 푸른 신음. 그것들과 마주치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지만 그 사람은 보란 듯이 자신의 기능과 형태를 잃어 갔고, 이미 죽어 있었고, 그리고 끝내 그 사람도 그 사람의 병실도 붕괴되었다.
새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고개를 툭툭 꺾어 주변을 살피고 나와 눈이 마주치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곧 몸을 깊숙이 말아 알을 품는 자세로 돌아갔다. 알을 지키려는 새에게 나는 까마귀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섭섭했으나 알을 중심으로 재편된 새의 일상을 나는 군말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또 다른 새를 발견한 것은 새가 알을 품은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새가 짧고 낮게 울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어디선가 또 다른 새가 나타났다. 새는, 그러니까 두 번째 새는 망설임이나 경계의 기색 없이 신속하게 둥지 위로 내려앉았고 첫 번째 새가 알을 품고 있던 그 자리에 정확하게 몸을 밀어 넣었다. 나는 첫 번째 새가 둥지에서 벗어나 날아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버림받은 새, 무리를 피해 달아난 새,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두 마리 새가 완벽한 타이밍과 신뢰 속에서 고단한 임무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비좁고 빈약한 철골조 틈새에서 자신들만의 질서를 만들고 있었다.
코왈스키 같구나. 나는 창에서 멀어지며 말했다.
난 그게 희생이 아니라 생존의 가능성을 넘겨준 행위라고 생각해. 그게 그거라고 하고 싶은 거야? 그럼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든지. 하지만 너 그건 꼭 알아야 한다? 넘겨주는 건 바치거나 버리거나 빼앗기는 것하고는 다르단 거. 희생하고는 아무래도 다르다니까? 친구가 말했다. 내 기억 속의 친구는 하나뿐인데··· <그래비티>를 보고 난 후였고. 추웠고. 따뜻한 차가 있었고. 라벤더? 잠을 못 잘 때였으니까. 텅 비고 끝없이 팽창하고 무한한 적막으로 둘러싸이고. 그런 건 너무 무서웠으니까. 그래비티. 너무 무서웠어. 꿈은 여기까지죠 그동안 행복했어요 꽃잎이 흩날리네요. 노래가 흘러나오고. 꽃잎이 흩날리네요. 꽃잎이 흩날리는구나. 꽃잎이. 자꾸 다른 곳으로 가고 나는. 불빛. 낙엽. 낙엽이 구르고. 금이 간 시멘트 바닥. 높은 건물. 그림자. 내 말 듣고 있어? 또 다른 데로 간 거야? 친구는 말하고. 삐걱거리는 환풍기. 차갑고 건조한 바람. 둥둥. 검은 우주. 떠가고. 듣고 있어? 에이씨. 친구는 말하고.
그러게. 코왈스키 같네. 나는 창에서 조금 더 멀어지며 말했다. 친구의 말대로라면 새들의 빠르고 민첩한 움직임은 희생이 아니라 생존의 가능성을 넘겨주는 행위에 가까워 보였다. 먹이와 물을 나누고, 한 마리가 짐을 내려놓을 때 다른 한 마리가 그 자리를 채워 주고, 그러니까 생존의 가능성을 교대로 넘겨주는 완벽한 생존 전략. 코왈스키는 죽었지만 새들은 죽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두 개의 알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지냈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천천히 부는 바람에 대하여. 창을 뚫고 들어오는 달빛에 대하여. 여름이 만든 그늘에 대하여. 멀리 달아난 잠에 대하여. 아무도 원치 않는 이야기를 쓰는 일에 대하여. 타인의 삶에 쉬지 않고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의 열정에 대하여. 그 피로에 대하여. 사방에 널린 재난 상황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렇게나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천천히 부는 바람에 대하여. 창을 뚫고 들어··· 끝없는 순환. 내 방에서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박제된 동물처럼 영원히 죽어서, 버려진 우물물처럼 오염된 채로 점점 밀도를 높여 가는 것 같았다. 죽은 자의 시간이 내게로 옮겨 온 것일까.
나는 내 몸에서 무언가가 점차 꺼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을 보살피는 일과 내가 나빠지는 일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내 얼굴을 덮고 있는 피로가 그 사람의 병세만큼이나 짙어졌다. 나는 종종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복도를 걷고 휴게실에 버려진 신문을 읽고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고 서 있으면서도 삶의 기미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매일 아침 나는 소독약 냄새를 맡으며 깨어났고 소독약 냄새를 맡으며 잠에 들었다. 어제와 똑같은 흰 벽. 간이침대. 산소 호스. 약병들. 열려 있는 차트. 링거 스탠드. 그 사람의 맥박만큼이나 느리게 떨어지는 수액. 바이털 사인 모니터가 요동치고. 콜벨이 울리고. 어제와 똑같은 오늘. 오늘과 똑같은 내일. 병실에 있는 모든 기구들이 그 사람이 아직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한편 내가 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올가미에서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리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병실. 복도. 휴게실. 병실. 간호사실. 복도. 린넨실. 병실. 짧고 정해진 동선. 아프면 안 돼. 먹어. 마셔. 내가 나를 타이르며 말하고. 말하고.
책을 한 권 한 권 빼내면서 나는 문득 이 행위가 그 사람이 소실되는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책장이 빈칸을 드러낼 때마다 그 사람의 몸이 작아지고 없어지던 순간의 공허함이 느껴졌고,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냄새가 그 사람의 몸에 배어 있던 약품 냄새와 겹치면서 그 사람이 쇠약해지던 날들을 사납게 재현했다. 그 사람이 소실되는 과정을 되감기하는 무한한 반복, 그 괴로운 재현 속에 나는 꼼짝없이 묶여 있었다.
책을 모두 빼냈다. 책장 전체가 무게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자신을 지탱하던 무거운 압력이 사라지자 책장은 빈 창틀처럼 약하고 무르게, 아무런 의지도 갖지 못한 채 그저 있게 된 것이다. 그 사람 같기도, 나 같기도 한 모습으로. 그 사람은 병으로, 나는 그 사람으로, 삶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의지마저 점차 희미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내 시간은 그 사람의 시간을 따라가고 있었다. 내 시간과 그 사람의 시간이 한데 섞여, 하나의 느리고 지친 흐름으로 마지막 종착지를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왔다. 그 사람이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때 병실에는 그간 경험했던 그 어떤 정적보다도 더 깊고 무력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쁜 발소리. 카트 끄는 소리. 기침 소리. 삐-빅삑. 코드 블루. 경고음. 심지어 내 심장 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정지해 버린 듯 병실은 고요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더 이상 차트 위의 날짜는 넘어가지 않을 것이었다. 나의 날짜 역시.
세상은 움직였으나 나는 병실에서 나올 방도를 찾지 못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못 살고.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분간 못 하고. 발밑은 소용돌이치는 시간의 늪일 뿐이고. 기억은 비연속적인 기록처럼 띄엄띄엄 혹은 뒤섞여 존재할 뿐이고. 병실에서 보냈던 몇 년의 시간이 그리고 지금 역시. 이곳이 내 방인지 아니면 내 몫의 병실인지. 나는 나의 시간이 완전히 멈췄음을 깨달았다. 그 사람의 마지막 순간이 나의 시간 전부를 함께 가져간 것만 같았다.
나는 마음을 놓친 순간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언짢아하고. 성내고. 심통내고. 투덜거리고. 발끈하고. 분통을 터뜨리고. 제발 빨리 끝났으면 하고. 빨리 끝나라. 제발 빨리. 제발. 되풀이하고. 그런데 왜 나가지 못 하나. 병실에서. 방에서. 끝났는데 왜. 괜찮아? 너는 어때. 아프진, 아프진 않고? 하나뿐인 친구가 전화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받지 않고. 하나뿐인 친구가 전화하고. 하루에 두 번씩. 한 번씩. 며칠에. 한 번씩. 음성사서함을 확인하고. 확인하지 않고. 메시지가 쌓이고. 다 아파. 다 죽어. 손 내밀 때 잡기도 해야 하는 거야. 통장 확인해 봐라. 하나뿐인 친구가 전화하고. 전화하지 않고.
장마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태양은 물러났지만 끈적하고 후텁지근한 열기가 지속됐다. 그리고 여름의 깊이, 그 한가운데에서 새끼가 태어났다. 새의 깃털 아래에서 새끼 새가 몸의 일부를 내밀며 꿈틀대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그것은 너무도 원초적이고 그런 만큼 무방비해 보였다. 솜털 하나 없이 희고 투명한 살가죽. 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간헐적으로 떠는 마르고 연약한 덩어리. 나는 그 작은 몸속에서 뛰고 있을 심장을 상상했다. 위태로울 만큼 빠르게 뛰고 있을 심장. 세상의 모든 활기와 기쁨이 그 작은 심장 하나에 응축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내게는 일종의 정화처럼 여겨졌다. 과거에 기인한 정서적 부채감이나 미결 상태의 후회 같은 것들이 힘을 잃고, 오랜 시간 짓눌렸던 감각들이 다시 부화하는 것 같았다. 무기력과 우울이 정지되고 오직 순전한 생명력만으로 가득 찬 미래.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일렁거림은 묘한 슬픔과 교차했다. 새끼가 머리를 내밀고 어미가 다시 고쳐 앉아 품는 순간, 어미의 품에서 가장 안전한 순간을 맞고 있는 새끼를 보면서 내 곁의 영원한 공백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사람을 잃은 나와 그들의 환희가 선명하게 대비되면서 그들이 지닌 모든 가능성이 내게는 이미 닫혀 버렸다는 것을,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아픔의 시초를 확인하듯 둥지를 살폈다. 둥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박스가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힘없이 늘어진 채 빗물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그 안에서 새는 새끼 새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자리를 골랐다. 나는 박스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곧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새가 목을 꼿꼿하게 세운 채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눈빛이 영화에서 보던 그것과 너무도 닮아서 나는 놀랐다. 막막한 우주에서 코왈스키가 내민 손을 마주잡던. 그 짧은 동안 나는 내가 결국 방에서 나가게 되리란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오래 묵은 집 냄새. 거실로 이어지는 짧은 복도를 지나면서 나는 그 사람의 흔적과 마주쳤다. 낡은 벽시계.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도 종종 멈추곤 하던. 안경. 접힌 채 탁자에 놓인. 흰색 슬리퍼. 주방으로 이어지는 곳에 가지런히 벗어 둔. 턴테이블. 파블로 카잘스. 첼로 음반. 겨울 외투. 갈색의 끝이 헤진. 머리띠. 먼지. 두텁게 쌓인. 먼지.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완벽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껏 세상이 흘러왔음을 시간이 시키는 대로 흘러왔음을 증언하며, 각자의 질서를 지키며, 평화롭게 제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의 흔적 속에서 잊고 있던 기억을 찾아냈다. 웃음소리. 끝없고 풍만한. 사소한 일에도 쉽게 기뻐하고. 기쁨이 공기처럼 부유하다 햇살에 섞이고. 집안 곳곳을 채우고. 냄새. 부드럽고 차분한. 숨결 같은. 나른한 오후에 펼쳐지던. 커피와 빵. 온기. 카펫 위에 늘어지던 따뜻한 빛의 띠. 머리맡에 놓인. 손길. 느리게 하는 말.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과거가 그 사람의 흔적만큼이나 또렷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남긴 두 가지 유산, 그러니까 고통과 풍요를 동시에 느끼며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습한 공기와 함께 빗물이 들이쳤다. 괜찮아. 생각보다 괜찮을걸. 새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 끝으로 물러났다. 나는 물에 젖어 흐물거리는 박스를 조심스럽게 제거하고 새 박스의 밑단을 펴서 바닥에 세우고 그 위를 작은 돌멩이로 누르고 비닐을 펼쳐 덮고 빈 화분을 덧댔다. 그 사람을 보살필 때처럼, 오랜 반복으로 몸에 익은 듯 재빠르게. 둥지를 손보는 동안 새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나를 지켜보았다. 이제 다 끝났어. 당분간 괜찮을 거야. 나는 창문을 열 때처럼 조심스럽게 창문을 닫았다.
구구 쿼쿼. 비가 그치자 새들의 지저귐이 다시 시작되었다. 경쾌하고 맑은 작은 신호. 한 마리가 날아들고 또 다른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떠나고. 먹이를 물어 오고. 먹이를 받아먹고. 새끼 새는 며칠 사이에 솜털이 돋기 시작했고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탐험에 나서기도 했다. 그들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내 방에도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장마가 빨리 끝나서 다행이야. 하긴 이제 장마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사계절이 사라지는 것도 시간 문제지 뭐야. 새 집은 쓸 만한가. 알았어. 그만 쳐다볼게. 나는 종종 새들에게 말을 걸었다. 츳츳,하고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챕터를 마무리할 때다. 방에는 분해된 가구와 여러 개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자잘한 물건과 뭉쳐진 먼지도 굴러다녔다. 한동안 이러한 혼란 속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찬찬히 방을 둘러봤다. 이제 모두가 이곳에 속할 필요는 없었다. 책장은 거실로 옮기고 이 방은 침실로 만드는 게 좋겠다. 작고 아늑하고 둥지가 있으니까. 나머지 방 두 개는··· 아무래도 좋지 뭔가. 내 집은 새의 둥지처럼 다시 튼튼해질 거고 시간은 많으니까. 나는 한동안 더 집을 둘러보다가 잡동사니를 뒤져 휴대폰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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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황새 양선형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네가 저질렀던 끔찍한 죄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쩌면 인간으로 살았던 시간을 초과할 만큼 오랫동안 작동했다. 너는 네게 주어진 원통형의 한계 속에 틀어박혔다. 그것이 너였다. 배터리와 부품이 망가지면 너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착했고, 너는 네 작동을 중지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음은 물론 작동을 중지하고 싶은 욕망 또한 갖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형벌이 단호하게 집행되었고, 너는 눈을 감았으며, 숨이 끊어지기 직전 너는 이후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줄곧 반복해야만 하는 한 줄의 기억 타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었던 시절의 작은 파편으로서 오토마타로 개조된 네 머리통 안에 각인될 예정이었다. 누군가 드러누운 네 팔뚝에 주사를 놓았다. 나른한 의식은 감은 눈 속으로 어른거리는 박쥐 모양의 환영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기억 타래는 네가 과거에 살과 피를, 얼굴과 자의식을 가졌던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의미했다. 인간인 너와 오토마타인 너를 잇는 개체로서의 동일성을, 속죄를 끝마치고 형기가 만료될 때까지 네가 감당해야만 하는 과오와 책임의 연속성을 말이다. 따라서 기억 타래는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인해 극형에 처해진 바로 그 범인임을 증명하는 전자 신분증이자 영혼의 낙인으로 비유될 수 있었다. 네가 죄수임을 공인하는 사법 기관의 서명, 특수한 일련번호, 기계의 머리통 안쪽에 새겨진 자아의 조각, 네 유한하며 어리석었던 시절의 잔류 데이터. 그러나 너는 네가 다른 기억들 가운데 하필이면 이 기억 타래를 골랐던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각별했기 때문인지, 각별했던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무의미했기 때문인지. 너는 카메라처럼 무감하게 눈을 떴으며,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딸깍거리는, 앵앵거리고 번쩍거리는 전자 신호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네 머리통 안에는 한 줄의 기억 타래만이 남아 있었다.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정확하게 움직이는 효율적인 무력함이었고, 그 무력함 속을 공회전하는 짤막한 분량의 이미지 찌꺼기였다. 너는 스크린을 향해 강제로 조향된 인형의 냉담하며 거짓된 눈알처럼 기억의 이미지를 주시했고…… 주시하지 않았으며, 사나운 파도처럼 우윳빛으로 들이닥치는 심신상실이 환하게 빛나는 스크린 주위를 에워쌌다. 네 머리통 안의 암실에서는 언제나 한 줄의 기억 타래가 상영되었다. 너는 기억 타래를 출력하는 영사기이자 영사막이자 영사기사였으며, 성자와 성부와 성령과…… 세 가지 작동인 사이를 그치지 않고 순환하는 자율적인 엔진에 가담하고 예속된 상태였으나, 대부분 네 기억의 관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엔 네 기억의 관객일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ON이었다. 너는 네 신경망에 폭포처럼 흐르는 전류를 자발적으로 차단할 수 없
- 관리자
- 2026-02-01
도래의 얼굴 최정나 한 남자가 길을 걷는다. 남자의 이름은 웅현이다. 웅현은 은행나무길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노랗게 물든 황금 터널 안에서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본다. 바람이 일자 은행잎들이 햇살을 따라 휘돌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웅현은 꽃잎처럼 흩날리는 노란 잎사귀들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위로도 햇살이 부서진다. 바람을 받은 잎사귀들이 다시 허공으로 번져 오르다가 방향을 살짝 틀어 다른 데로 이동한다. 웅현은 눈에 비친 풍경을 화면에 담아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웅현은 얼마 전 도래와 이별했다. 그래서 길에서 스치는 사람이 모두 도래로 보인다. 도래가 홀로 걷고, 도래가 누군가와 함께 걷고, 떨어지는 낙엽을 올려다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내려다보고···. 도래는 출몰하듯 나타나 웅현 곁을 스쳐 지난다. 옆에 있는데도 먼 얼굴, 도래가 자신을 불러내는 건지 자신이 도래를 불러내는 건지 웅현은 알 수 없다. 이윽고 수많은 도래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로 변한다. 도래와 함께 떠난 얼굴들,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웅현은 하늘을 본다. 사랑을 놓쳤니? 황금빛 사이로 겹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다. 왜 웃는 거지? 웅현은 누군가 보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놀림 받은 기분이다. 하지만 웅현은 그들이 남겨진 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렇더라도 역시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을 바꾸고, 곧이어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먹먹해진다. 나를 이해해 줘···, 도래의 마지막 말은 웅현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변형되다가 서서히 형태를 찾는다. 빛은 따뜻하고 세상은 노랗게 물들었지. 황금빛 계절이거든. 웅현이 말을 건넨다. 빛의 터널을 나오는 웅현의 눈에 그들이 비쳐 든다. 도래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웅현의 발걸음은 더디다. 노란빛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거리는 붉은빛에 휩싸인다. 사랑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웅현의 귓가에 닿는다. 여자는 붉게 물든 나무 아래 붉은 낙엽을 밟고 서 있다. 이어 들려오는 맞은편 남자의 웃음소리, 여자가 낙엽을 그러모아 허공에 뿌린다. 그러고는 다시 외친다. 사랑한다고! 붉은색이 그들 주위로 날아올라 빛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소리칠 기세지만 남자는 계속 웃기만 한다. 웅현은 그들이 붉은 구체 안에 있는 듯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나도 사랑해!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번져온다. 연인이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웅현도 소리 나는 데로 시선을 돌리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고 조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은행나무길이 보일 뿐이다. 웅현은 가벼운 듯 장난스러운 남자의 목소리를 아는 듯하다. 웅현은 도래와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걸으며 그녀와 함께였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러자
- 관리자
- 2026-02-01
아직 이른 마음 박하신 섬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성했다. 초여름을 맞는 버드나무 녹음이 무성했고, 고속도로에 바닷가 갯강구들처럼 달라붙은 자동차 정체 행렬이 무성했고, 하늘에 모둠 지은 뭉게구름 떼가 켜켜이 무성했다. 구름으로 말하자면 경부 고속도로 운전자들의 한숨이 한데 모인 것 같은 풍성함이었고 눅진함이었다. 사이사이 파고드는 여름 볕은 쨍쨍하기만 해서 자동차 갯강구들이 아지랑이 같은 김을 뿜어내며 느릿느릿 익어 가고 있었다. 올여름 재해에 가까운 폭염이 찾아온다고 했다. 창문을 내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끊어야 할 텐데. 지난 건강검진에서 의사는 금연을 강한 어조로 권고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라디오에선 올해 메탄가스와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다시 한번 고점을 돌파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 솥단지를 가득 메운 자동차 행렬을 보니 이해가 안 갈 바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차도 노후 경유차라며 폐차를 권고하던데··· 때마침 창밖에서 도로변 축사 냄새가 매연에 엉킨 채 훅 끼쳤다. 과연 오존을 뚫어 버릴 것 같은 유독함이다. 이게 다 나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앞차 배기의 색깔도 심상치 않다. 그래, 어차피 다 같이 찜 쪄지는 마당에 잘잘못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이미 벌어진 일과 잃어버린 것. 재해에는 고민한들 거스를 수 없는 면이 있고 그렇기에 말 그대로 재해인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암 같은 거다. 분명한 업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건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그래, 평일 오전부터 고속도로에 갇혀 소들 방귀나 맡고 있게 된 것도 말하자면 재해 같은, 암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그건 폭발에 대한 것이었다. 동선의 묘지가 폭발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 이른 열대야에 허덕이던 어제저녁이었다. 낯선 번호로 수차례 전화가 걸려 온 것인데 상대방은 대뜸, 동선 씨 친구분 되십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을 매봉도 수호행동위원장이라고 간략히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틀림없이 폭발합니다··· 땅속에 매설된 니트로글리세린과 질산암모늄 수천 킬로그램이··· 당신 친구의 묘지를 박살 내 버릴 거라구요···. 상대방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거대한 세력이 묘지를 파괴하기 일보 직전이라며 호소했다. 그것도 폭약을 심고 아주 섬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고 했다. 그는 동선의 묘소를 지키고 싶다면 나더러 당장 매봉도로 달려오라고 촉구했다. 여기··· 당신처럼 무언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가능하면 내일까지 와 주십시오···. 불가능해도 내일까지 오십시오. 체념하지 않는다면··· 지킬 수 있습니다. 모
- 관리자
-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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