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을 오르고
- 작성일 202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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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을 오르고
박현옥
기제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한 일은 산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반 거리에 기제의 아버지가 살았다. 거기서 차로 삼십 분을 더 가면 기제의 아버지가 소유한 선산이 나왔다. 12월 중순, 눈이 내리기 전에 다녀오자며 기제의 아버지가 기제에게 말했고, 이어 기제가 내게 주말에 같이 아버지 댁에 내려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따로 챙길 건 없으나 다만 밑창이 튼튼한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신발장엔 바닥이 얇고 발목이 드러나는 단화나 굽이 높은 구두뿐이었으므로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트래킹화를 하나 주문했다. 이튿날 저녁에 택배로 받아 본 신발은 정말로 단단했다. 뒤축이 특히 단단해서 기제가 차를 세워 둔 집 앞의 큰길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벌써 뒤꿈치가 쓸렸다.
선산엔 산주였던 기제 고모의 산소가 있었다. 기제를 몇 년 동안 만났는데 고모 이야기는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해도 뜨기 전인 새벽에 뻥 뚫린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며 기제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십수 년 전에 남의 집 선산이었던 걸 고모가 7억을 주고 샀다고. 시장에서 방앗간을 하던 고모는 인근 광역시의 국제공항이 그 산으로 이전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평생 모은 목돈을 죄다 털었다. 산주의 처가 쪽 친척이 도시개발과 과장으로 일한다는 말에 홀린 듯 산을 사 버린 것이다. 그러나 뜬소문이 으레 그렇듯 이전이 거의 확정이라던 공항은 여러 번의 공청회 끝에 무산됐으며, 선산 역시 원래의 값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원래는 얼마였는데?”
“6천만 원.”
“세상에.”
누군가는 기제의 고모에게 선산에서 송이라도 나면 일 년에 한 달만 일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겠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기제의 고모는 혹시나 하나는 마음에 몇 날 며칠 산을 헤집고 돌아다녔으나 산에는 소나무는커녕 상수리나무만 잔뜩 심겨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참나무와 달리 속이 물러 목재로도 쓸 수 없고 숯으로도 못 만든다고, 기제가 말했다. 고모가 그 산에서 발견한 건 송이도 아니고 산삼도 아니라 지천에 떨어진 도토리뿐이었다.
“근데 고모도 방앗간에서 도토리 가루를 팔았거든.”
앙금을 말려 가루 낸 것으로 킬로에 만 원을 받았다. 묵으로도 쒀 먹고 전으로도 부쳐 먹고, 효능도 모르는 채 매일 티스푼으로 한 숟갈씩 퍼먹는 사람도 있었다. 기제는 그러니까 고모가 도토리를 8억 원어치 산 것이나 다름없다며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난 다음엔 그 이듬해 고모가 산 중턱에서 제초제를 먹었다고 말했고 그때는 웃지 않았다. 히터를 세게 틀어 놓아 겨드랑이와 등과 발가락에서 땀이 났다. 뒤꿈치가 쓸린 곳에 땀이 닿아 한층 더 따가웠다. 내가 자꾸 발을 꿈질거리자 기제가 발이 시리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기제는 진작 말을 하지 그랬느냐며 히터를 더 올려 버렸다. 나중에는 엉덩이와 오금에도 땀이 났다. 짧게 깎은 기제의 옆머리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마을 초입으로 들어서자 저 앞에 기제와 똑같이 생긴 키 작은 아저씨가 서 있었다. 차를 세운 기제가 창문을 내리고 아버지, 타요, 하고 말했다. 나는 창문 너머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너도 왔냐.”
“잘 지내셨어요.”
기제의 아버지는 잘 못 지낸다, 하더니 허허 웃었다. 기제의 아버지를 본 건 그때가 두 번째였다. 그보다 몇 해 전 서울로 문상을 온 기제의 아버지를 만난 게 처음이었다. 소개나 인사랄 것도 없었다. 그가 이미 상갓집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온 뒤라 제대로 대화를 이어 나가기보단 그 혼자서 떠들고 나와 기제는 고개만 끄덕이는 식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하루에 소주를 두 병씩 마시던 친구의 장례식이라고 했다. 술버릇도 고약해서 아내와 아들을 때리는 건 예사였으며 한번은 집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려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까지 했는데, 그런데도 술을 끊지 못했다고 했다.
“병신이 이혼당하고 집에 혼자 남아서 매일 술만 먹다가 앉은 채로 죽었다지 뭐냐.”
“아버지, 친구한테 병신이 뭐예요.”
기제의 아버지는 그러냐, 하며 흐흐 웃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어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조는 것 같기도 했는데, 어느새 다시 고개를 들고 주절주절 떠들었다. 기제의 아버지는 나를 부를 때마다 이름 대신 얘야, 라거나 아가, 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에게 아버님, 이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제와 결혼을 한다면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서로를 부르겠구나, 생각했다. 기제도 저럴까. 나는 먼 훗날 아들의 애인을 붙들고 죽은 친구들에 대해 주절주절 떠드는 나이 든 기제를 상상했다. 병신이, 술만 먹다가 죽었다지 뭐냐. 어쩐지 그런 말은 성정이 착한 기제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기제와 나는 6년을,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중반까지 만났지만 결혼 이야기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었다. 적령기이기도 하고 결혼 생각이 아주 없지도 않았는데 언젠가 할 거라 가정은 했으나 올해와 내년보다는 항상 내후년을 염두에 두곤 했다. 일이 바빠서, 돈이 부족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나중엔 네겐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도 우리가 헤어지지 않고 계속 만났던 건 왜일까. 부족한 내가 그나마 만날 수 있는 게 기껏 너라서? 우리는 끝내 결혼하지 않고 헤어졌으므로 나는 없지 않은 것과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없지 않은 것은 결국 없는 것이다.
“몸은 좀 어떠세요?”
“똑같지.”
나는 뒷자리 쪽으로 몸을 돌려 기제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못 본 새 얼굴이 찌글찌글해진 것 같았다. 그해 연초에 기제의 아버지는 담석이 생겨 담낭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서울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므로 퇴원하고 회복하는 동안 기제의 집에 머물렀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 기제를 한동안 만나지 못하고 전화와 메시지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기제와 통화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기제의 아버지가 “기제야― 이기제―” 하고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기제는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자며 통화를 허둥지둥 정리했다. 한 달 만에 영등포의 감자탕집에서 만난 기제는 볼이 꽤 홀쭉해져 있었다. 아버지와 입맛이 다른 탓에 퇴근하고 함께 저녁을 먹다가 다툰 적이 많았다고 했다. 밥을 해 먹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 배달을 시켜 먹었는데, 메뉴를 고르다가도 싸움이 났다고 했다. 담낭을 떼어 내면 소화력이 떨어지는데 기제의 아버진 그런 건 생각도 않고 자꾸 고기를 먹자고 해서 기제가 콱 성질을 부렸다. 돌아가실 거면 그렇게 하라는 말에 노인네가 입을 합 다물더라. 나는 그런 기제가 안쓰러워 뼈에서 고기를 발라 기제의 앞접시에 놓아 주었다. 기제가 그걸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천천히 밥을 다 먹고 물을 마시던 기제는 내가 자기 아버지의 병문안을 와 주길 기대했었다고 말했다.
“왜?”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어른들과 넉살 좋게 대화하는 성격이 못 되고 기제도 그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기제가 낯설었다. 오라고 했으면 갔을 거라고 내가 대답하자 기제는 그러기 전에 알아서 와 주길 바랐던 것이라고 재우쳐 말했는데, 왜인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때는 얘가 왜 이런 말을 하지, 이상하고 서운했으나 나중엔 왠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기제가 선산에 가자고 했을 때 그러자고 순순히 대답한 것도 그런 까닭이 조금은 있었다.
기제와 헤어지고 나서 남들에게 기제가 했던 말을 들려주면 대부분은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며느리 노릇을 기대하느냐며 헤어지길 잘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나를 편들어 주느라 그런 말들을 한 것이겠지만, 사실 기제는 내게 바라는 것이 많지 않았다. 무얼 입으라거나, 무얼 먹자거나, 하다못해 이것 좀 보라며 유튜브 링크를 보내지도 않았다. 때로는 정말로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같아서 얘가 지금 나를 사랑하긴 하나, 골똘해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기제가 바란 단 한 가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하나를 끝내 해 주지 않았으니 내게 많이 서운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일단 아침부터 먹으러 가자고 기제의 아버지가 말했다. 기제는 말없이 차를 몰아 시장으로 향했다. 우리는 ‘시장순대’라는 간판이 붙은 가게로 가서 순댓국을 한 그릇씩 먹었다. 기제의 아버지가 국물에 다대기를 풀다 말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고모의 방앗간이 있다고 말했다. 방앗간의 상호는 고모의 이름을 따 ‘명희방앗간’인데 주인이 바뀌었으나 상호는 그대로라고 했다. 고모부는 안 계시냐고 물었더니 기제가 국물을 떠먹으며 고모는 일찍이 사별해 줄곧 혼자 살았다고 설명했다. 슬하에 자식도 없었으므로 고모는 늘 혼자였다. 혼자서 방앗간을 하시느라 외로웠겠다고 말하자 기제의 아버지가 방앗간엔 아줌마들이 많이 들러서 괜찮았을 거라고 대답했다. 아줌마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어찌나 조잘대는지 참기름의 절반은 침일 거라고.
기제의 아버지는 서울서 기십 해를 살다가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그와 고모는 함께 살지도 않았고 자주 만나지도 않았다고 했다. 서로에게 영 데면데면한 남매였겠구나 생각했는데 내 속마음을 어떻게 알고 기제가 고모와 아버지는 어머니가 다르다고 말했다. 기제의 큰아버지와 아버지까지가 첫째 할머니, 막내인 고모는 둘째 할머니. 그렇구나, 태연한 척 대답하며 김이 펄펄 나는 순대를 먹다가 입안을 홀랑 데였다.
“아줌마―”
기제의 아버지가 소주를 한 병 시키며 기제와 내게 잔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기제는 운전을 해야 된다고 거절했으나 기제의 아버지가 시골에서 그 정도는 괜찮다고 기어이 잔에 소주를 따랐다. 기제는 순댓국집 사장의 눈치를 보며 조용조용 소주를 마셨다. 사장 아주머니는 우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아침 방송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도시 생활을 접고 산으로 들어가 사는 사람이 나왔다. 기제가 한 잔 반을 마시고 기제의 아버지와 내가 각각 석 잔씩 마셨다. 건배도 하지 않고 홀짝홀짝 소주를 마시던 기제의 아버지는 문득 멧돼지가 고모의 무덤을 파헤치진 않았을지 걱정했다.
“산에 가 본 것도 벌써 작년이다.”
올해 벌초는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었더니 동네 사람에게 업자를 소개받아 돈을 주고 깎게 시켰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제의 아버지는 전화기 앨범에서 사진을 찾아 우리에게 내밀었다. 파랗고 짧은 잔디로 덮인 무덤 아래 상석에 ‘이가명희지묘’라는 글자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밝을 명에 기쁠 희. 너무 쉽게 지은 이름 같아서 괜히 마음이 쓰였다. 사진은 한식에 업자들을 시켜 떼를 새로 입히고 찍은 것이라고 했다. 그 무렵 기제와 함께 오키나와에 다녀온 게 생각났다. 기제도 나도 처음으로 가 본 해외여행이었다. 봄인데도 숨이 막힐 듯이 더워 신기했다. 우리는 차를 빌려 섬을 이곳저곳 돌아다녔는데, 소금박물관의 기념품 상점에서 한 일본 여자가 우리를 보며 “나카요시(なかよし)”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말뜻을 몰라 적당히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중에 숙소에 돌아와 인터넷에 그 말을 찾아보니 사이가 좋다는 의미라고 나왔다. 기제에게도 뜻을 일러 주자 기제는 어쩐지 그건 연인보다 친구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니겠느냐며 뜻 모를 표정을 지었다. 곧장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버린 기제를 보며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무슨 말을 했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곧잘 떠오르면서 왜 그런 건 도통 떠오르지 않을까, 의아했다.
*
농로에 차를 세워 두고 술과 포를 챙겨 산을 올랐다. 트렁크에서 전지가위 한 개와 낫 두 개도 챙겼다. 기제의 아버지가 내게 낫을 하나 건넸다. 자기 손으로 날을 잡고 손잡이는 내 쪽으로 내밀었다. 집과 집 사이를 지나고 겨울이라 텅 빈 밭을 가로지르니 산으로 향하는 입구가 나타났다. 기제의 아버지가 앞장서고 그 뒤를 기제와 내가 따라 올라갔다. 낙엽이 발등 높이로 쌓여 걸을 때마다 와삭와삭 소리가 나며 발이 푹푹 빠졌다. 수종까지는 몰라도 죄다 넓은 잎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가만히 땅을 내려다보니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가 군데군데 보였다. 정말로 송이는 없겠구나. 고모에게 두 오빠 말고는 다른 가족이 없어 기제의 아버지가 산을 상속받았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 산은 나중에 기제의 것이 되려나. 여자는 남자보다 육 년을 더 산다고 하니 아무래도 나보다는 기제가 먼저 죽겠지. 나중에 기제마저 죽으면, 그러면 이 산은 내 것이 되나. 기제를 따라 걸으며 나는 산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궁리했다. 집을 짓고 살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정말로 공항이 이전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앞으로 쿵 넘어지면서 언 땅에 무릎을 찧었다. 술을 마셔서인지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다만 뒤꿈치는 계속 따가웠다.
기제도 기제의 아버지도 내가 넘어지는 걸 보지 못하고 앞으로 걷기만 했다. 기제야, 하고 기제를 불렀으나 나를 돌아보지 않고 자꾸만 멀어져 갔다.
“기제야―”
그러나 내 목소리를 들은 건 맨 앞에서 걷는 기제의 아버지였다. 저 앞에 있던 그가 몸을 돌려 낫으로 나를 가리켰고, 그제야 기제가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봐 주었다. 기제는 갔던 길을 되돌아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뻗어 기제의 가는 손을 잡았다. 기제가 당근을 뽑듯 나를 일으키고는 무릎과 엉덩이와 손바닥을 털어 주었다. 무릎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니 갑자기 멍이 든 것처럼 아팠다.
“조심 좀 하지.”
“미안해.”
가자, 그러고서 기제는 몸을 휙 돌려 제 아버지를 쫓아갔다. 다시 와삭와삭 걸어 내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기제는 정확히 나와 아버지의 중간 지점을 유지하며 걸었다. 기제는 다정하면서도 조금 무심한 편이었다. 나를 바라보면서도 완전히 내 쪽으로 와 주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울고 있으면 가만히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아 주었으나 왜 우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기제를 집으로 불러 밥을 해 주면 밥을 두 공기 먹고 반찬까지 남김없이 다 먹지만 맛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기제는 전철에 앉아 있는데 노약자나 어린이가 다가오면 슬그머니 일어나 먼 곳으로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양보를 한 건지 아니면 내릴 때가 되어 일어난 건지 헷갈려서 미처 고마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십 분쯤 오르자 평평한 땅이 나왔고, 무덤도 보였다.
사진과 다르게 잔디는 오간 데 없이 불그죽죽한 흙뿐이었고 군데군데 강아지풀이 같은 잡초들이 갈색으로 말라 있었다.
“애가 제초제를 먹고 죽어서 아직도 풀이 안 자라나 보다.”
무덤가를 정리하던 기제의 아버지가 말했다. 무덤 옆에 웃자란 개망초를 뽑으며 말하느라 단어마다 힘이 들어갔다. 얘가, 제초제를, 먹고, 죽어서. 농담을 한 건가 싶었으나 웃기진 않았다. 그보다도 당황스러운 게 더 컸다. 나는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풀을 뽑기 시작했다.
“미련한 년 같으니라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풀을 뽑고 있자니 땅에서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와 엉덩이도 발도 시다. 나는 가뜩이나 손발이 찬 편이다 보니 발가락이 깨질 것 같았다. 다리가 저려 틈틈이 일어나 종아리와 허벅지를 주무르고 오그라든 등과 어깨도 풀어 줬다.
기제는 저편에서 전지가위를 들고 마른 가지를 잘라 내고 있었다. 나무도 나무인데 돼지풀이며 덩굴 같은 것들이 잔뜩 엉킨 채로 말라 죽어 있어서 가위로 그걸 자르고 뜯어내고 했다. 기제는 말도 하지 않고 찰칵찰칵 가위질만 한참을 하다가, 어느새 내 곁으로 슬그머니 와서는 자기 큰아버지에 대해 떠들었다. 기제가 방앗간을 이어받았어도 기름의 반이 침이었겠구나 싶었다. 기제는 중학생 무렵에 큰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고 이후로는 못 봤는데, 고모의 장례 둘째 날에 그가 불쑥 나타나서는 조의금으로 삼십만 원을 냈다고 했다. 이튿날 그는 발인을 마치자마자 자기가 낸 삼십만 원을 찾아서 훌쩍 떠나 버렸다. 화장장에도 안 따라가고 그대로 똥차를 끌고 휙 가 버리던데, 말하고서 기제는 피식 웃었다. 장례식엔 손님이 많지 않았으나 다만 시장 상인들이 찾아왔다고 했다. 기제와 기제의 아버지에게 적당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자기들끼리 앉아 밥과 술을 축내 놓고 갔다고. 다들 시장으로 돌아가 일을 해야 해서 밤까지 머물지는 않았다. 한 사람이 신발장에서 자기 신발을 찾다 말고 기제에게 다가와서는, 주름진 손으로 기제의 손을 꼭 쥔 채 자기는 이제 명희를 다 용서한다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기제가 내게 들려주었다.
“고모가 산을 살 때 여기저기서 돈을 조금씩 빌린 모양이더라고. 나중에 공항이 들어오면 웃돈을 얹어서 갚겠다면서 차용을 했는데 그만 일이 잘못돼 버린 거지.”
기제가 거기에 대고 죄송하다 해야 할지 감사하다 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그 사람은 장례식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기제의 손에는 반으로 접힌 부의금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 든 건 만 원짜리 다섯 장이었다. 돌려줄 수도, 어디에 버릴 수도 없는 용서를 기제는 어찌할 바 몰라 했다. 다만 기제는 그들의 용서가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닌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죽은 다음에 하는 용서가 다 무슨 소용이겠어.”
헤아려 보니 기제의 고모가 제초제를 먹은 건 내가 기제를 만나기 오 년쯤 전이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대학을 졸업하고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게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즈음 나는 태형을 만나다 헤어졌고, 시험에 떨어지고는 회사에 들어가 재형을 만났다. 만난 남자들 이름에 모두 형 자가 들어가서 나는 그다음에도 무슨 형 이름을 가진 남자를 만나게 될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는데 정작 그다음에 만난 사람은 기제였다. 신기하게도 지금 내 남편의 이름은 수형이다. 언젠가 나는 기제와 수형 중 누가 내 운명인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형 자 돌림을 끝낸 기제가 운명인지, 끝내 형 자가 들어간 수형이 운명인지. 어느 한쪽이 운명이라면 다른 한쪽은 무엇이 되는 걸까. 단지 우연인가.
“저게 뭐지?”
자리로 돌아가 가위질을 하던 기제가 어딘가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뭐가?”
“저―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제가 보고 있는 것을 보러 갔다. 다리가 저려 엉금엉금 걸어가자 기제가 저기 저거, 하며 가위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멀리 비탈 아래 평평한 곳에 컨테이너 한 채와 샌드위치 패널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건물 같은 게 보였다. 건물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육면체였다. 집인가? 기제는 두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눈에 대고는 집인가 본데··· 하고 중얼거렸다.
“개도 한 마리 묶여 있는데.”
개라는 말에 나도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눈에 대보았다. 나는 개를 좋아하니까. 유일하게 보는 유튜브도 개가 나오는 것들이고. 저 멀리에 하얗고 조그만 무언가가 꾸물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컹컹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으나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다. 기제는 개가 묶여 있으면 사람이 산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나는 당연한 것을 너무 당연하게 말하는 기제가 괜히 우스웠다.
“저게 기어이 남의 땅에 개새끼까지···.”
어느새 기제의 아버지가 우리 곁에 다가와 서 있었다. 저게 누군데요? 하고 기제가 묻자 기제의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사람 하나가 들어와 사는 것 같더라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벌초꾼이 사진을 찍어 보내 주어 알게 됐는데 저기까지도 선산의 영역이니 말하자면 사유지 침입 같은 게 아니겠냐, 기제의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민원을 넣고 여름엔 우체국에 가서 퇴거 기한을 적은 내용증명까지 보냈는데 나가기는커녕 짐만 잔뜩 늘려 놓았다며 분개했다. 한 손에 낫을 꼬나쥔 채로 화를 버럭버럭 내서 조금 무서웠다. 기제는 전지가위를 움켜쥔 채로 한번 가 볼까요, 아버지, 하고 말했다. 그러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은 낫과 가위로 수풀을 헤치며 길을 내기 시작했다.
“아가,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나는 어째야 하나 망설이는 와중에 기제의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추우면 내려가서 차에 들어가 있으라고 기제가 거들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런 나를 기제와 기제의 아버지가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와삭와삭 소리를 내며 눈앞에서 사라져 갔다. 그때로선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하고 단지 무덤 옆에 남아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나는 장갑을 끼고 쪼그려 앉아 풀을 뽑았고, 그러다 발이 시려 혼자 종종걸음으로 무덤 주위를 빙빙 돌기도 했다. 차에 내려가 있을까 싶다가도 길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되어 그러지 못했다. 휴대폰을 꺼내 유튜브로 강아지가 나오는 영상을 조금 보다가 배터리가 얼마 없어 금방 그만두었다. 나중엔 무덤 앞에 놓아둔 소주를 마셨다. 황태포도 손으로 뜯어서 안주 삼아 먹었다. 고모의 것인 줄을 알면서도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그랬다. 소주가 차갑게 식어 이가 시릴 정도였는데 목구멍과 배는 금세 뜨거워졌다. 나는 소주를 마시는 내내 기제에 대해 생각했다.
*
기제와 나는 어느 여름 시내버스 안에서 처음 만났다. 그날 오후엔 공습경보를 대비한 민방위훈련이 20분 정도 예정돼 있었다. 그걸 모른 채 버스를 타고 홍릉 인근을 지나다가 차가 난데없이 길가에 멈췄다. 도로의 차들이 모두 멈추고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기제는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버스 뒷문의 바로 앞자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아서 서울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신기하네요,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그런데 어디로 가던 길이었나요, 그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시동이 꺼져 에어컨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창문을 열고 손으로 부채질을 했는데, 그럴수록 몸에서 열이 올라와 땀을 송골송골 흘렸다. 기제는 오후 반차를 쓰고 은행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고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따러 학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요리를 배우세요?”
“내일배움카드를 쓰면 학원비가 반값이거든요.”
바로 뒤에 앉은 할아버지가 라디오가 들리지 않으니 조용히 하라며 핀잔을 줬고, 그래서 우리는 고개를 앞으로 조금 숙이고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그러고 있으니 왠지 더 우리가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친한 언니랑 같이 학원에 다니는데요, 거기에 취사병 출신인 남자애가 하나 있거든요, 근데 걔는 제대할 때까지 150인분밖에 안 만들어 봤대요, 태어나서 한 번도 2인분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거야···. 그렇게 말하자 기제가 신기하다며 웃고는, 자기는 어릴 때 천식을 심하게 앓아 군대에 가지 않고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거 조용히 좀 하라니까 그러네.”
“아, 죄송합니다.”
뒷자리의 할아버지는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심심했는지 우리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요즘 구청에서 하는 인문학 강연에 다니고 있는데 지난달엔 노자를 읽었고 이번 달엔 장자를 읽는다, 젊은이들은 한비자를 읽어라, 일찌감치 노장사상을 읽으면 인생이 덧없어진다, 한창 일하는 나이에 산에나 들어가 살게 된다, 그러더니 나중엔 창밖을 내다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아주머니가 끙 소리를 내며 자리를 앞으로 옮겼다. 기사 양반, 이거 언제 끝나? 아주머니는 날씨가 우라지게 덥다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한참 뒤, 우리가 연인이 되고도 몇 년이 지나, 기제는 그날 신촌에 있는 은행을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왠지 집에 바로 가고 싶지 않아 아무거나 잡아탄 게 내가 타고 있던 273번 버스였다고 말했다. 홍릉이란 곳도 태어나 처음 지나가 본 거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기제와 내가 만난 건 정말로 운명이었겠구나 생각했는데, 어쩌면 운명이 아니라 우연인지도 몰랐다. 태형과 재형에 모두 형 자가 들어갔던 것처럼 기제가 그 버스를 탄 것도 그저 우연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기제는 기막힌 우연을 운명이라 하는 거 아니겠냐는 말로 나를 안심시켰다.
혼자 무덤가에 남아 소주를 마시며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야금야금 소주를 마시다 보니 모르는 새 반병이나 마셔 버렸다. 얼굴에 서서히 열이 오르고 귀와 눈도 뜨끈해졌다. 술기운이 오르니 그간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궁금해졌다. 오래전에 기제는 은행에 왜 갔을까. 기제는 그때와 하는 일이 달라져 있었다. 다니던 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아는 형을 따라 타일 시공을 배우러 다녔다. 현장에서 일하려면 기존의 타일 업자 소속으로 들어가는 게 중요한데 연줄이 없으면 신입을 받아 주지도 않고 텃세도 심하다고 했다. 아는 형도 원래 태권도장을 하다가 타일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에야 고생했으나 이제는 도장을 운영하던 때보다 벌이가 좋다고 했다. 언젠가 퇴근 후 나를 만나러 온 기제는 방바닥에 쓰러지듯 누워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전보다 편하다며 묻지도 않은 것들을 혼자서 줄줄 말했다.
“전에 회사를 다닐 땐 자주 울었거든.”
그러고는 씻을 생각도 없이 그대로 잠들어 나를 당황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무엇이 그렇게 힘들어서 은행 일을 보고 아무 버스나 타고 어디론가 가 버릴 생각을 했을까. 문득 기제가 너무 가엽고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받지 않았고, 그게 서운해서 소주를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날이 추워서인지 평소보다 빠르게 취기가 돌았는데 순댓국집에서 이미 석 잔을 마셔서 그랬던 것 같다. 합치면 얼추 한 병은 마신 셈이었다. 기제와 기제의 아버지가 떠나고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부터 날이 서서히 꾸물꾸물해지더니, 조금씩 눈이 내렸다. 나는 다시 무덤 주변을 종종걸음으로 여러 바퀴 돌았다. 기제가 오래전 훈련소에서 배웠다며 내게도 알려 준 방한 체조를 혼자 해 보다가 숨이 차고 발도 아파서 그만두었다. 제자리에서 종종 뛰며 발을 앞뒤와 양옆으로 흔드는 방식이었는데 열 번만 해도 땀이 난다고 했다. 군대에 가지 않아 고작 그런 걸 자랑삼아 얘기하는 기제가 웃기고 안쓰러웠다. 기제는 언제 올까요, 고모, 하며 괜히 무덤에 말도 걸었다. 누가 보면 사연 있는 여자로 생각할 것 같아 더 하지는 않았다. 기제가 사라진 자리로 가서 아까 본 집을 다시 찾아보았다. 기제도, 기제의 아버지도, 기제가 있다고 했던 개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향감각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기제야.”
나는 아까 넘어졌을 때처럼 소리 내어 기제를 불러 보았다.
“기제야―”
혼자 있는데도 큰 소리를 내는 게 부끄러워서 먼저보다 조금 작게 불렀다.
“거기 누구요?”
수풀 속에서 남자가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처음 기제와 함께 무덤으로 올라왔던 쪽에 땅꾼이나 약초꾼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군복 무늬 바지와 패딩 점퍼 차림이었고, 키는 기제의 아버지만큼 작았다. 중년 정도로 보였는데 얼굴이 거무튀튀하고 콧수염과 턱수염도 자라 있었다. 손에는 검정 비닐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제법 묵직한 것이 들었는지 봉투 손잡이가 손가락 살을 파고들었다. 누구요? 하고 남자가 표정 없는 얼굴로 내게 재차 물었다. 나는 나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어물거렸다. 산주의 아들의 여자 친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여기 무덤 주인의 조카의 여자 친구라고 해야 할까. 남자의 등장에 깜짝 놀라긴 했으나 취기 때문인지 그가 무섭다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 순간엔 아마 기제의 아버지 정도의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다른 한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뭐라 뭐라 말하고 있었다.
“네? 뭐라고요?”
“그거, 먹는 거냐고요.”
남자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엔 내가 먹다 남긴 소주와 황태포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먹을 만큼 먹었고 또 원래는 고모의 것이었으니까. 남자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와 소주와 황태를 집어 들어 봉투에 넣었다. 소주병을 줍느라 몸을 숙일 때 그의 동그랗게 빈 정수리가 보였다. 만약 그와 내가 아는 사이였다면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으려 애썼겠지만,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남자는 고맙다는 말 대신 봉투 안에서 귤 세 개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내가 그걸 바라보고만 있으니까 그가 어서 가져가라는 듯 손을 한번 흔들었다. 얼른 받아요. 나는 손을 뻗어 귤을 받았다.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차가운 감촉과는 별개로 작고, 말랑말랑하고, 색이 선명해서 무척 달아 보이는 귤이었다.
남자와 나는 마주 선 채로 대화를 조금 나눴다. 음식을 나눈다는 건 둘 사이에 적어도 최소한의 호의가 오고 간다는 뜻이고, 내가 그를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인지도 몰랐다. 먼발치에 놓인 낫과 뽑아 놓은 잡초 더미를 본 그가 성묘를 왔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혹여 술 냄새가 날까 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나는 저―쪽 산 중턱에 삽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갯짓으로 기제와 기제의 아버지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그들이 찾아가 만나려는 사람이, 면사무소에 민원을 넣고 내용증명으로 보내도 모르는 척 산에 비집고 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텃밭에서 기른 배추로 김치를 담고 남은 걸 산 아래에 사는 할머니에게 가져다주고 귤을 받아 오는 길이라며 묻지도 않은 것들을 줄줄 설명했다. 사람이 그리웠던 걸까, 그는 좀처럼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에 질리고 사람이 싫어서 산으로 들어갔다는 사람이 눈앞의 사람에게 자신을 낱낱이 끄집어내고 있었다. 기실 사연이 복잡하진 않았다. 원래는 경기도 의왕과 분당을 오가는 버스를 몰았는데 매일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을 태우고 같은 길을 다니다 보니 자기 인생이 이렇게 도로 위에서 끝나 버리는 것 같아 무서웠다고. 존재에 대한 그의 두려움은 차츰 분노가 되었고, 어느 하루엔 고속도로를 달리던 와중에 핸들을 틀어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날이었어요, 산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게.”
남자는 이번이 산중 생활에서 처음으로 맞는 겨울인데, 겨울은 생각보다도 더 혹독한 계절인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추위도 추위인데 음식도 귀하고 술은 더 귀하다고 했다.
“몸은 고단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해요.”
내가 참 처음 보는 아가씨한테 별 얘기를 다 하네, 그러면서 허허 웃는 남자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기제가 보였다.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 일하면서도 마음이 편하다고 웃는 기제, 회사에서 소리 죽여 울었던 기제.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아무 데로나 가 버리는 기제. 가엽고 보고 싶은 기제. 술을 마셔서 그런지 기제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멀리서 희미하게 개가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렸다. 깨갱깨갱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남자가 웃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골똘한 얼굴로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가 곧장 나를 지나쳐 기제와 기제의 아버지가 사라진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는 소주를 챙기고 귤을 내밀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마 저런 얼굴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으려 했겠구나 싶었다.
저 사람을 기제와 만나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으로 낫을 찾았다. 술을 마셔서인지 날이 추워서인지 눈알이 빠릿빠릿 돌아가지 않았다.
마침내 낫을 찾아 주워 들었을 땐,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기제는 삼십 분가량 더 지나서야 무덤으로 돌아왔다. 그새 눈발이 조금 더 굵어졌다. 기제의 얼굴엔 지치고 고단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딘가 얼이 빠져 보이기도 했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이냐 묻는 대신 기제의 손에 들린 가위를 바라보았다. 가위 날과 손잡이에는 피처럼 보이는 붉은 액체가 묻어 있었고, 그게 기제의 옷에도 옆얼굴에도 튀어 있었다. 바짓단엔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하얀 털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처음엔 눈송이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털이 맞았다. 개의 피와 개의 털인 것 같았다. 기제의 아버지는 짐이 있어 먼저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중이라고 했다.
“소주는?”
기제가 물었고,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황태도 없네, 중얼거렸다. 나는 주머니에서 귤을 꺼내 내밀었다. 기제는 귤을 반으로 갈라 껍질을 벗긴 뒤 한입에 넣고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었다. 기제는 귤 세 개를 정신없이 먹어 치우고는 가자, 라고 말했다. 나는 낫을 챙겨 기제의 뒤를 따랐다.
비탈을 내려가던 중에 나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눈이 내린 탓에 바닥이 미끄러웠고, 뒤꿈치가 너무 아파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앞서서 가는 기제를 부르지 않았는데도 기제가 알아서 내게 다가왔다. 기제는 가위 날을 모아 쥐고 손잡이를 내게 내밀었다. 잡아, 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제가 피 묻은 날을 쥐고 있는 것이 싫었다. 맨땅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눈 때문에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기제가 가위를 바닥에 내려놓고 내게 다가왔다. 괜찮으냐고 묻는 기제의 얼굴은 원래 내가 알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제, 어디에도 없었던 기제였다. 아마도 그때 나는 내게 기제와 운명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가 끝내 헤어지고 마는 운명이리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았던 것 같다.
*
기제와 나는 산에 다녀온 이듬해에 헤어졌다. 이듬해라곤 했지만 연말에 산에 갔고 연초에 헤어졌으니 고작 한두 달 후라고도 할 수 있다. 싸우지는 않았고 소원해졌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 같지만, 원래도 우리는 각별하고 살뜰하진 않았으므로,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헤어졌느냐고 묻는다면 해 줄 말이 별로 없다. 수형에게도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기제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내게 적당히 다정하고 무심하게 구는 순간을 맞닥뜨릴 때면 겨울 산에서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정확히는 기제의 등에 업힌 채 함께 하산하던 순간이었다. 기제는 내 엉덩이를 팔로 받치고 손으로는 내 신발과 낫과 가위를 들었다. 나는 기제의 등에 몸을 바짝 붙이고 목 아래를 꼭 둘러 안았다. 기제는 아버지를 닮아 키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등은 비교적 넓은 편이었다. 나는 기제의 넓은 등을 좋아했는데, 그 넓은 등에도 군데군데 개털이 묻어 있었다. 피도 두어 방울 튄 것이 보였다. 함께 산을 내려가는 동안 나는 기제의 등에 묻은 개털과 피와 그 위에 내려앉는 눈을 헤아리면서 기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가만가만 읊조렸다.
기제야, 내가 너를 위해 무엇까지 생각했는지 아니.
바닥에서 낫을 찾았어.
그 사람의 목덜미를 찍어 버리려고 말이야.
그러는 동안 기제는 평소처럼 조잘대기보다는 입으로 하아 하아 거친 숨만 내쉬었다. 기제가 내뿜는 뽀얀 입김이 내 쪽으로 뭉게뭉게 넘어왔다. 시간이 흘러 기제의 아버지가 죽으면 이 산에 무덤을 만들게 될까. 그러면 기제는 해마다 이곳에 내려올까. 그때에도 기제는 산에 들어와 사는 사람에게 분노하고, 그를 쫓아내려 애쓰고, 무언가를 죽이러 가게 될까. 그때 나는 기제와 함께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나는 조금씩 나른해졌었다.
기제와 헤어진 해 여름에 나는 수형을 만났고, 거기서 한 해가 더 지나 우리는 결혼을 했다. 수형과는 아는 언니(함께 요리학원에 다녔던)의 소개로 만났는데, 처음 본 순간부터 왠지 결혼을 짐작했다. 나중에 수형도 나처럼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을 듣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번은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을 주제로 한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기제와 기제의 아버지와 함께 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수형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무덤가에 나 혼자 남아 소주를 마신 이야기를 몹시 흥미로워했고, 어떤 남자가 나타난 부분에선 긴장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는 기제와 기제의 아버지를 욕했다. 길도 모르고 연고도 없는 무덤 옆에 나 혼자 남겨 둔 그들을 욕을 섞어 비난했다. 하지만 남자가 떠나기 직전 내가 낫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웃지도 않았고 화내지도 않았다. 다만 수형은 좋아하는 마음은 때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 다음엔 나를 봐, 당신 만나고 내가 이렇게 이상해졌잖아. 그런 말로 나를 웃겼다.
얼마 전엔 신발장을 정리하다가 그때 내가 신었던 트래킹화를 발견했다. 기제를 따라 산을 오르내릴 때 딱 한 번 신고 그 뒤로 다시는 신지 않았다. 양쪽 뒤꿈치에 손톱만 한 물집이 잡히고 진물이 질질 흘러 여러 날을 더 고생했었는데, 그런데도 신발은 여전히 길이 들지 않고 단단했다. 그 사실이 왠지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신발을 신고 산에 갈 생각은 없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그걸 차마 버리진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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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황새 양선형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네가 저질렀던 끔찍한 죄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쩌면 인간으로 살았던 시간을 초과할 만큼 오랫동안 작동했다. 너는 네게 주어진 원통형의 한계 속에 틀어박혔다. 그것이 너였다. 배터리와 부품이 망가지면 너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착했고, 너는 네 작동을 중지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음은 물론 작동을 중지하고 싶은 욕망 또한 갖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형벌이 단호하게 집행되었고, 너는 눈을 감았으며, 숨이 끊어지기 직전 너는 이후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줄곧 반복해야만 하는 한 줄의 기억 타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었던 시절의 작은 파편으로서 오토마타로 개조된 네 머리통 안에 각인될 예정이었다. 누군가 드러누운 네 팔뚝에 주사를 놓았다. 나른한 의식은 감은 눈 속으로 어른거리는 박쥐 모양의 환영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기억 타래는 네가 과거에 살과 피를, 얼굴과 자의식을 가졌던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의미했다. 인간인 너와 오토마타인 너를 잇는 개체로서의 동일성을, 속죄를 끝마치고 형기가 만료될 때까지 네가 감당해야만 하는 과오와 책임의 연속성을 말이다. 따라서 기억 타래는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인해 극형에 처해진 바로 그 범인임을 증명하는 전자 신분증이자 영혼의 낙인으로 비유될 수 있었다. 네가 죄수임을 공인하는 사법 기관의 서명, 특수한 일련번호, 기계의 머리통 안쪽에 새겨진 자아의 조각, 네 유한하며 어리석었던 시절의 잔류 데이터. 그러나 너는 네가 다른 기억들 가운데 하필이면 이 기억 타래를 골랐던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각별했기 때문인지, 각별했던 기억들 가운데 이 기억만이 무의미했기 때문인지. 너는 카메라처럼 무감하게 눈을 떴으며,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딸깍거리는, 앵앵거리고 번쩍거리는 전자 신호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네 머리통 안에는 한 줄의 기억 타래만이 남아 있었다. 너는 기계, 껍데기가 회색인 오토마타. 너는 정확하게 움직이는 효율적인 무력함이었고, 그 무력함 속을 공회전하는 짤막한 분량의 이미지 찌꺼기였다. 너는 스크린을 향해 강제로 조향된 인형의 냉담하며 거짓된 눈알처럼 기억의 이미지를 주시했고…… 주시하지 않았으며, 사나운 파도처럼 우윳빛으로 들이닥치는 심신상실이 환하게 빛나는 스크린 주위를 에워쌌다. 네 머리통 안의 암실에서는 언제나 한 줄의 기억 타래가 상영되었다. 너는 기억 타래를 출력하는 영사기이자 영사막이자 영사기사였으며, 성자와 성부와 성령과…… 세 가지 작동인 사이를 그치지 않고 순환하는 자율적인 엔진에 가담하고 예속된 상태였으나, 대부분 네 기억의 관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엔 네 기억의 관객일 수 있는 네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ON이었다. 너는 네 신경망에 폭포처럼 흐르는 전류를 자발적으로 차단할 수 없
- 관리자
- 2026-02-01
도래의 얼굴 최정나 한 남자가 길을 걷는다. 남자의 이름은 웅현이다. 웅현은 은행나무길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노랗게 물든 황금 터널 안에서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본다. 바람이 일자 은행잎들이 햇살을 따라 휘돌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웅현은 꽃잎처럼 흩날리는 노란 잎사귀들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위로도 햇살이 부서진다. 바람을 받은 잎사귀들이 다시 허공으로 번져 오르다가 방향을 살짝 틀어 다른 데로 이동한다. 웅현은 눈에 비친 풍경을 화면에 담아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웅현은 얼마 전 도래와 이별했다. 그래서 길에서 스치는 사람이 모두 도래로 보인다. 도래가 홀로 걷고, 도래가 누군가와 함께 걷고, 떨어지는 낙엽을 올려다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내려다보고···. 도래는 출몰하듯 나타나 웅현 곁을 스쳐 지난다. 옆에 있는데도 먼 얼굴, 도래가 자신을 불러내는 건지 자신이 도래를 불러내는 건지 웅현은 알 수 없다. 이윽고 수많은 도래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로 변한다. 도래와 함께 떠난 얼굴들,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웅현은 하늘을 본다. 사랑을 놓쳤니? 황금빛 사이로 겹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다. 왜 웃는 거지? 웅현은 누군가 보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놀림 받은 기분이다. 하지만 웅현은 그들이 남겨진 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렇더라도 역시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을 바꾸고, 곧이어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먹먹해진다. 나를 이해해 줘···, 도래의 마지막 말은 웅현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변형되다가 서서히 형태를 찾는다. 빛은 따뜻하고 세상은 노랗게 물들었지. 황금빛 계절이거든. 웅현이 말을 건넨다. 빛의 터널을 나오는 웅현의 눈에 그들이 비쳐 든다. 도래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웅현의 발걸음은 더디다. 노란빛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거리는 붉은빛에 휩싸인다. 사랑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웅현의 귓가에 닿는다. 여자는 붉게 물든 나무 아래 붉은 낙엽을 밟고 서 있다. 이어 들려오는 맞은편 남자의 웃음소리, 여자가 낙엽을 그러모아 허공에 뿌린다. 그러고는 다시 외친다. 사랑한다고! 붉은색이 그들 주위로 날아올라 빛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소리칠 기세지만 남자는 계속 웃기만 한다. 웅현은 그들이 붉은 구체 안에 있는 듯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나도 사랑해!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번져온다. 연인이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웅현도 소리 나는 데로 시선을 돌리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고 조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은행나무길이 보일 뿐이다. 웅현은 가벼운 듯 장난스러운 남자의 목소리를 아는 듯하다. 웅현은 도래와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걸으며 그녀와 함께였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러자
- 관리자
- 2026-02-01
아직 이른 마음 박하신 섬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성했다. 초여름을 맞는 버드나무 녹음이 무성했고, 고속도로에 바닷가 갯강구들처럼 달라붙은 자동차 정체 행렬이 무성했고, 하늘에 모둠 지은 뭉게구름 떼가 켜켜이 무성했다. 구름으로 말하자면 경부 고속도로 운전자들의 한숨이 한데 모인 것 같은 풍성함이었고 눅진함이었다. 사이사이 파고드는 여름 볕은 쨍쨍하기만 해서 자동차 갯강구들이 아지랑이 같은 김을 뿜어내며 느릿느릿 익어 가고 있었다. 올여름 재해에 가까운 폭염이 찾아온다고 했다. 창문을 내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끊어야 할 텐데. 지난 건강검진에서 의사는 금연을 강한 어조로 권고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라디오에선 올해 메탄가스와 일산화탄소 배출량이 다시 한번 고점을 돌파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 솥단지를 가득 메운 자동차 행렬을 보니 이해가 안 갈 바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차도 노후 경유차라며 폐차를 권고하던데··· 때마침 창밖에서 도로변 축사 냄새가 매연에 엉킨 채 훅 끼쳤다. 과연 오존을 뚫어 버릴 것 같은 유독함이다. 이게 다 나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앞차 배기의 색깔도 심상치 않다. 그래, 어차피 다 같이 찜 쪄지는 마당에 잘잘못은 논하지 말기로 하자. 이미 벌어진 일과 잃어버린 것. 재해에는 고민한들 거스를 수 없는 면이 있고 그렇기에 말 그대로 재해인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암 같은 거다. 분명한 업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건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그래, 평일 오전부터 고속도로에 갇혀 소들 방귀나 맡고 있게 된 것도 말하자면 재해 같은, 암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그건 폭발에 대한 것이었다. 동선의 묘지가 폭발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 이른 열대야에 허덕이던 어제저녁이었다. 낯선 번호로 수차례 전화가 걸려 온 것인데 상대방은 대뜸, 동선 씨 친구분 되십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을 매봉도 수호행동위원장이라고 간략히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틀림없이 폭발합니다··· 땅속에 매설된 니트로글리세린과 질산암모늄 수천 킬로그램이··· 당신 친구의 묘지를 박살 내 버릴 거라구요···. 상대방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거대한 세력이 묘지를 파괴하기 일보 직전이라며 호소했다. 그것도 폭약을 심고 아주 섬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고 했다. 그는 동선의 묘소를 지키고 싶다면 나더러 당장 매봉도로 달려오라고 촉구했다. 여기··· 당신처럼 무언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내일까지···. 가능하면 내일까지 와 주십시오···. 불가능해도 내일까지 오십시오. 체념하지 않는다면··· 지킬 수 있습니다. 모
- 관리자
-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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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이기제가 이기재
새해에는 역시 박 작가님의 소설이죠.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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