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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의 얼굴

  • 작성일 2026-02-01

   도래의 얼굴


최정나


   한 남자가 길을 걷는다. 남자의 이름은 웅현이다. 웅현은 은행나무길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노랗게 물든 황금 터널 안에서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본다. 바람이 일자 은행잎들이 햇살을 따라 휘돌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웅현은 꽃잎처럼 흩날리는 노란 잎사귀들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위로도 햇살이 부서진다. 바람을 받은 잎사귀들이 다시 허공으로 번져 오르다가 방향을 살짝 틀어 다른 데로 이동한다. 웅현은 눈에 비친 풍경을 화면에 담아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웅현은 얼마 전 도래와 이별했다. 그래서 길에서 스치는 사람이 모두 도래로 보인다. 도래가 홀로 걷고, 도래가 누군가와 함께 걷고, 떨어지는 낙엽을 올려다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내려다보고···. 도래는 출몰하듯 나타나 웅현 곁을 스쳐 지난다. 옆에 있는데도 먼 얼굴, 도래가 자신을 불러내는 건지 자신이 도래를 불러내는 건지 웅현은 알 수 없다. 이윽고 수많은 도래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로 변한다. 도래와 함께 떠난 얼굴들,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웅현은 하늘을 본다. 

   사랑을 놓쳤니? 

   황금빛 사이로 겹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다. 

   왜 웃는 거지? 

   웅현은 누군가 보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놀림 받은 기분이다. 하지만 웅현은 그들이 남겨진 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그렇더라도 역시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을 바꾸고, 곧이어 떠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먹먹해진다. 나를 이해해 줘···, 도래의 마지막 말은 웅현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변형되다가 서서히 형태를 찾는다. 빛은 따뜻하고 세상은 노랗게 물들었지. 황금빛 계절이거든. 웅현이 말을 건넨다. 빛의 터널을 나오는 웅현의 눈에 그들이 비쳐 든다. 도래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웅현의 발걸음은 더디다. 


   노란빛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거리는 붉은빛에 휩싸인다. 사랑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웅현의 귓가에 닿는다. 여자는 붉게 물든 나무 아래 붉은 낙엽을 밟고 서 있다. 이어 들려오는 맞은편 남자의 웃음소리, 여자가 낙엽을 그러모아 허공에 뿌린다. 그러고는 다시 외친다. 사랑한다고! 붉은색이 그들 주위로 날아올라 빛처럼 흩어진다. 여자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소리칠 기세지만 남자는 계속 웃기만 한다. 웅현은 그들이 붉은 구체 안에 있는 듯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나도 사랑해!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번져온다. 연인이 낯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웅현도 소리 나는 데로 시선을 돌리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고 조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은행나무길이 보일 뿐이다. 웅현은 가벼운 듯 장난스러운 남자의 목소리를 아는 듯하다. 

웅현은 도래와 함께 걷던 길을 홀로 걸으며 그녀와 함께였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러자 찬 바람이 뺨에 닿는 듯하고, 도래가 또다시 나타나 웅현의 손을 잡는다. 웅현은 맞잡은 손을 호주머니에 넣는다. 둘은 서로에게 체온을 옮기며 실내 포장마차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주르르 놓인 음식물 쓰레기통 위에도 붉게 물든 벚나무 잎사귀 몇 장이 떨어져 있다. 둘은 작은 어항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우럭들이 움직임 없이 한 방향을 보고 있다. 도미 한 마리가 상처 난 비늘을 떨어뜨리며 우럭을 피해 천천히 돈다. 다른 어항에서는 작은 문어들이 긴 다리를 활짝 펼쳐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고 있다. 

   실내 포장마차로 들어간 둘이 자리에 앉자마자 일하는 할머니가 다가와 해신탕을 추천한다. 해신탕이 뭐냐고 묻는 도래에게 할머니는 육해공의 진미가 다 들어 있지. 용왕이 먹는 거니 한번 잡숴 봐, 하고 돌아서서 바삐 움직인다. 

   뭘 먹을래? 웅현이 묻는다. 

   도래가 메뉴를 고르지 못하는 사이 웅현이 다른 테이블을 둘러보고는 다시 묻는다. 

   할머니가 골라 준 거 먹어 볼까. 다들 그거 먹는데? 

   좋아. 

   웅현이 주문한다. 할머니가 다시 와 테이블에 화로를 놓고 그 위에 작은 냄비도 올린다. 소주와 맥주, 밑반찬이 깔린다. 둘은 잔에 술을 따라 건배한다. 양은 냄비 바닥이 화로와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둘의 얼굴이 화기로 물든다. 주변 공기가 팽창한다. 

   여행은 언제 가기로 했어? 꼭 가야 하는 건가? 웅현이 머뭇거리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묻는다. 

   도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다. 

   그때 할머니가 다가와 파란 바가지에서 꺼낸 문어 한 마리를 눈 깜짝할 새 도래 앞 냄비에 넣는다. 펄펄 끓는 냄비 안에서 문어가 꿈틀거리며 조금씩 수축한다. 도래는 소스라치게 놀라 외친다. 

   할머니! 산 채로 넣으면 어떻게 해요? 머리도 좋은 애를! 

   할머니는 이미 둘의 테이블을 지나 다음 테이블의 냄비 안에 또다시 산 문어를 집어넣으면서 도래를 보지 않고 말한다. 

   싱싱하다고 다들 좋아하는데 왜 그러실까? 

   할머니는 또 다른 테이블의 주문을 받고 돌아선다. 도래는 할머니의 절룩이는 걸음걸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그러고는 갑자기 운다. 웅현은 놀라서 황급히 냄비 뚜껑을 닫는다. 도래는 할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라면서도 눈물을 쉽사리 멈추지 못한다. 냄비를 뚫어져라 보던 도래가 뚜껑을 열어 아직 꿈틀거리는 문어를 본다. 웅현은 당황해서 우는 이유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대신 뚜껑을 다시 닫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굳이 뚜껑을 열어 죽어 가는 문어를 확인하는 도래가 의아하기만 하다. 침묵이 이어진다. 다시 다가온 할머니가 가위로 문어를 자른다. 도래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본다. 할머니는 우는 도래가 안됐는지 서비스라며 사이다를 내온다. 사람들이 웅현과 도래를 힐끔거린다. 

   되게 크게 잘못한 사람 보듯 나를 봐. 

   웅현의 볼멘소리에 도래는 그제야 주위를 본다. 걱정하는 눈빛들과 시선이 마주친다. 도래가 싱긋 웃는다. 웃으면서 운다. 도래는 웅현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고는 문어를 먹는다. 웅현도 같이 먹는다. 

   내 배를 채우려고 남의 살을 먹는 게 너무 슬프다. 

   그런데도 문어를 다 먹네. 웅현이 웃는다. 

   먹어야지. 

   보통 그러면 안 먹는데···, 맛있어? 

   맛은 없어···. 

   그런데 왜 먹어? 

   문어에 대한 예의를 지키느라···, 너도 잘 먹네. 

   타이어보다 더 질긴 것 같아. 

   도래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머리가 좋은 애라고 말한 점이 우습다고 했는데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뒤늦게 고백한다. 문어가 죽어서라도 우리 몸에서 같이 살아가기를 바랐다고도 했는데 그것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어째서 문어의 죽음을 의미로 만들려 했을까? 머리가 좋은 게 뭔 상관이라고? 

   도래가 하는 말의 의미는 웅현에게 와닿지 않는다. 왜 굳이 저런 생각을 하는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평소처럼 말하는 도래의 목소리에 마음이 놓일 뿐이다. 그러자 끝맺지 못한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인제 정말 그만 울어. 문어도 다 먹었잖아? 주위로 시선을 돌리며 말하는 웅현의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밴다. 

   사람들이 아직도 쳐다봐? 도래가 주위를 보지 않고 묻는다. 

   계속 보고 있어. 대체 저 나쁜 놈이 뭘 잘못했는지 알아내겠다는 듯이. 

   미안해. 

   괜찮아. 그러니까 그만 울어. 

   마음껏 슬퍼할 공간이 없어 슬프다. 도래가 한숨을 내쉰다. 

   고독할 자유가 없어 고독한 것처럼? 

   웅현이 예전에 도래가 한 말을 되돌려 주고는 냄비 안을 뒤적이며 말을 잇는다. 

   그래도 우리는 문어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하나도 남기지 않았어. 

   도래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러고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묻는다. 

   너도 네 살을 내어줄 거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내 살은 내 거야. 웅현이 몸서리치는 흉내를 내며 양팔로 어깨를 감싸안는다. 

   그러면 날 먹어 버릴 거야? 

   웅현은 대답하지 않는다. 냄비 안에서 뿜어나오는 수증기가 웅현의 시야를 가린다. 어느 순간 도래가 뿌옇게 흐려지다가 보이지 않는다. 웅현은 주위의 사람들을 본다. 홀로 앉아 조용히 문어를 먹고 있는 한 남자를 본다. 그 앞에 놓인 양은 냄비를, 그리고 입구 유리창에 하얗게 서린 김을, 그 너머에서 이쪽을 들여다보는 검은 실루엣을 본다. 


   웅현은 골목에 서서 포장마차 유리창을 보고 있다. 여전히 손님이 많고 뿌연 증기가 가득하다. 그 사이로 냄비 안의 문어를 홀로 먹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흘러들지만 일하는 할머니에 금세 가려진다. 

   골목 어딘가에서 통화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웅현의 귓가에 닿는다. 상대에게 하소연하는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버티는 수밖에 없다고, 그건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 관계를 끝낼 수는 없어. 흘러가는 대로 두는 수밖에는. 여자는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흐느낀다. 

   나는 차라리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그 말이 웅현에게 박혀 든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사랑이 있다는 사실이 그를 어지럽힌다. 


   올해 초 웅현이 이사한 집은 1975년에 지어진 3층 석조 건물로 널찍한 마당이 딸려 있다. 한 층에 한 세대씩 세입자가 입주해 있는 낡은 주택 3층이 웅현의 집이다. 

   처음 그 집을 보러 갔을 때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거실 바닥을 사선으로 가르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잠든 아이의 몸으로도 햇살이 흘러들었는데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평온해 보였다. 엄마와 할머니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웅현과 도래를 맞이했다. 불이 꺼져 있는데도 집이 밝았다. 

   불은 잘 들어와요? 웅현도 조용히 물었다. 

   그럼요. 할머니가 대답했다. 

   그런데 왜 불을 안 켜 두셨어요? 

   전기료 아끼느라요. 그래도 이렇게 환하잖아요? 할머니가 스위치를 켜자 집이 조금 더 밝아졌다. 

   확인했으니 얼른 끄세요. 전기 요금 나오겠어요. 도래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할머니는 흐뭇한 얼굴로 전등을 가리키며 사위가 예쁜 걸로 사서 단 거라고 했다. 

   남편이 이것도 다 새로 갈았고요. 엄마도 할머니와 같은 표정으로 싱크대 손잡이를 가리켰다.

   손잡이 중 두세 개는 갈아 낀 것과는 모양이 달랐고, 웅현은 나중에 손볼 걸 생각해서 그것을 눈여겨봤다. 밝고 온화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웅현은 집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전에 살던 집보다 넓었고, 도래와 같이 이 집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도 미래의 암시 같았다. 

   계약은 비대면으로 이루어졌다. 집주인은 부모에게서 상속받은 72평 단독주택을 세놓고 지금은 미국 유타주에 거주하는 회계사라고 했다. 복잡한 서류 절차뿐 아니라 보증금을 날릴 수도 있다는 위험이 따랐는데 도래는 오히려 그 과정을 좋아했다. 서류 안에서 이 집의 과거를 읽는 듯했다. 임대인의 아버지는 이곳에 집을 짓고 두 아들을 낳아 기르고, 자식이 출가한 뒤 이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소유권은 어머니를 거쳐 첫째 아들에게 이어졌고, 지금까지 이십오 년간 세를 놓아 왔다. 

   웅현이 서류에 허점이 없는지 살피는 동안 도래는 집을 둘러봤다. 마치 한 가족의 오랜 시간과 이 공간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의 자취를 더듬듯이. 웅현이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도 있다는 게 무섭지 않냐고 물었을 때 도래는 어쩐지 집이 그 모든 기억을 품은 채 우리를 보고 있는 거 같다며 다소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고는 너는 무서워? 하고 되물었다. 웅현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를 타인의 기척을 떠올리는 게 찜찜했다. 

   집안 곳곳에도 누군가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몇 개의 싱크대 손잡이뿐 아니라 빗물이 스며든 자국, 거실 벽면에 남은 아이의 낙서와 하트 모양의 보석 스티커 같은 것들, 의자 다리 자국이 남은 바닥과 아이언맨 비누 받침이 붙은 욕실 거울까지 손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도래는 아이가 그런 건데 뭘, 하며 웅현이 신경 쓰는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벽면에는 아이의 키를 재던 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얼굴만 크게 그려진 동그라미에 가느다란 선을 이은 비대칭적인 몸과 하나의 색으로만 칠해진 빨간 덩어리의 사람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섬뜩했다. 

   예전에는 밭에 무덤도 있었잖아. 게다가 이건 무덤도 아니고 아이의 흔적인걸.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웅현은 도래의 몸 어딘가에 있을 검은 공간이 그려졌다. 무언가가 어수선하게 들어차 있지만 끝내 그곳에 가닿을 수 없을 것 같았고, 알 수 없다는 것은 불안으로 다가왔다. 

   웅현은 도래의 말을 듣지 못한 척 집을 청소했다. 고칠 수 있는 부분은 직접 수리하고 빗물이 샌 흔적과 곰팡이 자국은 가림천으로 가렸다. 부분 도배와 페인트칠까지 하고 나니 집이 조금씩 정돈되는 듯했다. 

   거실 끝 계단은 옥상과 연결되었고, 그곳은 3층만 이용할 수 있는 전용 공간이었다. 계약서에는 ‘옥상 사용을 금지한다’라는 조항이 있었는데 도래는 ‘금지’라는 단어를 쉽게 쓰는 집주인의 사려 깊지 않은 태도에 실망했다. 미국에 있는데 어떻게 확인하겠어? 웅현이 기분을 풀어 주려고 말하면 도래는 밖으로 열리는 문을 통해 바람길을 만드는 건 금지조항일지 아닐지 궁금하다며 옥상 문을 열어서 아래층까지 바람이 흘러들게 하곤 했는데 문을 열 때마다 들려오는 삐걱거리는 경첩 소리가 마치 다른 세계의 문이 열리는 신호인 것도 같다고 했다.

   옥상 문 앞에는 방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웅현은 도래와 함께 차를 마시거나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나눠 먹었다. 문을 열고 건물과 건물 사이로 흘러드는 숲을 바라보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끼며 사랑을 나눴다. 손을 뻗으면 도래가 있었다. 도래의 살결이 닿는 감각은 웅현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도래는 옥상 방에 물건들을 하나씩 가져다 놓았다. 조약돌과 조개껍데기, 도토리와 은행알, 친구가 주고 갔다는 손목시계와 유리구슬 따위를 작은 그릇에 담아 선반 위에 보관했다. 거실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황이 그려준 그림을 걸었다. 황은 도래의 친구로 일흔이 넘은 노인이다. 그와 함께 갔던 여행 사진도 마스킹테이프로 붙여두었는데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갯벌 사진들 가운데 멀리서 찍은 황의 뒷모습이 끼어 있었다. 웅현은 아무리 노인이라도 다른 남자의 사진을 붙여 놓은 게 꺼림칙했다. 무엇보다 이 문제로 도래와 다투던 기억이 떠올라 더 못마땅했다. 도래는 웅현의 반대에도 황과 여행을 갔다. 다녀와서도 그와 종묘와 탑골공원 근처를 돌아다녔다. 

   반년 전 인왕산에서 길을 잃은 도래는 황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어디 사는지는 모르고 절을 거처 삼아 옮겨 다니는 것 같다고 했는데 스님은 아니라고 했다. 웅현은 노숙자나 다름없는 사람과 다니는 도래를 이해할 수 없어서 화를 냈다. 그런데도 도래는 계속 그를 만났고, 그 이유로 불화를 반복하다가 결국 웅현이 모른 척하는 걸 택하면서 잠잠해졌다. 더 반대하다가는 도래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한번은 도래와 함께 황을 만난 적이 있었다. 도래가 여행을 다녀온 후였다. 셋이 같이 신진 시장 골목의 한 식당에 들어가 낮술을 마셨다. 인사를 나눈 뒤 주로 둘의 대화를 듣던 웅현은 황에게서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 점이 다행이면서도 동시에 허탈했다. 웅현의 상상 속에서 황은 조금은 어른다운 노인이었고, 그래야 그를 만나는 도래가 설명됐기 때문이었다. 

   식당을 나와서는 황이 앞서 걸었다. 그는 처음 시장 구경 나온 어린아이처럼 가벼운 걸음걸이로 이곳저곳을 살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비를 쫓는 아이처럼도 보였다. 그런데도 걸음이 빨라 잠깐 시선을 떼면 저만큼 멀어져 갔다. 

   산에서 만났다더니 축지법이라도 쓰는 건가? 웅현이 말했다. 

   빨리 가자. 아무래도 또 놓치겠다. 도래가 웃으며 재촉했다. 

   황은 모퉁이 끝 화단 턱에 노숙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노숙자는 자기가 마시던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 건넸고, 황이 그걸 받아 마셨다. 도래는 별로 놀라지 않고 그 옆으로 가 쪼그리고 앉아 둘의 이야기를 들었다. 웅현은 어정쩡하게 서서 휴대폰을 봤다. 

   날이 추워서 힘들겠어요. 황이 노숙자에게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안 추운 거예요. 한겨울이 걱정이지. 

   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 그렇겠네요. 황이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황과 노숙자는 별 뜻 없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하나의 컵으로 술도 홀짝홀짝 나눠 마셨다. 조금 뒤 황이 잘 마셨다고 인사하고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머니에서 꺼내 노숙자의 손에 쥐여 줬다. 황이 다시 팔랑팔랑 어린아이처럼 시장길을 걸었다. 도래는 황과 나란히 걸으며 웅현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시장에서 조금 더 널따란 골목으로 꺾어졌을 때 웅현은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까르륵 웃는 둘의 모습이 눈에 띄는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자꾸 힐끔거렸다. 

   다음에는 우리 둘만 만나요. 

   헤어질 때 황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웅현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노인의 농담에 화를 낼 수는 없어서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분간되지 않았다.

   황은 노숙 생활을 하며 낯 모르는 사람에게 빌어먹는 꿈을 꿨다. 그림을 그려 주고 주는 대로 돈을 받아 하루 먹고 하루 살겠다고 했다. 웅현은 사치스러운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허세처럼 보여. 웅현의 말에 도래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웅현은 도래가 왜 그와 함께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물으면 도래는 쓸쓸한 얼굴로 그는 노인이 아니라 친구라고 답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그렇게 쉽게 믿으면 어떻게 해? 웅현의 질문에 도래는 우리도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답했다. 웅현은 우리하고는 다르다고 반박했지만, 도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황의 그림을 받아 왔을 때 웅현은 도래를 따라 인사동 화구 집에 갔다. 사장이 직접 그린 거냐고 물었고, 도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사장은 조금 안심한 듯 낙관의 위치부터가 틀렸다고 했다. 싸구려 먹물을 써서 선도 죄 번졌다면서 화구를 꼭 해야겠느냐고 재차 확인했다. 도래는 바로 그런 점이 좋다고 말했다. 아이가 썼는지 어른이 썼는지 알 수 없는 글자체와 덧칠을 통해 조금씩 수정해 그린 새의 깃털이, 싸구려 종이와 먹물, 싸구려 붓을 사용해 그린 변변찮은 점이 좋다며 사장이 쓴 단어를 그대로 받아 의미를 바꿔 되돌려줬다. 

   웅현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액자를 보며 화구 집 사장의 말을 떠올렸다. 오른쪽 중앙에 학 한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는데 학의 시선이 닿는 왼쪽 아래에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대충 쓴 것 같은 글자체는 뭉툭한 게 둥글었고,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웠다. 글의 내용도 모호했다. 

   ‘너는 앉아 있는 부처를 보며 산 부처를 죽이고 있구나.’

   읽어도 의미가 와닿지 않는 문장인 데다 대구도 맞지 않았다. 웅현은 황을 확실히 허세가 있는 노인이라고 결론지으며 도래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자신이 더 잘 지켜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도래는 옥상 방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추우니까 내려와, 하고 말하면 도래는 따뜻하게 입었어, 하고 말했고, 감기 걸릴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면 아직은 안 걸렸으니 괜찮다고 답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현재를 살지 못한다고 하더라. 

   웅현은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인 양 내뱉고는 계면쩍어져서 선반 위 도래의 물건들로 시선을 옮겼다. 실제로 웅현은 어떤 기억들은 잊거나 덮어 뒀고, 아프지 않은 척 지낼 수 있었다. 

   바람결에 그들의 숨결이 섞여 있잖아. 그게 현재가 되는 건지도 몰라. 

   도래는 모호한 대답을 하며 웅현을 보고 쓸쓸히 웃었다. 웅현은 그 말이 마치 자기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사람은 기억에서 지우는 게 좋아. 

   기억을 지우면 나는 뭐가 되는데? 도래가 웅현을 봤다.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을까? 웅현도 도래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얼마 전 도래는 옥상에 가져다 놓은 것들을 그대로 놔둔 채 집을 나갔다. 웅현은 도래를 잡지 않았다. 그저 거실 창가로 가서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마당에는 호랑이 무늬 고양이와 노랑 고양이가 조금 떨어진 채 웅크리고 있었다. 마당 밖 골목까지 나가 햇볕을 쬐는 호랑이 무늬 고양이와 달리 노랑 고양이는 인기척이 나면 곧바로 숨었다. 호랑이 무늬 고양이는 눈에 상처가 있었고, 노랑 고양이는 언젠가부터 한쪽 발을 절룩이며 걸었다. 도래는 고양이가 거기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가가거나 만지지는 않았다. 

   몇 주가 지나도록 웅현은 도래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도래는 오지 않았다. 고양이들도 도래를 기다리지 않았다. 


   웅현은 골목에서 더욱 좁은 골목을 들여다본다. 그늘에서 나온 아기 고양이가 햇빛이 좋아 하늘로 사뿐히 뛰어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져서는 다시 빛을 향해 폴짝폴짝 뛰어오른다. 햇빛에 다가가려는 듯 빛 속에서 또다시 빛을 향해 뛰어오르는 고양이의 장난을 웅현은 조용히 바라본다. 고양이가 골목으로 쏙 들어가서는 따라오라는 듯 뒤를 돌아본다. 우연히 마주한 골목은 도래가 오래전 살던 곳이다. 웅현은 이곳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던 도래를 떠올린다. 그러자 느닷없이 하늘이 흐려지고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가로등이 켜진다. 황색 불빛 아래 길이 열리듯 드러나고 환영 같던 공간이 실재하는 곳으로 바뀐다. 

   쭈그려 앉은 여자아이의 흐릿한 실루엣이 어느 순간 뚜렷해지면서 익숙한 모습으로 변한다. 도래다. 도래가 처마 아래서 가랑비를 피하고 있다. 그 옆에 나란히 앉은 여자아이는 기운이다. 기운은 중학교 1학년이고 도래보다 한 살 많다. 도래가 물웅덩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묻는다. 

   얼굴이 왜 그래? 오늘도 맞은 거야? 

   기운이 처마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맞는다. 손바닥 위에서 빗물이 튄다. 

   맞았어. 기운이 뒤늦게 대답한다. 

   그래도 얼굴은 안 건드렸잖아? 

   그 새끼, 이제는 가리지도 않고 때려. 기운이 눈물 고인 눈으로 도래를 본다.

   너도 맞았네. 

   나는 어제···. 오빠는 없어? 

   그 새끼는 나갔어.

   어디 갔는데?

   놀러 갔겠지···. 언니는 없어?

   학교 갔어. 

   나도 나가고 싶어. 

   어딜 가게? 

   모르겠어. 집 나가고 싶어. 

   그때 그들 옆 대문이 열리고, 여자애가 나와 둘을 보고 환히 웃는다. 여자애는 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갑자기 새로 산 원피스를 자랑한다. 웅현은 저 아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도래에게 분명히 들었지만 떠오르지는 않는다. 아니다. 도래는 말한 적이 없다. 기억 속에서 도래가 한 이야기들이 흐트러진다. 그러나 웅현은 그것을 개의치 않는다. 

   우산을 든 여자애가 둘 앞에서 빙그르르 돈다. 원피스 자락이 몸보다 조금 늦게 빙그르르 돌아간다. 분홍색 투명 우산도 팽이처럼 돈다. 도래와 기운은 나풀거리는 원피스 자락에 덧댄 레이스 주름 장식을, 그리고 노란 레인부츠를 본다. 아이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편의점을 향해 뛴다. 찰박찰박 발걸음 소리 옆으로 물방울이 튀어 오른다. 

   웅현의 기억 속에 다른 시간이 껴든다. 도래는 아직도 그 아이가 신고 있던 레인부츠를 기억한다고 말한다. 처음 본 날 그 아이에게 손을 잡혔던 기억도, 손등을 파고들던 손톱자국의 감각과 친해지자고 속삭이던 목소리도 잊지 않는다. 여자애가 멀어지자 웅현은 다시 도래와 기운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기운의 눈에 고인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도수 높은 안경이 작은 눈을 더 작아 보이게 하는 데다 울기까지 해서 그런지 얼굴이 볼품없다. 도래는 한숨을 내쉬며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우유 배달이라도 하자. 기운이 코 맹맹한 목소리로 말한다. 

   요즘 누가 배달을 시켜 먹는다고? 

   나가서 노숙하면서 며칠만 일하면 방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정말? 도래의 얼굴에 옅은 희망이 피어오른다. 

   응. 

   학교는? 

   너 정말 어설프다···. 가지 말아야지.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왜 자꾸 때릴까? 도래가 풀죽은 얼굴로 묻는다. 

   이유가 어디 있겠어? 그러고 싶으니까 그런가 보지. 뭐. 기운이 물웅덩이를 손으로 휘저으며 말한다. 같이 나가자. 나중에 돈을 벌면 그때 학교에 가자. 기운이 도래를 안심시킨다. 

   비염 때문인지 울어서인지 기운은 계속 코를 찡그리다가 킁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도래도 같이 일어나 괜히 엉덩이를 턴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기운의 맨다리에 얼룩덜룩한 멍이 보인다. 그건 도래의 가느다란 팔도 마찬가지이다. 둘은 호기롭게 일어나서는 골목 밖 대로를 보며 머뭇거린다. 기운이 엄마하고 가 본 적 있다며 동대문시장으로 가자고 말한다. 

   거기 가면 옷이 많아. 그걸 훔쳐서 중고로 팔면 잘 데를 구할 수 있을 거야. 

   도래는 대답하지 않는다. 

   여기 있으면 계속 맞는다고. 기운이 보챈다. 

   나가면 달라질까? 희망을 구하듯 기운을 보던 도래가 시선을 떨군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기운도 불안을 숨기듯 밝게 웃는다. 

   나는 새롭게 태어날 거야! 기운이 괜히 큰 소리로 말한다. 

   도래는 기운을 본다. 기운이 제가 가진 손목시계를 풀어 도래에게 건네준다. 시계는 다 젖어 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내 이름은 기운이 아니라 미래다. 앞으로는 그렇게 기억해 줘! 기운이, 아니 미래가 말하고는 빗속을 뛴다. 

   도래는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기운이, 아니 미래가 골목을 벗어날 때까지 지켜보다가 보이지 않게 되자 시선을 거둔다. 도래는 홀로 남는다. 미래를 따라가지 않는다. 미래도 오지 않는다.

   웅현은 도래에게 다가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도래는 보이지 않는다. 도래가 앉아 있던 자리는 이미 빌라로 바뀌어 있고, 골목에는 여러 겹의 시간이 낙엽처럼 쌓여 있다. 그들의 흔적이 이곳에 아직 남아 있을까, 웅현은 도래가 집에서 한 말을 떠올린다. 이 길은 그들을 기억할까, 웅현은 그런 것들이 새삼 궁금하다. 도래가 지나온 자리엔 도래의 시간이 다시 흐른다. 웅현은 도래가 지나온 자리마다 아직 남아 있는 자취를 쫓는다. 


   오래된 예배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웅현이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소리가 남아 있던 방향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새 한 마리가 하늘을 조용히 가로지른다. 웅현은 대로변으로 나간다. 도래와 함께 걷던 길을 다시 홀로 걷는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행인이 늘어난다. 그중 몇몇은 두리번거리거나 빠른 속도로 걷고, 몇몇은 멈춰 서 있다. 저마다 다른 속도로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들 몸을 부딪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데도 계속 방해받는다. 웅현이 걸음을 멈춘다. 어렴풋하게 기억 하나가 떠오르지만, 웅현의 것인지 도래의 것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도래는 이곳에서 무엇을 봤을까, 웅현은 궁금하다. 그 순간 성곽 너머에서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낮게 들려온다. 나무들이 느릿하게 출렁이며 소리가 점점 커진다. 황과 나란히 걷는 도래의 형상이 웅현 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웅현은 까르륵 웃고 있는 둘에게 다가가지만 가닿을 수 없다. 황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릴 뿐이다. 이어지는 도래의 목소리.

   골목으로 들어가면 술집들이 많아요. 황이 말한다. 딸이 이 동네를 좋아했어요. 나랑 같이 술 마시는 것도 좋아했고요. 

   둘 사이에 정적이 이어진다. 입을 다물고 있던 도래가 무심히 묻는다. 

   여행 가면 뭘 하시려고요? 

   뭘 할 건 없어요. 

   가고 싶은 데는 없어요? 

   글쎄요. 딸이 거기 있어요. 

   딸이요?

   딸을 뿌렸거든요. 

   도래가 황의 옆모습을 보다가 더 묻지 않고 시선을 돌린다. 

   오래전이에요. 딸의 뼛가루를 품에 지니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 조금 뿌리고 술 마시고, 다음 날 다른 데 가서 또 조금 뿌리고 술 마시고, 친구 집 화단에도 뿌리고, 고향집 풀숲과 논밭에도 뿌리고, 갯벌에도 억새밭에도 뿌렸죠.

   어디에 뿌렸는지 다 기억하세요? 

   에이, 다는 기억하지 못해요. 그래도 기억은 하지요. 

   거기 가보면 좋겠네요. 도래가 미소 짓는다. 

   새가 먹고 물고기가 다 먹었지. 황이 해맑게 웃는다. 

   그래도 가 봐요.

   그럼 가는 데까지 가고, 못 가는 대로 두는 것도 괜찮아요. 그런데 얼마 전에 꿈을 꿨어요. 엄마한테 오백 원 달라고 떼쓰는 꿈이요. 엄마가 시장에서 행상을 오래 했는데 거기에 가서 오백 원을 내놓으라고 악다구니를 부렸지 뭐예요. 깨나서 얼마나 우습던지, 이 나이에 그런 꿈을 꾼다는 게요. 

   받았어요? 도래가 웃으며 묻는다. 

   못 받았어요. 황이 뒤통수를 긁적인다. 

   둘은 낄낄 웃고는 한참을 말없이 걷는다. 

   웅현은 그의 딸이 어쩌다 죽었는지 궁금하지만 둘의 대화로는 알 길이 없다. 그저 변사가 아닐지 짐작할 뿐이다. 이윽고 웅현의 머릿속에서 황은 죄책감을 가진 노인이 된다. 딸이 죽은 후 집에 있을 수 없어 떠돌게 되었다는 황의 목소리가 저들의 대화 속에 겹쳐 들려온다. 웅현은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가는 둘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식당은 한산하다.

   낮술 생각에 아주 황홀하네요. 황이 벽에 걸린 메뉴를 보며 아이처럼 신난 표정을 짓는다. 

   뭘 먹을까요? 도래가 묻는다. 

   아무거나 시켜요.

   모둠전으로 주세요. 도래가 주문한다. 

   막걸리 먼저 주세요. 황이 덧붙인다. 

   둘은 이유도 없이 마주 보고 킥킥 웃는다. 도래가 수저통을 열자 그제야 주방에서 나온 여자가 성난 목소리로 외친다. 

   안 팔아요! 

   여자는 수저통을 쾅 소리 나게 닫고는 경멸에 찬 시선을 황과 도래에게 던지고 있다. 영문을 몰라 멍하니 보는 둘에게 여자가 또 한 번 소리친다. 

   그쪽들한테 줄 음식은 없으니 여기서 나가 주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도래는 주위에 앉아 있는 손님들과 그 앞에 놓인 음식을 보며 묻는다. 반주를 곁들여 혼자 식사하던 노인 몇이 도래를 힐끔 보고는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황을 본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나가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도래는 어이가 없는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황이 먼저 일어난다. 도래가 할 말이 남은 듯 여자를 보지만 황이 밖으로 나가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간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여자의 시선에서 자기 모습을 본 웅현은 서둘러 밖으로 나온다. 다시 문이 열리고, 황과 도래의 관계를 제멋대로 추측한 여자가 둘의 뒤통수에 대고 외친다.

   아유, 망측해라!

   둘은 말없이 길을 걷는다. 종묘 매표소 앞에는 가을을 느끼려고 모여든 관람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한복을 빌려 입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 노인 몇이 벤치에 앉아 졸거나 쉬고 있다. 둘은 근처 편의점에서 산 맥주와 과자 안주를 가지고 파라솔 아래 앉는다. 

   자리가 아주 딱이에요. 황이 말한다. 

   도래가 어째서 그렇냐고 묻는다. 쫓겨나 오게 된 곳이기 때문에 웅현도 그 점이 궁금하다. 

   그래도 화장실은 편하게 다녀야지요. 황이 근처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가리킨다. 

   도래는 무릎을 탁, 치는 흉내를 내고는 괜히 크게 웃는다. 웅현은 허탈하다. 

   그것이 노숙 생활의 지혜예요. 이번에는 황이 주먹으로 자기 이마를 살짝 친다.

   나는 시장 근처에서 노숙자로 지내고 싶어요. 황이 말한다. 

   왜요? 도래가 길에 떨어진 빈 과자봉지를 부리로 톡톡 건드리는 비둘기를 본다. 

   먹을 게 많잖아요.

   공짜로 줄까요? 

   제가 그림을 잘 그려요. 그러니까 그림을 그려주고 주는 만큼만 받아서 그걸로 끼니를 때우면 돼요. 쉽죠?

   꼭 시장이어야 할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황의 표정이 진지하다. 

   행상하는 어머니를 따라 어려서부터 시장에서 컸어요. 시장에 가면 마음이 편해요. 

   도래는 말없이 황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둘은 그 자리에 오래 있는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들을 바라본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도래가 묻는다. 

   어디서 오는 거겠죠. 황이 답한다. 

   어릴 때 친구가 집을 나갔어요. 같이 가자고 했지만 저는 남았고요. 그 뒤로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골목에 앉아 있으면 왜 그런지 그 친구가 떠올라요. 

   좋았나 보네요. 

   서로 의지했거든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기억해 달라고 했으니 기억해야 할 것도 같아서요.

   도래는 웅현에 대한 감정도 털어놓는다. 그리고 문어의 죽음을 의미로 만들려고 했던 자신의 비겁함에 대해서도. 황은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도래의 맥주 캔에 자기 캔을 부딪친다. 

   그만 털어 버리고, 같이 술이나 마셔요.

   둘은 맥주를 마시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본다. 골목을 걸어 다니는 몇 마리의 비둘기와 길을 따라 죽 이어진 돌담을 본다. 담장은 자주 보수했는지 군데군데 색이 다르다. 돌담 뒤 나무우듬지가 바람에 또 한 번 크게 출렁인다. 도래가 장밋빛으로 물든 하늘을 가리킨다. 

   어머, 예뻐라. 노을이예요. 언제 저렇게 붉어졌지요? 

   아, 정말 행복하다. 황이 붉어진 하늘을 본다. 

   행복해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이요. 

   도래가 황을 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에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도래가 황을 계속 보고 있다가 말한다. 

   그러네요. 저도 행복하네요. 

   둘이 다시 캔을 부딪치며 건배한다. 그러고도 둘의 대화는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웃음도. 그러나 그 소리가 더는 웅현에게 닿지 않는다. 도래가 말해주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웅현은 둘의 대화를 계속 들으려 하지만 목소리는 사그라든다. 도래의 조각이 더는 모이지 않는다. 둘의 형상도 같이 사라져 버린다. 낙엽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다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여행자 무리가 수령이 오랜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나무는 차분히 잎을 떨구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웅현은 도래의 마지막 말을 떠올린다. 수없이 되풀이되며 조금씩 변형된 기억이 또다시 형태를 찾는다. 웅현은 생일을 앞두고 도래가 좋아할 선물을 주고 싶었으나 뭘 골라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고민 끝에 구슬 형태의 유리 액자에 둘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을 넣어 주문 제작한다. 그러나 도래는 선물을 거부한다. 뭘 바란 건 아니었지만 호의를 거절당하자 서운하다. 웅현은 도래를 이해할 수 없어 결국 화를 낸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 나는 이해를 바란 적 없으니까.

웅현은 도래의 말을 이해해 달라는 뜻의 힐난으로 듣는다. 찾으려고도 하지 마, 이런 말도 들었던 것 같다. 웅현은 사실 그날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도래가 한 말인지 웅현이 한 말인지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떨어져 있었지만 계속 생각했어. 그러니까 같이 있었던 거지. 황과 여행을 다녀온 직후 도래가 한 말이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웅현은 그 말을 도래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어떻게 한 사람만을 곱씹어 생각할 수 있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도래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도래와의 기억을 떠올려 웅현이 재현해 낸 세계 속에 있을 뿐이다. 

   웅현은 이제야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멈춰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지만 한번 시작된 길은 계속 이어진다. 아직은 뭔가 더 남아 있는 듯하다. 웅현은 길을 걷는다.

   어두운 거리엔 사람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드물게 도로를 달리던 차들이 흰빛을 띠며 다가왔다가 붉은빛을 내며 멀어진다. 대로변에 청소차 한 대가 정차해 있다. 트럭에는 재활용 폐기물이 한가득 쌓여 있다. 환경미화원이 트럭 위에 올라타 재활용 폐기물을 도로로 던진다. 다른 미화원은 길에 쏟아 낸 것들을 재분류한다. 종이는 종이대로 꾹꾹 눌러 다시 차량에 차곡차곡 싣고, 플라스틱과 비닐, 스티로폼 등도 하나의 커다란 더미로 만들어 차량에 올린다. 일을 마친 둘은 도로 턱에 앉아 담배를 핀다. 연기가 도로 쪽을 향한다. 청소차 앞에는 빨간 관광버스 여러 대가 빈 채로 줄지어 서 있다. 


   웅현은 집이 있는 골목까지 들어와 마당을 마주 본다. 화단에는 몇 해나 묵었을지 모를 낙엽 위에 낙엽이 쌓여 보기에도 폭신하다. 그 위에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 무늬 고양이가 인기척을 듣고 슬며시 일어나 웅현을 본다. 노랑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웅현은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간다. 어둠에 잠긴 집이 비어 있는 굴처럼 괴괴하다. 검은 공간 속에 누군가 있는 듯하지만 불을 켜자 집은 평소처럼 아늑해진다. 웅현은 옥상으로 올라가 방을 훑어본다. 도래가 해 놓은 그대로다. 웅현은 도래의 물건을 상자에 옮겨 담는다. 선반 위의 물건도 모두 정리한다. 생각보다 짐이 많지 않다. 벽면에 걸린 황의 그림을 떼어 내 글자가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서 상자 옆에 세워 놓는다. 방은 깨끗이 정리되고 선반 위에는 선물 상자 하나만이 놓여 있다. 웅현은 그것을 차마 치우지 못한다. 

   웅현은 상자를 열어 유리구슬 형태의 액자를 꺼낸다. 벽면에 크리스털 빛이 반사되어 환영 같은 그림자가 진다. 천장에 비쳐 든 빛의 조각들이 가늘게 떨린다. 웅현은 유리 안에 있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도래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다. 흐릿하게 잠겨 있던 도래는 웅현의 시선 속에서 끝없이 불려 나와 얼굴을 바꾼다. 웅현은 도래를 조금 더 알게 된 듯하다. 이윽고 수많은 도래가 하나의 선명한 형태로 모인다. 웅현이 아는 얼굴인데도 어딘지 달라 보인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웅현은 액자를 상자에 담지 않는다. 받침대까지 꺼내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그 안에서 도래를 살게 둔다. 도래는 영원히 웅현과 함께 있을 것이다. 웅현은 무언가를 가두듯 옥상 문을 잠근다. 오래된 경첩 소리가 정적을 깨지만 그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불을 끄자 창으로 희미하게 달빛이 비쳐 들어오고, 유리구슬에서 흘러나온 빛의 파편들이 넓게 퍼져 흩어진다. 천장과 벽면을 가득 채운 굴절된 빛들 때문에 옥상 방은 하나의 커다란 크리스털로 변한다. 웅현은 어둠 속에 빛나는 그림자의 그림자들을 보면서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슬픔 가운데 평온이 깃든다. 거실로 내려온 웅현은 계단으로 오르는 문도 닫는다. 곧 올 겨울을 생각한다. 집이 조금 더 따뜻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 순간 차가운 기운이 뺨을 스치며 마치 누군가의 울음소리처럼 바람이 흘러든다. 웅현은 그 소리를 오래도록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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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01
서브리미널

서브리미널 안종성 여러 대의 카트가 교차 레일 지점을 충돌 없이 지나갔다. 높은 위치를 누비면서도 질서 정연히 움직일 줄 알았다. 출로에 다다를 때쯤 천천히 감속하더니 허공에 뚫린 검은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윤무의 눈동자는 천장 주행 장치의 행렬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 장면으로부터 슬픈 기분을 느끼고는 습관처럼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붙잡아 두는가? 그러나 기록할 도구를 찾지 못한 윤무는 걷기로 했다.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벽과 바닥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흰 공간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소리와 냄새, 온도, 어떤 예감마저 느낄 수 없었다. 윤무는 이곳을 알 것만 같았다. 얼마 전 필경사와 무한한 흰 공간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필경사는 권면에 들기 전 미리 가서 둘러볼 것을 권했다. 깨어날 때 부분적인 기억상실이 있을 테지만 영원히 망각한 게 아니라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권면 전의 삶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필경사는 뇌의 저장 용량을 컴퓨터 저장 단위로 환산하면 2.5페타바이트에 달함에도 인간의 상상력이 쉼 없이 활동하므로 정보를 선택적으로 보관한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인간의 신체가 권면과 죽음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기억 편람의 업로드가 끝나면 직계 가족이라 할지라도 오십 년 뒤에나 조회할 수 있다고 했다. 필경사는···. 구축 아파트에서 볼 법한 편복도를 지날 때 윤무는 재건축 직전의 폐허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수마다 잡동사니가 나뒹굴거나 무가지가 쑤셔 박혀 있었다. 앞바퀴 없는 자전거도 복도를 비좁게 만들었다. 윤무는 그중 현관문이 열린 곳에 서 있다가 인기척을 듣고는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곳에는 회색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있었다. 그 역시 깨어난 게 얼마 되지 않았는지 윤무에게 여러 번이나 같은 내용을 물었고─여기 당신의 집인가요? 다른 누가 또 살고 있습니까? 식사했습니까?─결국 이들은 임장하러 온 일행처럼 나란히 집 안을 둘러보게 되었다. 내부는 따로 특별한 게 없는 가정집이었다. 통유리에 붙은 주먹만 한 크기의 스테인리스 휠을 돌려 보거나 싱크대 위에 널브러진 여러 가재도구를 들춰 보던 윤무는 커피믹스를 발견하고 남성을 향해 들어 보였다. 포장 비닐이 아침의 배경 앞에서 가볍게 바스락거렸다.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스스로 마토메라 밝힌 남성은 일본 전자상거래 업체를 다니고 있지만, 서울 출장 경험이 잦아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고 말했다. 윤무는 소파에 앉은 마토메의 다부진 체격,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이국적인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외형만큼이나 독특한 건 마토메의 상태였다. 한눈에 보더라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내려다보는데 호흡이 불규칙했으며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윤무와 얼굴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업무차 여기에 온 건가요? 윤무는 낯에 익은 그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무대를 오며 가며 보았을 조

  • 관리자
  • 2026-03-01
우주의 영향 아래

우주의 영향 아래 임수지 언젠가 우주에게 내가 어릴 적 살았던 마을에 함께 가 보자고 말한 적 있다. 거기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방을 보게 될 거야. 팅커벨은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화장실에 다녀오면 문 앞에서 두꺼비가 널 지키고 있을 거야. 두꺼비들은 착하다. 두꺼비들은 두껍두껍 울지 않아. 걔들이 울면 동그란 구슬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정말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면 우주는 그곳은 꿈과 환상의 나라네, 하며 웃기도 했었는데. * 기사는 나를 미림슈퍼 앞에 내려 주었다. 멀어지는 택시의 후미등을 잠시 바라보다 미림슈퍼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을 두 번 꺾어 집 앞에 서서는 주먹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바다 냄새가 몸속 깊이 들어왔다. 버스터미널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분명 전화를 했는데도 할머니는 정말 내가 곧장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문을 열어 준 할머니의 짧은 파마머리가 멋대로 눌려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짜증을 조금 부리다가 곧 이불을 내어주었다. 날 밝을 때 오지, 뭐 하러 이 늦은 시간에 와.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닌 것 같았다. 보일러를 안 틀었나? 얼굴과 손발을 대충 씻고 작은방에 깔아 둔 이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불이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랐다. 안방에서 자는 할머니를 깨워 물어볼까 고민하는 동안 내 체온에 맞춰 이불이 천천히 데워졌다. 이불을 코까지 덮은 채로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데운 이불이 다시 나를 데우며 조금씩 따뜻해졌다.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2시가 지나 있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오늘은 우주의 기일. 오늘 나는 우주의 흔적이 없는 곳에서 잠들 것이다. * 우주가 내 방에 머물 때 입던 품이 큰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는 잘 개켜 종이 가방에 넣고 옷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두었다. 나는 그걸 다시 꺼내 본 적 없다. 우주가 쓰던 면도기나 낡은 양말 같은 것들도 진작 정리했다. 이제 내 방에 우주의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용 기한이 지난 음식점 할인 쿠폰 같은, 우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쓸고 닦아도 계속 생겨나는 먼지처럼 어딘가에서 자꾸만 하나씩 발견되었다. 청소를 하다 그런 것들을 찾아낸 날이면 나는 자꾸만 골똘해졌다. 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있다니. 그런데 2년이 그렇게 긴 시간인가? 2년이라는 시간은 하루이틀 사이에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사실은 하루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2년이 흘렀다고 누군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매트리스와 벽 사이에서 영화 티켓을 발견했다. 어쩌다 여기에 티켓이. 영화 제목을 보니 그때가 떠올랐다. 그날 관객은 다섯 명뿐이었다. 재미가 없는 영화인가. 영화 선택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으므로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옆에 앉은 우주에게 작게 말했다. 전세 낸 것 같고 좋은데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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