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리미널
- 작성일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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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리미널
안종성
여러 대의 카트가 교차 레일 지점을 충돌 없이 지나갔다. 높은 위치를 누비면서도 질서 정연히 움직일 줄 알았다. 출로에 다다를 때쯤 천천히 감속하더니 허공에 뚫린 검은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윤무의 눈동자는 천장 주행 장치의 행렬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 장면으로부터 슬픈 기분을 느끼고는 습관처럼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떠오르는 생각을 어떻게 붙잡아 두는가?
그러나 기록할 도구를 찾지 못한 윤무는 걷기로 했다.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벽과 바닥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흰 공간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소리와 냄새, 온도, 어떤 예감마저 느낄 수 없었다. 윤무는 이곳을 알 것만 같았다. 얼마 전 필경사와 무한한 흰 공간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필경사는 권면에 들기 전 미리 가서 둘러볼 것을 권했다. 깨어날 때 부분적인 기억상실이 있을 테지만 영원히 망각한 게 아니라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권면 전의 삶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필경사는 뇌의 저장 용량을 컴퓨터 저장 단위로 환산하면 2.5페타바이트에 달함에도 인간의 상상력이 쉼 없이 활동하므로 정보를 선택적으로 보관한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인간의 신체가 권면과 죽음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필경사는 기억 편람의 업로드가 끝나면 직계 가족이라 할지라도 오십 년 뒤에나 조회할 수 있다고 했다. 필경사는···.
구축 아파트에서 볼 법한 편복도를 지날 때 윤무는 재건축 직전의 폐허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수마다 잡동사니가 나뒹굴거나 무가지가 쑤셔 박혀 있었다. 앞바퀴 없는 자전거도 복도를 비좁게 만들었다. 윤무는 그중 현관문이 열린 곳에 서 있다가 인기척을 듣고는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곳에는 회색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있었다. 그 역시 깨어난 게 얼마 되지 않았는지 윤무에게 여러 번이나 같은 내용을 물었고─여기 당신의 집인가요? 다른 누가 또 살고 있습니까? 식사했습니까?─결국 이들은 임장하러 온 일행처럼 나란히 집 안을 둘러보게 되었다.
내부는 따로 특별한 게 없는 가정집이었다. 통유리에 붙은 주먹만 한 크기의 스테인리스 휠을 돌려 보거나 싱크대 위에 널브러진 여러 가재도구를 들춰 보던 윤무는 커피믹스를 발견하고 남성을 향해 들어 보였다. 포장 비닐이 아침의 배경 앞에서 가볍게 바스락거렸다.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스스로 마토메라 밝힌 남성은 일본 전자상거래 업체를 다니고 있지만, 서울 출장 경험이 잦아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고 말했다. 윤무는 소파에 앉은 마토메의 다부진 체격,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이국적인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외형만큼이나 독특한 건 마토메의 상태였다. 한눈에 보더라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내려다보는데 호흡이 불규칙했으며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윤무와 얼굴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업무차 여기에 온 건가요? 윤무는 낯에 익은 그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무대를 오며 가며 보았을 조연일 수도 있고, 스태프일 가능성도 있었다. 혹은 캐스팅 현장에서 보았을지도. 얼굴을 마주하고 몇 마디 나누다 보면 분명해질 일이었다. 그러나 마토메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방바닥을 향해 시선을 떨구었다.
잠시 뒤 홀짝거리는 소리에 뒤이어 마토메가 입을 열었다.
침입자 같은 그런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평생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일 없이 저만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담담하나 일상적이지 않은 독백이었기에 윤무는 점차 마토메가 연극배우라는 것을 확신했다. 마토메는 자신이 공간 정보 서비스를 기획하는 일을 했고, 적성에도 어느 정도 맞았지만, 일본 후생노동성에서 지시하는 참근교대로 현재는 해변과 국영 공원의 꽃밭이 아름다운 현 단위 지역의 공공 전자 상거래 서비스를 담당한다고 설명했다. 윤무가 공간 정보 서비스와 전자상거래 서비스의 차이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자 마토메는 스스로 국가와 회사에 얼마나 사명감을 가졌는지 부연하다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의 대화는 멈추고 말았다. 윤무는 머리칼이 소용돌이처럼 모여드는 마토메의 정수리를 내려보다가 말했다. 실은 내가 극작가라서요. 무대 안은 훤히 꿰뚫어도 무대 밖을 나서면 모르는 일투성이지요. 부끄럽게도 나는 아이가 입원하는 순간까지 백스테이지에 남았습니다. 내가 만든 세계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지 않는다면 연극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잖습니까. 늦게나마 병원에 갔는데 들여보내 주질 않더군요. 병원 복도를 지나는 동안 구름다리 위에 있는 것처럼 위태로웠습니다. 그래도 다시 극장에 돌아간 게 나란 인간입니다. 윤무가 말하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마토메의 눈이 커졌다. 윤무는 퍼포밍 가라지나 파라셀레네 소극장에서 상연했던 일화를 늘어놓았다. 그 말에 마토메는 『탈거』와 『시위를 당겨라』같이 연극으로 각색된 이반 크리칼료프의 작품을 모조리 섭렵했으며 앞으로 나올 작품까지도 펀딩을 걸어 둔 애서가임을 밝혔다.
만약 크리칼료프의 최근 저작을 보았다면 아실 텐데요. 제가 SNS에 남긴 감상평이 그대로 그의 소설을 생산하는 데 학습되었음을. 왜냐하면 그의 문장을 두고 ‘후춧가루’ 같다고 했는데, 이듬해 출간된 소설 속 노부부가 서로에게 모진 말을 쏟아내는 클라이맥스에서 실제로 후추를 뿌리더라고요. 마토메가 이상하리만치 흥분한 것과 달리 윤무는 대학 시절 그 작가들의 작품을 각색해 엉성한 무대에 올린 경험이 떠올라 잠자코 듣다가 몇 차례 알은체하는 추임새를 넣었다.
대화의 주도권은 윤무에게서 마토메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윤무는 정수기 위에 놓인 잘 익은 빨간 사과를 집어서 크게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아작아작 씹는 소리가 실내에 퍼졌다.
일본 기업 중에서도 보수적인 편이었던 회사는 반드시 실물로 현장에 가서 일하길 원했습니다. 저는 후생노동성이 노동하는 시민의 순환을 위해 오 년마다 직장을 무작위로 지정해 주는 제도에 의해 이동하는 중이었습니다. 새로 일하게 된 회사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어요. 한국에 가야 한다는 점도 그랬고요. 서울로 발령받아 머물 곳을 정할 무렵,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족에게 벗어나 마음껏 책이나 영화를 보며 쉬고 오자고 생각했지요. 참고로 저는 코페어런팅입니다. 공동 양육자인 마도카 씨는 미모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이 정서에 좋지 않다고요. 죽음을 가볍게 여길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
마토메는 무인 택시에서 내려 여러 짐꾸러미를 풀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래서 모처럼 맛보는 저만의 일탈이기도 했죠. 네오-인테리어 열풍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일부 지역은 생체 인터넷 이식과 혼성 건축 문화를 거부하는 전통주의자 밀집 지역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기와집 형태를 고수하며 여행객에게 공유 숙박을 제공하거나 마토메 같은 이들이 머물 수 있도록 단기 입주를 제공했다. 근방으로는 공사가 중단된 건축물과 이유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이들이 소조한 풍경으로 남았다. 마토메가 머무른 숙소 역시 상가 곳곳의 깨진 통유리창과 임대 문의 표지가 한 시절의 무늬처럼 남아 있는 거리에 있었는데, 자신이 나고 자란 런던의 해크니와 다름없음에 마치 고향을 거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대리석으로 만든 툇마루가 부자연스러웠음에도 마토메는 주로 그곳에 앉아 휴일을 보냈다. 머지않아 나타나게 될 예측 작가의 작품을 번갈아 읽고 리뷰 사이트에서 서핑을 즐겼다. 군소 사이트일수록 장앙리 파브르가 프란츠 카프카와 대화를 나누며 작품 속 벌레의 종을 맞춰 나간다는 좌담이나, 진행자가 스탠리 큐브릭에게 태블릿을 주고 포스터만으로 어떤 작품을 열람하는지 엿보는 기획 연재 기사로 관심을 끌려는 경향이 짙었다. 툇마루에선 비가 내릴 때마다 물비린내가 휘하게 맴돌았다. 젖은 처마를 타고 빗물이 느릿하게 흘러내리며 길게 자국을 냈다. 마토메는 담벼락 위에 현란하게 화면이 바뀌는 광고 패널을 넋 놓고 보다가 양팔을 뻗어 책을 들었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과 빗방울이 흙바닥에 가벼이 맞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활자가 쏟아지는 시간이었다.
피곤함을 잊을 수 있는 나날이었습니다. 제 삶에서 그런 순간은 많지 않았거든요. 언제나 무슨 말이든 억지로 해야 했으니까요. 평소에도 어디 골방 같은 데 들어가서 뭐든 읽으며 지내는 게 꿈이었는데 단 한 통의 전화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연락받은 것은 서울에서의 생활이 이 주째 접어들 무렵이었다. 스스로 컨설턴트라 소개한 발신자는 화면상에서 잘 쓸어 넘긴 머리에 통통한 볼살과 뿔테 안경을 쓴 특색이 돋보이는 어딘가 푸근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컨설턴트는 저의 양친 이야기를 했습니다. 두 분이 권면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는데 임대 중인 주택을 처분하길 원한다는 겁니다. 잔병치레 없이 멀쩡하게 살고 계시는 양친이 권면하는 것도 황당한데 당장 자식 사는 집을 팔다니요. 그곳엔 마도카 씨와 제 혈육인 미키코가 살고 있었습니다. 분명 집을 계약할 때 양친 명의로 했고 계약금은 전부 양친 재산이라지만···. 듣고만 있었던 윤무는, 어쩌면 권면 후의 삶 때문이겠군요, 라고 말을 보탰다. 마토메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컨설턴트 말에 따르면 권면자는 법적 사망자도 아니고 살아 있는 시민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야 한답니다. 깨어난 후의 삶과 세납을 위해 재산은 국부 펀드에 귀속시키고 컨설턴트들로 하여금 일정 기한까지 이를 부풀려 준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걸 믿다니요.
얼버무리고 있던 마토메의 앞으로 화면 속 컨설턴트는 짧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래서 자식이 알아서 유산상속을 포기하는 거잖아요, 마토메 씨. 그게 효도고요.
컨설턴트와 마토메가 나눈 대화에서 추출된 형태소로 인해 그들의 화면 오른쪽 하단에는 사용자가 관심을 가질 법한 타겟 광고 팝업이 나타났다. 광고 영상에서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렸고 아이들은 청정한 호숫가에서 뛰어놀았다. 현재의 선택이 빠를수록 맞이하는 미래는 젊어집니다. 그 문구를 마지막으로 광고 팝업이 사라졌다. 마토메는 스크린이 점차 흐릿해지면서 자기 얼굴과 광고에서 묘사된 세상이 겹치는 것을 응시했다. 저의 에이전트가 이런저런 정보를 마구 긁어 와서 띄워 주었어요.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는 말했습니다. 아티브로, 멈춰. 잠시만 내버려둬. 잠시만. 단 일 초라도 좋으니 세상이랑 단절시켜 줘.
이윽고 실내는 푸르스름한 간접 조명만이 남았다. 마토메는 아무것도 없는 어항 속에 남겨진 기분이었다. 꺼진 화면 속에서는 희미하게 여러 사람이 웃는 소리와 반복적인 클래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특집, 더는 보이지 않을 만큼 밝은 미래
동면을 암묵적으로 권장한 것은 국가였다. 법률상 걸림돌이 될 조항 수정과 조세, 권면자 보관 등에 관한 특별법이 발 빠르게 의회를 통과했다. 범국민적 인식 전환을 위해 언론과 미디어에서는 주로 육류, 생선류 제품에서 쓰이던 ‘냉동’이라는 표현을 탈락시키고 ‘수면’, ‘잠들기’, ‘겨울잠’, ‘권면’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남부 유럽을 중심으로 냉동 수면 장치의 힘을 신봉한 신흥종교가 성행했다. 이들은 동파된 소 사체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렀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취재진이 찾아간 곳은 ‘터미널’이 밀집된 도시 외곽의 어느 행정구.
폐업한 육가공장의 냉동창고에서 죽은 소를 고리로 매달아 두고 의식을 치를 때만 밖으로 꺼낸다. 단체로 대열을 갖춘 채 단단히 냉동된 소의 갈비뼈를 바닥에 내리쳐서 깨뜨렸다. 마치 블록처럼 부수어진 토막을 제단에 쌓아 올리고 권면을 앞둔 이들의 옷과 물품을 가져와서 제사에 활용했다. 그것들은 사제가 가져온 영생의 횃불에 의해 불이 옮겨붙어 활활 타올랐다. 치솟는 불길에 이백여 명의 인파가 환호했다.
인도, 태국, 한국, 일본 등 불교문화로부터 영향받은 아시아권 국가에서 ‘재회소’라는 시설에 모이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유골이 없는데 어떻게 납골당이라 부르고 죽은 이가 아닌데 봉안당이라고 부르겠는가. 권면을 원하는 이들로 종교시설과 결합한 터미널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알랭 판파니: 왕을 향한 맹세, 스승에 대한 존경, 연인과의 열렬한 사랑과 우정, 우애.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마지막 ‘무조건적인 사랑’을 잃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부모는 권면과 함께 자신이 가진 대부분의 재산을 동결시켰어요. 자식은 기본소득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빚을 내어서라도 뒤따라 값싼 한시적 권면에 들어갔습니다. 컨설턴트들은 이들의 재산으로 대리 투자하며, 독전대처럼 보이지 않는 미래로 고객을 밀어 넣었습니다.
인터뷰이는 취재진에게 현지 방송사에서 촬영한 자료를 보여 주었다. 빈집과 부수어진 소의 사진이었다. ‘기다리는 방[Sala d'attesa]’이라는 철제 간판이 달린 공장 형태 시설물 앞으로 녹슨 쇼핑카트를 끄는 이들이 천천히 지나다녔다.
거대한 터미널을 둘러싼 인파는 형형색색의 천막을 치고 간이 조리대를 만들어 음식을 해 먹었다. 사회학자는 오래전 죽은 사진작가의 뉴런을 복제한 드론카메라가 터미널의 풍경을 촬영해 미국사진사협회로부터 상을 받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 소년의 눈동자가 돔 형태 터미널을 응시하는 사진이었다.
알랭 판파니: 권면한 가족을 떠나보낸 이들은 터미널 근처로 모였어요.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잠든 가족과 친구 곁으로 향했죠. 이 사진은 정말 기이합니다. 실존하지 않는 이들이 실존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물음이 남습니다. 예술가가 없는 상태에서의 예술은 과연 그 예술가의 작품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술은 오로지 예술가 혼자의 힘만으로 탄생하는 것이 맞을까요?
(하략)
통화를 종료한 마토메는 스크린을 띄우고 자리에 누웠다. 뒤통수 뒤로 양손을 깍지 낀 채 천장만 응시하던 마토메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의 뺨이 촉촉하게 젖었다. 마도카 씨에겐 뭐라고 해명해야 할까. 마토메는 스스로 공동 양육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스크린에서는 다큐멘터리가 방영 중이었다. 배양육 보급에 맞서는 축산 업계를 다룬 내용이었는데, 축산업자로 나온 농장주는 자동화된 사료 시설을 안내하며 새끼 때부터 키워 온 생물의 육질을 배양육이 이길 수 없다고 단언했다. 사회자의 마이크를 건네받은 농장주가 준비한 글을 읽었다.
태어나자마자 전통적인 방식으로 클래식을 들려주고 좋은 여물만 먹입니다. 드넓은 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스트레스 없이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요. 우리는 기계로 매일 상태를 측정해 우수한 육질이 될 수 있도록 적기를 선별합니다. 냉동, 냉장으로 나눠서 전국에다 유통하는데, 냉동은 품질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고통 없이 윤리적으로 도살한 다음 급속 냉각으로 1시간 안에 각지로 보냅니다. 목사님 입회하에 기도까지 해 줍니다. 냉장은 어떻냐고요? 말해 뭐해요. 주문해 보세요. 당신의 고기가 포장지를 씌울 때까지 아무 스트레스도 느끼지 않아요. 배양육 같은 것들은 통조림에 든 뇌처럼 전기 자극을 받으며 상상 속의 산책만 되풀이하는 겁니다. 유전자 조작으로 기워 놓은 배양육과 실제 고기는 단백질의 수준이 다르답니다. 축산업자는 조작이란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사회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축산 업계를 상대로 한 생명윤리 집회가 전 세계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 와중에도 배고픈 나머지 마트로 향했습니다. 제가 보낸 연락을 받은 마도카 씨가 온갖 분노에 찬 이모티콘을 보내더군요. 마도카 씨는 미키코를 데리고 먼저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웬 고양이가 화면 안에서 길길이 날뛰고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보내고··· 고양이 이모티콘이 던지는 야로(野郞) 글자를 피하던 마토메는 하마터면 저들끼리 복귀 중인 마트 카트의 대열과 부딪칠 뻔했다.
저는 점퍼 깊숙이 휴대기기를 넣은 채 육류 판매대를 찾았습니다. 선홍빛 고기의 홀로그램이 한쪽 벽면에 띄워져 있었습니다. 냉동정육 품목, 정말 맛있어 보였죠.
‘CLEAN MEAT’이라고 적힌 전광판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마토메는 배양육 판매대에서 벗어나 보다 품질이 낮은 냉동육이 있는 곳으로 갔다. 시시각각 상품이 바뀌는 진열대를 응시했다. 여러 가축의 부위가 한데 모인 진열대는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불명의 생물체 같았다. 다음 제품으로 교체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얼굴이 잠시 유리판에 반사되었다. 그는 권면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어림잡아 마토메보다 서너 배 정도는 될 법한 고기 진열대가 관처럼 그를 담을 것이다. 시대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까지 악성 재고처럼 보관될 것이다. 뼛속까지 틈입하는 냉기, 그리고 정지된 시간은 갈수록 익숙해질 것이다. 꽃 피지 못한 씨앗이나 싸늘한 창고 영화같이 조금의 가능성만 품은 채로. 한기를 느끼던 마토메는 진열대에 배양육이 나타나자 헛구역질했다.
얼고 싶었죠. 저도 얼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것 또한 다른 의미에서 수면일 테니까요.
마토메는 강한 향신료에 볶은 냉동육 요리를 쌀밥에 얹어 먹었다. 방 안에서 마도카 씨와의 영상 통화만 켜 둔 채였다. 마도카 씨는 일본 청년들이 권면하는 길을 선택한다는 사회면 기사를 공유했다. 이어서 마도카 씨는 그래, 차라리 얼어 버리는 건 어때요? 혹시 유능한 컨설턴트가 우리 재산을 폭발적으로 늘려 놓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라고 말했다.
듣고 있던 윤무는 그것이 전혀 없는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마토메는 웃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마도카 씨는 그저 답답하니까 농담하고 싶었던 거겠죠. 그렇지만 저는 잠시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어도 좋으니 놓고 싶었답니다. 지금도 그래요. 얼어 버린다는 거, 어떨까요. 아플까, 괴로울까, 답답할까, 다르지 않을까. 아아, 그 뒤로 제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니까요.
윤무가 입을 열었다. 우연하게도 얼마 전, 나는 컨설턴트에게 재산을 위탁하는 서명을 했습니다. 작품에 관한 권리가 법적으로 보호되어 지정된 저축 계좌로 저작권료를 받을 거라더군요. 잠드는 동안에도 극은 올라가지요. 대신에 아무 불평불만도 자존심도 자의식도 없는 극작가라면, 정말이지 연출가와 배우들이 평화의 시대가 왔다며 오늘 하루 디스코 볼을 틀고 춤이나 추자고 할지도 모릅니다. 윤무는 스테인리스 휠을 돌려 내닫이창의 색온도를 노을로 맞추었다. 자연스러운 오후의 분위기가 되면서 윤무의 옆얼굴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필경사라는 사람이 온갖 기억을 정리해 주었는데, 나를 완전히 복사했다고 하더군요. 수치스러운 기억마저도. 그것들이 없다면 이 박윤무를 복구할 수가 없답니다. 나는 미래에 대한 흥분이나 모험심이 일절 없습니다. 캡슐 안에서 멈추는 게 무섭지도 않고요. 읽고 있던 인쇄물의 끝부분을 만지며 기다리는데,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던 필경사가 와서는 한마디하더군요.
박윤무 씨는 현재 증식시킬 자산이 없으십니다.
이상한 말이었지요. 나에게 분명히 주식이랑 예·적금도 있고, 대출로 묶인 구축이지만 아파트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필경사는 나의 재산이 어째서 미래 가치를 갖지 못하는지 기분 나쁠 정도로 명명백백히 설명하더군요. 주식은 주로 소외주이거나 안전성이 떨어지고, 기나긴 횡보만을 거듭한다는 겁니다. 오르기만 하는 소외되지 않고 안전한 주식이 어디 있겠냐만 말입니다. 이혼 판결이 날 때까지는 아파트 소유 비율도 명확하지 않다더군요. 미래로 먹고사는 필경사를 두고 현재에 급급한 나란 인간이 어떤 변론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인쇄물이나 쥐어뜯으며 못살 게 굴고 있는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혹시 미모스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정확하게 어떤 기술이다, 이런 것까지 알지는 못하지만 네, 나는 안다고 했습니다.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이야기가 수월하겠다며 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더군요. 윤무는 양팔을 번쩍 들어 보였다. 나는 권면할 사람이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괜찮답니다. 미모스는 원로 예술가나 하는 것이라 다들 생각하고 젊은 예술가는 불쾌해하며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창작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예술가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예술은 창작자도 이해 못 할 막연한 우연과 찰나의 영감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 우연과 찰나가 늘어나면 좋지 않냐는 그럴듯한 소리까지 하면서요. 그러자 나도 내 뉴런에서 얼마나 희곡을 뽑아낼지 궁금하더군요. 남겨진 애들에게 작은 유산이 될 수도 있고···.
윤무는 소파에서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는 마토메의 얼굴이 낯설고 멀게만 느껴져 입을 다물었다. 이어서 거실을 서성이는 윤무를 향해 마토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잖아요. 도망치기 전까지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누군가를 도왔나요, 아니면 부양할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까? 대본은 쓰고 있나요? 완성한 건 맞긴 합니까? 극이 올라간 적은 있긴 한 겁니까? 그러면 어디 한번 말해 보세요. 제가 봤을 수도 있을 테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으나, 윤무 쪽에서 먼저 고개를 돌렸다. 거실 창으로 서서히 태양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극이라. 지나간 일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윤무는 미약한 두통을 느꼈다. 글쎄요, 모노드라마였던 것 같은데. 그는 힘겹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복기를 거듭하며 기억의 실마리를 좇았지만 텅 빈 주머니를 뒤적이는 듯했다. 잠깐이나마 생각을 놓친다면 머릿속에 있는 잔상이 멀리 떠내려가 버렸다. 의식은 거침없는 폭포와도 같았고, 연상되는 사념을 수면 위로 나오지 못하게 억누르는 닻이었다.
어두컴컴한 의식의 너머에서는 정체 모를 삼원색이 갖가지 도형을 만들어 냈다. 그 도형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소묘처럼 그렸다. 방 안에 괴팍하게 생긴 노인이 있습니다. 초췌한 얼굴입니다. 윤무가 말했다. 런던 북부 연립주택의 골방에 처박혀서 책상에 쏘아진 레이저 키보드를, 그러니까 몇 번이나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이 감상한 모든 것을 기록하는 중이었다. 영하로 떨어진 도시의 기온과 배를 곯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몇 글자도 제대로 전진하지 못한 노인은 창문 앞을 서성거리거나 한겨울 템스강처럼 식은 홍차를 마셨다.
노인은 홍차가 맛이 없었는지 창문으로 던져 버렸다. 쨍그랑. (관객 폭소)
철제 침대에서 얇은 담요를 덮은 채 깜빡 잠이 들어 버린 노인이 일어났다. 평소와 다른 느낌에 그는 당황했다. 이어서 뭔가에 쫓기듯 책상 앞에 앉았다. 머릿속에 아우성치는 비명 같은 전파. 그는 그것을 옮겨 적는데, 입으로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낯선 언어가 산란하고 상상 속 텍스트는 획과 획이 서로 짝짓기하며 선을 뒤섞기 시작했다.
기어코 글자는 균일하게 뻗어지는 세 개의 점(···)으로 압축되어 무수한 작은 구멍의 형태를 하고 페이지의 한 행에서 숨구멍처럼 호흡했다. 벌름거리는 점들.
노인은 당황한 나머지 머리를 쥐어뜯었다. 사라지지 않는 현기증의 근원을 찾아 정수리를 더듬거리는데, 날 적에 숫구멍이 열렸을 부분으로 자기 손가락이 하염없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 구멍에서는 한 줄기 빛이 올곧게 하늘로 뻗어졌다. 노인은 침착하게 선을 잡아당겼다. 그럴수록 앙상한 그의 몸은 런던 북부의 쌀쌀한 상공으로 느리게 올라가고 있었지만, 도시를 배회하는 그 누구도 그를 발견하거나 손으로 가리키지 않았다.
마침내 별빛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우주까지 도달해 버린 노인은 살을 에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자신을 끌어당긴 빛줄기의 출처를 따라갔다. 그러나 더 이상 빛은 그의 정수리에 달린 것이 아니라 따로 떼어져 있는 것이었고, 노인은 그 줄을 생명줄처럼 복부에 칭칭 감아 유영했다. 거대한 성운에서 역동적으로 뿜어져 나온 빛은 거침없이 지구로 향했다. 그 광자 속에서 혈액처럼 흐르는 인자가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냈으며, 노인의 신체를 끌어당겼다.
빛이 빚은 성운을 지나다니는 노인의 발은 어디 한 곳을 디딜 수 없었다. 눈앞에 무수히 관통하는 우주의 구름 속으로 펼쳐지는 장면과 붙여진 이름, 행적, 날씨, 장소, 음성언어. 그것이 한데 어우러져 만드는 이야기의 원형이 펼쳐지고 있음에 매료되었다. 먼저 잠든 양친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지금껏 마주친 인물의 얼굴이 빠르게 지나치는 열차의 유리창과 같이 스쳐 갔다. 노인이 알고 있는 모든 서사의 고향이었다. 또한 지금까지 있어 온 문장과 앞으로 적히게 될 문장의 출처였다.
읽고 있는 동안에는 숨을 쉴 필요가 없었다. 온전히 다른 세계였으므로. 평생을 따라다닌 현기증과 척추협착증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개헤엄을 하듯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로 언제나 자신을 어디론가 이끌었던, 다음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을 순순히 따라갔다. 그러자 손바닥 아래에서 하나의 물건이 쥐어지게 되는데, 그것을 책이라 자각했으나 직사각 형태의 익숙한 모습과 다르게 생경하게 생긴 원통형이었으며 어떤 페이지에 검지를 넣고 읽어도 시작이자 끝인 구성이었다.
노인은 원통형 책을 끌어안고 망막한 우주 같은 어두운 무대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영원히 읽을 수 있다. 영원히.
노인, 쾌재를 부르짖는다. (암전)
에 대해 교토대학교 연구진이 공개한 미발표 에세이 『카페 버넷에서 보낸 한철』과 장편소설 『빛의 벽』을 경유한다. 이러한 연구는 이전에도 여러 유사 사례²와 함께 본고의 주제를 예각화하는 기능을 하며, 발표 재고를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선 문학의 효용론을 거론하거나, 또는 창작자의 주관이 소거되어 있으므로 여전히 문제적이라는 기존의 견해를 고수한다.
본고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진단한다. 첫 번째로, 작품의 내러티브는 어디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가? 그리고 두 번째, 작가가 더는 시대와 공존할 수 없게 된다면 작품 세계는 과연 달라지는가. 마지막으로 모든 논지는 예술이란 작가와 작품을 상업주의적으로 다룬 매니지먼트 기업의 비윤리적 상술에 해당하는가. 이에 대해 실험 정신을 잃고 영상 언어로 2차 창작될 거라는 기대감만으로 맥을 이어가던 창작 산업 전반에 활력을 공급할 콘텐츠가 등장한 것은 가히 긍정적이라는 시각이 대척에 공존한다. 예를 들어 밀라노 영화제를 통해 <Eye of the Beholder>와 <No Footing>를 발표해 참여 영화의 열풍을 주도한 안드레이 슈니츨러는 “작가 자신과 가족의 동의를 받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체 모를 분노에 휩싸여 있다. 창작자 자신의 주관 이상으로 작품을 결정지을 방법은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³라고 견해를 밝혔다. 창작자의 뉴런 구조를 재구성하여 생산한 작품이야말로 어떤 외부의 압박과 영향도 받지 않고 쓰인 순수한 창작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전망하는 긍정론은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발견되는 추세를 보인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앨프리드 히치콕에게 호러 게임의 심사를 맡게 한 것과는 분명 기술적으로 다른 문제에 해당한다. 죽음을 앞둔 창작자에게서 존재하는 모든 시냅스를 복사하고, 혈육과 연구회가 동석한 가운데 그것을 창작으로 연결하는 일은 여전히 윤리적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남긴다. 창작자는 죽어서도 예술 창작을 이어 나가며 그 창작의 지평에서는 작가의 벽(Writer's block) 같은 막힘이 발생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나 사회에게서도 영향받지 않는 글을 쓰는 작가는 독자를 새로운 고민에 빠뜨린다. 미모스(mimos) 작품을 읽을 때 발생하는 불쾌감과 비윤리성에 대한 거부감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미모스가 예술 창작 본질에 화두를 던진다는 점이다. 이제 화가와 작가의 펜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조각가와 무용수는 결코 지치지 않을 것이다. 작곡가와 설치예술가, 행위예술가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가수의 성대는 절대 손상되지 않으며, 코미디언의 유머는 원전처럼 무한에 가깝게 생겨날뿐더러, 배우의 얼굴과 신체는 영원히 젊고 아름다울 것이다.
이제 세상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 완벽한 세상에 완벽하지 않은 우리가 남았을 뿐이다.
(하략)
1. Kijoon Lee, Problèmes liés à la reproduction de l'esprit de l'écrivain et à l'impression générique, (Lille)
2. ‘Jean Lelord’, ‘Émile Seberg’, ‘E. Beauvoir’의 사례.
3, Fabrizio De Sivo 「Cinema Italiano」, 38, 9월호.
이야기를 마친 윤무는 이것이 마토메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보다 자신의 내부로부터 들리는 울림이라 생각했다. 이야기의 줄기만 덩그러니 남고 정작 그것을 쓰고 구상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윤무는 혼란스러웠다. 극이 올라간 적 있는가. 연기하는 배우는―갖가지 의상의 인물이 사라진다―? 조명은―빛이 꺼진다―? 스태프는―현장에 있던 스태프가 사라진다―? 무대는―무대가 없고 이제 공허한 암흑만 남는다―? 그는 끝나지 않는 저녁놀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창문 바깥으로 성냥갑 같은 건물과 그 뒤로 숯처럼 드리워진 산과 노을이 불타올랐다. 저것들은 어떻게 이 세계에 볼모로 붙잡혀 있나. 편집증적인 망상에서 튀어나온 세상의 부산물인가. 아니면 착란의 흔적일까. 어렴풋이 떠오르는 외부의 기억과 흐릿한 음성은 명료하게 그 자신을 윤무라고 호명하는 듯했지만, 그것은 어딘가 이상한 일이었다. 실체를 향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마토메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윤무에게도 건넸다. 생수를 목구멍 안으로 조금씩 넘길수록 노인의 형상은 점차 흐려졌다. 어느새인가 노인은 기억되지 못할 하나의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 피곤함을 느낀 윤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당신 정말 배우가 아닙니까? 얼굴이 익숙해서요.
윤무의 말에 마토메가 싱겁게 웃었다. 우리는 모두 삶이란 연극의 주인공이다, 이런 따뜻한 말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그런 말이라면 저의 양친에게 해당하겠지만요.
윤무는 과육을 먹고 남은 사과 심지를 손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나는 배우들을 존경합니다. 그 배우들과 무대 스트라이크 하는 순간을 보기 위해 극본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체되는 세트와 음향 스피커, 하늘에서 내려오는 조명. 또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채우는 과정이 끝에 도달한 나를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훗날 깨어나게 될 세계에서 내가 어떤 극을 올렸을지 나도 궁금합니다. 그렇게 해서 쓰인 작품은 정말 수많은 사람의 말처럼 세계의 어떠한 티끌도 묻지 않은 온전한 나의 극인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런 것들의 출처를 나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할까요. 윤무는 그 말을 마친 다음 입에서 맑은 침이 목구멍 안으로부터 밀려 나오는 기분을 느꼈다. 소파에 완전히 등을 기대고 그는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얘기를 하다 보니 배가 고프군요. 허기가 집니다.
그렇게 말하며 마토메가 자신의 앞에 있는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긴장이 풀렸는지 마토메는 거친 호흡이나 꾀죄죄하던 행색이 전보다 말끔해진 모습이었다. 저는 냉동식품이 아주 익숙합니다. 먹다 보면 나쁘지 않아요. 모두가 신선한 식재료를 원하는데, 모르고 먹으면 나쁠 게 없죠. 우리 혀가 그런 것을 예민하게 구별하지도 못하니까요.
활짝 열린 냉동고에서 운무 같은 냉기가 흘러나왔다. 어쨌거나 이 냉장고에는 배양육이 아주 많아요. 식감과 육질이 훌륭한 배양────육이 아────주.
순간 윤무에게는 마토메의 목소리가 몹시 늘어지게 들려왔다.
그것은 냉장고 앞에 한쪽 다리를 쭈그리고 앉은 마토메의 옆얼굴을 보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잠깐 마토메는 멈춰 있기도 했다. 창문을 투과하는 햇살이 그런 것처럼, 멀찍이 흘러가는 구름이 그런 것처럼. 실내에 부유하는 먼지와 공기가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날아온 냉기 때문에 그대로 얼어 버린 듯했다. 그러다가 그들이 멈춰 있는 장소가 스파게티처럼―말 그대로―길게 풀어졌고 시공간에 퍼져 있던 온갖 소음이 팽창했으며, 그로 인해 윤무는 귀를 틀어막고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수많은 백색 잡음을 모래처럼 실은 수천 대의 덤프트럭이 그의 앞에 모두 쏟아내 버린 듯이. 늘어나기와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공간은 수많은 입자로 쪼개져 윤무만을 남긴 채 주위를 온갖 색의 향연으로 섞어 버렸다.
회오리치며 윤무를 맴도는 색채. 바닥이 사라져 버리고 난 뒤 그는 끝없이 아득한 감각 속으로 추락했다. 함께 떨어지고 있는 마토메의 신체는 더 이상 사람으로 보기 힘들 만큼 형체가 굴절되고 껌처럼 늘어났다. 윤무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너지는 아파트와 분산된 사람, 무수히 분해되는 주춧돌 더미를 보며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세계가 끝없는 암흑 속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스톤헨지 거석과 스핑크스, 앙코르와트, 그리고 지나간 인류사가 빚어낸 유적과 유물이 괴성을 질렀다. 철근 다발이 부서지고 무참히 박살이 났다. 그렇다면 어디로? 그는 변덕스러운 허공에서 여러 번 정신 잃기를 반복하다가, 기억 안에 방치되어 있던 불규칙한 전 지구적 더미 데이터를 뒤져서 가까스로 하나의 장면을 건져 올렸다.
윤무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알았다.
나선형 레일이 회전하며 꼭대기에 선구자를 올려놓은 그 구조로. 그는 어느새 터미널이었다. 필경사와 컨설턴트를 따라 도착했던 그곳이었다. 메스꺼움을 견디지 못한 윤무는 대기실 좌석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실내는 몹시 평온했다.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고 새하얀 복장의 시설 관계자가 돌아다녔다. 윤무는 아파트에서 어떻게 돌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힘겨워하는 윤무를 제외한다면 터미널은 치밀한 건축법으로 이뤄진 바실리카와 다를 바 없이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중앙에 큼지막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스크린에서 모든 캡슐의 상태가 실시간으로 출력되었으며, 그 앞에는 잠든 이들을 기억하는 방문객 무리가 다채로운 꽃다발을 들고 머물렀다.
어느 순간 윤무는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다음으로 두 발을 바닥에 붙여서, 회전하는 잔상에 시달리던 머리를 진정시켰다. 윤무는 기시감을 느꼈다. 언젠가 자신이 시설 관계자의 안내를 따라 통과 수속을 거치고 내부로 입장했었음을 떠올렸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적이 드문 자리, 로렌초 기베르티가 조각한 천국의 문을 닮은 거대한 금색 구조물 앞에 서 있던 자신이 생각났다. 또한 들어가기에 앞서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느 사람의 얼굴을 다시 기억해 냈다. 그가 자신과 아무런 인연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말을 섞거나 같은 레일에 있지도 않았던, 그저 우연히 옆얼굴 일부를 목격하기만 했던 마토메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아이를 안고 서 있는 마토메는 어느 여성과 함께였다. 언뜻 보기에 단란한 가족으로 보이는 그들은 대기석에 나란히 앉은 노부부를 보살피는 중이었다. 윤무는 그 장면을 머릿속에 고스란히 간직한 채 누군가 열어 주는 문을 따라 실려 들어갔다. 문 너머로 펼쳐진 거대한 나선형 구조가 주는 위압적인 공간을 목격하고 또 한 번의 경탄을 느꼈다. 그는 모든 순서를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먼저 자신이 누운 캡슐이 기존에 있던 타인의 캡슐을 밀어서 올려 보내는 것을 기다렸다. 이어서 캡슐 안으로 입관하듯 가지런하게 누워 거대한 흐름에 정신을 내맡겼다.
캡슐 내부를 비추는 파란빛이 꺼지고 난 후 윤무는 세계가 천천히 의식의 아래로 잠겨 드는 것을 느꼈다. 신체 대사가 하나둘 느릿하게 저하 단계로 돌입했다. 신체 조직이 얼어붙는 것은 현실의 시간으로 눈 깜빡할 사이일 테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복합적이고 비밀스러운 층위가 발생했다.
다시, 어렵지 않게 돌아온 낡은 아파트에서 윤무가 뚜렷하게 느낀 첫 번째 감각은 자기 목을 조르는 커다란 손바닥이었다. 마토메는 윤무를 양손으로 강하게 압박했다. 마토메는 윤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욕설을 퍼부었다. 윤무는 마토메가 살아 있는 자아가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마토메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다. 마토메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다시 한번 세계가 붕괴하는 상황을 초래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윤무는 마토메의 존재와 감정이 실재한다고 믿기로 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가능하므로, 윤무는 두 눈을 감았다.
마토메는 광포한 분노에 사로잡힌 모습이었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무대 안에 극작가와 나란히 배역을 맡은 채로 갇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훗날 해동된다고 하더라도 마토메 자신만큼은 현실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마토메는 윤무가 기억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부산물이었다. 잠들기 전 포착한 기억을 무의식이 가공한 결과물이었다. 뇌가 일으킨 착각과 섬망의 일종이었다. 지금에 와서 마토메는 확증 편향을 공고히 할 찰나의 현상에 불과했다. 마토메가 날뛸수록 윤무는 더욱더 실체감을 느꼈다. 마토메가 목을 세게 조르면 윤무는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권면 도중 이상 징후는 빈번하게 발생한다. 신규 캡슐이라면 일종의 신고식과 다름없다. 꿈이나 각성 상태와는 분명히 다르며, 신체가 얼어 가는 과정에서 뇌가 신체의 유속을 느리게 감각하고 부조화를 경험하는 현상이다.
넓게 늘어난 사고의 지점에 두 사람이 뒤엉켰다. 혈관을 압박하는 거대한 손. 윤무는 심연 밑바닥에서부터 끝없이 자신을 증오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비로소 얼어 가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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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기 연습그만두기 연습 차현지 올리브는 무언가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때마다 적외선 치료기의 빨간 불빛을 떠올리곤 했다. 훈련이 끝나면 이비인후과에 가서 대기실 벽 한쪽에 나란히 걸려 있던 길쭉한 원통형 기계의 전원을 켰다.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수화기를 들 듯 치료기를 한쪽 귀에 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염증으로 늘 귓구멍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뜨겁고 날카로우며 압력이 가득 차는 듯한 통증은 아직도 생생했다. 언젠가 잠수 훈련을 하던 날이었다. 손가락으로 모자이크 타일을 하나씩 짚을 수 있을 만큼 수영장 바닥 가까이 내려가 잠영하던 중, 갑자기 퍽 소리가 나면서 뭔가가 찢기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얼마 안 있어 수경 너머로 연한 선홍빛 액체가 서서히 퍼지는 것이 보였다. 올리브의 오른쪽 귀에서 난 출혈이었다. 몸을 밀어 올려 수면 위로 향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 올리브는 생각했다. 이제 더는 지금처럼 수영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즈음 올리브는 사춘기에 막 접어들었다. 하루에 많게는 반나절 가까이 물속에서 체력을 다 소진한 탓에 베개에 늘 침 자국을 잔뜩 내며 꿀잠에 들곤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잠에 드는 것이 어려웠다. 누우면 자꾸 잡생각이 났다. 하계 수련회에 갈 때 버스는 누구랑 같이 타지. 정혜는 짝을 구했나. 왜 나는 단짝 친구 하나 없는 거지. 이게 다 수영 때문이야. 아, 수영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면 금세 자정이 가까워졌다. 훈련하느라 올리브는 늘 혼자였다. 친구들이 모닝글로리에 가서 샤프펜슬을 살 때도, 삼삼오오 모여서 만화를 그릴 때에도 올리브는 그들 사이에 끼지 못했다. 심지어 같이 수영을 시작한 친구들이 샤워실에서 그녀를 못 본 척 짝지어 수영복 물기를 짜고 있을 때도. 넌 선수반 갔잖아, 이제 우리랑은 못 놀지. 그 애들이 샤워실 밖으로 나갈 때까지 올리브는 연신 샴푸질을 했다. 거품이 많아져 눈꺼풀에까지 흘려내려도 쓱쓱 닦아내면서. 그러고는 아무도 없을 때 수영복의 물기를 짰다. 너무 많이 짜서 손아귀가 얼얼할 만큼. 됐어, 혼자여도 괜찮아, 까짓거. 주문을 외듯 혼잣말을 하면서. 올리브는 물속에 있는 것보다 물 바깥의 생활이 더 갑갑했다. 레인 안에서 일렬로 쭉쭉 직진, 턴, 직진, 턴만 하면 되는 반복적인 훈련이 그리웠다. 오로지 숫자와 기록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사회적 교감 따위 없는 속 편한 물속이. 너무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면 올리브는 심야 라디오에 편지를 썼다. 직접 손 글씨를 쓰며 사연 받을 주소를 불러주던 디제이가 더듬더듬 영…등…포구…… 여의…도…동…… 하며 나직하게 말을 이을 때면 올리브도 똑같이 편지지 봉투에 주소를 또박또박 적곤 했다. 사연이 채택되지는 않았다. 중학생은 너무 어리단 건가. 그래서 다음엔 대학생인 척 보내보았다. 봄이 되면 새내기 대학생들 사연을 자주 읽어주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올리브는 성별과 직업을 바꿔가며 계속 사연을 보냈다. 우푯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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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01
문장웹진 소설
모래 유원지모래 유원지 김소라 할아버지는 나를 기다리고, 나는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매일 오후의 풍경이 그렇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 발소리가 신호가 되었다. 저벅이는 소리가 가까워지면 할아버지는 낚시 조끼 주머니에서 투명한 아스피린 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동그란 알약 두 개를 손바닥에 덜어내 입안에 톡 털어 넣고는 물도 없이 삼켜버렸다. 아주 보란 듯. 때때로 입이 말라 단번에 삼키지 못하면 얇은 입술에 힘을 주고 한참을 우물거려 침을 모았다.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닿았다. 그다음엔 어김없이 할아버지의 혼잣말을 닮은 이야기가 시작됐다. 귀담아들을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에 대한 것. 그러니까 대부분은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어 나는 모르는 사람들. 영영 소식이 끊긴 아들이라든가 단골손님이라든가. 또는 이 동네에 관한 것, 그리고 저 동네에 관한 것. 전파사 문 앞에 놓인 접이식 철제 의자가 할아버지의 자리였다. 앙상한 다리를 꼬고 구부정하게 앉아 주절주절, 내가 탈 마을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중얼거렸다. 말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내 눈을 마주치는 법이 없었다. 이 대화가 아주 일방적이라는 것을 본인도 아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할아버지에게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아 나는 늘 내버려두었다. 할아버지는 ‘결국’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는데 그 사실까지는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 줄 알아? 그러다가 결국엔 말이야. 결국 이렇게 된다구. 그 말버릇 때문에 할아버지는 마지막을 다 아는 듯도 했고, 모르는 듯도 했다. 기대하는 듯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가 입을 뗄 때마다 나는 마지막을 기다리게 된다. 결국 어떻게 될까. 그 질문을 길잡이 삼아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를 기꺼이 따라가곤 했다. 천변을 따라 마을버스가 느리게 다가왔다. 이 버려진 동네는 물이 바짝 말라버린 개천을 사이에 두고 알파벳 U자를 길게 늘여 놓은 모양으로 생겼다. 나와 할아버지는 가장 끝, 휘어진 부분의 막다른 곳에 살았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올망졸망한 단층 건물들을 굽어보는 유일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3층엔 내가 세 들어 있었다. 혼자 사는 남자에게 딱 알맞은, 방 두 개짜리 작은 집이었다. 2층엔 건물의 주인인 할아버지가 살았고, 1층엔 오래전 할아버지가 운영했던 전파사가 문을 닫은 채 남아 있었다. 이 깊숙한 곳에서 마을버스를 타는 승객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푸쉬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버스 문이 열리고 내가 올라타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오게 되어 있거든, 결국. 버스 유리창 너머로 할아버지가 뻐끔거렸다. 여전히 시선이 엉뚱한 곳에 가 있는 모습이었다. U자 모양의 천변길을 벗어나 두 정거장을 더 가면 지하철역이 나왔다. 단 두 정거장을 지나왔을 뿐인데 그 사이 풍경은 TV 채널을 돌린 것처럼 완벽히 바뀌었다. 고르게 망해버린 천변과 달리 지하철역 주변에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럴싸한 카페와 서점, 은행, 최신 휴대폰을 파
- 김소라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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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작가님, 사냥철 때부터 잘 보고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