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유원지
- 작성일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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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유원지
김소라
할아버지는 나를 기다리고, 나는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매일 오후의 풍경이 그렇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 발소리가 신호가 되었다. 저벅이는 소리가 가까워지면 할아버지는 낚시 조끼 주머니에서 투명한 아스피린 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동그란 알약 두 개를 손바닥에 덜어내 입안에 톡 털어 넣고는 물도 없이 삼켜버렸다. 아주 보란 듯. 때때로 입이 말라 단번에 삼키지 못하면 얇은 입술에 힘을 주고 한참을 우물거려 침을 모았다.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닿았다.
그다음엔 어김없이 할아버지의 혼잣말을 닮은 이야기가 시작됐다. 귀담아들을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에 대한 것. 그러니까 대부분은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어 나는 모르는 사람들. 영영 소식이 끊긴 아들이라든가 단골손님이라든가. 또는 이 동네에 관한 것, 그리고 저 동네에 관한 것. 전파사 문 앞에 놓인 접이식 철제 의자가 할아버지의 자리였다. 앙상한 다리를 꼬고 구부정하게 앉아 주절주절, 내가 탈 마을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중얼거렸다. 말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내 눈을 마주치는 법이 없었다. 이 대화가 아주 일방적이라는 것을 본인도 아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할아버지에게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아 나는 늘 내버려두었다.
할아버지는 ‘결국’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는데 그 사실까지는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 줄 알아? 그러다가 결국엔 말이야. 결국 이렇게 된다구. 그 말버릇 때문에 할아버지는 마지막을 다 아는 듯도 했고, 모르는 듯도 했다. 기대하는 듯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가 입을 뗄 때마다 나는 마지막을 기다리게 된다. 결국 어떻게 될까. 그 질문을 길잡이 삼아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를 기꺼이 따라가곤 했다.
천변을 따라 마을버스가 느리게 다가왔다. 이 버려진 동네는 물이 바짝 말라버린 개천을 사이에 두고 알파벳 U자를 길게 늘여 놓은 모양으로 생겼다. 나와 할아버지는 가장 끝, 휘어진 부분의 막다른 곳에 살았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올망졸망한 단층 건물들을 굽어보는 유일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3층엔 내가 세 들어 있었다. 혼자 사는 남자에게 딱 알맞은, 방 두 개짜리 작은 집이었다. 2층엔 건물의 주인인 할아버지가 살았고, 1층엔 오래전 할아버지가 운영했던 전파사가 문을 닫은 채 남아 있었다. 이 깊숙한 곳에서 마을버스를 타는 승객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푸쉬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버스 문이 열리고 내가 올라타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오게 되어 있거든, 결국. 버스 유리창 너머로 할아버지가 뻐끔거렸다. 여전히 시선이 엉뚱한 곳에 가 있는 모습이었다.
U자 모양의 천변길을 벗어나 두 정거장을 더 가면 지하철역이 나왔다. 단 두 정거장을 지나왔을 뿐인데 그 사이 풍경은 TV 채널을 돌린 것처럼 완벽히 바뀌었다. 고르게 망해버린 천변과 달리 지하철역 주변에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럴싸한 카페와 서점, 은행, 최신 휴대폰을 파는 상점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엔가 사람이 솟아나는 샘이라도 있는 듯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오갔다. 개천 주변으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지만, 이곳엔 수십 년 세월을 품은 듯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빛바랜 나뭇잎들이 바람을 따라 길 위를 굴러다녔다. 어느새 도톰해진 사람들의 옷차림도 눈에 띄었다. 붐비는 곳에 와서야 계절이 실감 났다. 생명의 기척이 넘쳐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러 본 적은 없었다. 어차피 여기 오는 건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니까. 주먹을 꼭 쥐고, 땀이 날 지경으로 꼭 쥐고 사람들 사이를 통과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삐 걸었고 그 속도 때문에 서늘한 바람이 내 곁을 휙휙 스쳤다. 현기증이 날 때쯤 지하철에 올라탔다. 네 번째 역에서 내리면 되는데 역 사이가 너무 멀었다. 늘 그랬듯, 지하철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가는 내내 지상만 지난다는 재미있는 사실에 집중했다. 흥건했던 손바닥이 서서히 말라갔다. 손이 완전히 보송해졌을 때 고개를 들면 사람들은 거의 내린 뒤였다. 그제야 나는 맞은편 창 너머 잔잔해진 바깥 풍경에 눈을 둘 수 있었다. 키 작은 공장들과 오래된 놀이터, 쓰레기봉투가 쌓인 담벼락, 유리창 없는 빈 건물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 대신 풍경만 흘렀다. 누구도 나를 들여다볼 일 없는 세계에서 비로소 고른 숨을 내쉬었다.
지하철에서 내리자 시리고 끈적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역 바로 너머에 바다가 있었다. 모래사장이 시작되는 지점에 빛바랜 파란색의 이정표가 보였다. 바다 쪽을 가리키는 조그만 화살표 옆에 흰 글씨로 ‘모래섬 유원지’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섬’이라는 글자는 지워지고 흔적만 남았다.
여기서 때를 기다려야 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도 옆에 없으니 나 혼자. 하늘이 짙은 오렌지빛 노을로 물들기 시작하고 바닷물이 얌전히 뒷걸음질 쳤다. 이윽고 작은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법한 폭의 모랫길이 드러났다. 나는 온전히 길이 완성되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바다로 구불구불 길게 뻗은 모랫길을 따라 걷다 보면 평평한 모래섬에 다다랐다. 이곳이 나의 출근지, 모래섬 유원지였다.
웅장한 출입구라든가 매표소 같은 건 없었다. 흔한 담장조차 없어 누구든 드나들 수 있었다. 섬 전체가 유원지의 영역이었지만 일반적인 놀이공원 크기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이었다. 화려하거나 역동적인 놀이기구를 기대하면 곤란했다. 이곳은 아주 낡고 오래된 것들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은 기계들, 이를테면 뽑기 기계, 펀치 기계, 자동 솜사탕 기계, 사진 기계, 점 보는 기계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고, 다람쥐 통, 범퍼카, 회전목마 정도의 시시한 놀이기구가 그 곁을 지켰다.
나의 일은 기계와 기구들을 작동시키고, 유원지 전체의 불을 켜고 끄는 것. 조명은 모두 오렌지빛이었다. 바다 위로 드리워지는 노을과 꼭 닮았다. 전구가 달린 줄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나무 기둥 사이를 가로질러 걸려 있었다. 작은 전구들이 촘촘히 매달려 유원지 전체를 감싼 모습은 영원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풍경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유원지 전체를 밝히는 조명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전구들이 차례로 빛을 내는 걸 지켜보는 일은 매일의 의식과도 같았다. 간혹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 몇 개가 눈길을 끌었다. 특히 입구 쪽의 꺼진 전구 하나는 유난히 신경 쓰이는 위치였다. 가지런한 오렌지빛 사이에 검은 구멍이 뚫린 듯했다.
마지막 전구까지 켜지는 걸 확인한 후 몸을 움직였다. 섬을 크게 한 바퀴 돌며 모든 기계와 놀이기구의 전원을 켰다. 허름한 기계들이 녹슨 숨을 몰아쉬며 깨어났다. 저마다 다른 멜로디의 기계음을 내는데 울먹이는 소리처럼 들렸다.
의외로 손이 가장 많이 가는 건 자동 솜사탕 기계였다. 바다 습기를 먹은 설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기 일쑤였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정보가 기억나 나무젓가락을 여러 개 꽂아두었지만 소용없었다. 매일같이 단단한 설탕을 부수어야 했다. 돌멩이를 부수어 모래를 만드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이 일을 더 일답게 만들기 위해 나는 커다란 설탕 덩어리를 정확히 열 번의 타격으로 작게 쪼갰다. 이어서 작아진 덩어리들을 4분의 4박자의 리듬에 맞추어 가루로 만들었다. 탁탁탁탁, 탁탁탁탁, 탁탁탁탁, 탁-. 다 채우지 못한 마지막 마디 동안에는 막대를 옆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설탕은 새것처럼 고운 가루가 되어 있었다.
설탕을 부수는 동안에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지나갔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할아버지를 이 유원지에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낼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늘 자기 얘기를 하느라 내가 말할 틈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상상했다. 할아버지가 솜사탕을 입에 문 채로 범퍼카를 타거나, 다람쥐 통 안에서 사정없이 구르는 모습을. 결국 나를 죽일 셈이냐, 하고 소리를 질러댈지도. 언젠가 내가 운 좋게 말할 틈을 포착해 유원지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할 수 있게 된다면 할아버지가 다람쥐 통 안에서 어떤 얼굴이 되는지 확인할 수 있겠지.
설탕을 곱게 부수고 나면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다른 기계들과 기구들은 전원만 켜져도 알아서 굴러갔다. 일이 없다 보니 한번은 손님들이 먹고 버린 솜사탕 막대를 가지고 유원지 둘레를 따라 울타리를 만들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워낙 손님이 적어서인지 내 몸 하나 가릴 만큼의 높이도 쌓아 올릴 수 없어 그만두었다.
켜진 기계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까지 마치면, 그때부터는 모랫길로 이어지는 유원지 입구에 앉아 육지의 찬란한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폐장 시간인 자정이 가까워질 때까지는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 ‘저 동네’의 불빛이 선명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저쪽에 모여 요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불빛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 익숙해졌듯, 퇴근 후엔 항상 3층의 내 방 창문을 열고 깜깜한 천변을 한참 바라보곤 했다. 깜깜한 개천의 흔적과 깜깜한 길, 깜깜한 단층 건물들. 아마도 내가 응시하는 건 어둠이 아니라 그 속에서 유일하게 불을 밝힌 내 방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 의식을 창밖으로 날려 보내 다른 누군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듯. 나는 살아 있다. 나도 살아 있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쩌면 멀리 반짝임 가득한 저 동네에서 누군가 내 등대 같은 불빛을 눈치채 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가끔은 창가에 몸을 기댄 채 이런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내게도 할아버지처럼 자주 쓰는 말버릇 같은 게 있다면 어떨까. ‘결국’이라는 단어처럼 여러 번 곱씹게 되는 말. ‘언젠가’라든가, ‘원래’는 어떨까. 각자의 방식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할아버지와 나를 떠올려봤다. 오래된 한 쌍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결말을 알고 있는 사이처럼. 스치듯 보는 것만으로 그렇게 보일 수 있다면, 아마 빛을 밝힌 내 방을 확인하려 매일 밤 의식을 밖으로 밀어내는 고단한 일은 그만두어도 되었을 것이다.
마을버스에 올라타려는 순간 기사가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생김새와 다르게 뾰족한 목소리였다.
다음 달부터 노선 바뀌어요.
순간 뜻밖의 내용에 당황한 나는 버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철제 의자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목청을 높였다.
왜! 뭐라냐!
기사가 몸을 기울여 내가 가로막고 선 버스 문틈 사이로 할아버지에게 다시 소리쳤다.
다음 달부터 노선 바뀐다고요! 천변 안으로는 안 들어와요! 이제 이거 타려면 천변 입구까지 나와야 해요!
할아버지는 쥐고 있던 아스피린 병을 찰찰 흔들며 어딘가 즐거운 듯이 중얼거렸다.
결국 그럴 줄 알았지.
버스 문이 닫혔다. 텅 빈 버스 뒤쪽에 자리를 잡고 나자 기사는 룸미러로 나를 흘끔거리더니 왠지 친근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드디어 이쪽도 개발 준비하는 모양이죠? 시작이 어려워 그렇지 싹 밀고 나면 동네 하나 새로 생기는 건 금방이더라고요.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다음 달부터의 출근길을 머릿속에 그려보느라 정신이 다른 데에 가 있었다. 그러자 룸미러 속 기사는 원래의 살짝 짜증이 묻은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역시 더이상 집 앞에서 마을버스를 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버스의 승객은 늘 나뿐이었고 이 안쪽까지 올 사람도 없어, 천변을 빠져나가는 동안엔 기사와 단둘이 아무 말 없는 짧은 드라이브가 이어졌었다. 달콤한 침묵이 공기를 채우던 순간들이 있었다. 이제 다음 달부터는 그마저도 없어지는 것이다. 퇴근길과 마찬가지로 혼자 걸어야 했다. 그건 내 발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정적에 대해 생각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뜻이었다.
당장은 달라질 게 없었다. 다음날도 언제나 그래왔듯 해 질 무렵 모랫길을 건너 유원지에 출근했고, 불을 켜고 나서 일을 시작했다. 기계들은 내 엉킨 심정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깨어났다.
평소대로 자동 솜사탕 기계의 설탕을 부수고 있었다. 인기척에 돌아보니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원지에 들어선 두 사람이 보였다. 이십 대 초반, 아니 십대 후반이려나. 서로의 손을 꼭 붙들고 두리번거리는 그 커플은 제 발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불시착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재빨리, 하지만 태연히 설탕통의 뚜껑을 닫고 그들을 지나쳐 입구의 내 자리로 걸어갔다. 오늘처럼 아주 가끔 커플이나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찾아오긴 했지만 대개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낡은 유원지 상태에 실망한 사람도 있고, 아무도 없는 적막 속에 노는 게 멋쩍은 사람들도 있는 듯했다. 여기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엔 드물게 오는 손님이 반가워 은근슬쩍 뒤를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내 시선을 불편해한다는 걸 알고부터는 입구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다. 나름의 배려를 익힌 셈이었다.
입구에 자리 잡고 앉자 안쪽에서 커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풍선이 터지는 파열음 같은 웃음이었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나 보다라는 얘기가 오갔을 테고, 구식의 기계와 기구들을 구경하며 신기해했을 테고, 서로의 팔이나 어깨를 부산스럽게 때려가며 웃고 있겠지. 어떤 방식으로든 즐거워하고 있다면 나로선 뿌듯한 일이었다. 그런 순간들을 위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거니까.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은 데이트를 하다 우연히 이정표를 보았을까. 뭔가 색다른 게 있나 싶어 노을 색의 불빛을 향해 긴 모랫길을 걸어왔을까. 입장료도 따로 없는 이 어설픈 세계를 발견하고 반가웠을까. 나는 그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따름이었다.
고무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삐리리링 레트로한 기계음이 들렸다. 범퍼카를 타는 모양이었다. 부딪칠 건 서로뿐일 텐데도 둘은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나도 몇 번 타본 적이 있었다. 4번 번호를 달고 있는 파란 범퍼카가 제일 매끄럽게 움직였다. 비어있는 다른 범퍼카를 들이받는 건 기분이 묘한 일이었다. 다치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만 혼자 어딘가로 돌진하는 내 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쿵, 하고 부딪칠 때마다 마음이 모래처럼 바스라졌다.
오래전, 솜사탕 크기가 내 머리의 몇 배는 되는 듯했던 시절이 있었다. 들이받고 들이받히는 일이 그토록 즐거웠던 때. 내가 마음껏 소리를 질렀던 건 돌아보지 않아도 엄마 아빠가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처 없는 충돌과 안전을 약속하는 시선. 그런 것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게 언제였더라. 이젠 범퍼카를 타면 자꾸 어린 시절의 기억이 튀어 오르고, 그 기억마저 바스라질까 봐 더는 타지 않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다람쥐 통으로 옮겨 간 모양이었다. 스릴이라고는 앞으로 구를 지 뒤로 구를 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게 전부인 기구였다. 그런 점에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기구이기도 했다. 주머니 속 소지품을 빼고 타라는 안내문을 제대로 읽었을까. 뭔가를 떨구는 바람에 구르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면 다람쥐 통의 절반도 즐길 수 없게 된다.
문득 남의 즐거움을 엿듣는 것만으로도 이곳을 지키는 일에 어떤 실감이 생기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내가 직접 웃지 않더라도, 그들의 공기를 함께 호흡함으로써 내 실체의 채도가 몇 단계쯤은 또렷해지는 것 아닐까. 하루에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선명함이 10이라면, 오늘 같은 날은 한 5 정도의 단계를 얻은 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의 시선도 머물지 않는 나의 윤곽이 너무 무력하게 사라져 버릴 테니까.
커플은 솜사탕을 하나씩 들고 유원지를 나섰다. 지난주에 왔던 가족보다 훨씬 밝은 표정이었다. 설탕을 잘게 부숴 두어 다행이었다. 이젠 불을 끌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기대감이 섞이지 않은 기다림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 올 순간보다 오지 않을 순간들을 떠올리는 게 몇 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 유원지를 지키는 일에는 그런 텅 빈 시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손님을 맞는 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우연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시간을 끝까지 견디는 게 내 역할이었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
자정을 앞두고 유원지의 불을 껐다. 바닷물이 차오르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육지 쪽으로 걷는 동안 내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가끔은 고개를 돌려 불 꺼진 어두운 유원지를 보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그게 내가 만든 원칙이었다. 모래섬을 빠져나갈 땐 어둠을 돌아보지 않기. 왜냐하면 영영 오기 싫어질 수도 있으니까.
마을버스가 끊긴 시각, 지하철역에서부터 걸어 천변에 도착하면 이미 새벽이었다. 동네는 깜깜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오래된 가로등이 어슴푸레한 빛을 냈다. 주변만 겨우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익숙한 길이라 문제 되지 않았다.
나는 늘 개천을 왼쪽에 두고 걸었다. 오른쪽엔 이제 더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 가게 간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속도를 내지 않고 걸으며 그 간판들을 소리 내어 읽어보곤 했다. 원앙 주단, 한양 지물포, 태양 석유, 초원 목공소, 백송 얼음, 동양 포목상회. 아스라이 멀어진 단어들을 발음해 보면 왠지 모든 게 또렷해졌다. 한 번도 영업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이 동네는 두 번 버려졌다. 처음엔 세상의 무게 중심이 주변의 큰 도시로 기울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리석게도 이즈음 건물을 지었다지. 두 번째는 가까이에 신도시가 생기고 지하철이 뚫렸을 때였다. 등잔의 바로 밑처럼 교통의 흐름도 자본의 시선도 이곳을 비껴갔다. 흔적만 남은 가게들은 대부분 녹이 슨 셔터로 가려져 있거나 빨갛게 엑스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낮엔 꽤나 을씨년스러운 풍경인데, 오히려 새벽엔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늦어 문을 닫았을 뿐이라고 멋대로 상상해도 괜찮았다. 그 상상 속에서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로와 활기 넘치는 상점들이 선명했다. 반짝이던 시절이 눈앞에 살아났다.
다음 달부터가 문제였다. 이 길은 지는 해에 황량함을 드러낼 테고, 나는 걸음마다 쓸쓸하겠지. 몰락이 내 등 뒤에 차례로 내려앉는 기분을 안고 바쁘게 이 길을 벗어나 출근하겠지. 무심코 개천 건너편 길을 넘겨다보았다. 어둑하고 뿌연 빛이 띄엄띄엄 번졌다. 내 그림자가 저쪽에서 나와 같은 속도로 걸어주면 오직 발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텐데. 자꾸 쳐다보면 그림자가 우뚝 일어서서 걷기라도 할 것처럼 저쪽을 힐끔거렸다. 그 바람에 나는 한 번도 걸린 적 없었던 턱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바닷가 이정표 앞에 낯선 이들이 서 있었다. 흐린 날씨 속에서 두 사람의 샛노란 안전모가 유독 반질거렸다. 한 사람이 폴더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다른 한 사람은 주머니를 뒤적여 스카치테이프를 찾았다. 둘은 굼뜨면서도 부산스러웠다. 화살표를 덮네 마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어느새 둘이 힘을 합쳐 이정표 위에 테이프로 종이의 네 귀퉁이를 고정했다. 가뜩이나 ‘섬’ 자가 사라진 이정표인데 그들이 종이를 붙이자 나머지 글자들마저 가려졌다. 이제 아무것도 안내하지 않는 이정표나 다름없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어깨 너머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운영 중지 예정. 굵고 검은 글씨체로 깔끔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운영’이라고. 나의 일이 그렇게 표현되니 묘했다. 내가 가까이 있는 걸 몰랐는지 테이프를 담당했던 남자가 돌아서다 흠칫 놀란 기색을 보였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짐짓 태연히 돌아섰다. 마침 모랫길이 열리고 있었다.
유원지로 걷기 시작하자 뒤에서 그들이 다시 허둥지둥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십 미터 남짓 걸었을 때야 둘은 나처럼 모랫길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나와 거리를 좁히거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들이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앞만 보며 걷는 게 맞는 일인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꿋꿋한 침묵이야말로 이곳의 유일한 관리자로서 자리를 지키는 방법 같기도 했다. 유원지에 도착할 때까지 끝내 서로 외면한 채 긴장된 동행이 이어졌다.
입구에 다다라서야 그들은 살짝 속도를 높여 내게 따라붙었다.
현장 확인차 나왔습니다.
모랫길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던 그들이, 유원지에 도착하자 내가 여기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양 갑자기 말을 붙여왔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여기는 표정은 아니었다. 가벼운 인사라도 던지듯 형식적인 기색이었다. 공적인 업무이니 정당성을 갖췄다는 걸 알리고 싶었던 듯했다.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들은 곧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유원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손바닥만 한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철거 예정’이라고 빨간 글씨로 쓰여 있었다. 둘은 내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진지하게 시설물들을 관찰했다. 스티커를 붙이기에 적절한 위치를 고심하고 있었다. 빙 둘러 보고 허리를 굽혀 보고 한 발짝 물러나 멀리서도 봤다. 그 모습이 조금도 우스워 보이지 않았던 건 그들의 진지함이 내 일상의 질서를 찢기 시작했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을 내보내거나 뭐 하는 거냐고 따지지 못했다. 불쾌한 눈빛 정도는 보낼 수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게도 그들이 보이지 않는 듯 굴었다. 원래 하던 순서대로 유원지의 불을 밝히고, 기계들과 기구들의 전원을 눌러 하나씩 작동시켰다. 평소보다 손이 떨렸다. 내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은 안중에 없이 여기저기를 훑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에, 불현듯 이건 나만의 일이었을 뿐 누구의 허락도 없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그래, 난 유원지의 주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인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처음 이 버려진 유원지를 발견했을 때부터 그런 건 없었다. 그들도 알기 때문에 저러는 걸까. 기계들이 깨어나며 흐르는 멜로디에 울먹임이 섞이지 않았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내가 허락 없이 켰다는 걸 증명하겠다는 듯이 제멋대로 목청을 높였다. 나는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하며 스티커를 붙이는 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줄줄이 딸려 오는 불길한 상념들을 밀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일을 마치고 유원지 밖으로 사라진 후에도 속이 잔잔히 뒤틀렸고,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정표에 붙은 종이 때문인지 오늘은 단 한 명의 손님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런 날은 흔했지만 불안하고 화가 나긴 처음이었다. 샛노란 안전모가 무슨 권력이나 되는 것처럼 거리낌 없이 굴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잘 떼어지지도 않게 생긴 스티커를 아무 데나 붙이고. 타지도 않을 다람쥐 통을 그렇게 구석구석 살피고. 사람을 투명 인간 취급하고. 그들의 모든 행동이 다시 살아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되새김질이 자책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했다.
다음날 할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아스피린 두 알을 삼키고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몇 번이나 되풀이한 옛날 이야기였다. 국가 기능사 자격을 가진 사람이 드물던 시절,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고쳐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미 수도 없이 들었다. 어제의 일로 나는 예민해져 있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성가시게 들렸다. 최대한 듣지 않으려 마을버스가 다가올 방향으로만 귀를 세웠다.
한참 주절거리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나 싶어 흘깃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는 손으로 주먹을 만들어 자기 배를 꾸욱 눌렀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가 아픈 건가, 잠깐 생각했다. 그 순간 할아버지는 푸우 한숨을 길게 내쉬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결국엔 말이야, 모든 건 저물게 되어 있다구.
또다시 결국이라는 단어가 귀에 박혔다. 나는 아직 올 기미가 없는 마을버스 쪽을 향해 목을 길게 뺐다. 오늘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 정작 할아버지는 모든 게 결국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그냥 어느 순간이 오면 자연히 저무는 게 아니에요. 계획대로 움직여 무언가를 지워내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 계획에 대해 짐작도 못 하고 계시잖아요. 그런 말들이 차오르는 걸 속으로 눌러 삼켰다.
한참 만에 마을버스가 도착했다. 올라타려는 순간, 버스 뒷문으로 누군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서 내릴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날 찾아온 건 아닐 테니 그럼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걸까. 자리에 앉아 출발하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말쑥하고 단정한 옷차림에 검은 서류 가방을 든 채였고, 휴대폰을 들어 우리 건물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내 의자에서 일어나 그 남자에게 뭐라뭐라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보지 못했다. 버스가 곧 커브를 틀었기 때문이다. 나는 버스 뒤에 매달려서까지 그들을 지켜볼 용기는 없었다. 다만 안온한 일상에 침범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려고 머리를 손바닥으로 세게 몇 번 두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음날이었다. 할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집에 산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늘 앉아 있던 철제 의자는 접힌 채 전파사 문 앞에 기대어져 있었다. 아무도 없을 게 뻔한데도 괜스레 손으로 눈 위에 그늘을 만들고 전파사 안을 들여다보았다. 항상 할아버지가 버티고 앉아 있어 내부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유리 너머 공간은 빛이 닿지 않아 어두웠다.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기계와 물건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가장 안쪽 구석에 자그마한 책상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책상만은 어제도 작업을 했던 것처럼 말끔히 정리된 모습이었다.
하루가 더 지났지만 여전히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갔겠지. 애써 그렇게 믿어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앙상하고 오갈 데 없는 노인네가 여행을 간다는 게 애초에 가당키나 한가 싶기도 했다. 사실 나는 모종의 두려움에 조금씩 짓눌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의 순간이 사방에서 나를 포위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사흘째 아침, 나는 무거운 눈을 떴다.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먼저 머릿속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틀이나 안부를 확인하지 않아도 무사할 수 있는 노인의 나이란 대체 몇 살까지일까? 노인에게는 뇌졸중이나 심장마비, 폐렴 같은 위험한 병들이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그런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많을까? 80대일까, 아니면 이미 90대에 접어들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도 괜찮은 사이인가? 말을 하는 쪽은 매번 할아버지였지만 그것도 대화라고 친다면, 그럼 별일 없냐고 묻는 것도 가능한 사이인 건가?
누운 채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시간을 끌어보았지만 어떤 생각도 결론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겨우 이불 밖으로 나와 창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할아버지의 정수리가 보이지 않았다.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중압감에 떠밀리듯 2층에 들러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 집과 똑같은 현관문. 용이며 봉황이며 소나무며 오래 사는 것들이 잔뜩 장식된 어두운 갈색의 철문. 나는 그 앞에서 다시 망설였다. 문을 두드릴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안에 들어서는 순간,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돌이킬 수 없는 큰일까지 단번에 달려들 것 같아서였다. 내가 그걸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몰라 망설여졌다.
할아버지가 아스피린을 삼킬 때처럼 입안의 침을 모두 끌어모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세 번째 손가락 마디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의 청력을 감안했어야 했나. 이번에는 주먹을 쥐고 아까보다 세게 두드렸다. 여전히 조용했다.
차가운 금속 문에 귀를 가까이 댔다. 안에서 여자의 말소리가 어렴풋하게 새어 나왔다. 누구지? 목소리를 확인하려 몸을 더 밀착시켰는데 문이 안쪽으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잠겨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몸이 굳었다. 나는 애써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할아버지, 저 들어가요. 이렇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안에서 들릴 리 없었지만, 절차를 밟았다는 데 의의를 두며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기름칠이 잘 되어 있는지 조용하고 부드럽게 철문이 열렸다.
공이다. 거실 한가운데에 커다란 공이 있었다. 뿌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뿌연 햇빛. 반짝이진 않았지만 공은 그 빛에 충분히 빛나고 있었다. 거실 구석에 놓인 라디오에서 여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우리는 모두 타인의 신호를 알아채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겠죠?
나는 천천히 공에 다가섰다. 평소 입던 낚시 조끼를 그대로 입은 채 동그랗게 웅크린 모습. 팔다리를 안으로 한껏 끌어모은 자세가 기이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할아버지가 결국의 너머로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비운 자리에는 툭 치면 데굴데굴 굴러갈 것 같은 공 하나만 남겨졌다.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할아버지의 얼굴이 낯설었다. 다람쥐 통 안에서 정신없이 구르면 이런 표정이었을까.
마을버스에서 내렸던 남자의 단정한 뒷모습이 문득 눈앞을 스쳤다. 그자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자가 할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었다. 검은 서류 가방을 들고 이 건물 사진을 찍던 그자가. 온몸에 소름이 돋고 뒷머리가 한 올 한 올 일어섰다. 심장이 귓구멍으로 비어져 나올 것처럼 크게 울리는 바람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었다.
순간 할아버지의 조끼 윗주머니에서 열쇠 하나가 삐져나와 있는 게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신중하게 그걸 챙겼다. 경찰과 구급대가 도착해 공식적으로 사망을 확인하는 동안, 나는 여전히 요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주머니 속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조그만 쇳덩이에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 자꾸만 쥐었다가 놓았다.
일주일쯤 지나 경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무연고자였지만 최초 신고자에게 결과를 통보할 필요가 있는 모양이었다. 부검 결과 할아버지의 사인은 십이지장 천공에 의한 복막 감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십이지장에 구멍이 뚫렸다는 말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경찰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원인은 다양합니다. 만성 염증이었을 수도 있고, 궤양이었을 수도 있고요. 오랜 기간 소염진통제를 복용하신 경우도 종종 있고, 외상성은 이 경우엔 해당 안 되겠죠.
내 침묵과는 무관하게 경찰은 짧은 숨을 들이켠 뒤 덧붙였다.
통증이 시작되었을 때 병원에 갔으면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시기를 놓치고 방치된 거죠. 혼자이신 분들이 이래요. 아마 고통이 굉장했을 겁니다.
짤막한 통화가 끝난 뒤 나는 멍해졌다. 뭐야. 무슨 말을 하려던 거야. 나 때문에 이렇게 되기라도 했다는 거야? 할아버지의 생을 앗아간 사람은 따로 있는데. 할아버지의 사인이 고작 그런 것들일 리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고통을 수신하지 못한 나의 무신경함이 할아버지를 죽인 셈이 되니까.
그자의 모습을 찬찬히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할아버지는 그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대화 끝에 자연스럽게 집에 들어가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내가 본 그대로 건물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굴었겠지만 곧 목이 마르다거나 가스 검침을 나왔다는 거짓말을 했겠지. 노인들은 단정한 옷차림을 한 사람의 말은 신뢰하고 본다. 손에 들려있던 검은 서류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나는 커다란 주사기를 상상했다. 크고 두툼한 주사기에서 기다란 바늘이 나온다. 마치…… 안테나. 라디오에 달린 안테나처럼 길게 늘어나는 바늘이다. 그가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 가방에서 몰래 주사기를 꺼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었다. 그러고는 사냥감의 빈틈을 노리는 맹수처럼 침착하게 때를 기다리고, 기다렸겠지. 마침내 마주 보는 순간 흐트러짐 없이 할아버지의 배에 기다란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을 거다. 정확히 어디를 노려야 하는지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십이지장에 치명적인 구멍을 내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조금씩 복강에 흘러나오도록. 부검의는 결코 주사기 따윈 떠올리지 못할 테니까. 그저 혼자 사는 외로운 노인네가 운이 나빴을 뿐이라 여기고 꼼꼼히 보지 않았겠지.
이건 분명 계획에 의한 일이었다. 오래되고 무가치한 것들을 지워내려는 계획. 그 안에 할아버지도 포함된 것 같았다. 그런데 계획이란 건 대체 누구의 것일까. 모든 것이 낡아가고 부서지는 이 세계가 이미 계획 그 자체인 건 아닐까. 불현듯 누군가 내 배에 구멍이라도 내는 것처럼 예리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주먹으로 배를 누르고 그자가 할아버지를 쓰러뜨린 후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는 데 몰두했다. 마주한 적 없는 그의 이목구비가 점점 또렷해졌다. 그건 공포에 가까웠다.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할아버지에게 일어난 일과 그자의 얼굴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을버스가 집 앞까지 운행하는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엔, 이 일은 예정된 순서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무덤덤하게 앞만 보고 있는 기사에게 나는 용기 내어 말을 걸었다.
혹시요, 지난번에요…… 여기 정류장에서 어떤 사람이 내리는 걸 보셨을까요. 제가 탈 때 그 사람이 내렸거든요.
내가 말을 거는 것이 처음인데도 기사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심상한 표정으로 입술을 들썩이더니 핸들을 크게 회전시키며 말했다.
글쎄요. 어떻게 손님들을 다 기억합니까. 그것도 한참 전 손님을.
천변의 직선 구간으로 접어들자 기사는 한 손만 핸들에 걸쳐둔 채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더 대화할 의지가 없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기사와의 만남은 오늘이 마지막일 텐데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게 어딘가 씁쓸했다. 그렇다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든가 ‘이것 참 아쉽네요’ 같은 친근한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심하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자리를 잡았고, 일부러 더 그 남자 생각에 몰두했다. 그가 할아버지의 배에 구멍을 내는 장면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날카로운 바늘만이 내가 읽어내지 못한 신호를 대신할 유일한 진실이어야 했다.
내 추측이 맞았다. 이건 전파사 열쇠였다. 열쇠가 구멍에 저항 없이 들어가고, 경쾌한 소리로 잠금이 풀렸다. 가둬두었던 할아버지의 시간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스스러움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동시에 차올랐다.
왜 열쇠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평소 할아버지가 내게 전파사를 물려주고 싶다고 한 적도 없었거니와, 나 역시 이미 하고 있는 일이 있었으며, 고인 대신 이곳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천천히 유리문을 열자 머리 위에서 기계음으로 만들어진 경박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오래되어서인지 찌그러진 듯 들렸지만 분명 ‘고향의 봄’이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나는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몇 번 문을 여닫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멜로디가 노래의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반복되었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하는 부분은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수선한 실내로 들어섰다. 무수한 물건들이 사방에 쌓여 있어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황하던 시선이 멈춘 곳은 역시 작업 책상이었다. 깡마른 할아버지라면 쉽게 드나들었을 통로가 내겐 버거웠다. 숨을 들이마시고 옷자락이 물건을 쓰러뜨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몸을 감쌌다. 가까스로 책상 앞에 도착해 등받이 없는 동그란 나무 의자에 앉았다. 스탠드 조명의 스위치를 누르자 오렌지빛이 책상을 환하게 밝혔다. 앞에는 여러 권의 수첩이 꽂혀 있었다. 그중 하나를 손이 닿는 대로 꺼내 펼쳤다. 끝이 뾰족하고 휘갈겨 쓴 글씨라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군데군데 숫자가 보이는 걸 보니 거래의 흔적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이 자리에서 일했단 말이지. 이렇게 좁고 불편한 책상에서. 밝은 스탠드 조명 아래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겠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전파사를 드나들었다고 했으니. 옷자락을 여미며 좁은 통로를 지나 고장 난 물건을 내밀었을 사람들. 그들은 이제 모두 저 동네에 있는 걸까, 할아버지의 말대로 결국엔.
언제나 구부정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도 다리를 꼬고 책상에 팔을 괴었다. 저절로 등이 굽었다. 할아버지와 닮은 자세로 이 자리에 있으니 그가 끝내 뱉지 못하고 삼켰을 말들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다시 스탠드를 껐다. 불이 꺼지자 어둠 속에서 비로소 전구의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유원지를 밝히는 조명의 전구와 똑같은 것이었다. 한동안 신경 쓰이던 입구 쪽 꺼진 조명이 떠올랐다. 나는 어쩌면 이걸 가지러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던 마음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소매를 길게 늘어뜨려 전구를 잡고 조심스럽게 돌렸다. 그리고 굴러다니던 천 조각을 주워 전구를 감싸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어 허벅지가 따뜻했다.
마을버스는 이제 오지 않았다. 철제 의자에 앉아 일방적인 수다를 떠는 할아버지도 없었다. 나는 그림자가 지지 않는 천변을 오래 걸었고, 땀으로 흥건한 주먹을 쥔 채 지하철을 타고 바닷가에 도착했다.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운영 중지 예정’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던 이정표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섬’ 자가 지워졌던 그 표식조차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제 이곳을 원래 알던 사람이 아니라면, 이 지점에서 모랫길이 열리고 그 너머에 유원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란 영영 불가능해 보였다. 임시로 어딘가에 표시해두고 싶었지만 마땅한 도구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길을 기다렸다.
하늘이 어두운 오렌지빛으로 부풀었다. 바닷물이 조금씩 밀려나며 모랫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유난히 폭이 넓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인가. 그러고 보니 저 앞 하늘에 아직 온전히 떠오르지 않은 달의 테두리가 보였다. 동그랗고 선명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온기가 사라진 전구를 매만지며 모랫길을 걸었다. 오히려 내 체온으로 그것을 데우고 있는 듯했다. 동그란 모양을 손끝으로 더듬다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소리 내어 부르는 노랫말은 기계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갖는 듯했다.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거센 파도처럼 일렁였다. 빠져나갔던 바닷물이 기어이 되돌아오듯, 미뤄두었던 시간과 감정들이 때가 되어 한꺼번에 내 안에 도달한 것 같았다. 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지, 안 돼. 나는 내 할 일을 해야 했다.
수명이 다한 전구가 어느 것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이곳을 가장 잘 아는 건 나였으니 당연했다. 육지 쪽을 바라보고 서서 입구 오른쪽 네 번째 전구. 나는 그것을 풀어내고 할아버지의 전파사에서 가져온 것으로 갈아 끼웠다. 불을 켰을 때 다른 전구들과 정확히 같은 빛을 낼지 궁금했다. 나란히 매달린 전구들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언젠가 이 장면을 떠올리게 될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밟고 올라섰던 상자에서 막 내려오던 찰나 멀리서 요란한 차 소리가 들렸다. 입구로 나가자 여러 대의 차량이 보였다. 굴삭기와 덤프트럭, 로더가 모랫길을 따라 줄지어 오고 있었다. 철거 차량들이었다. 차체의 무게 탓인지 평탄하고 고르던 모랫길이 엉망으로 패이고 있었다. 물 먹은 모래 위로 고무바퀴가 퍽퍽하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배에 날카로운 통증이 도졌다.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차량들은 굉음을 내며 가까워졌지만 조급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나는 웅크린 자세로 재빨리 유원지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왜 이 유원지에는 입구를 막을 철문 하나 없는 걸까. 차가 들이닥치는 걸 막을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이 허술한 유원지는 모래처럼 사라져 버릴 게 뻔했다. 점 보는 기계 뒤에 몸을 숨겼다.
선두에 오던 트럭이 멈춰 서자 그 뒤로 철거 차량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트럭 조수석에서 한 사람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내렸다. 그가 땅을 딛는 순간 내 배의 통증이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심해졌다. 그자였다. 마을버스에서 내렸던, 할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바로 그 남자.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유원지에 그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계획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땐 할아버지였고, 이번엔 내 차례겠지. 그의 손에 서류 가방이 들려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커다란 주사기를 어디에 숨겼을까. 뒷주머니? 허리춤? 소매 안? 나는 점점 몸을 낮추고 그자의 움직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눈앞의 사물이 점점 확대되었다. 통증을 억누르려니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자가 열린 트럭 문 안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유원지를 크게 한 번 눈으로 훑었다. 날카로운 눈이었다. 시선에 잘 벼린 날이 서 있는 듯했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단 한 번에 모든 걸 판단하고 서슴없이 계획을 행동에 옮길 사람처럼 보였다. 숨을 꾹 참았다. 내장이 오그라드는 고통이 일었다. 내 몸에도 기어이 구멍이 난 것일까. 자꾸만 무언가 새어 나오는 것 같아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유원지 전체에 불을 밝히는 전원 스위치로 달려갔다. 인기척을 감지했는지 그자가 내 쪽을 향해 홱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안쪽부터 작업합시다.
그자가 크게 외쳤다. 내가 들어야 한다는 듯이. 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모아 조명 스위치에 올렸다. 차가운 금속 위에 내 체온이 옮겨 갔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입에 달고 살던 수많은 결국을 모조리 머릿속에 펼쳐놓았다. 그리고 지금이 빛을 밝혀 내가 여기에 있음을 알려야 하는 순간인지, 아니면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 순간인지 판단하려 애썼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떠오른 보름달이 내 그림자를 짙고 선명하게 새기고 있었다. 결국 나는 모래 위에서 저물어간 것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안전한 시선 속에 내지르던 어린 나의 목소리, 힘겹게 아스피린을 삼키던 목의 움직임, 끝내 다음 구절로 이어지지 않는 멜로디와, 자취를 감춘 ‘섬’이라는 글자까지.
딸깍 소리와 함께 스위치를 누르자 온 세상이 밝아졌다. 갈아 끼운 전구가 정확히 같은 빛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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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기 연습그만두기 연습 차현지 올리브는 무언가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때마다 적외선 치료기의 빨간 불빛을 떠올리곤 했다. 훈련이 끝나면 이비인후과에 가서 대기실 벽 한쪽에 나란히 걸려 있던 길쭉한 원통형 기계의 전원을 켰다.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수화기를 들 듯 치료기를 한쪽 귀에 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염증으로 늘 귓구멍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뜨겁고 날카로우며 압력이 가득 차는 듯한 통증은 아직도 생생했다. 언젠가 잠수 훈련을 하던 날이었다. 손가락으로 모자이크 타일을 하나씩 짚을 수 있을 만큼 수영장 바닥 가까이 내려가 잠영하던 중, 갑자기 퍽 소리가 나면서 뭔가가 찢기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얼마 안 있어 수경 너머로 연한 선홍빛 액체가 서서히 퍼지는 것이 보였다. 올리브의 오른쪽 귀에서 난 출혈이었다. 몸을 밀어 올려 수면 위로 향하는 아주 짧은 순간에 올리브는 생각했다. 이제 더는 지금처럼 수영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즈음 올리브는 사춘기에 막 접어들었다. 하루에 많게는 반나절 가까이 물속에서 체력을 다 소진한 탓에 베개에 늘 침 자국을 잔뜩 내며 꿀잠에 들곤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잠에 드는 것이 어려웠다. 누우면 자꾸 잡생각이 났다. 하계 수련회에 갈 때 버스는 누구랑 같이 타지. 정혜는 짝을 구했나. 왜 나는 단짝 친구 하나 없는 거지. 이게 다 수영 때문이야. 아, 수영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면 금세 자정이 가까워졌다. 훈련하느라 올리브는 늘 혼자였다. 친구들이 모닝글로리에 가서 샤프펜슬을 살 때도, 삼삼오오 모여서 만화를 그릴 때에도 올리브는 그들 사이에 끼지 못했다. 심지어 같이 수영을 시작한 친구들이 샤워실에서 그녀를 못 본 척 짝지어 수영복 물기를 짜고 있을 때도. 넌 선수반 갔잖아, 이제 우리랑은 못 놀지. 그 애들이 샤워실 밖으로 나갈 때까지 올리브는 연신 샴푸질을 했다. 거품이 많아져 눈꺼풀에까지 흘려내려도 쓱쓱 닦아내면서. 그러고는 아무도 없을 때 수영복의 물기를 짰다. 너무 많이 짜서 손아귀가 얼얼할 만큼. 됐어, 혼자여도 괜찮아, 까짓거. 주문을 외듯 혼잣말을 하면서. 올리브는 물속에 있는 것보다 물 바깥의 생활이 더 갑갑했다. 레인 안에서 일렬로 쭉쭉 직진, 턴, 직진, 턴만 하면 되는 반복적인 훈련이 그리웠다. 오로지 숫자와 기록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사회적 교감 따위 없는 속 편한 물속이. 너무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면 올리브는 심야 라디오에 편지를 썼다. 직접 손 글씨를 쓰며 사연 받을 주소를 불러주던 디제이가 더듬더듬 영…등…포구…… 여의…도…동…… 하며 나직하게 말을 이을 때면 올리브도 똑같이 편지지 봉투에 주소를 또박또박 적곤 했다. 사연이 채택되지는 않았다. 중학생은 너무 어리단 건가. 그래서 다음엔 대학생인 척 보내보았다. 봄이 되면 새내기 대학생들 사연을 자주 읽어주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올리브는 성별과 직업을 바꿔가며 계속 사연을 보냈다. 우푯값이
- 차현지
- 2026-05-01
문장웹진 소설
우릴 떠난 채식주의자와 불을 끄는 돼지들우릴 떠난 채식주의자와 불을 끄는 돼지들 김아인 1 산길의 고지를 넘자, 훅 안개가 끼는가 싶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권은 전조등을 상향으로 바꾸고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밤 기온이 뚝 떨어지는 늦여름이면 곧잘 있는 일이었다. 권은 턱을 당기고 운전대를 단단히 잡았다. 좁은 2차선 도로에 굴곡마다 급커브를 도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늦은 새벽에 비까지 더해지면, 아무리 익숙히 오가는 길이라 해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권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시 반이었다. 이대로면 집에 들어가는 건 세 시나 되어서일까. 권은 어금니를 맞붙이며 나오는 하품을 흘려보냈다. 왠지 평소보다 몸도 찌뿌둥하고, 눈도 뻑뻑한 기분이었다. 권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걸어가든 기어가든, 일단 굴러가곤 있다는 게 중요했다. 회사 차량─주행거리 36만 킬로미터의 다마스 트럭이 말썽을 피우거나, 도로가 끊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권은 눈살을 찌푸렸다. 축축한 기억 하나가 머릿속 깊은 곳에 얽혀있는 배관 속을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 지나갔다. 권은 그것이 뒤로 남긴 끈끈한 발자국을 되짚어 다시 한번 그 냄새와 습기를 떠올려냈다. 그리고 자신이 그걸 잊고 있었던 게 아니라, 단지 그 무게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2 권의 별명은 권이었다. 권. 태극권. 영춘권. 북두의 권. 사실 그가 다니는 곳은 주먹질과는 거리가 먼 유도 도장이었지만, 또래 아이들에겐 별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권이었고, 전혀 다른 곳에 가도 권이었고, 유도가 뭔지 알 만큼 아는 이들 사이에 속해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는 권이었다. 권이 유도를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열여섯은 선수를 목표로 하고 운동을 시작하기에 이른 나이는 아니지만, 그에겐 소질이 있었다. 우선 신체적 조건이 좋았다. 체격이 크고, 힘과 유연성이 좋았다. 처음 찾아간 도장의 관장이 한 말에 따르자면 균형감각이 굳세고 순발력도 탁월했다. 하지만 진짜 소질은 따로 있었다. 권은 상대 선수의 사전정보를 바탕으로 전략을 짜거나 여러 파훼법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아도, 본능에 따라 승리를 위한 최적의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관장은 그걸 두고 재능의 영역에 있는 감각이라고 말했다. 머리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이 그런 본능적인 감각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란 거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너는 생각하기 시작하면 굼떠져. 알겠어? 그 순간의 판단을 믿고 바로바로 움직이라고. 너는 그게 맞아.” 권은 그 말을 따랐다. 그는 반년 만에 청소년부를 떠나 성인부에 들어가게 됐고, 일 년이 좀 더 지나선 체급과 나이를 통틀어 지역 내에 붙을 만한 상대가 없게 되었다. 다른 학교나 시설, 다른 지역과의 교류를 할 때도 주목받을 만큼 두각을 드러냈다. 관장은 권을 자랑스러워했고, 권도 자부심을 느꼈다. 추천으로 체육대학에 입학한 후, 권은 더 많은 시간을 유도에 쏟아부었다. 자잘한
- 김아인
- 2026-05-01
문장웹진 소설
보희보희 공현진 * 아이돌을 넘어 훗날 국제 영화제를 휩쓸며 글로벌 스타가 될 연습생 보희는 세 달 넘게 생리를 하지 않았다. 네 달이었나? 가물가물한 만큼 보희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체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다. 두 달을 넘기기는 예사였고 반년 가까이 생리를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에 대해 불안하게 여겨본 적은 없었다. 보희를 불안하게 하는 건 피 따위가 아니었다. 일주일 단위로 레벨 테스트가 치러졌고, 월말마다 방출과 잔류가 결정됐다. 노래와 춤 연습을 치열하게 하는 건 당연했다. 땀은 흘리되 먹지는 않아야 했다. 탄수화물이 극도로 제한된 식단을 유지했다. 습관이 되어 어렵진 않았지만 간혹 컵라면이나 순댓국 같은 게 불쑥 머릿속을 떠다니면 명상에 들어갔다. 소용없으면 밖으로 나가 달렸다. 가로수와 반짝이는 건물들과 주인을 앞지르는 개들을 지나며 달렸다. 토할 때까지 달렸다. 먹은 게 없어도 몸 안에서 쏟아지는 것들이 있었다. 몸 안에 들인 적 없는 것 같은 토사물을 확인하며 보희는 안도와 두려움을 느꼈다. 반신욕을 하며 두려움도 몸 밖으로 쫓아내고자 애썼다. 피곤도 근심도 없어 보이는 맑은 피부를 위해. 살면서 노력이 배신당하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속상하고 억울해도 별수 없다. 세상은 노력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다행히 보희는 노력이 배신당하지 않는 특별한 쪽에 속했다. 타고난 능력도 있었다. 아름다운 몸, 보희는 자신의 몸이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을 알았다. 간혹 몸을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 운운하는 이들도. 보희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잠시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엾게 여기지 않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보희 역시 몸은 껍데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껍데기라 하여 왜 중요하지 않은가. 외면과 내면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보희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곤혹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열여섯 살의 보희는 특출나게 아름다웠다. 저녁이 되어 소속사 근처 샐러드 가게에 가면 가게 사장은 보희가 세계적 스타가 될 거라고 단언했다. 사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이 걸어오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수많은 연예인을 보았지만 보희가 뿜어내는 찬란한 빛은 본 적 없다고 말했다. “얼굴에 아무것도 하지 마. 네 나이 때는 네가 얼마나 예쁜 줄 모르겠지만 말이야.” 보희는 소스를 뿌리지 않은 샐러드를 먹으며,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은 사장의 말에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 보희는 모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어리고, 얼마나 예쁜지. 보희는 꽤 객관적으로 자신의 외모와 매력을 판단했다. 자기 객관화가 상당했기에 자신감과 불안이 함께했다. 소속사에서 가상으로 데뷔 그룹의 조합을 짤 때마다 늘 그 안에 들어갔다. 대개 메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다고 보희는 과도한 자신감으로 자신을 망치지 않았다. 그런 어리석음으로 결국 이
- 공현진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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