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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4

  • 작성일 2026-06-01

  용4


민병훈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면 창문 너머로 은빛 알루미늄 패널들이 보인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공사 중이고, 나는 밀리오레 건물 12층에서 그것을 늘 아래로 내려다본다. 직선이 없는 곡선으로만 채워지는 비정형의 패널들을 보며 완성된 모습을 상상한다. 거대한 우주선이 되어 사람들을 싣고 날아가는 게 아닐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얼마 전 일을 그만둔 사람은 유니폼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은색이 뭐야, 갈치 같잖아. 나는 창밖으로 태양 빛에 반사되는 패널과 거울 속 유니폼을 번갈아 본다. 무전기를 챙겨 탈의실을 나선다.

  이어폰을 귀에 꽂자마자 용1이 용14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야, 대답 안 해?

  같은 층에 배정받은 용13이 대신 다급하게 대답한다.

  배터리 교체 중입니다.

  용15부터 용1까지, 수신 상태를 체크하고 현재 위치를 보고한다. 무전을 할 때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내 차례에서 나는 발음을 조금 흘린다. 용5니까. 용5가 될 때까지 삼 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나는 경륜 경기를 송출하는 브라운관의 전원을 켠다. 희망나눔 전자카드를 손에 쥔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창구와 가까운 자리에 앉기 위해 항상 우리보다 더 일찍 도착해 줄을 선다. 객장에서도 건축 현장이 보인다. 커다란 크레인이 패널을 지붕에 안착시킬 때 금속성의 타격음이 무전기의 노이즈와 함께 겹쳐 들려온다.

  용1이 개장, 이라고 소리친다.


  또 왔어요.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용9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한다.

  가면 난리 친다. 멀리 있어.

  폐장 직전 큰돈을 걸었다가 잃고는 의자를 던지며 난동을 부린 적이 있다. 그때 나를 포함한 세 명의 보안요원이 그를 엘리베이터로 끌고 갔다.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자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나는 볼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닦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쫓아낼 때까지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팀장은 손수건을 건네며 내게 참을성이 좋다고 말했다. 이런 일은 잘 참아야 돼. 침을 닦자 손수건에서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약 있는지 확인해.

  생수통에 소주를 담아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약이라고 부른다. 식당가에서 밥을 먹다가 가방에서 소주를 꺼내 몰래 컵에 따라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다. 은갈치 같은 새끼들. 우리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말하곤 그날은 객장에 오지 않았다. 나는 용9를 불러 그가 앉은자리를 확인하라고 말한다.

  노란 걸 마시던데요.

  건물 앞에서 아침에 무료로 나눠준 음료일 것이다. 명절을 앞두고 본부에서 직접 기획한 행사였다. 계속 주시하라고 말한 뒤 객장을 천천히 돌아본다. OMR 구매표와 컴퓨터 사인펜을 손에 쥔 사람들이 고개를 젖혀 브라운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배당판이 움직인다. 단승과 연승, 복승과 쌍승의 배당률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화면에 표시된다. 이번 경기는 쌍승식 역배당에 배당률이 높게 형성된 것 같다. 이제 곧 바닥에는 베팅에 실패한 경주권이 쌓일 것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쌓인 경주권들을 밟으면 꼭 낙엽 위를 걷는 것 같다.


  오늘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된다. 초조하게 구매표를 만지작거리다가 마감 직전 창구로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로 그들이 말한 사람이 보인다.

  한눈에 알아볼 거야.

  며칠 전 청계6가 사거리에 즐비한 포장마차에서 용15의 환영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자정이 넘어가자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이지 않았다. 더 마시러 가자는 직원들의 제안을 거절한 채 술을 깰 겸 걸었다.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에 옷을 여미며 공사 중인 현장을 지나는데 문득 휴게실에 가방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1이 신경 쓰였다. 그는 누구라도 트집을 잡아야 근무 시간을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운동을 전공했거나 보안 업무를 한 이력이 있는 사람들만 모인 공간에서 어떤 식으로는 우위에 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그가 택한 방식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도 죄송하다고 말해야 그 시간이 끝이 났다. 한번은 장염에 걸려 전복죽을 배달시킨 직원이 있었는데 너 혼자만 입이냐며 점심시간 내내 그를 괴롭혔다. 결국 참지 못한 그는 아픈 게 죄냐고 소리를 질렀다가 휴게실 밖으로 끌려 나갔다. 

  언젠가 내가 건축학 전공 서적을 읽는 걸 보곤 왜 어울리지도 않는 곳에 왔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다른 애들보다 더 눈여겨볼 거라고. 책을 또 꺼내면 찢겠다고. 마침 그 책이 가방에 담겨 있다.

  건물 앞 야외무대를 지날 때였다. 누군가가 내 등을 툭 쳤다. 식당에서 약을 마시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등산복을 입고 있어서 우리끼리 응봉산산악회라고 불렀다. 한동안 보이지 않아 다른 지점으로 옮겼나 싶었다. 객장에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들. 언제부터 이곳에 다녔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입으니까 몰라보겠네.

  그거 봐, 내 말이 맞다니까.

  맞지? 여기 위에서 일하는?

  그들은 부탁이 있다며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것이다. 가방을 두고 오지 않았다면. 막차까지 여유가 없었다면. 그들이 술에 취하거나 비탄에 빠진 게 아닌 생동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지 않았다면.

  부탁은 간단했다. 자신들이 말하는 사람을 여기 주차장까지만 데려다 달라는 거였다.

  누군데요.

  내일 마지막 경기 때 돈을 제일 많이 버는 사람.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알아. 사람이 정해졌어.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돈이 가장 많이 몰리는 마지막 경기 때 고배당이 터지는 일이. 200배 이상의 돈을 가져간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고액 환급자라고 부르는데 다른 사람들이 시비를 걸거나 차비를 달라는 일이 많아 건물 밖으로 나갈 때까지 안전을 확보해줘야 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모범택시에 타며 내 바지 주머니에 돈을 넣은 적도 있다.

  택시를 타겠죠. 주차장에 왜 오겠어요.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지.

  안 하고 싶은데요.

  별안간 눈이 따가웠다. 야간 작업이 한창인 공사 현장의 허공에서 주황빛 크레인 조명이 반짝였다.

  당신네 제일 고참. 우리 시켜서 경주권 사는 거 알아?

  직원이 경주 배당에 참여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사실이 알려지면 퇴사 사유가 될 것이다. 용1이 다 구겨진 경주권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몇 차례 본 기억이 있다. 청소하다가 주웠거니 했을 뿐 직접 경주에 참여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회사에서 나가면, 나는 자연스럽게 용4가 된다. 용1부터 용4까지는 객장에서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고 상황실에 앉아 지시한다. 정규직이 되므로 임금을 두 배 이상 받기 때문에 웬만해선 자리가 나지 않았다.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모두가 용1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나는 처음 출근한 한 달 내내 매일 뒤통수를 맞았다. 목소리가 작아서, 넥타이가 삐뚤어서, 창구에서 일하는 이모님과 대화해서, 가격이 싼 구두를 신어서.

  문자 주고받은 거 줄게.

  여기 데려오면 뭘 하려고요.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훔칠 거예요?

  나는 우스갯소리로 말했는데 반응을 영 알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라 그래.

  받을 것도 있고.

  같이 택시 타고 갈 거야.

  은색 패널이 안착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어떤 자리에 빈틈없이 꽉 들어맞는 듯한 소리가.


  지폐 계수기가 끊임없이 돌아간다. 사람들은 모두 창구를 바라보고 있다. 응봉산산악회가 말한 것처럼 노란 점퍼를 입은 사람이 창구 앞에 서 있다. 주위가 조용하다. 몇 분 동안 멈출 줄 모르고 돌아가는 지폐 계수기를, 사람들은 저마다의 감정을 담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부러움? 질투? 살기? 그들의 눈빛을 읽는 일이 가장 흥미로운 순간이다.

  용15. 새끼야. 엘리베이터 빨리 안 잡아?

  넋을 놓고 창구를 바라보던 용15가 무전을 듣곤 객장 밖으로 뛰어간다. 용1도 곧 객장에 모습을 보일 것이다. 창구 이모님은 떡집 상호명이 적힌 가방에 돈을 담는다. 목돈이 들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팀장이 낸 아이디어였다.

  용5. 채널 돌려.

  개인 채널로 용1이 나를 부른다.

  오늘 응봉산산악회 봤어?

  아니요.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관둔다.

  다른 애들 말고 네가 직접 저 사람 챙겨서 내려가.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다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용10과 용12를 부른다. 가방을 든 그에게 다가간다. 얼마나 꽉 쥐고 있는지 가방을 움켜쥔 손가락들이 하얗게 질려 있다. 멀리서 팀장과 용1이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다. 귀가가 확인되면 팀장이 직접 지점장에게 보고할 것이다. 노원 지점만 이기면 된다는 지점장의 입버릇을, 팀장은 조회 때마다 직원들에게 전했다.

  사람들이 옆으로 비켜선다. 그를 가운데에 두고 나는 앞에서, 다른 직원들은 옆에서 걷는다.   시선들이 따갑다 못해 아프다. 1층으로 곧장 향하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잡아둔 용15에게 이제 객장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문이 닫히자 그는 막혔던 숨을 토하듯 뱉는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도로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용12이 대답한다.

  조용히 해.

  용10이 앞을 보라고 지시한다.

  아래에도 사람들이 기다리는 거 아닙니까? 세 명으로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최대한 별일이 아닌 것처럼 반응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그리 큰일도 아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돈을 벌었고 안전한 곳으로 가는 중이다. 이 상황 뒤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다. 주차장까지 그를 안내한 뒤 증거를 받은 후에는 천천히 생각해볼 예정이다. 용1이 하루라도 빨리 사라지면 좋겠지만, 나는 그 시간이 더디게 가길 바란다.

  문이 열린다. 영업이 끝난 상점들을 지난 뒤 건물 정문에서 걸음을 멈춘다.

  담배 한 대씩 피우고 올라가.

  혼자 가려고요?

  여럿이 유니폼 입고 다니면 여기 돈 있다고 티 내는 것 같잖아.

  용10이 용12의 팔을 붙잡고 사라진다. 나는 도로가 있는 방향이 아닌 주차장을 향해 걷는다.

  미리 택시 불렀어요.

  그는 주위를 살피며 걷는다. 이제 모퉁이를 돌면 곧장 주차장이 나올 것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주차장을 가리킨다. 그는 이제 달리기 시작한다. 나도 몇 걸음만 걸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겠지만 가지 않는다. 오늘은 공사를 멈췄는지 현장이 조용하다. 건축물의 검은 윤곽만 보인다. 상의 옷깃을 들어 올려 마이크에 대고 말한다.

  용5 송신. 팀장님, 상황 종료됐습니다.

  휴대폰으로 몇 장의 사진들이 전송된다.


*


  처음 일을 소개해준 형은 말했다.

  너 사람이 돈을 잃으면 눈빛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

  나는 삼겹살에 붙어있는 비계를 자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발바닥에 못이 찔리지만 않았어도 다른 일은 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형은 살점을 몇 점 먹고는 젓가락으로 내 눈을 가리켰다.

  가운데 까만 거, 이걸 뭐라고 하지?

  동공.

  그게 흐려지더라니까. 꼭 물을 섞은 것처럼.

  그래서?

  그런 사람만 잘 살피면 된다고. 그럼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야.

  형의 말은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

  나는 지금 형이 말한 눈빛을 가진 사람과 마주 보고 있다. 멱살을 붙잡힌 채. 까만 동공이 회색으로 보일 지경이다. 셔츠 단추 두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힘이 어찌나 센지 곧 계단 아래로 넘어갈 것 같다. 비상계단에는 나 그리고 방금 돈을 잃은 사람뿐이다. 직원들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항상 2인 1조로 다녀야 하는데 그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순찰 중 계단으로 향하는 문 사이로 하얀 연기가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누군가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는 몇십 장의 경주권과 담배 꽁초가 쌓여 있었다. 

  끄세요.

  무전기로 지원을 요청하려던 찰나 그는 내게 달려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얼굴을 맞았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니. 살코기만 집어먹던 형의 얼굴이 잠깐 스쳤다.

  볼 안쪽에서 피맛이 난다. 함께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수밖에 없다. 왼발 뒤꿈치가 계단에 걸쳐져 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나는 뒤로 넘어갈 것이다. 혼자 다칠 순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때 문이 열리고 용2와 용8이 나타난다. 몸이 먼저 반응한 용2가 나를 붙잡는다. 용8은 말을 더듬으며 지원을 요청한다. 곧 직원들이 달려와 그를 내게서 떨어트려 놓는다. 나는 반쯤 찢어진 셔츠를 정리하며 몸을 확인한다. 명치께가 손톱에 긁혀 피가 맺혀 있다. 그는 양팔을 붙잡힌 채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팀장실에 온 건 이번 일을 포함해 두 번째다. 팀장은 어떤 문제가 있을 때만 직원을 호출하는데, 첫 번째는 뇌전증 환자의 출입을 막지 못했을 때였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입 제한 명단에 있는 얼굴을 제대로 외우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자전거가 결승점을 통과하기 직전 객장 한가운데에서 사람이 쓰러졌다. 넘어지듯 달려가 바지 벨트를 풀고 기도를 확보한 뒤 팔다리를 주물렀다. 응급차가 도착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중에 사람들이 우르르 객장을 빠져나갔다. 매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팀장은 지갑을 열어 만 원짜리 지폐를 몇 장 꺼낸다.

  주말이라 병원은 닫았을 거고. 약국 갔다가 퇴근해.

  괜찮습니다.

  셔츠 여벌 없으면 담당자한테 말하고.

  팀장이 누구를 칭찬하거나 꾸짖는 일을 본 적이 없다. 팀장은 유니폼이 아닌 맞춤 양복을 입는데 자신의 옷매무새를 신경 쓰느라 우리한테 관심이 없는 거라고 직원들은 수군거렸다. 

시간만 때워. 왜 무리하고 그래.

  팀장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그의 눈빛은 OMR 구매표에 칠한 사인펜처럼 까맣고 진하다. 팀장실 문을 열고 나서자 용1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턱짓으로 탈의실을 가리킨다.

  용1과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마주 앉는다.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다. 아마도 트집을 잡아서 신났겠지, 라고 생각하며 나 역시 그를 바라본다.

  너 정신 안 차리지?

  대답하지 않자 별안간 정수리가 따끔거린다. 꿀밤이라니. 꿀밤을 맞았다.

  다른 애들이 보고 배운다고.

  한 대.

  왜 내가 잔소리를 들어야 하냐고.

  다시, 한 대.

  차라리 팔다리 하나 부러져서 나오질 말든가.

  그제야 정신이 든다.

  얼마나 벌었어요?

  그는 내 말을 듣곤 손을 내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연다. 햇빛에 반사된 은빛 패널이 오늘도 반짝이고 있다.

  밖에 저거, 완공까지 멀었겠죠?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알겠다는 듯이 크게 웃는다. 웃음소리는 처음 들어본 것 같다.

  문자에 선수 이름이랑 금액까지 다 적었던데요.

  나만 했겠냐.

  모르죠.

  알아야지, 씨발아.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곤 탈의실을 나선다. 당장 팀장실로 갈 수 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하다. 나는 창가에 기대 건축 현장을 한동안 바라본다. 여전히 완성된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


  그가 내 눈치를 보거나 애걸하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근무 시간에 휴게실에서 잠을 자고 다른 직원들의 귓불을 흔든다. 경주권을 사진 않은 것 같다. 휴게실의 모니터 브라운관도 꺼버린 채 등을 돌리고 누워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며칠 뒤에 열릴 경륜 왕중왕전 포스터를 객장 곳곳에 붙인다. 이용객이 가장 많은 한 주가 될 것이다. 벌써부터 열기와 긴장이 낮게 깔려 있다. 용15는 경륜 잡지를 들춰보다가 선수 한 명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우승할 것 같다고 말한다.

  제가 사람을 잘 봐요.

  안내 데스크에 모인 다른 직원들이 코웃음을 치며 그럼 내기를 하자고 한다. 그러다 성급히 일을 가리며 주차권에 도장을 찍는 나를 슬쩍 본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한다. 서로 천 원씩 꺼내 고무줄로 묶고 뭉치를 데스크 아래 서랍에 넣는다. 내기에서 이긴 사람은 그 돈으로 매점에서 콜라를 사 모두에게 돌릴 것이다. 기분만 내는 거지, 매점 아저씨는 봉투에 콜라를 담으며 말했다.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홈페이지 링크가 적힌 문자가 표시된다. 링크를 누르자 건축 사무소 오피스 인턴십을 신청하는 홈페이지로 연결된다. 자하 하디드의 런던 사무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공지글 하단에는 재정 증명에 대한 안내가 빨간색으로 표기되어 있다. 비자를 신청하려면 몇 개월치의 학비와 생활비가 통장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이번엔 좀 모았어?

  대학 동기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는다. 몇 년 전 통보 받은 합격 통지서가 아직 메일함에 있다.

  또 자동 취소되면 안 되잖아.

  직원들이 천 원 뭉치를 넣어둔 서랍을 만지작거린다. 고개를 들어 상황실을 바라본다. 팀장과 용들이 뭔가를 보며 웃고 있다.

  갑작스럽게 객장이 소란스럽다. 브라운관을 보자 선두로 달리던 선수가 넘어졌다. 그는 서둘러 일어나 앞바퀴가 휘어진 자전거를 붙잡고 안간힘을 쓴다. 다른 선수들이 멀어지는 동안 결국 포기했는지 헬멧을 벗어 던진다. 선수는 그렇게 카메라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중계진의 격앙된 목소리와 경주권을 바닥에 던지는 사람들의 욕설이 아득하게 들려온다.


  역 근처 양꼬치 전문점을 지나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응봉산산악회가 창가 자리에 앉아 얼굴이 붉어진 채로 양꼬치를 먹고 있다. 나를 보곤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모른 척 지나가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가게를 뛰쳐나온다.

  아직 일하던데?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린 여행객들이 캐리어를 끌고 지나간다. 여러 모양과 색을 갖춘 캐리어들이 눈길을 끈다.

  우리 당분간 다른 지점으로 다녀야 돼.

  그래서요.

  안 궁금해? 궁금할 텐데.

  나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난다.

  집에 도착해 가방에서 유니폼을 꺼낸다.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동안 옷장 위에 올려둔 캐리어를 바닥에 내린다. 먼지를 털고 캐리어를 열자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노먼 포스터의 독일 국회의사당, 안도 다다오의 물의 교회, 렘 쿨하스의 시애틀 도서관 등을 찍은 사진들이 보인다. 잡지에서 자르거나 홈페이지에서 출력한 것들이다. 건축 도면 수십 장과 논문들도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 사이로 자하 하디드의 인터뷰를 스크랩한 종이가 보인다. 

  “360도의 각이 있다. 그런데 왜 90도에만 집착하는가?” 

  종이와 펜을 꺼내 숫자를 적는다. 포트폴리오 제작비와 배송비, 어학 시험 응시료, 보증금과 월세, 생활비. 경륜장에서 본 선수들의 등번호, 배당률의 숫자들이 추상적이었다면 지금은 구체적인 방식으로 육박한다.

  용1이 저지른 불법적인 일을 알리고 용4가 된다면 일 년이 채 되기도 전에 돈을 모을 것이다. 다만 고액 환급자를 주차장에 데려다 줌으로써 나도 어떤 일에 가담한 거라면? 그들은 아니라고 했는데 그 말을 믿을 수 있나? 용1을 모두 싫어하지만 내가 그를 고발할 정도로 정의로운가? 순전히 나만의 이익을 위해 그를 쫓아내려는 게 아닌가? 탈수를 마친 세탁기에서 알람이 울린다. 복잡해진 머릿속이 차분해진다. 그러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왜 그럼 안 되는지.

  360도의 각이 있는데.


*


  경륜 경주장의 트랙은 모든 구간이 휘어져 있다. 원심력을 받기 위한 뱅크 구조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직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직선을 달릴 수 없다. 선수 등급은 특선급, 우수급, 선발급으로 나뉜다. 나는 출근 후 휴게실에 비치된 잡지를 펴고 등급심사 집계표를 확인한다. 지난번 경기 중에 넘어진 선수의 이름이 어느 등급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내일 치러질 왕중왕전을 위해 준비할 것들이 산더미이다. 평소보다 두 배에 가까운 구매표가 담긴 상자들을 창구에 보관하고 무전기와 이어폰 상태를 확인한다. 흡연실의 재떨이를 늘리고 등받이가 고장 난 의자를 교체한다. 연차를 쓸 수 없는 기간이라 전 직원이 출근했는데, 하필 점심시간의 인원 배치를 내가 맡았다. 아마도 용1이 시켰을 것이다. 용1은 언젠가부터 다른 직원들이 할 만한 일들을 내게 몰아주고 있었다. 나는 군말 없이 인원을 나누고 층마다 전화로 알린다.

  가장 늦은 시간대에 용15와 함께 식당가로 향한다. 용15는 매일 순두부찌개를 먹는다. 이유를 묻자 양이 제일 많아서라고 말했다. 항상 냄비 바닥이 보일 정도로 음식 한 점 남기지 않고 먹는다. 나는 입맛이 없어서 돈가스를 잘라 나눠준다.

  손님이 없네요.

  점심시간 지났으니까.

  그 사람들도 안 보이는데요.

  용15는 입에 든 음식물을 오물거리며 주위를 살핀다.

  응봉산산악회요.

  나는 돈가스를 자르던 손을 멈춘다.

  등산화 밑창에 흙이 한 톨도 안 묻어 있다고 형이 알려줬잖아요.

  알려줬지.

  형, 그 사람들이랑 있었잖아요.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배당률이 제일 높았던 오후 경주가 끝난 모양이다.

  고액 환급자 보호 맡은 날에 CCTV 확인하라고 했거든요.

  누가.

  팀장님이요.

  용15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닦는다. 아직 음식이 반 이상 남아있다.

  더 먹어. 가서 일해야지.


  휴게실로 향하는 복도가 소란스럽다. 헛기침을 해도 용들이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 뭔가를 꼭 숨기는 것처럼. 내가 봐서는 안 될 게 거기 있는 것처럼. 가방에 있던 전공 서적과 영어 자격증 문제집 등이 찢긴 채로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다. 누구 짓인지 말하지 않아도, 그가 자리를 비웠어도, 그리 놀랍지 않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용14가 빗자루를 들고 왔다가 멈칫거린다.

  저희는 도와주지 말라고……

  도와주지 마.

  나는 빗자루를 받아 휴게실을 청소한다. 휴식 시간에 충무로 인쇄소에 들러 제작하려고 했던 포트폴리오도 섞여 있다. 하얀 종이 뭉치들, 꼭 경주권이 바닥에 쌓인 것 같다. 나는 용1을 찾지 않는다.

  영업 마감 직전 팀장실로 향한다. 팀장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다가 나를 보곤 소파를 가리킨다. 휴대폰을 꺼내 용1과 응봉산산악회가 나눈 문자 내역을 보여준다. 매일 똑같은 그의 표정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유심히 쳐다봤지만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팀장은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며 휴대폰을 내게 돌려준다. 그뿐이다. 나는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내일 왕중왕전이라 바쁠 거야.

  그 말을 하곤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팀장실에서는 건축 현장이 보이지 않는다. 창밖으로는 밀리오레 빌딩보다 두 배 높은 두산타워의 중층부가 거대한 절벽처럼 가깝게 보인다. 그 뒤로 을지로의 격자무늬 빌딩들이 자로 대고 그은 듯 이어져 있다. 오로지 직선과 직선뿐이다. 내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 팀장은 어깨를 으쓱하곤 밖으로 나선다. 아무래도 지점장에게 직접 말해야 할 것 같다.


  공정한 경륜, 결승선으로 향하는 두 바퀴처럼, 희망찬 내일.

  홍보 문구가 적힌 분홍색 어깨띠를 몸에 두른다. 이런 촌스러운 색은 누가 정한 건지 모르겠다며 불만 섞인 소리가 들린다. 용15는 군말 없이 구두를 닦고 있다. 나는 경주권이 든 박스를 들고 창구로 향한다. 발매팀장님이 방금 깎은 사과가 담긴 접시를 건넨다. 오늘 같은 날은 속이 든든해야지, 다른 여사님이 말한다. 접시를 들고 탈의실로 돌아가 용들에게 나눠준다. 근무표를 보자 용1의 이름 옆에 병가라고 적혀 있다. 작년에도 왕중왕전이 있는 날에는 출근하지 않았다.

  용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다. 배정받은 층에 맞게 인원들이 내린다. 나는 이용객이 가장 많은 층에 배정받았다. 용2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린다. 아래 번호부터 차례로 수신 상태와 위치를 보고한다. 브라운관의 전원을 켜고 신호를 기다린다. 창문 너머 뿌연 빗줄기 사이로 크레인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인다.

  객장이 열리자 사람들이 쏟아진다. 희망나눔카드를 개찰구에 찍는 소리가 연달아 빠르게 들린다. 그들은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사인펜을 챙긴다. 언뜻 비장해 보일 정도이다. 브라운관을 보며 일행과 대화하거나, 어딘가로 전화를 하거나, 고함과 탄식을 번갈아 내뱉으며 돈을 꺼낸다. 왕중왕전을 경험하지 않은 넋이 나간 용들을 부른다. 상황이 발생해도 당황하지 말고 무전에 집중하라고 전달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흡연실에서 욕설이 들린다. 구매표를 훔쳐봤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얼굴을 때렸는지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져 있다. 상황실에 지원을 요청한 뒤 그들을 떼어낸다. 퇴장을 요구해도 쉽사리 응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오늘을 위해 돈과 시간을 준비했을 텐데, 이대로 퇴장하면 당분간 다른 지점에도 갈 수 없다. 때린 사람도, 맞은 사람도 용들을 밀쳐낸다. 나는 있는 힘껏 팔을 붙잡는다. 다른 용이 다가와 반대편 팔을 붙잡는다. 그는 거의 허공에 붕 뜬 채로 객장 밖으로 이동한다. 팔을 움직이지 못하자 작업화를 신은 발로 정강이를 걷어찬다. 벌써 푸른 멍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홧김에라도 대응할 수 없다. 건물 밖에서 상황을 종료하자마자 다른 층에서 무전이 온다. 누군가 브라운관에 휴대폰을 던져 화면이 꺼졌다는 내용이다. 하필 경주의 마지막 바퀴가 남았을 때라 수십 명이 항의하는 중이고 직원들 중 반 이상이 해당 층으로 가고 있다. 앞서 가는 용의 은색 유니폼이 땀으로 젖어 진한 회색으로 물들고 있다. 휴대폰을 던진 사람을 찾을 수 없어 상황실에서 CCTV를 확인한다. 이미 건물 밖으로 나갔다는 무전이 들린다. 형, 방금 지나간 사람 술 냄새 나는 것 같아요. 브라운관을 교체하는 동안 다른 층으로 복귀하던 용이 돌아와 귓속말을 한다. 빨리 따라가 보라고 말하고 창구로 향한다. 경주권을 발급하는 속도가 늦다며 누군가가 지팡이로 아크릴 가림막을 부술 듯이 두드리고 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사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달려가 지팡이를 빼앗고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개찰구에선 블랙리스트에 기록된 사람과 실랑이가 시작된 직원이 도움을 요청한다.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에 입장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입맛을 다시고 돌아서지만 몇 시간 뒤 다시 올 거라는 걸 안다.

  안내 데스크 뒤편에 가림막을 치고 김밥을 먹는다. 은박지에 담겨 있던 김밥이 식어 잘 넘어가지 않는다.

  그만둬야겠어요.

  몇 달 전에 입사한 용이 한숨을 토하듯 말한다. 오늘만 그런 거라고, 참으라고, 나는 구태여 말하지 않는다. 유니폼을 입은 채로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사물함에 넣어둔 유니폼을 직접 찾으러 갔다.

  옷은 두고 가.

  그때 기억이 났는지 다른 용이 우스갯소리를 한다.


  몇 차례의 소요가 지난다. 16경주에 배치된 마지막 경기, 즉 왕중왕전이 다가온다. 브라운관 속 배당판의 숫자가 움직인다. 자막에는 도박 중독을 경고하는 문구와 선수 정보, 부정 신고 포상금에 대한 안내가 흐르고 있다. 벌써부터 창구가 소란스럽다. 그때 팀장의 무전이 들린다.

  지점장님, 12층 객장으로 이동.

  경기가 끝나면 곧장 지점장실로 갈 예정이었는데 그런 수고를 덜 수 있을 것 같다. 혹시나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관람석 사이사이를 순찰한다. 발매 마감이 다가올수록 객장의 분위기는 고요해진다. 음량 조절 버튼을 서서히 내리는 것처럼. 소리와 열기가 가라앉고 있을 때, 나는 익숙한 얼굴을 확인한다. 객장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사복을 입은 용1이 앉아 있다. 혹시 잘못 본 건가 싶어 다가간다. 노런 점퍼를 옆자리에 두고 구매표를 작성하고 있는 용1이 보인다. 그때 그 환급자가 입은 점퍼와 같은 디자인이다. 그는 모자와 마스크를 챙겨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린다. 발매 마감 30초 전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브라운관을 보자 특정 선수의 배당률이 바뀌기 시작한다. 아무도 우승을 예상하지 않았던 선수, 용15가 우승할 거라고 말했던 선수. 제가 사람을 잘 봐요. 용15의 말이 떠오른다. 돈이 몰리기 시작한다. 

  경주가 시작되자 폭발하듯 함성이 쏟아진다. 안내 데스크로 향하는 길이 쉽지 않다. 사람이 아닌 소리를 헤집는 것 같다. 무전이 들려오지만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 개찰구 쪽 기둥에 기대 서 있는 지점장이 보인다. 나는 유니폼에 묻은 먼지를 털고 지점장을 향해 걸어간다. 개찰구를 통과한 응봉산산악회가 나보다 먼저 지점장에서 인사를 건넨다. 지점장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한다. 익숙한 듯 서로를 향해 웃는다. 그들은 내게 등을 보이곤 돌아서서 대화를 주고받는다. 욕설을 뱉으며 지나가던 사람이 내 등을 친다. 분홍색 어깨띠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용5. 원위치로.

  누가 말하는 걸까.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의 번호가 방송으로 안내된다. 나는 브라운관을 바라보지 않는다. 누가 결승선을 통과했는지 궁금하지 않다.

  알아야지, 씨발아.

  누군가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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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민병훈 너는 물에 젖은 곰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너는 동물원에 가자고 갑작스럽게 말했다. 너는 배를 잡고 크게, 오래 웃는다. 곰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 너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곰이 웃겨, 라고 물어 보는 대신 네 바지에 묻은 흙을 닦았다. 너는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으며 곰에게 손을 흔든다. 너는 동물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곰을 본다. 너는 평소 그런 식으로 하나의 대상을, 하나의 풍경을, 하나의 장면을 오래 응시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그사이 매점과 화장실과 흡연구역과 식물관에 다녀왔다. 너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눈을 깜빡이고 있다. 곰은 두 마리였다가, 한 마리가 철문을 통해 어딘가로 향하고, 너는 아쉬운 듯 쩝 소리를 내면서, 다시 물웅덩이에 들어가는 곰을 지켜본다. 너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입으로 소리를 낸다. 나는 네가 어떤 기분일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전부 알고 있다. 곰이었다니까. 좀체 흥분하지 않던 네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귀에서 잠시 삐, 이명이 들렸다. 휴대폰을 떼고 앞을 보자, 앞으로 넘어질 듯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잠실대교가 보였다. 언젠가 너는 시에서 대여하는 자전거를 타고 대교를 건넜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오도가도 못 하겠다고 전화한 적이 있다. 휴대폰 너머로,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너의 몸에 부딪혔다가 흩어지는 소리. 너는 가까운 곳에서 곰이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배달음식. 너는 그때 상반신만 겨우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고 봉지에 손을 뻗었다. 옆집 문이 열렸다. 너는 곰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곰은 자기가 음식을 주문한 것처럼, 하얀 봉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는 종일 밥을 먹지 않았고, 몸이 아픈 건 아니지만 기운이 없었다. 퇴근길에 내게 아무 음식이나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혹시 곰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시켰는지 떠올렸다가, 그보다는 곰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네게 놀라 가슴이 뛰었다. 어땠어, 묻자 곰이었지, 너는 말했다. 너는 동물원 폐장을 알리는 방송이 울리자 그제야 자리에서 벗어난다. 너는 뛰다시피 걷는다. 새로 산 운동화 끈이 풀린다. 허리를 숙여 끈을 묶는 동안, 너는 네가 본 그것이 저 곰만큼 크진 않았다고 말한다. 가면을 썼던 건 아닌지, 인형 알바 옷을 입었던 건 아닌지, 나는 묻지 않는다. 네가 등을 두드릴 때, 나는 다른 신발끈도 풀었다가 다시 묶는다. 지하철역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에 오르고, 너는 어깨에 기대 곯아떨어진다. 나는 버스가 운행 노선을 한 바퀴 더 돌 때까지 너를 깨우지 않는다. 수중에 있는 돈은 삼십오만 원. 너는 휴대폰 액정에 은행 어플을 켜고 내게 보여줬다. 이게 다야. 이게 다지만, 첫 인사에 빈손은 싫으니까. 너는 두 달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식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마침 겨울이었고, 동면에 든 동물처럼, 하루의 반 이상을 침대에서 잠만 잤다. 네가 하던 일은, 네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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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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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병훈
  • 201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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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두더지왕

    잘 읽었습니다.

    • 2026-06-07 19:24:43
    두더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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