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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프트의 딸들

  • 작성일 2026-06-01

  프롬프트의 딸들


최형경


  AI 프로그램에 갈색 가죽 가방을 든 이십 대 여자의 반신 사진이 만들어졌다. 민정은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았다. 사진 속 얼굴은 카리나의 얼굴형과 장원영의 눈매, 제니의 입술을 닮았다. 단추 두 개를 푼, 하얀색 셔츠 의상도 마음에 들었다. AI 작업 보드를 조작해 AI 영상 프로그램으로 모드를 바꾸었다. 민정은 영상 프롬프트를 쓰기 시작했다.

  사진 속 여자가 아래 대본을 읽게 해줘. 

  저는 진짜 사람이 아니라 AI 모델입니다. AI 패션 룩북 만드는 법, 이제 어렵지 않습

  작성을 멈췄다. 사진의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민정은 여자를 다시 살폈다. 갈색 가죽 가방이 눈에 띄었다. 로고가 없는 직사각형 모양의 숄더백이었다. 민정은 인터넷에 접속해 샤넬 시즌 백을 검색했다. 캐비어 가죽에 금장 샤넬 로고가 가방 덮개에 붙은 천이백만 원짜리 샤넬 백 이미지를 저장했다. 민정은 다시 AI 작업 보드를 조작해 AI 이미지 프로그램으로 모드를 바꾸었다. 민정이 샤넬 백 이미지를 첨부하고 프롬프트를 썼다.

  여자의 가방을 첨부된 이미지와 같은 걸로 바꿔줘.

  AI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민정은 프로그램 화면과 시간을 번갈아 확인했다. 아이의 하원 전에 인스타그램 계정에 새 게시물을 올리고 장도 봐야 했다. 뿌연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았다. 이미지가 만들어지다가 오류가 났다는 알림창이 떴다. 민정은 다시 엔터를 눌렀다. 몇 분 뒤 완성된 이미지를 보니 가방 뚜껑의 샤넬 로고가 찌그러져 있었다. 한숨이 났다.

  민정은 작업을 그만두고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이 닫히자 민정이 작업을 하던 부엌 식탁 너머로 생활동화 전집이 보였다. 거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백 권의 책들은 민정이 작년 삼 개월 할부로 팔십오만 원을 주고 구매한 것이었다. 민정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오늘 분의 쇼츠는 오늘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돈을 번다. 민정은 다시 노트북을 열어 작업 창을 켰다.

  민정이 AI 강좌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을 시작한 건 딸 때문이었다. 자라나는 아이 아래로 돈은 쉼 없이 들어갔다. 발달에 필수라는 국민 아이템부터 영유아 방문 수업, 유기농 식재료까지 성장에 좋다는 건 AI 결과물처럼 끊임없이 생겨났다. 생활동화 전집도 국민 아이템 중 하나였다. 판매 사이트에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빌려, 두 돌에서 네 돌 사이에 생활동화를 읽히면 예의 바른 아이로 큰다고 홍보했다. 전집은 차례차례 줄 서기, 친구에게 양보하기, 싸우지 말기 등의 주제로,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주인공들이 착하게 되는 스토리를 담았다. 하지만 민정은 딸을 옆에 앉혀놓고 전집의 책을 읽을 때마다 다른 생각을 했다.

  차례를 기다리고만 있는 건 소극적인 태도 아닐까. 양보를 잘하면 착한 사람은 되지만 성공하긴 어렵겠지. 내 것을 지키려면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야 해. 민정은 생활동화를 읽을 때마다 혀 아래까지 차오른 불순한 마음을 딸 앞에서 삼켜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먹은 마음을 왜 가지게 되었는지 누구도 묻지 않기를 바랐다. 큰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민정은 생일에 한우 대신 국내산 육우를 먹었다. 알파벳은 공교육에서 처음 배웠다. 오십 명 정도 일하는 중소기업에서 아파트 분양 홍보 영상을 만드는 일을 하다 결혼하고 퇴사했다. 연봉이 민정보다 천만 원 정도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예물로 경기 외곽 아웃렛에서 이월상품 구찌 백을 샀다. 출산 후 업소용 빵이 간식으로 나오는 병원 연계 조리원에 갔다. 트리플 역세권이라 홍보하지만 어느 역에도 가깝지 않은 아파트 전세를 대출받아 얻었다. 민정은 세트로 구매하지 못하고 돈이 생길 때마다 최저가를 검색해 채워 넣은 집 안의 가전들이 마치 제 삶 같았다. 구색만 갖춘 선택일 뿐, 하나씩 모았을 때 어떠한 미학도 자아내지 못했다. 민정은 스스로를 자주 공격했다.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그런 일들이 쌓였을 뿐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민정의 삶은 적당했다. 하지만 적당한 게 최고라는 말은 같은 처지에 처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말로 쓰였지 칭찬은 아니었다. 민정은 바랐다. 누군가 딸을 위로하기보다 질투하기를.

  다시 AI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동안 민정은 운영 중인 인스타그램 계정에 접속했다. 대시보드에 들어가자 방문자 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팔로워가 삼천 명 정도에서 정체된 지 한 달이 넘었다. 민정은 침을 삼키며 검색창에 AI 강좌를 타이핑했다. 짧은 스커트를 입은 AI 인플루언서가 외설적인 춤을 추거나 인터넷 BJ의 방송과 비슷한 구도를 꾸며낸 AI 영상이 화면에 떴다. 민정은 자신이 만든 AI 룩북 영상이 검색한 영상들과 함께 떠 있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아무래도 부족했다. 스크롤을 내렸다. 민정의 눈을 잡아끈 것은 두 돌쯤 지난 아기가 아이돌 챌린지를 추고 있는 AI 영상이었다.

  곧 AI 프로그램 결제일이었다. 연간 결제액은 백만 원이 넘었다. 민정은 노트북 화면 너머의 거실을 훑었다. 생활동화 전집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만으로 세 돌이 지난 아이는 이미 생활동화에 흥미를 잃었다. 민정은 식탁에서 일어나 휴대폰으로 생활동화의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사진이 자세할수록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

  며칠 뒤, 민정이 올린 중고거래 판매글을 보고 한 유저가 말을 걸어왔다. 민정은 꾸벅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온 유저의 프로필을 클릭했다. 프로필 사진에 국제중학교 입학을 축하하는 플래카드의 일부가 올라와 있었다. 민정은 프로필 사진을 닫았다가 다시 한번 열어보았다.


*


  민정이 생활동화 전집이 담긴 카트 두 개를 밀며 공동현관을 나서자, 문 앞에 서 있던 모녀가 민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마트에 입점한 스포츠 브랜드에서 파는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파마하거나 염색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반곱슬 단발머리에 화장기 없는 피부였다. 여자의 옆에는 학교 생활복을 입은 십 대 여자 아이가 보였다. 두꺼운 책가방을 메고 크록스를 신은 아이는 민정을 향해 곧은 자세로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아이의 가슴팍에 국제중학교 로고가 있었다. 민정은 엄마 쪽의 나이를 가늠했다. 사십 대 중반. 그렇게 생각하자 여자와 거리감이 느껴졌다. 여자가 먼저 민정에게 말했다.

  “당근 맞으시죠? 물건 안 내려주셔도 되는데요.”

  “아니에요. 근데 가져가실 수 있겠어요? 무거운데.”

  “아, 저도 이 단지 살아요. 딸이랑 같이 가져가면 돼요.”

  민정에게는 나이가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두 카트의 손잡이를 여자 쪽으로 내밀었다. 여자는 손잡이를 자신의 쪽으로 당기며 휴대폰을 꺼내 돈을 이체했다. 이십오만 원이 김은영이라는 이름으로 민정의 계좌에 들어왔다. 민정이 물었다.

  “김은영으로 들어온 거, 맞죠?”

  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하고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민정은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알게 된 동네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성공한 선배 엄마를 아는 게 아이 교육에서 중요하대. 민정의 알고리즘에는 교육 관련 콘텐츠가 많았다. 사교육 없이 서울대 보내는 법. 권장도서 독서만으로 국어 만 점 받는 법. 선행학습하지 않고 상위권 되는 법. 하지만 눈앞의 모녀처럼 숨 쉬는 실재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동네는 비학군지였다. 민정은 카트 손잡이 중 하나를 다시 쥐었다.

  “제가 같이 옮겨드릴게요.”

  “딸이랑 같이 가져가면 돼요. 요 앞에 104동인데요, 뭐.”

  “아휴, 따님은 책가방도 무거워 보여요.”

  민정은 먼저 카트를 밀며 104동을 향해 나아갔다. 은영과 딸은 이내 뒤따랐다. 민정의 뒤에서 모녀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학 수업에서 있었던 일, 이번 학기 수행평가가 어떤 것이 나오는지, 영어 원어민 교사의 배경과 같은 이야기였다. 민정은 카트의 바퀴가 드르륵거리는 소리 사이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오 분 정도 함께 걷자 104동 공동현관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민정은 연락처라도 먼저 물어볼까 고민하며 은영에게 카트 손잡이를 건넸다. 도리어 입을 먼저 연 건 은영이었다.

  “너무 감사하네요. 과일이라도 좀 드릴까요? 시누이가 과수원을 하거든요.”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의 층수 알림판은 삼 층을 표시하고 있었다. 민정은 알림판을 보다 급히 입을 뗐다.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가도 될까요? 커피는 제가 배달시킬게요.”

  은영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그럼요. 커피야 내리면 되고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민정은 은영, 그리고 딸과 함께 칸에 올랐다. 한 층씩 올라가자 그제야 아무런 머뭇거림이 없는 은영의 매끈한 승낙이 좀 희한하게 느껴졌다. 민정이 제안하기는 했지만, 현관문을 닫고 사는 시대에 처음 보는 이웃을 집 안으로 초대하는 일은 동화에서나 있을 법했다. 하지만 이 갑작스러운 만남이 두렵거나 의아하지만은 않았다. 도리어 고양된 쪽이었다. 민정은 다시 곁눈질로 은영의 딸의 생활복 가슴팍에 달린 로고를 보았다.

  도착음이 울리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민정은 아파트 현관문 옆 복도에 서서 은영이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을 기다렸다. 이내 열린 현관문 앞에서 민정은 잠시 주저하며 서 있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민정의 눈앞에 은영의 거실이 드러났다. 얼룩진 패브릭 소파와 책머리 위까지 책이 꽂힌 책꽂이, 구식 전자레인지와 과하게 번쩍거리는 세라믹 식탁의 상판, 거실장 위에 놓인 영어 말하기 대회 트로피 네댓 개가 보였다. 은영은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냉장고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능숙한 손길로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전집은 시누이 줄려고 산 거예요. 시누이 애가 두 돌이거든요.”

  노란 사과조각이 담긴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은영이 의자에 앉았다. 민정은 거실을 살피던 눈길을 거두고 은영의 건너편에 자리했다. 은영의 딸은 집에 들어오는 길로 어느새 본인의 방에 들어간 모양인지 기척도 없이 조용했다. 현관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방문을 쳐다보며 은영이 속닥거렸다.

  “좀만 더 크면 저렇게 된다니까요. 근데 아이가 몇 살이에요?”

  “40개월이요.”

  은영이 카트에 담긴 책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어, 그럼 아직 읽을 때 아닌가요? 왜 파셨어요?”

  민정이 미소를 지으며 비밀을 알려주듯이 말했다.

  “우리 애는 질렸대요. 이젠 마지막 페이지에서 앞 페이지로 읽는 게 더 좋다고 하더라고요. 착한 주인공이 나빠지는 게 악당 탄생 스토리 같다고.”

  은영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민정은 먼저 작게 웃었다. 실패한 농담 뒤에 따라붙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은영이 사과를 집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요새 애들은 그 나이 때부터 벌써 그래요? 잘 커야 되는데.”

  민정은 급히 입을 떼려고 하다 다시 닫았다. 때로는 긴 변명이 도리어 실수를 인정하거나 밑바닥을 드러내는 꼴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 수 있는 나이였다. 대신 민정은 은영의 말을 과하게 방어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말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그 틈에 현관 쪽 방문이 열리며 은영의 딸이 나왔다. 민정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 딸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어딘가 완고하고 단단한 데가 있었다.


*


  민정이 은영을 다시 본 곳은 마트였다. 은영을 보기 몇 분 전, 민정은 매대 앞에서 사과를 고르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앞 마트는 신선식품이 신선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동네 엄마들은 바로 옆 백화점에 좋은 물건이 납품되기 때문이라고 숙덕거렸다. 민정은 흠집이 난 사과들을 뒤적거리다 고르는 것을 포기하고 출구 쪽 계산대로 발길을 옮겼다.

  아이용 요거트와 애호박, 시판 반찬 몇 가지를 계산용 벨트에 올려놓는데, 중년 남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고객만족센터가 있었다. 남자의 건너편에 마트 직원복을 입은 은영이 명찰을 달고 앉아있었다. 은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환불은 힘드세요. 거의 다 드셨잖아요.”

  “죄다 상해서 먹은 것도 없다니까? 버린 게 반이라고 몇 번을 말해.”

  남자는 한 송이만 남은 샤인머스캣 박스를 테이블에 내려쳤다. 입구에 서 있던 보안요원이 남자에게 다가왔다. 은영은 미간을 손으로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뒤 사무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민정은 은영의 뒷모습을 보다 아는 체하지 않고 마트 밖으로 나섰다.

  마트 앞 횡단보도에 서서 민정은 위악적인 농담에 쉽게 웃지 않는 은영의 성정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가늠해보았다. 접시를 놓을 때마다 큰 소음을 내는 세라믹 상판, 전문 세탁을 맡기지 못한 패브릭 소파, 서로 어우러지지 않는 디자인의 가구들. 은영은 못된 사람들을 고객으로 모시며 번 돈으로 물건들을 샀을 것이다.

  민정은 집에 돌아와 식료품을 냉장고에 넣고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칠십 개가 넘는 알림이 와있었다. 민정이 마트에 가기 전 올린 쇼츠가 알고리즘을 탄 모양이었다. 알림을 눌러보니 ‘귀엽다’는 댓글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최근 아기가 어른처럼 춤추는 AI 영상이 인스타그램에 유행하고 있었고 민정은 아름다운 여자 대신 귀여운 아기 쇼츠를 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에 민정이 올린 영상은 눈이 크고 배가 튀어나온 아기가 여자 아이돌의 챌린지 댄스를 추는 영상이었다. 아기가 춤을 추며 영상 속에서 말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움직임, 이제 AI로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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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정은 영상의 댓글을 확인해보았다. 

  만드는 방법이 궁금해요.

  너무 귀여워요.

  존나 앵벌이네.

  민정은 내리던 스크롤을 다시 올려 마지막 댓글의 차단 버튼을 클릭하려다 말았다. 인스타그램 창을 하단으로 내리고 인터넷에 접속해 유명한 유튜버 아기들의 이미지를 저장했다. 눈이 동그랗고 말하는 게 귀여운 아기, 경남 사투리를 쓰는 아기, 춤을 댄서처럼 잘 추는 아기. 다시 댓글 알람이 울렸다. 인스타그램 창을 누르지 않아도 아래에 뜬 알림창으로 새 댓글이 무엇인지 읽을 수 있었다.

  기괴하고 징그러움. 

  민정은 알림창을 끄고 저장한 이미지를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에 순차적으로 넣었다. 이미지를 한 장씩 첨부하자 창 안에 아기들이 줄지어 놓였다. 민정은 아기들의 얼굴을 다시 보며 한 명씩 이름을 떠올렸다. 하준이. 태아. 준. 해아. 다나. 민정은 백만 명의 구독자가 팔로우하는 하준이의 유튜브 채널에 접속했다. 조회수가 높은 대표 영상의 댓글창을 열고 스크롤을 내리며 읽었다. 귀엽다는 댓글들 사이에 셰어런팅이 심하다는 악플이 있었다. 민정은 다시 AI 이미지 프로그램이 떠 있는 창으로 이동해 프롬프트를 작성했다.

  아기 이미지들을 참고해 새로운 아기를 만들어줘.

  새 이미지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또다른 알림창이 떴다.

  아기로 이 지랄하는 거 이해 안 되네. 자기 앤가?

  민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인스타그램 창을 켜 악플들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피부가 하얗고 볼이 통통하며 코가 작고 눈이 큰, 아기 사진이 만들어졌다. 민정은 아기 사진을 AI 영상 프로그램에 넣을까 하다가 말았다. 대신 소파에 누웠다. 은영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민정은 그날 쇼츠를 만들지 못하고 아이를 하원시켰다.

  집에 돌아온 딸이 우연히 제 방 서랍에 오래전 숨겨놓은 『사이좋게 지내요』를 발견했을 때, 민정은 은영에게 책을 한 권 빠뜨리고 팔았다고 연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책 한 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중요한 이유는 민정이 마트에서 은영이 고초를 겪는 모습을 봤고, 같은 날 민정이 악플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두 가지 일이 우연히 겹치지 않았다면 민정은 은영에게 동료 의식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일은 겹치기가 쉬웠다. 은영은 매일 고객의 불만을 들었고, 민정은 매일 악플을 받았다. 민정이 은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생활동화요. 한 권을 빠뜨리고 드렸네요.

  은영은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바로 답하지 않았다. 민정은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혹시 시간 되시면 오늘 또 커피 한 잔 해요.

  은영은 답장으로 대답 없이 꾸벅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남편이 퇴근한 후, 민정은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놓고 104동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노크하자 문이 열리며 은영이 나왔다. 은영은 미안한 얼굴로 민정이 내민 책을 받아 들었다.

  “너무 감사하네요.”

  “아뇨, 제가 빠뜨린 건데요, 뭐.”

  민정은 현관문 앞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섰다. 은영이 입을 뗐다.

  “수다나 떨고 가요. 남편도 야근인데.”

  은영은 처음 만난 날처럼 집 안으로 민정을 들였다. 매끄럽고 주저함이 없는 방식이었다. 그 때문인지 민정은 현관에서 신발의 뒤축을 구겨서 벗으며 은영에게 물었다.

  “언니라고 해도 되죠?”

  은영은 현관에 민정을 두고 먼저 식탁으로 향하다 민정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은영의 표정이 당근거래를 하던 날 본 은영의 딸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은영이 간결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되죠. 어차피 내가 나이 많은 것 같은데.”

  둘은 식탁에 앉아 커피를 나누어 마셨다. 남편과 시댁 이야기를 먼저 시작한 건 민정이었다. 은영은 화답하듯 본인이 겪은 결혼생활의 역사에 대해 털어놓았다. 남편에 대한 답답함과 시댁에 대한 서운함, 그래도 이 정도면 적당하다는 자기 위안 섞인 대화가 오고 갔다. 그들은 아파트 단지에 엄마 몇 명을 공통적으로 알고 있기도 했다. 지인들의 이름을 읊어보자, 같은 리그에 포함된 프로선수들처럼 느껴졌다. 화제는 일하는 엄마의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다만 민정은 은영이 고객의 컴플레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도리어 마트에서 일하는 이야기를 손쉽게 꺼내놓은 것은 은영이었고, 민정은 그 때문에 놀랐다. 은영이 말했다.

  “세상에 쓰레기들이 많아.”

  은영이 차가운 눈빛으로 분노 섞인 푸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놈 낳고도 걔네 엄마는 애 낳느라 고생했다고 미역국 먹었을 거 아냐?”

  멀쩡한 과일을 다 먹고 환불한 사람. 아무것도 사지 않고 주차료를 내기 싫어 영수증을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하는 사람. 마트 화장실에 비치한 두루마리 휴지를 훔쳐 간 사람. 중년 여자 직원들에게 욕을 하다가 젊은 남자 직원에겐 성격을 죽이는 사람. 은영이 쏟아낸, 길게 이어지는 말들에 민정은 잠시 집중을 잃었다. 그는 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은영의 집을 다시 둘러보았다. 생활동화 전집이 텔레비전 아래에 쌓여 있었다.

  현관 쪽 방문이 열리며 은영의 딸이 얼굴을 내밀었다. 은영은 하던 말을 멈추고 딸을 쳐다보았다. 딸은 거실로 나와 소파 옆에 세워 둔 본인의 책가방을 챙겨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은영이 말했다.

  “난 그래서 항상 딸한테 착하게 커라, 그렇게 말해. 공부고 뭐고 다 필요 없다고.”

  흐트러졌던 민정의 눈이 빛났다.

  “그래도 공부 잘하잖아요. 국제중 다니는 것 같던데? 언니 딸 영어 어떻게 했어요? 안 그래도 우리 애도 곧 영유 보낼 나이거든요.”

  은영이 고개를 저었다.

  “국제중 1차는 추첨이잖아. 난 우리 애가 착해서 복이 온 거라 생각해. 그러니까 너도 너무 사교육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말고 착하게만 키워.”

  은영은 짧게 대답하고 입을 닫았다. 민정은 교육 정보를 캐내고 싶어 하는 본인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았다. 그는 조용해진 은영의 눈치를 살피며 화제를 돌렸다.

  “근데 언니, 나도 일하면서 온갖 악플 다 받아요. 나 진짜 언니 마음 공감해.”

  민정의 말에 은영이 민정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너 무슨 일 하는데?”

  민정은 휴대폰을 꺼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열었다.

  “AI 강좌 팔아보려고 계정 키워보고 있어요. 인플루언서 같은 거, 알죠? 애 보면서 회사는 도무지 다닐 수가 없더라고요.”

  은영은 민정의 휴대폰을 받아 화면에 떠 있는 쇼츠를 클릭했다. 영상 안에서 눈이 크고 배가 튀어나온 아기가 여자 아이돌 챌린지 댄스를 추며 AI 강좌에 대한 홍보를 했다. 은영은 영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반복되는 동안 왼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민정은 그런 은영의 손을 쳐다보았다. 불규칙하게 쥐어지던 손은 매끈한 호의처럼 다시 자연스럽게 식탁 위에 놓였다. 은영이 말했다.

  “아기 영상을 많이 올렸네?”

  “많아요? 아직 몇 개 안 돼요. 은근히 아기가 조회수가 잘 나와요. AI 강아지 뭐 그런 거랑 비슷한 거죠. 일단 귀엽잖아요.”

  “근데 이건 강아지가 아니라 아기잖아. 좀 다르지 않나?”

  민정은 대답 대신 남은 커피 몇 모금을 연거푸 마셨다. 은영은 민정의 텅 빈 커피잔을 들여다보고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냉장고의 문을 열기 위해 등을 돌린 은영의 뒷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낮에 마트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은영은 냉장고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봉지 안에는 줄기 쪽 껍질이 변색되기 시작한 샤인머스캣 한 송이가 들어있었다. 은영이 말했다.

  “시누이 과일. 이거 가져가서 먹어. 오늘 나만 떠든 것 같아서 미안하네.”

  민정은 봉지 안의 샤인머스캣을 들여다보았다. 상하지 않았지만 신선하지도 않았다. 공짜로 먹기 좋은 정도였다. 민정은 봉지를 받았다.

  집에 도착한 민정은 은영이 건넨 비닐봉지를 열었다. 샤인머스캣 한 송이가 단내를 풍기며 누워있었다. 민정은 손가락 끝으로 포도알을 찔러 개중 가장 탱탱한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케케묵은 달콤함은 공격 같기도, 호의 같기도 했다. 민정은 이로 으스러뜨린 포도를 꿀꺽 삼켜냈다. 아직 은영에게 묻지 못한 질문이 많았다.


*


  민정은 은영과 세 번 더 만났다. 그들은 각자 저녁을 먹고 은영의 집에서 만나 수다를 떨었다. 먼저 만나자고 하는 쪽은 민정이었지만 말은 오히려 은영이 더 많았다. 진상을 만난 날은 더했다.

  때로는 민정이 은영에게 카페 같은 곳에서 만나자고 제안했지만, 은영은 굳이 돈을 쓸 필요가 없다며 본인의 집으로 민정을 불러들였다. 게다가 민정이 집으로 돌아갈 때면 은영은 항상 과일을 챙겨주었다.

  은영과 교류한 이후 민정의 냉장고에는 항상 과일이 있었다. 껍질이 시든 사과와 탱탱하지 않은 블루베리와 과숙된 골드키위. 하지만 민정이 은영에게서 받고 싶은 것은 공짜로 먹기 좋은 과일이나 회사 생활의 고초를 듣는 일이 아니었다. 민정은 은영의 진상 이야기가 길어질 때면 조금씩 약이 올랐다.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AI 이미지 프로그램에 여자 아기 이미지가 완성되어 있었다. 민정이 화면을 쳐다보며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가 만화 캐릭터처럼 인위적이었다. 민정은 휴대폰을 열어 딸의 사진을 찾았다.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헤어라인 쪽의 가지런한 솜털과 흘러내리는 듯한 볼살, 솟아오른 눈썹. AI 아기 이미지에는 이런 특징들이 없었다. 민정은 AI 이미지 프로그램에 헤어라인과 볼살, 솟아오른 눈썹을 추가한 프롬프트로 다시 이미지를 요청했다.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동안 그는 쇼츠의 대사를 미리 쓰기 시작했다.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AI입니다.

  신축 아파트. 드림 카. AI 아기 인플루언서 수익 자동화로 가능합니다.

  자연스러운 AI 아기 만들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프로필의 AI 강좌를 확인해 주세요.

  민정은 영상이 만들어지는 동안 강좌 판매 사이트에 접속해 마이페이지를 열었다. ‘AI 아기 인플루언서 만들기’라는 링크를 클릭하자 판매량 개수가 보였다. 그래프가 우상향하고 있었다. 민정의 AI 아기는 흠 없이 예쁘면서도 실제 아기들이 가질 법한 귀여운 요소들을 담고 있어 팬층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달의 판매는 마흔다섯 개, 강좌의 가격은 칠만칠천 원. 민정은 컴퓨터의 엑셀을 열어 두 숫자를 곱했다.

  영상이 만들어지자 민정은 급하게 인스타그램 계정에 업로드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아이가 하원하기 전에 백화점에 들를 생각이었다. 그날 저녁에도 민정은 은영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평일의 백화점 식품관은 사람이 없어 쾌적했다. 민정은 핸드백을 들고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을 걸으며 가지런히 놓인 식품들을 눈으로 훑었다. 민정은 아직도 은영의 교육 노하우를 알지 못했다. 민정이 질문을 할 때마다 은영은 그저 아이를 선하게 키웠을 뿐이라고 했다. 한 번 더 캐묻고 싶을 때면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은영의 습관이 떠올랐다. 민정은 어쩌면 은영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은영 때문이 아닌 자신 때문일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노력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민정은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점원에게서 은영의 선물을 샀다. 세련되게 디자인된 패키지에 들어있는 물건들이 귀하게 보였다. 민정은 오늘 은영에게 교육 비결을 더 물어볼 셈이었다.

  늦은 저녁 민정은 과일 바구니 중간 사이즈를 들고 은영의 집 앞에 섰다. 과일 바구니를 내려다보며 민정은 적당한 선물일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어느 출판사의 생활동화 전집이든 받은 만큼 보답하라는 가르침은 담겨있었다. 민정은 은영에게서 여태껏 무엇을 받았고 무엇을 돌려주고 싶은지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은 채 벨을 눌렀다. 그저 과일을 받았으니 과일을 주겠다는 겉뜻이었다.

  노크 소리에 이내 현관문이 열렸고, 은영은 전과 똑같이 민정에게 미소를 지었다. 민정이 인사하자 은영은 과일 바구니를 힐끔 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식탁으로 걸어갔다. 민정은 집 안에 들어서며 은영에게 물었다.

  “오늘도 남편은 야근이야?”

  “거의 매일이지, 뭐.”

  은영은 군데군데 눌린 딸기와 커피 두 잔을 놓아둔 식탁 앞에 앉아서도 과일 바구니에 대해 묻지 않았다. 민정이 식탁에 앉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언니, 이거 선물. 최근에 인스타로 돈도 좀 많이 벌었고요.”

  민정의 말에 은영은 못 이기는 척 바닥에 놓인 과일 바구니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은영이 입을 열었다.

  “뭘 이런 걸 샀어. 난 시누이한테 많이 받는데.”

  민정이 개구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사 온 거지. 언니가 언니 돈 주고는 과일 안 사는 것 같아서.”

  “내 돈 주고서는?”

  말을 끝낸 은영이 눈을 떨군 채 미간을 찌푸리며 왼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민정은 프롬프트대로 나오지 않은 결과물을 본 것 같았다. 사실 민정은 은영과 대화하며 자주 그런 기분을 받았다. 생활동화를 거꾸로 읽으면 악당 탄생 스토리가 된다는 농담을 했을 때도,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여줬을 때도 그랬다. 민정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언니가 과일 줘서 난 너무 잘 먹긴 했죠. 근데 그거랑 별개로 언니한테는 진짜 특상품 과일로 보답하고 싶어서요.”

  은영이 말이 없자 민정은 자꾸 말했다.

  “아, 나 뭐 실수한 건가?”

  한 번 잘못 나온 AI 생성물에 프롬프트를 다시 지시해서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을 받아 든 기분이었다. 민정 또한 입을 닫자 그제야 은영이 민정을 보았다. 민정은 자신이 은영에게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은영이 바닥에 놓인 과일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형광등의 백색광이 닿은 과일의 표면이 흠결 없이 반짝거렸다. 은영이 말했다.

  “고마워. 근데 이렇게 흠 없이 키우려면 농약 엄청 쳐야 한다더라. 우리 시누이가 키우는 건 유기농이거든.”

  은영은 좋은 과일의 기준에 대한 설교를 이어나갔다. 민정은 제 집 냉장고에 남은 과일들을 죄다 쓰레기통에 처박듯 은영의 말을 끊고 싶었다. 그는 은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실로 시선을 옮겼다. 민정이 판 생활동화 전집이 여전히 텔레비전 아래 쌓여 있었다. 마치 은영이 민정에게 쳐준 값보다 더 높은 값을 쳐 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민정의 눈앞에 은영의 마음 어딘가에 자리한 흠결이 드러났다. 민정이 말을 끝낸 뒤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은영에게 물었다.

  “언니, 시누이는 과일만 가져다주고 책은 안 가져가?”

  민정의 말에 찻잔 너머 은영의 시선이 생활동화로 향했다. 은영은 잔을 세라믹 상판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내려 놓았지만 마지막에 삐끗해 잔과 상판이 맞부딪치며 크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내려놓은 잔을 완전히 놓지 못하고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아, 책은…”

  민정은 은영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고개를 크게 갸우뚱거렸다.

  “과일 품종을 어떻게 그렇게 다양하게 키워? 과수원에서 그게 되나?”

  말을 끝낸 민정은 커피를 소리내어 꼴깍거리며 마셨다. 은영이 민정을 쳐다보다가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을 내려다보는 은영이 단단하고 완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편이 곧 집이래. 이제 가.”

  은영은 먼저 식탁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냉장고의 문을 열지 않고 민정 옆에 섰다. 민정은 식탁에서 일어나 은영의 집에서 나왔다. 처음으로 손에 과일이 없었다. 홀가분했다. 집으로 돌아가며 민정은 과일을 건네는 은영의 손길이 일종의 반작용이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사람을 고객으로 모시다 보면 착한 것만으로 채워지는 자존심의 방이 생기는 건 아닐까. 민정은 은영에게서 과일이 담긴 비닐봉지를 받을 때마다 그 방에 초대받는 기분이었다.


*


  민정이 은영과 있었던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할 때마다, 대부분 연을 끊으라고 했다. 은영의 분노는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때때로 민정의 무신경함도 지적당했다. 어떤 사람은 은영의 열등감을 알아보지 못한 무신경이 문제였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과일 바구니라는 선물이 모욕적일 수도 있겠다고 했다.

  민정은 모욕적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민정과 은영은 몇몇의 공통된 지인들이 있었고 엄마들의 커뮤니티는 좁았으며 대부분 한 다리 건너면 다 알았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은영이 민정을 험담하고 다니긴 애매할 것 같았다. 둘은 어떤 사안을 두고 심하게 다툰 건 아니었다.

  게다가 나이 차이가 나는 민정의 딸과 은영의 딸이 같은 공간에 있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건 학교나 학원에서 우연히 만날 확률도 낮다는 뜻이었다. 민정은 은영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이제는 별 수 없었다. 선배 엄마한테서 얻는 인사이트는 은영이 아니어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은영은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도 않았다. 민정은 여태껏 은영에게 자신은 감정 쓰레기통에 불과했다고 여겨졌다.

 민정은 노트북을 열고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피드를 내렸다. 발도르프 교육, 숲 유치원 후기, 영어 유치원 등 교육 정보와 관련된 게시물들과 AI 아기 영상들이 뒤섞였다. 민정은 AI 아기들의 게시물을 클릭해 관심 없음을 눌렀다. 하지만 민정의 게시물 때문인지 자꾸 다시 피드에 떴다. 민정은 교육 쇼츠 중 하나를 눌렀다. 쇼츠의 제목은 대치맘의 리얼 영어유치원 후기였다.

  국제초, 국제중. 입학이 문제가 아니라 입학 후 영어 수업을 따라잡을 수 있느냐가 관건…

  쇼츠는 핵심을 말하지 않고 끝나버렸다. 댓글을 달면 자료를 보내준다는 게시글에 민정은 댓글을 달까 하다가 말았다. 받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어학원이나 방문 수업 등 어딘가의 링크로 유도하는 광고 메시지일 것이다. 민정은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면 할수록 쇼츠를 믿지 못하게 됐다. 그는 재빠르게 흘러가는 영상 몇 컷이 아닌, 은영의 딸이 멘 책가방의 무게만큼 신뢰가 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딸을 키워내고 싶었었다.

  AI 작업 보드의 창을 켰다. 귀여운 아기가 마이크를 들고 AI 자동화 세 달 수익률에 대해서 말하는 영상을 만들어달라고 프롬프트를 썼다. 만들어지는 사이 다시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디엠함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민정이 디엠함을 누르자 정중한 메시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혹시 아기 쇼츠 맞춤 제작도 하시나요?

  메시지 입력창을 누르고 민정이 답장을 썼다.

  네, 어떤 쇼츠인가요?

  상대방이 무언가 치고 있는 듯 작성 중이라는 화면이 떴다가 이내 메시지가 왔다.

  저희는 영유아 사상을 무의식부터 설계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프라임키즈연구소입니다. 아기 쇼츠로 저희 단체의 메시지를 오해 없이 전달하고 싶습니다.

  민정은 인스타그램 창을 하단으로 내리고 포털 사이트에 프라임키즈연구소를 검색해 링크를 눌렀다. 메인화면에 소형 기기를 머리에 착용한 채 잠들어 있는 아이의 사진이 떠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자 성조기와 이스라엘기, 일장기와 태극기가 순차적으로 롤링되었다. 사이트는 부자연스러운 레이아웃으로 꾸며져 있었다. 민정은 마우스를 옮겨 단체 소개 탭을 눌렀다. 글로벌 스탠다드 기반 사고 패턴과 메트로폴리탄 맞춤형 생활 습관 취득과 같은 구절들이 적혀 있었다. 화면을 잠깐 더 바라보다 민정은 사이트를 껐다. 그는 자판 위에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 답장을 하지 않고 다시 대시보드에 들어갔다. 그래프는 하향 중이었다. 저번 달에 비해 팔로워 수가 늘어나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고 강좌 판매 수익도 떨어졌다.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민정은 우선 팔로워 수를 체크했다. 오천오백 명 남짓이었다. 계정 운영에는 팔로워들의 퀄리티도 중요하다고 했다. 팔로워를 클릭했다. 스크롤을 내리며 한 명씩 살펴보았다. 유령회원 같은 외국인 계정과 투자 정보를 준다는 사기 계정, 로맨스 스캠을 노린 범죄용 계정이 섞여 있었다. 그중 민정의 눈에 띈 것은 국제중학교 합격을 플래카드를 프로필로 한 dmsdud1983이라는 계정이었다. 민정은 자판에 손가락을 얹고 dmsdud이 어떤 한글이 되는 지 쳐 보았다.

  은영

  “미친.”

  민정은 dmsdud1983을 클릭했다. 팔로우 10명에 팔로워 20명, 게시물은 0개였다. 민정은 다시 본인의 계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쇼츠 하나를 눌렀다. 아기가 AI 수익 자동화로 명품백과 드림 카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쇼츠 아래에 달린 댓글이 백화점 과일 바구니를 바라보던 은영의 눈빛처럼 민정을 찔렀다.

  계정 주인이 애 키우는 엄마는 절대 아닐 듯.

  민정은 쇼츠를 끄고 자신의 피드 전체를 보았다. 사무용 의자에 앉아 AI 수익 자동화로 두 달 만에 롤렉스를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아기. 은근한 섹시 뉘앙스의 아이돌 웨이브를 추며 강좌를 사보라고 말하는 아기. 상급지 아파트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AI BJ 계정 운영을 추천하는 아기가 보였다. 민정은 쇼츠의 업로드 날짜를 체크하며 개수를 세보았다. 은영에게 계정을 보여줬을 때보다 아기는 스무 배 정도 더 많았다. 민정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은영과 함께 아는 지인들의 얼굴이 한 명씩 떠올랐다. 자극적인 소문은 나이를 타지 않고 퍼졌다. 그들은 은영에게서 계정에 대해 듣자마자 손가락으로 민정의 아기들을 누를 것이다. 민정이 고개를 들었다.

  역시, 적당히 잘 지내는 편이 낫겠다. 뭐든 적당한 게 최고다. 

  민정은 휴대폰을 열어 은영에게 전화했다. 통화가 연결되는 사이 민정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중요했다. 연결음이 끊기고 인사하는 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나 회사야. 급한 거 아니면…”

  민정이 은영의 말을 끊었다.

  “언니, 미안해.”

  은영이 잠깐 말이 없다가 도리어 물었다.

  “뭐가?”

  민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은영이 먼저 말을 이어나갔다.

  “서로 안 보면 그만이지, 뭐 하러 전화까지 했어. 다 늙어서 피곤하게.”

  민정이 어렵게 입을 뗐다.

  “왜 안 봐요? 과일 바구니 때문에 그래요?”

  은영이 짧게 웃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그냥 애 키우다 보니 어울리는 사람을 좀 더 가리게 되네.”

  은영이 뒷말을 삼켰다. 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아래위로 떨리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여 은영에게 물었다.

  “내가 어때서요?”

  “어떤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는 아닐까 싶네. 아무튼 조심해. 애들은 다 따라 해.”

  따라 한다는 은영의 말에 민정은 며칠 전 제 방에서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던 딸이 떠올랐다. 민정 안의 분노와 수치심, 불안과 억울함이 불어났다. 은영의 말은 마치 삼 년 넘게 죽도록 키워낸 민정의 딸이 민정 아래에서 어떤 인간이 되었는지, 너 다시 한번 살펴보라는 경고, 딱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민정을 할퀸 건 은영의 다른 말이었다.

  “나 근데 좀 궁금하다. 너처럼 살면, 사는 게 좀 달라져?”

  은영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민정은 은영에게 다시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부끄러웠고 동시에 부끄러워할 일인지 억울하기도 했다. 노트북 화면은 여전히 화려했다. 가짜 아기들이 민정에게 움직이고 말하고 춤추며 유혹했다. 가짜이기도, 아기이기도 했다. 은영과 적당히 잘 지내보려고 한 것이 문제였다. 적당한 것은 언제나 민정의 발목을 잡았다.


*


  은영과 다툰 뒤 민정은 은영이 일하는 마트에 가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은 민정은 내비게이션에 다른 대형 마트의 주소를 찍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돌아 출구로 나와 도로로 진입했다. 장 보는 시간이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포함해 삼십 분이 늘었다. 그만큼 영상을 작업할 시간이 줄었고 영상 업로드는 뜸해졌다.

  마트에 도착한 민정은 카트를 천천히 밀며 물건을 골랐다. 막 들어온 제철 과일이나 유통기한이 길게 남은 신선한 소고기를 보아도 쉽사리 카트에 담지 못했다. 영상을 뜸하게 올린 이후 팔로워 수는 아예 정체 중이었고 강좌도 팔리지 않았다. 영상을 만들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으면 사는 게 달라지냐는 은영의 목소리가 민정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렇다고 계정을 휴면하거나 삭제하고 싶지 않았다.

  유통기한이 짧게 남은 천 미리 우유 두 팩이 원 플러스 원 행사를 하고 있었다. 민정은 우유를 들어 남은 일자를 세어보고는 다 마실 수 있을지 가늠해보았다. 요새 아이는 흰 우유를 어린이집에서도 남긴다고 했다. 초코 우유나 바나나 우유가 아니면 싫다고 편의점 앞 인도에 눕기도 했다. 마트의 노래가 끊기고 마트 직원이 방송을 시작했다.

  “선착순 열 명, 한우 등심 특가 원 플러스 원 행사가 지금 시작됩니다.”

  아이는 소고기를 잘 먹었다. 야들야들한 한우일수록 더 잘 먹었다. 민정은 우유를 내려놓았다. 카트 손잡이를 잡고 축산 코너로 향하는 지름길을 떠올렸다. 카트를 밀며 빠르게 걸어 나갔다. 축산 코너가 가까워질수록 같은 방향으로 카트를 밀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민정은 속도를 올렸다. 민정이 속도를 올리자 민정을 의식한 중년 여자 한 명이 카트를 버리고 뛰듯이 내질러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를 보며 작게 웃으며 쑥덕거렸다. 민정은 쑥덕거리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의 말은 이랬다. 안 먹으면 그만이지. 민정은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면 먹고 싶어질 수밖에 없잖아. 아예 있는 줄도 모르면 상관없지만 여기저기 떠벌리듯 방송까지 하잖아. 알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거기 닿을 수 있게 노력해야 하는 게 미덕 아냐?

  민정은 카트를 더 빨리 밀었다. 본인이 왜 계정을 삭제하지 않았는지 되짚어보았다. 계정 삭제는 단순히 은영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선언이었다. 앞으로 적당하게 살겠다는 선언. 선언의 결과는 아주 조금씩 긍지를 침식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것이다. 민정의 딸이 한우 대신 국내산 육우를 먹고, 결혼 예물로 아웃렛에서 이월상품인 구찌 백을 사고, 출산 후 훗배앓이를 느끼며 업소용 식빵을 먹는 방식으로. 미세하고 치밀하게 사람을 목마르게 하며.

  민정은 카트를 매대 사이 통로에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민정이 사지를 내저으며 달려 나가자 선두에 있던 중년 여자가 당황했다. 민정은 본인이 우스워 보일 것을 알았다. 야채 코너, 과일 코너, 수산 코너를 통과하며 재빠르게 내질렀다. 중년 여자가 민정 뒤에 뒤처졌고, 중년 여자를 향하던 웃음소리가 민정의 뒤에 따라왔다. 하지만 민정은 한우 등심을 사야 했다. 행사장에 도착한 민정은 숨을 헐떡이며 매대 앞에 섰다. 등심이 든 패키지 안에 한우 핏물이 얕게 고여있었다.

  쇼핑을 끝내고 민정은 한우를 조수석에 실었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개운했다. 민정이 운전석의 문을 열자 멀리 주차장에 들어서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한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 많지 않을걸.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민정은 운전석에 앉았다. 개운한 김에 마저 개운해지고 싶었다. 그는 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짧게 가다 끊겼다. 시동을 걸고 핸들을 돌려 대형 마트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파트 단지 지하 주차장에 입차해 느린 속도로 차를 굴렸다. 오늘 딸에게 한우를 줄 수 있었다. 원 플러스 원이니 소분해 얼려두면 한 번 더 먹을 수 있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 좌회전을 돌자 104동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적힌 안내가 보였다. 민정은 우발적으로 핸들을 돌렸다. 차는 104동으로 향했다. 은영을 혹시라도 마주친다면 은영에게 전화로 당한만큼 응수해줄 생각이었다. 민정은 차의 속도를 더 늦췄다. 차량 디스플레이의 시계를 보았다. 곧 아이의 하원 시간이자 학생들의 하교 시간이었다.

  자동차 앞창문 넘어 104동으로 향하는 여자 아이의 뒷모습 하나가 보였다. 생활동화를 열 권 넘게 담은 것처럼 두꺼운 책가방을 매고 있었다. 민정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낯설지 않은 실루엣이었다. 여자아이는 차 소리를 들었는지 몸을 돌려 민정의 차가 뿜어내는 헤드라이트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어딘가 단단하고도 완고한 얼굴이었다. 민정은 브레이크를 밟고 기어를 P단으로 바꾸었다. 차가 멈추자 도리어 놀란 여자아이가 급하게 공동현관으로 쫓기듯 발걸음을 옮겼다. 민정은 운전석에서 내려 여자아이를 향해 뛰었다. 민정이 외쳤다.

  “잠시만, 아줌마랑 이야기 좀 하자.”

  민정의 목소리에 은영의 딸이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다 멈추었다. 딸이 민정을 올려다보았다. 민정이 입을 열었다.

  “너네 고모, 과수원 해?”

  “아… 네. 해요.”

  “거짓말하면 안 돼. 부모님한테 그렇게 배웠을 거 아냐.”

  “… 왜 물어보세요?”

  “반품 들어온 과일처럼 생겼었거든. 너희 엄마가 준 거.”

  딸이 민정의 눈을 피했다. 민정이 프롬프트를 입력하듯 은영의 딸에게 말했다. 중고물품을 되팔고 반품된 과일을 몰래 가져올 만큼 궁색한 형편을 조롱하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중고물품을 되파는 행동은 거짓된 행동이고, 폐기 물건을 몰래 가져오는 것은 훔치는 행동이라는 교훈적인 이야기였다. 민정의 말을 듣던 은영의 딸은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104동 안으로 사라졌다.


*


  은영에게 전화가 왔지만 민정은 받지 않았다. 은영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는 읽지 않고 삭제했다. 민정은 휴대폰을 켜 은영의 번호를 차단했다. 민정은 바빴다. 인스타그램에 올라갈 쇼츠를 기획했고, 제안이 들어온 일의 견적을 냈으며, 실제 계약으로 이어진 건들의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쇼츠 열다섯 개에 삼백만 원 정도의 견적을 산출해 전달하자 프라임키즈연구소는 선금을 보내왔다.

  민정은 프라임키즈연구소에 납품할 AI 쇼츠 제작을 하기 위해 아이가 잠든 후 부엌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저녁에 구운 한우 냄새가 빠지지 않았지만 창문을 열지 않았다. 그는 프롬프트로 이미지 생성을 지시했다. 새까만 단발머리를 하고 사과 머리를 한, 해사한 여자 아기가 만들어졌다. 민정은 아기를 찬찬히 보았다. 외국인처럼 보이게는 하지 말아 달라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이 떠올랐다. 

  민정은 휴대폰을 켰다. 바탕화면에 올려진 딸이 새우눈으로 웃고 있었다. 민정은 AI 아기의 눈을 새우눈처럼 조금 작게 해달라고 수정 프롬프트를 썼다가 지웠다. 아무래도 새우눈이라는 불분명한 단어보다 이미지가 빠를 것 같았다. 그는 휴대폰에서 딸의 이미지를 다운받아 AI 프로그램에 첨부했다. 이내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민정은 AI 작업 모드를 AI 영상 프로그램으로 바꾸었다. 프롬프트를 쓰기 위해 클라이언트가 요청한 대본을 확인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민정은 프라임키즈연구소의 사이트에 한 번 더 들어가 볼까 하다가 말았다. 정갈한 국기들의 배치가 마음만 흔들리게 할 게 뻔했다. 민정은 프롬프트를 쓰기 시작했다.

  아래 대본대로 아기가 말하게 해줘.

  민정의 요청에 AI 아기는 단어들을 입에 올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정은 노트북의 사운드를 세 단계 키웠다. 발음이 뭉개지지 않고 정확해야 했다. 민정은 사운드를 한 단계 더 올렸다. 그는 몰입했기에 집 안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민정의 딸이 잠든 방의 문이 조금 열렸다.

  딸은 깨어 있었다. 네 살은 부모 몰래 무언가를 하는 즐거움이 싹트는 나이였다. 딸은 문틈으로 엄마가 만든 아기를 보았다. AI 아기의 말들은 따라하기에 어려운 발음은 아니었다. 딸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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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祭)

제(祭) 김정우 한밤에 아버지의 부고를 전한 이는 여동생이었다. 연락이 끊긴 지 십여 년이 훌쩍 넘었으나 안부는 서로 건네지 않았다. 아버지가 위암 4기로 투병했다는 사실과 날이 밝으면 발인한다는 것.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느라 삼일장 중 이틀이 지났다는 것. 그래도 장남이니 이제라도 내려와 보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것. 그녀는 그런 말을 장례식장의 소음 속에서 이어갔다. 나는 주소를 제대로 듣지 못했음에도 전화를 끊었다. 어느 도시로 가야 할는지는 아무래도 알 수 있었다. 장례식장이 있을 만한 곳은 남쪽 끄트머리의 신도시였다. 광역시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쯤 이동한 뒤 기나긴 터널을 통과해야 나타나는 그곳은 도시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면서 언덕 지형이었다. 소각장과 원자력발전소와 농공단지가 신도시의 입구에 모여 탄내나 분진 냄새를 게워냈다. 몇 되지 않는 아파트 단지는 농공단지와 공동묘지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곧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명문 대학교의 분교가 이전해올 것이라는 말은 노인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경전철이 들어선다는 소문만 십수 년째 무성할 뿐. 실상은 버스 배차 간격마저 멀어서 젊은이들은 취업과 동시에 그 고인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십오 년 전에 그곳을 떠나왔고 젊은 사기꾼 소리를 듣다 전과가 몇 개 생겼으며 카지노에서 일하고 도박판에서 구르다가 부동산 투기로 운 좋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그러는 동안 한 번도 그 도시에 돌아간 적 없었다. 그 도시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냄새가 배어 있는 곳.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로 자주 하늘이 때 타고 콧구멍에 까만 먼지가 끼는 곳. 원자력발전소가 언제 터져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법하며 송전선로가 사방을 꺼멓게 두르고 있어서 투기꾼들도 들어가지 않는 곳. 공장을 닫고 파산한 뒤 대리운전 혹은 일용직 노동이나 전전하며 살았을 아버지에게나 어울릴 만한 곳이었다.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간략히 짐을 꾸렸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 도시가 장례를 치르기에 꽤나 편리한 곳이라고 여겼다. 병원과 장례식장은 물론이고 화장장과 공동묘지 심지어 절간까지도 차를 타고 움직이면 십여 분 안에 닿을 수 있었다. 도시의 슬로건은 기억이 가물거리긴 해도 미사여구가 잔뜩 붙은 희망적인 문장이었다. 차라리 ‘죽음이 쉬운 곳.’ 정도가 도시의 입구에 걸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관 뚜껑을 덮듯 트렁크를 닫았다. 날이 밝기 전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네 시간 넘게 차를 몰아야 했다. 그렇게까지 장거리 운전을 해본 적은 없었다. 차 안이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해질 때까지 기다린 뒤 회전 진입로를 통해 올라갔다. ‘환영합니다.’라고 벽에 프린팅된 글자들이 거꾸로 감기고 새벽빛이 주차장 입구로 틈입해왔다. 눈에 빛이 닿으니 시야는 잠시 암전되고 미시감이 들었다. 이 순간 나는 스무 살 같기도 하고 서른다섯 살 같기도 하며 불혹을 넘어선 것 같기도 했다. 앞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아이 같았다

  • 김정우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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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파트

킬링 파트 최미래 연애는 그리워할 연에 사랑 애. 단순히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야. 그리움을 팍팍 집어넣어야 한다. 상대와 눈 맞추는 와중에도 나는 네가 그리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더 자세히. 연애의 포인트는 거기에 있다고.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 연애의 주라고 여겨지지만 그게 아니야. 심적인 친밀감, 동경, 흠모. 왜 그리워할 연이겠어. 연애 감정은 거기에서 온다. 그러니까 재밌는 거지. 하지만 정말 성적 매력을 뺀 연애가 가능할까? 일반인이 등장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서 백진주는 진정으로 연애를 즐겼던 자신의 한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연애 프로그램에 나간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할까 곰곰이 망상에 젖었다. 얼굴과 직업 등 개인 신상을 드러내고 출연하는 방송 특성상 연애 프로그램의 진짜 연애는 다른 출연자들이 아닌 시청자랑 하는 거였다. 방송 나온 후에 인플루언서로 전향해서 공동구매하고 유튜버하고. 끼 발산하면서 돈까지 쓸어 담으면 얼마나 좋아. 조금 더 멀리 봐야 할 텐데. 민숙 님, 갑갑하네. 짜증 난다고 티를 그렇게 내면 안 되지. 민감한 이야기일수록 천진하되 차분하게 찔러넣어야지. 상대 눈 제대로 맞추고. 카메라는 절대 의식하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려 센 척하거나 기분 나쁜 티 내면 조지는 거지 뭐. 백진주는 참으로 답답했다. 민숙이라는 닉네임의 참가자 때문이었다. 민숙은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남성 참가자들에게 데이트 선택을 받지 못하면 표정과 말투가 날카로워졌고 다른 참가자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도 서슴지 않았다. 반대로 기분이 좋으면 카메라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듯 콧노래를 불렀다. 애교 섞인 말투와 윙크 등 플러팅도 마구 해댔다. 으 어떡해. 백진주는 그런 민숙의 행동 하나하나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이 민숙이라도 되는 듯 대리 수치심을 겪었다. 엄마도 연프 나가 봐. 요즘엔 돌싱 특집이 더 인기 많더라. 근데 민숙 저 여자는 진짜 이상하다. 저러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할 텐데. 그치? 소파에 옆으로 누워 뻥튀기를 먹으면서 서준은 민숙의 언행을 평가했다. 남자 출연자의 머리숱과 직업, 여자 출연자의 명품 아이템을 줄줄이 읊고 점수를 매겼다. 앞머리를 내면 더 귀여울 거라는 둥 스타일에 대한 조언도 아낌없이 퍼부었다. 백진주는 서준을 멍하니 바라본 후 텔레비전을 껐다. 아무리 사춘기가 빨라졌다지만 무슨 초등학생이 이래.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딸이 낯설었다. 서준은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바짝 올려 묶은 머리카락 옆으로 작은 링 귀고리가 반짝였다. 방송 댄스 학원에 다니게 된 이후, 어지간한 일에는 한 마디 짜증 없이 컨디션이 좋았다. 좋겠지, 그럼. 보름 동안 방문을 잠그고 울기만 해서 쟁취한 건데. 이렇게 좋아할 거였으면 진작에 보내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춤을 배우면서 점점 더 되바라져 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되었든 당장은 나아졌으니까. 백진주는 덮어놓았던 걱정과 불안이 올라오기 전에 눈을 감았다. 어쩌면 컨디션 조절은

  • 최미래
  • 2026-06-01

문장웹진 소설

용4

용4 민병훈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면 창문 너머로 은빛 알루미늄 패널들이 보인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공사 중이고, 나는 밀리오레 건물 12층에서 그것을 늘 아래로 내려다본다. 직선이 없는 곡선으로만 채워지는 비정형의 패널들을 보며 완성된 모습을 상상한다. 거대한 우주선이 되어 사람들을 싣고 날아가는 게 아닐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얼마 전 일을 그만둔 사람은 유니폼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은색이 뭐야, 갈치 같잖아. 나는 창밖으로 태양 빛에 반사되는 패널과 거울 속 유니폼을 번갈아 본다. 무전기를 챙겨 탈의실을 나선다. 이어폰을 귀에 꽂자마자 용1이 용14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야, 대답 안 해? 같은 층에 배정받은 용13이 대신 다급하게 대답한다. 배터리 교체 중입니다. 용15부터 용1까지, 수신 상태를 체크하고 현재 위치를 보고한다. 무전을 할 때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내 차례에서 나는 발음을 조금 흘린다. 용5니까. 용5가 될 때까지 삼 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나는 경륜 경기를 송출하는 브라운관의 전원을 켠다. 희망나눔 전자카드를 손에 쥔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창구와 가까운 자리에 앉기 위해 항상 우리보다 더 일찍 도착해 줄을 선다. 객장에서도 건축 현장이 보인다. 커다란 크레인이 패널을 지붕에 안착시킬 때 금속성의 타격음이 무전기의 노이즈와 함께 겹쳐 들려온다. 용1이 개장, 이라고 소리친다. 또 왔어요.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용9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한다. 가면 난리 친다. 멀리 있어. 폐장 직전 큰돈을 걸었다가 잃고는 의자를 던지며 난동을 부린 적이 있다. 그때 나를 포함한 세 명의 보안요원이 그를 엘리베이터로 끌고 갔다.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자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나는 볼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닦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쫓아낼 때까지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팀장은 손수건을 건네며 내게 참을성이 좋다고 말했다. 이런 일은 잘 참아야 돼. 침을 닦자 손수건에서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약 있는지 확인해. 생수통에 소주를 담아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약이라고 부른다. 식당가에서 밥을 먹다가 가방에서 소주를 꺼내 몰래 컵에 따라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다. 은갈치 같은 새끼들. 우리를 향해 들으라는 듯이 말하곤 그날은 객장에 오지 않았다. 나는 용9를 불러 그가 앉은자리를 확인하라고 말한다. 노란 걸 마시던데요. 건물 앞에서 아침에 무료로 나눠준 음료일 것이다. 명절을 앞두고 본부에서 직접 기획한 행사였다. 계속 주시하라고 말한 뒤 객장을 천천히 돌아본다. OMR 구매표와 컴퓨터 사인펜을 손에 쥔 사람들이 고개를 젖혀 브라운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배당판이 움직인다. 단승과 연승, 복승과 쌍승의 배당률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화면에 표시된다. 이번 경기는 쌍승식 역배당에 배당률이 높게 형성된 것 같다. 이제 곧 바닥에는 베팅에 실패한 경주권이 쌓일 것이다

  • 민병훈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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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오티닝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시선으로 읽었던 것 같아요! 나의 프롬프트는 잘 입력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소설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작가님~

    • 2026-06-04 16:36:33
    오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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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더지왕

    잘 읽었습니다.

    • 2026-06-03 00:00:43
    두더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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