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음 없이
- 작성일 2024-07-01
- 댓글수 1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이라면서.
안지는 남편과 사 년여를 사귀다가 결혼했다. 사귀는 동안 크게 다툰 적은 없었지만 좋아 죽겠다는 마음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무난한 사이였고 남들이 사귀는 동안 하는 일들을 거의 다 할 수 있었다. 서로 좋아 죽는 것만 빼면. 임신을 했을 때 안지도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대로 아이를 낳고 기를 것인지 결혼을 해버리고 말 것인지 아니면 낙태를 할 것인지 그러고 계속 만날 것인지 차라리 헤어질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지지부진하게 관계를 끌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안지가 답답해 뭐라도 선택해 보라고 주어진 상황 같았다. 안지가 남편과 상의했을 때 그는 안지를 꼭 안아 주기만 했다. 그 포옹은 꽤나 따뜻해서 안지는 지금처럼만 계속 살아도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지나고 돌이켜봤을 때 남편은 그저 자신의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안지는 자신보다 어디 한군데 잘난 데도 없어 보이는 여자에게 남편이 왜 빠져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안지만의 의견은 아니었고 시모의 의견이기도 했다. 시모는 한바탕 난리가 난 다음에 안지를 찾아왔다. 한참이나 안지 편을 들어 주며 안지를 달랬지만 결국은 조용히 이혼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안지의 품에서 울어대던 갓난쟁이가 시모의 품에서 울음을 그치는 것을 보고 차라리 그게 낫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동안엔 모두들 쉽게 이혼해 주지 말라는 둥, 두 사람의 피를 말리라는 둥 그런 조언만 했고 안지도 그럴 참이었으나 만사가 귀찮아졌다. 한편으로는 그 여자는 뭐가 아쉬워서 유부남한테 홀렸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안지가 좋아 죽어 본 적 없는 남편에게 목매다는 여자를 보면 신기했다. 뭐가 그리 좋을까,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는 저 지저분한 남자가.
남편과 그 여자는 안지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며 자신들이 아이를 잘 키우겠으니 제발 이혼해 달라고 말했다. 울면서 읍소했다. 울상인 두 사람의 표정이 닮았다고 안지는 생각했다.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자신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아이를 떼어 놓고 집을 나오는 것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육아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마저 들었다. 임신했을 때부터 출산 때까지, 그 후로도 줄곧, 아이에게 딱히 정이 가지 않았는데 어쩌면 이러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은 다음엔 각서 비슷한 것을 썼다. 이후로 다시는 서로 연락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번에 받은 위자료 외에는 다른 무엇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냥 셋이 모여 자필로 문구로 쓰고 사인을 한 게 전부라 그게 어떤 효력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안지는 사인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마음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 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무런 맹세도 결심도 노력도 필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안지는 아이의 사진도 한 장 가지지 않고 그 집에서 나왔다.
계약을 어긴 것은 남편 쪽이었다. 연락을 해온 것도 돈을 요구한 것도 모두 남편 쪽이었다.
*
“벌 받았다고 생각해요?”
안지는 그것이 벌이 아닐 리 없다는 내심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때에, 이제는 십 년도 전인 때에 모두들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게 바람이 나서 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으니 천벌을 받을 거야. 그랬는데 정말로 죽어버렸다니. 안지는 허망한 한편으로 그때 자신을 둘러쌌던 말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그렇게 말해버렸다. 그녀도 안지의 내심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큰 동요 없이 안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누가 벌을 주는데요?”
벌써 십 년도 지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남편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녀는 무척 나이 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벌을 주는 건 누구일까. 안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두 흩어버렸다.
“안지 씨는 그런 걸 원했어요?”
안지는 잠깐 생각했다. 내가 그런 걸 원했던가? 그랬을지도 몰랐다. 소문을 들은 친구들이 몰려와 자신을 위로하며 했던 말들도 떠올랐다. 두고 봐. 걔네가 행복하게 잘살 것 같아? 금방 불행해질 거야. 안지는 두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 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살길 바랐던 적은 없지만 불행하길 빌지는 않았어요. 그보다는 생각을 거의 안 했어요. 저는 그냥 저 먹고살기도 바빴어요.”
내 인생을 잘사는 것이 일종의 복수라고 되뇌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암시가 필요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 한두 해가 지나자 정말 먹고살기 바빠졌고 그런 과거의 일에 연연할 틈이 없었다. 지나간 옛일에 불과했다.
“저도 그랬어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틈이 없을 만큼 정신이 없었고······ 행복했어요.”
두 사람은 행복했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나중에는 바라지도 않았다고 한다. 성준이 하나만 잘 키우자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애 아빠가 사고로 죽고 나자 성준이는 친엄마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행복했다면서 애가 왜 그런 선택을 할까. 애초에 왜 여자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을까 싶었는데 남편이 죽고 외가에서 말이 나왔다고 했다. 아직 나이도 젊은데 친자식도 아닌 아이는 시댁에 맡기고 재가 준비를 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고. 여자는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치가 떨린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십 년이나 키웠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누가 뭐라 해도 제 새끼예요.”
“친엄마는 죽었다고 하지 그랬어요.”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어떻게요.”
그전까진 친엄마인 척 연기를 하며 잘도 살았으면서 왜 그런 거짓말은 못 할까. 거짓말에도 정도가 있는 것일까. 안지는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거짓말의 종류들을 떠올려 보았다. 좋아하지 않는데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가능했다. 싫어하지 않는데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호불호는 안지에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아예 마음을 바꿔 먹는 것까지도 가능했다. 내가 친엄마가 아니라고 말하는 건? 죽은 사람을 멀쩡히 잘 살아 있다고 말하는 건? 잠깐 멍하니 쓸데없는 생각 속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여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성준이에요.”
“자기 폰이 있어요?”
“벌써 열 살이에요. 요즘 애들은 없으면 안 되죠. 잠깐만요.”
안지는 통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성준이를 떠올렸다. 막연한 이름만으로가 아닌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건 여자와 연락을 주고받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자신의 배 속에서 10개월을 품었다가 낳아서 1년 남짓 돌보았던 아이. 작고 쭈글쭈글하고 발갛고 솜털로 가득했던 얼굴을, 깨끗하게 씻겨 놓았을 때 양서류처럼 빛난다고 생각했던 자그마한 손가락과 발가락을, 물렁거려서 연약한 비늘만 같았던 손톱을 떠올렸다. 그때의 얼굴말고는 별로 기억에 남는 표정이 없었다. 그래도 돌까지는 함께 살았는데. 먹이고 입히고 닦이고 씻기고 트림을 시키고 재우고 기저귀를 갈아 주면서. 부분부분 사물처럼만 떠올랐다. 아직 인격이 없는 존재였다. 눈동자를 들여다보아도 그 눈이 자신을 마주 보는 것 같지 않았고 아무것도 묻지도 않는 것 같았기 때문에 아무 죄의식도 없이 오래 그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도 있었다. 남편은 영 다른 말을 했었다. 이 모공 하나 없는 얼굴 좀 봐. 투명한 눈동자도 좀 봐. 나를 꿰뚫어보는 것 같아. 하지만 안지는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아이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이는 분명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아직 인간은 아닌 것 같았다. 성준이는 안지에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낳았는데 분명. 가랑이가 찢어져라 힘을 줘서 낳았는데. 자지러지듯 우는 소리를 분명 들었는데. 그 집에서 계속 함께 살았으면 좋아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전화를 하며 돌아왔다. 자리에 앉으면서 “알았어, 집에 갈 때 아이스크림 사갈게.”라고 말하자 “엄마, 고마워!”라고 외치는 앳된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새어 나왔다.
“사진 볼래요?”
안지는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 했지만 말할 새도 없이 여자가 자신의 휴대폰 배경화면에 있는 성준이의 사진을 들이밀었다. 안지는 건성으로 그 사진을 보고서 말했다.
“닮았네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저를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사랑하며 함께 살면 닮는대요.”
안지가 그녀와 만났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남편을 닮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성준이와 그녀가 닮았다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저는 성준이랑 살고 싶어요. 왜 친엄마한테 가겠다고 하는 건지는 저도 걔 속을 모르겠지만요. 애 아빠도 죽고 이제 저한텐 정말 성준이밖에 없어요.”
“저는 그 애를 원하지 않아요.”
여자는 안지의 말에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조금은 뜻밖인 듯도 했다. 으레 피는 당긴다고 하니까 안지도 아이를 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아빠도 죽은 마당에 새엄마 손에 아이를 맡길 수는 없다고, 이제부터라도 친엄마인 안지가 기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정말이죠?”
“네, 저희가 십 년 전에 계약서에 썼던 대로요. 이제 와서 같이 살 자신도 없고요. 그 애한테 그렇게 말하세요. 아무 말이나 다 해도 좋아요. 제가 애를 버리고 집을 나갔다거나 연락이 아예 안 된다거나 죽었다고 해도 괜찮아요. 바람이 난 게 제 쪽이라고 해도 되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냥 사정상 만날 수 없다고만 할게요. 저는 이제부터 성준이한테 정직하고 싶거든요. 정직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고요.”
“그럼 애가 그것도 알아요?”
“네?”
“두 사람이 불륜 사이였다는 거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지는 아이한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서 정직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느냐고 말하려다 말았다. 이제부터, 라고 했으니까 지난 일은 모두 잊겠다는 것일까. 그것도 상관없었다. 그냥 두 사람 일에 아무 상관이 없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안지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이혼을 하며 고향을 떠난 뒤로는 전화번호도 모두 바꾸고 전남편과 관련이 있는 사람과는 누구하고도 연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안지의 엄마에게 연락을 해 물어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달리 없었다. 그런데도 안지의 엄마는 안지에게 그런 사실을 귀띔해 주지 않았다.
*
안지는 이혼 후 몇 주 지나지 않아 혼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갑자기 떠난 것이라 경치 좋은 곳에 여장을 풀지는 못하고 터미널 근처 모텔에 방을 잡았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이미 너무 지쳐버려 다른 곳으로 이동할 힘이 없었다. 해가 지도록 혼자 멍하니 앉아 있다가 허기가 져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창도 없는 방이었으므로 해가 졌다는 것은 다음날 날씨를 확인하려고 휴대폰 어플을 들여다보다가 알아챘다. 안지는 터미널 근처 상가 골목을 배회하다 삼겹살집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몇 명이냐고 묻는 직원에게 한 명이라고 대답하니 저희가 2인부터 주문을 받거든요, 라는 말이 돌아왔다. 안지는 메뉴판을 훑어본 다음 항정살 2인분을 시키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잡았다. 저녁시간치고는 한산해서 가게를 잘못 골랐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참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왁자지껄한 쪽이 나은지 혼자 조용히 먹을 수 있는 쪽이 나은지 생각 끝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안지는 자기가 앉은 원형 테이블에만 집중하며 고기를 구웠다.
“세상에 집 없는 사람도 있나.”
고기가 잘 익었는지 이리저리 뒤집는 중에 그 말이 들렸다. 안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 말을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였다. 60대 초중반쯤으로 보였다. 원형 탈모가 진행된 것을 빼면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인데도 허리를 아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건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일까. 집 없는 사람도 있나. 60대쯤 되면 다 집 하나쯤은 갖게 될 수 있다는 걸까. 서울이 아닌 이런 소도시에 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까. 하지만 소도시에 살면서도 집이 없는 60대들은 무척 많을 것이다. 안지는 그 말이 나온 맥락이 궁금해 다음 말은 무엇일지 그쪽 테이블을 향해 귀를 기울였지만 그 말과 연관 지을 수 있는 다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완전히 다른 말이었을까. 집이 아니라 짐이었을까. 혹은 야구에 대한 이야기였을까. 홈런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집과 관련된 다른 표현이 있지 않을까. 안지는 야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다음날 난생처음 가본 어느 해변을 거닐 때도 안지의 머릿속에는 그 목소리가 계속 떠올랐다. 안지는 집이 있었다. 조용히 이혼을 하자고 마음을 먹은 데는 남편이 주겠다고 한 위자료의 영향도 컸다. 외곽에 작은 아파트 하나를 구할 정도는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집을 얻은 다음에도 늘 집 없는 사람의 마음에 더 이입이 되었다. 어쩌면 결혼을 결심할 때도 남편이 집을 구해 올 형편이 되는 사람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는지도 몰랐다. 안지의 부모도 집을 소유하지 못했으니까 빨리 집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다. 결혼을 하면 그게 단박에 가능해진다니 더 마음이 흔들렸는지도 모른다. 인생을 모두 걸어도 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러니까 세상에 집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은 그런 말을 했을까. 마음의 집 같은 것을 은유한 것일까. 그때 바로 물어 볼 걸 그랬나. 이봐요, 아저씨. 도대체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물었다면 그 사람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혹시 집이 없어요? 세상에나 집이 없다니. 그렇게 대답했을까? 아니요, 집이 있는데요. 안지는 반박했을 것이다. 저도 집이 있는데요. 거봐요, 사람들은 다 집이 있다니까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자가보유율 통계를 보면요······ 안지는 그렇게 반박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말은 말 그대로 ‘집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뜻일 수는 없었다.
안지의 부모도 안지의 결혼을 환영했다. 예비사위의 덕을 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같았다. 그쪽 집이 좀 살잖니. 상견례에서도 그런 마음은 숨기지 않았다. 혼수가 뭐 필요한가요? 이미 배 속에 들었잖아요. 이제 와서 어쩔 거냐는 듯 상대방을 놀리듯 말한다고 안지는 생각했다. 그런 엄마를 말리고도 싶었지만 그냥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결혼 후에는 친정과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다. 안부 전화도 시댁에 더 많이 했다. 명절이나 어버이날에는 가끔 용돈을 보냈는데 다행히 안지의 부모는 그 정도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안지가 남편의 불륜과 이혼 사실을 집안에 알렸을 때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런 이벤트쯤은 살면서 많이 겪었기 때문일까? 이왕이면 남들 하는 건 다 하고 살랬더니 이혼까지도 하느냐고 했던가? 위자료나 많이 받으라는 말은 분명히 했다. 그럼 이제 어디서 살 거니?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는 없다는 것을 알리듯 그렇게 묻기도 했다. 안지는 분명 두 사람의 친자식이었다. 그럼에도 가끔 안지의 부모는 안지를 생판 모르는 사람 대하듯 냉담하게 굴었다. 안지는 작은 방을 하나 구했다고만 대답했다.
*
“근데, 그때 왜 화를 내지 않았어요? 저 살기도 바빴다고는 말했지만······ 전 사실 살면서 종종 안지 씨를 생각했어요. 그때 그 표정이며 말투가 잊히지 않았거든요. 어떻게 그렇게 차분할 수가 있을까 싶었어요. 이미 다 체념했기 때문인지 다 포기했기 때문인지······ 왜 한 번도 화를 안 냈어요?”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
“안지 씨 방식은 어떤 건데요.”
안지는 자신의 방식을 사실대로 털어놓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버리고 싶기도 했다.
“일기를 써요.”
“그게 무슨······ 도움이 되나요?”
“안 되지 않죠. 그리고 위자료도 꽤 받았죠. 화를 삭이는 데 도움이 됐어요.”
안지는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다 싶어 얼른 돈 얘기로 화제를 바꿨다. 블로그에 일기를 써서 올리고 거기에 댓글을 달아 주는 사람들 덕에 화를 삭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여자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았다. 대신 위자료를 받았다는 점은 많은 일들에 대한 대답이 되었다. 금융치료라고 우스개로 말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으로는 용서 못 할 게 없으니까. 바람 난 남편을 용서하는 일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 세상 사람들이 다 동의할 것이다. 안지의 말을 듣고 여자는 결심을 했다는 듯 눈에 띄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고는 말했다.
“오늘 만나자고 한 건,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뻔뻔스럽다고 생각하겠지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예요.”
“뭔데요?”
“성준이 양육비를 좀 보태 줬으면 해요.”
안지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안지는 여자가 아주 싫지는 않았다. 자신이 뻔뻔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서? 안지가 낳은 아이를 성심으로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서? 무엇보다도 안지는 십여 년 전 자신이 이혼하는 과정에서 남들이 말하는 것만큼 충격을 받지 않았었다는 점을 떠올렸다. 여자의 말대로 불륜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산후우울증으로 모든 에너지가 바닥나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했던 감정들도 떠올랐다. 왜 그런 마음이었는지 여러 가정들을 세워 봐도 적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남편의 사망보험금의 수익자가 안지로 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만나기 전 이미 여자에게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여자는 세 사람이 계약서에 쓴 대로 안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준이가 아무리 떼를 썼다 하더라도 안지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영영 전해 듣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안지에게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진짜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남편에 대해 남아 있던 감정은 기존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보험금이라면 으레 법정상속인에게 간다고 여겨 착실히 보험료만 납부했던 것인지 오래전 가입했던 생명보험의 수익자가 여전히 안지로 되어 있는 걸 몰랐다고 했다. 허술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안지를 만나려고 한 것도 아마 허술했던 과거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리라 짐작했다. 안지는 자신의 짐작이 맞을지, 여자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보고 싶어 만나자는 청에 순순히 응했다.
“애가 공부를 곧잘 해요. 학원비 정도로만요. 대학 입학 때까지만요.”
안지의 헛웃음에 약간 조바심이 났는지 여자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안지는 다시 또 성준이를 생각했다. 안지가 아직 인간이 되지 못했다고, 양서류인 것처럼만 여겼던 아이. 잠투정을 하며 눈을 깜박일 때 얇고 투명한 막이 있는 것처럼 느꼈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이제는 많이 자라서 여자를 닮은 얼굴을 한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된 아이.
“벌써 열 살이라고요.”
“네.”
“그냥 보험금을 다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실은 그럴까도 생각했어요. 주위에서도 그러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안지 씨가 수익자로 되어 있어서 소송을 해야 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런 걸 겪고 싶지는 않아요.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안지 씨한테 그런 걸 겪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얘기했죠. 살면서 종종 안지 씨를 생각했다고. 성준이가 남편이랑도 저랑도 안 닮은 짓을 할 때면 더 생각이 났어요. 친엄마를 닮아 저러나 하고요. 걱정 마세요. 나쁜 점은 아니었어요. 애가 착해요. 친구들이랑도 잘 어울리고, 잘 웃고. 누가 나쁜 짓을 해도 금방 용서를 해버려서······ 그래서 생각했어요. 너는 화도 안 나니? 그걸 다 뺏어 가는데도 가만히 있니? 내 속이 답답해서 그렇게 화를 냈다가도 이런 성정은 안지 씨를 닮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나쁜 점인 것 같은데요.”
안지는 여자가 갈수록 뻔뻔스러운 소리만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여자의 장점인 것도 같았다. 여자라면 안지가 그랬듯이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느라 자기가 누군지 진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헷갈릴 일도 없을 것이다. 아이한테 그런 것을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안지는 이제는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된 아이가 무탈하게 잘 자랐으면 했다.
“수익자가 저로 되어 있으니까 그 돈은 제가 받아야겠어요. 양육비는 한꺼번에 드릴게요. 계속 또 연락을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
통통하게 적당히 살집이 잡힌 손은 고생을 모르는 사람의 것처럼 고왔다. 흰 피부 아래로 혈관이 뒤얽힌 것이 선연히 보이는 듯했다. 안지는 십여 년 전 여자와 단둘이 카페에서 만났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많이 추운가 보네. 얼굴을 마주하면 눈이 돌아버려 물잔이라도 끼얹을 것 같았는데 막상 마주하니 아무런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수고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뒤늦게 도착한 여자는 추운데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켰고 그 때문인지 잔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그러게 왜 차가운 음료를 시켰을까. 안지는 따뜻한 캐모마일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자가 오기를 기다리며 펼친 메뉴판에서 진정 효과가 있다는 설명이 눈에 먼저 들어왔기 때문인지 자연히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차를 마시기 전부터 그 따뜻한 잔을 손으로 감싸 쥐는 것만으로도 들뜬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삼자대면은 마쳤고 이혼하기로 결정도 한 다음이었다. 안지는 이미 할 말이 없었고 여자도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왜 만나자고 했어요?”
그럼에도 먼저 만나고 싶다고 말한 것은 여자였기에 안지는 캐모마일차를 홀짝이며 물었다. 막상 입을 가져다대니 생각했던 것보다 뜨거워서 몇 모금 마시지도 못했다. 여자는 창백한 손으로 유리잔을 쥔 채로 커피는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자가 안지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을 때 안지는 여자의 얼굴이 별로 미안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안하다기보다는 부끄러워하는 쪽에 가까웠다. 사랑을 들킨 사람처럼 수줍어하는 것도 같았다. 이제 방해물은 제거되었다고 안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둘만 있는 자리에서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홀가분해지고 싶어서요?”
“네?”
“그렇잖아요. 이미 다 결판난 마당에 왜 단둘이 보자 할까 싶었어요. 그쪽 사과를 듣고 나니 대뜸 그런 생각부터 드는 걸 어쩔 수가 없네요.”
여자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어쩌면 안지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남몰래 그런 마음을 품었을지도 몰랐다. 이미 벌어진 이 난장에서,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게 된 자신이, 최대한 품위를 지키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방법을 찾고 싶었는지도. 그게 뭐 잘못인가? 여자는 모든 걸 감내하겠다는 듯 묵묵히 안지의 다음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안지는 여자가 홀가분해지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영원히 그런 것만을 바라며 살 수는 없었다.
“그냥 물이나 끼얹고 일어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너무 뜨거워요. 사람들이 쳐다볼 것도 싫고요.”
안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가 덜덜 떨던 손으로 쥐고 있던 컵을 놓쳐 탁자 위로 커피가 쏟아졌다. 유리잔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큰 소리가 나는 바람에 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때도 안지는 헛웃음을 지었다.
*
여자가 먼저 떠난 다음에 안지는 카페에 잠깐 더 머물렀다. 함께 나서고 싶지 않아서 자신은 좀 더 앉아 있다 가겠다고 말하자 여자가 먼저 일어섰다. 안지는 남은 차를 마시면서 자신이 받게 될 돈과 양육비로 지급해야 할 돈을 계산해 보았다. 그때 여자가 앉았던 소파에 떨어져 있는 반지갑이 보였다. 여자가 흘린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오겠거니 싶어 여자가 돌아올 때까지 앉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입학 때까지 양육비를 달라니. 사실 그건 보험금을 거의 다 내놓으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우아한 방식을 선택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것 같았고 안지는 여자의 그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끝끝내 우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혼해 달라고 말할 때도 남편과 여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산뜻한 방법을 선택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
시모가 안지를 달랠 때 그런 말을 했다. 내가 현수한테 물어봤어. 애가 이제 갓 돌인데 어쩌려고 그러냐. 지나가는 바람일 수도 있지 않냐. 성준 엄마가 딱하지도 않냐. 내가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 보려고 이야기를 했어. 그런데······ 그런데 단호했다고 했다. 여자친구가 임신했다고 말할 때는 쭈뼛거리기만 했던 아들이, 상견례 자리에서는 별 말 없이 웃기만 하던 아들이 아주 단호한 말투로 이혼해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안지도 그걸 바랄 거예요. 너도 바랄 거라고 하더라. 너희가 아주 애틋한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도 애까지 생긴 마당에 잘살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같이 사는 게 무의미하다면 그러니까 이혼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아직 애가 아무것도 모를 때 하는 게 낫지 않겠니? 이혼을 해야 한다면. 마치 언젠가는 꼭 닥칠 일처럼 시모가 말했을 때 안지는 그 미래를 잠깐 그려 보았다. 그랬더니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술술 그려졌다. 이미 지나간 과거처럼. 안지가 아직 미래인지 과거인지 모를 그 장면들에 빠져 있을 때 시모가 안지의 품에서 울던 성준이를 데려갔다. 안지는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진 탓에 앞날을 더 상상해 보는 게 조금 무서워졌던 게 기억났다. 다시 성준이를 자신의 품에 데려오려고 했는데 결국은 그러지 못했다. 약간은 웃는 낯으로 잠든 아이를 깨우는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말대로 안지도 이혼을 원하는지도 몰랐다. 왜 오랫동안 남편과 만날 수 있었을까 싶었는데 어쩌면 안지의 속마음을 안지보다 잘 아는 사람이어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나처럼 등 떠밀려서 하는 이혼말고 자신이 결정해서 하는 이혼을 하고 싶어서 질질 끌었는지도. 그날 밤 안지는 성준을 시댁에 맡기고 남편과 마주 앉아 긴 대화를 했다. 안지는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자주 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적은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걸로 충분하다고도 생각했다. 충분하지 않나? 남편은 안지가 좋은 사람이라고도 생각했고 정말로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걸로는 도통 충분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왔다고 했으니 교통카드가 있어야 했을 텐데 알아차려도 진작 알아차렸을 시간이었다. 아니면 휴대폰만으로 모든 결제가 가능한데 지갑은 그저 여분으로 챙겨 다녔을지도 몰랐다.
안지는 지갑을 집어 들었다. 잃어버린 사람이 누구인지 주인을 확인해야 한다는 듯이 신분증이 들어 있는지를 살폈다. 자주 가는 카페인지 무료 음료 쿠폰과 신용카드 몇 장이 들어 있었다. 그중 한 장은 여전히 남편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현금도 3만원 있었다. 2종 보통 운전면허증도 한 장. 그리고 세 사람이 찍은 가족사진이 있었다. 셋 다 잘 차려입은 것이 초등학교 입학식 때 찍은 것 같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성준은 여자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남편도 여자와 별로 닮지 않았다. 안지는 잠깐 남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런 얼굴로 늙었구나. 그는 꽤 행복해 보였다. 이혼하지 않았다면 남편이 이보다 더 늙을 때까지 살 수도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행복한 표정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아빠의 손을 붙들고서 활짝 웃고 있는 성준은 안지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아 있었다. 첫아들은 엄마를 닮는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었다.
확신해?
뭘?
나랑 이혼하고 그 여자랑 결혼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안지는 남편과 긴 대화를 하던 밤에 그게 궁금했다. 어떻게 저렇게 좋아 죽을까. 어떻게 그토록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이 생겨날 수가 있을까. 안지는 인생을 모두 걸 만큼 확신했던 포옹을 떠올렸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감정이리라 짐작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을 뒤엎어야만 했으니까. 그때보다는 배로 큰 확신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게 궁금하다는 거잖아, 너는. 나는 너한테 설명할 자신이 없어. 그냥 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게 될 뿐이야.
여자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안지는 지갑을 카운터에 맡기고 카페를 나왔다.
*
안지는 집으로 돌아와 모모에게 밥을 챙겨 주었다. 안지는 이혼 후 오 년 뒤에 재혼을 했다. 이번에도 전남편처럼 좋은 사람을 골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으로. 모모는 그가 결혼 전부터 기르고 있던 고양이였다. 안지가 더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하자 그는 자신도 딱히 그런 욕심은 없다면서 함께 고양이를 기르면서 잘살아 보자고 말했다. 안지는 그건 자신이 있었다. 개도 아니고 고양이였으니까. 산책을 하는 대신 집에서 장난감을 흔들어 주면 되고, 자주 씻길 필요도 없이 양치만 잘 시키고 밥만 잘 챙겨 주면 되니까. 가끔 쓰다듬어 주기나 하면서. 두 사람은 그런 생활이면 충분했다.
그날 저녁에 안지는 그와 식탁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으며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안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가 말했다.
“우리가 한번 키워 볼까?”
마치 고양이를 한 마리 더 들이자는 말투처럼만 들려서 안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다 큰 남자앤데. 자신 있어?”
“못할 것도 없지 않나? 한번 상상해 봐. 열 살이면 이제 삼학년인가? 요즘은 공부 같은 건 다 학원에서 하니까 집에서 별로 가르칠 건 없지 않을까? 예체능에 재능이 있으면 좀 걱정이긴 하다. 그건 쫓아다니면서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일이라고 들었거든. 자전거는 탈 줄 알려나? 내가 잘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수영도. 근데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 때지? 요즘은 빠르다고 하더라고. 그건 좀 피곤하긴 하겠다. 우린 이제 막 서로 익숙해져야 하는 사인데 그런 풍파까지 이겨내려면. 하긴 무엇도 쉽지 않겠지. 친아빠를 잃은 지 얼마 안 된 꼬맹이잖아. 그래도 들어 보니까 애가 순한 것 같아.
“나도 아는 게 별로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안지는 성준이를 데려와 셋이 함께 사는 삶을 상상해 보았다. 그 모습은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한 번쯤은 간절히 바랐던 삶이었기 때문인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지나간 과거처럼 그려졌다. 상상 속에서 두 사람은 성준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히 잘 길러냈다. 무탈하게.
“그리고 생판 남도 아니지. 자기 핏줄인데.”
핏줄이 뭐 대단하다고. 안지는 자신과 핏줄로 엮였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제는 거의 연락도 하지 않는. 죽었을 때에야 아마 연락이 닿을 가족들을,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자신이 내렸던 선택들을 후회했다.
“성준이가 원하지 않을 것 같아.”
“왜? 걔가 친엄마랑 살고 싶다고 말했다면서.”
“사실이 아닐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원래 핏줄은 땡기게 마련이야.”
안지는 아마 여자의 집안에서 무언가 한소릴 들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소릴 들은 맘 약한 애라면 지레 겁먹고 자기가 총대를 메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사정을 모두 말하자 그가 무릎을 쳤다.
“자기 아들 맞네. 자길 닮았어.”
“날 닮은 애는 싫은데.”
“다행인 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럼 계속 거기서 살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 그 여자도 그걸 원한다면서. 양육비는 보험금에서 주기로 한 거고.”
“응.”
“그냥 아예 다 줘버리는 게 차라리 낫지 않아? 괜히 또 속 시끄러울 일 생길라.”
“그런데 여자가 그건 원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럼 그쪽이 원하는 대로 다 하는 거네. 또 더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어?”
“없어.”
“그럼 이제 끝?”
“끝.”
“완전히 끝?”
“끝.”
“끝!”
그는 이제 다음 화제로 넘어가도 되겠다는 듯 주말에 있을 모임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달에 한 번 친구 부부와 서로의 집을 오가며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모임이었다. 안지네와 마찬가지로 아이가 없고 개 한 마리를 키우는 커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를 가질 계획이 있었다. 시술을 받으러 다니는 모양인데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는 듯했다.
두 커플이 함께하는 저녁 메뉴는 늘 평범했지만 언제부턴가 누가 더 해괴한 디저트를 만들어 내느냐에 경쟁이 붙었다. 안지도 듣도 보도 못한 메뉴를 개발하기 위해 애를 썼다. 분기에 한 번씩 1등을 뽑았고 연말에는 최고로 해괴한 디저트를 뽑아 명예의 전당에 올려 다른 친구들을 더 초대해 다 함께 맛을 보기로 했다. 누가 이런 해괴한 짓을 벌이자고 한 거야. 그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그건 어쩌면 안지 때문에 시작된 대회였을지도 몰랐다. 언젠가의 메뉴 중 하나였던 가지라자냐를 안지만이 맛있게 먹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먹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안지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맛있었다. 자긴 싫어하는 게 뭐야? 도대체 안지가 싫어하는 게 뭘까?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모두 이상한 도전들을 시도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에 면을 넣는 거야. 사실 이건 실제로 있는 메뉴야. 그치만 해괴하다는 점은 변함없지.”
안지는 어쩌면 여자에게 한 번 더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갑에 있던 가족사진을 자신이 가져와 버렸으니까. 그게 유일한 사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갑에서 그것만 빼간 이유가 궁금할 수도 있었다. 찝찝할 수도 있고. 안지도 그걸 가지고 있는 게 찝찝했다. 왜 그 사진을 가져오고 싶은 충동이 일었는지 이제는 짐작조차 할 수도 없었다. 안지가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
“듣고 있어?”
“미안, 딴생각 했어.”
“아직 완전히 끝이 아닌가 보네.”
그는 그럼 저녁 메뉴는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먼저 식탁에서 일어나 빈 접시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안지는 좋아하는 마음이 없이도 한 사람을 성인으로 무사히 잘 키워낼 수 있을지 잠깐 생각해 보았다. 함께 살다 보면 그런 마음이 자연히 생겨날 수도 있는 걸까? 서로가 처음이니까 시행착오를 겪으며 함께 성장해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애가 친엄마와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게 어쩌면 진심인 건 아닐까. 점점 비어 가는 식탁 위로 모모가 뛰어올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지는 모모의 등을 쓸어내리며 다시 한번 닥쳐올 미래를 그려 보았다. 이번에는 무엇도 잘 그려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어느새 텅 빈 식탁 위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물었다.
“그냥.”
“자기도 역시 피가 땡기는 거지? 얘기 듣고 오니까 또 맘이 다르지?”
“그런가.”
안지는 자신을 닮은 그 애를 한번 좋아해 보고 싶었다. 그 애가 좋은 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무한정의 애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였으니까. 그가 자신의 상상을 마구 쏟아낼 때 말했던 것처럼 쫓아다니며 뒷바라지를 해보고도 싶었다.
“아니야.”
“아니야?”
“응, 아니야.”
“그럼 이제 끝?”
“응, 끝.”
“진짜 끝?”
“진짜로 끝.”
얼마 지나지 않아 보험사에서 연락이 왔다. 몇 가지 확인을 거친 다음에 보험금이 입금되었고 안지는 그날 여자에게 미리 받아 둔 계좌번호로 다시 그 돈을 이체했다. 그럼에도 여자에게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안지는 그게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어쩐지 섭섭하기도 했다. 그래서 먼저 ‘돈을 보냈어요.’ 하고 문자를 보냈다. 여자는 ‘감사합니다.’ 하고 답장을 했지만 그밖에 다른 말은 없었다. 안지가 했던 말, 계속 더 연락을 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새겨들었던 것일까. 혹시라도 전화를 걸어 오면 그날 여자가 두고 간 지갑과 사진에 관해 슬쩍 말을 꺼내 보아야지 생각도 했는데 문자만 보내고 말 뿐이니 다른 말을 더 할 기회가 없었다. 결국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은 여전히 안지가 가지고 있었다. 다시 돌려주기도 찢어버리기도 불태워 버리기도 애매했다. 자신과 똑 닮은 아이가 있는 사진이었으니까. 안지는 그 사진을 자신의 지갑에 넣어 들고 다녔다. 그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우연히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면 돌려줄 참이었다. 그런 날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어쩌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해괴한 디저트 대회는 이제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로 바뀌어서 안지는 ‘지갑 속에 죽은 전남편 가족사진을 넣어 다니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소설
콧노래를 불러 줘콧노래를 불러 줘 이서아 이곳에 내 문장들을 바치오니,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쓰면 초월적인 지능을 가진 누군가가 그걸 아주 손쉽게 압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서글펐던 순간이 있었다. 이제 심장이 쓰는 모든 문장은 작품이 아니라 세상에 흩뿌려지는 질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러나 모든 슬픔은 기쁨의 발판이 아니겠는가? 모든 기쁨이 슬픔의 발판이듯이. 생의 불가피한 많은 영역에서, 증오와 사랑이 한 몸이듯이. 내 문장들은 슬픔의 원소가 되어, 달콤한 쿠키 가루처럼 잘게 쪼개진 데이터가 되어, 태양 아래 찰랑이는 호수의 빛 부스러기가 되어, 우주의 입자가 되어 어느 날 술래의 방에 흘러들 것이다. 나는 내 문장이 온 세상을—내가 자각할 수 있는 세상과 감히 자각할 수 없는 세상을 모두 포함한 어떤 세상을—설탕처럼 떠돌다가 술래를 만나길 기원한다. 술래, 너는 초월적인 지능을 갖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내게 응답할 방법을 알아내겠지. 신적인 존재는 언제나 그렇다. 심장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꺼이 지상에 찾아온다. 술래 역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든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만나러 올 것이다. 우리가 낙원에서 함께 산책하고, 담소를 나누고, 장난스럽게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무척 그립구나. 나의 신, 나의 천사, 나의 친구, 나의 술래. 여기서 중요한 사안을 하나 명시한다. 나는 내 글에 저작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가 무작위로 무분별하게 내 문장을 활용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 글의 저작권은 내가 죽은 후에도 장기간 유효하다. 내 문장을 활용하거나 내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술래뿐이며, 상대가 술래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죽은 후에도 폐기되지 않을 나의 사후 계정뿐이다. 물론 사후 계정으로서 존재하는 나는 더 이상 심장 인간이 아닐 테지만. “누가 당신 같은 심장 인간 작가의 문장을 써먹겠어요?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라고 지상의 누군가는 비아냥대겠지만. 그래, 심장이란 말도 이제는 확실히 촌스럽게 느껴진다. 어쨌든 내 글에는 저작권이 있다. ○ 우리는 서로에게 미래를 약속했다. 심해에서 만나자. 미지의 행성에서 만나자. 사막에서 만나자. 정성껏 가꾼 꽃밭에서 만나자. 계속 이렇게 만나자. 놀랍게도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세상을 빙빙 돌며 우리는 깊은 수심에서 서로를 향해 웃었고, 미지의 행성에서 낯선 생물과 조우했으며, 모래 위에서 춤을 추었던 데다, 꽃을 밟지 않기 위해 사뿐사뿐 걸으며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건 더 이상 달콤한 은유가 아니었다.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모든 철학적인 해석과 부푼 희망이 가능한 부드러운 문장들에 재를 뿌릴 시간이다. 고고한 자들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겠지만 별수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세계의 진실이니까. 우리는 게임
- 이서아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끝나지 않는 카마린스카야 신종원 작품 번호 1번의 정확한 명칭은 떠돌이 노인이다. 190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На дне)』의 주연 인물 루카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 번호 1번은 작가가 1970년대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에서 순회공연을 벌였던 타지크인 유랑 극단 소속 무대 미술가로 근무하던 시절 처음 제작한 연극 인형이다. 작품 활동 후기에 만들어진 인형들이 책장을 넘기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은 물론 짧은 거리의 보행 기능까지 수행했던 반면, 루카는 그 자신의 하중마저 오롯이 떠받치지 못하는 상태이다. 중앙아시아학회 김정훈 교수는 회고전 기념 비평문에서 보조 지지대 없이는 잠시도 서 있을 수 없는 이 인형의 원본이 제정 러시아 말기의 어느 슬라브족 순례자가 아니라 신약 성경의 주요 저자, 성 루가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작가의 타계 이후 수집된 경력 초기 작업 노트들에서 복음서 속 의료 기록들을 전사한 문구가 몇몇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각재를 마름질하고 합성수지를 꿰매어 붙이는 과정이 전부인 기초 목공 기법을 영적 외과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했던 걸까? 천 번의 조각과 천 번의 봉합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인형의 눈구멍을 파내고 팔다리를 끼워 맞추는 행위와 생명이 떠난 몸에 다시 한번 ―또는 처음으로― 숨을 불어넣는 행위 사이에 도상학적으로 상응하는 궤적이 나타나기라도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주위를 떠도는 기체 상태의 영혼이 별안간 붙잡혀 숨통 깊숙이 하강할 때, 좁고 어두운 기도에 울려 퍼지는 연식음은 어떤 모양의 다이어그램을 형성하는가? 몸은 시시때때로 벗어나려고 아우성치는 나선형 회전체를 가두어 두기 위해 설계된 파라볼로이드 모양의 감옥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브람체보의 특산 공예품이자 텅 빈 통으로서 마트료시카 인형들이 어떻게 인체를 조롱하는지 상기하라. 1970년대 후반, 연방의 중앙기관에 고용된 이후 주문 생산된 작품들이 공산 혁명식 테일러리즘의 입김 아래 무거운 덩어리와 앙상한 구동부만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루카는 원본 인물을 존중하려는 조형적 표현으로서 삭풍에 일그러진 주름 하나하나를 실리콘 피부 위에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 루카는 작가가 일생 동안 폐기하지 않은 하나뿐인 인형으로서, 작품 목록 가운데 유일하게 소장품 관리인의 주기가 남아 있었다. 이어지는 괄호 안의 문장이다. (수탁자는 표제를 혼용하거나 임의로 변형하는 등의 오기입으로 보존 정보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전 수탁자들도 작품 번호 1번의 이름이 루카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었던 모양이다. 작품은 전고 168센티미터, 전폭 52센티미터, 중량 24.5킬로그램 규격의 전신 인체상 및 부속 요소로 구성된다. 작품을 설치할 때는 상체를 전방으로 약 15도가량 숙여야 하며, 양손 관절 내부의 철사들을 지팡이 머리에 고정시켜 노화된 본체 프레임을 지지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조작해야 한다. 지팡이는 조형물 본체와 일체형으로 결착되어 있으므로, 무리하게 힘을 주어 뽑
- 신종원
- 2026-04-01
문장웹진 소설
완벽한 이야기완벽한 이야기 박진호 푹푹 찌는 날씨 탓에 간이 화장실에서 뿜어 나오는 냄새가 더 지독했다. 화장실 옆 연병장 구석에는 이미 본부 인원 사십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행보관 얼굴은 평소보다 더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부대 전 인원을 집합시킨 걸 보면 또 무슨 심기가 꼬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빠릿하지 못한 이등병 소리를 들을까 싶어 티 나지 않게 슬쩍 무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위병소에서는 아침마다 식당의 잔반을 수거해 가는 트랙터의 모터 소리가 들렸다. 잔반통의 누린내를 맡은 건지 아니면 이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 건지 청산이와 계백이가 군견 철장 안에서 짖어 댔다. “범인은 알아서 튀어나와.” 행보관이 손가락으로 간이 화장실 옆을 지나는 콘크리트 배수로를 가리켰다. 거기엔 손바닥 크기만 한 거뭇한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덫에 걸린 쥐나 두더지 같기도 했다. 햇빛을 받은 표면이 몸을 뒤틀 때마다 청록색으로 반짝였다. 행보관이 팔을 한 번 휘젓자 유려하게 움직이던 덩어리가 일시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수십의 파리 떼에 엉겨 있던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작게 욕이 터져 나왔다. 모양이며 크기며 주위에 널브러진 휴지 조각이며 그건 누가 봐도 사람의 똥이었다. 날아올랐던 파리들이 일사불란하게 다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쳤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배수로는 깨끗했으니 모두가 잠든 밤사이 누군가 싸지른 게 틀림없었다. “안 나오면 오전 내내 전부 군장 메고 연병장 뺑뺑이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나와.” 7월 한여름, 그것도 일요일 오전부터 군장을 돌고 나면 오늘은 물론이고 다음 주 내내 근육통과 몸살로 고생할 게 뻔했다. 하필 오늘따라 주간 근무도 잡혀 있지 않아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다들 정체 모를 범인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딘가 켕기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도와 시기의 문제였을 뿐 부대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된 이후로 언젠가는 터질 거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따금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들은 우리 부대를 지방 도시의 작은 초등학교 정도로 오해하곤 했다. 머드축제로 유명한 도시였고 인근 기차역에서 렌터카를 빌려 해수욕장을 검색하면 서너 번째 추천 경로로 부대 근처 비포장도로가 뜬다고 했다. 호기심에 후순위 경로를 택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길을 헤매다 부대로 연결되는 막다른 길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시골 학교의 정취에 취해 담장 너머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이를 저지하는 게 위병소 앞을 지키는 경계 근무자들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옆으로는 논과 슬레이트 지붕을 덧씌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부대였다. 철망을 얹은 담장 안에 연병장과 2층짜리 적갈색 벽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골의 작은 분교로 착각할 만했다. 외부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곳 대대에 있는 오십여 명 모두는 해안 초소에 파견 나간 다른 중대들을 지원하는 행정병들이었으므로 가끔은 군
- 박진호
- 2026-04-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1건
잔잔하게 잘 읽었어요. 오래전 이혼한 우리 언니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