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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링크

  • 작성일 2024-08-01
  • 조회수 1,258

   미싱링크


지혜



   네 동생을 데려와. 엄마가 그렇게 말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내 동생이 될 뻔한 존재는 오래전 엄마의 뱃속에서 사산했고 그 사실에 나는 아무런 혐의가 없는데. 이름도 없는 존재를 사랑하는 건 본능일까 재능일까? 엄마는 사랑의 능력을 타고난 걸까 단지 사랑할 존재가 필요했던 걸까? 나는 엄마가 시게루,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잠시 머물뻔했던 아빠의 이복형제의 아들에 대해 종종 말하고 싶어했던 마음에 대해 알고 있다. 정작 엄마는 시게루를 만난 적도, 그가 사는 곳에 가본 적도 없었으면서. 나는 엄마가 만난 적 없는 아이를 그리워하듯 시게루라는 실존 인물 ― 그는 나고야의 한 전자상가 사장이 되었고 얼마 전 결혼을 했다 ― 을 주기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를 끝끝내 묻지 않았다. 세상에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진실도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한 가지, 엄마는 모르고 나만 아는 기억에 대해 언젠가 발설하고 싶은 마음을 영원히 억누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빠가 회사에서 승진하며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셋집 ― 아빠 쪽 먼 친척의 소유였던 ― 을 떠나 도시 외곽의 넓고 큰 아파트로 이사했다. 지은 지 오 년쯤 된 아파트는 당시 손에 꼽게 비싼 집이었고 고급 자재와 세련된 인테리어, 빌트인 가구 ― 요즘 말로 ‘옵션’이라 불리는 ― 가 놓인 점을 자랑하며 요란하게 광고를 해댔다. 세 개의 방과 거실, 기역 자 싱크대가 놓인 부엌과 두 개의 베란다가 있는 정남향의 아파트에는 오래된 피아노와 십자 장롱, 족보가 놓인 커다란 장식장이 제 자리인 듯 거실과 방 한구석을 장승처럼 차지하고 있었다.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 재건축을 앞두고 철거를 기다리는 와중에 호러 유튜브를 찍거나 퇴마를 한다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컬트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때 아빠에게는 무리를 해서라도 아파트로 이사 갈 이유가 있었다. 오랜 노력 끝에 엄마는 임신 사 개월에 접어들었고 산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마른 몸은 난산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절대 안정. 그게 당시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납작한 배를 문지르며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분명 아들일 거야.” 엄마는 커다란 거북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꿈을 꿨다고, 그건 분명 아들을 낳는 꿈이라고 말했다. “그럼 나는?” 나는 줄곧 궁금했던 나의 태몽 ― 물을 때마다 답이 바뀌던 ― 에 대해 다시금 물었다. “넌 향긋한 과일 밭에서 온갖 열매를 따 먹는 꿈이었지.” 과일? 고작 열매 먹는 꿈이라고? 나는 엄마의 빈약한 상상력과 취향에 비웃음이 났지만 과거를 회상하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입을 다물곤 했다. 당시에는 병원에서 태아 성별을 알려주는 게 불법이었지만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파란 옷을 준비하시면 좋겠네요”라든가 “다리 사이에 손가락이 보이네요” 같은 노골적인 비유가 산모들의 공공연한 암호처럼 돌아다닌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비유는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의사는 엄마에게 파란 옷을 준비하라고, 아빠를 닮아 건강한 ‘자식’일 거라고 넌지시 말했지만 ― 그 말은 딸이라면 아빠를 닮지 않을 거라는 뜻일까? ― 정작 태어났을 때 나는 다리 사이에 ‘손가락’이 없는 명백한 딸이었다. 그러므로 엄마의 꿈과 초음파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가 없는 것이다. 엄마는 나를 만났을 때 실망했을까 체념했을까? 혹은 반가웠을까? 이번에 태어날 아기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나는 급기야 만난 적 없는 아기에게 이유 모를 적대감까지 생겼다. 너도 날 만나면 반가워할까? 엄마가 널 기다렸던 것처럼? 나에게 해를 끼친 적 없는 존재를 미워하다 보면 한 가지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불러온다는 것. 나의 미움은 어린이 저축통장의 납입액처럼 날마다 조금씩 쌓여갔지만 그 사실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체없는 미움이 얼마나 커다래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이사 후 나에게 생긴 가장 큰 사건은 내 방이 생긴 것이었다. 더 이상 어른들의 물건으로 가득한 방에서 엄마, 아빠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지 않아도, 누군가 빠져나간 이부자리의 온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지 않아도 된 것이다. 동쪽 벽으로 난 창문 아래 반듯하게 깔린 이부자리, 어린아이에겐 다소 큰 책상과 사무용 의자, 속이 보이지 않는 삼 단짜리 여닫이 수납함과 백합이 수놓아진 방석, 삐걱대는 경첩 소리와 함께 수납함 문을 열면 내가 가진 모든 물건을 그 안에 담을 수 있었다. 나는 수납함 안에 나의 보물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안데르센 동화책 선집, 세계명작동화가 녹음된 오디오테이프, 미미와 쥬쥬, 쥬쥬의 1인용 소파, 미미의 강아지 알렉스와 인형들의 드레스 두 벌, 선물 받은 머리핀과 곱창 밴드, 그 모든 것이 들어가는 커다란 틴케이스 여행가방. 나는 가방에 내 모든 물건을 넣고 언젠가 먼 곳으로 떠나는 때를 상상하곤 했고, 머지않아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방 안의 물건들은 내 것이었지만 나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창문이 난 한쪽 벽에는 당시 유행하던 포인트 벽지 ― 붉은색 스트라이프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꽃무늬가 번갈아 인쇄된 ― 가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모조 원목 무늬의 비닐장판이 깔려 있었다. 옥색 문이 달린 작은 옷장 안에는 엄마와 아빠의 잡동사니가 정돈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고 특히 그 방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커튼은 엄마의 단골 인테리어 가게 ― 엄마는 그 가게에서 집안의 거의 모든 패브릭 물건을 맞췄다 ― 에서 주문한 초록색 체크무늬 제품이었다. 방충망처럼 자잘한 간격의 체크무늬 사이로 아침 해가 들어오면 그제야 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걸 실감하며 잠에서 깨곤 했는데 그 습관이 온전히 몸에 밴 건 이사하고도 일 년쯤 지난 뒤였다. 

   엄마는 우리 가족 중 가장 강력하고 분명한 취향을 가졌지만 동시에 취향들 사이에 아무 인과도 없는, 단지 좋아하는 것들을 한 곳에 모아둠으로써 자족하는 쪽에 가까웠다. 당시의 엄마에 대해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소망으로 이루어진 삶. 엄마는 바라고 원하면 언젠가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만물소망교도 ― 아마 그런 이름을 붙여도 무방하다면 ― 의 신자였다. 그 신앙의 성전은 다름 아닌 우리 집, 아빠의 명의로 된 아파트였다. 

   이 시점에서 아빠의 가족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 엄마와 나를 제외하고 그가 선택하지 못한 가족들에 대해서. 새집에서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마을에서 아빠는 태어났다. 어째선지 엄마와 나는 그곳에 가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딱 한 번,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에 간 적이 있다. 마당에 커다랗게 천막을 치고 직접 잡은 돼지를 삶아 종일 썰어대는 아저씨들과 쉴 새 없이 음식을 나르는 여자들, 잔치라기엔 어딘지 간소한 가짓수의 반찬과 끝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나는 어째선지 친밀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언젠가 저곳에 내가 앉아 있을 것만 같은 예감 때문이었을까. 고기 누린내와 기름 향, 음식을 지지고 볶는 냄새가 끊이지 않는 부엌을 보며 나도 언젠가 그들 사이에 섞여 삶은 고기를 썰며 음식을 만들고 접시가 든 커다란 쟁반을 날라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아빠가 그들과 절연했으므로 더 이상 그곳에 갈 일이 없게 되어버렸지만. 할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한 후엔 고향과 연관된 어떤 주제도 꺼낸 적이 없게 되어버렸지만. 그곳은 내가 태어난 곳도, 기억하고 미화할 추억이 있는 곳도 아니었으므로 아빠가 아니었더라면 나야말로 그곳으로 가거나 그리워할 이유조차 없었다. 당연하게도 아빠가 죽은 후, 한 번도 그곳에 간 적은 없다.

   어느 깊은 밤, 나는 손톱보다 작은 야광별 스티커가 붙은 내 방 천장을 바라보며 언젠가 갖게 될 나만의 집에 대해 생각했다. 모든 문이 유리였으면 좋겠어. 해가 비치면 반짝거리게. 바닥도 유리, 가구도 유리, 벽이 온통 유리여도 좋을 것이다. 혹은 투명한 플라스틱이어도 괜찮겠지. 나는 특별한 게 필요해. 가랑이 사이에 손가락이 없으니까. 방에는 인어공주와 해가 그려진 포스터를, 거실에는 레이스가 달린 실크 커튼을 달 것이다. 싱크대는 필요 없다. 나는 요리를 할 줄 모르니까. 또 어떤 가구가 좋을까. 거실에는 기둥을 세울까? 숨을 곳이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강아지나 고양이와 함께 살아도 좋겠다. 엄마는 동물을 싫어하니까. 나 혼자 살게 되면, 나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 방의 불만족스러운 부분들을 상당수 모른척할 수 있었고 인내심이라는, 특정 시기를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엄마의 입버릇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정함 속에 섞인 불순물처럼, 무언가를 견뎌야만 완성되는 시한부 만족의 나날들.


   그즈음 나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습관 하나를 갖고 있었다. 한밤중, 잠에서 깨 방을 빠져나와 거실을 서성이는 것이었다. 처음 그 상태를 목격한 건 새벽녘에 잠에서 깬 아빠였다.

   “너…… 뭐하니?”

   아빠는 처음 본 광경에 화가 나기도, 혹은 겁이 나기도 한 것처럼 물었다. 그때 나는 반쯤 눈을 뜬 채 천천히 아빠를 지나쳐 엄마가 누워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엄마의 옆에, 마치 처음부터 그곳이 내 자리였던 양 자연스럽게 누워 엄마의 겨드랑이에 얼굴을 묻었다. 고소한 살결과 땀내, 희미한 군내가 나는 부드러운 틈에서 익숙한 숨결을 들이마시며. 다음날 나는 간밤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잠에서 깼다. 그 일은 몇 번이고 계속됐다. 이듬해, 엄마가 밤에 안방 문을 잠글 될 때까지 그 이상한 버릇은 일 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해, 계절이 바뀔 즈음 아빠와 나는 아파트 공터에서 저녁마다 배드민턴을 쳤다. 아빠는 해병대 출신이었고 등산을 비롯한 온갖 레저 활동을 즐겼는데 ― 그의 취미가 해병대라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함께 운동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족 외에 여가를 보내는 친구도 없었고 낯을 가리는 통에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함께 족구를 하자고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가 내심 내가 얼른 자라기를, 함께 공을 찰 정도가 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그를 닮았다는 것, 그를 닮아 체육 활동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또래보다 좀 더 잘하는 편이라는 점이 그가 나를 저녁마다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 본다. 

   아파트 공터에는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는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우리는 공터 한가운데에 마주 섰다. 라켓은 한 손에 잡기에 버거울 정도로 컸다. 맞은편에서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콕을 라켓 한가운데에 대고 말했다.

   “자, 정신통일 해.” 

   정신통일, 그건 그가 입버릇으로 자주 쓰던 말 중 하나였다. 하고 많은 구호 중 하필 왜 그 말이었을까. 나는 그가 딱히 나의 정신을 통일하고 싶었던 것도,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싶었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 말을 내뱉음으로써 생기는 어떤 결기, 공기의 흐름 같은 걸 좋아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후에 학교에서 어떤 말을 외치며 죽음을 맞이한 내 또래의 남자아이 ― 공산당이 싫어요! ― 를 알게 된 후 세상의 비밀 한 가지를 엿본 기분이 들었다. 어떤 삶은 그가 마지막에 외친 말로 남기도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나는 죽을 때 무슨 말을 남기고 죽게 될까? 아빠는? 엄마는? 설마 정신통일, 그 말을 아니겠지?

   3월이 되자 저녁에도 제법 쌀쌀함이 가셨다. 어느 날 퇴근 직후, 아빠는 나를 데리고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스포츠용품 가게에 갔다. 그곳에서 배트민턴 라켓과 콕 한 세트, 성인용 축구화와 배구공, 테니스 공 한 줄을 샀다. 그렇게 많은 공이 왜 필요하냐고 묻자 쉬는 시간에 할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빠는 공공기관 소속 공무원이었고 여덟 시에 출근해 여섯 시가 되기도 전에 집에 도착했다. 나는 아빠가 회사에서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퇴근한다고, 원한다면 집에서 일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아침 일찍 출근한다는 엄마의 말을 믿고 있었다. 그가 퇴근할 즈음 어김없이 집 앞 주차장에 울려퍼지던 자동차 엔진소리, 그 시간대의 아파트 풍경은 가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소리가 들릴때면 재빨리 뛰어대던 심장의 박동까지도. 

   그날도 저녁을 먹고 아빠는 나를 데리고 아파트 공터로 갔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날씨가 마치 태풍이 올 것 같았다. 정작 태풍이 오려면 반년이나 더 있어야했지만. 아빠는 새로 산 라켓을 연습해야 한다고, 더 늦으면 손이 굳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나를 보챘다. “자, 정신통일하고 콕 끝을 잘 봐.” 아빠가 자세를 잡고 맞은편에서 서브를 보냈다. 나는 아빠의 말대로 콕 끝을 바라보며 라켓을 휘둘렀다. 휙, 휙 소리를 내며 포물선을 그리는 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할 만했다. 사실, 아빠의 외모와 더불어 신체 능력을 물려받았다는 건 살면서 꽤 도움 되는 사실이었다. 유년 시절 체력장이나 체육대회에선 늘 상위권이었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눈앞에서 놓치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런 능력을 타고났다고 해서 내가 그를 용서해야 할까? 건강한 몸을 주었으니 당신이 나에게 저지른 일은 모두 아무렇지 않다고? 쌤쌤이라고? 

   아. 나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든 라켓을 놓쳤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탓이었다. 그가 보낸 콕이 나를 지나쳐 저만치 날아갔다. 손바닥이 잘못 구운 빵처럼 빨갛게 부어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이 넘게 배드민턴을 친 참이었다. 나는 이만 들어가자고, 오늘은 일찍 자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때 아빠가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 뺨을 쳤다. 너무 재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억겁 같은 찰나가 지나고 그제야 나는 그가 나를 때렸다는 것을, 솥뚜껑처럼 굵고 커다란 손마디가 내 여린 피부를 치고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똑바로 서.”

   그는 나에게 다시 라켓을 잡으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자정이 될 때까지 배드민턴을 쳤다. 나는 오류 없는 기계처럼 그가 원하는 대로 서브를 받아냈다. 얼얼한 뺨은 시간이 지나자 얼음 조각처럼 딱딱해졌는데 아마 내 기분이 그렇게 변한 것이리라. 혹은 나의 마음이. 비밀은 빛을 따라가는 법이니까. 그 밤, 그와 나의 긴 랠리는 잠에서 깬 엄마가 베란다에서 어서 들어오라고 외치는 소리에 끝이 났다. 집으로 올라가며 만족스레 내뱉던 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거봐, 하면 다 되잖아.”

   그 후 나는 실의에 빠질 때마다 커다란 손 하나가 나를 치고 가는 상상에 빠지곤 했다. 정신통일, 정신 차려. 다 네가 하기 나름이야. 정말 그럴까? 모든 게 나의 탓일까? 우리의 미래, 우리의 비밀, 나의 비밀은 나만의 것. 나의 고통 또한 나만의 것.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종종 나를 실패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망령이 되어 내 안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 때문에 죽지도 못할 것이다. 약을 먹거나 물에 빠지려는 순간, 어김없이 나타나 이렇게 호통칠 테니까. “정신통일! 호랑이 굴에 빠져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면 내가 이런 기억을 남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늦잠을 자서, 먹다 남은 우유를 냉장고에 넣지 않아서, 신발 뒤축을 꺾어 신어서, 질문에 대답을 재빠르게 하지 않아서 등등. 폭력은 모기처럼 재빠르고 식은 빵을 삼키듯 손쉬웠다. 그건 눈을 감고 몇 초만 버티면 견딜 수 있을 정도로만 아팠다. 커다란 바퀴벌레가 정수리 위에 떨어진 것처럼. 아주 잠깐 동안 내가 나를 잊어버리면 없었던 일이 되는. 그는 결코 한 번 이상 때리지 않았다. 한 번은 나에게 물이 든 잔을 식탁에서 치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잔에 든 물을 나에게 뿌린 적도 있다. 잔을 던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가 나를 상습적으로 학대하고 폭행한 것 같지만 나는 그것보다 그가 나에게 왜 그랬는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내가 자라는 동안 내내 일어났던 사고 같은 사건들에 대해. 어쩌면 그건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사고일지도 모르니까.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딸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한, 혹은 잘못 알았던 한 남자의 실수라고, 해병대를 나와 귀신 따위 무섭지 않지만 열 살도 되지 않은 딸의 편식은 봐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나는 언젠가 나를 향해 내려치는 손가락 사이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 적이 있다. 나를 때릴 때 무슨 표정을 지을까, 닭의 심장처럼 궁금해하면서. 두꺼운 손마디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어째선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즈음에도 나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안방으로 가 잠을 잤다. 그와 나 사이에 엄마가 있다면 나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럴 거면 아예 안방에서 자라고, 네 방을 없애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기어코 아홉 시가 되면 내 방에 이부자리를 펴고 잠에 들었다. 그러고는 자정이 지나면 슬그머니 눈을 떠 반수면 상태로 방을 빠져나와 엄마의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여느 날처럼 안방에서 자던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거북이가 등장하는 꿈이었다. 거북이는 전에 나를 만난 적이 있듯이 나를 향해 느리게 기어 왔다.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 너머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거북이는 파도를 헤쳐 내가 서 있는 모래톱으로 건너왔다. 자동차만큼 커다랗고 지진 난 대지처럼 갈라진 껍질이 거북이의 등에 지붕처럼 얹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그마한 집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거북이를 향해 다가섰다가 등껍질 아래 드러난 속살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밧줄처럼 선명한 주름이 그의 목과 다리에 가득했다. 주름은 곧 무너질 모래성처럼 사지 아래 달라붙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그것들은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했고 나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는 소리쳤다. “저리 가! 오지 마!” 거북이 뒤로 둥그런 해가 마지막 불길을 거두듯 붉게 빛내며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갔다. 거북이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상기된 얼굴과 설레는 발걸음으로 나를 향해 계속 걸어왔다. 나는 바닥의 모래를 한 줌 집어 거북이를 향해 뿌렸다. 모래는 바람을 타고 주먹을 벗어나자마자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거북이가 걸음을 멈추고 모래 위에 우두커니 섰다. 정지된 집. 거북이는 잠시 후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무언가 변명하려는 마음에 너 때문이 아냐, 라고 속삭였고 거북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거북이는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다 안다는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가던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북이가 기어간 자리마다 모래 위로 길게 자국이 남았다. 거대한 건물이 하릴없이 쓸려가다 종내에는 사라지고 마는 흔적처럼. 이윽고 거북이가 바다에 다다르자 거대한 파도가 그를 마중 나오듯 집어 삼켰다. 거북이는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어째선지 섭섭한 마음이 들어 거북이가 떠난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데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나를 에워쌌다. 나는 내가 미처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른 채 잠에서 깼다. 이불은 모두 걷어낸 채였다. 잠시 후 나는 엄마의 볼록 나온 배, 나의 남동생일지도 모를 아기 위에 머리를 눕히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해 늦봄, 엄마는 아기를 유산했다. 임신 이십 주를 조금 넘긴 후였다. 소파수술이 이뤄지는 병원 대기실에서 아빠와 나는 나란히 앉아 엄마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지겨움에 설핏 잠이 들 때 쯤 파리한 모습의 엄마가 대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빠가 엄마를 부축하고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엄마는 한동안 안정을 위해 방 안에 누워 있기만 했다. 집안일은 아빠와 나의 몫이었다.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엄마가 아픈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거북이를 쫓아버리는 꿈을 꿨기 때문이라고, 사실 아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내 가랑이 사이에 손가락이 없기 때문이라고,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어쩌면 이목구비조차 확실하지 않은 내 동생을 죽인 게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고. 

   몸을 추스르자마자 엄마는 집을 떠나 외할머니댁으로 요양을 하러 갔다. 나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당분간 혼자 있고 싶어.” 그 말에 흔들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엄마가 없는 집은 둘만 있기에 너무 넓었다. 아빠는 퇴근 후 늦게 들어오는 때가 잦아졌고 나는 저녁을 거르는 일이 많아졌다. 아빠가 짜장면을 시켜 먹으라며 아침마다 돈을 줬지만 나는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두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기를 바라며. 아니,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며.

   어느 날 아빠는 해가 진 뒤에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아빠의 자동차 소리도,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거실 불을 끈 채 텔레비전을 보며 어서 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을 거르는 게 습관이 되어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다만 어서 밤이 오기를, 길고 얕은 잠 속으로 빠지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빠의 차가 도착했다. 나는 얼른 거실 불을 켜고 티브이 앞에 앉았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어둠 속에 혼자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처음 보는 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둘 다 술에 취해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저씨 기억나니?” 아빠보다 더 취한 그가 나를 보며 아는 척을 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그에게 손목을 잡혔다. 자, 용돈 해라! 그가 나에게 만 원짜리 몇 장을 건넸다. 나는 아빠와 지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가 준 돈을 받고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문밖에서 아빠가 냉장고를 뒤지며 술병 꺼내는 소리가 났다. 그는 거실 한 켠에 놓인 피아노를 가리키며 한 번 쳐보라고 말했다. 우리 가족 중 그걸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의 말대로 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크고 무거운 피아노 의자를 꺼내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빠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기억나는 대로 건반을 쳐 나갔다. 그때 내가 연주할 수 있는 건 소나티네에 실린 하이든의 소나타나 체르니 100번에 실린 곡들 뿐이었다. 그마저도 악보 없이는 연주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치든 그들이 만족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밤 중 자신의 말대로 피아노 앞에 앉은 어린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싶은 것일 뿐일테니까. 

   “그만, 그만하면 됐다!”

   내가 절대 곡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기억에 남은 희미한 멜로디에 마음대로 음을 붙여 창조해낸 무언가를 쳐댄 지 오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나에게 돈을 준 아저씨가 말했다. 늦었으니 가서 자라. 나는 아빠의 말대로 의자에서 내려와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밤, 아빠는 몇 명의 사람들을 더 불러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화투를 쳤다. 엄마가 있었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사실 저 사람은 내가 알던 아빠가 아니고 아빠의 얼굴을 한 다른 사람이 아닐까? 아빠는 나에게 저녁을 먹었냐고 물어 보지도 않았다. 나는 여전히 어색한 내 방 이부자리에 누워 이유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살기를 느꼈다. 문밖에서 떠드는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째선지 치욕처럼 느껴졌다. 엄마와 나, 그리고 아빠가 살던 곳이 더렵혀지는 기분이었다. 그건 모두 아빠 때문이었다. 모든 건 다 저 사람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에게 이 수모를 갚아줘야겠다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에게 ― 혹은 엄마에게 ― 줄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이라는 것을 그에게 반드시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어느 날 일본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을 때 아빠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아빠의 이복형제인 이치로 ― 시게루의 아버지 ― 였다. 아빠는 어색한 일본어로 무언가 대답하려고 노력했는데 아노, 스미마셍, 아······ 를 반복하며 대화다운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이, 모시모시가 오가고 말인지 추임새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다 통화가 끝났다. 그때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집에는 엄마가 만든 색색의 쿠션과 패브릭 소품들이 장식품처럼 곳곳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빠는 상기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본에 다녀와야겠어.”

   아빠가 어떻게 이치로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그와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눴는지 영영 알 길은 없지만 아마 조금쯤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의 시초인 그는 어릴 적 일본으로 넘어가 거의 그곳 사람처럼 살았었다. ‘거의 그곳’이라는 건 결국 그가 그쪽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평생 일본어를 입에 달고 일본어로 쓰인 책을 읽으며 일본 방송을 틀어 놓는 생활을 했다 해도 그가 말년에 눈을 감은 곳은 자신이 태어난 시골집 큰방의 아랫목이었다. 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의 입으로 들은 ― 그가 사실은 일본에서 죽고 싶었을 거라는 의심을 하곤 했다. 비록 일본에 아내와 아들을 두고 ― 그때 이치로는 고작 돌을 넘겼을 때였다 ― 고향에 돌아와 할머니와 결혼했다고 하지만,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아빠를 낳았다고 해도 할아버지는 줄곧 일본 생각을 하고 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언젠가 나고야의 신혼집으로 돌아가 그리운 아내와 아들을 만나는 것, 가능하면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사는 것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할 때 할아버지의 머릿속은 두 개의 방으로 나뉘고 각각의 방에는 절대 이어지지 않는 벽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한 번에 한 가정만을 생각했을 테니까. 그게 어릴 적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강제로 일본어를 배우게 된 이유였다. 나는 오랫동안 이 서사의 조각들을 모으며 짜 맞춰 마침내 조합한 뒤 어릴 적 세운 가설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어떤 비밀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가닿지 않는 이해의 영역에 있다. 나는 오랫동안 아빠에게 영향을 미친 할아버지를, 그리고 나의 유년을 집어삼킨 그와 그 ― 나는 가끔 그들을 분리할 수 없다 ― 를 이해해보려 노력했지만 그들 사이의 부서진 조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사건은 단순하다. 할아버지에게는 두 아내가 있고 그들은 각각 아들 한 명씩을 낳았다. 그리고 사십여 년이 넘어서야 그들은 말로만 듣던 서로를 처음 만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평생 동안 서로를 알지도, 무시하지도 못한 채 살아오던 두 남자가 어떤 이유에선지 만나게 된 이 시점에, 우연히 그들의 여정에 끼게 된 내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렇게 무언가를 남기게 되리라는 것을, 

   할아버지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을까? 


   아빠와 나의 급작스러운 일본행에 신난 건 엄마였다. 친정에서 돌아온 엄마는 그즈음 몸을 회복하고 활기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는데, 단골 인테리어 가게 ― 홈패브릭이라 불리는 온갖 천조각과 소품을 파는 ― 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기 시작하며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엄마는 아르바이트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엄마를 딱하게 생각한 가게 사장님이 자신의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라고 한 것 같았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엄마가 일하는 가게로 가 퇴근할 때까지 그곳에서 공부도 하고 숙제도 하며 놀았다. 사장님은 혼자 살며 가게를 운영하는 중년 여성으로, 주변에 어린아이 볼 일이 없다며 나를 예뻐해 주었다. 

   “일본에 동생 보러 간다며? 좋겠네.”

   일본 동생. 그때 내 머릿속에 시게루는 그런 이미지였다. 아빠가 일본의 이복형제 ― 이치로 ― 를 보러 가기로 한 뒤 못다 한 서로의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아빠는 국제전화로 이치로 ― 큰아버지 ― 와 몇 차례 더 전화를 주고받았고 급기야 출발하기 하루 전 그의 사진이 우편으로 집에 도착했다. 사진 속에는 정갈한 한글로 쓴 이치로의 편지와 ― 아빠는 끝끝내 그 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는데, 아빠와 어딘가 비슷한 인상의 큰아버지와 나보다 어린 남자 아이 한 명, 엄마 또래로 보이는 정장을 입은 단정한 인상의 여자 셋이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나는 그중 남자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봤다.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의 남자 아이는 단정한 반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갈색 가죽 멜빵을 차고 있었다. 눈썹에 맞춰 일자로 자른 앞머리는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정갈했고 불만이 가득 찬 동그란 눈동자는 왜인지 모르지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째선지 그 얼굴을 보며 꿈에서 쫓아버렸던 거북이를 떠올렸고 어쩌면 이 아이가 나의 새 거북이, 그러니까 사촌 남동생이라는 사실을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밤, 엄마는 나에게 새 옷을 입혀 주며 몇 가지를 당부했다. “꼭 아빠 옆에 붙어 있어. 모르는 사람이 어디 가자고 해도 절대 따라가면 안 돼.” 엄마는 나를 무슨 다섯 살짜리로 보는 걸까. 나는 피곤과 긴장으로 잠을 설칠 걸 알았으므로 엄마가 하는 양 그대로 두었다. 엄마는 가게 사장님이 만들어 준 새빨간 어린이용 원피스를 내 몸에 대며 만족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 아이 말이야, 네 동생.” 

   엄마는 ‘네 동생’이라고 말했다. 

   “시게루?” 

   “응, 시게루 말이야.”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그 애를 꼭 데려와. 네 동생이니까.”

   내 앞에. 엄마는 어쩐지 결기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외할머니댁에 다녀온 이후 엄마는 한결 편해진 모습이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동네라는 점을 빼면 엄마와 아빠의 고향은 하늘과 땅처럼 멀고 달랐다. 엄마는 어쩌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은 어째서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서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 어떤 사람은 왜 떠나서만 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엄마가 일찍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서 자신이 떠나온 곳을 바라보는 종류의 그리움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처럼. 

   그건 나의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당시 나고야에 가기 위해서는 김해공항을 경유해야 했다. 처음 타본 비행기는 티브이에서 본 것과 똑같아 별 감흥이 없었다. 이륙 후 도착까지의 시간은 한 시간. 나는 우기고 싸워 지켜낸 나의 틴케이스 가방 ― “그걸 꼭 가져가야겠니?”라고 묻던 엄마의 목소리 ― 손잡이를 손에 꼭 쥔 채였다.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나에게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음료 한 잔 드시겠어요?” 승무원의 질문에 뭘 마실지 고민하는 사이, 아빠가 선수를 쳤다. “오렌지주스 두 잔.” 나는 주스를 마시고 싶지 않았다. 결국 비행 내내 다 마시지 않은 종이컵을 들고 있느라 주스는 미지근해졌다.

   공항은 무척 근사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입구와 줄줄이 늘어선 택시, 차려입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비행기에서 내린 뒤 한 시간쯤 기다려야 했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와서 아빠에게 코코아를 사달라고 말했다. 코코아와 카푸치노, 우유 등을 파는 자판기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번도 자판기 코코아를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일본 가서 마셔.”

   “지금 마실래요.”

   나는 부러 사람이 많은 곳에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순간 표정을 바꾸고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절대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날 때리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고민하던 아빠는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빨리 뽑아.”

   나는 조심스레 코코아를 뽑고 아빠가 있는 벤치를 향해 걸어갔다. 손에 든 종이컵은 적당히 뜨뜻했고 문득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우리는 지금 경유하고 있어. 다음 비행기를 기다려야 해. ‘경유’라니, 무척 근사한 단어였다. 경유하는 동안 마시는 코코아는 더욱 근사할 테고. 벤치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나는 두 손으로 든 종이컵을 입으로 불었다. 한 모금을 머금으려는 찰나, 코코아 위에 뜬 까만 점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점에는 더듬이가 붙어 있었다. 개미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에 든 종이컵을 떨어뜨렸다. “엄마야!” 종이컵과 함께 코코아가 쏟아지며 안에 든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코코아가 가장 많이 튄 곳은 엄마가 입혀 준 새빨간 원피스의 치맛자락이었다. 무릎에서 한 뼘 아래 덧대어진 프릴 위로 점 같은 얼룩이 제각각의 무늬처럼 순식간에 생겨났다. 머릿속에 뜨거운 코코아가 튄 살결보다 더 무서운 것이 떠올랐다. 아빠는 날 때릴까? 난 일본에 못 가는 것일까? 눈앞에는 화가 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의 아빠가 서 있었다. 아빠는 재빨리 어딘가에서 휴지를 가져와 내 옷과 다리에 묻은 코코아를 닦아냈다. 코코아는 금세 원피스에 스며들었고 걸을 때마다 새 옷에 찌든 코코아 냄새가 났다. 

   “넌, 어쩜, 한시도, 넌.”

   아빠가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어느새 우리가 탈 다음 비행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앞서 걷는 그를 따라 거의 뛰어가며, 코코아가 든 종이컵에 빠져 있던 개미를 떠올렸다. 그 개미는 어떻게 자판기 안에 들어갔던 것일까? 왜 하필 내가 뽑은 코코아에 빠져 있던 걸까? 개미는 죽어있었을까 죽어가는 중이었을까? 언젠가 아빠에게 개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공항 밖은 후덥지근했다. 봄이었는데 날씨는 이른 여름처럼 열기로 가득했다. 아빠는 내 손을 잡고 지하철역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아빠를 따라가느라 몇 번이나 발걸음이 꼬여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그랬다가는 그가 나를 영영 그곳에 버리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정말 그럴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에 나는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아빠의 어깨 위에 고개를 올린 채 침을 흘리고 있었다. 아빠가 나를 보더니 의자에서 내려가게 한 뒤 자신 앞에 서 있으라고 했다. 나는 눈을 비비며 그가 이끄는 대로 역을 빠져나갔다. 사방에 많은 계단, 촘촘하게 박힌 바닥 타일, 뜨겁고 낯선 공기가 그곳이 내가 처음 간 곳이라는 걸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 낯선 공간에서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그곳은 오히려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역 밖은 소나기가 내렸던 것처럼 서늘하고 촉촉했다. 물기가 남은 거리의 아스팔트가 어쩐지 스산한 느낌을 줬다. 이전보다 낮아진 기온을 느끼자 기분이 좋아졌고 공항에서 엉망이 된 옷차림은 잊어버리게 되었다. 아빠는 한 손에 짐이 든 보스턴백을 들고 반대편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나는 내가 아빠의 관심에서 살짝 멀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두려움과 자유, 두 마음을 동시에 느끼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늠해 보았다. 

   시게루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애는 한국말을 할 줄 알까? 내가 부탁하면 나와 같이 한국으로 가줄까? 너는 이제 내 동생이라고, 우리 엄마는 좋은 사람이라고, 너도 분명 그를 좋아할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 될까? 

   멀리서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아빠의 혈육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승처럼 큰 키에 마른 몸, 다소 구부정한 어깨와 거무죽죽한 얼굴이 흡사 아빠의 다른 버전을 보는 것 같았다. 어두운 밤, 가로등 아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때라면 나는 아마도 아빠와 그 남자를 혼동할지도 몰랐다.

   남자는 천천히 걸어오더니 우리 앞에 섰다. 그도 우리의 얼굴을 알고 있던 것이다. 나는 아빠가 그가 했던 것처럼 그에게 우리 가족사진을 보냈다는 것을, 대체 언제 그런 깜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는 것보다 그와 더 많이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평생 남처럼 알려고도 하지 않다가 돌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그게 엄마가 아기를 잃은 것과 관련이 있는지 그때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건 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뜻이라는 걸 조금의 짐작도 할 수 없었을테지만. 

   나는 다시, 모든 일이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그 낮의 공원, 한낮의 열기를 느끼며 깨달았다.

   “하지메마시떼, 와따시와······ 와따시와 아나따노······.”

   남자가 아빠와 비슷한 얼굴로 아빠를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잠시간 둘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아빠가 물었다. “이치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이, 이치로 데쓰.”

   그는 아빠보다 서너 살 많은 나이였음에도 아빠보다 열 살은 더 어려 보였다. 둘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닮아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남자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남자의 무릎 정도 오는 키에 동그랗고 통통한 볼을 가진 시게루였다. 시게루는 남자의 허벅지를 잡고 얼굴을 내민 채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나는 어째선지 그 애를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 저기 가서 놀자.”

   나는 무작정 아이의 손을 잡고 두 남자 사이를 빠져나왔다. 아빠가 그 남자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 챘기도 했고, 어른들 사이의 비밀에는 아이가 참여할 수 없다는 이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 아빠의 비밀을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손을 잡도록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게루를 데리고 공원 저편으로 걸어갔다. 등 뒤로 아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내 거두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방이 막힘없이 뚫린 공원에서 길을 잃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시게루의 손을 잡고 보도블럭이 깔린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너 몇 살이야?”

   나는 으레 처음 본 아이에게 묻는 질문을 했다. 이름과 사는 곳은 알고 있으니 다른 정보가 필요했다.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듯이 시게루와도 금방 말을 터놓을 수 있을 것이다. 시게루는 대답 없이 멀뚱거리며 굳은 얼굴로 앞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혹시 그 애가 말을 못 하나 싶었지만 그런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면 내가 미리 알았을 것이다. 비밀과 사실 중 더 힘이 센 것은 어느 쪽일까? 매번 나중에야 찾아오고 마는 비밀과 달리 모든 이야기의 맨 앞에 서 있는, 사실이라는 진실의 문은 언제쯤 제대로 열리는 걸까? 

   그때까지 나는 한 손에 가방을 꼭 쥔 채였다. 가방 안에는 선물 받은 분홍색 곱창 고무줄과 알렉스 ― 미미와 쥬쥬 중 한 명만 데려오느니 둘 다 데려오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손수건, 알렉스의 밥그릇 ― 그건 내 주먹보다 작았다 ―, 그리고 이제껏 모은 돈이 들어 있었다. 나는 시게루가 내 가방에 관심을 가진다는 걸, 말이 없는 와중에 내 가방을 흘끗거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적당한 때에 가방을 열고 보여주리라. 곧 너와 이 안에 든 것들을 나눌 수 있다고 말해 주리라. 

   시게루의 손은 작고 뜨거웠다. 앞으로 계속 이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나는 줄곧 엄마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애를 꼭 데려와. 데려오라니, 어디로? 우리 집으로? 해가 지면 배드민턴을 치는 괴물과 알록달록한 커튼이 있는 그 아파트로? 시게루는 그곳을 마음에 들어 할까? 여기서 자신의 가족들과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처음 잡은 시게루의 손은 내 손에 딱 들어맞게 작았고 나는 그게 어쩌면 시게루를 데려갈 수 있다는 희망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다시 만난 거북이처럼, 시게루도 어쩌면 나를 따라 우리 집에 가고 싶을 거라고, 이미 그렇게 정해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떻게든 그에게 알려야 했다. 

   나는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시게루에게 건넸다. 시게루는 내가 건넨 가지를 건네받고는 몇 초간 눈을 깜빡이다가 재빠르게 공원 저편으로 달려 나갔다. “야!” 나는 시게루를 향해 소리치며 그를 따라갔다. 그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시게루는 발이 정말 빨랐다. 거북이와 시게루. 둘 중 진짜 동생이 되는 건 어느 쪽일까? 잠시 후 시게루는 공원 어느 구석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나무 아래 집채만 한 그늘이 나 있어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 시게루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이름을 외치며 나무 주변을 수색했다. 잠시 후 나뭇가지로 자신이 앉은 자리 주변을 파고 있는 시게루가 보였다. 나는 숨을 고르며 시게루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가면 놀라잖아.” 

   짐짓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내 말투는 아빠의 말투와 똑같았다. 조용하게 분노를 속으로 삭이는 형식의.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뭐 하는 거야? 그림 그려?”

   다시 보니 시게루는 땅을 파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앉은 주변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삐뚤삐뚤하게 이어진 둥근 선이 시게루와 나 사이의 공간을 완벽하게 분리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그가 그린 원 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네 집이야? 나 들어가도 돼?”

   나는 일부러 그가 관심 가질 만한 질문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애, 그러니까 아빠의 이복형제의 아들인 시게루와 나는 첫 만남을 그런 식의 불가해한 연극을 하며 흘려보냈던 것이다. 그때 그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나 또한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줄곧 한국어로만 말했고. 만약 시게루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도 나는 다른 언어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너네 아빠도 한국 사람이야?”

   나는 아빠에게 묻고 싶었던 것, 그러니까 아빠가 나를 데리고 비행기를 ‘경유’하면서까지 도착한 낯설고 아름다운 나라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을 시게루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이 그린 결계 ― 원 ― 안에 쪼그려 앉아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애꿎은 나뭇가지만 부러뜨리고 있었다. 어쩌면 시게루는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자신의 아빠가 자신을 데리고 온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아빠가 이곳에 혼자 올 자신이 없었던 것처럼, 그 ― 이치로 ― 또한 나의 아빠를 혼자 만날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른들의 비밀 때문에 애꿎은 어린아이인 우리 둘이 이곳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무이······.”

   그때 시게루가 처음으로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했다. 

   “뭐라고? 욕 한 거 아니지?” 

   나는 얼른 다시 물었다. “사무이······ 하라헷따······” 시게루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비가 내린 뒤라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었지만 장마철의 습한 공기가 공원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시게루가 원하는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너 내 말 다 알아듣지? 거짓말하면 엉덩이에 뿔 나.”

   나는 짐짓 무서운 표정으로 ― 아빠에게서 배운 ― 시게루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알아듣느냐는 건 짐작, 엉덩이 얘기는 진짜였다. “우리 반에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엉덩이 수술을 한 애도 있어.” 수술은 진짜, 거짓말 때문이란 건 짐작이었다. 적당한 진실에는 약간의 거짓이 섞이기 마련이니까. 반 아이는 엉덩이에 손가락만 한 종기가 나 한 달이 넘도록 학교에 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든 시게루에게 해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시게루가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시게루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마치 언젠가 본 적 있는 얼굴 같아서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보게!” 그때 시게루가 딱 봐도 욕 같은 말을 내뱉었고 나는 그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때까지 나는 시게루에게 내 소개를 하지 않은 채였다. 시게루 또한 나를 사진 속 사촌누나 ― 아빠가 사진을 보냈을 테니까 ― 라고 알고 있을 테지만 우리 사이에는 어떤 유대도, 반가움도 없었다. 두 아빠들과 달리. 

   스커트에서 나던 코코아 냄새는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 뱉어 놓은 토사물처럼 역해져 갔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시게루에게 차근히 말을 걸었다. 누나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나는 시게루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결계 밖으로 나오라는 시늉을 했다. 나뭇가지로 아무렇게나 그려 놓았지만 그가 그려 놓은 결계 안으로 함부로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그건 불문율이었다. 결계를 그린 사람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아무리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결계는 존중해야 하는 법이니까. 시게루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 분명 알아들었을 것이다 ― 원 안으로 더욱 들어가더니 나를 보며 입 밖으로 혀를 내밀었다. 메롱, 아니 모욕이었다. 순간 내 안의 어떤 감각이 부러진 과자처럼 잘게 조각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나는 그를 존중해 주려던 마음을 파기하고 결계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결계를 이기는 방법은 결계를 그린 사람보다 더욱 힘이 세면 되는 것이다. 파괴는 가장 쉬운 대화의 방식이니까. 부숴버리는 건 생각보다 무척 간단하니까. 

   정신통일 해.

   시게루가 나를 올려다보며 경악에 찬 얼굴로 소리 질렀다.

   “파파! 파파!”

   먼저 때린 게 누구였는지 모르겠지만 시게루는 자신보다 훨씬 큰 나에게 조금도 지지 않았다. 나는 시게루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쥐고 ― 그건 미미의 금발머리보다 얇고 부드러웠다 ― 세게 흔들었다. 시게루가 비명을 지르며 내 옷자락을 쥐었다. 프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옷자락에 묻어 있던 코코아 냄새가 났다. 결계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시게루의 작은 주먹이 나의 몸 여기저기를 찌르듯 난타했고 그럴수록 나는 시게루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찹쌀떡 같은 두 볼을 꼬집어댔다. 시게루의 피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처럼 희고 보드라웠다. 나는 그의 볼을 꼬집으며 이 아이가 정말 내 동생이 된다면 이 부드러운 살결을 마음껏 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게루의 볼을 꼬집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것들이······ 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동시에 우악스러운 손이 떡처럼 한데 붙은 시게루와 나를 떼어냈다. 시게루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파파노세이다! 파파노세이······ 시게루가 이치로를 보며 억울한 듯 소리쳤다. 결계는 사라졌다. 멀찍이 떨어진 틴케이스 가방이 흙더미에 섞여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그게 나와 시게루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다. 그 이후 엄마는 어떤 이유에선지 동생 얘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고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그의 이복형제에 대해 말한 적은 그의 장례를 치르러 몇 년 전 일본에 다녀왔을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내가 집을 떠난 지 오래였기 때문에 엄마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들었다. “네 아빠가 글쎄, 울었잖니…… 새벽 내내 말이야” 그래? 그 사람이? 그때 이미 나는 아빠를 보지 않겠다고, 가능하면 사는 내내 만나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였다. 

   방문객 없는 제사는 간소했다. 엄마와 나는 밤 10시가 되자마자 병풍을 피고 상을 차린 뒤 기억나는대로 제를 올렸다. 제사 방식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졌는데 그에 대해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심 제사같은 건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직 그 모든 수고를 감당하고 싶어하는 엄마를 위해, 자신의 정성을 사용하고자 하는 엄마를 위해 잠자코 있었다. 

   다음 날, 집을 나서려는데 엄마가 커다란 쇼핑백을 건넸다. 전날 종일 만든 제사 음식이 여러 개의 반찬통에 담겨 있었다.

   “잘 안 먹어.”

   “그래도 가져가.”

   “아, 안 먹는다고!”

   엄마와 나는 신발장 앞에서 말없이 대치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엄마였다. “이제 가면 또 언제 와?” 엄마는 부쩍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 명절 때쯤?” 나는 기약 없는 휴일을 가늠하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누가 보면 혼자 사는 줄 알겠어.” 

   “혼자 사는 거 맞잖아.”

   “내가 왜 혼자야?”

   혼자 사는 것과 혼자인 것. 엄마는 아직도 자신을 두고 내가 멀리 떠나 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 또한 태어난 곳을 떠나 연고 하나 없는 아빠의 고향에서 수십 년을 살고 있었으면서. 

   “네 작은아버지 기억나?” 

   누구?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접한 듯 다시 물었다. “네 아빠 동생 말이야. 어릴 때 너도 몇 번 봤었는데…… 엊그제 연락이 왔는데 글쎄 누구 얘기를 하는 줄 아니? 시게루라고 왜, 네 일본 남동생 있잖아……” 

   그렇게 된 것이었군. 나는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형사처럼 한숨을 내뱉었다. 

   “나한테 작은아버지가 어딨어?” 

   “왜 없어, 너 어릴 때 자주 만났는데.”

   “기억 안 나.”

   엄마는 더 할 말이 있지만 나중을 기약한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갈게요. 전화할게.” 나는 익숙한 현관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왔다. 아파트는 어릴 적 이사 온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나는 엄마가 그간 나에게 말하지 않은 수많은 비밀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빠, 작은아버지, 이치로, 시게루, 남동생······ 그러나 이제 와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엄마는 나에게 자신의 비밀을 함구하기로 했고 나 또한 그날의 기억을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우리는 이제 떨어져 사는 것만큼이나 멀고 많은 기억의 벽돌로 이루어진 비밀의 성을 몇 채씩 갖게 되었는데. 그건 앞으로도 수천, 수만 개로 늘어나 결국 우리는 서로를 영영 모르게 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기억의 공격에서 우리가 해방될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내가 아는 전부다. 가령 이런 비밀들과 함께. 

   그 밤, 큰아버지가 시게루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 뒤 아빠와 나는 말없이 공원을 걸었다. 해가 지는 공원 너머 커다란 타워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는 처음 보는 광경에 걸음을 멈추고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꼭대기에 석상이 달린 거대한 분수에서 물이 흘러내렸고 사람들이 분수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에 섞인 아빠가 어쩐지 그곳에 오랫동안 살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모르는 낯선 그의 모습이 한순간 결계를 뚫고 나타난 것만 같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의 결계, 때때로 나를 쥐어 팰 때나 드러나던 두려운 눈빛. 내가 그걸 다 이해해야 할까? 받아 줘야만 할까? 나는 손에 든 틴케이스 가방의 모서리가 종이처럼 구겨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제야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처음 본 사촌동생 ― 이라고 할 수 있다면 ― 과 싸우느라 내 소중한 보물을 일그러뜨렸다는 걸 깨달았고,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종일 비어 있던 뱃속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쓰라렸다. 무엇보다도 오줌이 너무 마려워 당장이라도 그곳에서 실수를 할 것 같았다. 도와주세요. 나는 아빠를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내며 내뱉을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아빠의 등 뒤로 해가 지며 그의 얼굴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하늘 푸른 공기. 그는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얼마간 날 바라보더니 이내 당연한 듯 다가와 나를 안아 올렸다. 그는 너무나도 쉽고 가볍게 나를 들어올리고는 처음부터 그곳이 나의 자리인 것처럼 익숙하게 내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내가 기다린 줄도 몰랐던 익숙한 향기가 그의 품에 가득했다. 나는 오랜만에 안기는 아빠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폭풍 같은 눈물을 흘렸다. 배고파요, 추워…… 그때 잠깐 나는 시게루를 이해했다. 낯선 곳에서의 낯선 만남은 때론 나를 배반하며 이루어지니까. 나의 체온, 나의 기분, 나의 상태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잠시 후 거짓말처럼 소용돌이같은 잠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때 눈물로 젖어 있던 건 내 얼굴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집에 가자, 집에······.” 그렇게 다독이던 소리가 나의 꿈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되리라는 것을. 다 식은 코코아 냄새와 축축한 오물로 더럽혀진 작은 몸을 안고 낯선 거리를 걷던 한 사내를 기억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이 내가 되리란 것을,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리란 것을 우리 둘 다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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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024-08-01
마샬

마샬 민병훈 너는 물에 젖은 곰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너는 동물원에 가자고 갑작스럽게 말했다. 너는 배를 잡고 크게, 오래 웃는다. 곰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 너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곰이 웃겨, 라고 물어 보는 대신 네 바지에 묻은 흙을 닦았다. 너는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으며 곰에게 손을 흔든다. 너는 동물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곰을 본다. 너는 평소 그런 식으로 하나의 대상을, 하나의 풍경을, 하나의 장면을 오래 응시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그사이 매점과 화장실과 흡연구역과 식물관에 다녀왔다. 너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눈을 깜빡이고 있다. 곰은 두 마리였다가, 한 마리가 철문을 통해 어딘가로 향하고, 너는 아쉬운 듯 쩝 소리를 내면서, 다시 물웅덩이에 들어가는 곰을 지켜본다. 너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입으로 소리를 낸다. 나는 네가 어떤 기분일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전부 알고 있다. 곰이었다니까. 좀체 흥분하지 않던 네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귀에서 잠시 삐, 이명이 들렸다. 휴대폰을 떼고 앞을 보자, 앞으로 넘어질 듯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잠실대교가 보였다. 언젠가 너는 시에서 대여하는 자전거를 타고 대교를 건넜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오도가도 못 하겠다고 전화한 적이 있다. 휴대폰 너머로,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너의 몸에 부딪혔다가 흩어지는 소리. 너는 가까운 곳에서 곰이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배달음식. 너는 그때 상반신만 겨우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고 봉지에 손을 뻗었다. 옆집 문이 열렸다. 너는 곰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곰은 자기가 음식을 주문한 것처럼, 하얀 봉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는 종일 밥을 먹지 않았고, 몸이 아픈 건 아니지만 기운이 없었다. 퇴근길에 내게 아무 음식이나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혹시 곰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시켰는지 떠올렸다가, 그보다는 곰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네게 놀라 가슴이 뛰었다. 어땠어, 묻자 곰이었지, 너는 말했다. 너는 동물원 폐장을 알리는 방송이 울리자 그제야 자리에서 벗어난다. 너는 뛰다시피 걷는다. 새로 산 운동화 끈이 풀린다. 허리를 숙여 끈을 묶는 동안, 너는 네가 본 그것이 저 곰만큼 크진 않았다고 말한다. 가면을 썼던 건 아닌지, 인형 알바 옷을 입었던 건 아닌지, 나는 묻지 않는다. 네가 등을 두드릴 때, 나는 다른 신발끈도 풀었다가 다시 묶는다. 지하철역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에 오르고, 너는 어깨에 기대 곯아떨어진다. 나는 버스가 운행 노선을 한 바퀴 더 돌 때까지 너를 깨우지 않는다. 수중에 있는 돈은 삼십오만 원. 너는 휴대폰 액정에 은행 어플을 켜고 내게 보여줬다. 이게 다야. 이게 다지만, 첫 인사에 빈손은 싫으니까. 너는 두 달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식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마침 겨울이었고, 동면에 든 동물처럼, 하루의 반 이상을 침대에서 잠만 잤다. 네가 하던 일은, 네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 최고관리자
  • 2023-05-04
일러두기

일러두기 조경란 모른다고도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재서에게 생겼다. 미용은 평소에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는 편은 아니지만 며칠 전에는 검은색 복면을 주문했다고 말했다. 손님이 텔레비전을 틀어 달라고 해서 채널을 돌리다가 여자 주인공이 눈과 입만 빼고 얼굴을 다 가리는 복면을 쓰곤 인질처럼 잡고 있던 아이들을 어떤 단체에서 구출해 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게 멋있어 보이기도 한 데다 주인공이 쓴 검정 니트 복면이 그 순간 못 견디게 갖고 싶었다고. 재서는 그 말을 하는 미용을 처음 보는 눈으로 봤다. 성인 여성 평균 키에서도 한참 모자라고 목소리도 작고 앳되며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수줍어하는 마흔아홉 살의 미용. 그녀와 검은색 복면은 아무래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숨 쉬는 데 편하고 시야도 가리지 않는데요. 미용은 에코백에서 검은색 복면을 꺼내더니 무릎에 올려놓고 반듯하게 폈다. 방한용 안면 마스크인가 본데 구멍 세 개가 뚫린 조금 긴 털모자 같았고 재서의 눈에도 영화에서 도둑들이 쓰는 것과 엇비슷해 보였다. 이걸 쓰고 다니실 건 아니겠지요? 재서는 자신이 잘 모르는 지점의 미용에게 물었다. 사람 일은 모르죠. 미용은 소리 없이 웃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고 소리 없이 먹고 마시고 심지어 노래할 때도 미용은 그래 보였다. 그래서 다른 가게 사장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의식하고 있지 않다간 미용의 존재를 까맣게 잊기 십상이었다. 그게 미용의 남다른 점이라면 점인데 얼마 전부터인가 재서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되었다. 재서는 인쇄․복사를 전문으로 하는 ‘대학사’의 오래되고 쿠션이 푹 꺼진 소파에 미용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가게였고 지금은 재서가 꾸려 가고 있는데 밖에서 보면 ‘♜대학사 COPY’라는, 한때는 눈에 띄었고 쓸모가 있었으나 최근엔 눈여겨보는 사람이 드문 간판이 무겁게 걸려 있을 것이다. 한 차례 장맛비가 지나가 후텁지근한 6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였다. 미용의 가게는 토요일이 휴무, 대학사의 휴무는 내일이다. 재서가 오른쪽 팔에 반 깁스를 하지 않았다면 미용이 쉬는 날 여기 오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미용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제일 먼저 왔다가 정작 고맙다는 말도 못 듣고 돌아가는 사람. 미용이 이 동네에 처음 나타날 때부터 재서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런 사람과는 더 거리를 두고 싶어서 재서는 미용을 더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도와주러 왔다는 말 대신에 미용은 정 사장님이 우리 집 단골이시니까요, 라고 얼버무렸다. 재서의 아버지가 미용의 우엉 전문 반찬가게의 조림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재서는 평소보다 풀이 죽어 있는 상태였다. 나흘 전 밤중에 장롱 한 짝이 방바닥으로 쓰러지면서 재서의 뒤로 쓰러졌다. 무슨 소리가 들려 순간적으로 피하긴 했는데 장롱 모서리가 오른팔 팔꿈치를 스치듯 쳤다. 아버지 말대로 만약 장롱이 머리로 무너졌다면. 집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상상은 한

  • 최고관리자
  •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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