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 작성일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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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백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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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가 다시 나타난 건 반년 만이었다. 그 애가 신용카드를 훔쳐 달아난 후 내가 분실신고를 하기까지는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사이에 세주는 370만 원을 사용했다. 그 돈을 지금까지 분할해서 갚고 있는 내게 이번에는 현금 500만 원을 빌려 달라 찾아온 것이었다. 세주는 오만 원 권이 아닌 만 원 권으로 준비하라고 문자를 보냈고, 나는 퇴근하는 길에 ATM기가 있는 편의점에 들러 100만 원을 뽑았다. 세주는 화분 밑에 있던 열쇠를 용케 찾아내 나보다 먼저 내 집에 들어와 있었다.
“지금 당장 가능한 건 이 정도야. 더 이상은 나도 힘들어. 미안해.”
내 눈앞에서 돈을 세어 본 세주는 피식 웃더니 서늘하게 뇌까렸다.
“이럴 줄 알았어. 너는 항상 말로 때우려 하지.”
미안하다는 얘기말고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그렇게 하나마나한 말을 건넨 후에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세주는 내 얼굴에 돈을 던지며 악을 썼다.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미안한 척하지 마. 정말 미안하면 네가 나한테 이래서는 안 되지. 무책임한 건 네 엄마를 닮은 거지? 네가 멀쩡하게 사는 건 다 내가 봐줘서야. 신랄하게 나를 모욕하다가 어느 순간 퓨즈가 꺼진 것처럼 잠잠해진다. 감정의 낙차가 너무 커서 당혹스러울 때가 많지만 세주의 감정 변화를 따라 동요해서는 안 된다. 감정이 새어 나가지 않게끔 최대한 웅크린 채 일관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잠시 혼자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던 세주는 곧 이성을 되찾았는지 침착한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근황을 얘기했다.(돈은 한 장 한 장 다시 주워 봉투에 담아 가방에 잘 챙겨 넣었다) 오늘 알코올중독 집중치료센터에서 퇴원했다고.
“사실 강제 퇴소 당한 거지. 내가 치약 튜브에 몰래 술을 넣어 갔거든. 정말 필요할 때 한 모금 마시려고. 안 들킬 수 있었는데······ 거기까지 검사할 줄은 몰랐네. 이번에는 정말 포기하지 않기로 아빠랑 약속했는데 실망이 컸나 봐. 내 전화를 안 받아. 이제 아버지도 포기한 거겠지, 나를.”
나는 세주가 술을 마신 게 아닌지 의심했다. 언젠가부터 세주는 취했을 때보다 취하지 않았을 때 더 횡설수설했다. 오늘의 세주는 발음도 또렷했고 나를 마주 보는 눈빛도 차분한 편이었다. 세주의 상태를 가늠하듯 그 애를 살피다가 거실 테이블 아래에 빈 술병이 놓여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아버지 입장도 이해가 돼. 아버지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어. 아버지는 그때 그 꼴을 보고도 나랑 내 어머니를 놓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었어. 너희 엄마랑 너희 가족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이렇게 될 일은 없었겠지.”
삶에서 위독한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 근원을 나와 내 어머니로 지목하는 세주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느낀 바대로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면 어떨까. 세주의 화를 돋울수록 분노의 강도는 세지고 힐난의 시간만 길어질 뿐이다. 무엇이 저렇게 서럽고 사무치는 걸까. 잠자코 귀를 기울이려 해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집중력이 약해진다.
모든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본다. 머릿속으로는 오늘 저녁으로 뭘 먹으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차라리 저녁을 굶고 아침을 맛있게 먹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다. 냉동시켜 놓은 바지락과 고등어를 미리 냉장실로 옮겨 놔야겠다는 생각, 무와 당근 등의 채소들이 무르기 전에 얼른 먹어치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분주하다. 나는 바지락 된장국의 구수한 냄새를 떠올리면서도 어깨를 떨며 낮게 흐느낄 수 있다. 내가 약간이라도 연기나 연예계에 흥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꽤나 주목을 받았을지도. 하지만 세주는 절대로 내가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는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끝냈는지 세주가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나는 배가 고프다고 투정을 부리는 세주를 위해 물을 올리고 숙주를 많이 넣어 라면을 끓였다. 세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TV를 틀어 요즘 인기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나 자고 간다.”
지금 시각은 오후 11시. 나는 보통 10시에 자고 5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공장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1시간 반을 가야 했다. 나의 내일을 엉망으로 만들겠다는 심보가 보였지만 선선히 그러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며칠이나 머물며 얼마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지 상상해 보았다. 라면을 그릇에 옮겨 닮아 대령한 뒤, 새 속옷과 편한 옷을 개켜서 그 애 옆에 내려 두었다.
욕실에 들어와 이를 닦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집을 얻을 때부터 화장실 거울 모서리는 깨져 있었다. 거울을 바꿔 달라고 집주인에게 말했지만 모서리만 살짝 금간 것뿐이니 그냥 쓰라는 대답을 들었다. 얼굴을 비춰보는 데에는 분명 문제가 없었지만 나는 모서리가 금간 거울이 이 집에서 가장 거슬렸다.
거실에서 세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TV 소리를 최대치로 올려 집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최미리. 빨리 씻어. 빨리 씻고 나와서 나랑 같이 드라마 봐.”
얼른 세수를 하고 칫솔질을 끝냈다.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다시 점검했다. 사흘 연속으로 초과근무를 했던 터라 눈에 빨간 핏발이 서 있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초췌한 거 아닌가. 세주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명랑해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세주는 자꾸만 내게 여유가 넘쳐 보인다고 했고, 여전히 천진난만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타인의 순조로운 일상에 깊은 내상을 입는 그녀를 위해 억지로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려 본다. 좋지 않은 기억들, 그런 것을 불러내는 건 쉽지 않다. 내 안에 있는 구차하고 궁벽하고 거북하고 겸연쩍은 기억들은 대부분 아주 깊고 먼 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기억을 불러내려면 세주가 필요했다. 나는 거실로 나가 세주 옆자리에 앉았다. 세주의 눈을 마주 본다. 세주 눈동자에 서린 무력감과 슬픔을 읽는다.
세주가 열 번, 스무 번도 넘게 나를 추궁하며 반복해서 물었던 것은 정말 단 한순간도 우리가 몸담고 있던 종교의 이상異常을 눈치 챈 적 없느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넌 알고 있었지? 진리가 아니라는 것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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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 어머니의 직분은 경기남부지역 제 1구역장. 통칭 1원장으로 불렸다. 경기남부는 총 5개 권역으로 나뉘었는데 그는 안산, 군포, 안양, 의왕 네 도시의 신도들을 관리했다. 입교한 지 3년 만에 구역장이 되었다는 점과 그가 한때 배우로 활동했다는 점 때문에 한동안 신도들의 주목을 받았다. 1원장은 공식적으로 제 1구역 지성전의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지만 경기남부 사도의 비서이자 운전기사이자 파출부이기도 했다.
1원장은 채소를 전혀 먹지 않는 나를 위해 아침마다 다양한 요리를 선보였다. 탕수육 맛이 나는 가지와 닭강정 맛이 나는 새송이 버섯, 타코야키 맛이 나는 감자볼을 먹으며 나는 먹는 즐거움을 알아 갔다. 어머니가 식사를 끝내면 그는 내 어머니의 생신 기념으로 자신이 선물했던 다구를 조용히 어머니 앞으로 가져왔다. 다관에서 우려낸 녹차를 숙우에 붓고 한 김 식힌 후, 작은 잔에 부어 기미를 하듯 한 모금 먼저 맛보았다. 그리고 잘 우러난 차를 찻잔에 따랐다.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옥색 찻잔을 차탁에 얹어 조심스레 어머니께 건넸다. 그 모습이 너무나 정갈하고 정성스러워 나는 1원장의 다도를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배우로 활동할 때 주로 한복을 차려 입는 전통사극에 영의정 댁 첩실이나 기방에서 일하는 기생 역할을 맡았다. 어머니는 녹차를 후룩후룩 마시며 1원장의 스케줄 브리핑을 들었다.
1원장은 한 해 동안 혼자서 무려 서른두 명을 전도해 교인 등록까지 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빠른 승급을 이루었는데 교주가 임명한 열두 사도 중 하나인 내 어머니를 보필하는 것을 큰 광영으로 여겼다. 혹시라도 그 역할을 누군가에게 뺏기기라도 할까 염려하는 것처럼 늘 한 발 먼저 앞서서 어머니의 필요를 채우려 노력했다. 어머니에게 보이는 충성심과는 결이 달랐지만 그는 나와 아버지에게도 꽤나 정성을 쏟았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만난 1원장을 분명 좋아했지만 내가 그녀를 의지하고 좋아했던 마음은 분명 다른 어른을 존경하고 공경하는 마음과는 결이 달랐다. 나는 어머니께 절대로 부릴 수 없는 어리광과 투정을 그녀에게만큼은 서슴없이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녀를 집사나 하인으로, 그녀는 나를 공주나 아가씨쯤으로 대우했던 것 같다, 고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경전의 가르침을 이행하기 위해 그녀가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는 건 서서히 깨달을 수 있었지만 그런 이유로 상처를 입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 어머니는 재림역전교 총재 강필성의 수족이었다. 역전교는 교주가 예수 다음으로 강림한 재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종교 중, 60년대 한국에서 크게 번영을 누린 ‘천주장막’에서 파생되었으나 강필성 스스로가 진짜 재림 메시아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분파가 아닌 개별적인 사이비로 평가되었다. 역전교의 총재는 입교했던 ‘천주장막’에서 흡수한 교리와 자신이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교리로 <천국강론>이라는 새로운 경전을 만들어냈다. 성경의 구약과 신약을 강필성이 임의로 편집한 후 <요한계시록> 뒤에 자신이 집필한 <빛의 약속> 1권에서 5권까지를 추가해 수찬한 것이다.
총재는 팔도를 열두 지역으로 나누어 열두 사도를 파견했는데 다스릴 지역을 정해 줄 때 차등을 두었다. 기여도와 충성도를 따져 인구수가 많은 지역을 가까운 수족에게 먼저 분배한 것이다. 어머니는 열여덟에 우연히 거리에서 강필성의 설교를 듣고 다음날 학교를 자퇴했다는 간증을 경배 때마다 반복해서 말했다. 강남과 강북 다음 세 번째로 큰 권역을 치리했는데 열두 사도 중에서 가장 젊은 것은 물론 사도 중 유일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라는 별칭이 있었다. 이천 년대 초반은 재림역전교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던 시기였고 위세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는 신도 수만 추산해도 전국에 십만 명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그 십만 명 중 5분의 1을 맡고 있는 사도였다.
역전교는 기여도(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봉헌한 금액이었다)에 따라 전체 신도를 5등급으로 나누었는데 경배를 드릴 때(개신교에서는 예배, 천주교에서는 미사라고 부르는 것을 역전교에서는 경배라고 명명했다) 착석하는 자리까지 지정할 정도로 등급별로 대우가 달랐다. 새로 입교한 자들은 자동적으로 1분위에 속하게 되는데 그들은 성전 입구에서 기립한 채로 경배에 참여해야 했다. 모두가 등급을 올리기 위해 무리해서 봉헌했고,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면서까지 포교에 몰두했다.
그러나 나는 사도의 딸이었기 때문에 천국의 제 5분위 시민권자라는 지위를 얻은 채로 태어났고 자랐으며 파문당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성전의 가장 첫 번째 줄에서 밀려난 적이 없었다. 첫 번째 줄에는 나와 내 아버지를 제외하면 모두 60대 이상의 장로들과 권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역전교가 교주 강필성에 의해 창시될 때부터 함께해 온 개국공신들이거나 20년 이상 역전교를 지켜 온 이들이었다. 두 번째 줄에는 이 장로, 권사들의 친족들이 앉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5분위, 세 번째 줄부터는 4분위였다. 전 재산을 역전교에 봉헌하고 365일 포교만을 위해 살기로 맹약한 이른바 ‘전도천사’들이 앉을 수 있었다. 이들은 불교에서 세인이 속세의 인연을 모두 버리고 출가하듯이 가족과 친구들과의 인연을 모두 끊어야 했다. 맹약한 다음날부터 역전교에서 지정한 기숙사에서 단체생활을 해야 하며 전국으로 포교 활동을 나갔다. 그다음 줄은 3분위였는데 구역장과 집사들이 이곳에 속했다. 사실상 일반 신도들이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분위는 3분위라고 보아야 했다.
5분위로 살 때 뭐가 가장 좋았어. 세주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 있다. 나는 모두가 나를 공주 대접해 주는 게 좋았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겁날 게 없었지. 내게 보장된 미래. 보장된 천국. 보장된 사랑.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아이였다. 모두가 내게 호의적이었기에 내게 주어진 풍요를 충분히 누리며 자랄 수 있었다. 내 유년기는 호화롭고 튼튼했다. 내 자아는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졌다. 나는 쉽게 좌절하지도 쉽게 고통을 느끼지도 않았다.
1원장의 딸인 세주와 친해진 건 재림역전교 총재의 칠순잔치 때였다. 나는 세주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르고 다리를 주무르고 발을 아로마 오일로 마사지하고 내가 먹은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체험학습 때 내 도시락을 싸고 우리 집 변기를 뚫고 내 교복을 다리는 모습을 당연하다 여기며 자랐다.
내가 4학년 때 펫샵에서 작은 강아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어머니께 생일선물로 강아지를 주면 안 되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집에서 개를 키우면 개털이 날리고 시끄러우니 절대로 안 된다고 말했다. 상심해 저녁을 먹지 않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1원장은 어머니를 설득해 펫샵에서 내가 점찍은 개를 데리고 왔다.
강아지의 이름은 돌돌이였다. 복슬복슬한 하얀 털로 아무데나 발라당 드러누워 바닥 청소를 한다고 지어 준 이름이었다. 약 두 달이 지나자 강아지는 몸집이 커졌고 힘이 좋아졌다. 산책을 나가고 싶으면 문을 긁으며 깽깽 짖었다. 어머니가 개 짖는 소리에 잠을 설친다며 그 개를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고 내게 통보했다. 드러누워 데굴데굴 구르니 1원장이 자기 집에 데려가서 키우겠다고 나를 달랬다.
“미리가 강아지 보고 싶을 때 말하면, 언제든 원장 아줌마가 강아지를 데려올 거야.”
그는 약속을 지켰다. 내가 돌돌이를 보고 싶다고 할 때마다 1원장은 개를 차에 태워와 마당에 내려놓고 나와 강아지가 함께 놀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자질구레한 우리 가정의 일들을 처리하기도 벅차 보였던 그에게 가족이 있을 거라는 걸 그때의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강필성의 칠순을 맞아 역전교에서는 유례없이 큰 규모의 행사를 준비했다. 잠실 주경기장을 빌려 전국의 신도들을 한자리에 집결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수도권 지역에 있는 만 명 가까운 청년들이 동원되어 카드섹션과 무술 시범, 군무, 사물놀이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나는 비슷한 또래 여자 아이들 열두 명과 함께 합창을 하게 되었다.
모두 중학교 1, 2학년으로 구성된 우리는 학교를 마치고 성전에 모여서 세 달 내내 <기쁘다 재림예수 나의 왕 필성주>를 연습했다. 몇 년이 지나서야 우리가 뽑힌 기준이 월경 전의 여자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 세주는 경기남부 본성전이 아닌 1구역 지성전에서 경배에 참여했기에 우리가 만날 일은 없었다. 1원장은 세주를 소개시켜 주며, 자신의 딸이 아직 믿음이 부족하니 많이 가르쳐 달라는 식으로 내게 부탁을 하고 갔다. 세주는 뼈대가 얇고 마른 데다 나보다 키가 한 뼘 정도 작아 보여 정말 동생처럼 느껴졌다. 그 애의 쭈뼛거리는 태도나 모기소리처럼 작은 목소리 역시 그 애를 한껏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모인 아이들은 나를 빼면 거의 구역장의 딸이거나 장로 혹은 권사의 딸이었다. 사도의 딸은 나뿐이었기에 탄일축전의 책임자는 지나치게 내 어머니와 나를 의식하는 듯 보였고 자연스럽게 내 중심으로 모든 연습이 진행되었다. 고운 색동 한복을 입은 나를 중심으로 흰색 한복을 입은 나머지 아이들이 부채춤을 추며 <기쁘다 재림예수 나의 왕 필성주>를 불렀다. 아이돌처럼 헤드셋마이크를 차고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며 복잡한 동선의 안무를 소화해야 했기에 우리들은 비지땀을 흘리며 매일 연습에 매진했다.
고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진심으로 10만 신도들 앞에서 총재의 탄일을 축하드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에 감격했다. 하지만 세주는 찬양을 부르는 목소리가 작고 행동이 굼떠서 지적을 자주 받는 편이었다. 탄일축전의 책임자는 세주에게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며 박력이 없다고, 개선이 안 되면 다른 아이로 교체할 수밖에 없다고 심하게 닦아세우곤 했다. 너는 마음에 감동이 많이 부족한 것 같으니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를 올리라는 말에 세주는 발개진 얼굴로 죄송합니다만 연발했다.
1원장이 내게 세주를 맡긴 이상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쉬는 시간, 나는 벽에 기대어 호흡을 고르는 세주에게 말을 걸었다.
“많이 힘들어?”
세주는 낯을 많이 가리는 듯 나는 돌아보지 않고 조그만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냥, 조금, 약간, 나는 이런 게 처음이거든. 그래서 너무 어렵고, 힘들고, 따라가기 힘든 것 같아.”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그 애를 달래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하고 싶어서 온 거잖아. 맞지? 우리 모두 선택된 자들이니 얼마나 감사해.”
세주는 그제야 나와 눈을 맞췄다. 나를 빤히 보더니 멋쩍은 듯 웃으며 속삭였다.
“실은······ 나는 엄마가 시켜서 온 건데.”
세주의 말을 듣고 조금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그 애의 난감한 표정들이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영유아부의 보조교사이기도 했기에 눈높이 대화에는 자신이 있었다. 부끄러운 듯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 세주를 저지하고,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려 억지로 눈을 맞춘 건 그 때문이었다.
“우리가 찬양을 올리는 순간만큼은 총재님께서 우리만 보시잖아. 예수님의 옷에 잠시 손을 댔던 사람도 죽을병을 고쳤는데 총재님의 축복을 듬뿍 받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기대되지 않아?”
답이 정해진 물음에 세주는 어영부영 대답했다.
“응······ 기대돼.”
“그럼 이런 태도로 임해서야 되겠어? 교체될까 봐 내가 불안 불안해. 조금만 더 힘내 보자. 네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과 총재님이 앞으로도 너를 분명히 귀히 쓰실 거야.”
나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어리석은 어린양을 어루만진다는 기분으로 희망을 속삭였다. 조금 마음이 놓였는지 그 애는 내 귓가에 소곤거리며 물었다.
“미리야. 뭐 하나만 물어 봐도 되니?”
“그럼. 물어 봐.”
“넌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믿어?”
“그게 무슨 말이야?”
순간 나도 모르게 뜨악한 표정으로 되묻자 세주는 실수했다는 걸 자각한 듯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아니라고, 잘못 말했다고, 자신이 다른 생각을 하다가 말이 잘못 나왔다고 어설프게 둘러댔다. 세주의 합류에는 원장의 입김이 있었겠지만 어머니의 추천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라는 것쯤은 어린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애의 불안과 산만함의 원인을 알아버린 나는 어떤 책임감과 의무감에 휩싸였다.
“괜찮아.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 비슷한 고민 하는 사람들······ 많이 봤으니까.”
그제야 세주는 표정이 조금 펴지더니 자신의 고민들을 털어놓았다.
“너는 강필성 총재님······ 이 재림하신 예수님······ 이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었어? 그게, 바로 믿어졌어? 그리고 총재님······ 이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영생불사하신다는 것도 너는 믿을 수 있어?”
나는 사실 이렇게 불순한 종자가 어떻게 탄일축전까지 참가하게 되었는지 의아했다. 합창단원들 대부분이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었고, 모태신앙이 아닌 아이들 또한 교주의 영생불사는 진리라는 공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먼저 깨달음을 얻은 자로서 뒤에 오는 이들의 신실한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어릴 때부터 들었기에 나는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세주에게 말했다.
“보이는 건 누구나 다 믿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천국 백성의 자격이 주어지는 거야. 하지만 총재님께서는 어리석은 우리를 위해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여주셨어. 그건 이적을 보여줄 테니 제발 믿고 따르라는 총재님의 사랑이고 배려야. 말기 암에 걸렸던 신도가 총재님 기도를 듣고 병이 깨끗이 나은 적도 있고, 눈이 보이지 않았던 신도가 눈을 뜨게 만드신 적도 있어. 꼭 그걸 봐야만 믿을 수 있다면, 창으로 찢긴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 보고서야 부활을 믿은 제자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은 존재들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겠지. 그래도 네가 정 믿기 어려우면 차라리 총재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이번에 눈으로 확인해.”
사실 암이 사라지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서 발간하는 소식지에서 본 내용을 나는 직접 본 것처럼 전달했다.
강필성은 일 년에 한두 번 자신의 탄일이나 개교開敎기념일마다 ‘나사로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린 예수와 동일한 이적을 보일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부활쇼였다. 강필성이 죽은 지 사흘이 된 송아지나 양이나 비둘기 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동물들은 찬양 한 곡이 끝나기 전에 몸을 떨며 일어나 앉았다.
죽었다던 송아지가 몸을 푸드득 떨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을 때, 강필성이 목줄을 잡아당기고 신도들 앞에서 행진을 했을 때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날의 감동과 충격이 몇 년이 지나서도 생생했으니 세주 역시 그런 장면을 보면 총재님을 믿지 않을 수 없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강필성은 탄일축전에 죽은 지 사흘 된 어린 양을 살리겠다고 미리 예고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세주는 불안정해 보였다. 세주는 내게 마음속의 내밀한 불안과 상처를 꺼내 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믿음을 가지라고 다그치는 어머니보다는 내가 믿음직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세주의 집은 1원장이 입교하기 전까지 꽤 부유했다. 그러나 세주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부동산 대부분을 팔아 봉헌한 후, 세주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는 끊이지 않았다. 세주가 중학교에 입학한 해에 결국 이혼을 했다고 했다. 1원장은 이혼 절차를 밟으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집에 들러 내 밥과 강아지 밥을 챙겼다는 얘기였다. 그때 내가 위화감이나 연민을 느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도에게 헌신하고 봉사할수록 1원장이 4분위에 가까워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역전교의 모든 직책은 총재와 사도들의 임의지명으로 결정되었기에 1원장은 승급에 섬김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체득한 것이었다. 내 어머니는 자주 경배에서 마태복음 20:25-281)를 들어 섬김을 하려면 종과 다름없이 완전히 자신을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역전교는 총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을 강조했다. 역전이 된다는 것은 이 땅에서의 신분이 보잘 것 없더라도 총재가 주인이 될 새천국에서는 언제든 역전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누가복음 13장 30절2)의 말씀을 들어 헌신도와 기여도에 따라 승급이 될 수도 감급이 될 수도 있었기에 오랫동안 신앙을 가졌던 사람도 절대로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분명 세주를 한심하게 여겼다. 그러나 함께 더운 여름을 보내며 나는 세주를 향한 이상한 애틋함과 책임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애가 이따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할 때면 가슴이 답답했고 동시에 불안을 느꼈다. 정말 죽은 송아지가 살아나는 걸 봤어? 10년 전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필성주만 하나도 늙지 않았다는 게 사실이야? 정말 신도를 14만 4천 명 모으면 이 세상이 역전되는 거야? 정말 우리는 죽지도, 늙지도 않아?
이렇게 반쪽짜리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세주가 갑자기 사고라도 당해 죽게 되면 영락없이 지옥으로 가게 되리라는 참담한 생각이 들면 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제발 세주가 강한 믿음을 갖게 해달라는 바람을 담아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세주와 다르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내겐 신앙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총재가 불로불사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총재가 건국한 새천국에서 내가 5분위 천국시민으로서 왕 대접을 받으며 살 것이라는 것에 나는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세주의 어머니는 입교가 늦었다는 것에 대한 자책과 두려움과 후회로 과거를 상쇄하기 위해 더욱더 헌신하고 봉사했다. 세주 역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싶어 했고 때로는 절박해 보였다. 믿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긴가민가하는 마음이 세주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게 진리가 아니면 안 돼. 나랑 엄마는 이걸 지키기 위해서 모든 걸 다 걸었어.”
세주는 자주 무언가에 취한 듯 중얼거렸고, 그럴 때마다 나는 세주의 손을 잡아 주었다.
2
내가 <나의 왕 필성주>의 마지막 가사를 외치며 두 손을 하늘로 뻗는 순간, 카메라가 내 표정을 타이트하게 잡을 테니 끝까지 웃음을 잃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리허설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떨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어머니가 합창단원들을 향해 다가와 용기를 북돋웠다. 어머니 곁에는 언제나처럼 1원장이 붙어 있었다.
행사가 시작되었다. 총재 부부가 흰색 말이 모는 마차를 타고 입장해 경기장 한 바퀴를 돌았다. 이어서 정치인들과 유명 연예인의 축하인사가 있었고 이후에는 무술시범단이 하늘을 날며 수십 장의 송판을 격파했다. 우리 순서는 거의 마지막이었다.
우리의 찬양 이후, 행사의 메인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부활쇼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합창단이 대기하고 있을 때 총재가 앉아 있는 단상 아래에 거대한 테이블과 양, 그리고 포도주가 항아리에 담겨 세팅되었다. 성건으로 불리는 흰색 천으로 어린 양을 덮어 놓은 것이 보였다. 그 양은 죽은 지 3일 된 양이라고 했다.
우리는 준비한 모든 것을 쏟아냈다. 온몸에 땀구멍이 열린 듯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나는 밝은 미소를 잃지 않고 목이 터져라 찬양을 불렀다. 총재가 앉아 있는 단상까지 달려가 두 손을 높이 쳐들자 단상 위에 있던 강필성이 내 눈을 마주 보고 환하게 웃음 지었다. 나는 강필성과 눈을 마주 보았을 때 몸에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강필성은 어깨가 매우 좁고 심각하게 깡마른 체형이었다. 모두 그가 대머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쉬쉬했다. 경배를 드릴 때마다 매번 다른 색깔, 다른 모양의 가발을 쓰고 나오는 그를 패셔너블하다며 칭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날 그는 화려한 금발의 가발을 쓰고 있었는데 무거운 왕관을 머리에 얹은 탓인지 가발이 밀려 반 정도는 대머리가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총재를 보면서도 나는 감격하며 눈물을 찔끔했던 것이다.
폭죽이 일제히 터졌고 사람들의 환호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모두가 강필성을 연호하던 그 순간, 나는 내 아래 있던 양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심장이 발밑으로, 발밑의 더 아래로, 가장 깊은 심연으로 깊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벌벌 떨렸지만 나는 그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 노력했다.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에 휩싸인 와중에도 내 세계는 고요하고 차분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곧 알게 되었다. 강필성이 아직 부활 기도를 올리지 않았음에도 양은 분명히 숨 쉬고 있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나는 눈동자를 강필성에게 고정했다. 그러나 의식하기 시작하자 미미하지만 분명 흰색 성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강필성이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리허설에는 없던 내용이었던 터라 나는 잠깐 당황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 손을 맞잡았으며 강필성이 이끄는 대로 함께 단상에 올랐다. 강필성은 내 손을 놓지 않고 잠실 주경기장을 빽빽이 채운 신도들을 향해 말했다. 이 아이들처럼 순전하고 정결한 상태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나는 강필성의 말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이 자꾸 밑으로 떨어졌다. 이제 양이 전보다 더 조금씩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강필성은 곧 내 손을 놓아 주었고 나는 공손하게 인사한 후 합창단들이 도열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일렬로 퇴장할 때 신도들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환호를 보냈다.
강필성은 예정대로 양 위에 손을 올리고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되신 만유의 필성주> 찬양을 큰 목소리로 불렀고 마침내 4절이 끝나기 전 양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양이 꿈틀거리는 것을 확인한 강필성이 성건을 벗겼고 카메라가 줌을 통해 그것을 비췄다. 거대한 전광판에 비몽사몽한 양의 모습이 보였다. 총재는 이 역전교로 들어와 5분위 천국시민이 되면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천하에 보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나는 평소보다 더 크게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그러면서도 내 곁에 서 있는 합창단원들을 의식해 힐끔거렸다. 아이들은 흰색 한복을 입은 채 꼿꼿한 자세로 나란히 정렬해 있었다. 세주의 표정이 유난히 들어왔다. 세주의 표정은 초등학교 일학년 때, 강필성의 송아지 부활쇼를 보던 날의 표정과 흡사했다. 이날 이후 삶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 감동받았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세주는 언제나 강필성의 칠순잔치를 꼽게 된다.
“총재님을 가까이에서 보니 어땠어?”
우리는 대절한 버스를 함께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버스 안에서 세주는 내게 물었다.
“멋있으셨어.”
“너는 총재님 꽤 가까이에서 많이 뵀지.”
실제로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그가 우리 집에 왔고, 심지어 내가 어릴 때는 어머니를 따라 총재의 자택에서 여러 번 밥을 먹은 적도 있었다. 그는 열두 사도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를 무릎에 올려 두고 일장 연설을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나서는 총재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는 많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총재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싶었다.
“총재님 자택에 초대받은 적도 있어. 아무래도 우리 어머니가 유일한 여자 사도시니까.”
“근데 총재님은 결혼을 하신 거지?”
“응, 하셨지.”
“자식도 있으신 거고.”
“왜? 너는 이런 게 왜 궁금해? 아직도야? 아직도 이런 게 마음에 걸리니?”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나는 세주를 다그쳤다. 그러자 세주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니, 신기해서 그래. 신기해서. 예수님께서는 결혼도 안 하시고 자녀도 없으셨는데 총재님은 가정이 있는 게 신기해서. 이상하다는 건 아니고, 그냥 역시 예수님보다 우리 총재님이 더 뛰어난 분이시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는 이상하게 그 말에 안심이 되어서 네 말이 맞다고, 신약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지만 새롭게 오신 재림예수는 모든 걸 완성하고 이루시는 분이라고 내가 십 수 년 동안 들은 가르침을 앵무새처럼 전했다.
세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다시 한 번 확인하듯이 내게 물었다.
“미리야. 정말, 양이 죽어 있었던 거지?”
그때, 심장에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내 신앙에 미묘한 유격이 발생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적당한 말로 둘러댔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중에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과 전혀 반대되는 마음을 늘어놓았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천이 몹시 얇고 살짝 투명한 재질이라 양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보였어. 양은 혀를 길게 빼고 죽어 있었어. 눈이 돌아가 있었고 살짝, 상한 냄새도 났어.”
“정말?”
“그래. 여름이잖아.”
내 간증을 들은 그날 이후로 세주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우리는 학교를 마치면 곧장 성전으로 와서 함께 만나기로 약속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함께 앉아 경전 공부를 했고, <빛의 약속>을 암송하거나 찬양을 불렀다. 4분위 전도천사들이 포교 활동을 나갈 때 동참하기도 했다.
나는 5분위 약속 세대라는 이유로 역전교가 세계를 통치했을 때를 대비한 예비사도로 일찍부터 교육 받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머니의 권유도 있었지만 내 의지가 더 강했다. 고등학교를 가고 싶다고 말한 적 있지만 어머니는 내게 있어서 더 이상의 세상의 가르침은 무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역전교에 정말 필요한 인재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세주는 중간에 학교를 자퇴하려고 했지만 세주가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을 시, 1원장과 이혼한 세주의 아버지가 양육권 소송을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세주는 나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학교를 마친 후 교복을 벗지도 않고 성전에 와서 더 긴 시간 동안 봉사했고 경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는 세주의 성장을 보며 진심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세주가 얼마나 내게 감사를 표현했던가. 세주는 자주 나를 은인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양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고 홀로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경전을 공부하며, 나는 내가 잠깐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게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음이 안온해지자 한순간이라도 의심을 품은 적이 있었나 싶게 의문들은 쓸려 내려갔다. 양이 꿈틀거린 것은 내가 잘못 본 것일 테다. 사후에 시신의 근육이 수축되는 과정에서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었다.
3
그 세계가 무너진 후에 달라진 점이라면. 글쎄, 거대한 박탈감이 나를 덮쳐야 마땅했겠지만 생각보다는 아니었다. 적어도 죽지는 않았으니까. 어딜 가나 도드라졌던 내가 짓밟혀 평평해진다는 것. 짓이겨져 납작해진다는 것. 나는 그러한 내가 낯설었다.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상상해 본 적 없었다. 5분위 천국시민이 아닌 평범한 나라는 사람은.
역전교의 퇴장은 초라하고 허무했다. 총재인 강필성은 그즈음 배임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그 시기에 서해안에 있는 8만 평 규모의 무인도를 사들여 그곳에 별궁을 짓고 여자 신도 열 명을 불러들여 난교파티를 했다는 보도가 탐사보도프로그램에 의해 공중파에서 방영되었다. 상황을 모르고 불려간 여신도 두 명이 총재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고, 역전교 포교 활동에 동원되어 전국에 파견된 ‘전도천사’, 그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노예 생활이 후속 보도되며 강필성과 범죄에 깊이 가담한 사도 3인이 구속되었다. 이쯤에서 믿음이 약했던 신도들 다수가 성전을 떠났지만 신앙심이 강한 이들끼리는 훨씬 더 집결하게 되었다. 지성전에서 흩어서 보던 경배를 본성전 하나에서 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 신도들 역시 광신도의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을 빼내던 방식으로 구치소를 테러해 핍박받는 총재님과 사도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하거나, 청와대를 습격해 대통령을 인질로 삼아 총재와 맞교환해야 된다는 식의 주장을 진지하게 펼치는 이들이 있었다. 강필성과 강북, 강남, 경기북부 사도가 동시에 구속되었기 때문에 그즈음 역전교의 총재 권한 대행자는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결정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사흘만 더 기도해 보자고 말했다. 이후에는 정부와 협상을 하든, 테러를 하든 결정을 내리겠다고 하곤 기도실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금식기도를 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도, 아버지도, 1원장도 어머니의 결정에 반대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금식한 지 나흘째 되던 날 저녁,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는 어머니를 이상히 여겨 기도실을 강제로 개방한 1원장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어머니는 짧은 유서를 남기고 떠났다.
진리를 찾았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모두에게 죄송합니다.
부검 결과 어머니는 기도실에 들어간 첫날에 목숨을 끊었다는 소견을 들었다. 멍한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했다. 총재가 기도를 올려도 이미 나흘이 지났으니 어머니는 살아나기 어렵겠다는, 그런 생각이.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신도들은 우왕좌왕했고, 장례가 끝나자마자 꽤 많은 수가 집으로 쳐들어오기까지 했다. 신도들은 어머니가 은닉한 재산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집을 샅샅이 수색했으며 부동산등기부등본과 어머니, 아버지의 통장사본까지 요구했다. 내 어머니가 그 흔한 청약이나 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그들은 물러났다. 그때의 나는 몰랐던 사실을 차례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 우리의 집과 우리의 차, 거실에 걸린 거대한 그림과 진열장에 놓여 있던 청자와 백자들이 전부 우리 것이 아니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역전교의 것이었고, 어머니 명의로 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가 내게 남긴 유일한 유산은 내 어머니가 고의로 사람들을 속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 자체, 그것 하나였다.
내가 탈교한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시시하다.(나는 스스로 탈교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역전교 간부들은 나를 파문한 것이라고 공표했다)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 사후에 작은 원룸을 얻어 같이 살다가 아버지가 4분위 전도천사들이 사는 기숙사로 들어가면서부터 거의 만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5분위에서 2분위로 한순간에 떨어졌으니 승급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검정고시를 두 번을 낙방한 끝에 겨우 붙었을 때 나는 새 삶을 살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너무나 좁았다.
내가 파문당한 뒤 3년이 지나서야 세주도 탈교했다. 교주가 없는 성전을 무슨 마음으로 지켰을까 상상해 본 적이 있다. 가늠할 수 없었다. 세주는 지금까지 1원장이 경기 지역을 통합해 사도로서 경배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주 또한 1원장, 아니 사도를 따라서 매주 교주 면회를 따라갔으며 세주가 한 일은 빠르게 총재의 말씀을 받아 적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전성기에 비해 신도 수가 20분의 1도 채 남지 않았지만 세주의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기쁘게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 말했다. 교주는 작년에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세주의 어머니는 여전히 교주가 부활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4
세주는 100만 원을 가져간 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 혹은 보름에 한 번씩 찾아왔다. 나는 그 애를 깨우지 않기 위해 새벽마다 최대한 조용히 씻고 조용히 움직였다.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세주가 있을 때도 있었고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도 있었다. 세주는 내게 일할 곳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가, 일단은 병원 치료부터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가, 뭔가를 다시 시작하려면 일단 돈이 필요하니 자신에게 얼마쯤 보태 달라고 말했다. 돈이 없다고 말하면 나와 내 어머니를 저주했다. 모든 대화는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나는 최소한의 생활비를 빼놓고 세주에게 돈을 건넸다. 세주의 무능력함, 세주의 무기력함, 세주의 무용함을 차분히 곱씹으며 그때 내가 진실을 말했든 거짓을 말했든 결국은 이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혼자 판단하고 수긍하곤 했다. 세주를 폄하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단순하고 가벼워졌다.
장마가 일주일째 이어지는 밤이었다. 며칠 밤을 샌 후 몸이 피곤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얼핏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거센 빗줄기가 때리는 소리라 생각하고 무시했다. 그때, 세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리야. 최미리.”
나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현관문을 열자 세주가 버럭 화를 냈다.
“왜 문을 이제 열어. 전화도 꺼놓고.”
세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채로 빗속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내게 화가 난 줄 알았는데 보다 보니 그게 아니라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얼굴이었다.
“천둥소리인 줄 알고. 전화는 피곤해서 꺼뒀는데. 그런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꼴이 그게 뭐야. 비 맞고 왔어? 일단 들어와.”
내가 욕실에서 수건을 꺼내와 그 애에게 건넬 때까지, 세주는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신발을 신은 채로 현관에 서 있었다.
“잠깐 나와 봐.”
“지금 이 시간에? 왜. 무슨 일 있어?”
내가 다그치듯 묻자 세주는 내 팔을 억지로 잡아끌어 당겼다. 얼떨결에 슬리퍼를 꿰어 신고 밖으로 나오자 대문 앞에 세주가 타고 다니는 낡은 승용차가 서 있었다.
우리는 우산도 쓰지 않고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았다. 나는 세주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곤 큰 우산을 가지고 나와 세주의 머리 위에 씌웠다. 바람 때문에 오른쪽으로 들이치는 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주는 혼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주는 기분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라고, 그건 고등학생 때나 삼십 대 중반이 된 지금이나 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게 갑자기, 갑자기 뛰어들어서.”
문득 세주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세주를 돌려세워 내 얼굴을 마주 보게 했다.
“너 술 마셨어?”
“낮에 소주 한 병 했어. 취하지도 않았어. 너, 나 알잖아.”
“한 병? 이런 날씨에 술 마시고 운전대를 잡았어? 미쳤어?”
내가 윽박지르자 세주가 우뚝 멈춰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눈을 봐. 네 눈에 내가 지금 취한 것 같아?”
세주의 눈을 마주 봤다. 사실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세주의 잔뜩 날선 눈동자가 더 잘 보였다.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물었다. 우리 집은 다세대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늦은 시간에 골목에서 작은 소란이라도 피우면 노인들이 창문을 열고 고함을 지르기 일쑤였다.
“사고 낸 거야?”
“내가 그런 게 아니라 그게 뛰어들었다고.”
“말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그래야 내가 도울 수 있어.”
내가 냉정하게 뇌까리자 세주는 덜컥 겁을 먹었는지 눈을 피했다.
“왜 여기로 왔어. 신고를 해야지.”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세주가 내 옷깃을 잡고 트렁크 쪽으로 이끌었다. 트렁크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댄 그 애가 내게 물었다.
“우리는 결국 같은 능력을 갖게 된다며. 네가 그랬잖아.”
그때 하늘에 번개가 번쩍 쳤다. 방금까지만 해도 창백하던 세주의 얼굴이 문득 기이한 열기와 기대감으로 들떠 보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가 그랬잖아. 천국시민이 되면 다 살릴 수 있다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렸듯이, 총재께서 양을 도로 부활시켰듯이 말이야.”
트렁크에 거대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속에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길쭉하고, 양감이 느껴지는 무언가였다. 자루에는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고 트렁크 깔판에 핏물이 조금 고여 있는 게 보였다. 핏물을 보자마자 지독한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이게 뭐야?”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세주에게 물었다.
“고라니? 노루? 아닌가, 개인가?”
입을 다물고 있는 세주를 흔들며 물었다. 세주는 대답 없이 내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대답해.”
“고라니든 개든 뭐가 중요해. 부활시키면 그만인데.”
세주는 비를 맞으며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느새 다시 침착해진 얼굴이었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동요하고 있는 나를, 분열하고 있는 나를, 균열된 나를 즐기는 표정이었다.
앙갚음이라기에는 세주가 더 상할 것이 분명한 게임이었다. 세주가 자기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왜 이렇게 나를 몰아세우는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꽤 멀쩡하다고, 꽤 행복하다고 믿는 세주라서. 여전히 나를 5분위로 취급해 주는 것은 세주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오래전 1분위가 되었고 이제는 1분위도 아닌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었다. 태연자약해 보이는 모습은 사실 내가 내 삶에서 기대를 거뒀기 때문이라는 걸 너는 언제 알아줄까. 여전히 누가 더 잃었고 누가 더 망했는지를 겨루는 게 너에게는 정말 중요한 걸까.
“네가 보기엔 어때?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아?”
세주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나는 말해야 했다. 그래. 그때 그 양은 살아 있었어. 숨을 쉬고 있었어. 그러나, 그렇지만.
무겁게 느껴질 만큼 거센 빗줄기가 우리를 때리고 있었다. 우리는 꼼짝없이 어둠 속에서 그 비를 맞고 있었다.
1)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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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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