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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소설가

  • 작성일 2024-09-01
  • 조회수 1,439

행복한 소설가

 

임현

 

1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의 이야기가 제일 많다는 것이었다.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까지 더하면 거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근대 문학의 출발이 무엇이냐? 자기 고백 아니냐? 그러므로 그것은 핍진성과 진정성의 문제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수많은 소설가들이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개연성 때문이라고도 했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소설이 잘 써진다고 말하는 소설가를 나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있다면 분명 주변에 부러움을 살 만한 재능이었는데도 아무도 그런 자랑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소설이 써지지 않을 만한 이유는 도처에 널려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행복한 소설가는 대개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불행한 소설가는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한 인물은 러시아의 대문호가 아니라 어느 늦은 밤 만취한 대한민국 출신의 선배 소설가였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계속 쓰려 한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그 괴로움에 대해 토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더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써지지 않는다고 징징대는 동안 기어코 완성하게 되는 것도 다름 아닌 소설이라는 점이었다.

   종로구 세종로 소재지의 조도가 낮은 호프집이었고 지하실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유독 심했던 곳으로 기억한다. 안주 메뉴로 한치를 굽고 쥐포도 굽고 제육볶음과 어묵탕 등을 조리하는데도 좀처럼 그 눅눅하고 고린 냄새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무얼 씹고 삼켜도 다 비슷비슷한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일간지에서 주관하는 문학상 뒤풀이 자리가 줄곧 이어지던 것이었으나, 정작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은 이미 가고 없었다. 마지막 지하철 운행 시간은 한참 지났고 오히려 첫차를 기다리는 편이 더 가까운 시각이었다. 그런 탓에 주로 경기도에 거주하는 사람들만 남았는데, 무엇보다 함께 자리한 여남은 사람들 중 그 이야기에 호응해 주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원고 마감할 시간에 이러고 있으니까 못 쓰는 거잖아요. 근데요, 형. 많이 취했어요? 그거 먹는 거 아니에요.”

   주문한 먹태 대신 자꾸 나무젓가락을 씹으려는 선배를 말리며, 나는 나름대로 이 불쾌한 냄새의 발원지를 추적해 보기도 했었다. 고정식으로 설치된 의자와 테이블은 혼자 앉기에는 넉넉하고, 둘이 앉기에는 비좁았는데 어떻게 앉아도 허리가 불편했다. 닦는다고 말끔하게 닦이진 않을 것 같은 지용성 얼룩이 벽마다 눈에 띄었고, 주방의 내부 구조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상태가 어떨지는 대강이나마 예상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런 곳마다 오래 밴 냄새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환풍기 탓인가. 주기적으로 세척을 해주지 않으면 화재의 위험이 크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불이 나도 벌써 여러 번은 났을 만큼 먼지투성이였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뭐랄까, 그런 뜬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술만 마시면 진지해지는 선배의 주정을 가만 듣고 있기가 몹시 힘들었다.

   반면, 동행한 또 다른 무리들이 자리한 건너편 테이블에서는 종합소득세라든지, 건강보험 지역가입자를 위한 감면 제도 등을 주제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기타소득이랑 사업소득이랑 어떻게 다르다고요?” 나는 틈틈이 그들 대화에 끼어들어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기도 하고, “가만있어 봐, 8.8프로면 그게 다 얼마야? 와, 이거 순전히 날강도들이네.” 받지도 않은 문학상 상금을 대신 아까워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날의 나는 사리분별이 명확할 만큼 맨정신이었다는 뜻이었다. 음주 전후로 비타민C를 복용하면 숙취 해소에 좋다던데, 과연 효과가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평소만큼 마셔도 잘 취하지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연재는 몸에 좋은 것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혈관 질환 예방에 도움이 된다며 아침 공복마다 병아리콩을 한 움큼씩 쥐어 주거나, 한때 내가 정수리에 500원 동전 크기만 한 원형 탈모를 얻어 시름할 때 석류 엑기스를 처방한 것도 모두 연재였다. 프로바이오틱스를 비롯해 루테인과 항산화 프로폴리스, 미네랄이 풍부한 해조 칼슘 등 하루에 챙겨 먹는 영양제만도 십여 종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작은 실천들로부터 연재는 혹시 모를 일들, 정확히는 우리를 위협할 수 있을 만한 것들,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을 만한 불운한 일들을 미리 예방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내 편에서 볼 때 연재가 하는 걱정들이란 대개가 불필요하거나 지나친 데가 없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는 그런 걱정을 공유하는 정보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게 더 문제라면 문제였다.

   예를 들어, 강형욱이 출연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한 뒤로는 엘리베이터에서 입마개를 하지 않는 대형견을 마주하고는 깜짝 놀라한다거나, ‘레몬테라스’나 ‘맘스홀릭’ 같은 커뮤니티 게시글에서 읽은 내용을 요약하며 우리 부부에게도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거나, 또 어느 날에는 나중에라도 절대 자영업은 하지 않기로 다짐을 받기도 했다. 그러고는 ‘골목식당’에서 백종원이 할 법한 조언들을 잔뜩 늘어놓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괜한 걱정 좀 하지 말라며 연재를 안심시켜야 했다. 하루는 어쩐 일인지 내 지적에 금세 수긍한 적도 있었다. 문제는 이후로 건강염려증을 앓는 환자들을 위한 전문적인 치료 기관을 검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내 상식을 훨씬 웃도는 상담료로 나를 조금 긴장시켰다는 점이었다. 그러고는 그새 뭘 또 찾아봤는지 나도 몰랐던 나의 질병에 대해 소개해 주기도 했다.

   “걱정이 너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각성제도 있네. 이것도 비급여겠지?”

 

   때때로 나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우리 부부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해 주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지만, 있다면 그려 볼 법한 미래를 함께 상상할 때도 많았다. 연재는 내 성에 어울리는 이름이 별로 없다면서 신중하게 아이의 작명을 고민했고, 조기에 받을 수 있는 교육과 행정자치마다 다른 여러 가지 제도와 혜택들을 비교해 보기도 했다.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강력 범죄를 뉴스 보도로 접할 때는 마치 우리 아이가 당한 일인 것마냥 화를 내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연재가 어떤 사람인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 연재도 나도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없는 우리의 자녀가 미래의 우리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날 새벽, 만취한 선배를 부축하며 든 생각도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첫차가 오기까지는 아직 먼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잠든 선배를 가만 보고만 있기 어려웠는데, 무엇보다 선배를 챙겨 줄 사람도 염려해 줄 사람도 이제는 없었다. 일행보다 먼저 호프집을 빠져나와 대로변 근처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나는 호주머니에서 비타민C 두 알을 꺼내 건네주었다.

   “형도 이제 몸 생각 해야지요. 이것 좀 먹어 봐요.”

   그러고는 연재에게 들었던 효능들을 똑같이 되풀이해 들려주었다. 그때는 어쩐지 선배가 나와는 처지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연재도 그들 부부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취향과 생활 패턴이 비슷하고, 머지않아 우리 부부가 겪게 될 많은 일들을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라고도 여겼다. 결혼 초기에 누구나 겪을 만한 문제들에 대해 조언과 도움을 얻기도 하고, 멀리 여행을 다녀온 뒤로 가벼운 기념품을 챙기기도 했는데, 갑작스러운 이혼 소식을 전했을 땐 연재도 나만큼 적잖게 당혹스러워했다. 그런 뒤에는 선배 내외에 대해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 당시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으나 이제 와서는 조금 달리 보이는 것들을 되새기다가, 그렇지 않을 수 있었을 또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서도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우리와 달리 만약 그들 사이에 아이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적어도 몇 번쯤 더 참고 버티고 고민하다가 결정을 미루거나 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연재도 나도 실은 비슷한 걱정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여느 가정에서처럼 사소하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문제들로 언성을 높이고 화해하기를 되풀이하다가 어느 순간 그마저도 하려 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 다툼도 없이 무던하게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다음에는 한때 우리를 다정하고 행복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암담한 미래를 상상하다 보면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근래 들어, 나는 그날 선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릴 때가 많았다.

 

 

2

 

   조명이 꺼진 서재는 모니터 화면만으로도 충분히 밝았다. 층간 소음도 들리지 않을 만큼 늦은 시각이었고, 이른 장마가 시작된 이후로 종일 켜둔 에어컨 덕분에 실내의 습온도는 쾌적한 상태를 유지 중이었으며, 무엇이든 채울 수 있을 만큼 드넓은 빈 문서가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첫 소설집이 출간된 이후로 줄곧, 나는 일주일에 사나흘은 문예창작학과나 사설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글만 써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글을 쓰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경제 활동은 더러 있었다. 이를테면, 소설가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정체성 같은 것이어서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자격이 유지되었다. 신분을 유지하는 데 비용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주기적으로 갱신해야 하거나, 만기가 있어서 재계약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반면에 가르치는 일은 유사한 분야에 종사하는 듯 보이지만 그와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10여 년 전, 나의 데뷔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분은 내게 이렇게 조언했다.

   “당분간은 취업하지 마. 특히, 정규직은 절대 하면 안 돼.”

   남들 일할 때 똑같이 일하면 정작 글을 쓸 만한 환경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백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는데, 세간의 오해와 달리 아무것도 쓰지 않는 소설가란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단히 유지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말에 조금 의아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당분간이라면 얼마나 당분간인가. 무엇보다 “근데요, 선생님은 왜 정규직인데요?” 묻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정작 본인 소설은 읽지 않는다며 투정하는 것도 내 눈에는 그저 부럽기만 했다.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조언을 성실히 따르게 된 꼴이었다. 다만, 나중에 시간이 흘러 내게 시간 강사 자리를 먼저 제안해 준 것도 그 심사위원뿐이었다.

   그러니까 소설가로서 소설을 가르친다는 것은, 이마저도 없다면 무언가를 계속 쓰기는커녕 생활을 지속하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상호 밀접한 영향 관계에 있지만, 뭐 원한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도 있는 근로 활동이었다. 이따금 쓰는 일보다 남의 글을 지적하는 일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성취감을 느낄 때도 있었고, 나도 잘하지 못하는 걸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 같아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다. 연재는 혹시라도 서툰 과제물에 대해 내가 너무 모질게 굴거나 괜히 트집 잡힐 만한 언행을 하지는 않을까 염려했는데, 무엇보다 성적 처리 마감 이후에 올라오는 수강생들의 강의 평가를 궁금해 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학생들의 의견에 공감하며 “당신이 그래, 미리 답을 정해 놓고 질문 좀 하지 말라니까” 하고 핀잔을 주거나, “그래도 코로나 때는 수업하기 편했는데. 운전하기 힘들지 않아?” 같은 말을 더하기도 했다.

   “너무 시간 뺏기는 거 같으면 다음 학기부터는 못 한다고 해도 돼.”

   아마 내가 그 말에 순순히 동조했다면, 연재는 분명 당황해 했을 것이다. 서둘러 다른 말을 꺼내며 둘러대거나 또 다른 고민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힘들기는 뭐가.”

   넉넉하지는 않아도 예상할 수 있는 수입원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을 계획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순간만큼은 연재의 마음이 진짜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 말에 동의하거나 수긍하지 않을 거라는 걸 연재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시간이 더 많다고 무얼 더 많이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강의가 없는 방학 기간 동안에는 연재와 일주일쯤 국내외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미뤄 두었던 넷플릭스 시리즈를 몰아보기도 했는데, 대체로 낮 시간에는 연재가 사서로 근무하는 공공도서관 내 연속간행물실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함께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것이 나의 주된 일과였다. 그런 뒤에는 집 주변 수변 공원을 따라 산책을 하거나, 배드민턴을 치거나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창고형 마트에서 장을 봤다. 그러니까 자정쯤 연재가 먼저 침실에 들어가 잠든 뒤에야 비로소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별다르게 무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늦은 시간까지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전부였다. 정확히는 인터넷 서점에서 신간 목록을 확인하기도 하고, 몇 해 전에 출간한 내 소설집에 혹시라도 새 댓글이 달리지는 않나 찾아보며 실망하기도 했으며, ‘삼프로TV’나 ‘주류학개론’, ‘입질의 추억’이나 ‘오사카에 사는 사람들’ 같은 유튜브 채널을 연이어 시청하기도 했다. 영상 중간 중간에 참여를 독려하는 ‘굿네이버스’나 ‘국경없는의사회’의 광고가 자주 뜨기도 했으나 한 번도 후원을 한 적은 없었다.

   나는 종종 소설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는 했다.

   “직업을 갖지 마세요. 유튜브도 보지 마세요. 야, 쇼츠는 한번 시작하면 진짜 답 없다.”

   알면서 실천하기 어려운 일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던가. 그중에서도 가장 꾸준히 챙겨보는 콘텐츠 중에 하나는 ‘장대 양봉’이었다. 자칫 주식 관련 채널로 오해할 법도 한 제목이었으나 벌꿀 채밀 과정이나 여왕벌의 인공 수정 과정, 장수말벌 퇴치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 등을 별다른 편집과 연출 없이 보여주는 양봉 전문 유튜브였다. 다른 유명 채널에 비해 그렇게까지 시간을 들여 만든 것 같지 않은 무심함이랄까 미숙함 같은 게 좋았는데, 비교적 저화질의 영상과 자주 맞춤법이 틀리는 자막, 200명이 채 되지 않는 구독자 수도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나름 그 분야에 관심이 생겨서 토종벌과 외래벌의 차이를 알아보기도 하고,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꿀벌들의 군집 붕괴 현상의 원인과 피해 상황을 다루는 기사를 검색해 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러고 나면 간신히 뭔가를 쓸 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빈 문서를 띄워 바라보고 있자면 어김없이 명치 쪽이 더부룩하고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소화기에 좋은 혈자리를 꾹꾹 눌러 보아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대체 이 새벽에 나는 왜 이러고 있나······. 그러니까 그런 순간이 되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 대해 자꾸 돌아보게 되는 것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 중 대부분은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뭐,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틀렸다기보다는 당시에는 오히려 누구라도 빤히 다 알 법한 소리를 뭘 또 열심히 우기기까지 하나, 싶을 뿐이었다. 꼭 그날의 선배가 아니었더라도 소설을 배우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조언 중에 하나는 자기 경험에 대해 써야 한다는 것이고, 아는 것에 대해서 결국 나 자신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때마다 조금 의아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본래 그러한 것, 더 이상의 연역도 증명도 필요 없이 이미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업계의 공리 같은 것 아니었나. 눈으로 사물을 보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옆 사람 방귀소리에 본능적으로 코부터 틀어막는 것처럼 따로 배우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굳이 강조하려 드는 이유가 다 무엇이겠는가. 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하지 않고도 무얼 쓰는 게 가능하다고?

   물론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는 일이란, 마치 ‘상자 속 고양이’의 생사 여부를 예상하는 일과 같아서 쓰인 다음에야 결과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정확히는 쓰는 사람도 당장 자기가 지금 무얼 쓰는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가령, “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원칙이 있지만 그게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말한 사람은 프랑스 출신의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이다. 모르면서 잘도 썼네. 그럼에도 상자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애초에 거기에 집어넣은 고양이일 뿐, 느닷없이 코끼리나 자동차를 꺼낼 수는 없는 일이다. 파리 태생의 서머싯 몸이 조실부모하고 런던에서 60마일 떨어진 어촌 마을에서 목회자로 활동을 하던 큰아버지 손에 길러지기까지의 사연은 『인간의 굴레』에서도 세밀하게 소개되어 있다. 뭔지는 몰랐어도 쓰고 봤더니 그게 다 자기 이야기였더라는 것이다.

   나의 경험을 쓰라고? 그러나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지 않는 소설가는 애당초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까.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둥근 사각형, 증세 없는 복지, 열린교회 닫힘, 구국의 강철대오 전두환 등등과 같은 일종의 형용 모순이랄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화면 속 빈 문서를 노려보며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쓰게 되는 문장이 무엇이겠는가.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어쩌다가 나는 이 지경이 되었나. 그러고는 불행했던 과거와 후회할 만한 기억들을 되새기다가 공공연히 어디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비밀들마저 모조리 늘어놓은 뒤에······ 아, 이래도 분량이 모자라네······ 종국에는 지금 당장의 괴로움마저 거짓 없이 실토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더욱이 소설가로서 당면하게 되는 불행이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절박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불행한 사람들 중 누군가가 소설을 쓰는 거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똑같은 고생담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한 사람들은 자서전을 쓰고, 여전히 고만고만하게 안타까운 사람들이 소설을 쓴다. 심지어 나름 이름 좀 알려졌다는 성공한 소설가들이 왜 자꾸 에세이를 출간하는 거겠나. 소설가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의 평범한 불행을 현재진행적으로 고백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시절이 나라고 왜 없었겠는가.

   언젠가 처가에서 보내 준 밑반찬을 정리하다가 연재도 비슷한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차곡차곡 냉장고에 가득 쌓이는 것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해 여전히 식탁 위에 방치된 잡채 몇 가닥을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 내게 연재가 말했다.

   “엄마가 당신한테 잘하래.”

   저칼로리 식품인 줄로만 알고 한때 삼시세끼 잡채만 먹은 적도 있었다. 남들은 고구마로 다이어트도 한다니까 고구마 녹말로 만든 당면도 이래저래 비슷하지 않겠나 싶었던 것인데, 연재는 명절 음식 중에 체중 감량에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며 나를 핀잔했다. 그럼에도 장모님은 나의 식성과 취향을 고려하여 주기적으로 찬거리를 챙겨 주었다. 진미채나 메추리알조림, 깻잎이나 고추장아찌, 손이 많이 가는 갈비찜이나 꼬막무침을 보내올 때도 있었다. 연재는 평소 가리는 음식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반건조 생선 조림이나 갓김치 같은 것들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한 번씩 처가를 방문해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나는 일부러 나물 무침을 크게 집어 먹기도 하고, 평소보다 국이나 밥을 한 그릇씩 더 비우기도 했다. 연재를 비롯해 처가 식구들은 전체적으로 소식을 하는 편이었으나, 홀로 식탐을 부리는 사위를 장모님은 매번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정확히 무얼 읽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냉장고 앞에서 여전히 빈자리를 만들지 못하던 연재는 “당신이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더라.”며 장모님의 말을 내게 전해 주었다.

 

   이따금씩 나는 이전에 내가 쓴 문장들을 다시 읽어 보고는 하는데,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 새삼 놀라고는 했다. 하고 싶은 말들은 대체로 비슷했고, 이제 와서 다시 쓰더라도 그때 했던 생각과 별반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평소에 하던 고민들이 그대로 글로 옮겨진 것인지, 아니면 그런 글을 이미 썼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애매하기도 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쓰는 나를 닮은 동시에 나 역시 소설에 등장하는 누군가를 흉내 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 먼저 여러 편을 실패해야 할 때도 많았는데, 오히려 망치고 그르친 이야기들에 대해 다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마무리되는 소설도 적지 않았다. 뭐, 그마저도 다 나를 닮은 이야기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만약 이전의 내가 아무것도 쓰지 않아서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내가 처음 쓰게 되는 문장들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중 누구를 더 닮게 되는 걸까. 그게 누구든 나 자신과 가까울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까 그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의 가장 정확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나의 기준이며, 내가 나라는 걸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걸까. 아니, 그보다 나는 왜 자꾸 나에 대해 골몰하게 되는 건가······. 고작 일인칭 대명사일 뿐인데.

   대신에 누군가는 나의 문장들로부터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읽어내거나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게 또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거기에 대해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혹스럽거나 화가 날 때도 있었고, 어딘가 답답한 마음에 혼자서 자꾸 무언가를 중얼거릴 때도 많았다. 여전히 나는 잡채를 좋아하고, 칼로리와 무관하게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테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냥 좋아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장모님만큼이나 내 소설을 성실히 읽었을 어머니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만, 장모님과는 달리 다른 무언가를 더 읽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어머니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내고는, 의도와 다르게 그것으로 내게 미안해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졌고, 누구에게라도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졌다. 변명하거나 설득하거나 평소라면 하지 않을 법한 말들도 떠올랐는데 그것으로 겨우 무언가를 쓸 수 있었다.

 

   그러니까 주로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써왔다. 나의 불우했던 시절은 모두 나의 소설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럴 수 없었는데, 새벽 네 시 무렵 서재를 빠져나와 연재 옆에 누웠을 때 마침내 거기에 대한 나름의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는 있었다.

   “좀 썼어?”

   작은 기척에도 쉽게 잠을 깨는 연재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누운 자세 그대로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대신 연재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요즘에 어때? 행복해?”

   “그럼, 행복하지. 자기는 아니야?”

   그러고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나를 다독여 주었다.

   마지막 정기 건강검진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조금 높게 나오긴 했으나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납부해야 될 건강보험료와 지방세가 예년에 비해 조금 올랐고, 날로 하락하는 부동산 시세와 다르게 분기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대출 금리 때문에 조금 불안할 때도 있었으나, 그 외에 딱히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다. 더구나 근래에는 나를 화나게 할 만한 일도 슬프게 하는 일도 별로 없었는데, 일부러 극우 성향의 유튜브를 찾아보거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레전드 회차만 골라 시청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해야 할 말들이 어지럽게 떠오르기도 했으나, 무얼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세상은 이미 불행한 일들로 충분히 넘쳐나고, 전쟁과 기아로 고통 받으며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 기구하거나 안타깝거나 하다못해 아무도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지만, 정작 내가 쓸 수 있는 불행들이란 겨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불행들뿐이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내가 처한 어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나로서는 거의 분명해 보였다.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 말하자면, 자서전을 쓰기에는 모자라지만 그렇다고 소설을 쓸 만큼 불행하지도 않은 상태. 전체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행복한 쪽에 서 있었다. 무엇보다 내 곁에는 언제나 연재가 있었으니까. 어느새 다시 잠들어버린 연재의 손을 나는 힘주지 않고 가볍게 잡아 보았다. 그러자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더욱 명료하고 물리적인 실재를 감각할 수 있었다.

   내 행복의 근원. 나의 모든 것.

   그리고 좀처럼 내가 무얼 쓸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3

 

   연재에게도 이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연재가 일하는 공공도서관에서는 시간 선택제를 운영하고 있어서, 일주일 중 연이은 나흘이나 혹은 이틀에 한 번씩 격일제로 주 30시간 미만을 근무할 수 있었다. 주로 출산 휴가나 육아 휴직 등으로 생긴 공석을 대체하기 위한 2년 임기제 인력들에게 해당하는 제도였는데 연재도 그중 하나였다. 근로 시간이 제한된 만큼 보수도 제한적이었으나, 대신 그 덕분에 다른 또래 부부들에 비해 우리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만큼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 근무가 없는 평일 오전에 여유를 부리며 보이차를 우려 마시거나, 새로 배운 어남선생 레시피로 늦은 아침을 준비하거나, 주말이나 휴일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맛집을 대기 시간 없이 이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평소 시시콜콜한 대화를 많이 나누었는데, 한번은 도서관에 새로운 계약직 직원이 들어왔다는 소식과 그간 있었던 몇 가지 일화를 들려준 적도 있었다. 연재의 손에는 깨끗하게 잘 마른 빨래가 들려 있었고, 나는 고무장갑을 낀 채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다.

   “어려서 그런가, 애가 뭘 좀 몰라.”

   그러고는 일손은 느린데 눈치도 보지 않는다거나, 아무리 6개월 단기 공공근로 자격으로 들어왔다고는 해도 뭘 배우려는 생각도 없어서 실수를 지적하면 그때뿐이라거나, 무엇보다 늘 항상 뭔가를 먹고 있다고도 했다.

   “뭘?”

   개수대의 물을 잠그며 내가 물었고, 일정하게 포개진 수건을 들고 욕실 수납장으로 향하던 연재가 대답했다.

   “몰라. 자기 가방에서 뭘 자꾸 꺼내서 혼자 먹어.”

   관리 직원 중 누군가가 그것을 지적한 일도 있었다. 도서관이란 곳이 본래 음식물 반입이나 취식이 제한되는 곳이니까. 열람실에서, 그것도 도서관 직원이 그러는 것은 문제가 될 것도 같았다. 다만 되도록 상대방이 기분 상하지 않게, 근처 카페로 따로 불러 타이르는 수준이었는데, 나중에는 그조차 말이 돌았다고 했다. 더구나 그 자리를 보다 불편하게 여긴 것은 훈계를 듣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훈계를 하는 쪽이었다. 무얼 말해도 주눅 들지 않는 태도도 당혹스러웠지만, 그런 말을 듣는 와중에도 주문해 준 딸기 케이크를 그 애가 참 잘 먹더라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연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새로 올라온 게시물이나,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연재의 먼 친척과 친구들, 특히 연재만 알고 나는 모르는 것들에 대해 되도록 자세히 들려주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묵묵히 연재의 말을 듣기도 하고, 하던 설거지에 집중하거나 잠깐 딴생각에 빠지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연재의 의도를 알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해지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내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자주 가던 단골 가게 중에는 팬데믹 이후로 사라진 곳들도 많았는데, 한 번씩 그 집 메뉴가 생각나기도 했다.

   “자기는 거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연재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치. 그때는 당신 따라서 억지로 간 거지.”

   입맛이 변한 것인지 자주 먹어서 익숙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연재와 살면서 그런 일들이 적지 않았다. 연재의 습관이나 취향 중 많은 것이 이미 나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새삼 예전과 내가 달라진 것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앞으로도 변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지금 당장의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에 대해 연재에게 고백해 버렸던 것이다. 그 말에 연재도 나만큼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개지 못한 빨래들이 여전히 연재 앞에 많이 남아 있었는데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연재는 내 베갯잇만 색깔이 누렇다고 놀리기도 하고, 괜히 선반 위의 그릇들을 살피는 척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내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기도 했다.

   “그럼 그냥 행복한 이야기를 쓰면 안 돼? 자기가 밤마다 그러고 있는 거 난 좀 걱정되더라.”

   솔직히 글을 쓰는 동안 즐거웠던 적은 별로 없었다. 대체로 괴롭거나 고통스러웠으며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몸 여기저기가 아픈 적도 많았다. 경력이 늘수록 더 능숙해지는 문제도 아니어서, 매번 막막한 기분으로 한 글자씩 억지로 채워 나가곤 했는데, 대신에 소설을 쓰기 때문에 남들은 모르는 감정 같은 것을 하나 더 알고 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쓰려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는 행복. 다만, 그것에 대해 어떤 문장으로든 다시 쓴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해 보였다. 행복한 이야기조차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만 쓸 수는 없는 일일 테니까.

 

   이후로도 나는 밤늦게까지 서재에 홀로 앉아 국채금리 하락과 달러화 약세가 뉴욕 유가에 미치는 영향 관계 등을 분석한 경제 전문 채널이나, 한 시간 분량의 ‘손흥민 프리미어리그 역대 골모음’ 등을 시청하고는 했다. 중간 중간 결손가정이나 중증질환자가 등장하는 후원 광고가 나올 때도 일부러 넘기지 않았다. ‘장대 양봉’에서 오래된 영상들을 찾아본 적도 자주 있었다. 재작년 가을쯤 첫 영상이 올라온 뒤로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업로드 되고 있었는데, 대개는 조회 수가 2천 회 안팎을 유지하는 편이었다. 그나마 가장 인기가 많았던 영상은 1주년을 기념하여 나름 이벤트 성격으로 준비한 Q&A 라이브 방송이었다. Q&A라고 했으나 별다른 질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영상과 달리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주로 들려주었는데, 요약하자면 그 나이대에 얻을 수 있는 질병과 수술의 경험들, 실패와 재기의 과정들이었다. 그런 다음에 나는 책장에서 간병이나 투병 생활을 다루는 에세이를 찾아보기도 했다. “암이 무섭긴 무섭네.” 페이지를 넘기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불행들에 대해 오래 상상하고는 했다. 그러고는 억지로 꾸역꾸역 한 문장, 한 문장을 겨우 채워 나가곤 했다.

   그러는 동안 정작 우리를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는 당장의 위기에 대해서라면 오히려 무심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연재의 새로운 직장 동료에 대해 다른 마음을 갖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정은 씨가 우리 부부의 문제로 자리 잡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 보자면 연재가 우려하는 일들은 살면서 누구나 겪을 법한 평범하고 사소한 걱정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불편할 수는 있지만 대단할 건 없어서 대부분은 참고 넘어가는 일들, 그것으로 암담하거나 불행해지지도 않아서 무언가를 쓸 수도 없는 고작 그런 경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연재가 정은 씨에 대해 유난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뒤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이전에도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내게 많이 들려주었으나, 당시에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사이 내가 연재를 통해 알게 된 정은 씨에 대한 것들은 이런 내용이었다. 고등학교를 이제 막 졸업했다는 것과 아르바이트 한 번 한 적이 없는 이력에도 면접심사 당시 도서관장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는 것, 처음에는 아직 적응이 필요하겠거니 했으나 웬만큼 익숙해질 만한 일에도 실수가 많다는 것, 영악해서 그런 건지 책임감이 없는 건지 안 해도 될 것 같은 일은 굳이 모르는 척하는 데다가 해야 할일도 좀처럼 하지 않으려 든다는 것 등등.

   장기연체 이용자들에게 반납 독촉 전화를 하거나, 새로 입고한 도서 목록을 엑셀로 정리하는 간단한 업무조차 옆 사람에게 미루려 드는 바람에 여기저기 불만 섞인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오히려 관장이 그 애를 감싸고 도는 게 더 문제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고는 안정적인 생계 지원을 위한 공공근로의 취지와 취업 취약 계층의 자격 등에 대해서 설명하던 연재는 정은 씨의 경우, 부모님이 출퇴근을 도와주는 모양인데 다른 직원 중 누군가 독일산 세단에서 내리는 걸 보았다는 말도 내게 전했다. 그런 정황들이 아무래도 정은 씨와 관장 사이의 불공정한 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사람 너무 미워하고 그러진 마.”

   직원들끼리 공유하는 단톡방에 아직 정은 씨만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나는 조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나는 잘하지. 정은 씨가 나한테는 그래도 잘해.”

   말은 그렇게 했어도 연재도 나름 신경을 많이 쓰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 무렵, 연재는 원인 모를 가려움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새벽 무렵에 특히 심해지는 편이었으나 그럼에도 별다른 진단명을 받지는 못했다. 의사에 따르면 그것은 질병이라기보다는 증상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두통을 앓는다고 모두 머리에 병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배가 너무 고파서 편두통을 앓는 사례도 있거든요.”

   “그게 많이 다른가요? 이 사람이 밤에 통 잠을 못 자거든요.”

   내 질문에 의사는 우리 부부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요약하자면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지만 그 자체로 질병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지난번보다 조금 더 독한 약을 처방해 주었다고 덧붙이며, 다만 비급여 항목이라 건강보험에서는 제외된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병원 수납 창구 앞에 앉아 처방전을 기다리는 동안, 더 전문적인 피부과나 한의원을 검색해 보는 내게 연재가 정은 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땐 이전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연재가 들려주었던 그간의 일들은 내가 지레짐작했던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그날 연재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대강 이랬다.

   도서관에서는 거동불편자를 위한 우편 대출 반납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는데,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연재가 최근 곤란한 상황에 처한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문의 전화에 대한 응대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것이었고, 더구나 상급 지자체를 통해 직접 접수된 민원이 사건을 키운 꼴이었다. 이로 인해 시청으로부터 다분히 징계성 절차로 보이는 경위 조사 일정을 통보 받았다고도 했다. 다만, 여기에 연재로서는 억울해 보일 만한 사정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정은 씨가 이 일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것이었다.

   하필 정은 씨가 그 전화를 받기까지의 과정은 조금 복잡했다. 당시는 관내 장서 점검 기간으로, 주기마다 한 번씩 도서의 관리 상태나 전산상의 목록을 대조하며 점검해야 했는데, 이 기간 동안 이용객들의 대출이나 열람 등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내부 직원들은 담당 부서에 상관없이 대체로 분주했다. 폐기와 재구매 여부를 결정하고, 대출 오류나 분실, 소재가 불분명하거나 이중 등록된 경우 등을 파악하느라 한창 일손이 필요한 때였음에도 오직 정은 씨만이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것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왜 자꾸 같은 일을 두 번씩 하게 만드느냐며 다른 직원들로부터 몇 차례 주의를 받은 다음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연재 입장에서는 그런 모습이 조금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던 터라, 나름 정은 씨를 배려하기 위한 제안이었던 셈이다.

   “근데 뭐 때문에 그런 거래?”

   “정은 씨 말로는 그냥······ 장애인이냐고 물어 봤대.”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자기 딴에는 배운 대로 하긴 한 거지” 중얼거리기도 하고, 관자놀이 쪽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깊이 숨을 들이마시기도 했다. 매뉴얼에 따르면 해당 서비스 이용을 희망하는 경우, 5급 이상의 장애 등록 사실이나 국가유공상이자 장기요양자임을 증빙할 수 있는 서류를 최초 1회에 한해 방문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그런 안내를 듣기도 전에 불쾌감을 느낀 상대방이 대뜸 정은 씨의 이름부터 따져 물었고, 거기에 대해 “왜요? 그걸 아저씨가 왜 묻는데요?”라며 막무가내로 버티다가 그냥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접수된 민원 글에서는 이보다 좀 더 무거운 내용도 담겨 있었는데, 관련 기관 등을 통해 책임자를 파악한 후 적절한 조치나 징계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공문으로 내려온 민원 관련 협조문에는 정은 씨가 아니라 연재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을 2급 지체장애인이라고 밝힌 당사자가 직접 ‘차별’과 ‘비하’ 등의 표현을 사용했을 땐, 이미 가볍게 넘길 사안은 아니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요즘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

   그런데 연재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든 것은 이후에 벌어진 일들 때문이었다. 사후 대책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관장이 오히려 정은 씨를 감싸려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간 주변에서 의심만 하고 있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정은 씨의 어머니가 관장이 출석하는 교회의 권사라는 것, 평소에도 정은 씨 문제를 두고 함께 기도하던 사이라는 것, 그런 탓에 이래저래 정은 씨의 사정을 알게 되어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인데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자신이 조금 난처하게 됐더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정은 씨가 아니라 연재에게 직접 해당 민원인을 찾아가 사과하기를 부탁했다고도 했다.

   “그건 좀 너무하네. 괜히 애꿎은 사람만 억울하게.”

   “아니, 그게 아니라······.”

   연재는 무언가 더 해야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입을 뗐다가 금세 또 주저하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 왔다.

   “있잖아, 자기는 혹시 경지가 무슨 말인지 알아?”

   “경지? 무슨 경지에 이르다, 할 때 그 경지?”

   그러고는 내 목소리가 너무 크다며 황급하게 주의를 주고는 주변에 누가 들은 사람은 없는지 괜히 눈치를 보기도 했다.

 

 

4

 

   경계선 지능인, 혹은 순화된 표현으로 ‘느린 학습자’라고도 불리는데 IQ 검사 결과 71점부터 84점까지의 지능 지수를 가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용어 자체에 이미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지능 장애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습능력이나 대인관계 등에서 종종 크고 작은 문제를 겪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특히,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탓에 적절한 보호 장치나 교육 제도 등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범죄에 쉽게 노출되거나 취업 현장에서 소외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까 증상은 있지만 장애는 아니라는 건가······.

   관련 기사나 영상 등을 검색해 보다가 나는 병원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재로부터 전해 들은 그간에 일들에 대해 차곡차곡 기록하기 시작했다.

   관장을 통해 연재가 듣게 된 정은 씨에 대한 이야기들도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사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행동이나 말이 또래에 비해 둔한 편이었고, 간혹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그것만 하려 들었고, 간단한 산수 문제도 어려워했는데, 정작 담임 말로는 국어 실력이 더 문제라는 이야기. 자주 따돌림도 당해서 어쩌다가 챙겨 주는 친구를 만나면 종일 들러붙어 귀찮게 구는 바람에 그나마도 결국 멀어진 모양이었다. 더구나 성인이 되고 보니 부모 입장에서는 나중 일들을 더 염려하더라는 말도 관장은 전했다. 차라리 장애 등급을 받으면 제도적 보호나 혜택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게 생각처럼 또 쉽지가 않았다. 지적 장애 판정을 위한 검사를 볼 때마다 73점이나 81점, 컨디션이 좋으면 간혹 88점이 나올 때도 있었던 것이다.

   “일부러 틀리려고 해도 뭘 알아야 더 틀리지······.”

   정은 씨만 빠진 대책회의 자리에서 관장은 그런 말들을 변명처럼 늘어놓았다고 했다.

 

   정은 씨와는 나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연재가 근무하는 동안 나는 주로 정기간행물실에서 문예지 과월호를 찾아 읽거나, 언어학이나 민속학처럼 사람들이 없는 한가한 분야의 서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멍하니 시간을 때우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그 자리를 정은 씨가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얼 찾거나 정리하지는 않고 나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니면 관내 지정된 흡연 구역에서 본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담배를 피우는 대신 핸드폰만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중에 다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마다 사람이 좀 약았다는 생각도 들고, 남들 일하는데 혼자 게으름을 피운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나중에 사정을 듣고 나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조금 딱해 보이기도 했는데,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정은 씨가 자꾸 밀려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함부로 한 사람을 밀어내고 있던 거 아니었나.

   아마 도서관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정은 씨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애꿎은 한 사람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모두 알게 된 뒤에도 여전히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것도, 혹시라도 모를 인사상의 불이익을 걱정하는 것도 오직 연재 하나뿐이었으니까.

   “알지, 자기 억울한 거 우리가 왜 몰라. 근데 애가 좀 딱하잖아.”

   그런 말로 누군가는 연재를 달래기도 하고, 관장이 시청 쪽 사람들에게는 이미 잘 알아듣게 설명을 해두었다고도 했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항의성 게시글이 계속 올라오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연재가 직접 민원인을 사과 방문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즈음 연재는 거실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오래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산책을 할 때, 마트에서 장을 보며 더 필요한 물건 등을 상의할 때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는데, 마치 혼자 있는 사람처럼 골똘해 있다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떨치려는 듯 괜히 고개를 저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옆에서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고는 했다. 그사이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연재가 궁금해 할 만한 이야기들을 해주었는데, 어딜 가든 요새는 다들 MBTI를 물어대서 “작가들은 원래 다 F”라고 둘러대면 전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거나, 주술호응이 맞지 않는 문장이나 맞춤법을 지적하던 내게 “T 맞네. 완전 T미네이터네”라고 놀리려 든다거나, “요즘 애들은 한국 소설 잘 안 읽는대.” 무엇보다 수강신청을 한 학생들 중에 내 소설을 읽는 애들은 아직 아무도 없는 것 같다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아니면, 연재의 친구들 중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을 대며 안부를 묻기도 했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정은 씨와 관련된 말은 되도록 피하려고 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연재가 지금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때마다 팔꿈치 안쪽이나 목덜미를 긁어대는 연재가 나는 신경 쓰였다. 가려움증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은 씨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연재였다. 강의를 마치고 밤늦게 돌아온 어느 날, 연재는 불 꺼진 거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저러고 얼마나 오래 있던 걸까 염려도 되었는데, 뭘 좀 먹었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나가서 좀 같이 걷겠냐는 말에도 반응하지 않아서 혼자 ‘배달의 민족’을 뒤져 보던 내게 연재가 말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나 왜 자꾸 걔가 밉지?”

   그러고는 냉장고에서 맥주 캔 두 개를 꺼내 와 내 앞에도 하나를 내려놓았다. 내심 항생제를 복용하는 기간에 음주를 하는 것이 건강에 너무 해롭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럼에도 그 순간에는 연재에게도 알코올이든 유튜브든 잠깐 딴생각을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 더 필요해 보였다.

   “정은 씨가 요즘도 좀 그래?”

   “아니, 나한테는 잘하지. 잘하는데······.”

   그러고는 무릎 위에 고개를 파묻고는 또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화가 나.”

   평소에도 정은 씨가 비교적 연재를 잘 따르는 편이라고 했는데 그 일이 있은 뒤로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화장실을 갈 때 일부러 따라나선다거나, 단둘이 있을 때면 가방에서 사탕이나 캐러멜, 개별 포장된 수제 쿠키 같은 것을 꺼내 건넬 때도 많았다. 누구한테 들었는지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와서는 “이거 진짜 연재 쌤 남편 거예요?”라고 물은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연재로서는 마냥 편하게만 대할 수 없었는데, 아직 마음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아이도 나름 노력하고 있구나 하는 게 빤히 보여서 “정은 씨, 나한테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마음에 없는 말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연재가 예상했던 것과는 결이 좀 달랐다.

   “내가 뭐가 미안해요?”

   연재에 따르면 그 순간에도 입안에 먹을 것을 넣고 우물거리던 정은 씨의 표정이 무척이나 해맑아 보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재차 확인하듯 “진짜 안 미안한데요” 하는 정은 씨의 말이 연재가 듣기에도 무척 진심 같았던 것이다.

   여전히 실수가 많고, 능숙해진 것은 별로 없는데도 정은 씨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것도 연재에게는 언짢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꾸 자기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연재는 내게 하소연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하게 치근덕거리는 정은 씨를 줄곧 밀어내게 되고, 나쁜 마음들이 쌓여 평소라면 넘어갈 만한 사소한 실수에도 사나워졌다고도 했다. 그러다가 기어코 그날 낮에 사람들 앞에서 정은 씨에게 언성을 높여버렸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직원들은 정은 씨가 아니라 연재를 탓하는 듯했는데, “자기가 좀 이해해야지”라는 말로 타이르는 사람도 있었고, “알면서 왜 그래, 애가 남들이랑 좀 다르잖아” 놀란 정은 씨의 등을 두드리며 두둔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연재는 화가 나기보다는 부끄러운 마음이, 그보다는 어딘가 모욕을 당했다는 기분이 더 많이 들었다고 했다. 누구보다 정은 씨로 인해 연재 자신이 매번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

   그러고는 내게 단톡방 메시지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주로 근무 일정표나 행사 관련 자료 등이 공유되어 있었고, 언제 초대됐는지 스무 명 남짓의 인원 중 정은 씨의 이름도 보였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 정은 씨가 올린 글은 꽤나 정갈하고 단순하면서도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문장이었다.

   ‘나는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장애인이 아닙니다.’

   그 메시지에 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

 

   소설에 대한 여러 규정들 중에 내가 자주 떠올리는 표현은 ‘내용이나 형식상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장르’라는 말이었다. 사실, 그 자체로 설명해 주는 것은 별로 없지만 나름 위안이 되기도 했다. 마치 빈 문서처럼 아직 미결정적인 상태의 무언가를 자유롭게 채워 나가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더구나 소설을 무엇으로 정의하든 결국 어떤 경우들에 한하여 그렇다는 것일 뿐, 세상의 모든 소설에 대한 정의로서는 늘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적어도 독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 읽는 사람마다 나름의 정의를 이미 가지고 있어서 제한된 규칙과 알고 있는 기준으로 평가하려 든다는 것, 때문에 매번 그 사이의 간극과 척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고는 했다. 결국 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유란, 마음 가는 대로 뭐든 써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고 쓰는 개별적인 두 주체 사이에 얼마만큼의 거리가 적당한가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발현되는 거라고 믿었다.

   문학의 정치니 윤리니 하는 말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꼭 어딘가에 문학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권고하려 드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의아하기도 했는데, 더구나 왜 매번 독자의 윤리가 아니라 작가의 윤리뿐인가. 그 태도를 평가하는 주체로서의 독자와 평가 대상으로서의 작가는 왜 이토록 멀고도 불균형적인가. 그럼에도 그 간극을 의식하는 일이야말로 제법 문학적이라고도 생각해 왔다. 소설가란 겨우 그 틈을 발견하고 메우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더욱이 내가 이해하기로 소설의 윤리란 메움재로 쓰기에 적당한 바른 재료를 찾아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엇 하나 제대로 결정하지 못해 고쳐 쓰고 다시 쓰며 흔들리는 그 순간에만 지속되는 상태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고작 소설 한 편을 쓰는 데도 어떻게 윤리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사 하나, 어미 하나 고르는 데도 이렇게 주저하게 되는데······. 만약 가장 윤리적인 소설을 가늠할 수 있다면, 줄곧 머뭇거리고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텅 비어 있는 공백의 문서일 뿐이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소설이 될 수 있지만, 내가 쓸 수 없는 소설이라는 게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정은 씨에 대한 이야기가 내게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정확히는 거기에 다른 말을 더하거나 차마 다시 고쳐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의 일들에 대해 되도록 내가 전해 들은 그대로를 옮겨 보자면 이랬다.

   정은 씨가 올린 단톡방 메시지에 대한 반응이 돌아온 것은 이튿날이 되어서였다. 딱히 누구에게 대답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틀린 말이라고도 할 수 없었는데, 다들 어딘가 변명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연재는 말했다. 누구보다 정은 씨를 가리켜 “남들이랑 다르잖아”라고 발언한 당사자의 경우,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럴 의도가 아닌 걸 너도 알지 않느냐, 가장 열심히 정은 씨를 설득하려고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웬만큼 알아듣게 설명했다고 여겼으나, 저녁 무렵 같은 메시지가 또 한 번 올라왔을 땐 처음보다 더욱 당혹스러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매번 비슷한 시간에 맞춰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고, 나중에는 이런 의심을 받기도 했다.

   “누가 시키는 거야, 이거. 애 혼자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

   그러다가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는데 더 이상 내색하지 않았으며, 차곡차곡 같은 메시지가 쌓여 가는 동안 점점 더 정은 씨를 피하려고만 들었다고 했다.

   연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내용의 메시지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보름쯤 지나 도서관 휴무일이었던 월요일 오전 무렵의 일이었다. 아침잠이 덜 깬 상태로 단톡방을 확인하던 연재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얘 진짜 왜 이래?”

   그러고는 소리 나게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정수기에서 찬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장애인을 혐오합니다.’

   계약 기간이 아직 석 달가량 남았는데도 며칠 뒤 정은 씨는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았다. 연재에 따르면 메시지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아무래도 직원 중에 누가 민원을 넣은 것 같다고, 채용 과정에서의 부당함을 고발한 모양인데 그 문제로 관장이 감사를 받았다고만 전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정은 씨에 대해 들은 전부였다.

 

   그리고 여러 번, 나는 그간의 일들에 대해 써보려고 했으나 잘 되진 않았다. 무엇보다 정은 씨에 대해 다른 말을 떠올리기가 어려웠는데 매번 같은 자리에 이르러 막막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혹여 도움이 될까 싶어 장애 관련 서적을 찾아 읽거나 교양 다큐멘터리를 시청할 때도 많았다. 차별과 편견의 문제를 지적하는 의도에 쉽게 납득이 되고 어떨 때는 화가 나거나 마음이 아플 때도 자주 있었다. 한편으로는 틀리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말이나,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당연한 소리에도 의문이 생길 때가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걸까. 고작 성금 후원을 독려하는 짧은 광고만으로도 금세 가슴이 답답해지는데······.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안타까운 삶을 목격하고도 어떻게 무심하고 담담하게 관대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그게 무엇이든 정은 씨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고도 생각했다. 더구나 무얼 쓰려고 할 때마다 나는 정은 씨가 아니라 늘 연재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으나 할 수 있는 말들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 단순히 이 한 문장을 설득하기 위해 내게는 너무 많은 말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이런 질문도 함께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정은 씨를 밀어낸 건 그럼 진짜 누구였을까.

   그 무수한 말들 중에서도 선뜻 내세울 만한 변명을 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니까 한없이 가여워하다가 결국에는 혐오하게 만드는 저 선량하고 악의 없는 보통의 마음들에 대해, 내가 뭘 더 말할 수 있었겠는가.

 

 

6

 

   이후 연재의 증상도 차츰 호전되었고, 결과적으로 우리 부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간혹 한 번씩 연재도 그것을 확인하려고 들었는데, “아직도 행복하지?” 하고 내게 물으면 “그럼, 당연히 그렇지.”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는 했다.

   “나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다만 그 말이 조금 슬프게 들릴 때도 있었다. 딱 한 번 연재에게 그런 마음을 들킨 적이 있었다.

   언젠가 연재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다가 열람실에서 한국 소설 여러 권을 쌓아 둔 채 읽고 있는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중에는 평소 친분이 있는 이름들도 보여서 혹시나 나도 알아보지는 않을까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했는데, 흡연구역에서 다시 마주친 그가 내게 불을 빌렸을 땐 괜히 반갑기까지 했다. 인상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실없이 웃기도 하고, “날이 많이 풀려서 다행이네요” 별 의미 없는 소리를 주절댄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연재도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는지 나중에 그에 대해 물어 왔다.  

   “혹시 그 사람이 자기한테 뭐라고 그래?”

   어딘가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상황을 파악한 뒤에야 안심을 하고는 “그 사람이잖아. 그때 그 민원 넣었다는······.”이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아, 그 장애인······.”

   나는 연재가 생략한 뒷말을 이었다가 어딘가 잘못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얼른 다른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전혀 모르겠네.”

   연재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 남자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짐작했던 것과는 달랐고, 어느새 정은 씨를 떠올리기도 했는데 그러다 보면 또 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아져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도 했다. 아마 연재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횡단보도 앞에서 멍하게 정신을 팔고 있다가 신호가 아닌데도 건너려는 연재를 나는 다급하게 말려야만 했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버렸다. 요즘 들어 왜 자꾸 그러느냐. 무슨 생각을 하기에 차가 오는 줄도 모르느냐. 조심 좀 해. 제발 조심 좀 하라고. 내가 쓴 소설 속 대사 같은 말들을 연재에게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그 밤, 연재는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잠들지 못한 채 오래 누워만 있다가 이불 속에서 내 손을 꼭 붙잡고는 “있잖아, 나 요즘에 아무렇지도 않다?” 하고 말을 꺼냈다. 그러고는 정말 무탈해 보이는 연재의 일상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새로 부임한 관장이 직원들에게 잘 대해 준다고도 하고, 다니던 피부과에서 신경안정제 계열의 약을 추가로 처방 받았다고도 했으며, 간혹 어지럽고 졸리기는 하지만 확실히 가려운 데는 정말 효과가 좋더라는 말도 더했다. 그런 다음에는 모처럼 정은 씨에 대한 이야기도 내게 들려주었다. 얼마 전 연재는 정은 씨와 통화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사무실에 두고 간 물건들이 있어서 안부도 물을 겸 먼저 전화를 걸었는데, 그때도 뭐, 나름 괜찮았다고 했다.

   “잘했네.”

   “그치? 잘한 거겠지? 근데 왜 자꾸 잘못한 것 같을까?”

   그러고는 며칠 뒤 다시 연락을 했을 땐 정은 씨의 번호가 이미 바뀌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여전히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는 괜히 연재 편을 드는 말을 하기도 하고, “바꿀 때가 돼서 바꿨나 보지”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굴기도 했다. 하지만 연재는 그보단 조금 다른 말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떼기를 반복하며,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에 대해 굳이 설명하려 들었다.

   그런 뒤에도 우리는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장 필요하거나 중요한 말들은 아니었다. 대개는  우리 두 사람이 이미 잘 알고 있고, 여러 번 되풀이했을 법한 사소한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때마다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연재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좋았다. 드라마를 보거나 산책을 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할 때 더없이 좋았는데, 행복이 고작 그런 것이라면 언제든 우리를 망가뜨리고 무너지게 할 만한 일들도 그다지 어려울 게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일들은 별다른 이유나 잘못도 없이 아무렇게나 일어나 버린다는 점이었다. 미리 예상하거나 대비할 수조차 없어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그 순간이야말로 실은 우리를 가장 암담하게 만드는 원인이자 시작일지도 몰랐다.

   그런 불길한 마음이 생길 때면 나는 일부러 지금의 생활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을 만한 일들을 더 오래 상상하고는 했다. 연재 옆에 나란히 누워, 뜻밖에 불운한 사고를 당하거나, 악성 종양이 발견되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없는 아이를 만들어 다시 잃게 되는 모진 장면을 상상한 적도 많았다. 무엇보다 연재가 더 이상 내 옆에 없는 여러 가능한 경우들을 떠올리다 보면 나는 진심으로 슬퍼졌다. 그러다가 몸을 기울여 잠든 연재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것으로 우리가 아직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에 새삼 안심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별로 화가 나지도 억울하지도 않은 무난한 날들을 보내는 중이다. 자주 내게 없는 일들을 떠올리며 무언가를 써보려고 하지만 한결같이 잘 되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이혼한 선배를 떠올릴 때도 있었고, 양봉업자의 항암 치료 과정이나 ‘굿네이버스’ 광고에서 본 사연들을 유심히 되새겨 볼 때도 있었다. 정은 씨나 그 민원인을 생각할 때도 많았는데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대신, 나는 나의 이야기를 채워 가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말하려는 나는 누구인가.

   그의 불행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나에 대해, 내가 아닌 평범하고 무수한 또 다른 나에 대해, 그러니까 스스로의 전부이자 겨우 일인칭 대명사일 뿐인 그것에 대해, 나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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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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