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자리
- 작성일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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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자리
이준아
윤의 기침소리가 아침부터 요란했다. 목을 억지로 긁어 가며 끌어내는 기침이라 답답함이 해소되기는커녕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침을 꼴깍 삼키고 싶게 만드는 소리였다. 상담이 잡힌 날이면 윤은 꼭 그런 식으로 불필요한 소음을 일으키며 단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다 목쉬겠어, 그만 좀 하지, 단이 타박이라도 할라치면 윤의 눈썹은 단박에 가파른 산등성이가 되었다. 단은 그 성질 사나워 보이는 눈을 흘기며 티가 나게 중얼거리곤 했다. 방구석 호랑이 주제에.
하지만 그날의 단은 윤에게 단 한 마디의 반기도 들 수 없었다. 윤의 상담이 시작된 이래 최초로 윤이 아닌 단이 환자인 날이었다. 그러니까 윤의 불안이 단에게서 기인한 날이었다. 하다 하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단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이런 일이 종종 있나요?”
“글쎄요, 흔한 케이스라고 말할 순 없겠네요.”
“이유가 뭘 까요?”
의사는 그건 앞으로 차근차근 알아보자며 그날의 상담을 마무리 지었다. 차근차근, 이라니,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입장 차이가 이처럼 분명하게 갈릴 말도 없을 거라고 단은 생각했다. 사무직에 종사하는 오늘날의 20대에게 모니터를 거부하는 증상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배울 만큼 배운 저 의사 놈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단은 의사씩이나 되면서도 충분히 젊기까지 한 그 태평한 얼굴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마지막 질문이 우선이었다.
“저 혹시, 지인 추천 할인 같은 건 없나요?”
의사는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며 처방전을 써내려가는 중이었다.
“음, 죄송해요. 그런 건 없어요.”
단이 진료실 문을 나서려는데 여전히 모니터에 고개를 박은 그가 인심 쓴다는 듯 말을 보탰다.
“두 분이 자매시니까, 설윤 환자 분 세션 예약해 놓은 거 설단 환자 분이랑 서로 양도는 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처음 증상을 느꼈던 곳이 하필이면 출근길의 만원 지하철이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낀 단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출입문을 향해 내달려야 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객차에서 의지대로 방향을 바꾸기란 대개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당장이라도 전부 게워낼 것 같은 얼굴로 주변을 밀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승객들은 짜증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서로에게 몸을 더 밀착시켰다. 그렇게 가까스로 생긴 공간으로 단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다른 쪽 손바닥에 들린 단의 휴대폰에선 알고리즘이 충실하게 골라 준 30초 내외의 짧은 영상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플랫폼 자판기에서 물 한 병을 결제해 해갈하며 숨을 돌리자 메스꺼움은 곧 가라앉았다. 역시 마지막 하이볼은 마시는 게 아니었어, 단은 지난밤의 객기를 후회하며 남은 다섯 정거장은 도보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물에 젖은 솜 같은 몸뚱이를 겨우 일으켜 긴 계단을 올랐건만 손이 허전했다. 자판기 옆 벤치에 휴대폰을 두고 온 사실이 떠올라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데 누군가 때마침 단의 휴대폰을 집어 들려는 모습이 보였다.
“어어, 그거 제거예요!”
다급한 나머지 팔을 지나치게 앞으로 뻗어버린 단의 코어와 하체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는 꼴로 계단을 처참히 구르고 말았다. 손목 인대 부상 정도로 끝난 게 천운이라고 목격자들은 입을 모았다. 지들 일 아니라고 말은 쉽지, 이 꼴이 됐는데 천운이라니.
“엄마한테는 말했어?”
보호대를 찬 단의 손목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윤이 물었다. 단은 진저리를 치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뭐 하러, 괜히 발작 버튼 누를 일 있냐. 굳은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는 윤을 보며 단은 잠시 자신의 대답을 후회했다. 하지만 윤의 기분까지 살피기엔 이미 너무 피곤했다. 하필 오른손이었다. 적어도 보름은 손목을 쉬어 줘야 한다는 처방이 단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은 한껏 내뱉은 것치고는 김빠진 사이다처럼 옹졸한 소리를 냈다.
“그 손으로 일은 어떻게 해?”
주방에서 들려오는 윤의 목소리에 단은 팀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단이 판단하기로 마케팅팀 내에서의 그녀의 알량한 입지는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수준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영상 편집과 이미지 보정 기술까지 틈틈이 익혀 가며 팀 내 20대 대표로서 역량을 입증하는 데 얼마간 성공하긴 했지만, 밑바닥이 드러나기까지는 그보다 짧은 시간이면 충분했다. 깊이가 없으면 감이라도 있던가. 일전에 팀원 중 한 명이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 뒤통수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요즘은 편집 프로그램이 그렇게 쉽게 잘 나온다며. 요즘 애들이 쓰는 플랫폼에 익숙한 사람이 단 씨말고 누가 있겠어. 젊은 사람 감성으로 대충 흉내만 내주면 돼. 일을 떠맡기며 팀원들이 인장처럼 휘감아 주던 ‘영 앤 트렌디’라는 제법 멋진 정체성은 머지않아 ‘겉멋만 든 요즘 애들’이라는 오명의 꼬리표로 변해 있었다.
“아 큰일이네. 다음 주까지 편집하기로 한 영상이 두 개나 되는데.”
“그냥 외주 주자 그래. 그런 거 돈 몇 십에 기깔나게 해주는 사람들이 사방에 널렸는데 언니네 팀도 참 답답하다.”
윤이 직접 담근 레몬청으로 차를 만들어 내밀었다. 줄기차게 집어 들던 머그잔인데도 유독 묵직하게 느껴졌다.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부터 윤은 ‘청’ 만들기에 몰두했다. 레몬, 자몽, 매실 같은 열매들을 벅벅 씻고, 유리병을 열탕하고, 과일을 자르고 설탕을 붓고, 예쁘게 라벨을 붙이는 일을 반복하다가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단을 호출했다.
- 딴딴. 퇴근하고 청 가져가.
단은 청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았다. 식빵에 잼도 발라 먹지 않는 담백한 입맛의 소유자였다. 커피는 무조건 블랙이고, 즐기는 디저트라고 해봐야 기본 스콘이나 소금빵 정도. 하지만 팀원들은 윤의 청을 좋아했다. 진짜 맛있다는 말이 그저 예의상 하는 소리거니 했는데 탕비실에 레몬청이나 라임청을 가져다 놓기가 무섭게 며칠이면 바닥을 보이더니, 급기야 윤의 청을 ‘공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윤이 고른 제철 열매는 끈적하고 달큰하게 예쁜 병에 담겨 한 병당 이만 원에 팔렸다. 수량은 그때그때 달랐는데 그들이 지인들에게 선물이라도 하려고 들면 단이 유통해야 하는 청의 무게도 늘어났다.
“손이 그래서 들고 갈 수 있겠어?”
하필 주문량이 많은 달이었다. 멀쩡한 팔에 청을 담은 보냉백과 가방까지 둘러메니 몸의 축이 기울었다. 몇 걸음 걸어 보던 단은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넌 돈도 많은 애가 이걸 꼭 해야겠냐, 얼마나 번다고. 윤에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오늘은 그냥 자고 가. 회사도 여기가 더 가깝잖아.”
단은 잠시 고민했다. 씻기 위해 힘겹게 욕실 의자로 옮겨 앉는 윤, 걷어 올린 다리의 선명한 흉터, 그리고 정작 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할 한밤중의 신음. 시간에 힘입어 머릿속에 눅진하게 눌어붙은 그날의 잔상들을 떼어내느라 잔뜩 설치게 될 단잠까지. 단은 그런 밤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목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어 보였다. 온몸을 덮치는 압도적인 피로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래야겠다.”
“그럴래? 간만에 엽떡 시켜 먹을까? 모짜 두 번 추가해서.”
순순히 자고 가겠다는 단의 반응에 윤은 흥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지 뭐, 내가 시킬게. 단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깁스한 팔을 쿠션에 올려놓았다. 가까스로 편안한 자세를 잡고 배달앱을 여는데 오장육부가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위장이 뒤틀리며 속에 담긴 모든 것을 밀어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지만, 단의 자세는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쿠션 위에 안착한 단의 깁스한 팔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단의 코어 근육은 상당히 하찮았기 때문에 휴대폰을 쥔 왼손만으로 재빠르게 일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낭비한 단은 화장실로 뛰어갈 새도 없이 거실과 주방의 경계 그 어디쯤인가에 와락, 구토하고 말았다.
“괜찮아? 오늘 너무 무리했나 보다.”
윤이 헐레벌떡 휠체어에서 내려왔다. 내려왔다기보다는 떨어졌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단의 토사물 때문인지 다리의 통증 때문인지 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너 멀리 떨어져. 괜히 옷에 묻는다.”
한 손을 뻗어 윤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은 단의 팔이 바르르 떨렸다. 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가 이렇게 쓸데없이 처참해.
부실한 식사에 부옇게 묽기만 한 토사물을 사이에 두고 무너져 있는 자매의 형국에 단은 기가 찼다.
머지않아 단은 참을 수없는 구역질과 휴대폰, 정확히는 액정과의 상관관계를 눈치 챘다. 결코 유쾌하지 않았던 이런저런 시도 끝에 손바닥 크기 이상의 모니터가 시선에 정면으로 닿으면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까지 파악했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노트북을 멀찌감치 두고 윤에게 부탁해 가까스로 검색을 돌려 봤지만 헛수고였다. ‘전자파 과민증’으로 스마트폰을 장시간 사용할 시 두통이나 헛구역질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기사만 두어 개 보았을 뿐, 단처럼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잠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발작적인 구토가 시작된다는 증상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휴대폰으로 시작된 증상은 패드에서 노트북으로, 노트북에서 TV모니터로 기세 좋게 세력을 넓혔다. 모니터를 의식한 순간 시작되는 토악질이라니. 단은 증상을 부정해 보려 눈을 부릅뜨고 까만 모니터 앞에 앉아 버텨 보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최악이었다.
노트북도 태블릿 PC도 휴대폰도 없는 방은 모든 것이 그대로인 채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눈동자는 정처 없이 헤매며 어딜 가면 되냐고 자꾸 묻는데 단은 마냥 무기력하기만 했다. 몸을 기대고 앉은 가구의 물성마저도 낯설게 느껴졌다. 시그널을 거부하는 몸은 마음이 갈 곳을 잃었다. 단은 더할 수 없는 난감함을 느꼈다. 정신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잠들지 않는 한 모든 순간과 함께하던 6인치짜리 액정 없이 허공을 몰두하는 꼴이라니, 신종 사이코패스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때 손목에서 전화가 울렸다. 그래 워치가 있었지! 단은 놓치고 있었던 스마트 워치의 존재를 자각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김은희 팀장이었다.
“그러니까,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안 되는 상태라는 말이죠? 지금 단 씨 말은.”
“안 된다기보다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팀장님.”
“그러면, 다친 손목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로?”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증상의 원인과 극복 방안, 적당한 대책, 김은희 팀장이 던진 질문에 단은 무엇 하나도 시원하게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음, 아이고, 허어, 세 음절 이하의 추임새만 읊조리며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팀장의 진짜 속내가 무엇인지 단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단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다친 손목으로 영상 편집도 못 하는 상황에 휴대폰을 들여다보면 구역질이 나서 당분간은 SNS 계정도 관리가 어려울 것 같다고 더듬거리는 부하 직원에게 김은희가 어느 정도의 불만과 분노를 느끼고 있을지 단은 굳이 가늠하고 싶지도 않았다. 김은희 팀장은 고심 끝에 단에게 일주일의 병가를 제안했다.
“그런데 통화는 괜찮은가 봐요?”
“그게······ 스마트 워치는 괜찮은 것 같아요. 지금도 워치로 통화하는 중이에요.”
영원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김은희 팀장이 단호한 충고를 건넸다.
“단 씨, 힘든 일이 있으면 상담을 받아요. 그게 좋을 것 같은데.”
*
정신과 의사가 처방해 준 약 봉투를 들고 생수를 한 병 사자마자 단은 택시에 올랐다. 휘휘, 팔을 휘둘러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본 게 얼마 만인지 이렇게도 진짜 택시가 잡히는구나, 단은 새삼 놀랐다. 윤의 집까지 택시비만 족히 3만 원은 나올 테지만 도처에서 재생되는 휴대폰 액정들을 무시하고 지하철에 올라탈 자신이 없었다. 구토 증세를 완화해 주는 약,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약, 위장 운동을 도와주는 약, 또 정확히 목적을 알 수 없는 약이 두어 개 더 섞인 한 무더기의 약 칵테일을 입안에 털었다. 이렇게 한 움큼을 먹는데 뭐라도 효과가 있겠지. 단은 운전석 옆 거치대에 달린 내비게이션 화면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곧이어 혼곤해지는 의식을 단은 애써 붙들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렸을 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약발이 들어서인지 전보다 가뿐한 느낌이 들었다. 단은 걷고 싶어졌다. 윤이 그렇게 되고 단은 자주 걸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리를 못 쓰게 된 건 윤이었는데, 단은 당장이라도 성큼성큼 걷지 않으면 제 다리가 말라비틀어질 것만 같은 환상통에 시달렸다. 틈만 나면 걸은 덕에 체중이 눈에 띄게 줄어든 단을 보고 도대체 비결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단은 어디서부터 솔직하게 얘기해도 좋을지 헷갈렸다. 동생이 다리를 크게 다쳤는데요. 고칠 수 있다는데도 스스로 병신이 되려고 해서요. 그래서 저라도 대신 많이 걷기로 했는데 걷는 데 빠져드니까 살도 빠지던데요? 가감 없이 진실을 말하고 어색해진 상대의 표정은 말끔하게 무시한 채 큰 보폭으로 사라져 버리는 장면을 단은 자주 상상했다.
신경이 살아 있고, 재활치료만 제대로 받으면 본래 기능의 80%까지 충분히 살릴 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에도 윤은 꼼짝하지 않았다. 비교적 멀쩡한 다른 쪽 다리까지 덩달아 하향 평준화하기로 한 듯 윤은 두 다리 모두 작정하고 방치했다.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윤의 마음을 단은 읽을 수가 없었다.
동네 할머니들과 배드민턴을 치고, 중학생 남자 아이들 틈에 껴서 농구를 하고, 주말이면 새벽같이 사라져 스포츠 센터에서 자유 수영을 즐기던 윤.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을 땐 운동장을 몇 바퀴고 달리던 윤. 야 이 한심한 언니야 제발 운동 좀 해라. 배가 이게 뭐냐. 겁도 없이 단의 옆구리 살을 움켜쥐던 윤.
단은 윤의 집 근처 천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휠체어가 다닐 만한 완만한 경사로가 있어 윤과도 자주 나오는 곳이었다. 하지만 혼자 걸을 때 단은 부러 구불구불하고 지면이 고르지 못한 갓길을 택했다. 윤이 다치기 전의 단이었다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길이었다.
저 멀리 윤의 전동 휠체어가 보였다. 쟤는 이 더위에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나온 거지. 단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윤은 단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여전히 걷지 않는 다리 위에는 청을 만들기 위한 과일 꾸러미가 한가득 얹혀 있었다. 단은 당장이라도 그 과일들을 물가에 내동댕이치고 윤을 휠체어에서 끌어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딴, 이거 윤이 아니야?
사고가 있던 그날 단에게는 친구가 보내 준 두서없는 영상을 제대로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연말 프로모션 준비에 차질이 생겨 팀 전체가 비상인 시기였다. 기획부터 틀어진 탓에 잡다한 실무를 담당하는 단이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퇴근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기껏 쥐어짜 낸 아이디어가 메인 타깃인 Z세대를 대상으로 한 블라인드 설문조사에서 혹평을 맞자 잔뜩 비뚤어진 안 과장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할로윈 관련 라이브 영상들을 보며 이죽거렸다.
“하여튼 정신 나간 것들. 이러고 쳐 놀면서 헬조선이래지. 남의 나라 귀신 쫓는 명절을 도대체 지들이 왜 챙겨?”
제대로 된 질문이라기보다는 넋두리에 가까웠고, 적당한 답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단은 기필코 제대로 호응해 주고 싶었다. 숨 막히는 회의실에서 이렇다 할 역할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단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단은 안 과장에게 그런 헤픈 종자들과 싸잡히지 않아도 되는 건실한 청년이고 싶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래야만 했다.
단은 그날의 발언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마치 다른 대답을 했다면 윤의 상태가 달라졌을 것처럼.
뒤늦게 확인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영상의 장소는 시끄러운 음악소리로 가득한 펍이었다. 영상은 잠시 펍의 내부를 보여주는가 싶더니 이내 한 곳으로 초점을 맞췄다. 젊은 여자였다. 밝은 핑크 머리에 불빛이 나는 요정 날개를 달고 아슬아슬하게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팬티가 다 보이도록 창틀에 들러붙어 누군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 부주의한 여자의 딴딴한 종아리가 무척이나 낯익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두 다리와 발목의 작은 돌고래 타투까지. 영락없는 윤이었다.
“뭐 해요. 빨리 도와요. 이러다 진짜 큰일 나요!”
고개를 돌리고 소리치는 윤의 옆으로 이내 더 건장한 체격의 외국인 남자 두 명이 진을 쳤다. 장정 두 명의 힘이 더해지니 더 정력적으로 사람들을 펍 안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쟤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의문이 더해지려는 찰나 창밖으로 보이는 까만 무리가 모두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빈틈없이 꽉 찬 사람 떼는 단이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마주하는 풍경이었지만, 들뜬 축제 분위기의 펍 내부와 대비된 창밖의 풍경은 어딘가 기괴했다. 신나는 팝이 흐르고 한껏 야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몸을 흔드는 사이 윤은 바깥 배경을 상대로 알 수 없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급기야 윤은 창틀에 엉덩이를 올리고 걸터앉았다. 저 미친, 치마는 또 왜 저렇게 짧아. 단에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야외를 가득 메우고 있던 색색의 머리들이 사라졌다. 갑자기 드러난 여백의 섬뜩한 공허를 감지한 순간, 동영상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불친절하게 끊어졌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응급실에서 찾아낸 윤의 상황을 단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단하게 버티고 섰던 윤의 다리가 왜 저 모양으로 곤죽이 되어 있는지, 난리통 속에서도 깜찍하게 펄럭이던 요정 날개는 어째서 저런 불온한 색으로 물들어 말라비틀어져 있는지.
너는 분명 그 풍경 안쪽에 있었는데.
*
“이번에는 뭐야?”
“청귤, 지금이 딱 철이야. 향 좀 맡아 볼래?”
“어떻게 나온 거야. 이 멀리까지.”
“앞집 이모가 시장가는 길에 뭐 필요한 거 없냐길래 나도 나가고 싶다 그랬지.”
“야, 그런 민폐를!”
“아니야, 그 이모 나랑 나가는 거 되게 좋아해! 수다를 얼마나 떠는데. 갈 때도 언니 못 만나면 자기한테 다시 전화하라고 신신당부했어.”
단은 윤의 주장을 의심하지 않았다. 옆집 할머니도, 편의점 이모도, 카페 알바도, 아랫집 남학생도, 경비 아저씨도, 모두가 윤을 좋아했다. 단과 윤은 비슷한 이목구비, 그보다 더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자매였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누가 더 단정하고 누가 더 자유분방해 보이는지 같은 뻔한 차이점이 아니었다. 윤의 호의는 뭐랄까, 자연스러웠다. 단이 꾸며내는 예의 바름과는 영향력의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단은 그런 윤에게 많은 시간 질투를 느끼며 살았다. 하지만 마음속 가시 같은 감정의 정체가 시샘이라는 것을 단은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나는 절대로 윤처럼은 될 수 없어. 단은 자주 되새겼다. 그것이 불가의 문제였는지 거부의 의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윤의 전동 휠체어가 멈춰 서는 바람에 돌아오는 길이 험난했다. 동력 없이는 천근만근인 그 바퀴 달린 물건을 도저히 여자 혼자 힘으로는 끌 수가 없었다. 단이 횡단보도 한가운데 휠체어를 버려두고 윤을 업다시피 하는데, 몇몇 사람들이 도로 위에 그대로 정차한 뒤 망설임 없이 자매에게 다가왔다. 두 명이 단을 도와 윤을 부축해 길을 건넜고, 남자 셋이 휠체어를 번쩍 들어 보도로 옮기고, 땅에 떨어진 청귤을 뒤따라오던 학생들이 살뜰히 챙겨 주는 광경. 그중 한 명은 자신의 전기차를 갓길로 옮겨 윤의 전동 휠체어를 충전해 주기까지 했다. 가여운 장애인을 돕는 도로 위의 의인들. 이 장면이 어쩌다 알고리즘을 탄다면, 사람들은 세상이 아직 따뜻하다며 제멋대로 인류애를 느끼겠지. 단은 윤이 그저 불구 행세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고래고래 폭로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멀쩡한 인간들이 약간의 선의로 쉽게 얻은 감동을 모조리 박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인 사람은 결국 단이었다. 윤은 뭐가 그렇게 감개무량인지 시종일관 싱글거리며 퍼레이드 마차에 올라탄 아이처럼 쉴 새 없이 손을 흔들고 또 종알거렸다. 어머 너무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단은 윤의 달뜬 목소리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일단락되고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의 몸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단은 그대로 현관에 주저앉았다. 사람들 정말 착하다, 그치 언니? 윤이 말했다.
“너 진짜 장애인이야?”
단의 물음에 윤은 서서히 얼굴의 화색을 거둬들였다. 구태여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머리를 지배할 정도의 무게감을 가졌지만 좀처럼 실체를 갖춰 쥐어지지 않는 그 통상적인 지칭.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고, 단은 내친김에 몰아붙였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데? 너 정말로 평생 장애인으로 살 작정이냐고. 이게 네 천직이다 싶어?”
윤이 한 발로 간신히 힘을 줘 실내 휠체어로 옮겨 앉았다. 제법 익숙해진 몸놀림에 단은 화가 치밀었다. 윤은 땅에 떨어졌던 청귤의 상태를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귤 다시 사야겠다. 청귤은 이때 아니면 못 사는데.”
윤의 무릎에서 오늘따라 유독 수난이 많은 청귤들이 다시금 굴러 떨어졌다.
“설윤, 줍지 마.”
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윤은 여전했다.
“그거 줍지 말라고!”
바깥 풍경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뻗은 팔, 힘없이 바스러지는 다리. 윤의 뒷모습은 귀신을 몰아내기 위한 인파로 가득한 그 거리의 풍경 속으로 기어코 다시 단을 데려다 놓고야 만다. 피의 축제로 끌려 내려가는 윤을 단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바라보면서도 알지 못한다. 단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
단은 결국 퇴사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김윤희 팀장은 퇴직 의사를 밝히는 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체 없이 명확한 시선이었다.
“팀을 옮겨 줄까요? 아무래도 마케팅팀이 디지털기기를 사용할 일이 많긴 하니까.”
호의는 감사하지만 어떤 종류의 모니터든 오래 바라보는 일이 힘들다고, 쉬는 동안 상황은 더 악화되기만 했다고, 충고해 주신 대로 상담도 지속해 볼 생각이라고, 단은 가감 없이 상황을 고해 바쳤다. 김윤희 팀장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었다. 피할 길 없는 상사의 얼굴에서 어린아이를 어르는 어른의 얼굴로.
“단 씨 증상은 나만 아는 거로 해두죠. 팀원들한텐 공부하러 갔다고 할게요.”
“네?”
“요즘엔 암암리에 데이터가 돌기도 하더라고. 회복하면 어디든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겠어요?”
단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김윤희 팀장이 마지막으로 베풀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푹푹 찌는 더위가 맹렬하게 단을 공격해 왔다. 연일 폭염주의보가 발효되는 중이었다. 단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앞으로의 인생 경로 같은 현학적인 사유가 먼저일 줄 알았는데 타들어가는 아스팔트 위에 서고 보니 그딴 고민은 해서 뭐 하나 싶었다. ‘모니터 불가’라는 어마어마한 핸디캡을 짊어진 단에게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손에 꼽았다. 하물며 햄버거 하나를 사려고 해도 도시는 키오스크 천지였고, 전시나 공연 같은 오프라인 이벤트를 찾아보고 싶어도 정보를 얻을 길이 없었다. 데이터를 활용하지 못하는 단은 까막눈이나 마찬가지였다. 잡스가 참 대단한 일을 하셨네. 폭삭 늙어버린 기분으로 전설의 고인을 욕하며 단은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에어컨의 찬 기운이 절실했다. 하지만 막상 버스에 자리를 잡으니 정수리로 쏟아지는 에어컨 바람에 금세 한기가 돌았다. 뭐가 이렇게 중간이 없어. 팔에 닭살이 잔뜩 돋은 채로 단은 얼핏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동네가 낯설었다. 적당히 열만 식히고 내려 건너편에서 같은 노선을 탈 예정이었건만 윤의 물리치료 예약이 고작 삼십 분 앞이었다. 단은 다급한 마음에 스마트 워치로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름 3센티 남짓의 액정조차도 단에게는 버겁게 느껴졌다.
“미안, 내가 버스에서 깜빡 졸았나 봐. 예약 시간 못 맞출 것 같은데 어떡하지?”
“괜찮아, 취소하고 다시 잡지 뭐.”
“왜 취소해. 택시라도 타고 가 있어.”
“혼자 택시 타는 건 뭐 쉬운가. 괜찮아, 안 그래도 좀 귀찮았어.”
땡볕에 달아오른 머리는 버스에서 충분히 식혔다고 생각했는데, 그 뜨거운 덩어리는 단의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께에 똬리를 틀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너 제정신이야? 화도 안 나? 그냥 좀 악착같이 가보라고! 그 무거운 과일도 굳이 직접 나가서 사 들고 오는 애가 치료는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정거장 주변에서 각자의 운송수단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일제히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단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더운 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제 손목에 대고 고래고래 육두문자를 날리는 젊은 여자는 단연코 흥미로운 소재였다. 누군가의 휴대폰 뒷면이 단을 향했을까. 그저 우연일 수도 있는 동그란 렌즈의 시선을 의식한 순간 단의 증상은 전에 없던 기세로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토할 것 같아.”
“뭐라고?”
“토할 것 같다고!”
단은 스마트 워치를 손목에서 잡아 뺐다. 손톱에 팔목이 긁힐 정도로 거친 동작이었는데도 윤과의 통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워치가 계속해서 단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윤의 목소리였는지는 단조차도 확실하지 않았다. 단은 워치를 주워 전원을 껐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이번에는 지면의 열기가 단의 다리를 타고 가슴으로, 다리로, 마침내 두 눈까지 빠르게 올라왔다.
자, 이제는 정말로 뭘 할 수 있을까.
“바깥 활동을 많이 해보세요. 운동도 좋고, 그냥 산책도 좋고, 너무 실내에만 머무르지 마시구요.”
단과 윤은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일을 같은 요일로 조정했다. 데이터를 못 쓰는 단과 다리를 못 쓰는 윤이 함께 움직이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번갈아 시간차를 두고 의사를 만났고, 각자의 상담 내용은 공유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 외에도 단은 몇 가지 큰 결단을 내려야 했다. 퇴직금을 털어 작은 소형차를 한 대 계약한 것, 그리고 윤의 집으로 완전히 들어온 것. 증상을 고백한 이후로 부모와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부친은 허구한 날 혀를 차대서 저러다 혀가 입천장에 그대로 달라붙을까 봐 걱정될 지경이었고, 모친의 경우는 처음엔 제법 잘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하루가 멀다고 정체불명의 식이요법을 찾아오고, 새벽기도를 나가다가 급기야는 굿을 권하기까지, 갈수록 자극적으로 단을 옥죄었다. 단은 윤이 그 몸을 하고도 기를 쓰고 본가를 나와 살기를 고집하는 이유를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단이 쓸 서랍장을 비우던 윤이 물었다. 언니 혹시 나 때문이야? 이렇게 된 거. 단은 윤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뭐 때문에 이러고 있어? 결국 자매는 서로에게서 원하던 답을 얻지 못했다.
윤의 재활치료가 있는 날이면 자매는 매번 크게 다퉜다. 단이 보기에 윤은 절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더 아파야 했고, 더 고단해야 할 텐데, 윤은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멈추고 말았다. 힘든 재활 운동을 마친 사람 같지 않은 보송한 윤의 얼굴을 단은 견딜 수 없었다.
“설윤! 너 제대로 안 해?”
단이 윤의 재활치료에 동행한 게 처음도 아닌데, 윤이 게으름을 피운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저 모든 것은 전과 같았는데도 단의 모든 감각은 윤을 향해 곤두섰다. 핸드폰 못 들여다보니까 괜히 나한테 지랄이야! 참다못한 윤이 맞받아쳤던 날, 자매는 물리치료실의 분위기를 험악하게 조성한 죄로 센터로부터 경미한 경고를 받았다.
“내 인친 중에 미디어 디톡스 하는 애가 있거든? 걔가 그러던데. 처음에만 힘들지 하다 보면 무심코 지나치던 삶의 가치들이 느껴지면서 차분해진다고. 언니 너는 어떻게 된 게 갈수록 괴팍해지냐?”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윤이 물었다. 윤이 말하는 인친이 누구인지는 단도 잘 알고 있었다. 툭하면 뭘 끊는 애였다. 술을 끊고, 커피를 끊고, 탄수화물을 끊고, 밀가루를 끊고, 소비를 끊고, 숏츠를 끊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열심히 ‘소통’했다. 자신을 향한 추앙과 증오가 반반의 비율로 들끓는 인스타 월드에 그 모든 것을 낱낱이 고해바치는 것이 대단한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미디어 끊으면 인스타 못 하는데 그 성격에 답답해서 어떻게 산대?”
“그러게, 그래도 중간에 경과보고 한 번 올리고 아직까지 게시물 안 보이는 거 보면 꽤 진심인 듯?”
으악! 놓쳤다! 아까 거기서 꺾었어야 되나 봐! 단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어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내비를 볼 수 없는 단을 대신해 길 안내를 담당한 윤은 자주 한눈을 팔았고 때마다 길을 놓쳤다.
“야이씨 설윤 너 진짜. 똑바로 안 해?”
하필이면 일방통행인 골목이었다. 역주행 방향으로 들어서는 단의 소형차를 보고 저 멀리서부터 벤츠 한 대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급히 핸들을 꺾어 보도로 차를 붙인다는 게 그만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던 노인을 놀라 자빠뜨리게 만든 꼴이 되고 말았다. 창밖을 살피던 윤이 단을 안심시켰다.
“언니가 친 거 아니야. 할머니가 그냥 놀라서 넘어지신 것 같아.”
운전대를 잡은 단의 손이 달달 떨렸다. 단과 할머니를 번갈아 살피던 윤이 말했다.
“왜 이렇게 떨어? 많이 놀랐어? 언니 근데 잠깐 내려 봐야 할 것 같은데. 할머니한테 좀 가봐.”
단은 운전석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하지만 할머니를 부축하러 간다고 생각했던 윤의 예상을 뒤엎고 단은 방향감각을 잃은 사람처럼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단의 귀에만 들리는 노래라도 있는 것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돌던 단은 갑자기 멈춰 서더니 그 방향 그대로 점점 멀어져만 갔다. 언니! 어디 가? 윤의 목소리를 단은 알아서 차단했다. 멀어지고 멀어지고 멀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이 살길인 것 같았다.
손목에 찬 아날로그 시계로 단은 시간을 확인했다. 비장하게 사라진 것치고 흥분은 싱겁게 가라앉았다. 딱히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래도 한 시간은 채울 결심이었다. 시종일관 태평한 윤을 조금은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길래 길 좀 제대로 보라니까, 나쁜 년. 결국 단은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를 불어터지게 느릿느릿 먹으며 사십 분을 겨우 채우고 터덜터덜 차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언니, 여기야!”
윤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창밖으로 산뜻하게 손을 흔들었다. 저건 진짜 미친년이야. 단이 한마디 쏘아붙이려는데 무슨 영문인지 뒷좌석의 창문이 같이 내려갔다.
“아가씨! 나 괜찮아!”
종잇장처럼 바닥에 나자빠졌던 노인은 생각보다 노인이 아니었고 매우 밝은 표정으로 단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
“내가 원래 좀 잘 놀라서 탈이야. 동생이랑 내가 아가씨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
“제 걱정을 하셨다구요?”
“응, 갑자기 그렇게 사라져서 여기 동생이랑 내가 얼마나 놀랐다구. 이것 좀 마셔요.”
그녀의 손에 들린 뜨끈한 박카스 한 병을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윤이 먼저 뚜껑을 따버렸다. 마시기 싫어도 그냥 마셔. 말을 생략한 강경한 태도가 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했다. 단은 그 병을 받아 들지 않는 것으로 화를 낼 사람은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무언의 힘겨루기를 끝낸 사람은 다름 아닌 뒷좌석의 할머니였다.
“안 마시면 내가 마시고.”
그녀는 단숨에 고함량의 카페인 섭취를 끝내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안전벨트를 채웠다.
“이제 집에 데려다줘. 나 너무 오래 기다렸어.”
*
윤이 그 노인도 아닌 노인에게 소정의 현금을 이체해 줬다는 말을 단은 넋을 놓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역주행, 난폭운전, 골절, 신고, 골치 아픈 말들을 주섬주섬 갖다 붙이며 억지 신음을 끌어내는 할머니를 차에 들이고 윤은 자신이 다리를 못 써 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점에 대해 먼저 사과했다. 할머니는 움찔하더니 윤의 다리를 흘끔거리며 중얼거렸다. 멀쩡해 보이는구먼.
“어쨌든 우리 차 때문에 놀라서 넘어지신 건 맞으니까. 침이라도 맞으시라고 쬐끔 드렸어.”
넌 인생이 호구냐. 단의 핀잔에도 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이 배달할 청을 꼼꼼하게 포장하는 중이었다. 윤의 수제청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는데 번창하는 것치고는 순수익이 형편없었다. 너무 좋은 과일을 쓰고 너무 비싼 설탕을 쓰고 심지어 병까지도 너무 고급을 써버렸으니까. 파손 위험을 줄인답시고 단의 소형차를 배송 수단으로 쓰니 결국 유류비까지 더하면 간신히 본전이었다.
같이 가준다는 윤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차에 오른 단은 프린트한 경로 안내를 대강 머릿속에 집어넣은 후에야 시동을 걸었다. 윤에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사실 단은 날이 갈수록 운전이 좋아지고 있었다. 긴 시간 장롱면허로 초보나 마찬가지인 단에겐 도로에 집중하고 신호를 따르고 길을 찾는 것만으로도 온 신경이 틈 없이 긴장하는, 그야말로 운전만 하면 되는 시간이었다. 출발을 위해 기어를 바꾸려는데 어디선가 둔탁한 신호음이 들렸다. 벨소리는 벨소리인데 미묘하게 음이 단조롭고 촌스러웠다. 소리의 출처는 뒷좌석 사이에 박힌 구형 폴더폰이었다. 이게 언제 적 유물이야. 벨소리는 끊기기가 무섭게 다시 시작되기를 반복했다. 상당히 거슬리는 조악한 음질이었다. 단은 엉겁결에 폴더를 열어버렸고 통화가 연결된 것을 감지한 상대방은 기회를 놓칠세라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구요??”
굳이 귀에 갖다 대지 않아도 차체를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핸드폰 두고 내리셨어요? 제가 방금 차에서 발견했는데.”
“아! 어제 그 아가씨구나! 다리 아픈 처자야 그 처자 언니야?”
“언니요, 운전했던 사람.”
“아이고 다행이네 다행이야! 잘 됐네 잘 됐어! 좀 갖다 줘!”
할머니는 다짜고짜 어제 데려다준 그곳에서 한 시간 뒤에 보자는 말만 남기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냈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폴더폰의 전원도 나가버렸다. 단은 그냥 무시해 버릴까 하다가 핑계가 생긴 김에 윤이 보내 줬다는 돈의 액수라도 정확히 파악하자 싶어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방금 아무런 증상 없이 통화를 완수했다는 사실을.
약속한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어슬렁 할머니가 나타났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젊어 보이는 그녀는 지팡이도 짚고 있지 않았다. 이리 줘. 손을 내미는 그녀에게 단은 어디서 이런 기종을 개통할 수 있었는지 다급히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요즘 2G는 서비스 종료됐다고 알고 있는데 이건 어떻게 개통하셨어요? 아, 3G예요?”
할머니는 단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거 효도폰? 아들이 저기 저 앞에 있는 핸드폰 가게에서 해줬어. 그건 왜?”
“저도 하나 갖고 싶어서요. 딱 이거랑 똑같은 걸로.”
“이런 게 왜 갖고 싶어?”
“제가 스마트폰 알러지가 생겨서요. 그런데 이거는 괜찮더라고요.”
번쩍. 단은 잠시 할머니의 눈에서 섬광 비슷한 걸 봤다고 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갑자기 매우 적극적인 태도로 그러지 말고 이걸 사가라고, 이거 산 지 오래돼서 아마 지금은 없을 거라고, 10만 원, 아니 5만 원에 주겠다고 정신없이 흥정을 걸어 왔다. 단이 지갑에 든 전 재산이 4만 원이라는 핑계로 만 원의 네고를 제안하자 할머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차 뒷좌석을 훑었다. 그럼 저 청이라도 한 병 줘. 밑도 끝도 없이 당당했다. 저게 청인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단은 신통한 할머니의 재주에 탄복하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까지 쟁취한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연락처를 수첩에 빠짐없이 옮겨 줄 것을 요구했다.
약구 ㄱ 임사 장, 박씨 ㄴ ㅔ 괴기, 사랑하는 큰 아들, 며늘이, 귀한 두 ㄹ째
내친김에 할머니가 개통했다는 대리점으로 가 명의를 변경하고 그 자리에서 이름 세 글자 빼고 전부 다 있는 그 어수룩한 주소록을 옮기는 사이 할머니는 또 어슬렁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충전기가 들려 있었다.
“아니 그래서. 그 효도폰 하나 얻겠다고 5만 원을 더 뜯기고 청까지 내주셨다고?”
낯선 번호를 타고 들려오는 단의 목소리에 놀란 것도 잠시, 자초지종을 들은 윤은 자, 이제 누가 호구지? 깔깔거리며 단을 조롱했다. 급속 충전이 될 리 없는 효도폰은 카페에 앉아 한 시간을 내리 충전했는데도 배터리의 반을 간신히 채웠다. 단은 다시 청을 배달하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출발지가 달라진 탓에 애써 뽑아 온 경로 안내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수월하게 길을 찾았다. 오, 나 길치 아니네. 단은 모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무사히 배달을 완료하고 윤의 집에 도착했을 때 득달같이 단을 몰아붙일 것이라 예상했던 윤은 어쩐 일인지 주방에서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거 다섯 병 더 배달하자. 정량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병에 청을 옮겨 담으며 윤이 말했다. 힘에 부치는지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뭐야. 배달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언니 니가 한 병 로스 냈잖아. 그거 다시 갖다 줘야지.”
“야 그걸 뭘 지금 당장씩이나 해. 그리고 왜 다섯 병이야. 병은 또 왜 이렇게 커.”
“아 그냥 좀 해!!! 갖다 주라면 갖다 주라고!! 그러길래 누가 병신같이 한 병 뺏기래??”
윤이 별안간 빽 하고 소리를 질러서 단은 하마터면 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단은 오냐 한번 해보자, 같이 성질을 내려다 어쩌면 단순히 청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왜 그러는데. 윤이 별다른 소득 없이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잠시 두 눈을 꼭 감았다. 윤이 지금 참고 있는 것이 눈물인지 화인지 단은 잠시 헷갈렸다.
“한 병 덜 간 주문자를 확인하는데 이름이 낯이 익더라. 찾아보니까 걔였어. 미디어 디톡스 한다는 내 인친. 너무 미안하다고 다시 보내 주겠다고 연락하려는데 뭐가 좀 이상해. 걔가 여기저기 댓글을 달고 다니고 있더라. 디톡스 끝났나 싶어서 걔 계정을 찾는데 안 보여. 한참을 찾아도 안 보여. 그래서 언니 핸드폰 켜서 찾아봤어. 그랬더니 바로 보여. 내 청이 거기 있어.”
뭐를 만날 끊기 바쁜 그 인친의 인스타그램은 여전히 공개 계정이었고, 미디어 디톡스는 진작 끝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제 다른 것을 끊는 것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미디어를 끊어 보고자 마음먹었던 이유는 아물지 않는 내면의 상처 때문이었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 상처가 모두 해로운 소통에서 비롯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며, 앞으로 독이 되는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녀가 구구절절 나열한 독이 되는 관계 속에는 ‘가짜 장애를 앞세워 동정을 사는 팔이피플’도 포함되어 있었다. 윤의 청인 듯 보이는 알록달록한 유리병 사진과 함께.
“미친년. 그러면서 청은 또 왜 주문해. 내가 독이면 지는. 진짜 씨발년.”
윤이 울었다. 울지 마. 욕을 할 거면 욕만 하라고. 왜 우는 거야? 대신 단이 화를 냈다. 윤을 오만 가지 감정이 섞인 기가 막히게 못생긴 얼굴로 울게 만든 사람이 고작 그 악랄한 끊기 중독자라는 사실에 성질이 났다. 당장이라도 찾아가 윤이 만든 끈적한 청을 머리끝부터 쏟아 부어 주고 싶었다.
“가자. 지금 당장 청 가져다주러 가자. 너 같이 가.”
“언니. 그러지 말고 우리 청에다 진짜 독을 좀 타볼까?”
단은 울다 웃는 윤의 등짝을 시원하게 후려쳤다. 손가락보다는 역시 손바닥이 세구나. 단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얼얼해진 손바닥을 윤의 허벅지에 올렸다. 아, 따뜻하네. 윤이 말했다.
*
단과 윤은 정신의학과 치료에 성실히 임했다. 큰 진전은 없어도 자매의 형세를 꾀병으로 보지 않는 권위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선생님 요즘 좀 잘생겨 보이지 않아? 윤이 하는 말이 전혀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단은 속으로만 조용히 인정했다.
단은 윤의 재활치료에 가서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게 되었다. 분노와 이해와 체념의 단계를 모두 거친 수용의 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고, 그 조금은 잘생겨 보이기 시작한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단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청을 만드는 데 쓰이는 수많은 열매들. 왜 그 무거운 과실들은 매번 시장에 나가서 직접 사오는 것인가. 단처럼 인터넷 주문에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나를 납득시키지 않으면 시장에도 같이 가지 않겠다는 단의 으름장에 윤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냥, 그편이 더 수고스럽잖아.”
단은 효도폰에 내장된 카메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윤의 사진을 찍었다. 벨소리 음질 못지않게 화질 역시 조악했다. 윤은 전혀 윤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결국 윤이었다. 오, 이제 사진도 찍을 수 있어? 윤이 놀라 물었다. 얼마 전 스마트폰을 잠시 켜봤을 때 전처럼 울렁거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단은 윤에게 굳이 밝히지 않았다. 효도폰은 아직까지 단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고, 일단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언니는 언제까지 그럴 것 같아? 생각보다 너무 오래가는 것 같은데. 윤의 물음에 단도 어물쩍 대답했다.
“그냥, 아직은 아닌 것 같아.”
윤이 사는 곳은 주차난이 심한 동네였지만 언제나 장애인 주차 자리 하나는 남아 있다. 단은 그것이 윤을 위한 이웃들의 배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의식 있는 시민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윤의 경계 없는 오지랖과 친근함의 표출로 얻어낸 성과라는 것도.
지금까지 단은 되도록 그 자리에 주차하는 것을 피해 왔다. 효율 떨어지는 오기일지언정 그렇게 했다. 꼭 윤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마는 것 같아서 꾸역꾸역 다른 곳을 찾아 차를 대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단의 주차 실력은 날로 늘어 갔다.
하지만 윤과 함께 전통 시장에서 매실을 몇 박스씩 사온 그날, 단은 고민 없이 그 널찍하고 쾌적한 주차 자리를 이용한다. 커다란 휠체어 모양의 표시선 위로 작은 자동차를 굴려 무사히 안착시킨다. 차에는 장애의 경계에 있는 두 사람이 타고 있다. 하나로 합치면 완전한 장애가 못 될 것도 없다 싶어서, 단은 가볍게 기어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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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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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6건
옆에 있는 사람을 한번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이야기였어요. 앞으로도 많은 이야기들 부탁드려요^^
현재의 주변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되네요. 잘 읽고갑니다.앞으로도 좋은글들 많이 올려주세요!!!!!
참신한 소재에 이야기가 재미있게 술술 읽히지만 더 깊은 내면에는 또 다른 이야기와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아 한 번 더 생각하며 보게 되는 것 같네요.
필력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윤과 단에 감정이입을 하여 읽게 되네요. 울림이 있는 내용이였습니다.
t사실 우리 모두가 장애의 경계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소설의 결말처럼, 윤이와 단이가 그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멋진 작품 감사합니다:)